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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님을 통하여 주어지는 축복
2020. 5. 10.(어버이주일) 창세기 27:27-29
탈무드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하나님께서 새와 짐승을 창조하였을 때 새 한 마리가 하나님을 찾아와 불평을 털어놓았다.
뱀은 독이 있고, 사자는 날카로운 이빨이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말은 발굽을 가지고 있는데, 왜 저는 나를 보호할 것이 아무 것도 없습니까? 이건 너무 불공평합니다.
이 말을 들은 하나님은 고개를 끄덕이시며 새의 어깨에 날개를 달아주었다. 그런데 며칠이 지난 후 새는 또 하나님을 찾아와서 날개는 무거운 짐일 뿐이고, 하나님이 날개를 달아주셔서 전과 같이 빨리 뛰어갈 수도 없게 되었다고 불평과 원망을 털어놓았다. 그때 하나님은 새에게 이렇게 말한다.
어리석은 새여, 날개를 달고 걸어가면 너에게 짐이 될 것이지만, 날개를 펼쳐서 하늘 높이 날면 아무도 나를 해치지 못할 것이다. 날개를 달고 뛰지 말고, 날개를 펼쳐서 하늘을 날아보거라. 그러면 자유를 누리게 될 것이다.
하나님은 자기를 보호할 무기가 없었던 새에게 날개를 주었다. 그래서 그 날개로 훨훨 날면서 자유를 누리게 하였는데, 새는 그 날개를 펼치지 않았기 때문에 무거운 짐으로 밖에 여겨지지 않았던 것이다.
이것이 새의 날개이다. 새의 날개는 펼치면 자유를 누리는 도구가 되지만, 어깨에 가만히 두면 무거운 짐밖에 되지 않는 것이다.
그런데 저와 여러분의 삶에도 새의 날개와 같은 것이 있지 않는가? 그 중에서 특별히 가족을 한번 돌아보기 바란다. 우리는 부모로서 자녀들을 먹이고, 입이고, 가르치고, 요즘은 결혼시킨 후에 손자까지 봐주고 있다. 그런데 또 우리는 자녀로서 부모님을 섬겨야 한다. 그래서 5월 가정의 달은 자녀와 부모님을 모두 섬겨야 하는 정말 힘든 달이다고 말하는 분들이 있다.
그런데 정말 가족이 나에게 짐이겠는가? 성경을 보면 그렇게까지 해야 했을까?하는 질문을 갖게 하는 사건이 종종 나온다. 그 중에 하나가 창세기 27장에 나오는 이삭이 야곱을 축복하는 사건이다. 나이 많아 눈이 어두워진 이삭은 장자의 축복을 에서에게 주려 하였다. 그래서 사냥을 하여 맛있는 음식을 해 오라고 명령한 이삭은 에서가 오기를 기다렸다. 그런데 야곱이 아버지 이삭을 속이고 장자의 축복을 받았다. 그때 화가 난 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창 27:41) 그의 아버지가 야곱에게 축복한 그 축복으로 말미암아 에서가 야곱을 미워하여 심중에 이르기를 아버지를 곡할 때가 가까웠은즉 내가 내 아우 야곱을 죽이리라 하였더니
동생이 아버지를 속인 것도 괘씸하고, 또 내가 받아야 할 장자의 축복을 받은 것도 용서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장자의 축복을 빼앗은 동생을 죽이겠다고 말하는 것은 좀 심하지 않는가? 사실 에서가 야곱을 미워한다(사탐)는 말은 영원히 미워하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런데 이 단어가 시편 55편 3절에서는 나를 핍박하나이다로 번역되어져 있다. 원수가 다윗을 죽이기 위하여 달려들어서 핍박하는 것이 바로 사탐이다. 그런데 장자의 축복을 빼앗긴 에서는 자신이 야곱의 원수가 되어서 야곱을 죽이기 위하여 달려들고 있다는 것이다.
왜 에서는 야곱을 죽이려고 달려들었겠는가? 이번 노회에 진해동부교회 김기해목사님의 은퇴 및 원로목사의 인사시간이 있었다. 진해동부교회에 부임하여 40년을 사역한 목사님은 은퇴하며 이제 자리를 비켜줘야 교회가 더 성장할 것같아 은퇴하게 되었다고 말씀하였다. 저는 그 인사말을 들으면서 40년 사역한 목사님이 존경스럽기도 하고, 또 부럽기도 하였다.
그리고 저는 은퇴할 때 뭐라고 말을 하면 될까?하는 생각을 해 보았다. 아마 저는 설교하는 저도 힘들었지만, 듣는 여러분들은 더 힘드셨지요? 설교를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하는 ❶감사인사를 할 것이다. 그리고 또 제가 해야 할 것은 ❷축복이다.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구원한 모세는 광야 40년동안 인도하였다. 그 동안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하나님이 주신 구원의 기쁨과 감격을 함께 나누기도 했지만, 때로는 백성들의 원망과 불평을 다 들어야 했던 모세가 이제 젖과 꿀이 흐르는 언약의 땅을 바라보며 이스라엘 백성을 떠나야 했다. 그때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을 향하여 두 손을 펼쳐서 축복하는 것이다. 느보산에 올라가 죽기 전에 이스라엘 12지파를 향하여 축복한 모세는 제일 마지막에 이렇게 선포한다.
(신 33:29) 이스라엘이여 너는 행복한 사람이로다 여호와의 구원을 너같이 얻은 백성이 누구냐 그는 너를 돕는 방패시오 네 영광의 칼이시로다 네 대적이 네게 복종하리니 네가 그들의 높은 곳을 밟으리로다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향하여 하고 싶은 말이 많이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모세는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은 모두 뒤로 하고 두 팔을 벌려 축복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저는 그 모습이 너무 멋있어 보인다. 그래서 저도 은퇴할 때 자여교회여 너는 행복한 사람이로다 라고 하며 하나님의 구원과 보호하심과 승리를 선포하는 축복을 할 것이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멋있지 않는가? 그런데 이 멋있는 모습은 목사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기관을 세우신 하나님은 그 기관의 대표자에게 축복권을 주었다. 그래서 목사가 성도의 각 가정을 향하여 두 팔을 벌리고 축복하는 것처럼 각 가정의 대표자인 가장에게도 축복권을 주었다. 그리고 아버지가 자녀를 위하여 손을 펼쳐서 축복할 때 복의 근원되시는 하나님이 그 복을 성취하여 주시는 것이다.
그런데 에서는 아버지 이삭을 통하여 그 복을 받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눈이 어두운 아버지가 사냥을 해서 맛있는 음식을 가져오면 마음껏 기쁨으로 복을 준다고 하여 사냥을 나간 사이에 야곱이 아버지를 속이고 그 축복을 빼앗아 가 버린 것이다. 그것이 얼마나 억울하였던지 야곱에게 축복을 빼앗긴 에서는 아버지에게 남은 복이라도 달라고 이삭에게 머리를 내밀고, 또 분함과 억울함을 참지 못하여 마치 원수가 다윗을 괴롭힌 것처럼 나는 야곱을 괴롭히겠다고 다짐하고 있는 것이다.
무슨 말인가? 에서는 정말 장자의 축복을 가지고 싶었다. 그런데 장자의 축복을 가지고 싶어하였던 야곱은 아버지 이삭을 속이고, 또 형님이 가져야 할 장자의 축복을 훔친 것이다.
왜 에서와 야곱은 장자의 축복을 이렇게까지 가지고 싶어하였겠는가? 이제 오늘 본문을 읽어보기 바란다.
(창 27:27-29) 그가 가까이 가서 그에게 입맞추니 아버지가 그의 옷의 향취를 맡고 그에게 축복하여 이르되 /내 아들의 향취는 여호와께서 복 주신 밭의 향취로다 28하나님은 하늘의 이슬과 땅의 기름짐이며 풍성한 곡식과 포도주를 네게 주시기를 원하노라 29만민이 너를 섬기고 열국이 네게 굴복하리니 네가 형제들의 주가 되고 네 어머니의 아들들이 네게 굴복하며 너를 저주하는 자는 저주를 받고 너를 축복하는 자는 복을 받기를 원하노라
27절 하반절에 나오는 밭은 개간하지 않은 넓은 평원을 말한다. 끝이 없이 펼쳐진 넓은 평원에서 짐승을 방목하고 사냥하는 그 땅이 바로 밭이다. 그리고 28절에서 하늘의 이슬과 땅의 기름짐은 가나안 땅에 입성한 후 이스라엘 백성이 농사짓는 땅을 말하는 것이다. 풍성한 곡식과 포도가 가득하게 맺히는 그 아름다운 땅을 하늘의 이슬과 땅의 기름짐이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아버지 이삭은 야곱에게 이 놀라운 땅의 축복을 허락하여 준 것이다. 그래서 장자의 축복을 받은 야곱은 넓은 대지 위에서 목축을 하고, 또 기름진 땅에서 농사를 지으며 부요하게 사는 복을 받게 된 것이다.
얼마나 놀라운 축복인가? 세종시가 혁신도시로 개발될 때 충남 연기군에서 4천평의 농사를 짓던 아버지가 있었다. 그 아버지는 요즘 즐거운 나날을 보내고 있습니다. 그런데 마음 한 구석에는 습쓸함이 있습니다. 라는 글을 썼다. 왜냐하면 세종시가 들어오는 곳에 땅을 보상해 주면서부터 큰 아들과 둘째 아들이 번갈아 가며 자주 집에 내려온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전에는 안부전화도 한통 없던 며느리들이 경쟁하듯이 아버지를 챙기고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아들과 며느리의 사랑과 관심을 받는 아버지는 행복하기도 하지만, 한편은 씁쓸했던 것이다. 그 아버지가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자식들이 갑자기 자주 찾아오는 이유가 보상을 받으면 조금이라도 떼어줄까 싶어서 오는 것같습니다. 속이 훤히 보이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 아닙니까?
부모님이 가진 것이 많이 있으면 그것을 하나 더 얻기 위하여 부모님을 잘 섬긴다는 것이다.
이것이 오늘날 우리 사회의 한 모습이 아닌가? 그런데 이삭은 장자의 축복을 주는데 4천평 정도가 아니라, 목축을 할 수 있는 넓은 대지와 또 오곡백과 무르익는 비옥한 땅을 받게 될 것이다고 선포하고 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이삭에게 그 만큼의 땅이 없다는 것이다. 사실 이삭은 자식에게 줄 땅이 한평도 없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이삭이 장자의 축복을 하며 넓은 대지와 비옥한 땅을 받게 될 것이다고 선포한 것이다.
이삭이 어떻게 이 넓은 땅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고 선포할 수 있었겠는가? 그런데 이삭을 통하여 선포되는 장자의 축복은 넓은 땅에서 멈춰서지 않는다. 하나님이 넓은 땅을 주실 것이다고 축복한 이삭은 두 번째로 너를 축복하는 자를 축복하고, 너를 저주하는 자를 저주하겠다(29절)는 축복을 하였다. 이 축복의 의미는 하나님이 너를 축복하는 자를 축복하고, 또 저주하는 자를 저주하여서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능력을 너를 통하여 나타내 보이겠다는 것이다.
그런데 땅을 주겠다. 너를 축복하는 자를 축복하고 너를 저주하는 자를 저주하겠다는 이 축복은 어디서 본 것같지 않는가? 창세기 12장을 보면 하란에 있는 아브라함을 하나님은 부르셨다. 그리고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땅을 주겠다. 민족을 이루게 하겠다고 약속하신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너를 축복하는 자를 축복하고, 너를 저주하는 자를 저주하겠다(창 12:3)고 약속하신다. 그런데 이삭은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하신 그 약속으로 야곱을 축복한 것이다.
이것이 무슨 의미인가? 노아의 홍수 이후 오랜 세월이 지났을 때 사람들은 하나님이 또 물로써 세상을 심판하면 어떻게 하나? 하는 두려움을 가지게 되었다. 그래서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시날 평지에서 성과 대를 쌓아가기 시작했다. 하나님이 다시는 세상을 물로 심판하지 않겠다고 약속했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못했던 사람들은 두려움에 하나님이 세상을 심판하실 때 흩어짐을 면하고 자기 이름을 내기 위하여 땀을 흘렸던 것이다. 그때 하나님은 사람들의 언어를 혼란시켜서 이들을 흩어버리셨다. 그렇게 사람들이 흩어졌을 때 하나님은 데라의 아들 아브라함을 선택하신 것이다. 그리고 그 아브라함을 약속의 땅으로 부르시면서 너를 축복하는 자를 축복하고, 너를 저주하는 자를 저주하겠다고 약속하신 것이다. 그래서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언약이 이삭에게 주어졌고, 이제 그 언약이 야곱에게 주어지고 있는 것이다.
무슨 말인가? 지금 이삭은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었다. 그런데 이삭은 땅을 차지하고, 또 너를 축복하는 자를 축복하고 너를 저주하는 자를 저주하시는 하나님으로 인하여 하나님을 나타내며 살겠다는 그 축복을 선포할 수 있었던 것은 만복의 근원되는 하나님의 언약을 이삭은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세상적인 부요함은 없었지만, 하나님의 언약을 믿고 있었던 이삭은 마음껏 장자의 축복을 선포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면 마음껏 선포하는 부모의 이 축복을 누가 받을 수 있는가? 선한목자교회 유기성목사님이 환갑이 되었을 때 딸들이 돈을 모아 가족여행을 가게 되었다. 딸들이 여행일정을 다 잡아서 목사님은 딸들이 차를 타라고 하면 타고, 밥을 먹으라면 먹었다. 그런데 목사님 마음은 밥을 먹으면 내가 돈을 내어야 할 것같고, 또 다음 여행지를 갈 때 목사님이 뭔가 해야 할 것만 같았다. 그래서 목사님이 돈을 내려고 하면 딸들은 아빠는 가만히 계셔요 하고 말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딸들이 시키는대로 움직이는 목사님은 몸은 편한데 한쪽 마음이 너무 부담스러웠다. 그래서 하나님 내가 정말 가만히 있어도 됩니까? 하고 물어보았다. 그때 하나님은 가만히 있으라고 하였다고 한다.
왜 하나님은 가만히 있으라고 하였겠는가?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10가지 계명을 주었다.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인 1-4계명은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명령하고 있다. 그리고 사람과 사람의 관계를 나타내는 5-10계명은 네 이웃을 사랑하라고 명령한다. 그런데 신인관계인 1-4계명의 첫 번째 계명인 너는 나외에 다른 신을 내게 두지 말라는 이 계명을 정확하게 지키면 우상도 만들지 않고,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도 않고, 안식일도 거룩하게 지킬 수 있다.
그렇지 않는가? 지난 번에 설교한 것처럼 나외에 두지 말라는 명령은 하나님의 얼굴과 내 얼굴 사이에 그 무엇도 두지 말라는 뜻이다. 그래서 하나님과 대면하고 있는데, 그 앞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만들 이유도 없고,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을 수도 없는 것이다.
그러면 대인관계를 잘 지킬 수 있는 중심은 어디에 있겠는가? 5계명이다. 부모를 공경하는 사람은 살인하지 않고, 도적질하지 않고, 또 간음하지 않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오늘 5계명인 네 부모를 공경하라에서 공경이라는 단어를 살펴보아야 한다.왜냐하면 공경하라(카바드)는 단어는 무겁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 나쁜 의미로는 짐, 엄한, 둔한으로 번역하고, 좋은 의미로는 다수의, 부요한, 존경할만한으로 번역한다. 그런데 카바드를 공경하다로 번역할 때가 있다. 그때가 바로 하나님과 부모님에 대하여이다. 이 세상에는 많은 권세와 능력을 가진 사람들이 많이 있지만, 그들을 향하여 공경하라는 말씀은 하지 않는다. 그런데 하나님과 부모님에 대하여서 성경은 공경하라고 명령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도 정말 신기하게 하나님을 향하여 2번, 부모님을 향하여 2번 기록하고 있다.
왜 성경은 하나님을 공경하고, 또 부모님을 공경하라 하였겠는가? 하나님을 공경하고, 또 부모님을 공경하는 사람은 하나님과 관계가 형통하고, 또 사람과의 관계도 형통한 것이다. 그래서 이 세상을 사는 동안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모든 복을 다 받아 누릴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에게 부모님은 어떤 분이신가? 어릴 때 많이 맞으신 분은 아직도 무서운 분으로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또 어떤 분은 부모님은 원망의 대상이다고 말씀하는 분도 있을 것이고, 연세 드셔서 불쌍한 분이다고 말하실 분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성경은 하나님을 공경하듯이 우리가 공경해야 하는 분이다고 가르치고 있다. 그리고 하나님을 공경하듯이 부모님을 공경할 때 우리는 하나님이 약속하신 그 놀라운 언약을 받는 복의 통로라고 가르치는 것이다.
그 부모님을 공경할 수 있기를 바란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기로 약속한 그 언약이 내 삶에 이루어지고, 성취되는 그 복을 받아 누릴 수 있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