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빈주의 새끼 유생(儒生)들에게
이광우 (2024.06.25.13:11)
{CBS 광장}(조충남 PD, 최경배 기자, 2024. 6. 23. 방송)에 출연하여 ‘여성 안수’를 주제로 인터뷰하였다. 40 분짜리 프로였으나 방송국에서는 1 시간 2 분으로 편집하여 녹화영상을 유튜브에 올려놓았다. (예상했던 바이지만) 거기 댓글에 어김없이 “여성 안수 주장하려거든 여성 안수 허용하는 다른 교단으로 떠나라”는 막말이 또 붙었다. 솔직히 나는, 공수특전단 장교 출신임에도 내가 남자로 태어난 것이 그토록 대~단한 것인지 아직도 잘 모르겠다. 나에게도 여성인 어머니가 있고 여성인 아내가 있고 여성인 딸들이 있기 때문이다. 아내를 만나 41년 넘게 살아오면서 단 한 순간도 아내와 내가 “누가 더 높으냐” 생각조차 해본 적이 없다. 또한 그 긴 세월 동안 아내와 단 한 번도 싸운 적 없다. (내 자식들 넷이 증인이다.) 짐작컨대, 가부장적 남성우월론에 찌들어 명색이 총신대학교 법인 이사인 나에게 아주 무례하게 “교단을 떠나라”고 하는 그 자(놈 者)는 어쩌면 박윤선 박사(목사)의 충실한 제자로서 집안에서 아내와 자식들을 날마다 마구 패는 삶을 살 것이다. 아니면 아내에게 뒈지게 처 맞고 살거나….
박혜란 목사(여성)를 기억하시는 분들이 혹시 있는지 모르겠다. 1979년에 한국 최초로 신·구약성경 전권(全卷)을 주석하고, 1980년에 예장합동 측의 교권주의에 반기를 들고 교단이 쪼개진 뒤 합신의 초대원장을 지냈던 박윤선 박사(목사)의 친딸이다. 박혜란 목사는 박윤선 목사와 첫 번째 부인인 김애련 여사 사이에서 3 남3 녀 중 둘째 딸로 태어났다. 서울대학교 공과대학을 졸업하고 1970년에 미국으로 이민 가서 45세에 늦깎이로 덴버신학교에 입학하였고, 졸업 후 계속 공부하여 석·박사학위를 받았다. 미국에서 신학을 공부하면서 아버지 박윤선의 신학에 약점과 문제점이 아주 많다는 것을 새롭게 깨우쳤다. 그 박혜란 목사가 『목사의 딸』(2015년, 아가페북스)이라는 책을 펴내서 한때 우리 사회에 큰 소용돌이를 일으킨 적 있다. 책의 부제는, “‘하나님의 종’이라는 이름 뒤에 감춰진 슬픈 가족사”이다. 이 책에서 박혜란 목사는 자신의 부친인 박윤선 목사의 실제 모습을 세상 앞에 있는 그대로 발가벗겨 드러냈다.
강의하는 신학교에서는 최고의 신학자요 목사로, 최고의 경건주의자로 추앙을 받았던 박윤선 박사, 예장합동 교단에서는 거의 신(神)으로 추앙받는 사람, 죽은 뒤에 거의 신격화되다시피 한국보수신학의 거장(巨匠)으로 여태껏 한없이 추앙받는 박윤선 박사, 여성인 박혜란 목사의 친아버지. 평생 곁에서 신학자이자 목사인 아버지 박윤선을 지켜보며 자란 박혜란 목사는 그런 박윤선 박사를 일컬어 “칼빈주의의 유생(儒生)”이라 싸늘하게 평가했다. 요즘 한국 골프의 살아있는 전설인 박세리 선수가 그 부친의 도박 빚을 갚느라 지친 나머지 그를 고발하자 박세리 선수를 일컬어 “낳고 길러준 부모 은혜도 모르는 ×”이라고 상스런 욕을 하는 정신 나간 자(者)들이 있던데, 당시 박혜란 목사가 책을 펴냈을 때도 사람들의 무참한 쌍욕이 그에게 쏟아졌다. 박윤선을 신(神)처럼 떠받들던 신학계에서의 박혜란 목사를 향한 살벌한 비난은 그럼 어땠을 것 같은가. 조선 시대까지 이어져 온 가부장적인 남성우월론에 내내 찌들어 곰팡내 풀풀 나던 나라 아니던가.
내가 늦깎이로 신학대학원을 다닐 때까지도 그 『박윤선 주석』이 마치 유일한 진리인 양 떠받드는 자들이 많았다. 어쩌면 지금 예장합동 교단을 쥐락펴락하는 자들 가운데 신학자 박윤선을 추앙하지 않는 자는 별로 많지 않을 것이다. 신학대학에서 강의하고 퇴근 전에 반드시 학교 뒷산 기도굴에 가서 경건하게 기도를 하는 평생의 습관이 있었다는 박윤선 박사, 그가 퇴근 후에는 자식들 보는 앞에서 자기 아내를 무지막지하게 패는 모습을 박혜란 목사는 평생 곁에서 보면서 성장했다. 얼마나 가슴에 맺힌 게 많았으면 부모 자식의 천륜(天倫)을 뒤로하고 아버지 목사(신학박사)의 실체를 세상에 까발리는 책을 썼겠는가.
박윤선은 이미 고인(故人)이 되었지만 그렇다고 예장합동 교단에서 “칼빈주의의 유생(儒生)들”이 대가 끊긴 것은 아니다. 그래서 그럴까, 그 칼빈주의의 새끼 유생(儒生)들이 오늘 나에게도 “여성안수를 주장하려거든 교단을 떠나라”고 막말을 해댄다. 미안하지만 나는 이 교단에서 혹시 목사 면직이 되면 신학을 공부하기 전의 ‘집사’로 돌아가 계속 주님을 섬길 것이고, 여성 안수 문제가 해결되기 전에는 이 예장합동 교단을 떠날 생각이 전혀 없다. 떠나더라도 여성 안수 문제가 해결된 뒤에 떠날 것이니 날도 더운데 너무 그렇게 보채지 마라. 그나저나 나에게 교단을 떠나라고 하는 목사들은, 목회하면서 교회 안에 자신과 다른 의견을 지닌 교인들을 모조리 다른 교회로 쫓아내면서 제왕(帝王)처럼 제멋대로 목회를 하고 사는 것은 아닌가 모르겠다. (설마 교인 한 사람을 무던히 소중히 여기는 목사가 그럴 리야 있겠냐만…)
익명(匿名)의 그늘에 숨어 비겁하게 닥반(닥치고 반대)만 하지 말고 그토록 자신 있으면 당당하게 민증(民證)을 까 이름을 밝히고 나서서 신학적으로 그리고 논리적으로 나를 논박(論駁)하라. 정당하고 논리적인 논박은 얼마든 환영한다. 그런 논쟁을 통해 우리의 신학이 반걸음씩이라도 신학적 완성을 향해 진보하지 않겠는가. 치열한 논쟁 끝에 나의 신학이 잘못되었다는 판단이 들면 교단 앞에 그리고 모든 성도들 앞에 즉시 엎드려 진중하게 사과할 생각이 있다. “한 때 내가 성경을 잘못 보았다”고 솔직하게 고백하며 알량한 대가리 한번 숙이는 것, 나같은 피조물에게 그게 무에 그리 어렵겠는가.
어쩌다 징허게 재수(?) 좋게 남자로 태어난 “칼빈주의의 새끼 유생(儒生)들”이여!
그냐, 안 그냐?
댓글
…(전략)…
이광우 (2024.06.27.11:27)
보수신학의 보루라 자임하는 예장합동 교단에서 신처럼 떠받드는 어떤 사람 얘기를 제가 꺼낸 것이 마치 역린을 잘못 건드린 듯 어제 오늘온 동네가 무쟈게 요란하군요.
예컨대, 순교자를 열심히 추앙한다고 그 사람이 순교자처럼 훌륭해질 거라는 착각은 아예 하지 않는 게 건강에 좋습니다. 이미 고인이 된 누군가의 업적만을 자꾸 치켜 올리면서 슬쩍 숟가락 하나 얹어 가는 거 신앙인으로서 좀 쪽팔리고 비겁하지 않습니까?
이광우 (2024.06.28.17:53)
거의 평생을 설교자로 살아왔습니다. 성경 본문의 결을 따라 말씀을 다루다 보면 어쩔 수 없이 성도들의 마음이 불편할 수도 있는 말을 해야 할 때가 많습니다. 그렇다고 하나님의 말씀을 상황에 따라 함부로 가감할 수는 없는 것이 목사가 져야 할 십자가라 생각해왔습니다. 어떤 말을 하면 사람들이 좋아하고, 어떤 말을 하면 사람들이 싫어하는지도 아주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설교자인 제가 조금 불편해질 것 같다 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임의로 재단할 생각은 추호도 없습니다. 그것은 이 일을 맡겨주신 하나님 앞에서 너무너무 무서운 짓이니까요.
예장 합동 교단에서 여성 안수 문제를 거론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입 다물고 가만히 있으면 편하다는 것, 저인들 모르겠습니까. 외롭게 나서서 문제를 제기하고 문제를 풀어가는 과정에서 다소 부담스럽지만 꼭 해야만 할 이야기들이 있습니다. 특히나 누군가의 약한 부분을 예를 들며 이야기할 때는 제 마음이 먼저 불편합니다. 저 역시 하나님 앞에 약점이 많은 한낱 피조물이기 때문에 더더욱 그렇습니다. 제 이야기는, 제가 누군가를 들어 그의 약점을 이야기하며 글을 쓰는 것이 즐거워서 하는 일이 결코 아니라는 것, 교우들이 듣기 불편한 이야기를 설교시간에 해야 할 때와 별 차이 없이 몹시 불편한 마음으로 제 의견을 아주 힘들게 그리고 조심스럽게 이곳에서 말하고 있다는 것만은 분명히 짚고 싶습니다. (마태가 신자들이 다 읽는 마태복음 26장 69절 75절에 사도 베드로의 배신 이야기를 쓴 것이 베드로를 ‘까기’ 위해 쓴 것이 아니라는 것쯤은 잘 아시지 않습니까?)
하지 않아도 될 이야기를 해야 하고, 쓰지 않아도 될 책을 꾸역꾸역 써야 하는 제 마음의 큰 부담과 고통을 제가 믿는 하나님 외에 그 누가 속속들이 알 수 있겠습니까? 물론 누군가가 알아주기를 바라고 말하고 글 쓰는 것은 아니지만, 마치 누군가를 까는 것이 즐거워서 그러는 것인 양 함부로 넘겨짚고 섣부르게 훈수 두는 일은 제발 하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제 전공이 글쓰기라, 설교 원고를 쓸 때나 글을 쓸 때, 토씨 하나, 문장 부호 하나까지 항시 신경 쓰는 체질이고 한 번 쓴 글은 적어도 20-30회 줄기차게 게속해서 교정을 하는 스타일입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이런 말을 하면 어떻게 될까, 또 저런 말을 하면 또 어떤 욕을 먹고 어떤 비난을 받게 될까를 짐작도 못할 만큼 제가 똥 멍청이는 아니라는 이야기입니다.
함께 나서서 싸우기 싫으면 그냥 좀 조용히 기도해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이광우의 말과 글이 너무 거칠다면 당신이 믿는 하나님 앞에 “하나님 저 놈 제발 좀 다소곳하게 맹글어 주십사” 이렇게 기도하시면 됩니다. 남자들이 선택한 것도 아니고 시험 봐서 단 것도 아닌 ‘불알’ 두 쪽이 그렇게나 대단한 것인지 지금 이 순간도 저는 정말 궁금합니다. 그것이 그토록 대단한 것입니까? 그것이 주님의 부르심이 있는 여성 사역자들의 소명을 막는 기준이 될 정도로 절대적으로 대단한 것입니까? 그래서 그 대단한 것을 마구 놀리며 성도들을 농락하는 남자 목사들에 대해서는 예장합동 교단이 그토록 은혜롭고 관대하게 대하는 것입니까?
우리 모두, 그 나라에서 그분의 심판대 앞에 설 날이 코앞에 다가와 있습니다. 우리 모두 내일을 장담할 수 없는 피조물들, 그저 “잠시 동안 걸어다니는 흙덩어리들”입니다. 날이 아무리 더워도 제발 좀 정신들 차립시다. 시시각각 우리 머리 꼭대기를 겨누고 내려오는 하나님의 엄한 도끼날이 보이지 않으십니까? 예수님을 구주와 주로 믿는 믿음이 있다고 무던히 큰소리치시는 분들께서 도대체 왜들 그러십니까?
…(하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