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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의 순교자를 낸 예루살렘교회 / 시 68:1-6, 행 7:55-60
사도행전을 읽으면 초대교회가 어떻게 신앙생활을 했는가를 알 수 있다. 오늘 우리가 읽은 행 7장 본문은 생겨난지 얼마 안되는 교회가 박해를 받게 된 이야기, 이 박해의 결과 마침내 이 교회의 최초의 7집사들 중 한분인 스데반 집사가 순교를 당한 이야기를 전해주고 있다. 우리는 이 순교의 이야기를 대하면서 한편 놀라움을 금하지 못하고, 다른 한편으로 우리는 우리의 생각에서 의문이 일어나는 것을 본다. 왜 생겨난지 얼마 되지도 않은 교회가 박해를 받게 되었는가? 무엇을 하였기에, 왜 박해를 받게 되었고, 급기야는 교인들 중 처참한 죽임을 당하는 비극까지 생겨나게 되었는가? 누가 박해를 했으며, 그 박해의 이유나 성격은 어떤 것이었나? 어떤 사람들은 또 질문을 할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설교하신 하나님의 사랑이 동기가 되어, 모든 사람들이 한 형제자매와 같이 서로 사랑을 실천하는 공산주의적 공동체를 세우고, 사랑을 실천하며 하나님을 예배하는 종교단체였고 사회적 정치적 당체도 아니었는데 어떻게 그러한 잔인한 박해를 받게 되었는가? 처음 교회가 왜 박해를 받게 되었는가 하는 등의 문제에 답하기 위하여 우리는 그때의 교회가 무엇을 했는가를 묻게 되는데, 이 질문을 묻기 전에 처음 교회는 어떤 교회였느냐는 것을 회상할 필요가 있다.
처음 교회는 세가지 특징을 가지고 있는 교회였다. 예배와 친교공동체로서 모이는 교회, 사랑의 공산주의적 삶을 살았던 공동체교회, 증언하고 선포하기 위하여 흩어지는 교회이다. 이 예루살렘교회는 세상에 나가서 그들이 구세주로 믿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가 부활했다는 것을 증언하고 선포했다. 이것이 그들의 증언과가 선포의 중심적인 내용이었다. 처음 교회가 예수의 부활에 관하여 증언하고 선포했다는 것은 이 교회가 박해를 받게 될 수밖에 없는 운명에 놓이게 했던 것이다. 바르게 증언하는 교회는 곧 박해받는 교회인 것을 보여주는 것이 오늘 본문의 이야기이다. 증언은 죽음을 불러오는 행동을 의미했다. 처음 기독교인들을 박해한 자는 유대 종교당국이었다. 스데반을 돌로 쳐죽인 것은 단순히 불법적인 깡패들이나 개인 범죄조직이 아니었다. 또한 스데반은 그들에게 사형(린치)을 당하여 죽임을 당한 것이 어니었다. 스데반은 관헌에 체포되어 유대나라의 최고 통치권부인 산헤드린의 재판을 받아 사형선고를 받고 처형된 것이었다. 이 산헤드린으로 말하면 유대나라에서 최고의 입법, 사법 등의 권한을 관장하고 있는 중앙 통치권부이다. 오늘 우리나라의 국회와 대법원의 기능을 함께 행사했던 기관으로서 중죄인을 사형언도하고 사형집행을 확정한 것이다. 스데반이 사형을 당한 것은 그 개인이 잘못하여 그렇게 된 것이 아니다. 그 개인에 대한 박해가 아니었다. 그가 속해 있던 예루살렘교회 전체에 대한 박해였고, 그 교회와 교회 지도자들이었던 사도들이 모두 이 일에 대하여 책임이 있었다. 그 교회가 무엇을 했기에 유대 종교당국은 새로 생긴지 얼마되지 않은 기독교를 박해했나? 가장 중요한 이유는 그들의 증언 내용과 그 증언의 여파였다고 할 수 있다. 행 4장에 보면 처음 기독교인들이 무엇을 했고, 무엇 때문에 유대교 당국이 문제를 삼았는가를 짐작할 수 있다.
첫째, 처음 교회의 사도들은 거리에 나가서 사람들에게 기독교의 복음을 가르치며 예수의 다시 사심을 증언하고, 또한 죽은 자의 부활을 증언했다.
유대 당국은 특히 예수의 부활을 주장하는데 대하여 매우 불쾌하게 생각했고 격분하지 않을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그 예수를 처형한 데에는 그들 자신들도 책임이 있었기 때문이다. 사도들이 유대 당국에 체포되어 심문을 받는 자리에서 그들은 그 재판정을 복음을 증언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증언하는 기회로 이용했다. 그들이 그들을 체포하고 박해하는 유대 종교 지도자들과 정치 지도자들을 향하여 증언한 내용은 무엇이었나? 오래전에 하나님이 예언자들을 통하여 후대에 올 것이라고 약속했던 메시야가 곧 그들이 증언하는 예수님이라는 것, 그러나 바로 그들 유대 민족 지도자들이 하나님이 보맨 메시야를 배척하고 박해하고 죽였다는 것, 그러나 하나님은 죽임을 당한 그 메시야인 예수를 다시 살려냈다는 것, 그리고 이 예수는 승천하였고, 온 세상을 다스리는 주님이고, 그는 산자와 죽은자를 심판하기 위하여 곧 다시 오실 것이라는 것, 이러한 복음의 내용을 증언했다. 특히 이들 기독교인들은 그들의 청중을 향하여 그들을 고소하고 심문하고 재판하고 있는 사람들을 향하여 ‘이 예수를 여러분이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다’라고 직설적으로 공격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 이것은 그들에게 도전하는 것이고, 그들을 죄인으로 법정에 세우고 심문하고 있는 그들 유대 당국을 향하여 오히려 그들이 하나님께 용서받기 어려운 죄를 지은 죄인이라고 규탄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에게 이 죄를 회개하라고 설교했다. 이것은 그들 유대 종교지도자들을 굉장히 곤란한 입장에 몰아넣고 당황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그 다음으로 사도들은 그들의 증언 뿐만 아니라 병자를 기적으로 고치는 일을 행함으로써 사회적으로 커다란 사건을 일으키고 있었다.
그들은 날 때부터 걷지 못하며, 길가에서 구걸하던 병자를 기적으로 고치고, 그들이 일으킨 기적은 바로 이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힘입어서 된 것이었다고 주장했다. 이것은 유대 당국자들을 여간 격분하게 하는 것이 아닐 수 없었다. 유대 종교지도자들을 더욱 자극한 것은 유대 민중들의 호응이었다. 사도들이 대중집회, 가두집회를 열고 예수님의 부활과 그의 메시야 됨을 증언했을 때 한꺼번에 수천명이 회개하고 기독교인이 되는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남자만 5천명이 되었다고 4:4절은 기록하고 있다. 이에 근거하여 추정한다면 아마 약 만명은 훨씬 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처음 개종한 사람들은 남자보다 여자들이 더 많았을 것이고, 또 어린이들도 있었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신흥종교를 믿게 되는 현상은 유대 종교지도자들에게는 크게 염려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음은 물론이다.
처음 기독교인들은 바보가 아니었다. 그들의 예수 부활의 증언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 것인가에 대하여 잘 예상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사명인 복음과 예수의 부활에 대하여 증언해야 할 바를 담대하게 증언했다. 유대 종교지도자들 역시 바보가 아니어서 그들은 신속하고 정확하게 반응하고 행동했다. 그리스도인들이 증언하고 선포하였을 때 그들은 무엇이 일어나고 있는가에 대하여 진상을 조사하였고, 그 주동자들을 색출하여 체포하엿다. 그들은 ‘격분하여 사도즐을 붙잡았다’고 했다. 사도들을 연행하고 심문하고 투옥했다. 유대 당국은 이들 기독교 지도자들을 재판하는 과정에서 만일 이들을 투옥하거나 사형에 처하면 그들을 따르는 수천명의 무리들이 항의하고, 이렇게 되면 사회적으로, 정치적으로 너무 부담이 크다는 것을 계산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다시는 예수의 이름으로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는 엄한 경고를 한 후 사도들을 석방했다. 그러나 사도들은 ‘하나님 앞에서 너희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라고 하면서 당국의 경고와 명령을 무시했던 것이다. 그들은 여전히 거리에서, 가정에서, 성전에서 예수를 증언했다. 그래서 그들은 두번째 다시 체포되고 심문당하고 투옥되었던 것이다. 사도들은 두번째에는 탈옥까지 하였다.
초대 기독교회가 예수를 증언하고 복음을 선포한다는 것은 결코 아무런 문제가 없는 그런 설교가 아니었다. 듣는 사람들에게 박수를 받고 인기를 끄는 그런 것하고는 거리가 멀었다. 그와 반대로 앞에서 말한 것같이 유대 종교 지도당국에게 정면으로 도전하는 것이고, 그들에게 죄인이러고 정죄하는 것이고, 회개하라는 촉구로써 그들을 자극하는 것이었다. 이렇게 신흥종교 운동인 기독교회는 기존 종교인 유대종교의 당국에 의해 박해를 받게 되었던 것이다. 뿐만아니라 후에는 로마 당국으로부터도 박해를 당하게 되는 것을 우리는 사도행전 뒷부분에 가서 알게 된다. 이 박해로 베드로와 야고보와 바울을 필두로하여 수많은 기독교인들이 처음에는 유대 종교당국으로부터, 그 다음에는 로마의 정치당국으로부터 박해를 박고 피를 흘리게 되었다. 이희승의 국어대사전에 보면 ‘순교’를 이렇게 말한다. ‘모든 억압과 박해를 물리치고, 자기가 신앙하는 종교를 위하여 목숨을 바치는 일.’ 원래 순교란 원어(마르투리온, 마르투스)의 뜻을 보면 ‘재판정에서 증은으로 진실을 밝히는 사람’이다. 이 단어를 기독교 용어로 채택하면서 그 의미가 본질적으로 변하게 되었다. 단순하게 증인으로 진실을 밝히는 사람이 아니라 ‘피흘림을 통한 신앙의 증거자, 순교자’를 뜻하게 되었다. 순교와 증언은 헬라어로 같은 단어를 쓰는데 예수를 증언한다는 것은 곧 순교를 의미했다. 이것이 당시이 현실이었고, 이것이 기독교의 역사였다. 이렇게하여 기독교의 역사는 곧 순교의 역사가 되었던 것이다.
오늘 우리가 읽은 스데반의 순교의 이야기는 사도들에 대한 박해에 이어서, 당국이 아주 큰 본보기로 스데반을 처형한 것이다. 유독 스데반이 가장 위험한 인물로 지목되었다. 거기에는 이유가 있었다. 스데반은 예루살렘교회가 임명한 최초의 일곱 집사 중의 한사람이었다. 이 집사들은 ‘믿을만 하고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 사람’들이라고 한데서. 스데반이 그 많은 초대 기독교인들 가운데서 인격적으로나 신앙적으로 가장 뛰어난 지도자적인 교인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성령의 특별한 능력을 받은 사람으로서 병자를 고치는 기적 등을 행했음을 성서는 기록하고 있다. 6:8절 ‘스데반이 은혜와 권능이 충만하여 큰 기사와 표적을 민간에 행하니’ 스데반에게 성령이 능력이 역사하고 있었음을 많은 사람들이 식별할 수 있을 정도였다. 그가 체포되어 법정에서 심문을 당하고 있는 그 스데반의 얼굴에 광채가 있고, 그가 단순한 사람이 아니라 ‘그 얼굴이 천사의 얼굴과 같더라’라고 기록하고 있을 정도였다.
다음으로 스데반은 성서에 해박하고 통달하였고 복음에 대하여 통달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가 법정에서 증언한 것은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하여 유대 민족의 역사를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라는 관점에서 설명하고, 이러한 역사적 줄기에서 하나님이 오늘날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보내셨지만, 너희들이 그를 박해하고 십자가에 못박아 죽인 악인들이라고 지적했던 것이다. 그의 긴 증언의 마지막 부분은 오늘 우리가 읽은 본분의 바로 앞에 있는데, 이 내용은 실상 베드로가 증언하는 복음이 내용과 일치한다. 그러나 베드로보다 훨씬 더 직설적이고 자극적임을 볼 수 있다. 스데반은 그를 법정에 세워서 심문하고 재판하고 있는 자들을 향하여 오히려 그들이 하나님 앞에서 죄악을 저질렀다고 다음과 같이 규탄하고 있는 것이다. 51-53절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아, 너희도 너희 조상과 같이 항상 성령을 거스르는도다. 너희 조상들이 선지자들 중의 누구를 박해하지 아니하였느냐? 의인이 오시리라 예고한 자들을 그들이 죽였고, 이제 너희는 그 의인을 잡아 준 자요 살인한 자가 되나니, 너희는 천사가 전한 율법을 받고도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하니라.’ 여기서 우리는 유대 당국이 왜 스데반을 처형하게 되었는지를 충분히 알 수 있다. 스데반은 그의 신앙의 정절을 지키기 위하여, 그리스도의 복음과 장차 그가 한알의 밀알이 되어 수많은 열매를 거둘 그리스도의 교회를 위하여 기꺼이 순교를 당한 믿음의 증인이고, 최초의 순교자가 됨으로써 교회의 어머니적인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다. 스데반의 순교로 최초의 기독교는 새로 나게 되었고, 후대의 모든 기독교회는 스데반의 죽음에 힘입고 있다는 점에서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의 어머니의 역할을 했다고 할 수 있다. 그는 사형이 집행되기 직전에 하늘의 게시를 볼 수 있는 특권을 가졌고, 사람들에게 더없는 용기를 주었다고 할 수 있다. 그가 본 계시는 무엇이었나? 그가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았을 때 그는 하늘이 열리는 놀라운 광경을 보았다. 그리고 그 하늘에 하나님과 하나님의 오른편에 서 계시는 예수님을 보았다. 그는 이 영광스러운 하늘의 광경과 영광을 보고 희열과 열광 상태에 들어갔다. 하나님의 오른편에 서 계시는 그의 주님, 예수께서 그를 마치 어서오라고 응원하고 부르는 듯이 보였다. 그래서 스데반은 그에게 닥친 무서운 죽음을 환영하는 듯이 죽어갔다.
그의 죽음의 최후의 장면은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예수님의 모습을 우리에게 연상시켜주는 엄숙한 장면이다. 무리들이 그에게 돌을 던져 그를 죽이고 있을 때, 그는 무릎을 꿇고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라고 기도했다. 그리고 그는 곧 운명했다. 스데반의 순교는 여러 가지 면에서 중요성을 가진다. 역사상 처음 기독교회였던 예루살렘교회는 처음부터 그 사회의 지배세력과 종교 지도자층과 충돌하고, 처음부터 박해를 받았다. 교회가 창립된지 얼마되지 않은 때에, 교회가 미쳐 정착되고 안정되기도 전에 이미 교회는 박해를 받기 시작하였고, 마침내 그 교회는 7집사 중에 가장 능력잇고 유능한 집사인 스데반이 순교를 당하게 되는 비극을 초래하였다. 이 스데반의 순교로 예루살렘교회는 산지 사방으로 흩어지게 된다. 무서워 도망가는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사방에 복음을 전하는 기회로 삼았다. 이들 처음 기독교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예루살렘이란 유대 종교의 성지 안에 갖춰놓고 하나의 제도적인 종교로 정착시킨 것이 아니라, 그 거룩한 예루살렘의 도시 경계를 벗어나서 온 세상을 향해 복음을 전파하고, 믿는 사람들의 무리로 이루어지는 신앙의 공동체라는 새로운 운동을 확산시켜 나갔던 것이다. 스데반의 순교사건을 이렇게 세계를 향한 새 공동체 운동으로 확산하는 계기로 삼게 되었던 것이다. 세계를 향해 나가고 전진하는 교회의 위상을 갖추었다. 그래서 박해받던 교회와 교인들은 사방에 나가서, 고생하고 박해받는 민중들을 섬기는 교회와 사람들이 되었다. 8:4절 이하에 보면 사마리아로 갔던 기독교인들이 수많은 민중들, 특히 더러운 귀신들린 사람들, 중풍병자들, 신체 불구자들 등을 고쳐주고 도와준 것을 기록하고 있다. 이것은 바로 그들의 주님이신 예수님이 하시던 일이었다. 이것을 이들 박해받고 쫒겨다니던 기독교인들과 교회가 계속했던 것이다.
그 다음으로 중요한 것은 한 젊은 스데반의 죽음은 새로운 한 젊은 바울의 시작을 의미하는 것이었다는 사실이다. 스데반이 죽임을 당할 때 그에게 돌을 들어 죽이는데 참여한 사람들이 한 젊은이에게 그들의 옷을 벗어 보관시켰다. 그가 사울이라는 젊은이였다. 바울은 ‘스데반이 흘린 피로 세례를 받고 그날 하나님에 의해 안수를 받았다’라고 어느 누가 표현했다. 스데반을 죽이던 사람들의 옷을 맡아 보아주면서 그의 죽음을 목격했던 바울은 그 사건이 있은지 얼마되지 않아서 그리스도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게 되었고, 그 스데반이 죽음으로 증거하였던 그 복음을 계승하여 온 세계에 전파하게 되었다. 그 바울의 복음전파가 로마를 흔들었고, 이어서 유럽대륙을 흔든 후, 아메리카로 건너가 미국을 탄생시켰고, 이어서 우리나라에까지 복음이 들어와 우리가 믿고 구원받게 되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스데반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북음과 부활을 증언하다가 죽임을 당했다. 스데반이, 베드로가, 바울이 그랬던 것처럼 처음 기독교인들이 박해를 박으면서도 온 사방에 다니면서 복음을 담대하게 증언하면서 그 복음의 증언이 곧 순교인 것을 몸으로, 삶으로, 죽음으로 표현했던 것처럼, 오늘 우리가 복음 안에서, 세상 속에서 그렇게 살아가야겠다. 이런 삶을 살 때 우리는 하나님의 은총을 피부로 느끼며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이런 복된 삶을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란다. (1996-0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