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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장
致虛極,
(세상 사람들의 마음은 일부러 일삼는 바가 있음이) 텅 빈 바, (그것이) 끝점에 다다른 바에 이르러야 하며,
太極, 本, 虛. 故人心, 致虛, 之極. 則太極, 於是, 乎著矣.
태극(太極; 無極·無爲)은 (만물의) 본체(本; 性·命·自然)로서, (일부러 일삼는 바가 있음有爲이) “텅 비어 있다.” 따라서 세상 사람들의 마음은 (일부러 일삼는 바가 있음有爲이) “텅 빈 바”에 “이르러야 하며”, (일부러 일삼는 바가 있음有爲) 그것이 “끝점에 다다른 바(極; 無極)”에 “이르러야 한다.” 이른바, 태극太極은 따라서 (세상 사람들에게 마음의 본체) 그것이게 되며, 따라서 (세상 사람들에게 마음의 본체 그것으로) 드러나게 되기 때문이다.
守靜篤,
(음陰의 일부러 일삼음이) 조용한 바, (그것이) 도타운 바를 지켜야 한다.
陽動, 陰靜. 而陰靜, 乃其, 本, 質. 故守靜, 之篤. 則陽動, 由是, 立矣.
양陽은 (한 번 일부러 일삼아 오행五行을 생겨나게 하고, 오행五行과 더불어 어우러지는데, 따라서 음陰에 비해 일부러 일삼음이) 시끄러운 바이며, 음陰은 (양陽에 비해 일부러 일삼음이) “조용한 바”이다. 따라서 음陰의 (일부러 일삼는 바가) “조용함”은 이른바 그 (일부러 일삼는 바가 시끄러운 양陽의) 본체가 되며, 바탕이 된다. 따라서 (세상 사람들의 마음은 그 음陰의 일부러 일삼음이) “조용한 바”를 “지켜야 하며”, (일부러 일삼는 바가 “조용함”) 그것이 “도타운 바”를 “지켜야 한다.” 이른바, 양陽의 (한 번 일부러 일삼음이) 시끄러운 바는 (음陰의 일부러 일삼음이 “조용한 바”) 그것을 말미암으며, (따라서 양陽의 한 번 일부러 일삼음이 시끄러운 바 그것이) 세워지게 되기 때문이다.
萬物幷作, 吾以觀復.
만물이 일어남과 (더불어) 어우러지는 때, 나만 (홀로) 따라서 (일부러 일삼음이 조용하고 도타운 음陰의 모양과 모습을) 살피고 되돌이킨다.
此以下, 守靜篤也. 言人, 皆樂觀夫春夏發生之時, 萬物幷有, 而吾, 獨觀於冬至靜寂之中, 一陽來復也. 此, 先王之, 至日閉關, 而道之, 所以本於靜也.
이 문장 이하는 “(세상 사람들의 마음이 음陰의 일부러 일삼음이) 조용한 바, (그것이) 도타운 바를 지키는 일”에 관한 문장이다. (이 문장은) 이른바, “세상 사람들은 (모두) 만물이 (일어남과 더불어) 어우러지고 (그것을) 가지는, 이른바 봄과 여름의 피어나고 생겨나는 때를 즐겁게 여기고 (그것을) 살피지만, (노자) 자신만 홀로 (만물의 일어남이) 조용하고 잠잠함의 (한) 가운데이자, 한 번 (일부러 일삼아 오행五行을 생겨나게 하고, 오행五行과 더불어 어우러졌던) 양陽이 (다시) 찾아들고 되돌이키는 바인 동지冬至(의 때)를 살핀다”는 것이다. 이것이 (아주 먼) 옛날의 임금이 동짓날 출입문을 닫고 빗장을 걸었던 까닭이며, 도(道; 自然)가 (일부러 일삼는 바가 있음有爲이) “조용한 바”를 (일삼음의) 본체로 삼는 까닭이다.
夫物芸芸, 各歸其根. 歸根曰靜, 靜曰復命, 復命曰常, 知常曰明.
이른바, (봄과 여름 때) 만물은 잎과 줄기가 많아지지만, (겨울 때 그것은) 모두 그 뿌리로 되돌아간다. (그) 되돌아가는 뿌리, (그것을) 일컬어 (일부러 일삼음이) 조용한 바라 한다. (그) 조용한 바, (그것을) 일컬어 (한 번 일부러 일삼아 오행五行을 생겨나게 하고, 오행五行과 더불어 어우러졌던 양陽이) 되돌이키는 (하늘의) 명命이라 한다. (그) 되돌이키는 (하늘의) 명命, (그것을) 일컬어 (일부러 일삼는 바가 없음이) 늘 그러한 도道, (이른바 일부러 일삼는 바가 없음이) 늘 그러한 바로 이름 지어 불리는 바라 한다. (그) 늘 그러한 바를 알아차리는 일, (그것을) 일컬어 (만물의 모양과 모습을) 밝게 알아차리는 일이라 한다.
芸芸, 衆多貌. 歸根曰靜, 言春夏, 之芸芸, 至有者, 及冬, 歸藏本根, 而至無也.
“운운芸芸”은 (봄과 여름 때, “만물”이) 잎과 줄기가 많아진 모양과 모습을 비유한다. “귀근왈정歸根曰靜”, 이른바 봄과 여름 때, (“만물”) 그것은 (잎과 줄기가) 많아지게 되고, (따라서 “만물”은 그러한 바를 가지는 바가) ‘있음’에 이르게 되지만, 이른바, 겨울 때, (“만물”은 잎과 줄기가) 본체(本; 虛極·靜篤)로 “되돌아가게 되는데”, (이른바, 봄과 여름 때, 많아졌던 “만물”의 잎과 줄기가) “뿌리(根; 自然·無爲·性)”에 숨겨지게 되며, 이른바 (“만물”의 잎과 줄기가 그것을 가지는 바가) ‘없음(無; 無極·無爲·命)’에 이르게 되기 때문이다.
靜曰復命, 言必靜寂至無, 然後一陽之, 爲天命化化生生者, 方始來復也.
“정왈복명靜曰復命”, 이른바 반드시 (일부러 일삼는 바가) “조용하고” 잠잠하게 되며, (일부러 일삼는 바가) ‘없음’에 이른 다음에야, 한 번 (일부러 일삼아 오행五行을 생겨나게 하고, 오행五行과 더불어 어우러졌던) 양陽은 하늘의 명(命; 靜·自然)이 어우러지고 아우러지며 생겨나고 생겨나는 바를 (다시) 일삼게 되고, 이른바 (“만물”의 잎과 줄기가 많아지는) 시작점이 (다시) 찾아들게 되며, 되돌이켜지게 되기 때문이다.
復明曰常, 言一陽初復之時, 以味, 則玄酒, 以聲, 則希音. 而乃是, 常道常名也.
“복명왈상復明曰常”, 이른바 한 번 (일부러 일삼아 오행五行을 생겨나게 하고, 오행五行과 더불어 어우러졌던) 양陽의 처음(始; 靜·命)이 “되돌이켜진” 때, (그것은) 따라서 (그) 맛이 이른바 (일부러 일삼은 바가 어슴푸레하고) 어렴풋한 술맛(의 모양과 모습)이게 되며, 따라서 (그) 소리가 이른바 (들어도 또렷하고 뚜렷하게 들을 수 없는) 소리(의 모양과 모습)이게 된다. 따라서 이른바 그것은 (노자가 제1장에서 일컬은 일부러 일삼는 바가 없음無爲이) “늘 그러한 도(常道; 自然)”, (이른바 일부러 일삼는 바를 가지는 바가 없는 바無爲로) “늘 그러하게 이름 지어 불리는 바(常名; 自然)”이게 되기 때문이다.
知常曰明, 言必知常道常名, 然後方爲明知. 若春夏, 之芸芸, 至有, 夫人而皆知之也.
“지상왈명知常曰明”, 이른바 반드시 (일부러 일삼는 바가 없음無爲이) “늘 그러한 도(道; 自然)”, (일부러 일삼는 바를 가지는 바가 없는 바無爲로) “늘 그러하게 이름 지어 불리는 바(名; 自然)”를 “알아차린” 다음에, 이른바 “밝게 알아차림”을 일삼게 되기 때문이다. 이른바, 봄과 여름 때, (“만물”) 그것이 잎과 줄기가 많아지게 되고, (잎과 줄기가 많아지는 바를) 가지를 바가 있는 바에 이르게 되면, 이른바 세상 사람들이 따라서 (“만물”의 그러한 모양과 모습) 그것을 (“밝게”) “알아차리게 되기” 때문이다.
不知常, 妄作凶.
(그러나 세상 사람들은 일부러 일삼는 바가 없음이) 늘 그러한 도道, (이른바 일부러 일삼는 바가 없음이) 늘 그러한 바로 이름 지어 불리는 바를 알아차리지 못한 채, 망령되게 흉한 바를 일으킨다.
不知至有本於至無, 則務多鬪靡, 妄自動作, 必致凶咎也.
(그러나 세상 사람들은 일부러 일삼는 바가 없음無爲을 가지는 바가) ‘있는’ 본체(本; 常·常道·常名), 이른바 (일부러 일삼는 바가 있음有爲을 가지는 바가) ‘없는 바(無; 本)’에 “이르러야 함”을 “알아차리지 못하는데”, 따라서 (반드시 일부러 일삼아) 힘쓰는 바가 (마구) 많아지게 되고, (일부러 일삼아) 다투는 바가 (마구) 늘어나게 되며, (따라서 반드시) “망령되게” (힘쓰는 바를 마구) 일삼게 되고, 일부러 일삼아 (다투는 바를 마구) “일으키게 되며”, (따라서) 반드시 “흉한 바”와 허물되는 바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知常容. 容乃公, 公乃王, 王乃天, 天乃道, 道乃久, 沒身不殆.
(따라서 세상 사람들은 그 마음으로 하여금 일부러 일삼는 바가 없음을 가지는 바가) ‘있는’ 본체, 이른바 (일부러 일삼는 바가 있음을 가지는 바가) ‘없는 바를 알아차리게 함으로써, (그 몸으로 하여금 만물을 본래 저절로 그러한 바 대로) 품어 안게 해야 한다. (몸이 만물을 본래 저절로 그러한 바 대로) 품어 안게 되면, (몸이 만물을 본래 저절로 그러한 바 대로) 가지런하게 대하는 바에 이르게 되고, (몸이 만물을 본래 저절로 그러한 바 대로) 가지런하게 대하게 되면, (몸이 아주 먼 옛날, 일부러 일삼는 바가 없이 천하를 다스렸던) 임금의 덕스러움德을 높이게 되며, (몸이 아주 먼 옛날, 일부러 일삼는 바가 없이 천하를 다스렸던 임금의 덕스러움德을 높이게 되면, (몸이 일부러 일삼는 바가 없는) 하늘의 일삼음을 받들게 되고, (몸이 일부러 일삼는 바가 없는) 하늘의 일삼음을 받들게 되면, (몸이 일부러 일삼는 바가 없는) 도道의 본체를 (본래 저절로 그러한 바 대로) 키우게 되며, (몸이 일부러 일삼는 바가 없는) 도道의 본체를 (본래 저절로 그러한 바 대로) 키우게 되면, (몸이) (일부러 일삼는 바가 없는) 도道와 (더불어) 하나가 되게 되고, 몸이 다할 때까지 오래 보여지게 되기 때문이다.
此, 言致虛極也. 知常, 則至虛, 而容物. 容物, 則至公. 而溥遍, 乃帝王之德, 上天之事, 大道之要也. 道乃久, 以其一也. 沒身不殆, 以其久也.
이 문장은 이른바 “(일부러 일삼는 바가 있음有爲이) 텅 빈 바, (그것이) 끝점에 다다른 바에 이르는 일”에 관한 문장이다. “(세상 사람들은 따라서 일부러 일삼는 바가 없음無爲을 가지는 바가) ‘있는’ 본체(本; 常·常道·常名), 이른바 (일부러 일삼는 바가 있음有爲을 가지는 바가) ‘없는 바(無; 本)’를 알아차려야 하고”, 따라서 (세상 사람들의 마음은 일부러 일삼는 바가 있음有爲이) “텅 빈 바”에 이르러야 하며, 따라서 (세상 사람들의 몸은) 만물을 (본래 저절로 그러한 바 대로) “품어 안아야 한다.” (세상 사람들의 몸이) 만물을 (본래 저절로 그러한 바 대로) “품어 안게 되면”, (세상 사람들의 몸이 만물을 본래 저절로 그러한 바 대로) “가지런하게 대하는 바”에 이르게 된다. 따라서 (세상 사람들의 몸이 본래 저절로 그러한 바 대로 만물에게) 두루 이르게 되며, 두루 미치게 된다. (이것이 이른바 아주 먼 옛날, 일부러 일삼는 바가 없이 천하를 다스렸던) “임금”의 덕스러움(德; 自然·無爲·道)을 높이는 일이고, (일부러 일삼는 바가 없는) “하늘”의 일삼음을 받드는 일이며, (일부러 일삼는 바가 없는) 도道의 본체(要; 自然·性·命)를 (본래 저절로 그러한 바 대로) 키우는 일이다. “도내구道乃久”는 이른바 (세상 사람들의 몸) 그것이 (“도道”와 더불어) 하나가 된다는 뜻이다. “몰신불태沒身不殆”는 이른바 (세상 사람들의 몸) 그것이 “오래 보여지게 된다”는 뜻이다.
右第十六章. 自第十一章至此, 凡六章, 爲一節, 而象太極. 之含六. 故卽夫一節之終. 備言致虛守靜, 之自有而無, 以及乎王乃天, 天乃道, 道乃久, 之成效極功焉.
여기까지가 제16장에 대한 풀이이다. (덧붙여) 제11장에서부터 이 장에 이르는, 이른바 6개의 장은 하나의 주제를 일삼는데, 이른바, (도道의) ‘태극(太極; 일부러 일삼는 바가 없음無爲이 끝점을 가지는 바가 없는 바無極)’으로서의 모양과 모습을 상징한다. (이 6개의 장은) 그것이 함축된 장들이다. 이른바, (그) 하나의 주제는 (이렇게) 요약된다. “(세상 사람들의 마음은) 갖추어야 한다. 이른바, (일부러 일삼는 바가 있음有爲이) 텅 빈 바에 이름과 (일부러 일삼는 바가 있음有爲이) 조용한 바를 지킴, 이른바 저절로 그러하게 (일부러 일삼는 바가 없음無爲을 가지는 바가) ‘있음’과 (저절로 그러하게 일부러 일삼는 바가 있음有爲을 가지는 바가) ‘없음’을. 따라서 (세상 사람들의 몸은) 다다르게 된다. (일부러 일삼는 바가 없는) 하늘의 일삼음을 받들게 됨, (일부러 일삼는 바가 없는) 도道의 본체를 키우게 됨, 도道와 (더불어) 하나가 되게 됨, 이른바 (그러한) 본받는 바를 이루게 됨, (그러한) 공능(功能; 功)의 끝점에 이르게 됨에.”
첫댓글 잘못된 부분이 있다면, 모두 저의 부족함 탓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