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벗지 그러니?
일순:
(벗으려고 가면을 잡았다가 멈추더니)
……. 벗었는데 내가 안 보이면?
이상하다는 듯 보는 설미.
건설 현장 (낮)
전기 배선을 하는 일순.
일순:
(소리)
스무 살 때 절도로 재판 받는데 판사가 선고를 내리면서…….
나한테만 들리게 이러는 거예요.
법정 (낮)
주심 판사, 허리를 굽혀 일순에게 최대한 얼굴을 들이대고 속삭인다.
판사:
씹새끼야, 너는 점으로 소멸될 거다.
공포에 사로잡히는 피고 박일순.
건설 현장 (낮)
씬26 연결.
설미:
(소리)
저런.
일순:
(소리)
교도소에서 별 짓을 다 했어요, 자꾸 소멸되는 거 같아서…….
다른 사람 옷도 훔쳐 입고…….
처음엔 여기 들어와서 약 먹구 이빨 잘 닦구 좋아졌는데……. 퇴원하니까 또…….
화장실 (낮)
작업복 입은 채 이 닦는 일순. 구석구석 열심히.
일순:
(소리)
이름도 바꾸고……. 다른 사람처럼 하고 다니다가 사기죄로 걸렸거든요…….
설미:
(소리)
그래서?
일순:
(소리)
교도소엔 안 갔지.
정신분열증에 반사회적 성격장애, 안티소셜이니깐.
현장 사무실 (낮)
작업복을 벗고 옷을 갈아입는 일순.
설미:
(소리)
오- 안티소셜…….
일순:
(소리)
이유 없이 자꾸 훔치구 싸우구, 죄책감이나 동정심 없는 게 안티소셜이잖아요.
설미:
(소리)
그러니?
일순:
(소리)
근데 왜 나보구 안티소셜이라 그러는지 몰라.
난 사정이 있어서 훔치는데……. 소멸될 거 같아서…….
나는요 안티소멸이에요, 누나.
택시 (낮)
가방을 옆에 두고 택시에 앉은 일순. 택시, 산 속을 달린다. 길을 돌아들면 하얀 병원 건물이 보이기 시작한다.
일순:
(소리)
안티소셜은 치료법이 없잖아요.
그래도 의사가 희망을 가지래요……. 삼사십년 지나서 저절로 낫는 경우도 있다고…….
대개 그 삼사십년을 교도소에서 보내지만…….
설미:
(소리)
음…….
일순:
(소리)
그 교도소 가기 싫어서 내 발루 입원하잖아, 예감 딱 느끼면 바루 들어와 버려.
다섯 번째 입원이에요, 사 년 동안.
노가다 착실하게 하면 입원비랑 약값은 어떻게 하는데…….
현관 앞에 서는 택시, 돈 주고 내리는 일순.
복도 - 치료실 앞 (낮)
나란히 복도를 걷는 일순과 설미, 일순은 가면을 손에 들었다.
일순:
……. 이런 식으로 사십년 버틸 수 있을까, 소멸되지 않고?
어떻게 생각해 누난?
걸음을 멈추는 일순, 간절한 눈길로 설미를 본다.
설미:
(일순의 얼굴을 찬찬히 보며)
그냥……. 희망을 버려.
(멍하니 바라보는 일순의 이마에 일회용 반창고를 척 붙여주며)
그리구 힘내!
일순:
(혼자 뇌까리듯)
이빨을 좀 더 열심히 닦아야겠어…….
설미:
응?
일순:
엄마가 집 나간 담에 딱 한 번 전화 왔는데요……. 자기 전에 꼭 이 닦으라고…….
이빨은 한 번 소멸되기 시작하면 돌이킬 수가 없잖아요.
설미:
왜 나한테 이런 얘길 해?
일순:
(설미를 향해 걸어오는 간호사1을 힐끗 보고)
누나 오늘 전기충격 치료받는 날이잖아.
간호사1:
(친절하게 생긋 웃으며 설미의 팔짱을 낀다)
설미님.
전기충격치료실 (낮)
전압게이지 눈금이 올라간다. 부르르 떠는 설미의 발.
식당 (저녁)
공손히 눈을 내리 깐 덕천과 불쾌한 표정의 수진, 식판을 들고 마주섰다. 경쾌한 걸음으로 뒤에 와 서는 일순, 다시 그 뒤로 은영 도착. 어디선가 스르륵 나타난 영군, 전혀 거리낌 없이 파고들어 일순 바로 뒤에 선다. 자리를 뺏긴 은영, 어이없어 한다. 뚫어져라 일순을 보는 영군, 일거수일투족을 관찰한다. 줄이 움직이기 시작하자, 뒤로 걷는 덕천.
덕천:
(아주머니1이 국그릇을 식판에 올려주자 정중하게 고개 숙여 인사하며)
……. 오늘도 고맙습니다.
일순:
(소리. 덕천을 주의 깊게 관찰하며)
그는 예의가 바르다.
덕천:
(아주머니2가 밥을 퍼주자)
이거 어떻게 감사해야 할지…….
식판을 들고 종종거리며 뒤로 걸어 식탁으로 가는 덕천.
일순:
(소리)
너무 겸손해서 차마 앞으로 걷지도 못한다.
궁중 예법이 그렇대나?
덕천, 얼른 식판을 테이블에 놓고 수진과 영군: 을 위해 의자를 빼준다. 맞은편 테이블에 앉는 일순. 왕성한 식욕으로 밥을 먹는 수진, 흘릴세라 소리가 날세라 조심하며 먹는 덕천. 쇼핑백에서 도시락통을 꺼내는 영군, 양 손 집개손가락으로 배터리를 집어 들고 눈을 감는다.
덕천:
매번 이렇게 밥을 안 드셔서…….
(눈을 뜨고 물끄러미 바라보는 영군에게 집요하게)
혹시 저 때문에……. 밥맛 떨어지신 건 아닌지…….
일순:
(소리)
뭐가 잘못되면 무조건 자기 탓이라고 생각한다.
수진:
그럴 만두 하지 뭐유…….
(영군의 만두 반찬을 집어먹으며)
어떻게 이런 걸 먹으라고 주는지…….
아, 입맛 없어…….
휴게실 (저녁)
대평과 준범의 탁구시합. 쉴 새 없이 제자리 뛰기 하면서 기합을 넣는 대평, 희한한 서브를 구사한다. 구경하는 일순, 소파 뒤에 숨어 일순을 관찰하는 영군. 일순, 갑자기 홱 돌아본다. 영군, 재빨리 딴청을 부린다. 잠깐 노려보다가 다시 탁구 구경으로 돌아가는 일순. 설미, 들어선다. 문 옆에 선 일순과 마주친다. 일순의 얼굴에 스치는 불안한 표정.
설미:
(반갑게)
오랜만이네요? 요새 통 안 보이더니…….
(이마의 일회용 반창고를 만지며)
다쳤어?
일순, 반창고를 떼어낸다. 상처가 없는 이마를 이상한 듯 보는 설미. 대평이 점수를 올린 듯 환호성을 올리는 환자들. 설미, 환자들 틈으로 들어가 탁구 경기를 구경한다. 서브를 넣으려다 일순과 눈이 마주치는 대평, 갑자기 오른쪽 엉덩이가 가려운 듯 움찔거린다. 탁구를 치면서 왼손으로 긁어보려 하지만 손이 닿지 않는다. 독려하는 환자들. 대평, 도저히 참지 못하고 탁구채를 내던진다. 놀라는 환자들. 문 밖으로 뛰쳐나가는 대평. 걱정스런 얼굴로 황급히 뒤로 걸어 따라나서는 덕천. 일어서서 따라가는 일순. 쇼핑백을 멘 영군, 소파 뒤에서 쓱 나와 일순을 따라간다.
화장실 (낮)
변기 위에 쭈그리고 앉아 바지를 내리는 대평, 엉덩이를 긁어댄다. 화장실 문을 노크하는 덕천.
덕천:
……. 계십니까?
대평:
(짜증을 내며)
뭐요!
덕천:
(문에 입을 대고)
혹시 저 때문에……. 지신 건 아닌지…….
화장실 밖에 서서 엿듣는 일순. 또 그 뒤에 서서 일순을 훔쳐보는 영군.
일순:
(소리)
……. 이런 식이다.
도로 - 덕천의 망상 (밤)
전복사고 현장. 피투성이가 되어 차에서 빠져나오려고 안간힘을 쓰는 운전자. 구해줄 생각은 않고 옆에 서서 명함을 나눠주고 연신 굽실대며 사과하는 덕천.
일순:
(소리)
우연히 교통사고 현장을 지나치던 덕천씨는 사고가 자기 탓이라고 확신했다.
피해자들에게 사과를 한다고 쫓아다니다
견디다 못한 피해자 가족의 신고에 의해 병원에 들어오게 되었다.
화장실 (낮)
라디에이터에 나란히 앉은 두 사람.
대평:
(짜증을 내며)
아, 글쎄 형씨 때문이 아니라……. 내 탁구……. 탁구가 안 되잖아요, 가려워서…….
덕천:
(뒤춤에서 조심스레 대평의 탁구채를 꺼내)
탁구란, 공을 주고받는 경기가 아닐까요?
일순:
(소리)
덕천씨는 또, 하나마나한 소리를 하는 데 선수다.
덕천:
(탁구채를 대평 손에 쥐어주며)
저는 아니라고 봅니다, 탁구라고 해서 꼭 공을 주고받아야 하는지…….
(탁구채로 찰싹 소리가 나게 뺨을 때리는 대평.
덕천, 뺨을 감싸 쥐고)
……. 역시 저 때문이었군요.
(잠시 말이 없다.
햇빛이 들어오는 창가, 지나가던 고양이가 열린 창을 들여다보며 야옹하며 운다.
창턱에 앉아 뒷발로 턱을 긁는 고양이.
뭉게뭉게 날리는 털을 역광으로 보면서 크게 한숨을 내쉬는 덕천)
고양이란 놈은 무엇보다도 털……. 짐승입니다.
홱 돌아보는 대평, 움찔 놀라는 덕천.
대평:
실은……. 저희 집사람도 털이…….
고양이, 덕천과 대평을 보며 야옹 울더니 아래로 털썩 뛰어내린다. 놀라 창가로 다가가는 두 사람.
화장실 바닥으로 풀쩍 뛰어내리는 고양이, 뛰어나간다. 넋 나간 모습의 대평, 따라간다.
계단 (낮)
계단을 뛰어 내려가는 고양이, 황급히 뒤쫓는 대평, 능숙하게 뒤로 내려가는 덕천, 사이를 두고 천천히 내려가는 일순, 쇼핑백을 메고 살금살금 내려가는 영군.
대평:
(소리)
마누라 털이 그렇다보니 제가 발기부전이 온 것은 당연하지 않습니까?
대평의 집 - 회상 (낮)
딸아이의 머리를 빗어주는 아름다운 손과 빗.
대평:
(소리)
……. 곧 사법부에서 연락이 옵니다.
집사람을 고소했거든요……. 털괴물이라는 사실을 속이고 결혼한 거니까요.
아이가 나가자 소매를 걷어 올리는 아내의 손, 무성한 털을 정성껏 빗는다.
계단 (낮)
힘없이 계단을 오르는 대평, 나란히 서서 뒤로 올라가는 덕천, 사이를 두고 올라가는 일순, 살금살금 쫓는 영군.
대평:
경찰관의 발기를 막는다는 건……. 공무집행방해에 해당합니다.
복도 (낮)
문득 돌아보는 일순, 미행자 영군을 발견한다. 당황하며 우왕좌왕하는 영군, 몸을 돌려 꺾어진 복도로 사라진다. 뚜벅뚜벅 걸어오는 일순. 숨을 데를 찾아 허둥대는 영군. 일순, 모퉁이를 돌아서자, 괘종시계 하단 캐비넷으로 반쯤 들어가고 있는 영군 보인다. 발소리가 멈추자 영군: 움직임도 멎는다. 아주 불편한 자세로 죽은 듯이 가만히 있는 하반신. 옆에 서서 내려다보는 일순, 침묵이 흐른다. 영군, 딸꾹질을 시작한다. 괘종시계의 초침 움직임에 맞춰, 딸꾹딸꾹.
영군:
(한참 만에, 동굴처럼 쩡쩡 울리는 소리로)
……. 그 설미 아줌마요…….
일순:
응.
영군:
진짜, 거짓말 너무 잘하잖아요.
일순:
응.
영군:
……. 그 전기충격치료요…….
(대꾸 없자)
……. 몇 볼트나 될래나?
일순:
(다시 돌아서, 가던 길 가며)
싸이코…….
영군:
(여전히 상반신을 시계 안에 넣은 채, 울리는 소리로)
싸이코가 아니라요, 싸이보근데요.
영군:
(소리)
아차, 말해버렸네!
여자 입원실 (밤)
모두 잠든 어두운 입원실. 틀니를 끼고 독서등을 향해 앉은 영군.
영군:
엄마랑 약속했는데…….
식당 - 회상 (밤)
쪼그려 앉아 돼지 부속을 다듬는 엄마, 창자에 당면을 채우는 아줌마 둘. 조용히 엄마 옆으로 다가가 앉는 영군.
영군:
(조심스럽게)
엄마, 나……. 싸이보근가 봐.
영군 엄마:
(천천히 몸을 일으키며 한참동안 영군을 뚫어지게 본 다음)
그게 뭔데?
영군:
글쎄……. 로보트 비슷한 건가…….
영군 엄마:
(주변을 살피더니 영군을 끌어 구석으로 데리고 가며)
……. 어디 몸 이상한데 있어, 싸이보라서?
(고개를 젓는 영군)
뭐 먹고 싶은 건 없고?
무라든가…….
(고개 젓는 영군을 빤히 보며 잠깐 생각하다)
그럼 됐어, 알았으니까……. 가서 자.
다른 사람들한텐 말하지 말고…….
(뭔가 할 말이 남은 듯 우물쭈물하는 영군의 어깨를 잡고 눈을 들여다보며)
걱정 마, 싸이보라두 괜찮아, 사는 데 지장 없어.
남들 모르게만 하면 돼…….
(돼지부속으로 돌아가는 엄마, 울상이 된 영군: )
엄마가 식당하는 데 딸이 싸이보라 그러면 누가 먹으러 오겠어?
여자 아나운서:
(소리)
……. 싸이보그여, 당신은 지금 할머니를 생각하나요?
여자 입원실 (밤)
씬43 연결. 라디오를 듣는 영군.
영군:
(조그맣게)
네.
여자 아나운서:
(소리)
설마 슬퍼하는 건 아니겠지요?
영군:
(황급히)
아니에요.
여자 아나운서:
(소리)
할머니도 싸이보그를 생각합니다.
그는 왜 아직 하얀맨들을 죽이지 않는가.할머니를 억지로 끌고 간 하얀맨들을 다 죽이고 틀니를 전해주러 오지 않는가.
영군:
저기……. 힘이 없어서요, 충전이 잘 안 돼 가지구.
여자 아나운서:
(소리)
동정심 때문이 아니길 바라겠어요.
동정심이 칠거지악 중 으뜸이라는 사실은 알고 있겠죠?
영군:
(손을 내저으며)
동정심은 아니에요, 절대.
여자 아나운서:
(소리)
참고로 나머지 여섯 가지는 다음과 같아요.
슬픔에 잠기는 것, 죄책감, 망설임, 쓸데없는 공상, 설레임, 감사하는 마음.
이상, 순서는 나쁜 순서대로였어요.
영군:
(한숨을 쉬며)
네에.
여자 아나운서:
(소리)
하얀맨에게도 할머니가 있지 않을까 하는 쓸데없는 공상,
하얀맨들이 죽으면 그 할머니들은 어떡하나 하는 동정심 때문에
차마 죽이지 못하고 망설여서는 안 되겠어요.
기계음으로 이루어진 클로징 음악 흐른다. 괴로운 듯 이상한 소리를 내며 베개에 몸을 던지는 영군.
남자 입원실 (밤)
6인실, 환자 넷은 잠들었고 침상 두 개가 비었다.
일순:
(소곤거리는 소리)
……. 가만있어 봐요.
화장실 (밤)
칸칸이 닫힌 문. 마지막 칸에 보이는 두 사람의 발.
일순:
(소리)
안 아파요.
칸막이 안. 초록색 물감을 칠하고 눈을 감은 덕천, 변기에 앉았다. 얼굴을 덮은 마분지. 움찔움찔하는 덕천.
일순:
(마분지에 손을 올려놓고 속삭이며)
……. 이제 다 됐어요, 내가 가져갈게요.
(마분지를 떼어내면 거기 선명히 새겨진 덕천의 얼굴 윤곽)
……. 딱 소리가 나면 다섯을 세고 물을 내리는 거예요.
(덕천의 어깨를 두드리며)
어렵지 않죠?
손가락을 퉁겨 딱 소리, 나가는 일순.
덕천:
하나……. 둘…….
복도 (밤)
가면을 쓰고 침착하게 뒤로 걸어 나오는 일순.
덕천:
(소리)
셋……. 넷……. 다섯…….
변기 물 내리는 소리, 졸다가 놀라 일어나는 영군. 뒤로 걸어서 지나가는 일순 보인다. 녹색 얼굴의 덕천, 화장실 밖으로 나와 아무 일 없는 듯 느릿느릿 앞으로 걸어간다. 숨어서 보던 영군, 입을 딱 벌리고 선다.
일순:
(소리)
안녕하세요?
복도 (낮)
가면을 쓰고 활기차게 뒤로 걷는 일순. 의아한 듯 걸음을 멈추고 돌아보는 환자와 의료진들.
일순:
(돌아보며)
좋은 아침이잖아요, 예?
(지나가던 환자와 부딪히자 냉큼 달라붙으며)
……. 어이구, 죄송합니다, 괜찮으세요……. ?
괜찮은 거 확실하세요? 정말?
덕천:
(소리)
……. 저에겐 꿈이 있었어요.
남자 입원실 (낮)
이불을 둘둘 말고 침대에 앉아 울먹이는 덕천. 간호사1, 물수건으로 얼굴을 닦아준다. 둘러싼 환자와 간호사들.
덕천:
폐 끼친 분들을 모두 찾아뵙고 보상을 하는 건데…….
사람은 누구나 폐를 끼치면 보상을 해야 돼요.
(간호사2, 휠체어를 밀고 입원실로 들어온다.
덕천, 가까스로 울음을 참으며)
근데 이제 인사를 몽땅 잃어버렸으니 제가 무슨 수로 사과를 하나요?
사람이라면 마땅히 사과를 해야 하잖아요?
보호사들, 덕천을 들어 휠체어에 앉힌다.
간호사1:
어디서 잃어버렸는지 기억 안 나세요?
덕천:
(고개를 마구 흔들며 오열)
당신들이 폐 끼친 기분을 알아?
……. 이 씨발년아!
자기가 말해놓고 놀라 손으로 입을 가리는 덕천.
슬기:
(소리)
일순님, 가면…….
그룹치료실 (낮)
‘마음의 선물’이라고 쓰인 칠판 앞에 놓인 카세트 레코더, 하프 선율의 몽환적 음악 흐른다. 가운을 입지 않은 슬기와 환자들 동그랗게 의자를 놓고 앉았다. 가면 벗는 일순. 휠체어에 앉은 덕천,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린다. 수간호사, 각자 앞에 놓인 잔에 차를 따라주고 환자들 사이에 앉는다.
슬기:
……. 저는 오늘 이 시간에, 신덕천님께 커다란 꽃다발을 드리고 싶어요.
덕천님이 비록 인사를 못 하시더라도
그 마음을 꽃 한 송이와 함께 전하실 수 있을 거예요.
(얼굴을 가린 손을 천천히 내리는 덕천, 얼굴에 기쁜 미소)
그리고 이대평님께는……. 좋은 안경을 드리고 싶어요.
대평:
왜요?
슬기:
지금 쓰고 계신 안경이 불편하시지 않을까…….
대평:
(화가 나 말을 제대로 하지 못하며)
그니까, 지금 저더러 안경이나 똑바로 쓰고 다니라?
슬기:
그게 아니고요…….
대평:
저는 고양이 받고 싶어요.
당황한 일동, 잠시 침묵.
수간호사:
아, 대평님은 고양이가 받고 싶으시군요.
대평님은 왜 고양이가 받고 싶으세요?
대평, 말하기 싫은 듯 엉덩이만 긁으며 조용하다.
슬기:
(고개를 끄덕이며)
오늘 차 모임 시간에는요,
주고 싶고 받고 싶은, 마음의 선물을 서로에게 드리도록 하겠어요.
여러분도 음악이 흐르는 동안
(손에 든 종이 상자를 들어올려 보이며)
여기 쪽지에 적힌 분에게 어떤 선물을 드리고 싶은지 생각해 보세요.
상자를 돌린다. 환자들, 하나씩 쪽지를 뽑아들고 생각에 잠긴다. 음악 볼륨을 높이는 슬기, 입가에 자애로운 미소.
잠시 후 -
몽환적인 하프 음악. 허리를 꼿꼿이 하고 앉은 채 자는 덕천, 거의 쓰러진 수진, 설미, 대평, 환청을 듣는 듯 혼잣말하는 은영과 황박사. 슬기 입가에 고정된 미소, 조금 굳어 보인다.
슬기:
오늘은 다들 피곤하신가 봐요…….
(자는 환자들을 깨우거나 주의를 집중시키는데 잠시 어려움을 겪는 의료진)
박일순님, 오늘 모두에게 인사도 잘 하시고 활기찬 모습 보기 좋았는데요.
누구한테 어떤 선물을 드리고 싶으세요?
일순:
(수줍은 듯 쪽지를 만지작거리며)
감사합니다……. 과찬의 말씀……. 과한 거는 부족한 것보다 못한 법인데…….
저는 할 수 있다면 여기 계신 분들 모두에게 선물을 드리고 싶네요.
사람은 누구나 선물을 드려야 되니까…….
수간호사:
쪽지에 적힌 분한테만 하시면 돼요.
일순:
그러니까 제가 차영군님에게 드리고 싶은 선물은…….
선물을 드릴라면 꼭 필요한 걸 드리는 편이 드리는 입장에서나 받는 입장에서나 다 좋으니까…….
제가 영군님한테 드리고 싶은 선물을 드리는 것보다
영군님이 받고 싶은 선물을 드리는 편이 좋겠지만…….
말이 길어지자 하품을 하거나 딴 짓을 하는 환자들. 시간 종료를 알리는 벨이 울린다. 일순, 입을 딱 벌린 채 멈춘다. 환자들 다 일어나 나간다.
화장실 (밤)
소변보는 일순, 추워서 살짝 진저리친다. 돌아서면, 구석에 웅크리고 앉아 조는 영군. 놀라는 일순.
일순:
으악!
영군:
(잠에서 깨어나 벌떡 일어서며)
선물 주세요!
일순:
밥을 안 먹으니까 아무 데서나 졸리잖아!
……. 뭐를 줘?!
영군:
(순간적으로 말문이 막혔다가 자신 없게)
……. 동정심?
일순:
(잠시 생각하다)
……. 없는데…….
영군:
저는 많아요!
(‘많으면서 왜……. ?’하는 표정을 짓는 일순)
훔쳐 주세요! 목요일처럼!
일순:
……. 뭔지를 알아야…….
영군:
동정심이란……. 음……. 죽여야 되는데 못 죽이는 맘인데요.
(못 알아듣는 일순)
자꾸 생각이 나는 거예요, 하얀맨들을 딱 죽였는데
하얀맨들한테도 할머니가 있으면 어떡하나……. 막 불쌍하고…….
일순:
(뒤로 걸어 영군의 옆에 가 서며)
아가씨……. 상대방한테 말을 할 땐 상대방이 알아듣게 말을 해야 돼요.
영군:
그니까 동정심은…….
(갑자기 눈물이 그렁그렁해지며)
큰이모하구 큰이모부는 정말 그러면 안 되는 거잖아요.
사람들이 왜 그렇게 동정심이 없어요!
자기가 쥐이고 싶어서 쥐인 사람이 어딨어요!
일순:
(버럭 고함)
큰이모 얘긴 하지두 마!
영군:
(훌쩍이며, 모기만한 소리로)
죄송해요.
일순:
그리구 뭘 훔쳐달라고 자꾸 부탁을 하면, 그게 훔치는 게 아니잖아.
주는 거 받아오는 거지!
영군:
그러면 어떻게 하지요?
일순:
(덕천 자세로 돌아와, 앞짐을 지고 뒤로 서성이며)
나란 사람은…….
다른 사람한테 뭘 훔치려고 할 때 그 사람 몰래 며칠이고 지켜봐야 되는 사람이에요.
그렇게 할 수 있겠어?
영군:
예.
일순:
지켜보면서…….
그 사람한테서 훔치고 싶은 뭔가를 발견해야 훔치고 싶은 마음, 즉 훔치심이 생기는 거지.
그런 사람이 될 수 있겠어요?
영군:
(기어들어가는 소리로)
노력하겠습니다…….
일순:
훔치심이 생겨서 훔치고자 할 때…….
그 사람이 싫어하는데도 훔쳐야만, 그 훔침이 완성되는 건데…….
그런 영군이 되어줄 수 있겠어요?
영군:
(두 손을 모아 간절하게)
꼭 싫어할게요……. 부탁드려요.
일순:
오케이.
빠르게 뒤로 걸어 순식간에 나가버리는 일순. 기겁해서 따라가는 영군.
화장실 앞 복도 (밤)
뒤로 걷는 일순을 따라가며 애원하는 영군.
영군:
안 훔치고 어디 가세요?
일순:
‘마음의 선물’이란 마음으로 줘야지 진짜로 주게 되면 마음의 선물이 아니에요.
나는 방금 영군님한테 내 마음의 ‘훔침’을 드렸습니다.
최슬기 선생님이 덕천님한테 마음의 꽃다발을 줬듯이.
받아주시는 거죠?
(실망해서 걸음을 멈추는 영군의 시야로, 빠른 속도로 멀어지는 일순의 앞모습.
이쪽저쪽으로 고개를 돌려 뒤로 걷는 자신의 모습을 확인하며)
앞으론 내 뒤를 따라다니기 힘들겠어요, 그죠?
음하하하 웃으며 멀어지는 일순.
들판 (새벽)
씬10 연결. 천둥소리에, 영군의 품에 파고드는 일순.
식당 (밤)
눈을 감은 채 건전지를 잡고 앉은 영군. 수진이 입맛을 쩝쩝 다시며 영군의 반찬을 집어 먹는다. 영군, 한쪽 눈을 반쯤 뜨고, 세 개 있던 튀각이 하나씩 사라지는 것을 아쉬운 듯 본다. 다시 눈을 감고, 튀각 씹는 아삭아삭 소리를 듣는 영군. 식당 입구에 등을 뒤로 한 채 숨어 고개를 넘겨 영군의 모습을 훔쳐보는 일순.
일순:
(소리)
그는 밥을 먹지 않는다.
3층 복도 - 스테이션 앞 (낮)
영군, 지나는 의료진을 향해 일일이 손을 내밀며 걷는다. 친절하게 웃으며 마주 손을 내미는 의료진들. 막상 악수하려고 하면 울상이 되어 재빨리 손을 빼는 영군. 문 열린 입원실을 재빨리 뒤로 뛰어 옮겨 다니며 영군을 좇는 일순.
일순:
(소리)
몹시도 악수를 하고 싶어 하다가 갑자기 하기 싫어한다.
(덩치 큰 남자 의사가 손을 덥석 잡아 마주 흔들자, 거칠게 손을 뿌리치는 영군,
화가 난 듯 얼굴이 빨개지며 가버린다. 이내 힘이 빠지는 듯 벽에 기대 주저앉는다.
바로 옆 입원실로 숨어드는 일순, 영군을 관찰한다. 기진맥진한 얼굴로 눈을 감는 영군)
악수가 그렇게 싫으면 손은 왜 내미는 걸까?
안 먹을 거면 왜 식당에 와서 꼭 밥을 타놓는 걸까?
살금살금 다가가는 일순, 손을 쓱 내밀어 영군의 가방에 넣는다.
3층 복도 - 자판기 앞 (밤)
대문 달린 성城 모양의 가면을 쓴 일순, 자판기 앞에 섰다. 사람들이 지나다닌다. 주변을 둘러보고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한 후, 자판기에 팔을 짚고 기댄다. 가면의 문틈으로 틀니 낀 입이 언뜻 보인다.
일순:
(헛기침 한 번 하고)
커피.
(잠시 기다렸다가 가면의 문을 열고)
……. 블랙.
반응 없다. 조용하다.
여자 입원실 (밤)
독서등 켜는 영군, 틀니 케이스를 연다, 비었다, 깜짝 놀라 쇼핑백을 뒤진다, 울음을 터뜨릴 듯한 얼굴로 뛰쳐나간다.
3층 복도 (밤)
뛰는 영군, 눈물 글썽이는 눈으로 이쪽저쪽을 둘러보고 잠깐씩 멈춰 서서 구석마다 살핀다.
영군:
(소리. 절박하게)
형광등아……. 자판기야……. 공중전화야……. 딸꾹 시계야…….
우리 할머니 틀니 못 봤니…….
화장실 (밤)
칸막이 안. 뒤로 돌려세운 덕천을 몸으로 벽에 밀어붙인 일순.
일순:
인사 가져가요, 아저씨.
(덕천의 등 뒤에서 뭔가를 돌리는 듯한 손놀림)
뒤로 걷는 거랑, 하나마나한 소리 하는 거, 다…….
덕천:
(저항하며)
아이, 왜에…….
일순:
(손놀림을 멈추고 짜증내며)
다른 사람이 뒤를 따라 올 수가 없잖아!
덕천:
(절규)
주지 마…….
나도 싫어!
등나무 정자 (낮)
둥글게 모여 앉은 슬기와 환자들. 영군, 혼자 훌쩍거리며 운다.
슬기:
은영님, 방금 너무 솔직한 말씀 잘 해 주셔서…….
지금 영군님도, 힘들었던 이별이 생각나셨나 봐요.
(간호사1, 옆에 앉아 달래주려고 하지만 영군, 손길을 뿌리치고 울음을 수습한다.
영군 의자 옆에 놓인 쇼핑백에 틀니를 몰래 넣어놓는 일순)
오늘 차모임 시간에는 ‘가장 힘들었던 이별’에 대해 얘기하고 있는데요…….
(삐딱하게 앉은 덕천을 발견하고)
이번에는 덕천님, 말씀해주시겠어요? 자…….
(약간 톤을 높여, 노래하듯)
‘내가 가장 힘들었던 이별은?’
기대에 찬 똘망똘망한 눈길로 덕천을 주목하는 슬기. 모두들 덕천을 돌아본다.
덕천:
(노래하듯)
‘내가 가장 힘들었던 이별은’ ……. 니미 뽕!
일순:
(좌중이 조용해진 가운데 손을 들고 붙임성 있게 나서며)
제가 할까요, 선생님?
슬기:
(건성으로)
‘내가 가장 힘들었던 이별은?’
일순:
‘내가 가장 힘들었던 이별은’…….
(모두의 시선을 의식하며)
열다섯 살 때 어머니가 집을 나가시면서…….
화장실에 있던 전동칫솔 가족 세트를 다 가지고 가버린 것입니다.
그 후로 전 도둑이 된 것입니다.
단호하게 입을 다무는 일순. 슬기와 환자들, 어리둥절해진다. 이글이글 불타오르는 눈으로 일순을 노려보는 영군.
영군:
이……. 도둑놈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