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전 강원도에 눈이 내린다는 일기예보를 예의 주시하며 중.고.대 동기인 친구 세명이 눈내리는 태백산 트레킹 계획을 세웠다. 당일 등반은 무리한 일정이라 태백시에서 일박하고 아침부터 산에 오르기 위하여 대전 제천 태백간 기차표를 연결하여 예매하였다. 여행의 기쁨으로 설레여선지 30분 전에 대전역에 도착한 우린 분주히 오가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일탈의 아름다운 상상만으로 그저 즐겁기만 하였다. 여유롭게 달리는 기차안에서의 대화의 주제는 자연스럽게 강원도에서 체험한 경험이 주가 되었다. 두 친구는 군생활 이야기와 여행 이야기로 대화의 꽃을 피웠지만, 나는 2월 특히 눈이 내리는 날이면 결코 잊을 수 없는 대관령의 값진 체험을 생각하게 된다. 1973년인가 강릉에서 교사로 근무할 때 겨울방학 동안은 대전 부모님이 살고 계시는 본가에 와서 편히 쉬고 개학을 앞두고 전 교직원의 소집일을 앞두고 있어 전날 출발하려고 모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 때는 기차를 타면 대전에서 강릉까지 꼭 12시간이 소요되었고 상경하여 비행기를 탑승하면 편하게 갈 수 있었다. 서울 대한항공에 가서 예매한 표를 티켓팅을 하려하니 눈이 많이 와서 이착륙이 어려워 결항이란다. 기차는 선로 위를 주행하니 괜찮을까 싶어 청량리역으로 전화를 하니 강원 남부 태백산맥 고지대는 폭설이 쌓여 기차가 힘이 없어 오를 수 없단다. 그리고 서울 강릉간 일체의 버스 노선도 폭설로 도로가 막혀 모두 운행하지 않는다고 한다. 오도 가도 못하는 난감한 지경에 춘천 강릉간 버스를 알아보니 조심스럽게 막차를 출발시키려 한다고 한다. 가까스로 춘천에 달려와서 강릉행 버스 좌석에 착석하니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다는 안도감에 그렇게 평안할 수가 없었다. 나는 차창에 스치는 눈 내리는 바깥 풍경을 마음껏 즐기며 시간만 기다리면 운전기사님의 솜씨로 안전하게 강릉에 갈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눈이 7-80cm이상 쌓였는지 산과 들 밭 나무 집들 온세상이 하얀 그야말로 동화속의 설국이었다. 노련해 보이는 운전기사도 집중하여 핸들을 잡고 운행하지만 고개를 오를때에는 같이 힘들어 하고 살짝 바퀴가 미끄러지기도 한다. 10여 미터 앞도 분간하기 어려운 거센 눈보라를 헤치고 달렸지만 두세 시간은 지체된 체 21시경 버스가 대관령에 도착하니 폭풍한설에 주위는 깜깜했다. 이제 이 고개만 넘으면 굽이굽이 강릉가는 하향길로 목적지를 목전에 두고 정차한 것이다. 대여섯 시간은 족히 좌석에 앉아 있었던 터라 화장실도 다녀오고 맑은 공기도 호흡하며 스트레칭을 하면서 몸을 풀고 버스에 올랐지만 출발할 기미가 보이질 않고 기다리란다. 그 때 도로상에는 버스 트럭 승용차등 여러 종류의 차들이 엉켜서 정차하였고 그 승객 수백 여명이 여기저기 혹한에 몸을 움츠리며 한낱 희망을 기대하며 서성이고 있었다. 그 때 경찰과 당국의 관계자들이 합의한 결과가 방송과 핸드마이크로 전해졌다. 폭설이 1m이상 쌓이고 야간이라 기온이 급하강하여 도로가 얼어 몹시 미끄러울 뿐아니라 바람이 세차게 불어 로로옆 도랑에 눈이 쌓여 도로와 도랑을 분간할 수 없어 대관령 구간을 전면 교통통제를 한다는 것이었다. 버스 기사님이 버스회사의 누군가와 통화를 하더니 오늘은 승객 모두 횡계에서 각자 숙박을 하시고 명일 6시경 밝아지면서 제설차로 눈을 밀어야 교통이 재개될 터이니 새벽 여섯시에 탑승하란다. 모든 사람들이 대관령 꼭대기 횡계에서 발이 묶여 난감한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그 당시 횡계는 통과하는 도로에 면한 전형적인 산골 면소재지로 띄엄띄엄 몇채의 집이 있었고 더구나 숙박시설은 여관이나 여인숙이 손가락을 꼽을 만큼 있었던 걸로 기억이 된다. 벌써 숙박시설 주인들은 방 하나에 대여섯 명씩 조를 짜서 손님을 신청받느랴 야단법석이었다. 그런 와중에 같은 학교 수학선생님을 만나니 둘이 공동 대처하려 손을 꼭 잡고 숙소를 잡기위하여 관망하고 있는데 한 여학생이 닥아와 인사를 하며 어머니께서 개학날이 가까우니 나가서 선생님을 모셔 오라고 하셨단다. 하늘이 도우셔서 그 어머니가 우리를 품어 주신 것이다. 불안했던 그 상황에서 안도의 한숨을 쉬면서 우리는 그 학생네 집으로 가니 어머니께서 반갑게 맞이해 주시며 방으로 안내하신다. 평소 사용하지 않던 사랑방을 내어 주셨는데 냉기가 차갑게 돌고 을씨년스러워 적응이 어려웠지만 찬밥 더운 밥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희미한 등잔불에 방바닥이나 벽과 천장에 신문지도 바르지 않은 맨 흙으로 방바닥엔 갈대로 만든 두툼한 자리가 깔려 있었다. 벽에는 못을 박아 옥수수가 삥 둘러 걸려 있었고 윗목에는 감자를 보관하는 낫가리가 있었다. 선생님들이 추우실테니 장작불을 많이 피우라는 어머니 말씀에 제자는 분주해졌고 아궁이에서는 마른 나무가 따다따닥 잘 타는 소리가 들린다. 조금 있으니 김이 모락모락 나는 옥수수와 감자를 내오셔서 시장기를 때우고 나니 세상 부러운 것이 없어 지금도 오성호텔 부럽지 않은 대관령 투박한 산골 방의 추억과 그 행복이 힘들때에는 나에게 평생 큰 위로와 용기가 되어 주었다.. 얼만나 불을 많이 지폈는지 방은 뜨끈뜨끈 달아 올랐고 두꺼운 돗자리위로 올라오는 열기로 등과 엉덩이를 지지는 현대판 천연 황토방 힐링을 일찌기 체험한 셈이다. 대관령은 겨울철에 몇날 며칠 눈이 내려 1m이상 쌓이면 마을간 이웃과 고립될 때도 있지만 아침 일찍 골짜기를 부지런하게 돌면 굶주려 미동도 하지않는 토끼나 산짐승을 주워 망태기에 담는 즐거움도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런 자연조건으로 우리나라 스키 국가대표급 선수들은 거의 모두 대관령 출신 강릉여고와 강릉농고 학생이거나 졸업생 출신들이었다. 다음 날 새벽 버스에 탑승하니 동해의 찬란한 일출을 받으며 강릉으로 달리는 차창에는 도열하여 반기는 금강송이 환영하는 듯 기억속의 마음은 늘 환희의 개선장군 같았다. 얼마전 대관령에 갔을 때도 옛 추억을 소환하여 고마움을 표하고 싶어 그집과 학생을 찾아보려 했지만 쌍전벽해같이 달라진 모습에 조금도 빌미를 찾을수 없는 아쉽고 허전한 마음으로 발길을 돌려야 했다. 선인들이 하시는 말씀에 철이 들어 부모에게 효도하고자 하나 부모님은 돌아가셔서 뵈올 길 없고, 지나온 삶의 역정중 수많은 고마운 분들에게 도움과 은혜 중에 살아왔지만 만날 길 없고 보답할 길 없으니 참으로 한스럽고 안타깝다 하지 않을 수 없다. 세월이 잠잠이 흘러 이제 어느덧 시니어 연령이다 보니 젊은 날 열심히 살면서 바쁘다는 핑계로 잊고 제대로 챙기지 못하며 살았던 셀 수 없는 소중한 기억들이 새록새록 살아난다. 그러나 지난 일을 후회하고 한탄한들 무슨 소용이 있을까? 현재의 위치에서 우리의 이웃과 나라와 후손들이 더 행복하게 잘 살 수 있는 자유민주주의 대한민국의 근간을 튼튼하게 세울 수 있도록 모범이 되고 덕이 되는 일원으로 사명을 다할까 다짐해 본다.
(2023년 2월 9일.10일 -1박2일 일정으로 태백산 설산 트레킹을 마친후 2월13일 수필 '강릉 가는 버스가 1박2일' 쓰다.)
첫댓글 2023년 3월1일 발행한 문학사랑에 게재한 '강릉 가는 버스가 1박2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