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생긴대로 논다.
그러나 또한 사람은 외모로만 판단해서도 안된다.
그런데 살다보면 여러 사람을 만나게 되는데 대부분은 생긴대로 노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간혹은 아차! 사람을 외모로만 판단해서는 안되는구나 하는 것을 느끼는 경우도 있다.
몇번 만나보니 첫 인상과는 딴판인 경우인 사람들을 만나게 될 때이다.
생긴 건 범죄형이었는데 만나볼수록 진국이면서 순박한 경우. 그래서 ‘역시 외모만 보고 사람을 판단해서는
안된다’는 말도 맞는 말인가보다 생각하기도 한다.
그러나 피드백 과정에서 결국 알게 된다.
사람은 생긴대로 논다는 처절한 결론을 얻기도 한다.
생긴 것과 달랐던 꾸며진 모양새는 노력에 의해 만들어진 위장술에 불과한 경우가 많다.
그러다 다시 또 결론을 내린다.
사람은 100% 생긴대로 논다.
그렇다면 이 생긴대로 논다에서 생긴 것이란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사실 생긴 것은 그 사람의 품성이나 속이 겉으로 드러난 것에 불과하다.
운동을 많이 한 사람은 근육질로 생길 것이고 많이 웃고 산 사람은 얼굴에 주름이 져도 웃는 주름일 것이고
많이 찡그리고 산 사람은 얼굴 또한 그렇게 변해갈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열길 우물 속은 알아도 한길 사람속은 모른다고 언뜻 보면 그 사람의 속을 알아차리기란
매우 어렵다.
보통 어쩔 수 없이 그 사람의 마음이 드러난 외모 즉 얼이나 몸 그리고 하는 말씨나 말투를 보고 판단한 수
밖에 없다.
1. 얼굴
‘얼굴’의 어원은 ‘얼의 꼴’ 즉 ‘얼의 생김새’이다.
‘얼’이 그 사람의 정신 혹은 혼백을 뜻하는 말이니, 얼굴(얼꼴)이라는 것은 ‘영혼의 생김새’란 뜻이다.
또 눈을 ‘마음의 창’ 이라고 하며 ‘눈빛만 봐도 마음을 안다’고 했다.
그러면 얼굴 따로 눈 따로일까?
눈빛이라는 것은 단지 눈깔에서 나오는 빛이 아니다.
눈알만 파내놓고 보면 모든 사람들이 똑같다.
사람마다의 독특한 눈빛은 눈 주변의 피부와 근육이 만들어내는 조화다.
즉 눈빛은 그 사람의 안식 眼識(보는 것을 인식하는 마음의 모양)이 그 눈에 나타난 것이다.
그러므로 눈빛은 그 사람의 마음이 드러난 것이다.
한의학에서는 간에 간직되어 있는 혼이 밖으로 드러난 것이다.
다만 얼굴중에서 얼의 꼴을 가장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곳이 바로 눈이다.
눈이 맑으면 사람이 맑고, 눈이 탁하면 사람이 탁하다.
눈이 정직하면 사람이 정직하고, 눈이 야비하면 사람이 야비하다.
여기서 얼굴을 따진다는 것은 얼굴이 못생기고 잘생기고를 따지는 것이 아니다.
물론 현대사회에선 얼굴의 미모여부가 후천적인 성격에 영향을 주기는 한다.
오래도록 사랑을 받지 못하고 살다보면 영혼이 상처를 입는다.
그러면 자기자신에 대해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게 되고 위축되기 때문에 나쁜 모습이 얼굴에 나타날
수도 있다. 하지만 처한 상황이 바뀌면 이런 것은 바로 치유가 된다.
즉 얼굴이란 후천적인 상황들이 다소 영향을 주기는 해도 거의 대부분은 선천적이다.
원판 불변의 법칙이 적용되는 것이다.
2. 몸
우리는 흔히 살이 두둑하게 붙어 퉁퉁한 사람들을 ‘넉넉하게 생겼다’ ‘인심 후하게 생겼다’고 말하는 걸
많이 듣는다. 그런데 실제로 겪어보면 어떤가. 뚱뚱한 사람들이 과연 인심이 후하고 넉넉한가?
아니다. 오히려 정반대이다.
사람에 대한 데이터가 없는 어린이들 사이에서 뚱뚱한 아이들이 곧잘 따돌림의 대상이 되거나 놀림감이
되곤 한다. 왜 그러는 걸까? 그저 뚱뚱한게 보기 흉해서 일까? 단지 그것만은 아니다.
아이들은 본능적으로 뚱뚱한 아이들을 싫어한다.
뚱뚱한 아이들은 그렇지 않은 아이들에 비해 대개 미련하고 둔하며 욕심이 많고 쩨쩨하다.
아이들은 본능적으로 이걸 안다.
뚱뚱한 것과 말랐다는 것은 어떤 차이일까?
뚱뚱하다는 것은 끌어들이는 것이 내보내는 것보다 많은 것이며, 말랐다는 것은 내보내는 것이 끌어들이는
것보다 많은 것을 의미한다.
즉 뚱뚱한 사람은 받기를 좋아하고 마른 사람은 주기를 좋아한다.
결국 살이 찌고 안찌고의 차이는 영혼 깊숙히 깔려있는 탐욕의 차이이다.
즉 뚱뚱하다는 것은 후천적으로 영양섭취가 다소 영향을 주기는 하지만 절대 대부분은 선천적이다.
여기서도 원판 불변의 법칙이 적용된다
3. 말
말과 사람의 관계에 대한 표현은 참 많다.
말은 그 사람의 브랜드, 말은 그 사람의 거울, 말은 그 사람의 인격 등등
그만큼 말이라는 것도 사람을 판단하는 데 중요한 도구가 된다는 뜻이다.
실제로 말엔 그 사람의 인격과 품성이 고스란히 묻어 나온다.
말투가 싸가지 없으면 실제 성격도 싸가지 없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말로 사람을 판단할 때엔 조심해야 하는 경우도 있는데 말이란 것이 후천적으로 습득한 도구이기
때문에 자기 자신의 노력이 반영될 여지가 많기 때문이다.
전화로만 통화하던 사람을 직접 만나고선 깜짝 놀라는 경험을 해봤을 것이다.
정직하고 순박하다고 느끼던 사람이었는데 직접 만나보니 한눈에 사기꾼인 경우. 그래서 절대로 말투로만
사람을 판단해서는 안된다.
실적이 좋은 영업사원들에겐 눌변인 경우도 많다.
달변은 사람들로 하여금 거부감을 주는데, 눌변은 사람을 만만하게 여기게끔 만든다.
그래서 눌변은 내가 맘대로 주무를 수 있다라는 착각을 갖게 만든다.
그래서 눌변들이 오히려 사회생활에 잘 적응하고 잘 산다.
문제는 이걸 노리는 사람들이 많다는 점이다.
연습을 통해 순박하고 차분하고 정직하게 느껴지는 말투로 가공한다.
이런 것도 조심해야 한다.
그런데 얼굴, 몸, 말로는 부족한 경우가 많다.
노력에 의해 얼굴과 몸과 말투를 다 바꾸었다면 이젠 판단이 헷갈린다.
얼굴과 몸은 의학의 힘을 빌어 아주 쉽게 바꿀 수 있다. 말투도 연습에 의해 바꿀 수 있다.
이렇다 보니 경험이 그리 많지 않다면 자칫 사람만 봐서는 본성과는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파악하게
될 수도 있다.
물론 원판 불변의 법칙은 작용하기 때문에 조금만 상대해 보면 원판을 볼 수 있다.
하지만 사람이 초인적인 노력으로 위장한다면 일반인들은 그걸 파악하기가 불가능하다.
따라서 더 보아야 할 것이 있다.
4. 가족
세살버릇 여든까지 간다고 했다. 어린시절 입력된 사고행동양식은 웬만해서는 변하지 않는다.
따라서 어린 시절 가정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했던 경우엔 그게 그 사람의 후천적 인성이 되어 평생
고쳐지지 않는다. 성인이 되어 아무리 그걸 교정하고 위장해도 본질은 고칠 수 없다.
이런 본질은 생각할 겨를이 없는 위기의 순간에 튀어나온다.
평상시 아무리 호인인척 하던 사람이라도 위기의 순간엔 본질이 튀어나오는 것이다.
그래서 위험하다.
위장여부는 그 사람의 부모 형제자매를 보면 금세 알 수 있다.
가족들이 다 무식하고 교양이 없는데 개천에 용 나듯 본인 하나 말끔하다면, 그건 위장일 가능성이
무척 높다.
만약 결혼과 같은 중대사라면 부모와 형제자매를 반드시 보아야 한다.
결혼생활엔 반드시 사람의 본질이 튀어나오기 때문이다.
5. 친구
가족만큼이나 유용한 것이 바로 그 사람들의 친구들이다.
유유상종, 사람들은 자기와 비슷한 상대와 어울리게 마련이다.
그래서 어울리는 친구를 보면 그 사람을 알 수 있다.
단 성인이 된 후 만난 친구는 여기서 제외이다.
사회적 필요에 의해 만나는 경우가 훨씬 더 많기 때문이다.
또 어린시절 친했던 친구라고 다 유유상종에 해당하는 것은 아니다.
떼거지로 어울리다 보면 본질적으로 맞지 않는 친구들이 끼어있을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어린 시절 친구중 아직까지 만나는 친구만 선별해야 한다.
이렇게 아직까지 만나는 어린 시절 친구로 그 사람의 본질을 유추하는 것, 이거 상당히 유용하다.
하지만 어느정도 친분이 없다면 그 사람의 가족과 친구들을 만나볼 기회는 별로 없다.
6. 그래도 알기 어려우면?
얼굴, 눈빛, 몸, 말, 가족, 친구까지 다 알아보고도 그래도 판단이 안되면 대개 마지막 수단으로 사주, 관상
궁합, 명리학, 종교 등등 이제는 자신의 판단 이외에 전통적으로 내려온 이른바 찍는 방법이 동원된다.
이런 찍는 방법도 나름 일리가 있어 없어지지 않고 내려온 것인지라 참고할 만한 경우도 있다.
그러나 그런 방법이 그 사람의 품성이나 속을 다 알아내기란 당연히 어렵다.
마치 시험에서 찍는 방법이 간혹 정답을 맞추기는 하지만 찍어서 100점을 맞추기란 하늘의 별따기 보다
더 어려울지도 모른다.
다 나름대로 합리적인 것같은 찍는 방법이 동원되지만 역시 오류 투성이 일수 밖에 없다.
보통 판단이 어려운 이유는 내 눈이 내 마음의 눈이 흐려져서인 경우가 많다.
즉 자신의 어떤 욕심이나 바라는 눈으로 보면 당연히 보는 눈이 흐려진다.
그래서 사람은 아무런 이해관계가 없는 사이일때 가장 본색이 드러나기 마련이다.
애인을 찿는다든가,사업상 이용해야 할 사람을 찿는 다든가, 결혼 상대를 찿는 등 어떤 목적이 있을 때에는
내 욕심의 눈으로 상대를 보게 돼 있다.
이것은 썬글라스를 끼고 사람을 바라보는 것과 같다.
썬글라스의 색깔에 따라 당연히 대상이 다르게 보이지만 정작 선글라스를 낀 사람은 사실로 받아 들이게 된다.
다른 사람이 보면 분명히 사기꾼인데 사랑이라는 욕심을 가지고 보면 그 사기꾼도 매력적으로 보이는 것이다.
이처럼 사람의 눈이나 사고, 인식이란 사실을 사실로 받아 들이는 것이 아닌 나만의 썬글라스를 끼고
대상을 받아들이기 때문에 객관적이거나 사실이라고 할 수 없다.
그런데 문제는 주관적이고 사실이 아닌데도 정작 보는 사람음 사실일 거라고 착각하는데 있다.
이처럼 내 마음과 눈이 바르지 않으면 눈이 흐려지게 돼 있다.
즉 어떤 목적이나 욕심이 내 안에 있을 때에는 당연히 그 욕심의 썬글라스를 끼고 대상을 보게 되므로
속기 쉬운데 그처럼 속은 탓은 대상에게도 있지만 일차적으로 자신의 책임일 수 밖에 없다.
아무리 여러가지 방법을 동원해도 마찬가지이다.
자신에게 어떤 목적이 없고 욕심이 없다면 대상을 있는 그대로 보게 된다.
예를 들어 이성을 볼때 내 욕심의 눈이 아닌 동료나 그냥 좋은 친구의 눈으로 보면 있는 그대로의 대상을
알아 볼 확률이 높다.
이 정도 되려면 당연히 보는 사람이 수양이 되지 않으면 거의 어렵다고 봐야 한다.
문제가 생기면 팔자탓, 니탓, 부모 탓 등으로 돌리고
큰 사고나 불행한 일이 겹치면 이제는 하늘탓, 운탓, 하느님 탓 등도 하게 되지만
실제로는 모두 자신의 탓일 뿐이다.
인연은 반드시 그 뒷책임을 포함한 말이다.
내 눈으로 좋아보여 선택했다면 좋지 않은 일을 겪어도 그 뒷책임을 다하겠다는 자세가 없다면
기본이 되어 있지 않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좋은 것에는 반드시 그 댓가가 있다.
세상에 공짜란 없다.
돈이 많으면 많은대로 없으면 없는대로
잘 생긴 남자를 만났으면 그 만한 댓가가 있고
예쁜 여자를 만났으면 또 그만한 댓가가 있게 마련이다.
세상엔 지극히 선한 것도 지극히 악한 것도 없는지라 선이 악이 되고 행이 불행이 되고
불행이 행이 되기도 한다.
항상 문제는 자신의 눈을 맑게 하는 것
자신의 마음을 맑게 하는 것
그리고 욕심없는 빈 마음의 눈으로 보면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일 뿐이다.
거기에 좋고 나쁨이 낄 틈이 어디 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