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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산줄기를 따라서 원문보기 글쓴이: 靑松(전주김)
◈땅끝기맥 단독종주기◈
[바람재분기점⇒월출산⇒두륜산⇒달마산⇒땅끝마을 토말탑]
제 4구간
[풀치-월출산-구정봉-도갑산]
2005. 11. 1(화) 날씨 : 맑음(약간 무더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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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행(종주)거리
☞산행(종주)시간
09 : 20 - 15 : 50(총 6시간 30분 소요, 탈출 30분포함)
☞산행(종주)코스
불티재[풀치재:초령(草嶺)]→340봉→누릿재→금강거사해주최공현지묘(錦江居士海州崔公現之墓)→
월출산동봉(555봉)→660봉→금릉경포대3거리→통천문3거리→통천문→월출산천황봉→바람재3거리→
베틀굴→구정봉→억새밭헬기장→미왕재(억새밭 3거리)→암봉→도갑산→도갑산3거리안부→동원농장도로(화장실)→도갑사주차장
☞위치 : 전남 영암군 영암읍, 군서면, 강진군 작천면, 성전면 등 접경
06 : 50 전주출발
07 : 50 호남고속도로 광산IC(13번국도-영산포-영암)
09 : 10 불티재 도착
☞시간별 진행
09 : 20 불티재[풀치재:초령(草嶺)]출발
09 : 45 340봉
09 : 55 누릿재
10 : 35 금강거사해주최공현지묘(錦江居士海州崔公現之墓)
10 : 55 월출산동봉(555봉)(10분)
11 : 30 660봉
11 : 53 금릉경포대3거리
12 : 03 통천문3거리
12 : 12 통천문
12 : 18 월출산천황봉(중식 22분)
12 : 40 중식 후 출발
13 : 13 바람재3거리
13 : 27 이정표(억새밭 1.6km, 천황봉 1.3km, 베틀굴 0.1km, 구정봉 0.2km, 마애여래좌상 0.7km)
13 : 30 베틀굴
13 : 35 구정봉(5분)
14 : 10 억새밭헬기장
14 : 12 미왕재(억새밭 3거리)(5분)
14 : 28 암봉
15 : 13 도갑산(3분)
15 : 20 도갑산 3거리 안부
15 : 40 동원농장도로(화장실)
15 : 50 도갑사주차장
<영암읍에서 본 월출산>
★산 행 후 기
≪만추 월출산의 전모를 파헤치다≫
◈영암(靈巖)과 월출산
영암(靈巖)이라는 지명은 통일신라 때 행정구역을 개편하면서 생겨났는데 이때는 당나라와의 교역이 영암의 덕진포, 도포, 상대포, 남해포 등을 통해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었다. 중국에서는 월출산을 화개산이라고 부르기도 했는데 상선이 영암내해로 들어올 때 월출산의 모습이 자색 빛을 발하고 있어서 그렇게 불렀다고 한다. 당나라에서 영암과 월출산이 인구에 회자되자 풍수지리에 관심이 많던 당나라 황제가 지관을 보내어 월출산을 조사토록 했다.
조사를 마친 지관이 월출산에는 3개의 동석(動石)이 있어서 위대한 인물들이 많이 태어난다고 보고하자 황제는 그 동석을 모두 넘어뜨리라는 명을 내렸다. 그런데 그 중 하나의 돌이 다시 제자리에 가서 섰다고 한다. 그 때부터 모두들 신령스런 바위가 있는 고장이라 하여 영암군으로 칭했다고 한다(<동국여지승람> 참조). 현재도 이 신령스런 바위는 월출산 구정봉 벼랑에 선 채 영암을 굽어보고 있다.
일본에서 학문의 신으로 추앙을 받고 있는 왕인 박사는 백제 근초고왕 때 영암 구림 성기동에서 태어나 문산재에서 수학한 후 대학자가 되었다. 그는 일본 응신천황의 초청으로 천자문, 논어를 가지고, 도공, 야공, 직조공과 함께 도일하여 일본 아스카문화의 시조가 되기도 한다. 1600여년이 지난 지금도 영암의 왕인 박사 유적지에서 춘계대제가, 일본 히라카타시 왕인 묘에서 추계대제가 매년 개최되고 있다. 영암 구림에는 왕인석상, 책굴, 문산재, 양사재, 지침바위, 왕인박사탄생지, 성천(聖泉), 성천(聖川), 왕인사당, 상대포(왕인박사 도일시 배를 탓던 곳)가 현존하고 있다.
구림(鳩林)이라는 지명은 도선 국사의 탄생설화에서 기인했다. 통일신라말 어느 겨울에 구림마을 처녀가 성기동 통샘에서 빨래를 하던중 참외 하나가 떠내려오자 이것을 먹었는데 잉태하여 애를 낳았다. 처녀의 집안에서는 이를 부끄럽게 여겨 마을 숲 속의 바위에 아이를 갔다 버렸는데 며칠이 지난 후에 그곳에 가보니 비둘기들이 감싸고 있어서 다시 데려다 키웠다고 한다. 이 아이가 훗날의 도선 국사였다. 도선 국사 관련 유적으로는 국사암, 국암사, 백암, 도갑사, 월암사지, 도선국사비 등이 있다.
-자료인용-
이번 월출산구간은 불티재에서 밤재까지 한꺼번에 종주 할 수 있으나 월출산 단풍의 최고 절정기를 맞아 마음껏 주변풍광을 카메라에 담고 조망을 즐기고자 일부러 널널한 산행을 하고자한다. 그래서 두 번으로 끊어 종주하기로 하고 오늘은 도갑산을 지나 도갑사 주차장까지 마칠까 한다.
<불티재>
09시 20분 작천면에서 세운 사자상이 있는 불티재[풀치재:초령(草嶺)]에서 기맥을 이어간다. 곧바로 가로질러 오르는 길을 못 찾아 좌측(남쪽)으로 50m정도 도로를 따라 내려와 도로를 버리고 우측으로 공원 안 짙은 수림으로 빨려 들어가 길을 찾아 오른다.
청량한 기류가 맴도는 숲에서는 새들의 합창소리가 정겹게 귓전을 자극하고 묘지로 오르는 잘나있는 길을 따라 오른다. 곧이어 봉화금씨묘지(奉化琴氏)등 3쌍묘 위로 올라 빼곡하고 음침한 송 숲을 치고 1분 정도 오르면 기맥능선과 만나고 다시 좌측으로 돌려 호젓한 숲을 따라 서서히 한동안 고도를 높인다.
09시 45분 한차례 올라 340봉에 선다. 큰 참나무가 조망을 막아놓았으나 거목사이로 월출산의 동쪽의 암릉군이 훤칠한 자태로 시선을 끌고 있다. 그 위세에 눌려 기맥은 누릿재를 향해 다시 고도를 떨어뜨리며 쏴한 기류가 온몸에 파고드는 수림 지역을 따라 내림 질로 이어진다.
09시 55분 영암읍 개선리와 월남리를 잇는 유서 깊은 고개인 누릿재 안부에 내리선다.
★누릿재(황치:黃峙)와 풀치재(草嶺:불티재)
누릿재는 옛날 영암에서 강진, 해남으로 갈 때(걷거나 말을 타고) 이용했던 고갯길로 고개언덕에 풀밭이 많아 가을에 누런색을 낸다하여 누릿재라 불렀으며, 현재는 이용하지 않아 조그만 소로(小路)만 남아 있다.
세월은 옛 사람들이 삶의 애환을 담고 넘어 다녔던 고갯길을 세상에서 완전하게 밀어내 버리기도 한다. 강진에서 영암으로 통하는 누릿재도 도로의 발달과 함께 지금은 세상에서 사라진 이름이 되었다.
한때 누릿재는 강진, 해남, 장흥, 완도 사람들이 광주로 향하기 위해 통과했던 관문이었다. 바로 주변에 상대적으로 길이 넓은 풀치재가 있었지만 사람들은 누릿재만을 애용했다. 풀치를 통하면 월출산 자락을 우회해 영암읍 반송정과 청풍 삼거리를 거쳐야 하지만 누릿재만 넘으면 영암읍 개신리로 바로 연결된다.
60년대 초반까지도 이 질긴 전통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풀치재가 일제 때인 1930년대 중반 넓은 신작로로 탈바꿈했지만 누릿재의 가까움을 대신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다산 정약용의 유배길, 누리령
풀치재로 영암 가는 버스가 다니기 이전까지 강진 작천이나 성전면 사람들은 모두 누릿재를 이용해 영암장을 보러 다녔다. 지리적으로는 강진군에 속하지만 강진장보다 영암장이 훨씬 가까웠기 때문이다.
실제로 60년대 후반까지만 해도 장돌뱅이들은 누릿재를 통해 강진과 영암장을 넘나들었다. 특히 소장수들은 성전장과 영암 신북의 바람장, 영암장, 강진장 등 우시장이 있는 장들을 돌기 위해 누릿재를 주요 통로로 사용했다. 벌어먹을 논밭이 없어 보부상으로 연명하던 사람들도 무거운 짐을 이고 지고 누릿재를 넘었다.
다산 정약용 선생도 강진으로 향하는 귀향길에 누릿재를 넘었다. 당시 목포와 해남으로 길이 갈라지던 나주의 주막 삼거리 율정점에서 흑산도로 유배 떠나는 형 손암 정약전과 이승에서의 마지막 인사를 나눈 정약용은 눈물로 누릿재 고개를 넘으며 ‘탐진촌요’(耽津村謠)를 남겼다.
<누리령의 산봉우리 바위가 우뚝우뚝/ 나그네 뿌린 눈물로 언제나 젖어 있네./ 월남리로 고개 돌려 월출산을 보지 말게/ 봉우리 봉우리마다 어쩌면 그리도 도봉산 같아.>
탐진촌요는 유배를 떠나는 자의 아픔과 두고 온 땅에 대한 그리움이 짙게 배어 있다. 고개를 넘는 수많은 나그네들이 뿌린 눈물로 언제나 젖어 있던 누릿재는 세월의 흐름과 함께 변모해 지금은 더 이상 사람의 길이 아니다.
나주와 영암 경계, 풀치재 삼거리
누릿재는 가파른 고개로 이어진 험한 산길인 반면 풀치재는 구불구불 이어지기는 마찬가지지만 비교적 넓게 단장된 신작로다. 재의 정상은 영암과 강진의 경계로 삼거리가 나 있다. 하나는 영암, 다른 두 길은 강진 작천과 옴천으로 나눠진다. 일제시대에 크게 뚫린 풀치재 삼거리는 한때 주변 교통의 요충지 역할을 했다. 그러나 현재는 통행하는 차량을 거의 볼 수 없다. 지난 2000년 ‘풀치터널’이 뚫리고 4차선도로가 나면서 지금은 거의 버려진 길이 되고 말았다.
풀치재는 오랜 옛날부터 풀치재, 불티재, 풋치재 등 여러 가지 이름으로 불렸다. 그러다가 터널이 뚫린 최근에 와서야 풀치재로 통일됐다. 국토관리청이 터널 이름을 짓기 위해 풀치재가 속한 강진, 영암군과 협의해 풀치재로 최종 결정을 내린 것이다.
◆월남리
월남 마을은 지금이야 전형적인 산촌 마을이지만, 조선 시대까지만 해?역이 자리한 마을이었다. 조선 시대에 강진과 영암을 오가던 옛 길이 지금 13번 국도가 뚫린 풀치재가 아니라 풀치재와 천황봉 사이의 누릿재(황치)였는데, 해남 우수영(右水營)에서 한양을 가려면 강진 월남원(月南院)■누릿재■영암■천안■한양으로 이어 지는 ‘해남로’를 지났다. 그래서 제주도로 유배 가던 추사 김정희와 강진으로 유배 온 다산 정약용이 이 길을 따라와 누릿재를 넘었던 것인데, 당시 다산은 ‘월남원(月南院)’에서 월출산을 바라보고 한양을 그리는 시를 짓기도 했다. 월남원이 바로 현재의 월남리다
-자료인용-
다시 가로질러 사랑싸움하는 새들의 노래소리를 들으며 지척에서 우뚝 솟아 호령하는 월출산의 동쪽 암봉군의 위세에 주눅이 든 체 걸음을 재촉한다. 2분 후 송전전봇대가 나오고 우측(북쪽)으로 내려가는 길이 잘나있는 안부를 지난다.
곧이어 폭2m 정도로 벌채를 하여 잘 내놓은 산책로를 따라 가파르게 한동안 오름을 계속한다. 30여분 정도 조금 빡세게 올라 잠시 다리 쉼을 하면서 뒤를 돌아보니 국사봉과 활성산을 지나 이어지는 기맥의 연릉이 시야에 완연이 들어온다.
<활성산 조망>
또다시 급경사를 따라 꾸역꾸역 오름을 계속하고 한참 후 급경사가 조금 숨을 죽이는 것 같더니 산죽과 맹감넝쿨이 빼곡한 터널 숲으로 이어진다. 곧이어 기기묘묘한 월출산의 기암괴석과 장군봉 같이 우뚝 솟아 천하를 호령하는 듯한 암봉군은 최고의 극치로 산객을 감동의 도가니로 몰아넣기 시작한다.
갈수록 기세등등한 산죽과 어우러진 잡목터널을 뚫고 나가기가 너무도 난감하기만 하다. 하지만 간간이 앞에서 볼거리를 제공하는 파란하늘을 수놓은 선홍빛의 단풍은 너무도 아름답다.
10시 35분 지독한 잡목과의 한 판승을 마감하고 금강거사해주최공현지묘(錦江居士海州崔公現之墓)가 있는 암봉에 올라선다. 오늘의 첫 시험대인 월출산의 동쪽 암봉군이 눈에 바짝 다가와 있다.
잠시 후 바짝 다가가서 대슬랩을 우회하며 나가면 곧이어 집채만한 너덜바위군 다소 위험한 된비알이 기다렸다는 듯이 잔뜩 주눅을 주고 있다. 바위 위에서 훨훨 불타고 있는 선홍색의 단풍을 보며 한동안 너덜바위 가플막을 어렵게 붙잡고 오른다.
10시 55분 한차례 빡센 너럭 급비탈을 기어올라 멋들어진 소나무가 기지개를 켜고 있는 암봉안부에 좌측으로 조금 더 올라 월출산동봉(555봉)에 선다. 지나온 국사봉과 활성산이 훤칠한 모습으로 시야에 들어오고 서쪽으로는 향로봉과 구정봉의 톱날같은 암봉의 연릉이 그리고 북서쪽으로는 월출산의 맹주인 천황봉이 웅장한 위용으로 시선을 압도하고 있다.
<항로봉,구정봉>
조망을 뒤로하고 다시 안부로 내려와 좌측으로 돌려 암봉을 우회하여 돌아나간다. 오늘 산행은 종주목적이 아닌 산악트래킹 목적으로 산행을 하기로 당초부터 계획하여 아주 유유자적하고 널널한 심정으로 진행해 나간다. 즉 멀리 가는데 목적을 두지 않고 조망을 즐기는데 목적을 두고 산행을 할 것이다.
11시 30분 사위가 시원스럽게 펼쳐는 660봉에 선다. 여기서 우측(북동쪽)에 사자봉이 있고 북으로는 근엄한 풍채의 장군봉이 천군만마를 호령하고 있는 듯 하다.
지척에는 거대한 암봉인 천황봉이 기세좋게 솟아서 웅장한 위용을 과시하고 있고 그 아래는 골마다 단풍의 물결이 유영하고 있어 황홀한 조망은 자꾸만 발걸음을 붙잡고 있다.
<만추의 월출산 천황봉>
11시 53분 왼쪽으로 탈출로가 잘나있는 금릉경포대3거리를 지난다. 탐방로통제 안내판이 있는데 불티재에서 동봉을 지나 여기까지 구간은 험란한 지역으로 등산객의 안전을 위해 탐방로를 통제하고 있는바 지금껏 그것도 모르고 지나온 것 같다.
♣금릉경포대 계곡은 동백꽃 세상
다시 이정표(천황봉 0.4km, 경포대 2.5km, 구름다리 1.5km)를 지나 우측에 철제 울타리를 붙잡고 한차례 빡세게 암릉을 따라 오른다.
<천황봉>
12시 03분 이정표(천황봉 0.2km, 천황사 2.9km 구름다리 1.4km, 경포대 2.7km)가 있는 통천문3거리에 선다. 우측에 천황사를 내려가는 길이 잘나있고 많은 산객이 가쁜 숨을 토하며 오르고 있다. 다리 쉼을 뒤로하고 직진하여 가파른 나무계단을 따라 10여분 정도 오르면 통천문이다.
12시 12분 하늘로 오르는 관문이라는 통천문을 지난다.
이문은 월출산(月出山)정상인 천황봉(天皇峰)에서 동북쪽으로 약 100m아래에 있다. 천황사(天皇寺)쪽에서 바람폭포 또는 구름다리를 지나 천황봉(天皇峰)쪽으로 오를 때 만나는 마지막관문의 바위로서, 이 굴(窟)을 지나야 천황봉(天皇峰)에 오를 수 있다. 천황봉(天皇峰)에 이르는 문(門)의 역할 때문에 통천문(通天門)이란 이름이 생긴 것인데, 이는 월출산 최고봉을 지나 하늘로 통한다는 높은 문(門)이라는 데서 비롯된 것이다. 이 바위굴에 들어서면 시원한 바람과 함께 월출산의 북서(北西)쪽 능선이 펼쳐지며, 멀리 내려다보이는 영암(靈岩)고을과 영산강(榮山江)물줄기가 한눈에 들어온다.
12시18분 드디어 월출산 천황봉에 올라선다. 힘들게 올라왔던 월출산 천황봉에서의 조망은 마치 선계에 들어온 착각을 느끼게 한다. 천황봉을 필두로 사방으로 우뚝 솟아 호위하는 암봉군 그리고 그들을 호령하는 천황봉의 위용은 과히 추앙할만하다. 100여 평 정도의 평평하고 너른 산정에는 많은 산객들이 올라와 때가되어 금강산도 식후경이라면서 온통 먹거리를 털어 내고 한바탕 향연이 벌어진다. 전국에서 가지고온 각지방마다의 토속 주와 음식들이 선을 보이며 마치 즐비한 음식박람회장을 방불케한다.
▲월출산(808.7m) ○위 치
-자료인용(한국관광공사)-
<뒤돌아본 동부능선>
정상에는 표석과 함께 삼각점(영암26, 1990재설)있고 그 옆에 월출산소사지(月出山小祀址)와 다음과 같은 월출산소사지 안내문이 둥그런 계란형의 돌에 음각 되어 있다.
■월출산소사지 안내문
12시 40분 한켠에 앉아 점심과 조망을 끝내고 자리를 털고 일어나 이제 실루엣으로 다가오는 향로봉과 구정봉을 바라보며 월출산을 출발한다
<구정봉(상,하)>
잠시 후 힘센 장정 몇 명이 밀면 금방이라도 낭떠러지로 굴러 떨어질 것처럼 벼랑 끝에 아슬아슬하게 걸려있는 흔들바위가 눈앞에 나타나고 곧이어 다소 위험한 급경사 암벽을 따라 한동안 곤두박질하며 내림질한다.
뒤를 돌아보면 자꾸만 걸음을 잡는 천황봉 암봉군의 비경에 심취된 체 한참을 내려오면 바람재 3거리에 닿는다.
13시 13분 바람재3거리에 3거리안부에 내리선다. 남쪽에 경포대(2.3km)로 내려가는 길이 잘나있고 다시 이정표(구정봉 0.4km, 도갑사 4.3km, 천황봉 1.1km)의 안내를 받으며 억새 밭 가운데 울타리를 치고 반질반질하게 패여 있는 등로를 따라 구정봉을 향해 오름을 계속한다.
<구정봉가는길>
13시 27분 한차례 철계단을 따라 올라 이정표(억새밭 1.6km, 천황봉 1.3km, 베틀굴 0.1km, 구정봉 0.2km, 마애여래좌상 0.7km)가 있는 분기점에서 이정표의 지시에 따라 베틀굴을 향해 진행한다.
13시 30분 베틀굴에 도착해보니 그 유래가 적힌 안내문이 옆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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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틀굴(窟)
<구정봉부근에서 바라본 천황봉>
13시 35분 베틀 굴을 뒤로하고 조금 올라 드디어 구정봉에 선다. 여기도 구정봉과 마애 여래좌상안내문이 세워져 있다.
■구정봉
■마애여래좌상(磨崖如來坐像)
14시 10분 사방으로 억새가 포진한 헬지장에서 좌측으로 내리선다. 가야할 도갑산과 월각산이 눈앞에 뚜렷하고 그 뒤로 둔중한 벌매산도 시야에 확연히 들어온다. 양쪽에서 춤사위를 보이며 열려하게 산객을 환영하는 억새군락을 따라 조금 내려오면 억새밭 3거리인 미왕재다.
14시 12분 이정표(도갑사 2.4km, 천황봉 3.0km, 구정봉 1.5km)와 억새밭 안내문이 있는 미왕재에서 잠시 다리 쉼을 한다. 여기서 100m정도 조금 가다 좌측으로 지릉을 따라 내려가면 무위사가 나오는데 자연휴식년제 기간을 설정하여 출입을 통제하고 있다.
◈ 무위사 극락보전(국보 제 13호)은 건축학적 측면에서도 단아한 미학으로 유명하다. 무위사 건물들은 대부분 이 사찰의 네 번째 중건인 1555년에 건립된 것이지만 이 극락전만은 1430년(세종 12)에 지어졌다. 극락보전 건립 작업은 당대 최고 기술자들이 참여한 국가적인 사업이었다고 한다.
건물의 모서리에 추녀가 없고 용마루까지 측면벽이 삼각형으로 된 맞배지붕의 미학이 넘쳐 난다. 또 맞배 지붕은 측면 구조가 노출되므로 그 미관을 중요하게 여겼는데, 전문가들은 ‘조화로운 면 분할로 단정한 맛을 소박하게 표현하고 있다’고 평가한다.
14시 28분 시야가 터지면서 작은 암봉전망대가 눈앞에 나타나 잠시 걸음을 멈춘다. 정면에 가야할 도갑산, 월각산, 벌매산으로 이어지는 기맥의 연릉이 뚜렷하고 기맥을 중심으로 좌측은 성전저수지가 우측은 도갑저수지가 각각 햇살을 머금고 현란하게 일렁거리고 있다.
<도갑산으로 이어지는 기맥 연릉>
우측(북쪽)에는 장쾌하게 우뚝 솟은 노적봉의 위용이 산객을 매료하며 유혹하고 있다. 다시 내림길에 손에 쥐기만 하면 붉은 물감이 뚝뚝 떨어질 것 같은 선홍빛의 단풍 너무도 아름답다!!!
<노적봉>
방향을 우측으로 서서히 틀면서 조금 내려오면 기맥은 유순해지면서 산죽군락으로 이어지고 갈수록 산죽의 기세는 강도를 높이며 숨이 막힐 듯한 터널로 돌변하여 계속된다.
15시 13분 한동안 30여분이상 지겨운 산죽터널을 통과하며 올라 도갑산에 선다. 여기도 산죽이 사방으로 잠식하여 그저 답답하기만 하여 곧바로 끊임없이 따라 붙는 산죽을 따라 내리 선다.
15시 20분 이정표(도갑산 주차장 2.1km, 구정봉 3.5km, 억새밭 1.9km)가 있는 안부에 도착하여 오늘은 여기까지 끝내기로 하고 곧바로 도갑산주차장을 향해 우측으로 산허리를 따라 내림질한다.
15시 40분 임도가 나있고 계곡유원지 화장실이 있는 동원농장도로에 내리서서 임도를 따라 주차장을 향해 진행한다.
15시 50분 10여분간 도로를 따라와 도갑사주차장에 도착하여 오늘의 산행을 모두 마감하기로 한다.
◈ 도갑사 도갑사는 산세가 빼어나고 풍광이 아름다워 옛부터 '호남의 소금강'이라 불리는 월출산, 호랑이가 앞발을 들고 포효하는 형상이라는 산자락 아래 자리잡고 있다. 신라의 4대 고승 가운데 한 분이신 도선(道詵)국사께서 창건하신 대가람으로 그 뒤를 이은 수미왕사와 연담선사, 허주선사, 초의선사 등 역대 고승대덕들이 주석 하시면서 깨달음의 참다운 이치를 널리 펼치셨다. 해탈문(국보 제50호)과 마애여래좌상(국보 제144호), 석조여래좌상(보물 제89호), 문수 보현보살 사자 코끼리상(보물 제1134호), 대형석조, 그리고 도선수미비 등 많은 문화재를 소장하고 있는, 유서 깊은 고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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