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일체법의 진제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우리는 마음속에 참과 거짓이라는 주사위를 담고 살아간다. 어떤 사건과 상황이 발생하면 우리는 알게 모르게 마음속 주사위를 던지게 된다. 그리고 일의 경중에 따라, 그 던지는 시간은 길어질 수도 있고 짧을 수도 있다. 이러한 일은 누구를 통해 학습하는 일이 아니라, 움직이는 생명체 안에 내재한 경향성일 것이다. 이러한 경향성의 참과 거짓은 ‘이것’이라고 특정하게 단정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사람에 따라 다르게 나타나는 유기적인 개체의 판단이면서 취향일 것이다. 그러므로 나에게는 참일지라도 타인에게는 거짓이 될 수도 있고, 타인은 참이더라도 나에게는 거짓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만약 이러한 참과 거짓이 사실의 바탕에서 판단하는 거냐고 묻는다면, 그것은 그렇지 않다. 사실의 바탕에서 말한다면, 참과 거짓은 하나의 개념이다. 참 속에 거짓이 있고, 거짓 속에 참이 있다. 참(거짓)과 거짓(참), 이 중에 어떤 것을 사용하든 그것은 같은 원리이다. 그리고 사실에서 보면 개체가 가지고 있는 개념이 하나가 더 있는데 그것은 허구이다. 그러니 이 세상에는 참(거짓)과 허구로 이루어져 있다. 그러니 참(거짓)은 개체가 보는 개념의 세상이고, 허구는 개체가 보지 못하는 개념의 세상이기 때문에, 사실이라는 실체는 개체의 개념적인 세상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고 여기에서 말하는 ‘실체가 없다.’는 뜻은 무엇이 존재성을 가지고 있다가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이 부분에서 소통하는 것이 가장 어려운 부분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서로 똑같이 물질을 가지고 소통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언어의 사용처가 같은 것으로 이해되어 말하는 그 언어의 개념을 받아들이다 보니, 소통에서 약간의 차이가 생겨 전달하고자 하는 뜻을 전달하지 못하고 서로가 머쓱하게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진제(眞際)가 말하는 언어는 세상에 있는 어떤 언어와 모양에 대해 부정과 긍정 또는 한정적 사고나 포괄적 사고에 대해 표현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진제는 말하는 주체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밖의 대상을 이야기하는 것 같지만, 밖의 대상을 말하는 것이 아님을 정확히 들어야 한다. 진제의 언어는 말하는 주체의 불성립에 대한 이야기를 계속하고 있는 것이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면 ‘나는 존재하지 않는 사람이다.’를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무엇으로 존재하고 싶은 사람은 절대로 이렇게 들을 수 없다. 꼭 무엇인가 특별한 것이 있는 것처럼 들리게 되고, 그렇게 듣고 싶어 한다. 그러고 보면 우리는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실체를 보지도, 듣지도, 만지지도, 생각해보지도 못하고 사라진다.
대혜가 대답했다. “그들은 먼저 탐진치 등의 심리 작용이 존재한다는 것을 인정하고는, 이어서 다시 그것들을 떨쳐 내려 하고 거기에 집착하지 않으려 하며, 다시 그들에게 있는 자성의 근본을 부정하려 합니다.”
이솝우화 중 ‘고깃덩어리를 입에 문 개’ 이야기가 있다. 고깃덩어리를 입에 문 개가 강물에 비친 자신의 그림자를 보고, 더 큰 고깃덩어리를 물고 있는 다른 개라고 생각하고는 짖는 바람에 자신이 물고 있던 고기를 잃어버린다는 내용이다. 그 개는 자신의 모든 것을 잃어버렸다고 근심하겠지만, 진제의 입장에서는 무엇도 잃어버린 것이 없다. 근심하는 개체의 입장에서는 그 고깃덩어리가 자신에게서 사라졌으니 잃어버렸다고 하겠지만, 그것은 강물에 남아있다. 개체가 사용하는 ‘있다’와 ‘없다’는 개체의 상태나 위치에 따라 그것을 사용하는 것이지, 그것이 가지고 있는 사실을 논하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조금 더 본원적인 것을 말하면, 우리가 지칭하는 ‘나’라는 언어는 사실적인 어떤 대상이 없다. 그런데 그 지칭할 수 없는 ‘나’가, 무엇인가 많은 것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오온을 ‘나’라고 하게 되면, 지칭할 수 없는 ‘나’의 입에 온전히 있던 그 ‘고깃덩어리’는 한순간에 사라지고 마는 것이다. 항상 무엇인가를 찾게 되는 것은 이 허탈함에서 기인한다. 많은 것을 가지고 있는 오온은 실제적으로는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고, 아무것도 없는 것 같은 진제는 사실적인 것이 무엇인지를 알고 있으니 모든 것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지휴 스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