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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복에서 견장만 뗀 것이었다. 운운' '신발은 지카다비(작업화)가 제일 많았다. 운운' '……느껴지는 것은 그들의 생활이 물질적인 향상을 가져오려면 더 많은 땀과 시간이 필요하다는…… 운운' 하는 대목이 있는 것입니다. 이는 실로 중대한 과오 입입니다. 다음에 이명준 동무의 자아비판이 있겠습니다.]
명준은 일어서서 편집장이 비워 준 단 위에 올라섰다. 여덟 개의 눈이 그를 차갑게 지켜보고 있었다.
[편집장동무의 보고에 대하여 저는 동의할 수 없습니다.]
자리가 술렁거렸다. 편집장이 물었다.
[왜 동의할 수 없습니까?]
[저는 본 대로 옮긴 것뿐입니다.]
[그들 가운데 일제 군복을 고쳐서 입은 동무가 있었단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일제가 달아날 때 병영에서 주운 것이라고 했습니다.]
[지카다비는 인민공화국에서도 비슷한 제품을 만들고 있습니다. 혹시 잘못 본 게 아닙니까?]
[아닙니다. 앞이 두 쪽으로 갈라진 왜놈들의 것이었습니다.]
[그러면 좋습니다. 그렇다면 설사 그것이 사실이라고 하더라도, 그 사실을 보도한 것이 잘못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리얼리즘은 사실을 사실대로 옮기는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것이 동무의 위험한 반동적 사상입니다. 사회주의 리얼리즘은, 인민의 적개심과 근로의 의욕을 앙양시키고 고무시키는 방향으로 취사선택이 가해져야 합니다. 무책임한 사실의 나열을 일삼는 자본주의 신문의 생리와 다른 것입니다.]
[그러나 이 경우에 왜 그것이 버려져야 할 것인지 알 수 없습니다.]
[인민을 모욕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일제의 군복을 과도기에 입고 있다는 사실을 옮기면, 왜 인민을 모욕하는 것입니까?]
[동무, 작년도에, 위대한 중국 인민은, 인민 경제 계획을 초과 완수했습니다. 의류나 일상생활 필수품은, 전 중국 인민이 입고도 남을 만큼 생산했다는 말입니다. 아마 그들은, 노동을 하는 데 입기 위해서, 일본 제국주의 군대가 버리고 간 물건을 한두 사람이 가지고 있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 한 가지 사실을 가지고, 이미 인민이 쟁취한, 풍족한 물질 생산 수준에 대해서 회의적인 보도를 하는 것은, 동무 자신의 가슴과 머리 깊이 박혀 있는 소부르주아적인 인텔리 근성에 지나지 않습니다. 전체 인민이 새로운 역사를 창조하며, 빛나는 미래를 향하여 전진하고 있는 이 역사적인 마당에, 이명준 동무는 전혀 자신의 주관적 상상에 기인하는 판단으로 트집을 잡으려고 한 것입니다. 금년 봄 중국 공산당 연차 대회에서, 모택동 동무가 보고한 경제 계획 보고 요지가 당원을 위한 교양 자료로서 배포되었으므로, 만일 이명준 동무가 그 팸플릿에 명확히 기재된 프로센토(퍼센트)로 나타난 통계를 연구했다면, 그런 과오는 범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명준은, 대들려고 고개를 들었다가, 숨을 죽였다. 그를 향하고 있는 네 개의 얼굴. 그것은 네 개의 증오였다. 잘잘못간에 한 번 윗사람이 말을 냈으면, 무릎 꿇고 머리 숙이기를 윽박지르고 있는 사람들의, 짜증 끝에 성낸, 미움에 일그러진 사디스트의 얼굴이었다. 명준은 문득 제가 가져야 할 몸가짐을 알았다. 빌자, 덮어놓고 잘못을 저질렀다고 하자. 그의 생각은 옳았다. 모임은 거기서 10분 만에 끝났다. 명준은 사무친 낯빛을 하고, 장황한 인용을 해가며, 허물을 씻고 당과 정부가 바라는 일꾼이 될 것을 다짐했다. 지친 안도감과 승리의 빛으로 바뀌어 가는 네 사람 선배 당원의 낯빛이 나타내는 움직임을 지켜보면서 명준은, 어떤 그럴 수 없이 값진 '요령'을 깨달은 것을 알았다. 슬픈 깨달음이었다. 알고 싶지 않았던 슬기였다. 그는 가슴에서 울리는 무너지는 소리를 들었다. 그 옛날 그는 S서 뒷동산에서 퉁퉁 부어오른 입 언저리를 혓바닥으로 핥으면서 이 소리를 들었다. 그의 마음의 방문이 부서지는 소리였다. 이번 것은 더 큰 울림이었다. 그러나 먼 소리였다. 무디게 울리는 소리. 광장에서 동상이 넘어지는 소리 같았다. 할 수만 있다면 그 자리에 엎드려서 울고 싶었으나, 울기 위해서는 그는 네 개의 벽이 아직도 성한 그의 방으로 가야 했다. 아니 그의 마음의 방이 아니다. 마음의 방은 벌써 무너진 지 오랬으므로. 그의 둥글게 안으로 굽힌 두 팔 넓이의 광장으로 달려가야 했다. 혼자서 운다는 일은 강한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의젓한 몸가짐이었다. 눈에 보이건 안 보이건 사람은 우상 앞에서만 운다. 멍석 없이는 못 하는 지랄도 있던 것이다. 이제 명준에게 남은 우상은, 부드러운 가슴과 젖은 입술을 가진 인간의 마지막 우상이었다. 오늘 일로 하여 그는 절박한 것을 느끼고 있었다.
이제부터는 전혀 다른 짐작으로 살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 짐작에서 차지할 그녀의 자리는 높은 곳 한가운데 있었다. 집이 가까운 골목에 이르렀을 때는, 이명준은 거의 뛰다시피 걷고 있었다.
문을 열자 그녀의 얼굴이 후딱 들렸다.
[갈까 하던 참이었어요. 인제 열 셀 동안 오시잖으면 가려고.]
명준은, 바바리 주머니에 양손을 집어넣은 채, 우두커니 서서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녀는 손에 책을 들고 있었다. 심심한 걸 메우느라고 명준의 책상에 얹힌 걸 뒤적이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로자 룩셈부르크 전』. 명준은 그녀의 손에서 책을 받았다. 등을 잡고 타르르 책갈피를 넘겼다.
헌책가게에 있는 것을 보고 사오는 날로 끝까지 잃어버린 책이다.
[재미있어?]
[그닥……]
[앉지.]
그제야 명준은 바바리코트를 벗어서 벽에 걸고, 자기가 먼저 털썩 주저앉았다. 그녀는, 명준의 낌새가 심상치 않은 것을 눈치 챘는지, 아무 소리도 없이 따라 앉았다. 그는 눈을 감았다. 가슴이 비었다. 뱃속도 비었다. 시장기가 심할 때, 가슴과 배가 쓰리고 허할 때 같았다. 그러면서 먹을 마음은 조금도 없었다.
당장에는 단 한 술을 뜰 것 같지 않았다. 그러면서, 가슴에서 배 쪽으로 뻗치는 빈 기운이 있었다. 몸속에 있던 내장들이 깡그리 비어 버리고, 그처럼 휑뎅그런 몸뚱어리 속을 바람이 불고 지난다. 감았던 눈을 번쩍 떴을 때, 수그린 이마 바로 앞에, 그녀의 비슴듬히 옆으로 뻗친 두 다리가 있었다. 아직도 해가 있어서 불을 켜지 않은 방안에는, 땅거미 질 무렵의 은근한 붉은 기운이 알릴락말락 녹아 있었다. 양말을 신지 않은, 맵시 있게 살이 붙은 두 다리는, 문득 생생했다. 명준은 가슴이 꽉 막혔다. 보고 있으면 볼수록, 그 기름한 살빛 물체는 나서 처음 보는 듯이 새로웠다. 곤색 스커트 무르팍에서부터 내민 다리는, 뚝 꿇어져서 조용히 놓인 토르소였다. 사랑하리라. 사랑하리라. 명준은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렸다. 깊은 데서 우러나오는 이 잔잔한 느낌만은 아무도 빼앗을 수 없다. 이 다리를 위해서라면, 유럽과 아시아에 걸쳐 모든 소비에트를 팔기라도 하리라. 팔수만 있다면. 세상에 태어나서 지금 이 자리에서 처음으로 진리의 벽을 더듬은 듯이 느꼈다. 그는 손을 뻗쳐 다리를 만져 보았다. 이것이야말로 확실한 진리다. 이 매끄러운 닿음세. 따듯함. 사랑스러운 튕김. 이것을 아니랄 수 있나. 모든 광장이 빈터로 돌아가도 이 벽만은 남는다. 이 벽에 기대어 사람은, 새로운 해가 솟는 아침까지 풋잠을 잘 수 있다. 이 살아 있는 두 개의 기둥.
몸의 길은 몸이 안다. 그녀는 예사로운 애무로 아는 모양인지 하는 대로 보고만 있다.
[은혜.]
[네.]
고즈넉이 네 하는 이 짐승이 사랑스러웠다. 나는, 밖에서 졌기 때문에, 은혜에게 이처럼 매달리는 걸까. 이긴 시간에도 남자가 이토록 사무치는 마음을 가질 수 있을까. 아마 없을 테지. 졌을 때만 돌아와서 기대는 곳. 기대서 우는 곳. 철학을 믿었을 때, 그녀들에게 등한했었다. 사회 개조의 역사 속에 새로운 삶의 보람을 걸어 보려던 월북 직후의 나날, 윤애도 떠오르지 않았다. 지금 나한테 무엇이 남았나? 나에게 남은 진리는 은혜의 몸뚱어리뿐. 길은 가까운 데 있다?
명준은 거칠게 그녀를 꺼 안았다. 그의 품속에서 그녀는 눈을 감았다. 늘 그랬다. 이 여자가, 인민을 위한 '예술 일꾼'이며, 인류의 역사를 뜯어고치는 거창한 대열에 발맞춰 나가는 '여성 투사'라? 좋다. 그러면서도 그녀는 은혜다. 내 거다. 그 밖에 그녀가 되고 싶어 하는 여러 것일 수 있다. 그는 그녀의 뼘에 자기의 그것을 비볐다. 도톰한 입술을 깨물어 열고 부드러운 혀를 씹었다. 어느새 해가 지고 방 안은 어두웠다. 그는 한 팔로 그녀를 받쳐 안고, 다른 손으로 그녀의 턱을 만져 본다. 목을 더듬었다. 가슴과 허리를 짚어 내러갔다. 벅찬 깨달음을 준 다리를 쓸었다. 몸의 마디마디 그 자리를 틀림없이 알고 싶었다. 움직일 수 없이 자기에게 기대는 따뜻한 벽을 손으로 어루만져, 벽돌 하나하나를 다짐해 보고 싶었다. 손이 떨어지면 그것들은 자기한테서 떠날 것만 같았다. 순례자가 일생에 몇 번이고 성지를 찾아 의심을 죽이고 믿음을 다짐하듯이, 손에 닿고 만져지는 참에만 진리는 미더웠다. 남자가 정말 믿을 수 있는 진리는, 한 여자의 몸뚱어리가 차지하는 부피쯤에 있는 것인가. 모든 우상은 보이지 않는 걸 믿지 못하는 사람의 약함 때문에 태어난 것. 보이지 않는 것은 나도 믿지 못해.
[은혜, 나를 믿어?]
[믿어요.]
[내가 반동분자라두?]
[할 수 없어요.]
[당과 인민을 파는 공화국의 적이라두?]
[그럼 어떡해요?]
[은혜의 그런 용기는 어디서 나와?]
[모르겠어요.]
사랑의 말에서는, 남자가 얼간이고 여자가 재치 있게 마련이었다. 남자가 고지식하고 여자가 교활하다는 말일까. 남자는 따지고 여자는 믿는다는 까닭에서일까. 명준은 윤애를 자기 가슴에 안고 있으면서도, 문득문득 남을 느껐었었다. 은혜는 윤애가 보여 주던 순결 콤플렉스는 없었다. 순순히 저를 비우고 명준을 끌어들여 고스란히 탈 줄 알았다. 그런 시간이 끝나면 그녀는 명준의 머리카락을 애무했다. 가슴과 머리카락을 더듬어 오는 손길에서 그는 어머니를 보았다. 어머니와 아들, 아득한 옛적부터의 사람끼리의 몸짓. 그녀는 생각난 듯이 말했다.
[참, 저, 모스크바로 가게 될는지 모르겠어요.]
[모스크바?]
명준은 어리벙벙했다.
[네, 지금 당장이 아니구 명년 봄쯤.]
[좀 자세히 얘기해.]
[모스크바에서 예술제가 있어요. 소비에트의 각 공화국과 동구라파와 중화인민공화국, 그리구 우리. 모두 나오는 거예요. 무용 쪽에서는 최승희 연구소에서 많이 나갈 거라는 얘길 들었지만, 나라를 통틀어 대표하게끔 파견단을 만들 테니깐, 국립극장 쪽에서도 얼마쯤 나갈건 확실해요. 게다가 안나 동무는 소련 출신 아니에요.? 길잡이 삼아 꼭 낄 테구, 그리 되면 우리두 한몫 낄 수밖에 없잖아요? 안나 동무는 그 일로, 오늘도 소련 대사관으로 갔는데, 제가 나올 때까지도 돌아오지 않았어요.]
명준은 번듯이 드러누웠다. 모스크바. 은혜가 모스크바로 가? 안 된다. 그녀가 모스크바로 가면 다시는 그의 품으로 돌아올 수 없을 것 같았다. 아무 까닭도 없이, 그런 느낌이 불쑥 떠올랐다.
[얼마나 걸릴까?]
[뭐가요? 떠나기까지가?]
[아니, 거기서 머무는 사이가 말야.]
[한 서너 너덧 달?]
명준은 벌떡 일어났다.
[아니, 뭐가 그리 오래 걸려?]
[예술제가 그렇게 걸리는 게 아니구요, 끝난 다음에, 인민민주주의 국가를 한 바퀴 돌 모양이던데요. 앞서도 그랬어요. 아무튼 잘은 아무도 모르고 그럴 거라는 제 짐작이에요.]
[예술제는 확실하지.]
[확실해요. 문화선전성에 통첩이 왔다니까요.]
명준은 또 잠잠했다. 은혜는 조금 들뜬 말투로 이었다.
[기쁘지 않아요?]
[아니.]
[어느 쪽이에요? 아니라면 알 수 있어요?]
[기쁘지 않다는 쪽이야.]
[어머나!]
그녀는 놀라서 명준을 쳐다보았다.
[은혜, 가지 말아 줄 수 없어?]
대답이 없었다. 그의 얼굴에서 까닭을 찾아낼 모양인지, 깜박거리지도 않고 이쪽의 눈을 빤히 쳐다봤다.
한참 만에 그녀는 입을 열었다.
[왜요?]
[석 달이나 은혜를 떨어져 살 수 없어.]
그녀는 활짝 웃었다.
[어린애 같으셔.]
[난 어린애야. 당원도 아니고 인민의 일꾼도 아니야. 은혜에게 어린애 노릇 하는 바보, 그게 나야.]
[왜 자꾸 당과 인민을 끌어 대세요? 당이 사랑하지 말라는 가요?]
[그건 게 아니구, 당보다두 나한텐 은혜가 중하다는 거야.]
[어머나, 그건 정말 부르주아적인 사상이신데]
[그럼 은혜는, 내가 당을 위해서는 은혜를 버리는 그런 사람이 되길 바라나?]
[굳이 한쪽을 버릴 건 없잖아요?]
[버린다면?]
[생각해 본 적 없어요.]
[지금 생각해.]
[네?]
그녀는 아직도, 명준의 말에서 얼마만큼 한 정말과 사랑의 농담을 갈라내야 할지, 모르는 모양이었다.
[다시 한 번 말하겠어. 은혜, 모스크바엔 가지 말어.]
[글쎄 왜 그러세요? 덮어놓고 가지 말라면… 그리고 제 맘대로, 가구 안 가구 할 수도 없어요.]
[맘만 그렇게 잡으면 야, 무슨 핑계로든 안 갈 수 있지 않아?]
그녀는 내놓고 언짢아 보인다.
[난 내 맘을 어떻게 옮겼으면 좋을지 모르겠어. 허지만, 은혜가 모스크바로 가면, 우린 다시는 만날 수 없을 것같이만 생각돼. 억지 얘긴 줄 알아. 한 번만 억지를 받아 줘.]
[은혜가 가서는 안 된다는 다른 까닭이 있는 게 아냐. 석 달이나 넉 달 갈라져 있는 게 그리 대단한 것도 아닐 테지. 허지만, 지금 내 심정으로선, 단 한 달도 갈라져 살 수 없어. 또, 아까 얘기한 대루, 이번에 은혜가 가면, 다시는 내 품에 올 수 없을 것 같은 예감이 있어. 제발.]
명준은 오랜 옛날 이런 식으로 빌붙던 걸 생각했다. 그렇지. 인천 변두리, 갈매기가 날고 있는 바다로 트인 분지에서, 윤애의 알 수 없는 변덕을 버려 달라고 빌던 자기 말투. 알몸으로 자기를 믿어 달라고 빌던 말투였다. 윤애는 끝내 그녀의 벽을 허물지 않았다. 못 한 것인지도 모른다. 어쨌든, 명준이 월북을 해낸 데는, 그녀가 안겨 준 노여움과 서운함이 그 대목에서 미치고 있었던 것만은 가리울 수 없다.
여자들이란, 곧잘 미신을 섬기면서, 정작 미신일 수밖에 없는 일 앞에서는, 오히려 망설이는 것은 어찌 된 노릇일까. 은혜를 모스크바로 보내면 자기는 그만 이라 싶었다. 이렇게 되고 보면 더욱 그랬다. 입 밖에 내지 않았으면 아무렇지 않았을 일도, 한 번 말이 되어 나와 버리면 허물어 버릴 수 없는 담을 쌓고 만다. 지금이 그랬다.
[은혜, 아무 말도 묻지 말고 내 말 대루 해줘. 사랑을 위해서, 중요한 일을 농담 삼아 깔아 버리는 그런 식으로 핑계를 대도 좋아. 나를 사랑한다는 걸 보여 줘.
[네, 가지 않을 테에요.]
흑 하면서 그녀는 두 손으로 낯을 가렸다.
손가락 사이로 눈물이 흘러내렸다. 보고 있자니, 마냥 흘러내린다. 명준은, 그녀 앞으로 다가가 앉아서, 낯을 가린 손목을 치웠다. 손목을 잡힌 채 그녀는 울음을 그치지 않았다.
흑, 하고 느끼는 그녀를 가슴으로 끌어당겼다. 되지도 않는 헛소리를 받아 줄 사람이, 그녀 말고는 누가 있을까 싶은 생각이, 그를 목메게 했다.
그녀가 돌아간 후, 무릎을 세우고 앉아 오랫동안 우두커니 창밖을 내다보았다. 마른 나뭇잎이 창유리에 부딪히는 소리가 들린다. 메마른 삶. 이제, 오래지 않아, 그 소리도 들리지 않을 테지. 혼자 사는 살림에는 겨우살이래야 걱정할 것은 없었다. 다만, 길어지는 밤을 생각으로 새워야 할 일이 괴로웠다. 월북하고부터 그의 시간은 달음박질 하듯 지나 온 느낌이었다. 서울 살 때는 그리도 느리던 시간의 걸음이. 아니 그때는 시간이 없었다. 있지 않았다. 적어도 나한테는. 생활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시간이 없다. 적어도 그는 지금 밥과 옷을 제 손으로 번다. 그런데 밥과 옷을 제 손으로 번다는 게 생활이란 말의 뜻일까? 갖은 화려한 공상과 괴로운 생활의 골짜기를 거쳐 이른다는 데가 밥과 옷인가. 그런 모양이다. 그러나 그걸 어떻게 버느냐를 가지고 다투어 오는 게 아닌가? 편집장 말이 생각난다. '동무는 오해하고 있는 듯해. 공화국을 동무가 도맡아 보살펴야 한다는 그런 생각, 그건 잘못입니다. 동무는 맡은 바 자리에서 당이 요구하는 과업을 치르면 그만입니다. 영웅주의적인 감정을 당은 바라지 않습니다. 강철과 같이 철저한 실천자가 아쉬운 겁니다.' 자본주의 사회의 저 뒤얽힌 산업 질서의 개미굴 속에서, 나날이 사람스런 부드러움을 잃어 가는 사람들과 꼭 같이 되라는 소리였다.
여기도 기를 꽂을 빈터는 없었다. 위대한 것들은 깡그리 일찍이 말해진 후였다. 자기 머리로 생각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인가 보다. 어김없이 움직이기만 하라는 것이었다. 왜 이렇게 됐을까. 북조선에는 혁명이 없었던 탓일 것 같았다. 인민 정권에서는 인민의 망치와 낫이 피로 물들여지며 세워진 것이 아니었다. '전 세계 약소민족의 해방자이며 영원한 벗'인 붉은 군대가 가져다준 '선물'이었다. 바스티유의 노여움과 기쁨도 없고, 동궁(冬宮) 습격이 아슬아슬함도 없다. 길로틴에서 흐르던 피를 본 조선 인민은 없으며, 동상과 조각을 망치로 부수며, 대리석 계단으로 몰려 올라가서, 황제의 안방에 불을 지르던 횃불을 들어 본 조선 인민은 없다. 그들은 혁명의 풍문만 들었을 뿐이다. 30년 전에 흥분이 있었다는 풍문을 듣고 흥분할 수 있다면 그는 감정의 천재다. 1789년에 있었던 흥분의 얘기를 듣고 흥분할 수 있다면 그는 천재다. 하물며 남의 나라의. 세계는 하나라? 그건 그 흥분이 있었던 다음부터의 애기다. 북조선 인민에게는 주체적인 혁명 체험이 없었다는 데 비극이 있었다. 공문으로 명령된 혁명, 위에서 아래로, 그건 혁명이 아니다. 그 공문을 보낸 사람이 '전 세계 약소민족의 해방자이며 영원 훤한 벗'이라도 그렇다는 일은, 이 사상에 발을 들여놓은 사람들에게는 좀체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무서운 일이었다. 그것은 그리스도 교인이 성경을 두고, 비록 그것이 신이 보낸 말이라도 '남'이 보낸 말이고 보면 자기를 건질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 죽음보다 두려운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지금껏 지내 온 바를 가지고 생각한다면, 하느님은 어쨌건, '전 세계 약소민족의 해방자이며, 영원한 벗'도 '남'이라고 볼 수밖에 없었다. 목숨을 대신 살 수 없는 것처럼, 혁명도 공문으로 대신할 수는 없었다. 그렇다면? 공문 혁명이 주어진 조건이었다면, 그런 조건에 어울리는 행동의 방식을 찾아내는 것이, 우리한테 맡겨진 혁명일 것이다. 북조선의 공산주의자의 혁명가로서의 품위는 이 일을 어떻게 해내느냐에 달려 있다.
공문 혁명의 테두리에 눌러앉은 벼슬아치가 돼서, 제 머리로 생각해 보고 싶어 하는 사람들에게 눈을 부라리고, 진리에 대한 해석의 권리를 혼자 차지하려는 사람들만 설치는 고장. 이런 사회에서 혁명의 흥분을 꾸미는 자는 위선자다. 혹은 쟁이다. 혁명 쟁이다. 혁명을 팔고 월급을 타는 사람들. 아버지도 그런 쟁이가 돼 있었다. 아버지는 일자리를 얻기 위하여 월북한 것일까. 하하하, 정말 혁명을 느낀 건 로베스피에르와 당통과 마라와 레닌과 스탈린뿐이다. 인류는 슬프다. 역사가 뒤집어씌우는 핸디캡. 굵직한 사람들은 인민을 들러리로 잠깐 세워 주고는 달콤하고 씩씩한 주역을 차지한 계면쩍음을 감추려 한다. 대중은 오래 흥분하지 못한다. 그의 감격은 그때뿐이다. 평생 가는 감정의 지속은 한 사람 몫의 심장에서만 이루어진다. 광장에는 플래카드와 구호가 있을 뿐, 피 묻은 셔츠와 울부짖는 외침은 없다. 그건 혁명의 광장이 아니었다. 따분한 매스 게임에 파묻힌 운동장. 이런 조건에서 만들어 내야 할 행동의 방식이란 어떤 것인가. 괴로운 일은 아무한테도 이런 말을 할 수 없다는 사정이었다. 혼자 앓아야 했다. 꾸준히 공부를 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남'에게 탓을 돌릴 수 없는 진짜 절망이 찾아왔다. 신문사와 중앙도서실의 책을 가지고 마르크시즘의 밀림 속을 헤매면서 이명준은 처음 지적 절망을 느꼈다. 참으로 그것은 밀림이었다. 그럴듯한 오솔길을 발견했다 싶어 따라가면 어느새 그야말로 '일찍이' 다져진 밀림 속의 광장에 이르는가 하면, 지금 자기가 가진 연장과 차림을 가지고는, 타고 내리기가 어림없는 낭떠러지가 나서는 것이었다. '전 세계 약소민족의 해방자이며 영원한 벗'들도, 이 밀림의 어디선가에서 길을 잘못 든 것이 틀림없었다. 그렇다면 이 밀림에는 다져진 길도, 따라서 지도도 없으며, 다 제 손으로 할 수밖에 없다는 말이 된다. 목숨에 대한 사랑과, 오랜 시간이 있어야 할 모양이었다.
6부에 계속
광장 최인훈 6 1960
5부에 이어
명준은 은혜마저 없는 평양을 견딜 것 같지 않았다. 은혜는, 많은 여자가 그런 것처럼, 꼭 어느 사회가 아니면 못 산다는 여자가 아니었다. 로자 록셈부르크가 될 수 없는 여자였다. 이 독일 여자처럼, 몸과 마음의 괴로움을 경제학으로 풀이할 만한 배움도 없었고, 나름도 그렇지 않았다. 그녀가 사상을 아랑곳 않는 데에 명준은 가다가 놀랄 때가 많았다. 명준에게는 그것이 좋았다. 무지한 여자한테서 쉴 데를 얻자는 저 좋을 마련만은 아니었다. 될 수만 있으면 그녀와 바꾸고 싶었다. 자기 영혼과 아무 탯줄이 닿지 않는, 시대의 꿈에서 떨어져 있을 수 있는 그녀에게서 명준은 은총을 보았다. 신은 그가 사랑하는 자에게 생각의 버릇을 주지 않는 듯싶었다. 그녀에 대한 이런 생각에는 나중에 따져 보면 거짓이 섞였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어떤 사람이 어떤 때 스스로 참이라고 느끼는 일을, 거짓이라고 잘라 말할 수 있는 사람은 누굴까. 은혜가 모스크바로 가겠다고 우겼다면 명준은 어떻게 됐을까. 그 생각은 그를 떨게 했다. 그녀가 울면서 그의 청을 받아들였을 때, 명준은 분에 넘쳐 기뻤다. 그녀가 사랑스러웠다. 자리를 바꾸면 자기를 웬걸 그럴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볼쇼이 테아트르에서 호화스런 공연에 끼이고, 구라파를 돌아다니는 것은 화려한 기쁨일 것이었다. 더구나 예술가라면. 그녀는 가끔 이데올로기로 갈라진 세계 지도를 잊어버린 사람처럼 망발 말하는 때가 잦았다.
'파리에서 그림 공부를 했으면 도움이 되겠는데.'
발레라면 파리라야 할 까닭이 없었다. 제정 때 세워진 발레 학교가 그대로 자라 왔고, 가장 아껴 주는 예술 가닥의 하나라는 것은, 명준도 들어서 알고 있었다. 이런 참에 따라가면 어떤 좋은 일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런데도 명준의 억지를 받아 준 그녀를 생각하면, 사랑을 위해서 증거를 보이겠다는 마음이 고마웠다.
이부자리를 내려서 깔고 그 속으로 기어들었다. 은혜가 놓고 간대로 『로자 룩셈부르크 전』이 책상 밑에 떨어져 있다. 책을 손에 들고 뒤적이다가 코끝에 가져갔다.
생각 탓인지 그녀 몸 냄새가 나는 듯했다. 책을 떼고, 그녀의 냄새를 따로 떠올려 본 다음, 다시 책을 코끝에 댔다. 없었다. 처음 방에 들어와 앉았을 때 보았던 그녀의 다리 생각이 났다. 그렇지. 그녀의 다리가 내게 준 놀라움을 은혜는 모를 거다. 언젠가, 그녀에게 지지 않을 만큼 갚으면 되지 않나. 갚겠다. 갚을 수 있다. 불을 껐다. 바람이 많이 부는 듯 나뭇가지를 흔들며 지나가는 소리가, 큰물 진 여울처럼 도도했다.
방 안의 훈훈한 기운으로 유리에 닿은 물기가 빗물처럼 무늬져 흐르는 창가에 서서 명준은 멀리 바다를 내다보았다. 명사십리가 한 줄 굵은 띠마냥 수평선 위에 떠 있다. 이곳 원산 해수욕장에 자리 잡은 노동자 휴양소에 한 주일째 묵고 있다. 취재하러 온 게 아니고, 진짜 휴양이다. 전국의 일터에서 모범 일꾼들만 오는 곳에, 어쩌다 명준을 보내 준 건지, 처음엔 짐작이 가지 않았으나, 부친이 마련한 줄을 나중에야 알았다. 부친의 그런 방식에 명준은 더 맞서지는 않았다. 전번 자아비판회 때 알아차린 요령을 저도 모르는 새에 생활에 옮기고 있는 요즈음의 그였다. 오랜 세월 소리 없이 일해야 할 앞날이었다. 그러자면, 작은 일을 가지고 속물들과 부딪쳐서는 안 된다. 바다를 건너려는 사람이 웅덩이에 빠져 죽어서는 안 된다.
이 휴양소 건물은, 원래 개인 소유의 별장이었던 걸 나라 차지로 만들어 버린 것이었다. 여름이 제철이지만, 겨울은 또 겨울대로, 솔밭 사이에 드문드문 자리 잡은 아담한 별장 속 한 칸을 차지하고, 바다 소리를 들으며 잠이 들고, 바다 소리에 잠이 깨는 나날도 나쁠 건 없었다. 이런 데까지도, 독보 회니 교양사업이니 하는 것이 있었으나, 딴 여느 일터의 그것에 대면 훨씬 누그러진 것임에는 틀림없었다. 월북한 다음, 사회에서 쓰는 낯선 말에 익숙해지기까지, 한동안 괴로운 말의 헛갈림을 겪었지만, 이 교양사업이라는 것도 그 한 가지였다. 그때까지 명준의 말버릇에서는, 교양이란 낱말은, 퍽 개인적인 겪음에 치우친 낱말로 돼 있었다. 그 교양이란 말에 붙인 사업이란 낱말은, 글라디올러스 화분에 붙잡아맨 전기 모터처럼, 영 어색하게만 보였다. 그러나 같은 말을 여러 사람이 되풀이할 때, 거기 새 짜임새가 나오는 것이었다. 동무라는 부르기만 해도 그랬다. 누구에게나 들어맞을 부름말이 없었던 탓도 있었으리라. 변증법을 빌린다면, 양적인 발전이 질적인 변화를 일으키는 현상이라고나 할까. 아무튼 이 휴양소에도 그 교양사업이라는 게 여전히 있었으나, 심한 것은 아니었다. 하긴, 모처럼 마음과 몸을 쉬려는 곳에까지, 곧이곧대로 정치 교육을 한다는 건 어리석은 일이다. 그런 탓으로 이 휴양소에 사는 사람들은, 한동안이나마 마음의 시집살이에서 벗어나는 셈이다. 스팀 난방이 된 방 안에서 잠자리에 들 적마다, 명준은 가끔 헛갈린다. 나는 부르주아의 외아들인가? 중앙 정부의 높은 벼슬아치를 아버지로 가진 젊은 탕치객? 왜 그렇게 생각하는가. 윗사람은 허술하게 입고 먹어야 한다는 건, 한 번도 지켜진 적이 없는, 동양의 거짓말이다. 꺼림하다면, 이만한 호강이 아직도 당 지도층이라든가, '모범 일꾼'들쯤이나 누릴 수 있는, 본보기에 머물러 있는 일일 게다. 그만두자. 이러니 나란 놈이 살찌긴 다 틀렸지. 아, 왜 자리가 높은 아버지가 전화를 걸어서, 그 아들이 며칠 호강을 하기로서니, 인민공화국이 결딴날까. 이명준. 시시한 소리 말아라. 역사는 흔히 개가죽을 쓰고 호랑이 춤을 추지 않더냐. 때가 되면 개가죽은 헌 개가죽처럼 동댕이쳐질 텐데 왜 어릿궂게 앙앙거리느냐. 국으로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어라. 큰 새의 뜻을 누가 알리요. 바둥대 봤자, 아버지랑 그 또래가 이 사회를 한동안은 움직이게 돼 있지 않으냐. 죽은 사람들로 하여금 죽은 사람들을 묻게 하라.
맑은 겨울 날씨였다. 비쳐 보이는 하늘의 푸름에 대면, 바다는, 그보다는 짙은, 풀빛으로 그늘져 보였다. 오른편으로 멀리 두 마리 세 마리 갈매기들이 너울거린다. 이런 하늘 밑에서 사람이 즐겁지 말란 법이 있을까. 내 나라의 하늘은 일류 풍류객이야. 결코 찌푸리지 않거든. 울부짖지 않거든. 멋쟁이야.
문이 열리는 소리에 돌아다보았다. 식당에서 일하는 소녀가 간단한 아침 끼니와 신문을 가져왔다. 소녀의 뺨이 쟁반에 담아 온 사과처럼 빨갰다. 명준은 그 뺨을 손가락으로 꼭 찌르면서 시시덕거렸다.
[김 동무, 오늘 아침엔 정말 이쁜데.]
[거짓말.]
열네 살짜리 소녀는 애교도 없이 짧게 대답하고는 문간에서 혀를 낼름해 보인 후, 문을 닫았다. 콩콩콩 발자국 소리가 멀어져 간다. 명준은 흥겨워졌다. 한 손으로 사과를 집으며 신문을 펼쳐 들었을 때 그는 소리를 질러 버렸다. 다시 기사를 들여다보았다. 지방 소식에,
'무용 예술 일꾼들 이곳에……'
크게 나 있다.
그 글자 뒤에서 은혜의 환히 웃는 얼굴이 기웃거리는 것 같았다. 그녀의 일행은 전국을 돌며 공연하고 있었다. 일행에는 모스크바로 가게 된 맴버들이 많았으나, 은혜는 프로그램을 메우기 위해 같이 간다고 하면서 평양을 떠난 지가 열흘 전이었다. 지금쯤은 함경도 쪽을 돌고 있으려니 짐작하고 있던 그녀를 여기서 만날 생각을 하니, 몸이 떨리도록 기뻤다. 공연은 한시부터였다. 그러고 보니 오늘은 일요일이었다. 트렁크 속에서 면도칼을 찾아 들고 세면소로 달려갔다.
공연이 끝나자마자, 그녀는 뒷문으로 빠져나왔다.
[아니, 이렇게 대뜸 나와도 되나?]
[안 되긴. 그보다도 어떻게 된 거예요?]
[음, 원산까지 왔다 기에 불현 듯 보고 싶어서 왔지.]
그녀는 노려보았다. 명준은 그냥 웃었다.
[쪽지를 받았을 때, 마침 제 차례여서, 대충 읽어 보고 신발 속에 끼우고 무대로 나갔지 뭐예요. 아무리 관람석을 훑어봐도 없지 않아요? 그래 끝나고 들어와서 신발 속을 찾으니 원, 간데온데없단 말이에요. 그래 혹시 무슨 잘못이나 아닌가 했지요.]
극장 뒷문으로 발레리나를 모시고 나오는 제가, 쑥스러웠다. 그녀는 자본가들의 노리개가 아니란 말이다. 떳떳한 예술가는 애인도 가져서는 안 되는가.
난 패트런이 아니다. 그녀의 패트런은 인민이다. 이건 부르주아 사회의 무대 뒷풍경이 아니야. 그런 구질구질한 꼴은, 이 사회에서는 싹틀 수 없어. 그런 것은 좋다. 그렇게 생각하니, 홀가분했다. 국영 식당에서 끼니를 마치고, 송도원까지, 그들은 걸어왔다.
물 놀이터로 넘어서는 고갯마루에 올라섰을 때는, 겨울 해가 벌써 다 기울었다. 솔바람이 파도 소리보다도 요란했다. 송도원이란 이름은, 소나무와 파도란 말이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하면서 명준은 옆에 걸어오는 은혜에게 말해 봤다.
[글쎄요.]
그녀는 건성으로 치워 버렸다. 그녀는 시무룩해 보였다. 방 안에 들어서면서 명준은 그녀의 낯빛부터 살폈는데 그렇지도 않았다.
전등불 밑에서 보는 그녀는 훨씬 밝아 보였다. 그녀는 먼저 머릿수건을 풀고 장갑을 벗고, 다음에 외투를 벗어 벽에 걸었다. 명준은 가만히 서서 바라보았다. 그는 흐뭇했다. 많은 사람들이 모인 놀이마당에 서 있던 여자를, 자기 잠자리에 데리고 들어온 남자가 느끼는 으쓱함이었다. 명준은, 그런 시시한 느낌에 맞설 수 있는, 무언가 세찬 말을 하고 싶은 북받침에 사로잡혔다.
그녀는 창에 마주서서 어두운 바깥을 내다보고 있었다. 여자가 남자를 부르는 몸매였다. 그녀의 뒤로 다가섰다. 그녀는 바깥을 내다본 채 움직이지 않았다. 창유리에는 축축이 물이 흐르고 있다. 뒤에서 본 목덜미가 유난히 하얗다. 명준은 여자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그 다음에 그들이 만난 것은, 3월 중순, 국립극장 무대 뒤에서였다. 순회공연에서 돌아온 은혜는 고단해 보였다. 그는 은혜를 한편 구석으로 데리고 가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 예술단이 모스크바로 가는 게 어느 달이었지?]
그녀의 낯빛이 금세 어두워졌다.
[왜 또 그런 말을 하세요?]
[미안해. 요사이 내가 좀 이상해. 은혜가 이러구 있다가 그때 가서 훌쩍 떠나 버릴 것만 같단 말야.]
[어머나!]
그녀는 두 손바닥으로 낯을 가려 버렸다.
[잘못했어. 저것 봐. 사람들이 이쪽을 본대두.]
그녀는 그래도 손을 떼지 않았다.
[잘못했어. 날 봐. 날 보라니깐.]
그제야 그녀는 손을 뗐다. 그녀는 빤히 명준을 쳐다보았다.
[절 못 믿으시는군요. 그럼 그렇게 할까요?]
[맘대루 해.]
그는 휙 돌아서 나왔다. 은혜는 따라오면서 속삭였다.
[이따 저녁에 가겠어요.]
그날 밤 그녀는 오지 않았다.
이튿날 저녁 신문에서 명준은, 은혜 일행이 그날 아침 모스크바로 떠난 줄을 알았다.
1950년 8월.
공산군이 들어온 서울. 원래 S서 자리 지하실에서, 이명준은 책상 하나를 사이에 두고 영미 오빠 태식과 마주앉아 있다. 방에서는 냄새가 코를 찌르고 불빛도 어두웠다. 서 건물은 내무성 직속 수사기관인 정치보위부에서 쓰고 있었다. 잡혀 있던 태식이 정말 끌려왔을 때, 기쁨과 비슷한 것이 솟아나는 것을 깨닫고 소름이 끼쳤다. 우연이었다. 만나리라고는 생각도 하지 않았었다. 영미네 가족은 모두 남하하고 집은 텅 비어 있었다.
태식이 시내에서 잡혔을 때, 그는 소형 사진기를 가지고 있었고, 필름을 빼내 돋워 보니 서울 둘레에 흩어진 공산군 시설이 찍혀 있었다 한다. 태식이가 그런 일을 하다가 잡혔다는 일이 믿어지지 않는다. 더 뜻밖의 일은 윤애가 태식이와 결혼했다는 일이었다. 그녀는 남편을 만나러 왔었다. 이층 창문에서 내려다보고 있던 명준이 아니었다면 그녀는 그대로 돌아갔을 것이다. 면회는 허락돼 있지 않았다. 그녀는 명준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태식을 놓아 달라고도 하지 않았다. 묻는 말에 짧게 마지못한 대구를 할 뿐. 마치 무서운 사람을 대하듯 황황히 돌아갔다. 오늘 오후에도 또 오기로 돼 있다. 면회를 허락한 것이 아니고 명준이 쪽에서 부른 것이었다.
수갑을 차고 고개를 수그린 태식은, 며칠 내리 받은 고문 때문에 코의 테두리가 허물어져 있었다. 코언저리가 두루뭉술하니 삐뚤어진 부은 얼굴은, 얼핏 문둥이처럼 보였다. 그를 보자 솟아난 기쁨을 명준은 풀이할 수 없었다. 풀이만 된다면 웬만한 일은 그런 대로 다룰 수 있었다. 악마도 풀이할 수만 있으면 무섭지 않았다. 그러나, 붙들려온 태식을 보고 느낀 기쁨을 그는 풀이하지 못했다. 태식은 그의 친구였다. 은인의 아들이었다. 영미의 오빠였다. 다 그만두더라도, 그와 태식의 사이는 나쁜 편이 아니었다. 어딘지 마지막 한 장이 서먹서먹한 사이긴 했으나, 그 무렵 친구를 들라면 그를 들어야 할 처지였다. 그런데도, 붙들려 온 태식은 그에게 전리품으로 비쳤다. 풀이는 한 가지밖에 없었다. 그의 앞사람에게서 일을 넘겨받는 며칠 동안, 그는 체포된 용의자들을 만나지 못했었다. 윤애의 갑작스런 나타남과 그녀의 말로 태식의 수감된 사실을 알았다. 자기 여자를 차지한 자가 손아귀에 들어 있다. 죽이든 살리든 마음대로다.
그 풀이는 고깃간에 걸린 날고기처럼 거슬렸다. 셀로판과 레이스밖에는 가지지 못한 이명준에게는, 그런 날 비린 고기를 쌀 거친 나무껍질이 없었다.
[자네가 이런 일을 하다니 뜻밖이야.]
태식은 부은 눈을 들어서 의심스럽게 건너보았다.
[속에 있는 대로 대답해도 괜찮겠나?]
[물론이야. 맘대로 대답하게, 옛날처럼.]
[그럼 말하지. 자네가 그 자리에 앉아 있는 것도 내게는 뜻밖일세.]
[알겠어. 그러나 나 같은 인간은 이렇게 될 가능성을 가지고 있던 자야. 허나 자네는.]
[깔보지 말게. 모든 인간은 다 그런 가능성이 있네.]
[자네가 이처럼 고생할 만한 갓이 남조선에 있었던가?]
[자네가 그 자리에 앉아 있을 만한 값이, 북한에 있었던가 묻고 싶어.]
[음, 되묻지 말고, 먼저 내 물음을 받아 주게.]
[값이 있어서만 사람이 행동하는 건 아닐세.]
[그럼?]
[값을 만들어 내기 위해서도 행동할 수 있어.]
[자네 같은 애국자를 왜 남조선이 알아주지 못했을까. 나는 여기 잡혀 오는 자들을 정말 미워해. 이렇게 애국자가 수두룩한데 왜 남조선이 요 꼴이 됐지?]
[말해도 좋은가?]
[그러래두.]
[자네 같은 사람이 넘어갔기 때문이야.]
[고맙네. 허지만 자넨 남지 않았나.]
[아니야, 내가 남은 건 6월 25일에서 오늘까지 뿐이야.]
[늦었군 그래, 늦었어. 나한테 부탁이 없나?]
[죽여주게. 고문을 이 이상 참을 수 없어. 자네가 아직도 나한테 우정이 있다면, 나를 곧 죽여 주 게.]
[자네의 죽음을 아무도 몰라도 좋은가?]
[자네, 북한으로 가더니 속물이 됐군. 난 괴로우니깐 빨리 쉬고 싶다는 것뿐이야.]
[난 현재로선 자네한테 우정을 가지고 있지 않아. 지금 똑똑히 느꼈어. 내가 괴로워할 때 자넨 웃고, 자네가 괴로워할 때 나는 웃어야 하도록 돼 있다는 걸 지금 똑똑히 알았네. 난 웃어야겠어.]
[자넨 그다지도 악한이었나?]
[악안? 맞았어. 더 듣기 좋게 악마라고 불러 줘. 내 생애에 단 한번 악마가 될 수 있는 기회를 빼앗지 말아 줘. 난 악마가 돼봐야겠어. 이런 북새통에 자네 한 사람쯤 풀어 주는 건 지금 내가 가진 힘으로 도 넉넉해. 허지만 안 하겠어. 신파는 않겠어. 옛날 은인의 외아들을 목숨을 걸고 풀어 주는 공산당원. 안 돼. 그러면 나는 끝내 공중에 뜬 몸일 뿐이야. 이런 기관에 온 것도, 내가 자원한 일이야. 나는 이번 싸움을 겪어서 다시 태어나고 싶어. 아니 비로소 나고 싶단 말이야. 이런 전쟁을 겪고도 말끔한 손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는 거야. 내손을 피로 물들이겠어. 내 심장을 미움으로 가득 채워 가지고 돌아가야겠어. 내 눈과 귀에, 원망에 찬 얼굴들과 아우성치는 괴로움을 담아 가져야겠어. 여태껏 나는 아무것도 믿지 못했어. 남조선에서 그랬구, 북조선에 가서도 마찬가지였어. 거기서 나는 어떤 여자를 사랑했어. 나는 그녀를 믿었지. 그러나 그녀도 나를 속였어. 그녀를 미워하지는 않아. 좀 어려운 약속을 했는데 결국 지키지 못하더군. 그녀는 지금 모스크바에 있어. 지금 나에겐 아무것도 없어. 무엇인가 잡아야지. 그게 무엇인가는 물을 게 아니야. 싸움에서 빈손으로 돌아오는 자는 바보뿐이야. 바이블에 나오는 게으른 종처럼. 전리품을 긁어모아야지. 당이 논아 주는 전리품을 바랄 수는 없어. 내 손으로 뺏어야 돼. 나의 남은 생애를 쓰고도 남을 전리품을. 옛날부터 싸움이란 그런 거야. 그때 자네가 나타난 거야. 옛 은인의 아들. 맘 맞는 농담을 지껄이던 짝패. 그리고…… 그건 말하지 않지. 이보다 좋은 거리가 어디 있나. 나는 그걸 짓밟겠다는 거야. 그 썩어진 모랄의 집에 불을 지르겠단 말이거든. 그래서 범죄인이 되겠어. 또는 인민의 영웅이 되겠어. 마찬가지 말이야. 어쩔 수 없이 나를 얽어매는 죄를 내 손으로 만들겠다는 거야. 무슨 영문인지도 모르고, 나면서부터 지고 나온다는 원죄 따위 부르주아 꿈 넋두리가 아니야. 내 손으로 밝히 해낸 나의 죄. 그래서 태어나겠다는 걸세. 내 탄생을 도와주게. 그리고 자네 부인이, 지금쯤, 이층 내 방에서 기다리고 있을 거야. 그녀도 나의 탄생을 도와야해. 사람이 태어나기야, 여자한테서 말고야 다른 길이 있겠나?]
태식이 의자에서 벌컥 일어섰다.
[악한.]
[그렇지. 더 흥분해 주게. 자연스럽게 내가 탄생할 수 있도록.]
[윤애한테 손대지 말어. 제발 부탁이야. 자네의 마지막 양심을 믿어. 그건 자넬 괴롭힐 뿐이야. 다른 발업으로도 얼마든지 자기를 살릴 수 있잖아? 제발.]
[다른 방법! 알아듣지 못하는군. 나더러 속물이 됐다더니. 하긴 영미라도 있다면, 영민 어디 있나? 내가 월북한 후 개는 뭐래?]
말이 끝나기 전에 탁, 침이 날아왔다.
그는 한 손으로 낯을 문지르면서 빙긋 웃었다.
[아첸 스파시보. 생큐 베리 머치란 러시아 말일세.]
순간 그의 주먹이 태식의 얼굴을 갈겼다. 수갑이 차인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쓰러지는 태식을, 발길로 걷어찼다. 태식의 얼굴은 금시 피투성이가 됐다. 그 핏빛은, 몇 해 전 바로 이 건물에서, 형사의 주먹에 맞아서 흘렸던, 제 피를 떠올렸다. 그때 형사가 하던 것처럼, 태식의 멱살을 잡아 일으켜, 또 한 번 얼굴을 갈겼다. 제 몸에 그 형사가 옮아앉은 것 같은 환각이 있었다. 사람이 사람의 몸을 짓이기는 버릇은 이처럼 몸에서 몸으로 옮아가는 것이구나. 몸의 길. 그는 발을 들어, 마루에 엎어진 태식의 아랫배를 차 질렀다. 꼭 제 몸이 허수아비 놀 듯, 자기와 몸 사이에 짜증스런 겉돎이 있었다. 그 틈새를 없애려고, 쉬지 않고 팔과 다리를 눌렀다. 태식은 더 움직이지 않고 마루에 배를 깔고 누워 있었다. 쭈그리고 앉아서 죄수의 코에 손을 대보았다. 다음에 가슴을 짚어 보았다. 죽진 않았어. 허리를 펴고 일어서면서 아랫주머니를 찾아 손수건을 꺼냈다. 손에 묻었던 피를 빨아들인 수건은 금방 질척거렸다. 아직도 깨끗한 가장자리를 써서 손톱까지 말끔히 닦은 다음, 그것을 방 귀퉁이를 향하여 집어던졌다. 그리고 나서 문간에 선 감시병을 불렀다.
[감방으로 옮기시오.]
이른 다음 계단을 천천히 올랐다. 가슴이 개운하고, 아무렇지도 않았다. 그렇지.
갈매기가 보이는 바다로 트인 분지에서 윤애를 애무했을 때도 그는 이랬었다. 쑥이었던 그가 능란한 사랑의 솜씨를 부린 것에 스스로 놀라던 일. 그때처럼, 아무렇지도 않았다. 나도 끔찍할 수 있다. 아무렇지도 않다. 히틀러의 고문관들도 이렇게 해낸 것일 테지. 스페인의 종교 재판관들도 이렇게 해낸 것이지. 왕조의 형리들도 이렇게 곤장을 친 것이지. 그리고 윤애가 기다리고 있다. 그녀를 덮치는 것도 아무렇지도 않을 거다.
그녀는 전날처럼 명준의 책상 옆에 놓인 의자에 앉았다가, 그가 들어서자, 일어섰다. 모시 치마저고리에 고무신을 신고 있었다. 그 모습에는, 몇 해 전처럼 싱싱한 데가 없는 대신에, 점잖은 티가 깃들여 있었다. 고생스럽게 걱정으로 지내는 여자로서는 이유가 있어 보였으나, 그녀의 눈과 가는 목이 어쩔 수 없이 애처로웠다. 그녀는 의젓하려고 애쓰는 듯했다. 명준은 병신스럽다고 생각했다. 여기는 너의 집 응접실이 아니라고 소리를 치고 싶었다. 일이 얼마나 중한지 그녀는 모르는 건가. 또는 명준에게 한 가닥 바람을 걸고 있는가.
[앉아요.]
그녀는 앉으면서 치마꼬리를 여밀 싸했다.
[윤애.]
그녀는 겁에 질린 눈초리로 건너다봤다. 오랜만에 불러 보는 그녀의 이름이, 잠깐 그를 어지럽게 했다. 이러려는 게 아니지. 그는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얘기도 없이 사라져서 미안했어.]
[……]
[허지만 또 이렇게 오지 않았어? 어쩌면 윤애를 한 번 더 보기 위한 것인지도 몰라.]
[그 말씀은 말아 주세요.]
[그래? 그럼 무슨 얘길 할까?]
명준은 담배를 꺼내서 붙여 물었다. 되도록 천천히 연기를 즐겼다. 담배 한 개비를 다 피우고 일어서서 윤애 앞으로 걸어갔다. 오른손으로 그녀의 턱을 쳐들었다.
그녀는 하얗게 질린 채 눈을 감고 있었다. 입술이 까칠하게 탔다. 덮치듯 입술을 댔다. 윤애는 튕겨지듯 자리에서 일어나며 뒤로 물러섰다.
[왜 이러세요? 사정을 아시면서.]
명준은 허하게 웃었다.
[사정? 옛날 애인이지만, 지금은 친구의 부인이라는? 알아. 아니깐 그러는 거야.]
그는 한 발 다가섰다.
[용서해 주세요. 이러지 마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