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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란 도대체 무엇인가?
우리는 (민주주의 정부의 근대적 전통과 마찬가지로) 근대 자본주의를 실제보다 아주 훗날 등장한 것으로 보는 데 익숙해 있다. 혁명의 시대와 산업혁명, 미국과 프랑스의 혁명, 18세기 일련의 사건들 등을 거치면서 나폴레옹 전쟁 후에야 완전히 제도화된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기이한 역설에 직면하게 된다. 자본주의와 결부시키는 금융조직의 거의 모든 요소들, 즉 중앙은행과 채권시장, 공매도, 증권거래소, 투기 버블, 증권화, 연금 등이 경제학뿐만 아니라 법인과 공장, 임금노동이 등장하기 전에 이미 존재했던 것 같다. 이는 우리의 사고에 그야말로 도전이 아닐 수 없다. 우리는 공장과 일터를 “진짜 경제”로 생각한다. 그 나머지는 그 위에 세워진 ‘상부구조’로 여긴다. 하지만 이것이 진실이라면, 어떻게 상부구조가 먼저 생길 수 있는가?
이 모든 것들은 우선 “자본주의”가 무엇인가 라는 질문을 제기한다. 아직까지 이 질문의 답에 대해선 의견일치가 이뤄지지 않고 있다. 자본주의라는 단어는 원래 자본주의를 자본을 소유한 사람이 그렇지 못한 사람의 노동을 지배하는 체제로 본 사회주의자들이 만들어낸 것이었다. 대조적으로 자본주의 옹호자들은 자본주의를 시장의 자유로 본다. 시장에서 팔릴 잠재력이 있는 아이디어를 가진 사람들이 자원을 끌어모아 그것을 현실화시킬 수 있는 곳이 곧 시장이라는 인식이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이 자본주의는 끊임없는 성장을 요구하는 체제라는 점에는 동의한다. 기업가들은 존립을 위해서라도 성장하지 않으면 안 된다. 국가도 마찬가지다. 자본주의 초기에 합법적인 이자로 연 5%가 널리 받아들여졌듯이, 어느 국가든 GDP(국내총생산)의 성장률이 연 5%는 되어야 한다. 한때 모든 것들을 이익을 위한 잠재적 원천으로 보게 만들었던 비인간적인 메커니즘이 이젠 인간 공동체의 건강을 측정하는 유일한 객관적 척도로 여겨지게 되었다.
우리의 기준선인 1700년대부터 대략적으로 보도록 하자. 근대 자본주의의 여명에 나타난 것은 신용과 부채의 거대한 금융조직이다. 이 금융조직은 거기에 연루된 사람들 모두로부터 더욱 많은 노동을 뽑아내려고 노력한다. 그 결과 재화가 끊임없이 생산된다. 이 금융조직은 도덕적 충동만으로 그렇게 하지 않는다. 물리적 힘까지 동원한다. 중요한 고비마다 유럽에선 전쟁과 상업이 뒤얽히는 모습이 거듭 나타난다. 전쟁과 상업 간에 놀랄 정도로 새로운 형태의 결합이 이뤄지는 경우도 간혹 있다. 네덜란드와 영국의 최초 주식시장들은 주로 동인도회사와 서인도회사의 주식을 거래했다. 두 회사 모두 군사적인 일과 교역 사업을 동시에 추구하던 곳이다. 그처럼 이익을 추구하던 개인 회사 하나가 인도를 무려 1세기나 지배했다. 영국과 프랑스 등의 국채는 운하를 파거나 다리를 세우기 위해 빌린 것이 아니라 도시들을 포격할 화약을 구입하고 또 포로들을 수용하고 군 지원자들을 훈련시킬 캠프를 짓기 위해 빌린 것이었다. 18세기의 버블 거의 모두는 유럽의 전비를 마련하기 위해 고안된 장밋빛 식민지 사업들 때문이었다. 종이화폐는 부채화폐였으며, 부채화폐는 전쟁화폐였다. 언제나 그랬다. 유럽의 끝없는 군사적 충돌에 돈을 댄 사람들은 또한 정부의 경찰과 감옥을 이용하여 나머지 인구의 생산성을 최대한 짜냈다.
누구나 다 알 듯이, 스페인과 포르투갈 제국들이 처음 시작한 세계시장 시스템은 먼저 향료를 구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었다. 그 시장은 곧 무기무역과 노예무역, 마약무역으로 3갈래로 나뉘어졌다. 마약무역은 대부분 커피와 차, 담배, 설탕 등 약한 마약들을 거래했다. 그때 증류주도 처음 등장한다. 잘 알고 있듯이, 그러다 유럽인들은 금 유출을 막기 위한 한 방법으로 중국에 아편을 공격적으로 판매하면서도 양심의 가책을 전혀 느끼지 않았다. 의류무역은 그 다음에 등장했다. 동인도회사가 무력을 동원하여 인도의 목화수출무역을 막은 뒤의 일이었다. 찰스 대버넌트가 1696년에 신용과 인류애에 관해 쓴 에세이가 담긴 책을 보면 당시 상황이 잘 드러난다. 거기에 동료 영국인들 사이의 관계는 복종과 사랑, 우정이 충만한데 식민지에서는 오직 복종만 있을 뿐이라는 대목이 나온다.
이미 앞에서 설명했듯이, 대서양 노예무역은 브리스톨에서부터 칼라바, 그리고 아로 족 무역업자들이 비밀결사들을 지원하고 있던 크로스 강 상류까지 이어지는, 부채와 채무의 거대한 쇠사슬로 상상하면 된다. 인도양의 노예무역은 네덜란드의 위트레흐트에서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케이프타운, 인도네시아의 자카르타, 그리고 백성들을 투계장으로 끌어들여 돈을 잃게 하여 자유를 버리게 만들었다는 발리 섬의 그겔겔 왕국까지를, 그와 비슷한 거대한 쇠사슬로 묶고 있었다. 두 노예 무역 모두 결과는 똑같았다. 인간 존재들이 그동안 살아온 환경에서 송두리째 뽑혀 인간성을 완전히 말살 당하고 부채의 영역에서마저도 영원히 추방되는 것이었다.
이 쇠사슬의 중개자들, 이를 테면 런던의 주식 투기꾼과 나이지리아의 아로 족 성직자들, 인도네시아 동부 아루 섬의 진주 조개잡이들, 벵골의 차 플랜테이션, 아니면 아마존의 고무수액 채취자들을 연결시키는 다양한 상업적 연결고리들은 냉정하고, 계산적이고, 낭만이라곤 전혀 없는 사람들이라는 인상을 준다. 부채 쇠사슬의 양쪽 끝을 보면, 그 전체 과정이 환상을 교묘하게 조작하는 능력과 동시대인들의 눈에도 요지경처럼 비치는 것에 모험을 거는 무모함에 의해 움직인 것 같다. 한 쪽 끝에는 주기적으로 나타나는 버블이 있었다. 루머와 환상에다가, 파리와 런던 같은 도시의 주민들 중에서 여유 자금이 있는 사람들 누구나 알게 되었듯이, 많은 사람들이 그런 루머와 환상에 넘어간다는 사실까지 맞물리면서 거품이 주기적으로 나타났다.
찰스 맥케이(Charles Mackay)가 이 거품들 중 첫 번째 거품에 대해 멋진 글을 남겼다. 1710년에 일어난 그 유명한 “사우스 시 거품”이다. 실제로 사우스 시 컴퍼니(급성장하여 한때는 국가채무의 대부분을 사들였다)라는 회사가 그 사태를 주도했다. 당시 이 회사는 거대한 법인으로, 주식 가치가 끊임없이 상승하고 있었다. 오늘날로 치면 “대마불사”(大馬不死)라 불릴 정도였던 것 같다. 이 회사를 모델로 설립된 회사가 수백 개에 달했다.
“무수히 많은 주식회사들이 곳곳에서 창업했다. 그 회사들은 곧 ‘거품’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인간의 상상력에서 나온 표현 중에서 이것만큼 적절한 것도 없을 것이다. … 일부 회사는 1, 2주일 지탱하다가 슬그머니 종적을 감추고 말았다. 그 정도까지 가지 못한 회사도 부지기수였다. 밤마다 새로운 사업계획이 나오고, 아침마다 새로운 프로젝트가 탄생했다. 이처럼 이익을 좇는 일에는 최고위층의 귀족들도 콘힐의 막노동꾼이나 다를 바가 하나도 없었다.”
이 글의 저자는 비누나 돛배 제작에서부터 말에 대한 보험, “톱밥으로 판자를 만드는” 방법에 이르기까지 86가지 사업계획을 무작위로 나열하고 있다. 각 회사들은 주식을 발행했으며, 주식은 나오기가 무섭게 선술집과 커피하우스, 골목, 가게 등에서 탐욕스럽게 거래되었다. 회사가 설립되기만 하면 예외 없이 주가가 급상승했다. 주식을 산 사람은 자기보다 더 잘 속아 넘어가고 더 탐욕스런 사람을 찾아 넘기기만 하면 그만이었다. 그러다 보면 붕괴를 피할 수 없었다. 그로 인해 수많은 사람들이 부자가 되었으나 그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빈털터리가 되고 말았다.
“그 모든 회사들 중에서 가장 부조리하고 비상식적인 것은, 아니 사람들의 광기를 노골적으로 이용한 것은 무명의 모험가가 시작한, ‘위대하긴 하지만 아직 아무도 구체적으로 알지 못하는 모험을 수행할 회사’라는 긴 이름의 회사였다.
곧잘 속아 넘어가는 대중들의 경박함을 이런 대담하고 인상적인 이름으로 시험하려 든 그 영리한 사람은 설립취지서에 필요한 자본 50만 파운드, 발행 주식 100파운드짜리 5,000주, 공탁금 주당 2파운드라고만 적었다. 공탁금을 내는 청약자들은 주당 1년에 100파운드씩 받을 자격이 주어진다는 내용도 있었다. 엄청난 이익을 어떤 식으로 낼 것인지에 대해서는 아직 그 단계에선 설명할 수 없지만 1개월 이내에 세세하게 발표할 것이며 또 그때 나머지 대금을 받겠다고 약속했다. 이 사람은 이튿날 오전 9시에 콘힐에 사무실을 열었다. 금방 군중들이 사무실로 몰려들었다. 오후 3시에 사무실 문을 닫았을 때, 1,000주에 대한 청약이 있었고 공탁금도 예치되었다.
그는 그 정도의 모험에 만족할 줄 아는 철학자였기에 그날 밤 대륙으로 향하는 배에 몸을 실었다. 그 뒤로 그에 대한 소식을 들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맥케이의 말을 믿는다면, 런던 시민 전체가 동시에 망상에 사로잡혔다고 할 수 있다. 돈이 무(無)에서 만들어진다는 망상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그런 일이 가능하다고 믿을 만큼 바보라는 착각과 바로 그런 사실 때문에 어쨌든 실제로 무(無)에서 돈을 벌 수 있을 것이란 착각에 빠졌던 것 같다.
부채 쇠사슬의 다른 끝으로 가보자. 거기서는 마법에서부터 대재앙을 예고하는 미신까지 또 다른 부류의 공상이 발견된다. 인류학적 문헌을 보면, 현지의 중국인 상점에서 외상으로 산 물건을 선물로 주지 않으면 바다의 보석을 절대로 내놓지 않는다는, 아루 족 진주 조개잡이의 아름다운 “바다의 아내들”이 있는가 하면, 벵골 지주들이 채무노예를 공포에 떨게 하기 위해 귀신들을 산다는 비밀시장들, 인간사회에서 벌어지는 살육의 공상인 티브 족의 ‘인육부채’가 있고 간혹 티브 족의 악몽이 현실로 나타난 듯한 사건들이 있다. 그런 사건들 중에서 가장 악명 높은 것이 1909년과 1911년 사이에 벌어진 ‘푸투마요 사건’이었다. 페루의 우림에서 작업을 벌이던 한 영국 고무회사의 자회사 직원들이 후이토토 인디언(이들을 그 직원들은 계속 ‘식인종’이라고 불렀다) 수만 명을 강간과 고문, 사지절단 등의 악랄한 수법으로 살해했다는 소식이 전해져 런던 시민들을 충격에 빠뜨렸다. 400년 전에 있었던 최악의 정복을 떠올리게 하는 사건이었다.
이어 논쟁이 벌어졌다. 가장 먼저 그 인디언들을 부채의 덫에 빠뜨린 시스템이 공격의 표적이 되었다. 그 시스템은 인디언들이 그 회사의 가게에 모든 것을 의존하도록 만들었다.
“모든 악의 뿌리는 소위 말하는 ‘후원’ 시스템이었다. 영국에서 ”트럭 시스템“(현물급여제)이라 불리던 것의 한 변형이었다. 모든 종업원들은 모든 용품을 직원용 가게에서 구입해야 했으며, 그 때문에 회사에 끊임없이 빚을 지게 되어 있었다. 그러면 그 빚을 다 갚을 때까지는 회사를 떠나지 못했다. … 그렇기 때문에 ‘피후원자’가 사실상의 노예일 때가 간혹 있다. 거대한 대륙의 오지에는 정부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피후원자’의 운명은 주인의 처분에 좌우되었다.”
그 이야기는 계속되었다. 채찍질을 당하다 죽거나 십자가형에 처하거나 나무에 묶여 표적이 되거나 고무를 충분히 가져 오지 않았다는 이유로 칼에 난도질당하기도 했던 “식인종들”은 모두 부채의 덫에 빠져들었다. 회사 직원들이 제시하는 물건들에 혹했다가 자신의 목숨과 맞바꾼 꼴이 되었다.
이후 영국 의회의 조사가 있었다. 실제 이야기는 이와 딴판이었다. 후이토토 인디언들이 유혹당하여 채무노예가 되었던 것이 아니었다. 부채의 늪에 깊이 빠져 있던 사람들은 그 지역으로 간 직원과 감독관들이었다. 스페인 정복자들과 많이 닮았다. 이들의 경우 자신들에게 돈을 대 준 페루회사에 빚을 지고 있었으며, 페루 회사들은 런던의 금융가들로부터 최종적으로 신용을 정산했다. 직원들은 그 신용 망(網)을 인디언들에게까지 확장할 의도를 갖고 현지에 도착했다. 그러나 후이토토 인디언들은 옷과 칼, 그리고 직원들이 인디언들과 교역을 하기 위해 가져온 주화에 아무런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그러자 그들은 결국 포기하고 인디언들이 강제로 융자를 받게 한 뒤 갚아야 할 고무의 양을 정했다. 그 인디언들 중 많은 이들이 거기서 달아나려다 죽음을 당했다.
그렇다면 인디언들은 사실상 노예로 전락한 것이었다. 1907년만 해도 그것을 공개적으로 인정할 수 없었다. 정당한 기업이라면 도덕적 기반을 가져야 했고, 그 회사가 아는 유일한 도덕은 부채였다. 후이토토 인디언들이 그 전제 자체를 거부하는 게 분명해졌을 때, 모든 것이 뒤엉켜버렸으며 회사는 경제적 기반까지 위협받게 된 것이다.(609-616)
자유노동이란 환상
자본주의의 은밀한 불명예 하나는 어느 시점에도 자유노동을 중심으로 조직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남북미 대륙의 정복은 대량 노예화로 시작하여 점점 다양한 형태의 채무노예와 아프리카 노예, “계약 노예”, 즉 계약 노동자의 사용으로 바뀌어갔다. 이 중 계약 노동자의 경우 현금을 미리 받고 5년, 7년 또는 10년 등 정한 기간 동안 노동을 함으로써 그 부채를 갚는 근로자들을 말한다.
말할 필요도 없이 “계약 노예들”은 대부분 이미 부채를 지고 있던 사람들이었다. 1600년대 미국 남부의 플랜테이션에는 아프리카 노예 못지않은 수의 백인들이 일을 하고 있었다. 백인들도 법적으로는 아프리카 노예나 똑같은 처지였다. 그 이유는 처음부터 플랜테이션 사회들이 노예제도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유럽의 법적 전통 안에서 움직였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아프리카 노예들조차도 사우스캐롤라이나와 노스캐롤라이나 주에선 처음부터 계약 노동자들로 분류되었다.
물론 훗날 “인종”이라는 개념이 도입되면서 이것이 변하게 된다. 아프리카계 노예들이 자유의 몸이 되었을 때, 카리브해의 바베이도스에서부터 인도양의 모리셔스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플랜테이션에서 그들은 다른 계약 노동자로 대체되었다. 이번에는 주로 인도나 중국에서 모집해 온 근로자들이었다. 중국 계약 노동자들은 북미의 철도를 깔았고, 인도 “쿨리들”은 사우스 아프리카의 광산을 개척했다. 중세에 토지 소유자로 자유롭게 농사를 지었던 러시아와 폴란드의 농민들은 자본주의가 동틀 무렵 자신의 영주들이 서쪽의 새로운 산업도시들을 부양할 양식을 세계시장에 내다팔기 시작하자 그만 농노로 전락하고 말았다. 아프리카와 동남아시아의 식민 집단들은 정복지 주민들에게 강제노동을 수시로 요구하거나 빚을 안겨 그들을 노동시장으로 내몰 세금제도를 시행했다. 인도에 파견된 영국인 지배자들은 처음 동인도회사로 시작했다가 그 다음에는 국왕 정부 하에서 계속 일하며 해외에 팔 제품들을 생산할 주요 수단으로 채무노예를 제도화했다.
이것이 불명예인 이유는 시스템 자체가 종종 나쁜 결과를 초래하기 때문만은 아니다. 푸투마요 사건에서 본 것처럼, 그것이 자본주의에 대한 가장 기본적인 관념, 특히 자본주의는 자유와 관련이 있다는 전제를 여지없이 깨뜨리기 때문이기도 하다. 자본가들에게 있어서 자본주의는 시장의 자유를 의미한다. 반면 대부분의 근로자들에게 있어서 자본주의는 자유로운 노동을 의미한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임금노동이 어떠한 의미로든 종국적으로 자유로울 수 있는지에 대해 의문을 품었다. 자기 몸뚱이밖에 팔 것이 없는 사람은 어떤 의미로도 순수하게 자유로운 행위자로 여겨질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자유로운 임금노동이 여전히 자본주의의 바탕으로 여겨지고 있다.
자본주의 역사에서 두드러진 이미지 하나는 산업혁명 당시 공장에서 땀 흘리며 일하던 영국 근로자이다. 이 이미지는 실리콘 밸리까지 이어질 수 있다. 산업혁명 시대 영국 근로자와 실리콘 밸리의 미국 근로자는 서로 직선으로 연결된다.
수백 만 명에 달하던 노예들과 농도들, 쿨리들, 채무노예들은 사라지고 있다. 그렇지만 그들에 대해 이런 식으로 논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단지 그들이 관련된 일시적 현상만 건드리고 넘어가는 꼴이 될 것이다. 노동착취공장처럼, 이것도 산업화를 위해 필히 거쳐야 하는 단계로 여겨지고 있다. 그것은 지금도 존재하는 수백만 명의 채무노예와 계약노동자들, 노동착취공장의 노동자들이 자기 자식들만은 건강보험과 연금을 갖는 임금근로자가 되고, 그 자식의 자식들은 의사와 변호사, 기업가가 되는 것을 보겠다고 기대를 거는 것과 똑같다.
심지어 영국 같은 국가에서조차도 임금노동의 실제 역사를 보면, 그런 희망은 금방 사라지고 만다. 중세 유럽 북부의 대부분 지역에서 임금노동은 대체로 평생 이어졌다. 12세 내지 14세부터 28세 내지 30세까지, 이 연령대에 속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다른 사람의 집에 하인으로 고용된 것으로 여겨졌다. 보통 1년 단위 계약이었으며, 그 기간엔 숙식과 직업훈련, 임금이 주어진다. 사람들은 결혼해 가정을 꾸릴 수 있을 만큼 돈을 모을 때까지 그런 식으로 노동을 했다. “프롤레타리아화”가 낳은 한 가지 현상은 유럽 전역의 수많은 남녀 젊은이들이 사실상 일종의 ‘영원한 청년기’에 갇혀 옴짝달싹 못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도제와 장인은 결코 마스터가 될 수 없었기에 결코 성장이 불가능했다. 결국 많은 젊은이들이 마스터의 길을 포기하고 조기에 결혼을 했다. 이는 새로운 프롤레타리아 계급이 가족을 부양하지도 못하는 상황에서 가족을 이룬다고 주장하던 도덕주의자들에겐 못마땅한 현상이었다.
임금노동과 노예제도 사이에는 이상한 유사성이 있고 또 있어 왔다. 그것은 산업혁명 때 공장에 적용된 과학적 경영기법 대부분이 설탕 플랜테이션까지 거슬러 올라간다는 이유 때문만은 아니다. 노예주인과 노예, 고용주와 피고용자의 관계가 원칙적으로 비인간적인 때문이기도 하다. 당신이 팔려나갔든 아니면 스스로 자신의 육체를 빌려준 처지든, 소유주가 바뀌는 순간, 당신이 어떤 존재인가 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게 된다. 중요한 것은 당신이 명령을 이해할 수 있고 지시받은 바를 행동으로 옮길 수 있느냐 하는 것뿐이다.
노예의 구입이나 노동자들의 고용이 신용으로 이뤄지지 않고 반드시 현금을 요구하는 이유도 아마 그 때문일지 모른다. 문제는 영국 자본주의 역사 대부분 동안 현금이 언제나 귀했다는 사실이다. 국립 조폐국에서 소액의 은화와 동화(銅貨)를 제작하기 시작했을 때조차도, 주화는 공급이 드물게 이뤄졌고 양도 부족했다. 이 때문에 “트럭 시스템”이 발달하기 시작했다. 산업혁명 동안 공장주들은 종종 직원들에게 현지의 가게에서만 사용할 수 있는 증서 같은 것으로 임금을 지급했다. 그 가게의 주인이 사실상 공장 주인의 대리인일 때, 그때까지 가게주인들과 맺어오던 전통적인 신용관계는 완전히 새로운 양상으로 변하고 말았다. 공장주들은 자기 공장에서 나오는 제품으로 임금 일부를 지급하기도 했다.
고용주가 마지막으로 선택할 수 있는 방편이 한 가지 더 있었다. 그냥 돈이 나타나기를 기다리는 것이다. 그 동안에는 노동자들에게 아무것도 지급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면 노동자들은 공장이 아닌 다른 곳에서 임시변통을 하든지, 구호물자를 받든지, 그것도 안 되면 상어 같은 융자업자나 전당포를 찾아야 할 것이다. 노동자들의 상황은 아주 나빴다. 19세기 런던의 전당포에 불이라도 나면 노동자들이 살던 지역은 부부싸움으로 시끄러웠다. 많은 아내들이 남편의 외출복을 오래 전에 전당포에 잡혔다는 사실을 실토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오늘날엔 직원들의 월급을 18개월이나 미룬 공장이 있다고 하면 옛 소련이 붕괴할 때처럼 경제적으로 추락하던 나라의 일로만 여겨질 것이다. 그러나 영국 정부의 태환화폐 정책 때문에 산업자본주의 초반에 영국에서도 그런 상황이 다반사로 일어났다. 당시 영국 정부는 지폐가 많이 나돌아 투기성 버블이 일어나는 일이 없도록 예방하는 것을 최우선 과제로 삼고 있었다. 심지어 정부조차도 공무원들에게 임금을 지급할 현금을 확보하지 못할 정도였다. 18세기 런던에선 영국 해군이 데프트포드 부두에서 일하던 노동자들의 임금을 1년 뒤에 지급하는 것이 예사로 통했다. 미국 역사학자 피터 라인보(Peter Linebaugh)가 보여주었듯이, 정부가 재정을 안정시키고, 임금을 제때 현금으로 지급하기 시작하고, 그리하여 ‘작업장 좀도둑’을 근절시키려고 노력하고 나서야 상황이 두드러지게 개선되기 시작했다. 그것이 1800년 무렵이었다. 그 후로 작업장 좀도둑을 채찍질과 감금으로 다스릴 수 있게 되었다. 그곳의 조선소를 개선하는 책임을 진 엔지니어 새뮤얼 벤담(Samuel Bentham)은 순수한 임금노동이 이뤄지는 곳으로 만들기 위해 조선소를 마치 경찰서처럼 바꿔야 했다. 이를 위해 그는 작업장 한가운데에 상시적으로 감시할 수 있는 높다란 탑을 세울 것을 고려했다. 이 아이디어가 나중에 그의 형인 제러미 벤덤(Jeremy Bentham)에게 차용되어 그 유명한 파놉티콘(Panopticon)(원형감옥)으로 발전하게 된다.(617~621)
인간의 속성
스미스와 벤담 같은 인물들은 이상주의자, 아니 공상적 이상주의자였다. 그러나 자본주의 역사를 이해하려면 우리가 머릿속에 그리고 있는 근로자들의 이미지는, 말하자면 동등한 입장에서 체결된 계약에 따라 오전 8시에 출근카드를 찍고 매주 금요일 주급을 받는 근로자의 이미지는 이상형으로 시작되었으며, 그것이 영국과 북미에서조차도 점진적으로 현실화되었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 선행되어야 한다. 어느 시대 어느 곳에서도 시장을 위해 재산을 조직하는 데 있어서 근로자가 최우선적으로 고려된 적은 지금까지 한 번도 없었다.
따지고 보면 스미스의 저작물이 그렇게 중요한 이유도 여기에 있을 수 있다. 그는 부채와 신용이 거의 없는, 그렇기 때문에 죄와 범죄가 없는 상상의 세계를 그렸다. 남자와 여자들이 모든 것이 신에 의해 더 큰 선(善)을 추구하도록 사전에 설계되어 있다는 것을 아는 가우데 자유롭게 자신의 이익을 추구할 수 있는 그런 세계였던 것이다. 물론 그런 상상 속의 그림들이 과학자들이 흔히 “모델”이라고 부르는 것들이다. 그것 자체에 잘못된 것은 하나도 없다. 나 자신도 그런 모델을 떠올리지 않고는 논의를 심도 있게 진행하기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모델의 문제는 한번 만들어지기만 하면 사람들이 그것을 객관적인 현실로 보고, 심지어 그 앞에 납작 엎드리면서 신처럼 숭배하려 한다는 점이다. “시장의 명령에 복종하겠습니다!”라는 식이다.
이처럼 곧잘 자신의 창조물을 숭배하는 인간들의 속성을 잘 알고 있었던 칼 마르크스가 『자본론』(Das Capital)을 쓴 이유도 거기에 있었다. 비록 우리가 경제학자들의 이상적인 비전에서 시작한다 하더라도, 일부 사람들이 생산 자본을 독점하도록 하는 한편으로 팔 것이라곤 자신의 뇌와 몸뚱이뿐인 사람들을 그냥 내버려 둔다면 노예제도나 다를 게 거의 없는 결과를 낳아 전체 시스템이 결국 허물어지고 말 것이라는 점을 보여주기 위함이었다. 마르크스를 읽는 사람들 모두가 망각하는 것이 그의 분석의 “비평적인” 성격이다. 마르크스는 당시 런던에 공장 근로자들보다 구두닦이와 매춘부, 하인, 군인, 행상, 굴뚝청소부, 꽃 파는 소녀, 거리의 음악가, 죄수, 유모, 택시운전자가 훨씬 더 많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가 현실의 세계가 앞에서 말한 것과 같다고 한 적은 한번도 없었다.
그래도 지난 수백 년 동안의 세계사가 가르쳐준 것이 있다면, 이상적인 비전들이 어느 정도 호소력을 발휘한다는 사실이다. 애덤 스미스의 이상적인 비전도 그랬고, 그의 이상에 반대하는 자들이 제시한 이상도 또한 그랬다. 대충 1825년에서 1975년 사이의 기간은 매우 막강한 몇 사람이 많은 약한 자들의 지지를 등에 업고 자신의 비전을 현실로 바꾸려는 노력을 치열하게 전개한 세월이었다. 마침내 보통사람들까지도 신용이나 영수증 등에 의존하지 않고 일상생활을 영위할 수 있을 만큼 주화와 지폐가 많이 발행되었다. 새로운 종류의 가게와 아케이드와 갤러리가 등장했다. 거기선 누구나 현금을 내고 물건을 살 수 있었다. 세월이 흐름에 따라 할부 같은 비인간적인 형태의 신용도 등장했다. 그 결과, 부채는 죄이며 타락이라고 보던 청교도적 인식이 스스로 “존경받을 만한” 근로계층이라고 여기던 사람들에게도 큰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당시 근로계층은 전당포와 고리대금업자를 가까이 하지 않는 것을 긍지로, 또 주정뱅이와 사기꾼과 육체노동자와 자신들을 구분 짓는 기준으로 여기고 있었다.
그런 근로계층 가정에서 자란 한 사람으로서(53세에 세상을 떠난 나의 형은 죽는 날까지 크레디트카드를 거부했다) 나는 깨어 있는 시간 대부분을 다른 사람의 지시에 따라 일하며 보내는 사람들에게 현금이 가득 든 지갑을 끄집어낼 수 있는 능력이 얼마나 큰 자유인지를 누구보다 잘 안다. 그렇기 때문에 역사적인 노동운동의 지도자들이 지금까지 이 책에서 논의된 경제학자들의 가설들 중 매우 많은 것을 그대로 포용한 것도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다. 마치 그 경제학자들이 자본주의의 대안적인 비전을 정확히 제시한 것처럼 받들어지고 있는 것이다. 제6장에서 보여주었듯이, 문제는 단순히 경제학자들의 비전이 결함이 많은, 심지어 잘못되기까지 한 인간 자유의 개념에 근거하고 있다는 사실에 있지 않다. 진짜 문제는, 유토피아적인 꿈들이 다 그렇듯, 그 비전도 실현 불가능한 것이라는 사실이다. 보편적인 세계시장이 불가능하듯, 자본가가 아닌 사람들까지도 치과치료까지 적절히 받는 가운데 임금을 규칙적으로 받으며 남부럽지 않은 임금노동자가 될 수 있는 체제는 불가능하다. 그런 세상은 지금까지도 존재하지 않았고 앞으로도 영원히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게다가, 그런 비전이 실현될지도 모른다는 그 기대마저 물질화되는 순간, 전체 시스템은 해체되기 시작할 것이다.(621~624)
[출처] 부채: 그 첫 5,000년
Debt: The First 5,000 Years(2011)
데이비드 그레이버 지음, 정명진 옮김, 부글북스 2011
(부채, 첫 5,000년의 역사, 2021년 재 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