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리치료실에서 만난 사랑의 환자들
3장 그 여자는 거기에 없었다
-박창열
학부 때 심리학을 복수 전공했다. 제일 기억에 남는 과목은 이상심리학(abnormal psychology)이다. 첫 수업 시간에 교수는 “의과대학 증후군”을 소개했다. 의대생이 처음 입학해 공부하다 보면 모든 질병이 자신에게 해당된다고 느끼는 현상이라고 했다. 이것은 정신병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인데 이상심리에 대해 배우게 되면, 자신과 주변 사람들에게 정신병 진단을 남발하게 된다는 것이다. 요지는 이것이었다. 모든 사람은 정신병적 성향을 가지고 있는데 그것이 질병이 되고 아니고는 정도의 차이다. 정도의 차이가 정상과 비정상을 규정한다.
이혼 전문 변호사의 이야기를 다룬 굿파트너라는 드라마가 있다. 초보 변호사인 주인공은 의부증 아내가 청구한 이혼 소송에 변호를 해달라는 고객을 만난다. 친절하고 깔끔하고 호감이 가는 남자다.
재판 과정에 주인공은 봉변을 당한다. 아내의 가족으로부터 너도 첩이냐 라는 말을 듣게 된 것이다. 이 과정에서 주인공은 아내가 자신을 실제로 남편의 외도 상대로 의심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고, 녹음을 하여 의부증의 증거로 제출한다. 재판에 패소한 아내는 법정 밖에서 주인공에게 울부짖는다. 남편이 얼마나 많이 외도를 했는지 아느냐고, 심지어 안방에서 그짓을 하는 것을 본 것을 아느냐고 말이다. 아내는 의부증을 가지고 있는 것은 맞지만, 남편의 계속된 외도로 인한 충격이 중요한 원인이었다. 모든 사람이 남편의 외도 때문에 의부증을 앓지는 않지만 이 여인에게 남편의 외도는 중요한 방아쇠였다.
사랑을 하면 질투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어느 정도가 넘어가면 문제가 된다. 어느 정도의 기준이 뭘까? 애니타는 남자 친구 그레그의 부정을 의심한다. 애니타는 그것이 합리적인 사고가 아니라는 것을 안다. 그것은 상상의 산물이다. 동시에 애니타는 그것이 진실이라고 믿는다.
프랭크는 애니타를 상담하며 그녀의 병리 현상의 이유에 대해 분석한다. 과잉일반화, 완벽주의 성향의 원인에 대해 생각한다. 프랭크는 애니타의 어린 시절의 경험에서 그 이유를 추측한다. 남편 몰래 부정을 행한 엄마, 애니타가 기대하던 사랑을 거부한 엄마, 자신에게 지나치게 비판적인 엄마. 어린 시절의 경험은 애니타의 과도한 질투에 영향을 미쳤을 수 있다. 그러나 그것으로 다일까?
프랭크는 그레그의 외도 가능성에 대해 넌지시 이야기한다. 그레그는 깔끔한 외모와 성격의 사람이다. 구렛나루까지도 깔끔하게 관리하고 재킷의 실밥도 넘어가지 못한다. 이것이 완벽주의적인 애니타에게도 매력적으로 다가왔을 것이지만, 다른 여성들에게도 그럴 것이다. 애니타가 매력적인 여성이라서 끌렸는데, 성관계를 별로 관심이 없어 다른 관계를 찾았을지도 모른다. 만약 그레그가 외도의 가능성을 충분히 의심할만하게 행동했다면 그것이 애니타의 질투형 망상장애를 자극하지 않았을까?
프랭크도 말하지만 “단일하고 배타적인 관계에 특권을 부여하고 질투로 그 관계를 유지하려는 욕구는 인간의 본성”이다. 이런 본성의 이유는 상대방이 부정을 행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프랭크의 인용을 신뢰한다면 결혼한 이성애자 남자의 약 20-30퍼센트와 기혼 여성의 20-25퍼센트가 혼외정사의 경험이 있고, 커플의 70퍼센트도 상대 외의 성관계를 가진다. 만약 나에게 상대방의 부정으로 인해 관계가 깨어진 경험이 있다면, 나와 애니타의 거리는 그리 멀지 않을 지도 모른다. 애니타는 정신병자일까?
애니타의 질투 망상이 치명적인 것일까도 질문해본다. 물론 그녀의 망상은 사랑과 관계에 있어서는 문제가 될 수 있다. 그러나 한 사람의 인생에서 이성과의 배타적 사랑 관계가 차지하는 비중이 얼마나 될까? 어떤 사람에게는 클 수도, 어떤 사람에게는 작을 수도 있을 것이다. 각자 삶의 모습이 다르니 말이다. 애니타에게 그것이 그렇게 치명적일까?
애니타는 10년 뒤 인테리어 디자인 프로그램에 등장한다. 티비에 나올 정도로 성공한 인테리어 디자이너가 된 것이다. 그녀의 질투형 망상은 그대로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이 그녀의 인생에서 얼마만큼의 의미일까? 그것이 치명적인 질병일까? 아니, 질병이기는 할까? 한 사람의 인생이 모든 면에서 완벽할 수는 없다. 누구다 다 약점을 가지고 살아간다. 애니타의 질투형 망상도 누구다 다 가지고 있는 약점 중의 하나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DNA로 기록되지 않았을까?
첫댓글 이 글을 읽고 나면 누군가의 의부증, 그러니까 누군가 지금 당장 보이는 어떤 증상을 가지고, 그 사람에 대해서 전부를 아는 양 얘기할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사람의 행동, 그 앞과 뒤, 그 위와 밑에는 얼마나 많은 맥락과 감정들이 넘실대는지요. 인간의 삶을 어떤 식으로든 깔끔하게 정리한다는 건, 그 밑에 말해지지 못한 숱한 무언가가 소리치고 꿈틀대는 상황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모든 상황은 모두 그럴만 하다는 식으로 지지할 수도 없고, 설명할 수 없음으로 덮어둘 수만은 없다는 생각도 해보았습니다. 어떤 식으로든 매듭을 지어야 할 상황은 닥치기 마련이고, 우리가 갈구하는 다음 순간을 짓기 위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어떻게 사랑해야 할까, 고민이 많아지는 밤입니다.
늘 생각이 많아지게 하는 발제문, 감사히 읽게 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