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진 배경
우리나라에서는 1948년 대한민국 정부수립 이후부터 2000년 초까지 초 ․ 중 ․ 고교의 모든 교실마다 앞면 중앙 상단에 우리나라 국기인 태극기를 게시해 교육용으로 활용해 왔다. 이때는 태극기를 종이로 인쇄해 사각형의 투명유리 속에 넣는 방식이었다.
그런데 유리 액자에 넣어서 게시하던 방식이 일제의 잔재라는 비판과 함께 국기가 유리에 갇혀 갑갑하다는 느낌이 들고, 종이로 된 태극기 도면이 세월이 흐를수록 퇴색하는 현상을 보이며, 또 실내조명의 반사로 어떨 때는 깃면이 제대로 보이지 않는 등 국기로서 품위유지에 문제의 소지를 안고 있다는 지적에 뒤따랐다.
이에 국가상징을 담당하는 행정안전부(당시는 행정자치부) 의정관실은 투명 유리액자에다 종이에 인쇄된 태극기를 넣어 게시하던 종래의 형태에서 벗어나 시대적 변화에 맞춰 새로운 스타일로 바꿔보자는 취지에서 추진하였다.
추진 과정
이 실내게시용 국기틀 개선은 행정안전부 소속의 사단법인 대한민국국기선양회 회장이던 김 모 씨의 제안으로 시작되었다. 김 모 회장은 당시의 유리 속에 넣는 방식의 국기는 일제의 유산이라며 좀 역동적인 ‘휘날리는 국기’로 변경하자며 시제품 1점을 가져와 담당 부서인 행정안전부 의정관실에 건의를 해왔다.
그러나 그 취지에는 공감하였으나 당시 가져온 시제품은 국기로서 품위 등에서 적합하지 않다는 내부평가를 내렸다. 그 후 의정관실에서는 그 연장선상에서 시대적 변화에 따라 새로운 국기틀을 제작하기로 방침을 세운 뒤 구체적인 제작 방안을 마련하는 데 적극적으로 뛰어들었다.
의정관실에서 이 업무를 담당하던 필자는 우선 관련 정부기관과 전문가의 참여가 필수적이라는 판단하에 산업통상자원부 산하의 한국디자인진흥원에 전문적인 지원을 요청하고, 서울 시내 미술대학의 디자인전문 교수 등의 자문을 받아 여러 차례 디자인 개선과정을 거쳤다. 그런 후에 서울 종로의 대학로광장에 몇 종류의 시제품을 전시해 디자인, 색상 등에 대해 앞으로 우리나라를 짊어지고 나갈 젊은 층의 선호도를 반영하였다.
이러한 의견수렴절차를 거쳐 새로 만든 시제품에 대해 「국가상징자문위원회」(위원장 : 최창규崔昌圭 성균관장)에 심의 ․ 보고 절차를 거쳐 최종적으로 행정안전부 장관의 결재를 받아 2002년 8월, 「행정안전부 고시(告示)」로 시행하게 되었다.
이 고시에서 행정안전부는 ‘세계화 시대를 맞아 국민들이 일상생활 속에서 우리나라의 상징인 태극기에 대하여 친근감을 가지고, 태극기 사랑의 생활화를 실천할 수 있도록 고유 전통미와 감각을 조화시켜 만든 새로운 정부권장형의 실내게양용 국기틀의 규격을 정한다.’고 발표했다.
그리고 새 실내게양용 국기틀은 원형목에다 태극기 문양이 오랫동안 퇴색되지 않는 깃면을 부착하고, 그 표면이 실내조명에 반사되지 않도록 무광(無光) 처리를 한 것이 특징이며, 형태는 주위에서 태극기를 돋보이게 하는 <좌우보필형>, <상방 족자형>, <족자형> 3종으로 하고, 색상은 태극기와 잘 조화되는 <밤색>과 <연한 밤색> 2종으로 하였다.
행정안전부는 이 6종(형태 3종, 색상 2종) 가운데 자유롭게 선택해 사용하되, 그 크기는 환경에 따라 확대 또는 축소할 수 있도록 하였다.(그 후인 2009년 9월, 행정안전부는 그간의 우체국쇼핑 판매량 등을 바탕으로 국민들이 가장 선호하는 형태로 나타난 <좌우보필형> 하나로 통일하였다.)
이후 각급 행정기관, 학교, 군부대, 민간기업체 등에서 새 국기틀로 교체하여 게시하기 시작하였고, 우체국쇼핑(mall.epost.go.kr)을 통해 누구나 편리하게 구입할 수 있도록 하였다.
추진 과정에서 일어났던 에피소드
행정안전부 의정관실에 처음 국기틀 개선을 제안했던 사단법인 대한민국국기선양회장 김 모 씨였는데, 그의 제안은 나름대로 의미가 있었다. 왜냐하면 오랜 세월 태극기를 유리 속에 넣어 오던 방식을 벗어나 역동적인 태극기의 모습으로 바꿔보자는 제안이었기 때문이다.
문제는 국기틀을 개선하는 과정에서부터 사단이 벌어졌다. 국기는 어느 개인이 소유할 수 없는, 그야말로 ‘공공재’가 분명하다. 그런데도 행정안전부 의정관실이 백지상태에서 출발해 시대변화에 따른 국기틀 개선 작업을 추진하는 과정에 시제품 제작과 자문 등의 역할을 맡아 함께 참여했던 그는, 현행 국기틀과 비슷한 모양으로 디자인이 뚜렷하게 개선되는 시점부터 이를 몰래 자신의 고안인 것처럼 ‘김 모’개인 명의로 디자인을 출원하고, 계속해 몇 차례 추가 출원하였다.
이러한 출원 사실을 전혀 알지 못한 채 국기틀 개선을 추진한 행정안전부 의정관실은, 장관 결재를 받은 후 국기틀의 제식(制式)과 모양을 규정한 「행정안전부 고시(告示)」를 언론에 발표하였다. 그러자 이때부터 김 모 씨는 그 동안의 우호적인 태도에서 돌변했다. 여러 민간 국기제작업체들을 대상으로 행정안전부 고시는 자신이 출원한 디자인제품이라며, 새 국기틀을 만들려면 자신에게 사전 허가를 받은 후 사용료를 내어야 한다고 협박하자 국기제작업체들로부터 이게 사실이냐며 문의가 잇달았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김 모 씨의 특허청 출원내용과 행정안전부의 고시에 나오는 디자인 간에 ‘유사(類似) 여부’가 쟁점이 되었다. 여기에서 김 모씨의 마지막 출원과 행정안전부 고시 간에 시간적 차이가 얼마간 있었고, 이에 따라 디자인에서도 약간 차이가 있었다. 결국은 이 ‘유사 여부’를 쟁점으로, 김 모씨가 행정안전부의 고시대로 국기틀을 만들어 우체국쇼핑을 통해 판매하던 박 모씨를 상대로 대법원까지 가는 법정싸움이 벌어졌다. 우체국쇼핑을 계속하려면 자신에게 디자인권에 따른 사용료를 내야 한다는 김 모씨의 주장을 우체국 쇼핑의 박 모씨가 거부하자 법정싸움으로 비화한 것이다. 결국 박 모씨는 행정안전부의 대리인이 된 셈이 되었고, 소송과정에서 양측은 전문 변리사를 별도로 선임하는 등 승소를 위해 안간힘을 썼다.
우리나라에서 일반 민사소송과는 달리 특허소송은 ‘특허심판원(1심) → 특허법원(2심) → 대법원 순’으로 진행되는데, 최종심인 대법원에서 2008년 12월 김 모씨의 출원내용과 행정안전부 고시 내용 간에는 디자인에서 차이가 있다며 ‘비유사(非類似)’로 판결하였다. 우체국쇼핑을 운영하던 박 모씨와 행정안전부는 첫 심판인 특허심판원에서 이기고, 2심인 특허법원에서는 패소했다가, 최종심인 대법원에서 다시 승소한 것이다.
결국 행정안전부 고시에 적시된 국기틀 제식과 모양은 대법원으로부터 독창성을 인정받게 되었고, 김 모 씨는 공공재인 국기틀을 사유화(私有化)하여 돈을 많이 벌겠다는 욕심에서 의욕적으로 일했던 담당 공무원과 여러 국기제작업체들을 괴롭히다 소송전에서 패소해 망신을 당하고 말았다.
이처럼 오늘날의 정부권장형 국기틀은 소송과정에서 엄청난 정신적 고통과 함께 금전적 부담까지 하는 진통 끝에 탄생한 것이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