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증법 입문] 홍승용 소장님 강의 및 논의 내용 중에서 개인적으로 관심 있는 내용들 정리해서 올립니다. 한번 쯤 생각해 볼 여지가 있는 내용들이라고 여겨서 올립니다. 강의 일자에 상관없이 강의 내용 정리되는 대로 조금씩 올립니다.
변증법의 매력은 변증법이 어떤 원의 사각형 같은 것을 약속한다는 점 -물론 약속만 하는 것은 아닙니다-. 즉 합리성과 동화되지 않는 것, 비동일자, 직접 구성되지 않는 것 등을 그래도 구성하고 따라서 의식 자체를 통해 비합리적인 것을 파악한다는 점 혹은 헤겔의 어법을 훨씬 더 현대적인 대립상에 적용하자면 합리 자체를 통해 합리적인 것과 비합리적인 것의 대립을 넘어섰다고 약속하는 점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번역본 77쪽)
변증법적 사유는 개별자를 그 상위 개념에 환원함으로써 이 개별자를 단순히 더 보편적인 개념들 아래 포괄함으로써 규정하지는 않는 사유인 것입니다.(번역본 78쪽)
변증법적 사유는 개별자를 그 상위 개념에 환원하는 건 아니다. 개별자를 상위 개념에 환원하면 이론 역할을 했다고 자부한다. 그다음에 추상적 개념으로 현상들을 설명 기술하면 자기가 이론가가 됐다고 자부한다. 온갖 현대 이론들이 그렇다.
과연 그 이론에서 어떤 실천이 나오는가도 봐야 하고, 현실적 힘을 갖는가, 그냥 말장난 아니냐 하는 것도 봐야 한다. 이렇게 보든 저렇게 보든 추상적으로 압축해서 보면 이론이냐. 물을 수 있다.
이론화하면 현상이 더 잘 보이니까 사회학에서는 계속 이론화하려고 하는 것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지금 말하는 각각의 것들이 이론화하면 한 축에 쫙 보이면서 현상들을 한 번에 설명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의 축으로 설명하면 이 안에는 들어가지 않는 바깥에 들어가는 것들이 있다. 이 바깥에 있는 것들은 무엇으로 설명할 것인지 이해가 안 된다. 50%만 갖고 있어도 그 이론 안에 집어넣는다. 그러면 나머지 50%는 우리가 말하는 것과 어느 정도의 차이가 있는지 설명이 안된다. 그 잔여 부분들은 모든 이론이 다 안고 있다.
예컨대 자본론을 어마어마하게 두껍게 썼지만 그 자본론 바깥에 있는 영역이 훨씬 더 많을 것이다. 자본론으로 포착되는 현대사회의 자본주의 문제가 과연 우리 실천에 핵심적으로 도움이 되는가, 우리가 우리 문제를 극복하는 데 중요한 통찰이 되는가는 따져야 하는 것이다.
그렇게 압축해서 보여주는 게 지적 유희인지 문제 해결을 위한 진짜 지침이 될 만한지, 발판이 될 만한지 자료로서라도 가치가 있는지, 아니면 현실을 그렇게 보도록 왜곡하는 건지, 거짓말도 그렇게 할 수 있다.
그래서 이데올로기적인 기능을 하는 건지. 아니면 진짜 뭔가 해방적이고 변혁적인 사고를 부추기는 데 도움이 되는지, 그 안에 들어가느냐 바깥에 얼마나 있느냐, 아니면 얼마나 많이 포괄하느냐 이것도 중요하지만 그 이상으로 그것들이 진짜 핵심을 놓치거나, 흐리거나, 왜곡하는 건지 그 부분이 훨씬 더 중요할 것이다.
사회는 너무 많이 바뀌고 있고 우리의 나아갈 바는 명확하지 않은데 우리가 이렇게 책상에 앉아서 공부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냐 물을 수 있다. 우리가 모두 길에 나가서 운동을 할 수는 없는 것이다.
좀 전에 말한 것처럼 현상을 보는데 좀 더 이론화돼서 뭔가를 볼 수 있는 그 역할을 한다면 연구자로서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 연구가 어느 쪽을 지향하느냐까지 나오면 좀 더 명확하게 이해가 될 것 같다.
연구자들의 기본적인 부채다. 그런 부채감 없이 그냥 앉아 있으면 자본의 하수인 되기 쉽다. 자기가 하고 있는 기술記述 하나하나가 그 자체가 이미 벌써 사회에 대한 발언이다. 이미 전투를 벌이고 있는 것이다.
그 전투를 의식 안 하기 때문에, 그럴 경우에 본능적으로 잘못하면 지배적인 문화 이런 것들에 휘말려 들어갈 가능성이 훨씬 크다. 명확하게 의식하고 가면 경계도 하고 자기가 무엇을 추구할 것인가, 무엇을 노릴 것인가 단어 하나하나도 어떻게 쓸 것인가 다 의미가 있어지는 것이다.
단어 하나하나에서 불꽃이 튄다고 보면 되는 것이다. 논쟁적인 사고를 하는 것이다. 그냥 이렇게 아무 생각 없이 쓰는 게 아니라 계속 그 단어 하나하나를 논쟁적으로 써야 한다. 논쟁에다가 하나 더 추가한다면 전략적 사고까지 해야 한다.
어떻게 써야만 이게 효과적으로 다가올 건가 고민해야 한다. 그런데 아도르노 논리로 보자면 전략적으로 사고하는 것은 모든 걸 틀 안에서 짜 맞추고 끼워 넣고 하는 그런 틀로 다시 우리를 몰아넣자는 얘기냐. 반론을 제기할 수 있다.,
아도르노 논리는 다분히 전략이라는 개념에 대해서 거부감이 있을 것이다. 그건 도구적 이성의 영역 카테고리다. 자기 논리 내부에도 있는 것이다. 해방이나 실천과의 관계, 이런 것들이 남아 있다. 맑스주의 전통이 스며 들어가 있다.
사태 자체를 강조하는 이유가 내재 비판과 연관이 있다. 전략을 짜려고 해도 사태를 파악해야 하고 사태 자체를 면밀히 봐야 한다. 그렇게 보다 보면, 제대로 현실을 파악하면 어떤 전략이라든지 새로운 대안이 나온다고 얘기할 수 있다.
레닌은 진실 또는 이론에 근거해서 전략을 찾았다. 반대로 스탈린은 전략에 근거해서 진리를 만들었다. 어느 쪽이 합당하냐 했을 때 레닌이 합당하다는 사람도 있고 스탈린이 더 맞지 않냐 이런 사람도 있다.
전략은 우리가 ‘목표 의식’이라고 하는 것이다. 목표 의식과 거기에 들어가는 수단들을 고려해서 이론은 따라가는 것 아니냐. 그래서 니체주의적인 원근법적 사고, 담론이 힘이고, 권력이라고 하는, 푸코 등등의 틀들이 스탈린주의하고 뭐가 다르냐. 주체 역할을 그만큼 강조하는 것 아니냐. 물을 수도 있다.
변증법이 이른바 실증주의를 전적으로 거부한다면서 사실은 실증주의에 빠지는 것 아니냐, 그러니까 주체가 적극적으로 투쟁해서 없는 걸 있게 만드는 그 투쟁도 해야 하는 것 아니냐, 물을 수 있다.
지젝 같은 경우가 그쪽이다. 없는 게 있게 되는 것도, 그러니까 유토피아 좋다 가자 한다고 해서 가지는 건 아니다. 조건이 있어야 하는 것이고 현실적인 조건 안에서 갈 수 있는 힘, 일종의 무기다.
가능성이다. 그냥 주의주의로 가서도 안 되지만 그렇다고 또 주의주의적 요소가 전혀 없어져도 항상 대세만 따르게 되는, 잘못하면 기존에 있는 조건이 다 갖춰져야만 뭘 하겠다고 드는 것도 함정에 빠지기 쉽다는 것이다.
스탈린식은 많은 희생을 초래한다. 지젝도 많은 희생을 초래한다. 사후적으로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 후유증이 심하다. 그 두 가지를 따로 볼 건 아닌 것 같고 그것도 변증법적으로 당연히 결합 되어야 하고 사태 자체, 객관 현실 그 속에는 주체도 당연히 포함되어야 한다.
주체의 의지, 주체의 목표 의식, 전략, 이것들이 다 같이 작동하고 있다. 자기도 그 안에 포함되어있는 것이다. 내가 어떤 주장을 하고 어떤 글을 쓰느냐가 이 사태와 무관한 게 아니라 그렇게 함으로써 이 사태가 변한다. 그럼 그 변수도 고려해야 한다.
강하게 대중들을 설득하려면 객관적인 것들, 기존의 것들, 즉, 경제 구조, 자본주의의 한계, 현재의 정치 지형, 이런 것들을 분석하는 것은 기본이다. 하지만, 그것만 하고 있어서는 안 되고 거기다가 우리가 이렇게 하면 이렇게 변한다는 사고방식도 끼워 넣어야 한다.
그건 스탈린주의적인 요소가 있다. 우리가 이렇게 하면 역사가 이렇게 변할 거야. 이거 빼고 얘기해서는 안 된다. 어떤 주제 하나 나오면 60년대는 어떻게 했고 70년대는 어떻게 했고 80년대는 어떻게 했고 촛불 때는 어떻게 했고 현재는 어떻게 했고 이걸로 95% 채우고 끝에다 몇 줄을 쓴다. 이게 남 얘기만 하는 글쓰기다.
지금 핵심의 문제가 이건데 우리가 무엇을 하자는 것이 없다. 근데 무엇을 하자는 얘기를 하는 순간 잘못하면 그 조직에서 왕따가 되거나 다른 조직으로부터 엄청난 비난을 받거나 타겟이 되거나, 이런 우려가 늘 있고 그래서 자기가 거기서 책임지기 싫다는 것이다.
그런 심리가 작동하는 것 같다. 조직안에서 활동 할 경우 항상 그런 우려를 동시에 하게 된다. 이게 조직 전체에 피해가 오는 건 아닌가. 누구 심기 건드리는 것 아닌가. 자기검열을 미리 하는 것이다.
진짜 사태 자체로 들어가고 거기서 진짜 문제가 뭔가를 보고 그다음에 자기 나름대로 그 문제를 놓고 깊이 고민을 해서 이 문제 풀이는 이쪽이 답인 것 같다는 최소한의 대안도 찾는, 이런 글쓰기가 필요하다.
근데 이걸 회피하면 맨날 딴 얘기만 한다. 스탈린 방식이 후유증이 커서 싫다는 것이다. 지젝은 희생을 전제로 하고 실패해라 그 다음에 또 잘 실패해라. 불완전한 상태로 시작하라. 이런다. 그러면 희생이 불가피하다. 희생은 나중에 사후 구제하는 것이다.
그렇게 얘기하면 안 되고 그래도 희생을 최소화하고 승리할 수 있는 최소한의 실마리라도 찾아서 이론가가 그걸 제시할 수 있어야 전략적으로 그래야 이론가다. 그렇게 이론화해야 한다.
2024. 1.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