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9강 할례와 십자가
(갈라디아 5:7-15)
1.경기장의 규칙(5:7-9)
“여러분은 지금까지 잘 달려왔습니다. 그런데 누가 여러분을 가로막아서, 진리를 따르지 못하게 하였습니까? 그런 꾐은 여러분을 부르신 분에게서 나온 것이 아닙니다. 적은 누룩이 반죽 전체를 부풀게 합니다.”
앞 절(1-6)에서 바울은 그리스도인의 자유에 관하여 말하였습니다. 여기서 자유를 방해하는 것이 할례라고 합니다. 할례란 율법 전체를 상징합니다. 율법을 선택하면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은혜에서 멀어집니다. 왜냐하면 율법준수는 자신만의 힘으로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자기 힘만으로는 구원을 성취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제 다시 바울은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흔들리지 말 것을 당부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따라 경주하였는데, 왜 거짓교사들의 말에 마음을 빼앗겨서, 달리고 있던 코스를 벗어나려고 하느냐는 것입니다. 잠시 선을 넘어가도 괜찮다고 생각하지도 말라는 뜻으로 “적은 누룩이 반죽 전체를 부풀게 한다.”는 말과 더불어 경고에 경고를 더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율법주의를 선택하는 것은 결코 그리스도의 법을 따르지 못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우리 역시 이와 비슷한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신앙생활에서 성서와 전통에 따라 세운 규칙들을 잘 준수하는 것이 중요한 일인데, 그렇다면 율법도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율법의 핵심인 십계명을 안 지켜도 된다는 말이냐고 반문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바울의 주장은 그런 뜻이 아닙니다.
율법은 그리스도 이전의 법입니다. 그리스도는 율법을 완성하러 오신 분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통하여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를 구원하는 것이 분명한 데, 그 길을 벗어나서 율법으로 구원을 받으려고 한다면 그것은 정도를 벗어나 실족하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여기서 율법은 그 한계가 명확하게 정해집니다. 그리스도의 길을 따르는 보조역할입니다. 율법은 우리가 왜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은혜를 붙잡아야하는지를 알려줍니다. 왜냐하면 율법 앞에서 우리는 스스로 죄인임을 깨닫고 좌절하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다음 절에서 이 문제를 정확하게 지적하고 있습니다.
2. 십자가의 거리낌 때문인가?(5:10-12)
“나는 여러분이 다른 생각을 조금도 품지 않으리라는 것을 주님 안에서 확신합니다. 그러나 여러분을 교란시키는 사람은, 누구든지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내가 아직도 할례를 전한다면, 어찌하여 아직도 박해를 받겠습니까? 그렇다면, 십자가의 거리낌은 없어졌을 것입니다. 할례를 가지고 여러분을 선동하는 사람들은, 차라리 자기의 그 지체를 잘라 버리는 것이 좋겠습니다.”
“다른 생각”이란 무엇일까요? 거짓교사들이 할례를 받으라고 하는 꾐을 뜻하겠지요. 옆에서 같은 말을 자꾸 반복하면서 꾀면, 그것을 이겨낼 자가 없습니다. 그런데 매우 그럴싸하게 들린다면 어떻겠습니까? 지금 거짓교사들이 하는 말속에는 “바울도 할례를 베푼 적이 있다.”는 뜻이 담겨있습니다.
사도행전 16장 1-3절에 보면, 바울이 제 2차 전도여행(49-52) 때에 디모데를 합류시킨 이야기가 나옵니다. 자신이 세운 소아시아 지역의 교회들을 먼저 돌아보고 마케도니아로 가는 선교여행인데, 소아시아 더베에서 디모데를 만났습니다. 디모데는 그리스인이 부친이어서 이방인을 데리고 다닌다고 오해를 받을까봐 바울은 그에게 할례를 하도록 하였습니다. 물론 예루살렘 회의(48년)의 결정에 따라 반드시 할례를 하지 않아도 되지만, 전도여행의 일원이라는 점에서 그렇게 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실을 갈라디아 교회의 거짓 교사들도 알고 있었던 모양입니다.
이런 것을 보면, 바울이 율법을 무시한 것은 결코 아닙니다. 디모데에게 어쩔 수 없이 할례를 하도록 했지만, 할례로 대표되는 율법주의가 구원의 본질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다음과 같은 주장을 이어갑니다.
바울은 율법의 대표 격인 할례문제 때문에 유대인들로부터 지속적인 박해를 받았습니다. 만일 바울이 디모데의 경우를 확대해서 “누구나 할례 받아도 된다.”거나 또는 “모두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했더라면, 유대인들의 박해를 피하고 수월하게 그리스도를 전파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바울의 생각에 그리스도와 율법은 동일한 위치에 놓을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먼저 유대인에 속하고 나서, 그 다음에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은 복음의 보편성에 위배되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사용한 말 중에 “십자가의 거리낌”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 말의 뜻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달려서 수치스러운 죽음을 당했다는 것이 매우 걸린다는 의미입니다. “거리낌”이란 원문으로 scandalon(σκάνδαλον)입니다. 영어로는 offense, 독일어로는 Ärgernis로 번역하지요. 범죄, 위반, 폐끼침 등등의 의미인데, 여기서 스캔들(scandle)이라는 말이 나왔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구원자 그리스도가 범죄자들의 처형방식인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했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 스캔들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런 “거리낌”을 완전히 지워버리는 방식이 할례를 받도록 하는 일이라는 것을 바울도 잘 알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그 거리낌이 결코 부끄럽거나 수치스러운 일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구원사역의 역설이라는 것을 선포하려는 것입니다.
3.율법 때문에 싸우지 말고, 서로 사랑하십시오(13-15)
“형제자매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을 부르셔서, 자유를 누리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그 자유를 육체의 욕망을 만족시키는 구실로 삼지 말고, 사랑으로 서로 섬기십시오. 모든 율법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여라.’ 하신 한 마디 말씀 속에 다 들어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이 서로 물어뜯고 잡아먹고 하면, 피차 멸망하고 말 터이니, 조심하십시오.”
자유에 대한 설명은 이후(16절부터)에 다시 한 번 등장합니다. 그 자유가 그리스도인을 어떤 길로 이끄는지 말입니다. 여기서는 율법으로부터의 자유는 결코 방종이 아니라, 사랑으로 섬기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모든 율법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레위기 19장 18절)는 말씀 속에 다 들어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놀랍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께서 하신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바리새파 율법교사가 예수께 율법 가운데 제일 중요한 계명이 무엇인지를 물었습니다.(마22:34-40) 물론 시험이었지요. 그때 주님은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신6:5)는 말씀과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레19:18)는 계명이라고 대답하였습니다. 바울과 같은 말씀을 이미 하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마태 19장에서 부자청년이 영생을 물을 때에도 같은 대답을 했습니다.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마19:19)
갈라디아 교회 교인들은 거짓교사들 때문에 혼란에 빠졌고, 율법에 대하여 생각이 다른 사람들과 불화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결국 율법의 근본정신인 이웃사랑을 율법 때문에 하지 못하는 결과를 낳은 셈입니다. 거짓교사들은 혼란과 분쟁을 야기합니다. 그런데 그 책임은 거짓교사들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교회에게 있습니다. 왜냐하면 분별력을 지니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분별력은 명확한 가치관에서 나옵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죽임들 당한 것은 결코 수치스러운 것이 아니라, 가장 낮고 천한 자리에까지 내려오신 하나님의 희생적인 사역을 상징하는 것이라는 깨달음이 소중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십자가의 스캔들”을 사랑합니다.
2025년 2월 2일
홍지훈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