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러포즈를 하면서 남성은 상대 여성에게 장밋빛 비전을 제시해야 한다. 믿거나 말거나 예전에는 “나랑 결혼하면 평생 손에 물 한 방울 안 묻히게 해줄게”라는 상투적인 약속도 그 메뉴 중 한 가지였다고 한다. 집안일을 포함하는 모든 근육노동으로부터 면제된 편안한 삶을 보장해 주겠다는 말인데, 그거 참 큰일 날 소리다. 손에 물 한 방울 안 묻히고 생활하게 되면 그녀의 섬섬옥수가 얼마나 불결하게 될까? 그보다도 더 아무런 근육노동도 하지 않는 삶이 그녀를 편안하고 행복하게 해주기는커녕 삶에 대한 권태와 무의미의 구렁텅이에 빠뜨릴 게 분명하다. 그래서 그런지 실제로 거의 대부분의 아내들의 손은 물에 불었다가 말랐다가를 반복하면서 나중에는 거친 나뭇가지처럼 된다. 그렇게 되면 남편은 “젖은 손이 애처로워 살며시 잡아 본 순간 거칠어진 손마디가 너무나도 안타까웠소” 라고 노래한다.
톨스토이는 근육노동이 우리에게 생존의 토대가 될 뿐만 아니라 도덕적 기초가 된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사회가 발달할수록 사람들은 근육노동의 고역을 피하려고 애쓰며, 그것을 얼마나 효과적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전가하는가가 곧 한 사람이 인생에서 얼마나 성공했는가를 나타내는 표시가 되기도 한다. 그러나 톨스토이가 보기에 자신의 안락을 위해 근육노동을 다른 사람에게 전가하는 것은 부당할 뿐만 아니라 부도덕한 행위이다. 고대에 귀족들은 근육노동을 노예에게 전가하고, 자신들은 아무런 가책도 없이 안락과 풍요를 누렸다. 현대 사회에서는 부유하거나 높은 수준의 교육을 받은 사람들이 가난하거나 교육을 받지 못한 사람들에게 근육노동의 고역을 떠맡기고, 자신들은 그 편익을 당연시하며 누린다. 문제는 계급제도가 허용되지 않는 자유 민주주의 사회에서 그처럼 불공정한 관계가 공공연히 행해진다는 점이다. 설령 그런 관계가 제도나 관행에 의해 용인된다고 할지라도 근육노동에 종사하는 계층은 그런 현실에 대해서 마음속에는 불만을, 그리고 상대 계층에 대해서는 분노를 품게 된다.
톨스토이는 그러한 사회적 부정의를 피할 수 있는 가장 단순하고도 실질적인 방법으로 높은 사회경제적 계층에 속하거나 지식 노동에 종사하는 모든 사람들이 근육노동을 직접 체험할 것을 권고한다. 특히 적어도 인도주의나 종교적 박애의 원칙을 표방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이라면, 자신의 기본 생존 욕구가 반드시 다른 누군가의 근육노동을 통해서만 충족된다는 사실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톨스토이는 자신은 “하녀의 시중을 강요하는 사람의 철학적, 도덕적 진실성에 대해 믿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는 지적 활동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될수록 다른 사람의 육체적 수고에 의존하지 말아야 하고, 자신의 지적 활동이 다른 사람들의 삶에 실질적인 도움이 되도록 노력해야 한다고도 주장한다. 그러나 실상은 뛰어난 지적 능력을 통해서 성공하거나 부자가 된 사람들은 으레 다른 사람들의 섬김을 받는 것을 자신들의 우월감과 긍지의 원천으로 삼는 경향이 있다. 드라마나 영화에서 그리고 또 실제로도 회장님 댁에는 가사도우미인 ‘여주댁’이 필수 아이템이 되어 있다. 그녀는 회장님 가족 중 누구라도 “여주댁” 하고 부르면, 언제라도 부엌 쪽에서 다소곳이 나타나는 충직한 하인이다. 그런데 그녀는 왜 하필 여주 출신일까? 여주 시민들은 그걸 어떻게 생각할까? 어떻든 회장님 댁 사람들은 자신들의 의식주를 위해서 손에 물 한 방울 묻히지 않는 것이, 손가락 하나 까닥하지 않는 것이 자기들이 누리는 특권인 양 행세한다. 이런 현상이 우리나라에서 지금도 여전히 노예 계층이 존재한다는 증거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톨스토이는 근육노동을 “다른 사람의 봉사를 받지 않고 행하는, 그러나 의심의 여지없이 다른 사람들에게 유용한 활동”이라고 규정한다. 짐꾼이나 간호사, 농부 등이 하는 일이 그 예이다. 반면에 유한계급이나 지식 노동에 종사하는 화이트칼라들이 자신들의 직업적 활동을 하는 데는 반드시 다른 사람들의 근육노동이나 그 결과물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국회의원이나 아나운서, 변호사나 의사, 교사나 학자, 은행원이나 유튜버는 농부나 어부, 광부나 건설노동자, 택시기사나 택배라이더, 환경미화원이나 축산물 가공업자의 노동의 결과물이 있어야만 안락하고 풍요로우며 품위 있는 생활을 할 수 있다. 물질의 토대 위에 정신 작용의 상부구조가 존재한다. 막말로 해서 극단적인 상황이 되면 토대가 상부구조에 우선한다. 모든 문명사회에서 지적 활동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막강한 권력을 가지지만, 그들의 노동 결과물이 가지는 유용성은 제한적이며, 심지어 그 결과가 다른 사람들에게 유해할 수도 있다.
근육의 힘을 사용하지 않고 오로지 두뇌 작용이나 언어 능력을 통해서 직무를 수행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말로는 사회적 기여나 봉사를 표방하지만, 실제로는 단지 자신에게 이익이 되는 행위를 하고 있는 경우가 허다하다. 오늘날 문학이나 철학, 역사학 혹은 종교 등 이른바 인문학이 처한 빛 좋은 개살구와 같은 지위가 그 가장 실질적인 예이다. 인문학의 각 분야에서 그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인간적인 삶을 살려면 자기 분야의 인문학을 공부해야만 한다고 주장한다. 대학에서 문학 공부를 업으로 삼아 일하는 사람들은 문학 공부가 인간성을 계몽시켜 주고, 그래서 사람들에게, 다른 동물들은 갖지 못하는, 삶에 대한 숭고한 의미를 갖게 한다고 주장한다. 철학자들은 철학을 공부하는 것이 인간이란 무엇인가를 깨닫게 해주는 보편적이고 고귀한 가치를 가진다고 주장한다. 역사학자들은 사학을 공부하는 것이 현재 우리가 당면한 사회적 문제들을 이해할 수 있게 하고, 나아가서 미래에 대처하는 지혜를 얻을 수 있게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오늘날 인구의 대다수는 인문학의 그런 도움이 없이도 평생 무난히 살아가며, 인문학에 대해서 실질적인 관심이 없다. 즉 그들 대부분은 인문학을 필요로 하지 않으며, 인문학은 그들의 삶에 어떤 실질적인 도움도 주지 못한다. 그에 대해 다시 인문학자들은 비록 대중이 각자 직접 인문학의 가치를 경험하지 않는다 해도, 사회 전체적으로 인문학이 행사하는 문화적 영향력 때문에, 인간 사회가 의미와 존엄을 갖게 된다고 주장할 것이다. 하지만 굳이 ‘인문학’이라고 규정하지 않아도, 인간 사회는 경험과 지혜에 의해서 품위를 유지할 수 있을 것이다. 엄밀한 관점에서 본다면, 인간 삶에 실질적인 기여를 하지 못하는 인문학은 헛되고 거짓된 지적 활동이다.
첫댓글 혹시 호미님이 은퇴 후 그동안 밀린 근육노동을 갚고(?) 계시는 것은 아닐까, 이런 얍실한 소감을 남기면 안되겠죠?? ^^
솜사탕님이 저의 아픈 구석을 콕 찌르셨습니다. 제가 한 말이 자체 모순 혹은 아이러니죠. 제가 쓴 글 자체가 실행을 강조하는, 실행이 없는 공허한 말에 불과하니까요. 17세기 영국 시인 조지 허버트의 시 "창문"을 첨부합니다. 교회의 스테인드 글라스를 보고 쓴 시랍니다.
「창문」
조지 허버트
주님, 인간이 어떻게 당신의 영원한 말씀을 설교할 수 있겠습니까?
인간은 깨지기 쉽고 미치광이 같은 유리에 불과한대요;
하지만 당신의 성전 안에서 이 영광스럽고 경이로운 곳에서
당신이 은총을 통해서 그를,
하나의 유리창이 되게 해주십니다.
당신이 유리를 달구어 그 속에 당신의 이야기를 새겨 넣을 때
정결한 설교자들의 마음속에서 당신의 생애가
빛나도록 만들 때, 그때 빛과 영광이
더욱 거룩하게 되고, 그렇게 해서 더 많은 사람들을 설복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그 유리는 나약하고 암담하고 얇아 보입니다.
교리와 삶, 색깔과 빛이 하나 될 때
그때 그것들이 결합되고 섞여, 강한
존경과 경외를 만들어 냅니다; 말뿐인 건
사위는 불꽃처럼 사라집니다,
그리고 마음 바탕을 울리지 못하고 귀에만 쟁쟁거립니다.
올림픽이나 각종 스포츠 경기 관전을 즐기는 사람들을 보면서 가끔 인류가 만들어 낸 잉여의 산물이란 생각을 했어요. 노루와 사자가 초원에서 근력다지기를 런지를 하는 모습이라니요. 생각만해도 재밌네요.ㅋ
호미님 글 덕분에 인간의 삶에 노동과, 운동은 각기 어떤 영향을 미칠까? 노동이 없는 생존은 불가능할까?, 운동이 없는 삶 또한 불가능할까? 생각하다가ㅎ 생존노동이란 단어를 생각하게 됐네요.^^
랭던 길키의 <산둥 수용소>가 새삼 생각납니다. 각계각층의 사람들이 극심한 결핍 속에서 공동체를 구축해 가는 과정에서 가장 나중에 필요한 게 인문학적인 것이었지요. 가장 불필요한 사람이 '게으르고 교양 있는 사람들'이었다는 대목이 어찌나 인상적이던지! 저를 이르는 것 같았거든요. 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