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이 12월 1일입니다. 벌써 2023년의 마지막 달이 된 것입니다. 연말연시가 된 것입니다. 연말이 된 것이고 곧 또 연초가 될 것이고 2024년 새해가 시작될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 새해나 헌 해는 없습니다. 날마다 뜨고 지는 해는 그 해가 그 해입니다. 태양계의 운행, 지구의 공전과 자전이 있을 따름입니다. 반복되는 그 과정을 우리가 지구의 움직임을 기준으로 구분하고 거기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새 해나 일 년 계절과 하루나 밤과 낮 등의 개념을 우리가 만들어 낸 것입니다. 우리의 의식이 그 개념에 끌려가는 것입니다.
해가 한 번씩 바뀔 때마다 우리는 나이를 한 살씩 더해갑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생명체에 변화가 있을 뿐입니다. 사실 생물이든 무생물이든 모든 물질에 변화가 있을 뿐입니다. 생물의 경우 그 변화는 생로병사라 해도, 기승전결이라 해도, 생멸이라 해도, 생사라 해도 모두 같은 의미입니다. 탄생과 성장과 노화와 소멸입니다. 그 각각의 해가 바뀔 때마다 우리는 각기 다른 감정을 경험합니다. 어렸을 때는 미래에 대한 기대의 감정이 큽니다. 성장하는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젊었을 때는 설렘의 감정이 큽니다. 짝짓기 활동과 먹이활동을 위해, 연애와 성공을 위해 왕성하게 활동하기 때문입니다. 신체적 변화가 기본이고 그에 따라 정신과 감정의 변화가 생겨납니다. 늙어가면서 몸의 힘과 기능이 약화되는 걸 느끼다가 어느 때부터인가 현저히 쇠약해지는 걸 느낍니다. 그에 상응해서 마음 상태도 달라지고 달라져야만 하고 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몸의 노화 때문에 마음의 의지나 기운이 약해지는 것입니다. 욕구나 욕망이 점점 줄어들고, 좋은 일이든 나쁜 짓이든 실행이 줄어드는 것입니다. 걸음걸이나 언행 즉 태도가 더 점잖아집니다. 점잖아 보이게 됩니다. 더 도덕적인 사람처럼 보이고, 또 사회로부터 그렇게 행동하도록 기대됩니다. 점잖아지는 것이 아니라 기운이 빠진 것이고, 힘이 빠진 것이 도덕적으로 성숙해 가는 것처럼 보일 뿐입니다. 마음속에는 아직 젊음에 대한 미련이 남아 있고 욕구와 욕망이 몸의 노화에 비례해서 아직 그 정도로 줄어들지 않았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결국 마음도 몸의 상태를 따라갑니다.
나는 40대 초반부터 흰머리가 많아졌고 그래서 50대 후반까지 염색을 했었습니다. 세븐에이트 튜브 두 개에서 각각 묽고 투명한 젤과 좀 더 진하고 흰색인 젤리 같은 물질을 은박지 위에서 섞어 물렁한 검은 물질을 머리 전체에 고루 바르고 7-8분 기다렸다가 감아서 그 검은 물질을 씻어내고 나서, 거울을 보면 한 10년은 젊어 보이곤 했었습니다. 십 수 년 동안 그렇게 위장을 하고 다녔으나 그렇게 하는 게 눈에 해롭다거나 두피 건강에 해롭다고도 하고, 또 흰머리가 머리카락 밑동에서부터 드러나 보이기 시작하면 위선이 점점 드러나는 것 같아 마음이 편치 않아지고, 어느 정도 뚜렷하게 눈에 띄게 되면 볼썽사나워서 또 다시 염색에 대한 마음의 부담이 증가하곤 했습니다. 위장하는 데도 한계가 있는 법이어서 50대 후반 어느 시점에서 포기하고 커밍아웃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어느 날 미장원에서 머리를 자르고 나니 내 머리가 완전 백두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런 변화된 내 모습을 보고 맨 처음 든 생각이 ‘이제 나는 점잖아져야겠구나’였습니다. ‘남들 앞에서 까불면 안 되겠구나’였습니다. ‘걸음걸이도 말투도 행동도 조심해야겠구나’였습니다. 그래서 늙어서 힘 빠지면 점잖은 것처럼, 도덕적으로 성숙해진 것처럼 보이는 것입니다. 사실 마음은 아직 거기에 적응하지 못하고 철없는 상태에 있을 가능성이 큽니다. 몸의 변화가 늘 먼저고 마음의 변화가 항상 그 뒤를 따라갑니다. 그 갭 때문에 우리는 착각하기도 하고 당혹스럽기도 합니다. 몸은 이미 상당히 노화가 진행되었는데 마음은 거기에 비례해서 같은 정도와 속도로 노화를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에 발생하는 착각입니다. 몸의 변화는 물질적 변화여서 저절로 이루어지지만 마음에는 의지가 작용하므로 때로는 몸의 변화를 잘 느끼지 못하거나 느낀다고 해도 그 변화를 자연스럽게 수용하지 않으려 하고 거부하기도 합니다. 마음은 보통 자기 주제를 잘 모릅니다. 한번은 이런 적도 있습니다. 10년 쯤 전 어느 여름날의 사건입니다. 날마다 찾아가는 뒷산 산책길에 전날 밤 태풍 때문에 아름드리나무가 밑동이 부러져 넘어져 산책길을 허리 정도 높이로 가로 막고 있었습니다. 그걸 넘어가려고 쓰러진 나무의 줄기 위로 올라서서 가볍게 뛰어내리려고 시도했습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영 딴판이었습니다. 사뿐히 착지하리라는 기대를 정면으로 배신하고, 내 몸이 마치 뭔가 묵직한 물질이 담긴 가죽 자루처럼 땅바닥에 철퍼덕하고 떨어져 내리면서 온 몸에 추락의 충격이 전해져서 그 자리에 잠시 쪼그리고 앉아 몸을 추슬러야만 했습니다. 정말 쪽팔렸습니다. 그게 몸과 마음의 갭입니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누구나 입버릇처럼 하는 말이 “시간이 너무 빨리 간다,” “세월이 너무 빠르다”입니다. 나이에 따라 세월에 가속도가 붙는다고들 합니다. 40대엔 시속 40킬로미터로, 50대엔 50킬로미터로, 60대엔 60‘마일’로, 70대엔 70‘마일’로 가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아마도 80대엔 ‘광속’이 될 것 같습니다. 바꾸어 말하면 나이 들수록 미래가 빠른 속도로 짧아집니다. 그래서 어느 혁신위원장님이 미래가 짧은 사람들이 너무 나서면 안 된다고 말했다가 욕을 ‘서리나게’ 얻어먹었습니다. 그러나 어쩜 좋죠? 노인에게뿐만 아니라 청년에게도, 청년에게 뿐만 아니라 갓난아이에게도 미래는 결코 길어지지 않는데, 누구에게도 미래는 결코 길어지지 않고 꾸준히 짧아지는데, 속도에 대한 느낌에 차이가 있을 뿐인데 말입니다.
가는 헌 해 잘 마무리하시고 오는 새해에도 늘 건강하시고 뜻하시는 일들이 순조롭게 이루어지길 기원합니다.
첫댓글 저도 언제쯤 커밍아웃을 해야 할지 생각해 보고 있습니다. 우선 몸을 단련시켜 얼굴이 좀더 건강하게 보일 때 시도할까 합니다. 흰머리를 드러내는 게 자신감으로 여겨질 수 있게요. ㅎㅎㅎ
호미님 은발이 멋있어 보였어요. ^^
저두 언젠가는 단정한 은발을 하고 싶어요.
저는 정년하면 자연인으로 살아가야겠다고 결심했는데 아직 강의중이라서.
저도 호미님처럼 은발이 어울리기를 간절히 바라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