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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 1862년 9월 22일, 미국의 노예제도를 두고 벌어진 남북전쟁은 최악의 유혈사태를 낳고 있었다. 그때 미국 제16대 대통령 에이브러햄 링컨이 중대한 발표를 한다. ---1863년 1월 1일을 기해 모든 노예가 영원히 해방 되었음을 선언하는 바이다.---
On January 1, 1863, all slaves were declared liberated forever.
해설: 미국 역사의 운명이 걸린 결정적 순간이었다.
최원정/KBS 아나운서: 347번째 역사저널 그날 세계사를 바꾼 승부, 오늘 마지막 시간입니다. 그런데, 아까 전 세계 대통령 중에서 가장 유명한 사람을 꼽는다 한다면 글쎄 링컨을 꼽지 않을까 싶어요.
최태성/한국사 강사: 위인전을 읽을 때는 링컨 전기부터 일기 시작하지 않나요? 그랬던 기억이 나요.
이시원/배우: 저도 초등학교 때 위인전 읽었을 때 딱 지금 기억나는 건 3가지, 키가 컸다 (193미터), 두번째는 실패 탈락 낙선 흙수저로 태어나서 진짜 고생을 많이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예해방을 일궈낸 대통령~
김지윤/정치학 박사: 그래서 제가 오늘 모시고 왔어요.
일동: (깜짝 놀라며) 모시고 왔다가요?
김지윤: (5달러 지폐의 주인공 링컨), 여기~ 우리가 화폐에 누구의 얼굴을 넣느냐는 게 중요한 거거든요. 그만큼 여기에 들어가는 사람은 그 나라의 역사에서 기억이 될만한 사람이다 라고 볼 수가 있죠. 그렇기 때문에 링컨도 5달러 지폐에 들어가 있고 뒤쪽에 보면 워싱턴 DC를 방문하여 보면, 링컨 기념관이 있습니다. 가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이게 굉장히 커요.
최태성: 엄청커요. 사진으로는 크다는 걸 못 느껴요.
김지윤: 5미터 높이를 가지고 있고 뒤에 글귀를 보면, “미국을 구원한 에이브러햄 링컨에 대한 기억이 영원히 간직될 것이다” In this temple as in the hearts of the people for whom he saved the union the memory of Abraham Lincoln is enshrined forever. 라고 새겨져 있습니다.
최원정: 그만큼 유명한 오늘의 주인공, 이 분에 대해 자세히 설명해 주시기 위해 나오신 분입니다. 건양대의 김형곤 교수님, 안녕하세요.
김형곤/건양대학교 브리꼴레르 학부 교수: (흰색 와이셔츠에 나비 넥타이~검은색 상의) 제가 복장을 갖춰 입고 나왔는데~
최태성: 링컨 복장인가요?
김형곤: 네, 그렇습니다. 연미복을 입어야 되는데 준비가 안되었습니다. 미국에는 링컨이라는 이름이 도로나 산 건물 기타 도시만 하더라도 스무 개가 넘는 이름을 써요, 같은 이름이지만~ 그래서 주소를 잘 써야 돼요. 이게 미국에서 하나의 역사고 문화입니다. 오늘 주제가 되는 링컨의 노예해방, 이걸 통해서 미국이 두 개 이상의 나라로 쪼개질 수 있는 것을 막았던 거죠. 오늘날 우리 인간들이 추구하는 민주주의나 자유나 상징이 되어있는 거죠.
김지윤: 제가 질문 하나 드릴게요. 우리가 United States of America 할 때 다음에 is (단수명사) 일까요 아니면 are (복수명사) 일까요?
이시원: is요.
최원정: states 가 여러 개 이니까 are?
이시원: 하나 라는 의미를 강조하기 위해서 웬지 is 라고 할 것 같애요.
김지윤: 그렇죠, 조사를 해봤는데 건국 초기에는 복수가 쓰였어요 are, 그러다가 남북전쟁이 일어나고 1860년대 이후로는 are 를 쓰는 비율이 점점 줄어들고 이제는 is로 씁니다.
최태성: 이것도 역사랑 연결되네~
김형곤: 하나의 나라라는 거죠.
김지윤: 건국은 예전에 건국의 아버지들이 했지만 미국이란 나라가 정말로 건국이 된 것은 남북전쟁 이후다라고 인식하고 있습니다.
허준/방송인: (미국 남북전쟁은) 내전인 거죠. 인류 역사상 전쟁 중에 가장 끔찍한 건 내전들이 대부분이거든요. 그만큼 전쟁이 시작되는 이유가 이념이나 종교나 뚜렷한 이유가 아니면 내전은 잘 안 일어나는데 흑인노예 해방 같은 내전이 일어난 것에 의문이 드네요.
김형곤: 그거는 우리가 지금은 미국이라는 나라를 하나로 보지만은 당시 남부하고 북부하고의 차이는 독립할 때부터 완전히 달랐습니다. 남부 같은 경우는 산업혁명 이전에는 농업경제, 특히 처음에는 담배였다가 그 다음에는 밀이었다가 산업혁명이 일어나면서 목화, 면화로 바뀝니다. 그래서 남부에는 너무 덥고 습하기 때문에 백인들은 현장에 나가서 일하기를 싫어하죠. 그래서 흑인노동의 필요성을 크게 느끼고, 북부는 제조업이 중심이고 남부는 농업적으로 발전한 차이가 있는 거죠.
최원정: 목화 농장에 노동력이 많이 필요했나 보죠.
최태성: 그렇죠, 지금 말씀하신대로 남부 쪽에서 집단적으로 많이 생산한 게 목화거든요. 이 목화를 제가 좀 보여 드릴게요. 먹으면 안 됩니다. (패널들에게 하얀 솜털 목화를 한 개씩 줌),
김형곤: 어렸을 적에는 이걸 많이 먹었습니다. 이게 솜이 되기 전에는 달고 부드러워요 (목화다래-아직 피지 않은 목화의 열매, 육질이 부드럽고 수분이 많으며 달콤한 맛이 남),
최원정: 교수님, 혹시 몇 년생이신지 목화를 먹었다고요?
김형곤: 목화를 먹을 만큼 나이를 먹었습니다.
최태성: 어쨌던 간에 이 목화 재배를 하는 데는 어마어마한 노동력이 들어가구요. 더 중요한 건 목화는 기후에 예민해요. 우리나라 목화, 목화하면 문익점이 떠오르지 않습니까. 문익점도 목화씨 가져와서 재배하는 데 실패하고 단 한 개만 재배하는데 성공했지 않습니까.
김형곤: 문익점은 인류 최초의 산업 스파이예요.
최태성: 게다가 더 어려운 건 목화에서 실을 추출하려면 안에 있는 씨앗을 제거해야 되는데 자~ 씨앗 한번 빼 보세요.
일동: 쉽게 빠지지 않는 목화씨
최원정: 쏙~쏙~ 빠져야 재밋는데 안 빠져~
김형곤: 씨도 많아요.
최태성: 농부들이 이걸 한 번 재배를 할 때 1인당 130킬로그램 목화를 벨 수가 있어요. 그런데 중요한 건 여기서 씨를 빼야 되는데 너무 힘들잖아요. 지금 빼 보셔서 알겠지만~ 그래서 대개 한 사람이 씨 제거 작업량이 하루에 0.5~0.8 킬로그램 밖에는 안되는 거예요.
허준: 130 킬로그램을 베는데~
최태성: 그렇죠, 엄청나게 힘이 들어가니까 쉽지 않아요. 1793년도에 미국의 면화 생산량이 전 세계의 1%도 채 안돼요.
이시원: 진짜 어려워요. 지금 제가 면화 하나 빼서 씨 한 토막이라도 분리해 볼려고 하거든요 (4분의 1), 근데 말씀 다 하시는 동안 2분 동안 겨우 4개 뺐어요.
최태성: 이 엄청난 시간을 획기적으로 바꿔줄 발명품이 발명됩니다.
해설: 1793년 미국의 발명가 일라이 휘트니가 목화의 씨앗을 분리하는 조면기를 발명합니다. 조면기는 면화 선별작업에 필요한 노동력을 50분의 1로 줄이며 미국 면화산업의 혁신을 가져왔다.
이시원: 역시 발명은 인간을 풍요롭게 해요.
최원정: 노동의 자유로움이 있고 그만큼 노예의 필요성도 낮아졌겠네요.
김형곤: 그렇지 않습니다. 당시 미국의 남부에 조면기가 발명되기 전에는 흑인 인구가 한 50만 정도도 안됐습니다. 그런데 1860년 경에는 무려 400만 명으로 늘어납니다.
이시원: 사람들이 하던 걸 조면기가 대신 하면 아까 50분의 1의 노동력이 든다고 했잖아요. 그러면 노예도 50분의 1로 줄어 들어야 되는게 아닌가요?
최태성: 그건 노예들 입장이고~ 역으로 얘기하면 농장주 입장에서 보면 조면기가 나옴으로써 한 명이 50배의 일을 할 수 있는 거예요. 옛날에는 수확을 해봐야 의미가 없는 거예요. 씨를 분리를 못해 내니까~ 조면기가 발명이 되면서 농장주 입장에서 이제는 수확을 많이 하면 할수록 돈이 늘어나는 거죠. 그러니까 당연히 노예의 수를 더 늘리는 수 밖에 없는 거죠. 아까 제가 1793년도에 미국의 면화 생산량이 전 세계 1%도 안 된다고 했잖아요. 그런데 이제 1860년이 되면은 전 세계 면화 생산량의 70%를 차지합니다.
김형곤: 생산되는 면화가 유럽으로 다 수출이 됩니다. 그러면 그게 돈으로 오거나 유럽 제조업의 상품들이 유입이 되는 거죠.
김지윤: 더 많은 수입을 얻을려면 더 많은 노예를 투입을 해야되고 그러니까 이제는 노예가 더 필요하게 된 거죠. 그런데 이렇게 말하기는 뭐 하지만 값이 올라가요. 1790년대 같았으면 약 3백 달러에 거래되었는데 이게 1860년대 가까이 되면은 엄청 비싸져요. 약 2천 달러로~
이시원: 조면기 발명되었다고 팔자 피나 했는데 오히려 더 힘들어졌네요.
최태성: 노예들 값이 높아진다는 게 내 자산 가치가 높아지는 거잖아요. 농장주들이 부자가 되어 가고 있는데 남부 농장주들이 흑인 노예들을 어떻게 착취하면서 부를 늘였는지 보여주는 영화 다들 아시죠.
해설: 미국 남부 조지아주 타라 농장주의 딸 스칼렛은 풍요로운 삶을 살고 있었다.
비비안리/스칼렛 오하라役: (기둥을 붙들고) 우~
유모: 숨을 들이마시고 가만히 있어요.
하녀: 유모! 여기 아가씨 식사 있어요.
스칼렛: 부엌에 놔 둬, 한 입도 안 먹을 거야
유모: 아니에요! 한 입 한 입 다 드셔야 해요.
스칼렛: 싫어!
해설: 고된 노동은 물론 화려한 생활을 유지하는 모든 과정을 흑인 노예에게 의탁했던 남부의 농장주들~ 그들에게 흑인 노예는 화수분과 같았다.
이시원: 이거 항상 비비안 리 입장에서 영화를 봤거든요. 이거 색 달라요. 근데 오늘 얘기하면서 보니까 흑인 여자 애가 부채질하고 있고 어린 여자 애가 서빙하고 있고~그러네요.
최원정: 저 장면만 보고 여자 주인공이 너무 철 없어 보이지 않아요.
이시원: 아름다운 세상이라고 말하는 데 저게 말이 돼요.
최태성: 현재 우리 시각으로 보면 불편해요, 어쨌거나 스칼렛이 그 당시 여성들은 허리 띠를 졸라맬수록 예뻐 보인다. 그 당시에는 그런 측면에서 졸라 맷겠지만 거기에서 유모 마미, 마미 입장에서는 사실은 생존을 위해서 졸라 매는 그런 다른 모습이거든요.
최원정: 영화 자체는 후반부에 가면 시대상이나 전쟁의 참혹함 이런 걸 잘 표현하고 있지만 (영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1939년 作-남북전쟁 당시를 배경으로 남부 농장주들의 삶-전쟁의 참혹함을 표현), 지금 저기는 굉장히 럭셔리한 삶을 비춰주고 있어요. 실제로 남부 농장주들이 저렇게 잘 살고 부자였나요?
김형곤: 물론 차이는 있었겠지만 경우에 따라서 당시 남부 면화지역에 기본소득이 재산액이 얼마냐 하면 약 1만 3천 달러, 지금으로 말하면 엄청나겠죠. 그런데 그걸 대비해 주는 게 당시 노동자들의 평균 재산이 100달러가 안 됩니다. 그러니까 그 차이라는 것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당시 대부분의 남부 도시들은 잘 사는 지역이었조.
김지윤: 특이나 미시시피 같은 곳은 미국의 전체 주에서 가장 못 사는 주 중에 하나였어요. 특히 남부의 텍사스라 부르는 이런 곳 그쪽들은 경제발전도 잘 안됐고 낙후됐고 못 살았죠. 그 당시 1850년대 이 때쯤에는 정말 잘 살았어요. 재산은 미국내 경제력이 5위 안에 들어가는 그래서 지금 나체즈(Natchez) 라는 도시가 있는데 거기에 많은 부자들이 살고 있었고 우리가 그 사람들이 사는 대저택, 맨션 이라고 하는데 지금도 가면 으리으리 하고 멋있고 그땐 정말 잘 살았죠.
이시원: 그런데 그 부가 어떻게 보면 거기에서 도와주던 흑인 노예들 때문에 된 것이잖아요.
최원정: 흑인 노예들을 착취하면서 떵떵 거리고 살았던 건데 그렇다면 노예들은 과연 어떤 대우를 받고 있었을까요?
해설: 노예 시장이 커지면서 수백만 명의 노예들이 경매를 통해 팔려 나간다. 구매자들은 아이를많이 낳을 수 있는 노예를 원했고 젊은 여성이 가장 비싼 가격에 거래되었다. 아이가 있는 여성들은 아이도 함께 사 달라고 구매자에게 애원해야 했다.
--------------이광용/아나운서: 노예로 팔려가면 얼마나 힘든 상황이 펼쳐질지 알면서도 제발 내 아이를 함께 사 달라는 엄마의 애원과 절규, 정말 비참하죠. 그 당시 미국 남부 신문에 지금 여러분들이 보시는 것처럼 흑인 남성은 물론이고 여성과 아이들까지 판다는 광고가 자주 등장하곤 했습니다. 백인 농장주들은 흑인들이 연대할 것을 두려워 해서 걱정해서 흑인 노예가 가족을 이루었을 경우에는 일부러 가족을 분리해서 따로 따로 떨어뜨려서 다른 농장주들에게 팔곤했다는 겁니다. 그렇게 팔려간 흑인 노예들은 하루에 개인당 130 킬로그램 정도의 목화를 따야만 했는데요.만약 할당량을 채우지 못하거나 잠시 한 숨을 돌리거나 하면 매서운 채찍질을 당해야만 했습니다.
이시원: 이건 그냥 고문이잖아요. (무자비한 채찍으로 등에 뱀 같은 울퉁불퉁한 남자노예),
최태성: 사람이 아닌 가축 취급이잖아요.
이광용: 사진 한 장이 많은 것을 얘기해 주지 않습니까. 사랑하는 가족과 헤어져야 하는 고통은 물론이고 조금 전에 보시는 것처럼 신체적 학대를 견뎌야 했던 노예들 어떤 선택을 했을까요, 도망을 선택합니다. 죽도록 일하다가 맞아 죽으나 도망가다 잡혀 죽으나 마찬가지라는 생각을 했던 거죠. 하지만 도망을 가다가 잡혀온 노예들에게는 더 가혹한 폭력은 물론이고 강력한 올가미까지 채워졌습니다. 그 올가미를 제가 준비했습니다.
최원정: 사진으로도 너무 끔찍한데~
이광용: 농장주들은 노예들이 도망가지 못 하도록 목에 방울 올가미를 채웠습니다.
최원정: 방울은 왜 채웠을까요?
이광용: 일단 제가 완전히 채우지는 안 했는데 무겁고요. 답답합니다. 그리고 방울은 왜 달았냐. 도망갈려면 뛰어야 하잖아요. 이 소리로 노예가 도망간다는 걸 인지하게 되는 거죠.
허준: 목의 방울은 가축들한테나 다는 거예요.
이시원: 저기 사진을 보면 발에 또 쇠사슬에 묶여있어요. 한쪽 다리를 못 뛰겠끔 고정시켜놓았네요. 허벅지까지
이광용: 이렇게 농장주들이 노예들이 도망가지 못하도록 여러가지 장치들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도망치는 노예들이 속출합니다. 그러자 1850년 도망노예법이 강화됩니다. 이게 뭐냐하면 도망가는 노예를 도와주는 사람에 대한 처벌을 강화하는 것입니다. 실제로 도망 노예를 잡는 추노꾼이 이 당시에 엄청나게 많았거든요. 그런데 이 사람들이 노예를 잡은게 아니라 북부에 살고 있는 평범한 흑인을 잡아와서 노예라고 우기는 거예요.
김형곤: 해방된 노예를~
이광용: 그렇게 복부의 해방된 흑인들을 노예로 잡아와서 남부로 넘기는 그런 역할도 했구요.
최태성: 인신매매 수준이네요.
이광용: 그렇죠, 그리고 이렇게 잡혀온 노예 흑인들의 운명을 결정하는 건 행정관들의 몫이었는데요. 이게 진짜 웃깁니다. 행정관들이 농장주들에게 유리한 판결을 하고 10달러를 받고요. 노예들에게 유리한 판결을 하면 5달러를 받아요.
최태성: 당연히 10 달러 가야지
이시원: 양심 값이 5달러인 거예요.
이광용: 지금 생각하면 정말 말이 안 되는 일이 170년 전 미국 땅에서는 버젓이 있었던 겁니다.
최태성: 미국이라는 나라가 저런 나라였습니까?
김형곤: 그런 나라를 끝내신 분이 오늘 우리가 하고 있는 링컨 대통령이십니다.
이광용: 당시 흑인들은 이렇게 변론할 기회도 제대로 얻지 못한 채 지옥과도 같은 남부의 농장으로 되돌아가야만 했습니다.
최원정: 아니 판결을 어떻게 돈으로 살 수 있나요? 흑인은 인권이라고는 없는 소유물이라는 인식이 뿌리 깊게 박혀 있는 것 같애요.
최태성: 이때 이제 많은 사람들에게 야 이 흑인 노예들도 심각한 문제가 있는게 아냐 하는 인식을 일깨워준 명작이 탄생합니다. 아마 어렸을 때 한번 읽어 보셨을텐데~ 톰 아저씨의 오두막 Uncle Tom’s Cabin by Harriot Beecher Stowe, (톰 아지씨의 오두막-미국 작가 해리엇 비처 스토가 1852년 발표한 소설 흑인 노예의 비참한 실상을 사실적으로 묘사),
허준: 저는 솔직히 톰 소여의 모험 말고는 잘 몰라요.
최원정: 톰 소여의 모험과는 다른 거죠.
이시원: 되게 가혹하게 노동을 하고 거기다가 어떤 하녀였나 흑인 여자 노예가 자기 딸 애한테 이 비참한 삶을 딸에게 물려줄 수 없다면서 독약을 먹여서 죽이는~
김형곤: 그런 장면도 나와요.
김지윤: 사건이 비슷한게 있었어요.
이시원: 실제 상황이~
김지윤: 그때는 독약이 아니라 칼로 죽였어요.
최원정: 아까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는 청년들의 모습이라면 여기는 노예들의 입장에서 소설을 쓴 거죠.
최태성: 이 책이 출간 당시에 미국과 유럽에서 300만 부 이상 판매가 되었어요. 성경책 다음으로 팔렸다고 그러고요. 어마 어마한 영향력을 갖게 되는데 여기에 나오는 모습들을 보면 너무 착한 흑인 노예가 완전 포악한 백인 주인, 두 캐릭터가 선명하게 대비되면서 흑인이 이런 식이었어 라고 알려지게 되면서 심지어 이런 얘기가 나와요. 우리 오늘 이야기할 남북전쟁은 바로 이 소설책 때문이다. 그런 말이 나올 정도로 영향력이 엄청컸습니다.
김형곤: 링컨이 전쟁이 한창일 때 노예해방 선언을 하고 나서 1863년에 스토 부인을 만납니다. 직접 만나요. 그러면서 당신이 이 큰 전쟁을 일으킨 작은 부인이시죠. 이러면서 포옹을 했다고 그래요.
김지윤: 남부에서도 맞대응 하는 소설이 나와요. 필리스 아줌마의 오두막 Aunt Phylis’s Cabin by Mrs. Mary H. Eastman,
허준: 톰 아저씨? VS 필리스 아줌마?
김지윤: 여기서는 우리가 처음에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영화에서 보듯이 평화로운 한 장면 아름다운 남부 그리고 거기서 조금~ 모자라는 듯한 흑인 노예를 부모처럼 감싸서 잘 보살펴 주는 그런 주인 이런 식으로 묘사가 돼죠. 어떻게 보면은 남부측에서 대항해서 내놓은 소설이고 이것도 나름 잘 팔렸어요. 3만부 정도~
허준: 제가 보기엔 300명의 농장주가 100권씩 사지 않았나,
일동: 웃음
최태성: 이미 소설 속에서 전쟁이 일어나고 있네요.
최원정: 옛날에 우리 ‘해방 전후사의 인식이 나왔는데 나중에 해방전후사의 재인식’으로 맞대응했던 그런게 맞는 것 같애요. 역사를 바꾼 명작이라고 봐야겠네요.
김형곤: 많은 사람들에게 노예 제도의 악랄함 그리고 노예제도를 단순히 정치적 문제가 아니라 도덕적 문제로 풀어가게 된다고 인식을 하게 한 책입니다.
최원정: 노예제를 둘러싼 남북의 갈등이 문학에 까지 번지고 있는 상황인데~ 이 위기를 더 고조시키는 소식이 들려 옵니다.
해설: 1860년 11월, 노예 폐지론자들의 강력한 지지를 받으며 미국의 16대 대통령으로 당선된 에이브러햄 링컨, 이 소식을 들은 남부는 링컨의 모습을 한 인형을 불태우는 등 강력한 반발에 나섰고~--“포토맥 강이 사람의 피로 물들든, 펜실베니아 거리가 수많은 시체로 넘쳐나든 남부는 링컨의 대통령 취임이란 굴욕과 수모를 절대 용인하지 않을 것이다”---1860년 Southern Confederacy 기사 中---사우스캐롤라이나를 시작으로 남부 11개 주가 연방을 탈퇴했다.
이시원: 강물이 피로 물 들어도 대통령 선거결과를 반대한다. 진짜 내 눈에 흙이 들어가도 이건 안 된다. 이런 말 이잖아요.
김형곤: 그것보다 더 쎘죠.
최원정: 링컨 대통령이 대단히 존경을 받는 사람인데 그때는 어떤 인물이었기에 극렬히 반대했어요?
김형곤: 링컨은 공화당의 상징적인 인물이었습니다. 특히 공화당의 강령 중의 하나가 바로 노예제도 금지, 또 확산금지 이런 것들이었는데 그것을 대변하고 특히 링컨이 일리노이 지역의 시골 촌놈, 무명의 변호사에 불과했는데 슈퍼 스타로 떠오르게 된 건 당시 민주당의 전국구 미래 대통령 감이었던 스티븐 더글러스라는 친구가 있었어요. 그 친구랑 일리노이 주 상원의원을 놓고 1858년에 7 차례에 걸쳐서 연설대결을 펼칩니다. 거기에서 더글러스는 주민주권, 노예제도는 그 주민들이 결정한다 라고 이야기를 했어요. 그런데 링컨은 일찌 감치부터 노예제도가 악이 아니면 이 세상에 무엇이 악이겠느냐, 그래서 주민이 판단하는 그것은 도덕적 논리에 맞지 않다. 이런 아이콘을 갖고 있었죠.
김지윤: 그래서 링컨에 대한 남부 사람들의 두려움은 컸던 거죠. 그리고 어떻게 보면 남부 사람들에게는 노예제를 폐지하게 되면 자신들의 경제를 완전히 노예에 의존하고 있는데 그러면 경제를 무너지게 하는 것도 있고 어떻게 보면은 정체성이라고도 볼 수 있죠, 우리들의 문화 우리들의 역사에 대한 정체성 훼손이다 저 북부 촌스런 일리노이 출신 촌뜨기가 약간 이런 것도 있었어요. 북부가 막 발전하기 시작했잖아요. 산업이 돌아가고 제조업이 발전하고 그래서 두려움 같은 것도 있는 거죠.
이시원: 제녜가 이제 우리 보다 잘 살면 어떡하지~
김지윤: 여기 같이 뭉쳐 있는 데서 지금까지는 우리 남부가 조금은 더 우위에 있는 듯한 연방정부나 연방의회에서 그런 위치를 가지고 있었는데 지금 상황을 보니까 저쪽으로 넘어가는 것 같다 말이에요. 그런 두려움에서 이럴 바에는 그냥 헤어지자 이런 것도 작용을 했죠.
허준: 정말 이게 이해가 오는게 뭐냐 하면 노예가격이 엄청 올라 있던 상태잖아요. 그러면 내가 10명의 노예를 데리고 있으면 한 명당 2천 달러에 샀으면 2만 달러의 자산인데 노예해방이 되면 O 달러가 되잖아요. 그러니까 정말 내 자산과 경제적인 힘을 잃는 게 너무나도 두려웠던 게 남부 사람들이 극렬하게 저항하는 게 아닌가
김지윤: 그런데 링컨이 공짜가 아니고 돈 준다고 했어요. 노예 해방의 금전적 손실에 대해서 보상을 약속했어요. 그런데 남부가 거부를 하죠.
최원정: 결국 남부 11개 주가 연방을 탈퇴하면서 주사위는 이미 던져졌는데 그렇다면 링컨 대통령은 남부와 붙을 것인가 아니면 그들의 이탈을 인정해 줄 것인가 이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해야 되겠네요.
김형곤: 그런데 링컨이 고민을 합니다. 링컨이 3월 4일날, 보통 미국 대통령들은 3월 4일에 취임을 하는데 취임을 하기 전에 남부 주들은 이미 탈퇴를 한 거죠. 근데 전쟁을 할려고 그러면 보통 적이라고 그러잖아요. 그런데 적이라고 그러지 않고 반란자라고 합니다. 그래서 반란을 했기 때문에 반란을 수습을 하면은 다시 돌아올 것이다. 그래서 돌아오기를 바라는 거죠. 만약에 돌아오지를 않으면 그런 거지요. 성조기에서 별이 하나라도 빠지면 이건 전쟁이 아니라 어떤 일도 불사하겠다 라는 강한 의지를 표명합니다.
김지윤: 링컨이 당선된 게 1860년 11월 선거였잖아요. 사우스캐롤라이나 주가 탈퇴한다고 선언한 게 12월이에요. 그러니까 기다리고 있다는 듯이, 링컨이 내가 대통령에 당선이 되면 노예제를 폐지하겠다고 얘기 하지는 않았어요. 노예제가 확산되지 않겠다고 했지 이게 다른 거지요.
이시원: 점진적인 노예 폐지론자이네요.
김지윤: 약간은 뭐랄까요. 공약 때문에 너무 걱정하지 말라는 노력을 했죠. 그런데 남부에서는 기다렸다는 듯이 탈퇴를 선언하고 심지어 취임식 때도 링컨 대통령이 노예제도가 있는 주에는 간섭을 안 하겠다는 연설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남부 주들이 탈퇴를 한 거죠. 그렇게 되면은 남부 주에 연방 정부의 재산이 있을 것 아녜요 이런 것들을 내몰아내든지 특히 군대 같은 경우는 남부에 연방군이 있으면 남부에서는 연방군을 몰아내야 할 것 아녜요. 이걸로 갈등이 벌어지게 되는 거예요.
이시원: 그러면 어찌보면 남부에서 먼저 공격을 시작한 거네요.
김지윤: 네, 맞습니다. 저기 보이는 게 사우스 캐롤라이나 주에 있는 섬터 요새인데 연방군의 지휘자인 로버트 앤더슨 장군이 우리는 안 나간다 그래요, 못나간다고 그러니까 남부군 쪽에서는 군대를 모아갖고 여길 공격을 시작합니다. 저기를 기점으로 해서 남북전쟁이 출발했습니다.
해설: 1861년부터 4년간 계속된 남북전쟁, 전쟁에서 발생한 사망자는 무려 62만 명에 달했다. 이 수치는 베트남 전쟁, 1차 세계대전, 2차 세계대전 등 미국의 역대 전쟁에서 사망한 군인들을 모두 더한 것보다 많은 것이었다.
-------------이광용: 남북전쟁을 미국 역사상 최악의 전쟁으로 만든 배경에는 한 발명품이 있었습니다. 그 내용을 자세히 알아보기 위해 최고의 무기전문가 태상호 군사전문기자를 모셨습니다.
태상호/군사전문기자: 안녕하십니까?
이광용: 역대급 사상자가 남북전쟁에서 발생했다고 하는 데 그걸 만든 그 발명품은 대체 뭐 였나요?
태상호: 남북전쟁 당시에 무기체계 발전이 굉장히 눈부셨어요. 많은 무기체계가 대량 살상자를 냈지만 그 중에서도 제가 오늘 말씀 드리고 싶은 것은 바로 미니에 탄입니다. (손으로 만든 물체를 보여줌) 바로 이런 탄이죠.
최원정: 그렇게 조그마한 게 발명품 이에요?
이광용: (새까만 콩알 만한 탄환) 지금 화면에도 나와 있는데~
태상호: 여러가지 종류가 있죠. 그런데 이 탄의 이름은 minie ball 이라고 해요. 그런데 미국 사람들은 프랑스식 발음을 다하기 싫어하죠. 그래서 미니볼 이라고 했습니다. 꼭 뭘 하나 빼는 걸 좋아합니다.
이광용: 원형이 아닌데 왜 볼이라고 했을까요?
태상호: 왜냐하면 그 전에 군용탄은 둥그런 볼 모양이었어요.
이광용: 우리 나폴레옹 워털루 할 때 이거 나왔잖아요, 동그란 총탄~
태상호: 이것 역시 총기의 발달을 우리가 봐야 합니다. 그전에는 머스켓 이라고 하는 소총이 있는데 머스켓에 강선이 없었습니다. 집어 넣기 쉬운 그러니까 총구에서 위에서 아래로 집어넣기 쉬운 형태가 바로 이런 볼이었죠. 하지만 프랑스의 포병장교 미니에가 고안했던 미니에 탄이 나왔을 때는 총기도 변화되는 싯점이었어요. 활강체 머스켓에서 강선이 없는 머스켓으로 변화하는 싯점이었습니다. (남북전쟁 당시 총기의 변화: 둥근 납탄-활강식 총열 -> 미니에 탄-강선식 총열), 이런 구형탄을 쓰는 활강식 머스켓의 일반적인 유효사거리가 100미터 정도라고 친다면 미니에 탄을 사용하는 강선식 머스켓은 400 미터를 사격할 수 있습니다. 명중률로 늘어났고 탄환의 속도도 4~8배로 빨랐습니다.
이광용: 이건 그거네요, 권투에서 팔이 4배 길면 상대방이 아무리 주먹질해 봤자 소용없는 거네요. 그리고 펀치의 강도도 세지고~ 그런데 거기서 사실 사상자가 더 많이 나온 또 다른 배경이 있지 않나요?
태상호: 맞습니다. 1800년대 중반부터 1890년 이 사이에 총기의 발전은 엄청 빠르게 이루어졌습니다. 하지만 전술의 발전이 총기의 발전을 따라가지 못했죠. 즉 사람을 죽일 도구들은 다 준비가 되어 있는데 효과적으로 전투를 할 수 있는 방법은 몰랐던 겁니다. 병력들은 아직도 나폴레옹 시대 때 전열보병방식의 전투를 수용했어요. 그러니 조금 더 좋은 무기체계를 쓰면 한쪽이 거의 전멸을 당하게 됩니다. 그런 상황이 생길 수 있는 거죠. 또 다른 문제는 전쟁 사상자가 너무 많이 생기는데 그럼 그 사람들을 살려야 되잖아요. 전술 응급조치가 따라 오질 못했습니다. 부상자들이 너무 많은 거예요. 이런 부상을 본 적이 없는 거죠. 팔다리를 절단하지 않아야 되는데도 팔다리를 절단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영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中- 그 삶 다리를 자를 모양이에요. 빨리요 곧 돌아올게요. 안돼, 안돼, 절 내버려둬, 안돼! 안돼! 제발! 간호원은 어디 있죠?-------------
태상호: 그때 당시에는 너무 많은 부상자가 몰려오기 때문에 한 명 한 명을 제대로 치료해 줄 수 있는 시간적 여유가 없었어요. 그래서 빨리 자를 수 있었으면 자르고 다음 환자로 넘어 갈 수 밖에 없었죠.
이광용: 미국 남북전쟁이 미국 역사상 최악의 전쟁, 가장 많은 사상자를 낼 수 밖에 없었던 명확한 이유가 여기에 있었던 거예요. 지금까지 태상호 군사전문기자였습니다.
태상호: 감사합니다.
최원정: 전사자가 아까 6만 명이라고 했죠. 그런데 링컨 대통령 입장에서도 내가 이럴려고 하는 전쟁이 아닌데~ 생각이 굉장히 많아 졌을 것 같애요.
최태성: 맞습니다. 사실 링컨도 이렇게 전쟁이 오래 동안 갈 거라곤 생각을 못했어요. 링컨 입장에서 이건 빨리 끝낼 수 있을 거라고 판단했던 것 같애요. 왜냐면 북부와 남부 전력비교를 해드릴게요. 일단 철도부터 보면 철도는 전쟁에서 보급품이 조달 되어야 하는 중요한 거잖아요. 보세요, 지금 북부가 무려 22,000마일이고 남부는 고작 9,000마일 이에요. 압도적으로 북부쪽이 많구요. 인구를 보세요. 북부 인구가 2200만 명이고요, 전투가능 인구가 400만 명, 남부는 900만 명 인구에 전투 가능 남성이 북부의 4분의 1 밖에 안되는 120만 명 밖에 안 되기 때문에 링컨의 판단에서는 금방 끝날 수 있다 그랬는데 길어진 거죠.
이시원: 이것만 보면 딱 승자가 정해져 있는 것 같애요.
최태성: 그러니까요,
김형곤: 근데 이제 초반 전쟁에서 의외로 북부가 계속 패합니다. 그 패하게 되는 이유 중의 하나가 전쟁이 주로 남부에서 일어나요. 남부인들은 노예제도를 방어한다는 면도 있지만 자기 고향을 지켜야 된다는 사명감 이런 것들이 있었던 거죠.
최태성: 내 고향을 지키고 말리라
김형곤; 지리를 알게 되면 전쟁하는 데 있어서 이길 수 있는 확률이 높은 거죠.
최태성: 우리나라 삼국시대 백제 황산벌에서도 5만 김유신 부대가 5천 계백 부대를 초창기에는 이기지 못해요. 우린 기필코 죽자고 싸우는 사람들이라서 이기기 힘들었죠.
김지윤: 그리고 남부 쪽에 걸출한 장군이 있었죠. 그 유명한 로버트 E. 리 장군, 근데 역사에 관심이 있는 분들은, 이름을 한 번은 들어보셨죠 (로버트 E. 리 (1807~1870)-미국-멕시코 전쟁에 참전했으며 남북전쟁 당시 남군을 이끈 장군),
최태성: 아니 이렇게 되면 질문이 바로 나와야 해요, 성이 이씨예요?
이시원: 리 장군의 고향은 어디였어요?
김형곤: 버지니아 주 출신이죠.
이시원: 버지니아 리(?)씨인 거죠?
김지윤: 워낙에 뛰어난 장군이었고, 멕시코 전쟁에서도 활약을 했었고 링컨 대통령이 처음에는 북부 연방군의 육군 사령관을 맡아달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그런데 이걸 거부를 하죠. 거부를 하고 남부의 총사령관이 돼서 전쟁을 이끄는데 기습공격도 잘하고 공격적이고 그래서 초반에 북부측 장군들이 많이 밀리죠.
최원정: 로버트 리 장군은 노예제를 찬성을 했나요?
김지윤: 아니예요, 노예제를 찬성하지도 않았고 연방을 탈퇴하는 것도 반대를 했어요. 그런데 연방과 주 사이에서 어떻게 보면 당시에는 자기가 미국 사람이기 보다는 버지니아 사람이다 라는 정체성이 강했던 거죠. 내가 버지니아 사람으로서 버지니아군과 남부연합을 위해서 싸워야겠다.
이시원: 워낙 명 장군으로서 유명했으니까 분명히 활약상도 있었겠네요.
김지윤: 당연하죠.
김형곤: 웨스트 포인트에서 1등했어요, 수석 졸업,
김지윤: 리 장군 때문에 계속 지고 패전하고 열을 받으니까 북부 연방군엔 셔먼 장군이 있어요. 너무 화가 나는 거야, 그러니까 많은 북부 군인들이 죽어 있고 시체는 있는데 무덤이 없을 정도니까 신경질이 나갔고 리 장군의 집이 버지니아 라고 했잖아요. 저택에 장미도 피어 있고 이걸 다 쓸어버려 무덤으로 만들어 그래서 만들어요, 그게 지금의 알링턴 국립묘지예요 (알링턴 국립묘지-포토맥 남서쪽 교외에 위치한 미국 국립묘지),
이시원: 황당하겠다, 내 집이 묘지가 되다니~
최원정: 아무튼 로버트 리 장군의 등장으로 오히려 남북전쟁이 더 어려워지고 있는 거예요.
최태성: 이렇게 되니까 링컨도 우울증이 있었다고 그래요. 근데 이때 더 심해졌다고 합니다. 그렇잖아요. 빨리 끝내야 하는데 군인들은 계속 죽어나가고 승기는 안보이고 있지, 게다가 더 안 좋은 소식이 들려와요. 남부 연합군이 프랑스와 영국에 도움을 요청한 거예요. 왜냐면 프랑스와 영국 같은 경우는 산업혁명으로 나라가 계속 돌아가야 되는데 유럽 섬유공장에는 미국 남부의 면화가 필요하거든요. 만약에 프랑스와 영국이 남부쪽을 경제적 이익 때문에 지지해 준다면 북부는 더욱 힘들어질 수 밖에 없는 거죠.
이시원: 근데 경제적 상황도 상황이지만 일단 남부는 노예제도를 유지할려고 전쟁을 하는 거잖아요. 그러면 유럽도 노예제도에 찬성하고 있는 상황인가요?
김형곤: 당시 18세기말부터 시작해서 유럽의 주요 국가들은 특히 프랑스와 영국 같은데도 노예제도가 금지됩니다. 그리고 우리가 유럽에서 가장 후진국 이라고 하는 러시아도 1861년도가 되면서 노예제도를 농노제 라고 하죠, 폐지합니다. 우리가 사실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면 안 되겠지만 자유-민주주의-평등의 아이콘이라고 하는 미국이 그렇게 늦게까지 노예제도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은 참 아이러니하고~
최원정: 근데 유럽의 개입설은 굉장히 위기로 다가왔을 것 같애요. 이렇게 되면 이게 내전이 아니라 국제전으로 갈 수도 있는 거고 돌파구가 보이지 않을텐데 링컨이 신의 한 수를 써야죠?
김형곤: 그렇습니다. 이때 링컨이 그 동안에 생각했던 마지막 한 수를 가지고 그걸 쓰지 않으면 안 된다. 나에게 남아 있는 마지막 카드를 쓰지 않고 내가 패배하는 것은 나는 인정치 못하겠다, 그래서 이제 노예해방을 선언하게 됩니다.
최원정: 저는 약간 마지막 신의 한 수 카드라고 해서 대량 살상무기 등등 같은 게 등장할 줄 알았는데 선언이라니~
김형곤: 링컨이 직접 남부 현장에 가서 흑인들의 역할이 어떤 거냐 그러니까 전쟁터에서는 참호도 파고 보급품도 날라주고 가정에서 백인들이 전쟁터에 나가면 가정 일을 대신 하는거예요.
-----------------영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中-흑인남자: 당신 어머니는 남부연합에서 우리를 필요로 한다고 말씀하셨어요. 우리는 참호를 파러 남쪽으로 가야해요, 스칼렛, 걱정마요, 우리가 양키들을 막을 거에요------------- 그래서 흑인들을 해방시키면 남부에서 남부 전력이 약화된다 라는 것을 전략적으로 알고 있었던 거죠.
허준: 사실 어떻게 보면 돈 때문에 하고 있는 전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느낌이 있었는데 돈에서 갑자기 노예해방, 이걸로 바뀌는 순간 유럽국가의 개입이 애매해졌는데요.
김형곤: 전쟁 목표로 처음에는 연방 보존만 있었어요. 근데 전쟁 중반에 노예해방이 들어감으로써 이게 확대가 된 것이죠. 그걸 선언함으로서 이미 노예제도가 없어진 유럽에서는 다시 노예제도를 옹호할 남부를 지지할 도덕성에 엄청난 타격을 주는 거죠.
최태성: 경제전쟁을 도덕적 성전으로 일거에 바꿔버리는 거예요.
김지윤: 북군 내에서도 굉장히 힘이 됐던 게 지금까지는 내전의 어려운 부분은 내가 싸우는 적이 정말 적인가 찾기가 힘들었는데 근데 싸움의 어떤 명분을 준 거잖아요. 도덕적 우위성을 우리가 가지고 있다. 북군 입자에서도 상당한 힘이 되었던 거죠.
최태성: 정말 링컨은 승부사적 기질이 있는 사람인 것 같애요.
최원정: 승부사의 기질이 젊은 시절부터 연마되었던 거라고 그러더라구요. 어떤 내용인지 또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스튜디오엔 레슬링 4각 링과 선수가 등장(극동 헤비급 챔피언 등장)------------
김민호/프로레슬러: 안녕하십니까? 저는 WWA 대한 프로레슬링 연맹 소속의 2018년 극동 아시아 헤비급 챔피언 김민호입니다.
이광용: 저기 줄자 좀 갔다 주세요 (김 선수의 팔둑을 만지면서) 팔둑이 대체 몇 센티미터인가?
허준; (이광용 아나에게) 너무 옆으로 가지 마세요 (키와 체격이 너무 차이가 남), 되게 볼 품 없어 보여요,
이광용: 아니 근데 저희가 미국의 에이브러햄 링컨 대통령 이야기 하는 거 알고 나오신 거죠?
김민호: 알고 나왔죠.
이광용: 근데 갑자기 분위기가 프로레슬링?
김민호: 사실은 링컨 대통령께서 저의 머나먼 선배님이세요. 링컨 대통령께서 1992년도에 미국 레슬링협회 (AWW) 명예의 전당에 헌액이 되셨었고 22살 때 일리노이 주 프로레슬링 챔피언까지 역임을 하셨습니다.
이광용: (패널들에게) 이거 알고 계셨어요?
일동: 전혀 몰랐어요. 영화 ‘기생충’에 일리노이가 나오는 건 알아요.
이광용: 아니~ 큰 별쌤, 공부 제대로 안 하세요?
최태성: 링컨을 알고 있는데 링컨이 레슬링 선수라는 건 제가 처음 알았어요.
이광용: 제가 그래도 사전에 조사를 하지 않았겠습니까? 자~ 링컨 선수, 총 현역시절에 301변의 경기를 치렀고 그러면 링컨 선수는 301전 몇 승 몇 패, 승률이 얼마나 됐을까요?
이시원: 50대 50? 아슬아슬하게 약간~
김민호: 훨씬 up이에요.
허준: 일단 명예의 전당에 올라간다는 건 기록적이어야돼요. 보통 레슬링 선수 WWA나 이런 데에 나오는 선수들이 정말 승률이 좋은 선수들은 90% 정도까지 올라갑니다. 그러면 한 270승 전후?
김민호: 근접하게 맞추셨습니다. 그게 301전 중에서 무려 300승을 하시고 단 1패만 하셨다고 합니다. (입이 딱 벌어지는 기록), 어느 정도냐 하면 현재 현역 선수들 중에서 연승이 가장 높은 선수가 미국 WWE에 골드버그 인데 그 선수가 173연승~ 어마어마한 전적이구요.
이광용: 300승 1패 라는게 저도 스포츠 방송 20년을 했는데 어떤 종목이든 어떤 선수이든 어떤 팀이든 300승 1패 이렇게 될 수 없는 거거든요. 그런데 또 한편으로는 인간적인 면모를 위해서 한 번 저준 거 아닌가~
최태성: 정조처럼 맨 마지막 화살을 안 맞히는 거에요.
이광용: 그런게 아닌가할 정도로 생각되는 거예요. 그런데 여기서 갑자기 궁금한 건 김민호 선수의 전적은 어떻게 됩니까?
김민호: 너무 불편한 질문을 갑자기 해서~ 저는 고생을 많이 하고 챔피언이 된터라 노코멘트 하겠습니다.
이광용: 아주 많이 졌던 걸로~ (챔피언을 도발하는 이광용?), 그런데 프로레슬링 즐기시는 분들은 아시겠지만 선수마다 주특기 기술 잘 쓰는 기술이 있거든요. 그런데 당시 링컨 선수의 주특기 기술은 뭐 였을까요?
김민호: 저는 그거 듣고 깜짝 놀랐는데요. 초크 슬램 이라는 고급기술을 썼더라구요. (초크슬램-상대방의 목을 움켜쥐고 위로 들어올렸다가 아래로 내동댕이치는 프로레슬링 기술),
이광용: 그거 진짜 무서운 기술이네요. 어떤 기술이냐
최원정: 보여 주세요.
이광용: 잠깐만~
김민호: (먹이를 노리는 맹수의 발걸음-두 팔로 이 아나의 목을 잡음-오른 손으로 이 아나의 목을 움켜잡고, 기술 후 신사적인 마무리),
이광용: 제가 잘못 했습니다. (절로 무릎 꿇게 되는)
김민호: 돌아가실 까봐 제가 마음껏 못하겠습니다. 제대로 된 기술시연을 위해 선수를 한 분 모셨습니다. 그 당시 링컨 대통령이 깡패 두목을 이 기술로 KO시켰다고 해서 제가 깡패 두목 같은 분을 모셨습니다.
-----------------(비슷한 체격의 레슬링 선수 한 명 등장, 서로 생대방을 손바닥으로 가격하며 시연), 김대중/운동선수: (공격모습행동), 이때 김민호 선수가 갑자기 김대중 선수의 목을 잡아서 두팔로 들어올림, 바닥에다 메다꽂는 끝내기 기술-------------
김민호: 링이 약해서 제가 살살 던졌어요.
이광용: 그게 살살 던졌다구요.
김민호: 이 링이 무너질 것 같애요.
이광용: (수고해 주신 김대중 선수에게) 박수 한 번 쳐 주세요, 무려 300승~ 전설적인 레슬러였던 링컨 대통령의 새로운 면모를 소개해준 WWA 극동헤비급 챔피언 김민호! 선수였습니다.
허준: 초크슬램 이라는게 키가 큰 선수가 하면 손을 위로 뻗어서 하거든요. 그러면 3미터에서 상대방을 내려 꽂는 기술이에요. 그런 걸 보통 프로레슬링에서 피니시(finish)라고 합니다. (피니시 무브(Finish Move)-프로 레슬링에서 경기의 마무리를 위해 사용하는 가장 강력한 기술), 이 피니시가 유명한 선수들이 제일 인기가 많은데 이걸 링컨이 썼다고 하니까 야~ 링컨은 이때부터 피니시를 쓸 줄 알았구나.
김형곤: 아마 노예해방 선언도 링컨의 피니시 무브네.
이시원: 그걸로 진짜 남부의 목을 잡고 아래로 내리 꽂은 거네요.
김형곤: 링컨은요 어렸을 때부터 집이 너무너무 가난했어요. 가난해서 안해 본 직업이 없습니다. 누구 가게집의 점원이라든가 상점주 라든가 우체국장 이라든가 심지어 군인도 3개월 잠깐해요. 그런 것들이 링컨의 그런 휴머니즘을 발휘하게 하고 다양성의 인간을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지 않았나~
최원정; 노예해방 선언의 비장의 카드를 쓴 건데 이제 이후에 전쟁의 흐름은 어떻게 되나요?
김형곤: 역시 전세가 많이 바뀌죠. 노예해방 선언으로 남부백인 사회뿐만 아니라 남부흑인들도 엄청난 영향이 미치고 또 아까 얘기했던 많은 도망 노예들이 오게 되는 거죠. 그래서 북부에 이미 와 있는 흑인들이 또 새로 온 흑인들이 북부 내에 따로 흑인으로 구성된 흑인 육군부대가 만들어지죠. 약 18만 명이 돼요. 흑인으로 구성된 해군도 약 4만 명이 만들어집니다. 북부의 승리에 중요한 기여를 하게 됩니다.
이시원: 근데 링컨이 노예해방 선언을 했다고 해서 남부군이 나름대로 똘똘 뭉쳐 있었잖아요. 쉽게 포기할 것 같진 않은데~
김지윤: 그렇죠, 그 후로 전쟁은 계속 됐는데 처음에 북부가 밀렸다고 했잖아요. 그러면서 조금씩전세를 회복을 하다가 결정적으로 전세를 뒤집은게, 1863년 7월, 그 유명한 게티스버그 전투입니다. 근데 그게 정말 남북전쟁 역사상 가장 참혹한 전투 라고도 해요. 북군이 한 10만여만 명 참여했고, 남부연합군이 7만 5천여 명 참가했는데 약 5만 명이 전사했다 하니까 정말 많은 젊은이들이 쓰러져 갔고 그거를 계기로 해서 기세가 북쪽으로 넘어오게 돼죠 (게티스버그에 내버려진 전사자들 시신, 1863년 7월 5일),
최태성: 참혹했던 게티스버스 현장, 여기를 4개월 뒤에 링컨이 방문을 합니다. 그리고 정말 그 유명한 연설을 하죠. 연설의 내용은 2분 정도, 짧은 연설이에요. 그 내용은,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정부는 지상에서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링컨, 1863년 게티스버그 연설 中---정말 이후 미국의 비전을 제시하는 명연설이 되었죠.
허준: 이 연설이 여기서 나왔군요.
최태성: 엄청난 희생 속에서 나온 연설이에요. 그냥 나온 게 아니라는 거죠.
김지윤: 근데 우리가 게티스버그 연설하면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요 부분을 생각을 하지만 사실 가장 중요한 부분은 다른 곳에 따로 있어요. 어떻게 얘기하냐 하면, “87년 전 우리 선조는 자유에 기반을 두고 모든 사람이 평등하게 태어났다는 전제 하에 새로운 나라를 세웠습니다. 우리는 이곳에서 희생된 분들이 지금까지 이뤄놓은, 하지만 미완의 과업을 완수하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링컨, 1863년 게티스버그 연설 中. 모든 사람이 평등하게 태어났다는 건 헌법에 나온 부분이거든요. 그래서 어떻게 보면 우리가 처음 이 나라를 건국을 할 때 가졌었던 자유와 평등의 정신을 아직 다 완수하지를 못했으니까 지금 이 순간 이곳에서 우리가 완료를 해야 된다.
김형곤: 사실 이 연설 이후에 미국은 이제 하나다 라는 이런 것들이 많은 사람들에게 인식이 되기 시작했습니다.
최원정: 게티스버그 연설이 끝나고 나서 청중들이 쥐 죽은 듯이 조용했다면서요. 이때 링컨이 이 연설 망했다 했는데 뒤돌아 서서 자리로 가는데 갑자기 우뢰와 같은 박수소리가 터져 나왔다고 하던데요. 너무 감동해서 그런 느낌 이었던 것 같애요.
김형곤: 연설자로 처음 나온 사람이 하버드 대학교 총장인 에드워드 에버레트 라는 사람인데 이 사람이 2시간 반을 연설해요. 박수를 어쩔 수 없이 억지로 치고 그랬는데~ 링컨이 딱 2분 하고 내려간 거에요. 그리고 우뢰와 같은 박수가~
최원정: 근데 이 연설 이후로도 남북 전쟁은 2년이나 더 지속이 된 거죠. 그런데 아무튼 그럼에도 불구하고 링컨 대통령은 노예해방을 시켰고 미국의 분열을 막아낸 그야말로 세계사를 바꾼 승부를 펼친 리더입니다. 오늘 레슬링도 보고 미국 역사에 대해 많이 아는 시간이었습니다.
허준: 제 역할, 저의 직업에 맞는 이야기만 딱 들어오더군요. 링컨을 통해서 확실하게 하나 배웠습니다. 멘트는 짧고 굵게~
최태성: 이 링컨의 노예해방 선언, 이 선언 이후 140년 간에 정말 미국 최초의 흑인 대통령 오바마 대통령이 나올 수 있었다. 그 씨앗이 바로 여기서 시작되었구나. 그렇구나, 지금 미국의 역사는 바로 이 링컨의 노예해방에서 부터~
김지윤: 저는 링컨 대통령을 생각하면 마음이 아파요. 1865년에 암살당했잖아요. 그 다음날 새벽에 숨을 거두었는데 그 아들이 보고서는 아빠는 어디 갔어요? 물으니까 아버지는 하나님 곁으로 갔다. 그런 말을 했대요. 아빠는 굉장히 행복한 것 같애요. 처음으로 웃는 것 같애요. 그러니까 정말 수많은 청년들이 남북전쟁으로 희생이 되고 어떻게 보면 나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닌가 생각을 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잖아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예해방을 해야 된다는 신념, 미국이라는 나라를 지켜내야 된다는 신념을 끌고 왔고 그 과정에서 얼마나 괴로웠을까. 그러니까 시신에서는 미소를 띤 것 같다고 들을 정도로 그 많은 짐을 혼자 짊어져야 했던 링컨에 대한 인물에 대해 항상 마음이 아프고 안쓰럽더라고요.
김형곤: 링컨이 또 위대한 점은 1864년 두번째 대통령이 돼죠. 취임사가 아주 끝내 줍니다. “아무도 미워하지 말자” 용서하자. 우리는 하나의 나라라는 것을 얘기하죠. 그게 링컨의 가장 빛나는 또 하나의 리더쉽이 아닌가.
최원정: 오늘 순서는 여기서 마무리 하죠. 끝. (KBS 역사저널 그날 347회 [신년기획] 세계사를 바꾼 승부 ⑥ 링컨, 노예해방을 선언한 날에서 정리).
① 6년전에 아메리카 시스템의 비밀, 앙드레 프레너들의 탄생에서 링컨이 발명가고 특허권도 가지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대통령 때 철도에도 조예가 깊어서 철도간격을 표준화 하였고 1862년에 미국 대륙횡단 철도 법안을 추진하였는데 완성되기 전에 암살당하였다. 이번에 링컨의 레슬링 선수로서의 전적과 노예해방에 관한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어 기쁘다. 10여년 전에 어느 글에서 링컨이 군대에서 대위로 어느 전투에 참여해서 싸웠는데 실패하여 일등병으로 강등이 되었다는 수치스러운 내용을 읽은 일이 있었다. 아래 ⑧번에 링컨이 젊었을 때 너무 너무 가난해서 안해본 일이 없었다고 한다. 그는 3개월간 군대생활도 했다는 내용이 나온다. 링컨과 스토우 부인과의 만남 이야기-톰 아저씨의 오두막 감동적이다. 그리고 링컨의 흑인노예 해방선언으로 흑인 대통령 오바마의 탄생이 가능했다,
② 1860년 11월, 노예 폐지론자들의 지지를 받으며 미국의 16대 대통령으로 당선된 에이브러햄 링컨, 이 소식을 들은 남부는 강력한 반발에 나섰다. 사우스캐롤라이나를 시작으로 남부 11개 주가 연방을 탈퇴했다. 링컨 대통령이 대단히 존경을 받는 사람인데 그때는 어떤 인물이었기에 극렬히 반대했나, 링컨은 공화당의 상징적인 인물이었다. 공화당의 강령 중의 하나가 노예제도 금지, 또 노예확산금지 이었는데 링컨이 일리노이 지역의 시골 촌놈, 무명의 변호사에 불과했는데 슈퍼 스타로 떠오르게 된 건 당시 민주당의 전국구 미래 대통령 감이었던 스티븐 더글러스라가 있었다. 그 친구랑 일리노이 주 상원의원을 놓고 1858년에 7 차례에 걸쳐서 연설대결을 펼친다. 거기서 더글러스는 주민주권, 노예제도는 그 주민들이 결정한다 라고 이야기를 했다. 그런데 링컨은 일찌 감치부터 노예제도가 악이 아니면 이 세상에 무엇이 악이냐, 주민이 판단하는 그것은 도덕적 논리에 맞지 않다. 이런 아이콘을 갖고 있었다. 1861년부터 4년간 계속된 남북전쟁에서 사망자는 무려 62만 명에 달했다. 이 수치는 베트남 전쟁, 1차 세계대전, 2차 세계대전 등 미국의 역대 전쟁에서 사망한 군인들을 모두 더한 것보다 많은 것이었다.
③ 링컨이 당선된 게 1860년 11월 선거였다. 12월 사우스캐롤라이나 주가 탈퇴하였다. 링컨은 내가 대통령에 당선이 되면 노예제를 폐지하겠다고 얘기 하지는 않았다. 노예제가 확산되지 않도록 하겠다고 했다. 점진적인 노예 폐지론자다. 공약 때문에 너무 걱정하지 말라는 노력을 했다. 그런데 남부에서는 기다렸다는 듯이 탈퇴를 선언하고 링컨 대통령이 노예제도가 있는 주에는 간섭을 안 하겠다는 연설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남부 주들이 탈퇴를 하였다. 그러면 남부 주에 연방 정부의 재산이 있는데 이런 것들을 내몰아 된다. 특히 군대는 남부에 연방군이 있으면 남부에서는 연방군을 몰아내야 할 것이다. 이걸로 갈등이 벌어지게 되었다. 사우스 캐롤라이나 주에 있는 섬터 요새인데 연방군의 지휘자인 로버트 앤더슨 장군이 우리는 안 나간다, 못나간다고 그러니까 남부군 쪽에서는 군대를 모아 공격을 시작했다. 여기를 기점으로 해서 남북전쟁이 출발했다.
④ 초반 전쟁에서 북부가 의외로 계속 패한다. 그 패하게 되는 이유 중의 하나가 전쟁이 주로 남부에서 일어났다. 남부인들은 노예제도를 방어한다는 면도 있지만 자기 고향을 지켜야 된다는 사명감이 있었다. 그리고 남부엔 워낙에 뛰어난 리 장군이 있었다, 링컨 대통령이 처음에는 그에게 북부 연방군의 육군 사령관을 맡아달라고 하였다. 이걸 거부한다. 남부의 총사령관이 돼서 기습공격도 잘하고 공격적이고 초반에 북부측 장군들이 많이 밀렸다. 로버트 리 장군은 노예제를 찬성하지도 않았고 연방을 탈퇴하는 것도 반대를 했다. 연방과 주 사이에서 당시에는 자기가 미국 사람이기 보다는 버지니아 사람이다 라는 정체성이 강했다. 내가 버지니아 사람으로서 버지니아군과 남부연합을 위해서 싸워야겠다. 워낙 명 장군으로서 유명했으니까 분명히 활약상도 있었다. 웨스트 포인트에서 1등했고, 수석 졸업,
⑤ 리 장군 때문에 계속 패전하고 열을 받으니까 북부 연방군에 셔먼 장군이 너무 화가 났다. 많은 북부 군인들이 죽어 가고 시체는 쌓이고 무덤이 없을 정도니까 신경질이 났고 리 장군의 버지니아 저택을 무덤으로 만들었다, 그게 지금의 알링턴 국립묘지란다. 링컨이 우울증이 있었는데 이때 더 심해졌다고, 빨리 끝내야 하는데 승기는 안보이고 있지, 게다가 더 안 좋은 소식이 들려왔다. 남부 연합군이 프랑스와 영국에 도움을 요청한 거다. 프랑스와 영국은 산업혁명으로 나라가 계속 발전시켜야 되는데 유럽 섬유공장에는 미국 남부의 면화가 필요하였다. 만약 프랑스와 영국이 경제적 이익 때문에 남부를 지지해 준다면 북부는 더욱 힘들어진다.
⑥ 18세기말부터 프랑스와 영국은 노예제도가 금지된다.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면 안 되겠지만 자유-민주주의-평등의 아이콘이라고 하는 미국이 늦게까지 노예제도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은 아이러니하다, 근데 유럽의 개입설은 위기로 다가왔다. 이러면 내전이 아니라 국제전으로 갈 수도 있다. 노예해방을 선언하게 된다. 돈 때문에 하는 전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돈에서 갑자기 노예해방으로 바뀌는 순간 유럽국가의 개입은 애매해졌다. 전쟁 목표가 처음에는 연방 보존 이었는데 이제 노예해방을 선언함으로서 이미 노예제도가 없어진 유럽에서는 노예제도를 유지하는 남부를 지지할 명분과 도덕성이 없어진 것이다. 경제전쟁을 도덕적 성전으로 일거에 바꿔버리게 되었다. 링컨의 신의 한 수가 빛을 발하였다
⑦ 북군도 내가 싸우는 적이 정말 적인가 찾기가 힘들었는데 근데 싸움의 어떤 명분을 찾은 것이었다. 도덕적 우위성을 북부가 가지고 있게 되었다. 북군에 힘이 되었다. 링컨은 승부사적 기질이 있는 사람이다. 승부사의 기질은 젊은 시절부터 연마되었다고 한다. 링컨 대통령은 22살 때 일리노이 주 프로레슬링 챔피언까지 역임을 하였고 1992년도에 미국 레슬링협회 (AWW) 명예의 전당에 헌액이 되었다, 링컨 선수는 현역시절에 301변의 경기를 치렀고 무려 300승을 하였고 단 1패만 하였다. 입이 딱 벌어지는 기록, 현재 미국 현역 선수들 중에서 연승이 가장 높은 선수가 미국 WWE에 골드버그 인데 그 선수가 173연승이란다, 당시 링컨 선수의 주특기 기술은 초크 슬램 고급기술, 상대방의 목을 움켜쥐고 위로 들어올렸다가 아래로 내동댕이치는 프로레슬링 기술, 당시 링컨은 깡패 두목을 이 기술로 KO시켰다고, 아마 노예해방 선언도 링컨의 초크슬램 기술발휘, 그걸로 진짜 남부의 목을 잡고 아래로 내리 꽂은 거였다.
⑧ 링컨은 어렸을 때부터 집이 너무너무 가난했다. 가난해서 안해 본 직업이 없었다. 남의 가게 점원이라든가 상점주라든가 우체국장 이라든가 심지어 군인도 3개월 잠깐했다고, 그런 것들이 링컨이 휴머니즘을 발휘하게 하고 다양한 인간을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지 않았나, 노예해방 선언 이후 전세가 많이 바뀌었다. 남부백인 사회뿐만 아니라 남부흑인들에도 엄청난 영향이 미치고 또 많은 도망 노예들이 오게 되었다. 북부에 이미 와 있는 흑인들이 또 새로 온 흑인들이 북부 내에 따로 흑인으로 구성된 흑인 육군부대가 만들어졌다. 약 18만 명이 되었다. 흑인으로 구성된 해군도 약 4만 명이다. 북부의 승리에 중요한 기여를 하였다. 그 후로 전쟁은 계속 됐는데 처음에 북부가 밀렸는데 조금씩 전세를 회복을 하다가 결정적으로 전세를 뒤집은 게, 1863년 7월, 그 유명한 게티스버그 전투였다. 그게 남북전쟁 역사상 가장 참혹한 전투 라고 한다. 북군이 한 10만여만 명 참여했고, 남부연합군이 7만 5천여 명 참가했는데 약 5만 명이 전사했다. 정말 많은 젊은이들이 쓰러져 갔다. 4개월 뒤에 링컨은 참혹했던 게티스버스 현장을 방문하였다. 그리고 그 유명한 연설을 하였다. 연설의 내용은 2분 정도, 짧은 연설,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정부는 지상에서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링컨의 1863년 게티스버그 연설은 이후 미국의 비전을 제시하는 명연설이 되었다.
⑨ 근데 게티스버그 연설하면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부분을 생각을 하지만 가장 중요한 부분은 다른 곳에 있다. “87년 전 우리 선조는 자유에 기반을 두고 모든 사람이 평등하게 태어났다는 전제 하에 새로운 나라를 세웠습니다. 우리는 이곳에서 희생된 분들이 지금까지 이뤄놓은, 하지만 미완의 과업을 완수하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링컨의 1863년 게티스버그 연설은. 모든 사람이 평등하게 태어났다는 건 헌법에 나온 부분이다. 우리가 처음 이 나라를 건국을 할 때 가졌었던 자유와 평등의 정신을 아직 다 완수하지를 못했으니까 이 순간 이곳에서 우리가 완료를 해야 된다. 이 연설 이후에 미국은 이제 하나다 라는 것들이 많은 사람들에게 인식이 되기 시작했다. 링컨의 게티스버그 연설이 끝나자 청중들이 쥐 죽은 듯이 조용했다. 링컨은 이 연설 망했다 했는데 뒤돌아 서서 자리로 가는데 갑자기 우뢰와 같은 박수소리가 터져 나왔다고 한다. 너무 감동해서 그런 느낌 이었던 것 같다. 처음 연설자로 나온 사람이 하버드 대학교 총장인 에드워드 에버레트인데 이 사람은 2시간 반을 연설해서 어쩔 수 없이 박수를 억지로 치고 그랬는데~ 링컨이 딱 2분 하고 내려간 거다. 그리고 우뢰와 같은 박수가 터져나왔다.
⑩ 이 연설 이후로도 남북 전쟁은 2년이나 더 지속이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링컨 대통령은 노예해방을 시켰고 미국의 분열을 막아낸 그야말로 세계사를 바꾼 승부를 펼친 리더다. 링컨의 노예해방 선언, 이 선언 이후 140년 만에 정말 미국 최초의 흑인 대통령 오바마 대통령이 나올 수 있었다. 그 씨앗이 바로 여기서 시작되었다. 지금 미국의 역사는 바로 이 링컨의 노예해방에서부터 다시 시작해서~ 1865년에 링컨 대통령은 암살당했다. 그 다음날 새벽에 숨을 거두었는데 그 아들이 보고서는 아빠는 어디 갔어요 물으니까 아버지는 하나님 곁으로 갔단다. 그런 말을 했단다. 아빠는 굉장히 행복한 것 같애요. 처음으로 웃는 것 같애요. 정말 수많은 청년들이 남북전쟁으로 희생이 되고 나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닌가 생각을 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예해방을 해야 된다는 신념, 미국이라는 나라를 지켜내야 된다는 신념을 끌고 왔고 그 과정에서 얼마나 괴로웠을까. 시신에서는 미소를 띤 것 같다고 들을 정도로 그 많은 짐을 혼자 짊어져야 했던 링컨에 대한 인물에 대해 항상 마음이 아프고 안쓰럽다. 링컨이 또 위대한 점은 1864년 두번째 대통령이 되어서 취임사에서 “아무도 미워하지 말자” 용서하자. 우리는 하나의 나라라는 것을 얘기하였다고, 그게 링컨의 빛나는 또 하나의 리더쉽이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