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thout even one hundred won
by D.J. YOON
WITHOUT EVEN ONE HUNDRED WON
Running to the backyard this morning
I had a good cry.
WITHOUT JUST ONE HUNDRED WON
I need it for my art class, Grandma
No money, No money, said she.
That would be the case
‘Cause we make a living by free rice we got
Once a month from the town office
Grandma, me and my brother, a newspaper boy
Each and every house in my village
With TVs and electric lights on
We still use a kerosene lamp
We still use it in the evening & at night
On the days I do a lot of homework
With a kerosene lamp on until late at night
I just fall sleep then I find myself black
Under my nose when I wake up in the morning
An animated film that comes out often on TV
I listen to my classmates to talk about it at school
Even when the children who watched TV are excited
About professional baseball and youth soccer games
I overhear over their shoulders one by one
Two years ago Mom had left home to Daegu
To make money, but with no news yet
I’ve heard nothing from Mom
WITHOUT EVEN ONE HUNDRED WON
Running to the backyard this morning
I cried out heartily.
Appreciation Review
In the early 1980s, the price of black-bean-sauce noodles was 500 won.
It is now 7,000 won, based on the most famous Chinese restaurant in Gwacheon.
That is, it went up 14 times.
I didn't have 1,400 won to buy an art class supply, so “I ran to the backyard and had a good cry.“
Crying to myself, "whether we don’t have even 1,400 won," with deep sad feeling, "I ran to the backyard and cried out heartily."
감상평
1980년 초 짜장면 값은 500원이었다고 합니다.
지금은 과천에서 제일 유명한 중국집 기준으로 7,000원입니다.
무려 14배 올랐습니다.
나는 미술 수업 준비물을 사야할 돈 1,400원이 없어서 “뒤안으로 달려가 실컷 울었습니다.”
나는 오늘 아침에 ‘우리 집엔 돈 1,400원도 없나’ 하면서 너무도 서러워 “뒤안으로 달려가 실컷 울었습니다.”
미술 준비
-윤동재
우리 집에는 돈 백 원도 없나 싶어
오늘 아침엔 뒤안으로 달려가
실컷 울었다
미술 준비 해 가려고
할머니에게 돈 백 원 달라니 없다며
주시지 않았다
우리 집은 한 달에 한 번씩
면소에서 내주는 배급 쌀로
할머니와 나
신문 배달을 하는 오빠가
살아가고 있다
우리 마을에는 집집
텔레비전도 있고 전등불도 켜고 있지만
우리 집은 아직
호롱불을 켜고 있다
숙제가 많은 날은
호롱불을 켜 두고
늦게까지 숙제하다 그냥 자고
일어나면 코밑이 새까맣다
텔레비전에 자주 나온다는 만화영화도
학교에 가서 아이들의 얘기를 듣고 안다
텔레비전을 본 아이들이 프로야구 소식과 청소년 축구 소식에 열을 올리고 있을 때도
나는 그들의 어깨너머로 가만가만 엿듣는다
돈 많이 벌어 오겠다며
대구로 나간 어머니는
이태째 소식이 없고 ...
우리 집에는 돈 백 원도 없나 싶어
오늘 아침에는 뒤안으로 달려가
실컷 울었다
#one hundred won #have a good cry #art preparation
첫댓글 감사합니다
살다보면 때로 실컷 울고 싶을 때가 있는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때는 크레용과 크레파스가 나뉘어 있었습니다. 크레용은 조금 저렴한 것, 크레파스는 더 비싸고 색깔도 다양해서 마룬색(자주색 비슷)이라는 것도 있는 고급품이었습니다. 마룬색이 있는 크레파스 사는 것은 턱도 없어, 그나마 어렵게 마련한 크레용을 가지고 갔는데, 크레용은 자꾸만 뭉쳐져서 그림이 그려지지 않았습니다. 쓰고 싶은 마룬색도 쓰지 못하고, 그림은 뭉쳐지고. 이래저래 그림은 제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마룬색 크레파스를 살 수 있는 어른이 되었을 때는 이미 그림 욕구가 소멸되어 버린 때였지요. 그때 마룬색 크레파스를 가지고 그림을 그렸다면 그림을 계속 그렸을까? 통곡은 아니어도 가끔 결핍 가득했던 어린 시절을 아프게 생각해 봅니다. 윤동재 님 시를 보고 김문철 님 번역시를 보고, 그 결핍과 처량함을 다시 생각합니다. 이런 것을 공감이라고 하는 거겠지요?
아 그랬군요 ..
크레용과 크레파스가 다르다는 것을 전 몰랐습니다.ㅎ
그 때 그 시절의 추억은 사람마다 다를 수 있지만 아픔이든 아련함이든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 기억은 주위에서 늘 발견하게 됩니다.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