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을 잡아 주세요 거친 할머니의 손
김광한
사람을 사귐에 있어 처음 상대했을 때는 그 향동거지에서 무척 크고 위대하게보이다가 점차 만남의 빈도가 잦을수록 점점 작아지는 사람이 있습니다. 심각하게 인생을 논하고 휴매니즘과 원대한 세계관을 침을 튀기며 이야기하면서 자신의 가치를 상대에게 돋보이게 하는 사람일수록 몇 번 만나다보면 가장 속물이고 별것 아닌 속물적 인생인 사람이 우리 주위에는 널려 있습니다.. 마치 스스로가 박애주의(博愛主義)자이면서 굉장한 자선가인 것처럼 행세하지만 그 행실을 여러 번 대하다 보면 여간 쩨쩨하고 역겨운 것이 아니라서 금세 실망이 드는 사람, 이 들을 우리는 속물(俗物)이라고 하지요.
그러나 처음에는 그 외양이 꾀죄죄하고 별것 아닌 것 같지만 사귈수록 그 인물이 커져서 마치 눈사람처럼 되는 사람이 있습니다. 우리 짧은 인생 가운데 이런 분들을 많이 접하는 것이 행복이 아닐까요? 영등포역전, 윤락(淪落)가 골목 앞에 요셉의원이란 병원이 있습니다.여기서 한때 자원봉사를 한적이 있습니다.그때 알던 분들의 이야기입니다. 이미 오래 전에 선종했지만 이 병원의 원장(院長) 선우경식 의사가 바로 후자에 속하는 사람인 것 같아서 소개를 할까 합니다. 그 의사는 가톨릭의대를 나와서 내과전문의로서 공중보건의사로 있게 되면 괜찮은 삶<경제적으로>을 영위할 것이 분명한데도 그 동네의 소외된 사람들, 윤락녀, 알코올 중독자들의 갱생을 위해 헌신하고 있는 슈바이처 같은 사람입니다. 이분은 요셉 회를 만들어 거친 환경 속에서 스러져 가는 불쌍한 인생들의 사람다운 삶을 위해 자신의 안락한 삶을 거의 포기하면서 성자(聖者)처럼 살다 갔는데 ,여기에 모인 분들 역시 한결같이 큰 사람들이었습니다.
먼저 이탈리아에서 오신 ‘칼라’수녀님, 이분은 59년 전 이탈리아 ‘아시시’,프란치스코 성인(聖人)의 고향에서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나 .뜻한바있어 수도자의 길을 걷고 있는 분인데 선교지로 한국을 택해 학을 고향처럼 여기며 주로 윤락가의 윤락녀들이나 부랑인(浮浪人)들을 아들딸처럼 입양하여 살아오신 분입니다. 그분은 자신의 신앙을 누구에게 강요한 적이 없으며 우선 병든 몸을 고쳐 주고 나서 사람다운 생활을 하게끔 만들어 주고 있습니다. 그분에게 가진 것이라곤 몇 십 년 째 들고 다니는 커다란 낡은 가방과 싸구려 운동화 ,그리고 수도복 한 벌이 모두이지만 복부인(福婦人)이나 유한마담들이 입고 걸치고, 차고 다니는 밍크 오버, 몇 천만 원짜리 시계, 목걸이 등보다 더 값지고 위대하게 보이는 것은 그분이 갖고 있는 사랑의 함량이 아닐까요. 나이 육십도 안돼 얼굴에 주름살이 가득한 칼라 수녀님의 모습은 그 어떤 미인보다도 예쁘게 보이는 것은 그 얼굴이 하느님이 가장 좋아 하시는 얼굴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대체로 사람의 얼굴이란 자신이 생각하는 얼굴과 남이 보는 얼굴, 거울이나 사진에 박힌 얼굴이 있는데 그 가운데서 자신이 생각하는 얼굴에 가장 많은 점수를 주지요. 그러나 가장 올바른 점수는 하느님이 매기시는 점수가 아닐까요. 또 한분, 신야고보<세례명>라는 사람, 역시 의사분이신데 이 분은 가톨릭 수사(修士)입니다. 역시 의과대학을 나와 공중 보건의사나 대학병원이라도 취직을 했더라면 가문 좋은 처녀와 결혼을 해서 그 일생이 우환만 없다면 탄탄 대로였을 텐데 안타깝게도 충북 음성의 꽃동네 창립자인 오 웅진 신부 밑에서 몇 년간 봉사를 하다가 아예 눌러 앉아 버렸죠. 자신이 소유한 좋은 의술(醫術)을 소외되고 아무도 찾아주지 않는 버림받은 생명을 위해 사용하는 것이 하느님이 좋아하실 것 같아 그렇게 한 것입니다. 물론 우리 같은 속물들은 바보 머저리라고 할런지 알 수 없지만 때로는 이 세상은 약삭빠르고 영악한 사람들보다 바보나 머저리 같은 순수한 사람들의 손에 이끌려 가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분은 종신(終身)서원을 하고나서 10여 년간 꽃동네에서 죽어간 5천여구의 시신(屍身)을, 사망진단서는 물론 염과 매장까지 손수 했는데 그분의 이야기는 가히 ‘소설깜’이 아닐 수 없습니다. 불량배(不良輩)들이 회칼을 들고 설쳐대는 우리네 영화를 보고서 마치 그자들이 이 시대의 영웅 것처럼 착각을 하게 만들고 돈을 버는 우리 사회에서 이분들은 진정한 영웅이 아닐 수 없습니다. 도움을 청해도 손 한번 잡아주지 않고 그냥 지나치는, 깨끗한 손을 가진 사람들, 그 사회가 얼마나 찬바람이 돌고 인정머리 없는 세상이란 것은 절망과 실의에 빠져본 사람만이 알 것입니다.
성서(聖書)에서도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어떤 사람이 강도를 당해 의식이 혼미한 상태인 것을 보고도 레위 사람도, 바리사이파 사람도 그리고 랍비라고 일컫는 지식인도 그대로 지나쳤습니다. 이 때 유대 사람들에게 경멸과 멸시를 당하던 별 볼일 없었던 사마리아 사람이 그를 불쌍히 여겨 당나귀에 싣고가 여관 주인에게 치료를 맡기는 이야기를 잘 아실 것입니다. 그 사마리아 사람은 보나마나 그리 큰돈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의 마음속에는 착하고 선한 양심이 가득 차 있었기 때문에 강도당한 사람을 그대로 죽게 할 수가 없었던 것이겠지요. 요즈음도 그런 것 같습니다. 당대(當代)뿐만 아니라 자손 대대로 먹고살아도 남을 감당할 수도 없는 재산을 갖고 있어도 남들에게는 동전 한 닢 베풀지 못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 가요. 우리 사회의 지도자로 자처하지 만 이런 사람들이 과연 이 시대를 선도해 날 수가 있겠습니까? 종교 이야기를 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오래 전에 제가 사는 동네 산꼭대기에 ‘두엄자리’라는 의탁할 곳 없는 할머니들의 집이 있습니다.
이 할머니들은 가정에서 소외되어 갈 곳 없다가 누군가에 의해 버려져 이곳까지 왔는데 이 할머니들에겐 이 집이 임종의 장소이며 삶의 마지막 사람다운 대접을 받는 천국이 아닐 수 없습니다.주로 자식들에게 몰래 버려자 수용된 할머니들이지요 함부로 똥을 싸고 아무런 말을 해도 누구도 구박을 하지 않으니까요. 이 할머니들이 이곳에서 한달 걸러 한번씩 세상을 떠나는데 그동안 봉사자의 손을 잡고 인근 성당을 나갑니다. 신앙이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성당에라도 나가면 죽어서 천당 가는 데 그만일 것이라는 단순한 마음 때문이겠지요. 할머니들은 잠도 없어서 새벽 여섯시 미사에 꼬박 참례를 하는데 언제나 맨 앞줄에 앉아. 계시지요. 성체(聖體)를 영(令)할 때 지나가다가 이 할머니들의 손을 살그머니 잡아주면 화들짝 놀라 할머니의 또 다른 손이 덮치지요. 아마도 할머니들은 그 손이 수녀님이나 그 이외에 어떤 분, 때로는 하느님의 손인 줄 착각을 하는 듯 그렇게 좋아 할 수가 없습니다. 이 세상에 누군가 자신을 위해 아는 체를 한다는 것이 할머니 들에겐 눈물겹도록 고마운 일이 아닐 수 없기 때문이지요.저는 가끔 그 할머니들의 거칠고 예쁘지 않은 손들을 몰래 잡아 드렸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새벽이었습니다. 제가 손을 잡아준 바 있는 그 할머니가 그 손에 빨간 비단 헝겊을 감고 나와서 앉아 계셨습니다. 왜? 저는 곰곰이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러자 생각나는 것이 있었습니다. 옛날에는 임금님이 과거에 급제한 선비들의 손을 잡아주면 그 선비는 가문의 영광이라면서 얼마동안 비단헝겊으로 그 손을 싸매고 다녔다고 합니다. 그래서 옛날 무덤을 어쩌다 파헤쳐보면 시신(屍身)은 간 데 없어도 그 비단 헝겊은 썩지 않고 남아 있다고 합니다. 2백여 년 전에 순교(殉敎)한 백서(帛書)의 주인공인 황사영의 묘지(墓地)를 절개(切開)했을 때 붉은 비단 헝겊이 나왔다고 합니다. 그 할머니는 제가 잡아준 그 손이 마치 하느님이나 그 외에 어떤 높은 분이 자신의 손을 잡아준 것으로 알았던 것입니다. 그 할머니를 본의 아니게 속인 것은 죄스럽지만 그 할머니에게 어떤 미래에 대한 희망을 준 것 같아서 기분은 그리 나쁘지 않았습니다.
주름살투성이의 손, 함부로 굴러다니는 막대기처럼 쭈글쭈글한 그 손, 젊고 포동포동한 손이라면 누구라도 만져보고 싶겠지만, 얼마 안 있으면 염습을 할 그 손을 잡아 주는 사람은 하느님 이외에는 없다고 생각하겠지요. 예쁘고 잘생긴 손보다도 못생기고 사연 많은 고목(枯木) 등걸 같은 손을 잡아보십시오. 그리하면 당신도 이 다음, 누군가가 절망과 실의에 빠져 있을 당신의 그 늙은 손을 잡아 줄 것입니다. 가진 자, 권력 있는 자에게 아는체하는 것보다 병들어 늙고 가진 것이 없는 자에게 손을 내미는 것을 하느님은 좋아하시기 때문입니다. ‘너희들 가운데 가장 보잘 것 없는 자에게 해준 것이 곧 나에게 해준 것이다.’ 란 성서 구절이 있습니다. 오늘의 나의 유복(裕福)이 영원하지 않을 것이고 ,내일의 불행 앞에 잡아 줄 수 있는 손, 그 손을 당신이 먼저 내밀어 보십시오. 그리하면 누군가가 당신이 미천하게 됐을 때에 당신의 손을 분명히 잡아 줄 것입니다. |
첫댓글 손을 잡아주세요
글을 읽으며 갑자기 가슴이 뜨거워집니다
이 귀한 작품을 많은 분들이 읽으셔야 한다고
책임감을 느낍니다.
어잿밤 꿈 속에서 곤고한 일을 당할 때
손을 잡아주지 않아
어둠에서 헤매었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오늘 선생님의 글을 읽으면서
느끼는 점이 너무나 큽니다
선생님의 글을 존경합니다
그 할머니에게는 선생님의 그 손이 하느님의 손이었을 겁니다.
가슴이 울컥 하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