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시작 / 조미숙
뜨거웠다. 뜨겁다 못해 익어버리는 느낌이었다. 땡볕에 주차된 차 문을 열면 더운 공기가 훅 끼친다. 쇠라도 건드리면 화상을 입은 듯 화들짝 놀란다. 숨이 막힌다. 냉방을 최대로 켜고 달려도 뚝뚝 떨어지는 땀을 닦을 새도 없이 어느덧 목적지에 도착한다. 교실 에어컨 바람에도 쉬 마르지 않는다. 집에 돌아와도 마찬가지다. 우리 집은 4시부터 6시까지 햇볕을 듬뿍 받는 절정의 시간이라 미칠 것 같았다. 34도 최고의 온도를 나타낸다. 선풍기에 의지해 참다가 남편이 들어오기 30분 전에 에어컨을 켠다. 하루 종일 더운 데서 일하고 온 남편에게 최선의 예우를 보인다.
어쩌다 보니 작가가 되어 있었다. 내 치부가 고스란히 드러나 창피하기도 했고 혹시 어떤 일에 내가 잘못 생각하지는 않았는지 걱정되었다. 내 글에 책임감이 무겁게 나를 짓눌렀다. 사람들은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작가님!”을 연발한다. 정신없이 쏟아지는 칭찬과 선물에 어안이 벙벙했다. 인터넷에 내 책이 보이는 신기한 경험을 했다. 하루하루 꿈같은 나날이었다. 그렇게 날씨만큼 뜨거운 여름을 보냈다.
틈틈이 까서 모아 둔 마늘을 갈러 방앗간에 가려고 나왔는데 한기가 들었다. 나도 모르게 “아이고, 추워!”한다. 사삭스럽게도 바로 어제까지만 해도 더워서 죽겠다고 했는데 사람 마음 참 간사하다. 그래도 이젠 가을이 왔나 보다고 생각하니 살 것 같다. 풀벌레 소리가 정겹다.
우여곡절 끝에 마음이 맞는 사람들이랑 여행을 가기로 했다. 힘들게 수업까지 조정했다. 하지만 이틀 전부터 몸이 이상했다. 갑자기 한기를 느낀 게 징조였나, 감기 몸살 같았다. 딱히 증상은 없는데 몸이 무겁게 가라앉고 코가 좀 아팠다. 우선 키트로 코로나 검사부터 했는데 음성이었다. 병원에서 감기약을 지어 먹으려고 갔는데 열이 난다고 코로나와 독감 검사부터 하자고 한다. 8월 말부터는 코로나 검사비가 제값으로 바뀌어 비싼 돈을 낸다고 했는데 덜컥 겁이 났다. 그래도 나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 피해가 가면 안 될 것 같아 검사를 받았다. 다행히 둘 다 음성이었다. 약 기운이 있으면 좀 괜찮고 자고 일어나면 다시 아픈 날이 계속되었다. 그래도 모처럼 계획한 여행을 포기할 수 없었다.
지리산으로 여섯 명이 떠들썩하니 떠났다. 태풍과 비 예보로 제주도에서 지리산으로 목적지가 바뀌었지만 개의치 않았다. 도착하자마자 인월 하나로마트에서 시장을 봤다. 가능하면 지역 상품을 이용하는 게 착한 여행이기도 해서 그렇게 준비 없이 간 것이다. 자기가 먹고 싶은 것을 마음껏 고르라는 말을 듣고 난 과자 한 봉지와 탄산음료를 골랐다. 먼저 도착한 일행이 대부분의 것은 사 둔 상태였다. 그런데 수레 안에 어울리지 않는 물품이 있었다. 냉동 떡갈비와 후르츠칵테일 캔을 보고 이건 뭐하러 샀냐는 타박들이 이어졌다. 그이는 분명 마음대로 사라 해서 캔은 다음 날 아침 샐러드에 넣으려고, 떡갈비는 한우는 비싸 눈치가 보이니 대신 먹고 싶어서 샀다고 억울해했다. 다시 한번 그 말을 꺼내면 백 원의 벌금을 내기로 하면서도 그 일은 여행이 끝나도록 되살아나 우리에게 웃음을 주었다.
짐도 풀기 전에 두 시간여 인월-금계 구간을 걷고 나서 둘레길에 있는 유명 식당에서 정신없이 점심을 먹었다. 배 두드리며 나오니 먹음직스럽게만 보였던 빨간 사과가 자세히 보였다. 주렁주렁 열리긴 했지만 죄다 상태가 좋지 않다. 잦은 비 때문인가 알 수는 없지만 벌레 먹거나 썩었고, 고랑에 떨어져 수북하게 뒹구는 것을 보니 마음이 아팠다. 그러면서도 사과값이 비쌀 거라는 현실적인 걱정부터 앞섰다.
한 시간 정도 마을로 내려오니 500년 된 느티나무 노거수가 우리를 반긴다. 주변에 평상처럼 나무를 깔아 두어서 한숨 자고 가면 딱 좋을 것 같았다. 다 같이 누워서 나뭇가지 사이로 보이는 파란 하늘을 보며 잠시 여유를 즐겼다. 시시각각 바람 따라 바뀌는 나뭇잎 그림은 절로 공상을 펼치게 했다. 곳곳에 수령이 많은 나무가 마을을 지키고 있었다. 노르스름하게 물들어 가는 벼 다락논이 고운 빛깔을 낸다. 산간 마을이 고즈넉하다. 자꾸만 발길을 붙잡는 풍경을 뒤로 하고 숙소로 갔다. 지리산 흑돼지 삼겹살 파티로 배를 채우고 쉴 새 없는 수다로 지리산 휴양림의 밤은 깊어갔다. 자리에 누우니 계곡물 소리만 우렁차게 우리를 감쌌다.
다음 날 아침 일찍부터 부지런한 동생 덕분으로 또 배를 든든하게 채우고 숲해설을 들으러 갔다. 우리 일행 중 세 명은 숲해설가지만 부담스러워할까 봐 그 사실을 알리지 않고 아무것도 모른 척했다. 그 뒤에 휴양림 내 힐링 숲길을 또 걸었다. 돌아오는 길은 오르막길이라 너무 힘들어서 묘수를 꺼내 들었다. 다 같이 가위바위보를 해서 이긴 사람은 스무 걸음, 진 사람은 열 걸음 식으로 놀면서 왔더니 금방이었다.
지인 찬스로 거나하게 차려진 밥상을 대하고 우린 또 게걸스럽게 먹어 치웠다. 그리곤 귀촌한 지인의 집에 무단 점거하고 앉아 작정하고 마주한 지리산 풍경을 훔쳤다. 친절한 주인은 시원한 차를 대접해 줬다. 풍선덩굴 씨앗 몇 개를 얻어서 주머니에 가볍게 넣고 부러움은 잔뜩 껴안은 채 백무동 계곡으로 가는데 몹시 고단했다. 하지만 모두 간다고 나섰는데 나만 빠질 수 없어 그냥 걸었다. 계곡물 소리에 모든 게 씻겨 나가는 듯싶다. 갑자기 맨발로 걷고 싶었다. 용감하게 발에게 자유를 주었다. 수시로 비가 오던 날씨라 길이 젖어 있었다. 발끝에서 찰박거리는 물이 시원하다. 자갈길은 발바닥이 아프지만, 바위투성이 길은 매끈해서 착 안기는 느낌이 들어 기분이 좋다. 그렇게 첫나들이폭포까지 다녀와서 족욕탕에 발을 담그니 그저 시원하다. 다시 신발을 신고 걸으니 날아갈 것 같다. 보통 7, 8 천 보만 걸어도 다리가 묵직한데 아니었다. 피로가 싹 가셨다. 전날보다 잠을 잘 잤다.
마지막 날엔 뱀사골계곡을 걸었다. 전날에 기분 좋았던 기억에 또 맨발로 걸었다. 뱀사골계곡은 무장애 길이 잘 닦여져 있어 맨발인 게 거의 의식되지 않았지만 숲길에서는 자연의 정기를 듬뿍 빨아들이는 것처럼 한발 한발 정성을 들였다. 오로지 걷는 일에만 열중했다. 이렇게 딱 일주일만 지냈으면 좋겠다. 아무 생각 없이 맛있는 거 먹고 즐겁게 걷고 하는 날이 이어진다면 더할 나이 없겠다.
2박 3일 일정에 매일 2만 보 가까이 걸었지만 살은 쪄서 돌아왔다. 다시 일상을 마주하니 할 일이 넘친다. 손 놓고 지내던 집안일도 해야 하고 잠시 쉬던 수업도 재개되어 바빠지고 매주 글쓰기도 해야 한다. 어쩌다 보니 또다시 일요일 밤이 되었다. 이젠 더 이상 미룰 수가 없어 서둘러 컴퓨터를 켠다. 이러면 안 되는데 난 또 이렇게 2학기를 시작한다.
첫댓글 그래도 저보다 낫네요.
저는 지난 번에 써 둔 글, 재활용합니다. 하하.(선례)
어찌됐건 쓰셨잖아요.히히!(조미숙)
지리산만 들어도 '하룻밤만 재워 주세요.'가 생각 나서 웃으며 읽었네요. 오랜만에 써도 길게 잘 쓰셨습니다.(박선애)
그러게요.
그 용기는 어디서 났을까요?
쟁취하는 자만이 결혼에 이릅니다. 하하!
맞아요. 어쩌다 보니 또다시 일요일 밤이 되더라구요.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백현)
놀라울 따름입니다.
잘 하시면서. 하하!
작가님과 함께 글 쓰게 돼서 영광입니다. 보내 주신 책도 잘 읽었습니다.
황송한 말씀. 하하!
작가님과 같이 할 수 있어 영광입니다. 이번 주일에 완독 했습니다. 감동입니다. 감나무뿐만 아니라 밭둑에 있던 대추나무, 개복숭아 나무까지 심지어 건너편 밭둑에 있던 살구나무까지 모조리 사라지고 빈 밭만 허망함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ㅠㅠ
고맙습니다.
조 작가님만 글쓰기를 미룬 것이 아니고 다 마찬가지입니다.
하하! 위안이 되네요.
작가님들이 계셔서 더 많이 배울 수 있을 것 같네요. 감사합니다.
아이고 저도 아직 많이 부족합니다.
지리산 여행기,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작가가 되시더니 더 잘 쓰시네요.
행복이 묻어나는 글 읽으며 저
도 덩달아 기분이 좋습니다.
글이 술술 읽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