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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5장
含德之厚, 比於赤子, 毒虫不螫, 猛獸不據, 玃鳥不搏. 骨弱筋柔而握固, 未知牝牡之合而䘒作, 精之至也. 終日號而嗌不嗄, 和之至也. 知和曰常, 知常曰明. 益生曰祥, 心使氣曰强. 物壯則老, 是謂不道. 不道早已.
덕스러움德을 품은 바가 두터운 사람은 어린아이에 비유되는데, (어린아이는) 독충이 (일부러 일삼아) 독을 뿜지 않고, 맹수가 발톱과 발로 긁어내리거나 찍어 누르지 않으며, 맹금류가 낚아채지 않는다. (만물을 일부러 일삼아 분별하는 바를 가지는 바가 없는 마음이 지극하기 때문이다. 어린아이는) 뼈가 연하고 살이 부드럽지만, 손이 쥐는 바가 단단하고, 암컷과 수컷이 어우러지는 바를 알지 못하지만, 고추가 살아나는데, (무위가) 면밀한 바가 지극하기 때문이다. (어린아이는) 하루를 마치도록 큰 소리로 울지만, 목구멍이 쉰 소리를 내지 않는데, (무위와 더불어) 어우러지는 바가 지극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세상 사람들은 무위와 더불어) 어우러지는 일이 (삶의 형세를 본래 저절로 그러한 성性·명命대로) 늘 그러하게 하는 일임을 알아차려야 하고, (삶의 형세를 본래 저절로 그러한 성性·명命대로) 늘 그러하게 하는 일이 (덕스러움德·無爲을) 밝게 하는 일임을 알아차려야 한다. (따라서 유위한) 삶을 더하는 일, (삶이) 상스럽지 못하게 되는 일이라고 일컫는다. 마음이 기氣를 (일부러 일삼아) 부리는 일, (유위가) 굳세어지게 되는 일이라고 일컫는다. (따라서) 사물이 (일부러 일삼아) 자라나게 되면, (일부러 일삼아) 늙어지게 되는데, 그것은 도道가 아니기 때문이다. 도道가 아니기 때문에 (일부러 일삼아) 일찍 끝나게 되는 것일 따름이다.
含德者, 蘊于中, 不耀于外也. 內全其天, 而外泯其知, 故以赤子爲化. 朱子曰, 無知無能, 而純一無僞者, 赤子之心也.
덕스러움(德; 無爲·命·道·自然·性)을 품은 사람은 (덕스러움德을 마음) 가운데 쌓은 채, (일부러 일삼아) 밖으로 번쩍이지 않는다. 안으로 그 (저절로 그러한) 하늘(의 모습)을 (쌓는 바를) 오롯한 채, 밖으로 그 (일부러 일삼은) 앎을 (번쩍이는 바를) 어그러뜨린다. 따라서 어린아이(의 무위無爲한 마음으)로써, (만물과 더불어) 어우러진다. 주자朱子는 (『맹자孟子』 「이루장구하離婁章句下」에서) 일컬었다. “(일부러 일삼아) 알아차리는 바를 가지는 바도 없고, (일부러 일삼아) 일삼는 바를 가지는 바도 없으며, 하나(一; 德)에 순수하고, (일부러 일삼아) 속이는 바를 가지는 바도 없는 것이 어린아이의 마음이다.”
螫, 毒也. 吳幼淸曰, 以爪足拏按, 曰據. 德, 全于中者, 物, 莫之傷. 雖有忮人, 不讐嬰兒, 以其, 無心也.
석螫은 (일부러 일삼아) 독毒을 뿜는다는 말이다. (중국 원元나라 때) 오징(吳澄, 1249~1333)은 (『도덕진경주道德眞經註』 제47장 주註에서) 일컬었다. “(일부러 일삼아) 발톱과 발로 긁어내리거나 찍어 누르는 일, 거據라고 일컫는다.” 덕스러움德이 (마음) 가운데 오롯한 사람은 (독충, 맹수, 맹금류와 같은) 사물이 (독毒, 이빨, 발톱으로써, 일부러 일삼아) 해치는 바를 가지는 바가 없다. (이른바, 어린아이를) 싫어하는 바를 가지는 바가 있는 사람일지라도, 어린아이를 (일부러 일삼아) 적敵으로 여기지 않는다. 어린아이는 (자신을 싫어하는 바를 가지는 사람을 일부러 일삼아 적敵으로 여기는) 마음을 가지는 바가 없기 때문이다.
䘒, 子何, 切赤子陰也. 作, 動也.
최䘒는 (어린) 사내아이의 무엇, 바로 어린 (사내)아이의 고추이다. 작作은 (저절로 그러하게) 살아난다는 말이다.
號, 啼哭也. 嗌, 咽也. 嗄, 聲嘶也.
호號는 큰 소리로 운다는 말이다. 익嗌은 목구멍을 가리킨다. 사嗄는 (목구멍이) 쉰 소리를 낸다는 말이다.
其, 天全, 則神完. 神完, 則氣全. 其, 靜也全, 則其, 動也, 直. 故力, 不用, 而固, 情, 不萌而作. 以其, 至專, 而不雜也.
어린아이는 (저절로 그러한) 하늘(의 모습)이 오롯한데, (어린아이는 저절로 그러한 바가) 신령스러운 바(神; 太極)가 오롯하기 때문이다. (어린아이는 저절로 그러한 바가) 신령스러운 바가 오롯한데, (어린아이는 저절로 그러한 음陰·양陽의) 기氣가 오롯하기 때문이다. 어린아이는 (따라서 유위有爲가) 조용한 바(靜; 無爲)가 오롯하고, 따라서 어린아이는 일삼는 바가 (무위無爲가) 참되다. 따라서 (어린아이는 그) 힘이 일삼아지지 않았는데, (그 손이 쥐는 바가) 단단하게 되고, (따라서 어린아이는 그 암컷과 수컷이 더불어 어우러지고자 하는) 마음이 싹트지 않았는데, (그 고추가) 살아나게 된다. 이른바, 어린아이는 (무위無爲가) 오롯한 바에 이른 바이자, (유위有爲가) 섞이지 않은 바이다. 따라서 (노자는) 일컬었다. “(무위無爲가) 면밀한 바.”
內情, 不炎, 外物, 不傷. 雖終日號, 而其中, 則猶無與也. 以其, 無所乖忤也. 故曰和.
(어린아이는) 안으로 마음이 (유위有爲에 대해 일부러 일삼아) 불타지 않고, (따라서 어린아이는) 밖으로 사물이 (일부러 일삼아) 해지지 않게 되며, (따라서 어린아이는) 하루를 마치도록 크게 울더라도, 그 (목구멍) 가운데가 (쉰 소리와) 더불어 하는 바를 가지는 바가 없게 된다. 이른바, 어린아이는 (무위無爲를) 어그러뜨리는 바나 거스르는 바를 가지는 바가 없는 바이다. 따라서 (노자는) 일컬었다. “(무위無爲가 더불어) 어우러진 바.”
赤子之, 和, 以無知而已. 大人者, 物, 來. 而順應. 萬變, 交乎前. 而我, 無與焉.
어린아이는 (무위無爲와 더불어) 어우러지는데, 따라서 (어린아이는 사물을 일부러 일삼아) 알아차리는 바를 가지는 바가 없게 될 따름이다. (따라서 무위無爲의 수준과 정도가 높고) 큰 사람은 사물이 (눈앞에서 저절로 그러하게) 오(가)게 하고, 따라서 (그는 사물을) 따르며, (사물과 더불어) 어우러진다. 사물의 변화가 (눈)앞에서 (저절로 그러하게) 어우러지게 하고, 따라서 그는 (사물의 변화를 따르는 바와 사물의 변화와) 더불어 하는 바를 (일부러 일삼아) 가지는 바가 없다.
夫以我逐物者, 其勢, 不可以久. 以物順物, 則終日交, 而我, 不勞, 不勞, 則不傷, 不傷, 則可以長久. 常者, 德之, 可久者也.
이른바, (유위有爲한 사물인) 자신으로써 사물을 좇는 사람은 그 (삶의) 형세가 (본래 저절로 그러한 성性·명命대로) 오래 보여질 수 없게 된다. (그러나 무위無爲한) 사물(인 자신으)로써 사물을 따르게 되면, 하루를 마치도록 (사물과 더불어) 어우러지더라도, 자신이 (일부러 일삼아) 수고로워지지 않게 되고, (일부러 일삼아) 수고로워지지 않게 되면, (일부러 일삼아) 다치지 않게 되며, (일부러 일삼아) 다치지 않게 되면, (그 삶의 형세가 본래 저절로 그러한 성性·명命대로) 오래 갈 수 있게 되고, 오래 보여질 수 있게 된다. (따라서 노자가 일컬은) “상(常; 삶의 형세를 본래 저절로 그러한 성性·명命대로 늘 그러하게 하는 일)”은 (덕스러움德을 밝게 하는 일이 되고, 덕스러움德을 밝게 하는 일은) 덕스러움(德; 無爲)이 (저절로 그러한 바대로) 오래 보여질 수 있게 하는 일이 된다.
益生, 卽所謂生生之厚也. 祥, 猶左氏傳, 是, 何祥也之祥, 謂妖異也.
익생(益生; 유위有爲한 삶을 더하는 일)은 (제50장이 일컬은) “삶이 그 (유위有爲가) 두터운 바를 (일부러 일삼아) 생겨나게 하는 일”이다. 상祥은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이 (「희공僖公16년年」에서) “(별똥별 5개가 떨어지고, 큰 물새 여섯 마리가 날아간 일) 이것은 어떠한 일인가? 상스러운 일인가? 아니면 상스럽지 못한 일인가? (길吉한 일이라면, 그것이 언제쯤 일어나겠는가? 흉한凶 일이라면, 그것이 언제쯤 일어나겠는가?)”라고 할 때의 상스럽지 못한 일로서, (삶이 본래 저절로 그러한 성性·명命을 일부러 일삼아) 벗어나게 하고, 어긋나게 하는 일이다.
莊子曰, 不以好惡. 內, 傷其身, 常因自然, 而不益生. 不以好惡, 內, 傷其身, 則此章, 所謂和也. 常因自然而不益生, 則其身, 不傷, 而其生, 自長. 若有意於益生, 則欲畏妖其情, 趨捨勞其形, 而反爲傷生之妖矣.
『장자莊子』는 (「덕충부德充符」에서) 일컬었다. “(내가 한 ‘사람은 유위有爲한 마음을 가지는 바가 없어야 한다’는 말은) ‘사람은 (그 마음이 일부러 일삼아) 좋아하거나 싫어하지 않아야 한다’는 뜻이다. (따라서 그) 마음이 그 몸을 해치지 않게 되고, (따라서 그 몸이) 늘 그러하게 저절로 그러한 바(自然; 性·命·道·德·無爲)를 말미암게 되며, 따라서 (그 몸이 유위有爲한) 삶을 더하지 않게 된다.” (여기서, 그 마음이) “(일부러 일삼아) 좋아하거나 싫어하지 않게 되고, 따라서 그 마음이 그 몸을 해치지 않게 되는 일”, 이른바 이 장이 일컬은 “화(和; 무위無爲와 더불어 어우러지는 일)”이다. “(따라서 그 몸이) 늘 그러하게 저절로 그러한 바를 말미암게 되고, 따라서 (그 몸이 유위有爲한) 삶을 더하지 않게 된다”는 말은 “따라서 그 몸이 (일부러 일삼아) 다치지 않게 되고, 따라서 그 삶이 저절로 그러하게 (본래 저절로 그러한 성性·명命대로) 오래 가게 된다”는 뜻이다. 따라서 (그 마음이) “(유위有爲한) 삶을 더하는 일”에 뜻을 가지는 바가 있게 되면, 그 (본래 저절로 그러한) 마음을 일부러 일삼고자 하게 되고, (따라서 그 본래 저절로 그러한 마음을 일부러 일삼아) 으르게 되며, (따라서 그 마음이 본래 저절로 그러한 바를 어긋나거나) 벗어나게 되고, (따라서 그 마음이) 그 (본래 저절로 그러한) 형상(形; 身)을 (일부러 일삼아 유위有爲로) 달려가게 하고, (따라서 무위無爲를) 내버리게 하며, (따라서 그 몸이 일부러 일삼아) 수고로워지게 되고, 따라서 (그) 삶이 (일부러 일삼아 저절로 그러한 바를 어긋나거나) 벗어나게 되는 바로 되돌아가게 되고, (그것을) 일부러 일삼게 되며, (그것을 일부러 일삼아) 생겨나도록 하게 되는 것이다. 〔홍석주는 『장자』의 “身”을 “神”으로 잘못 인용했다. 따라서 옮긴이가 홍석주의 “神”을 “身”으로 수정했다〕
心使氣, 謂心, 動於中, 而氣, 爲之, 變也.
심사기心使氣는 (본래 저절로 그러한) 마음이 (유위有爲의) 가운데로 움직이게 되고, 따라서 (본래 저절로 그러한) 기氣가 (유위有爲) 그것을 일삼게 되며, (따라서 본래 저절로 그러한 기氣가 유위有爲를 일삼는 바로) 바뀌게 된다는 말이다.
含德之厚者, 唯無心也. 故物, 莫之能害. 赤子, 唯無心也. 故神全, 而氣和. 治, 然其, 未乖, 退, 然乎守雌, 可謂弱矣. 唯弱, 故爲道之用, 而長, 有其生.
덕스러움德을 머금은 바가 두터운 사람은 (유위有爲한) 마음을 가지는 바가 없다. 따라서 (그는) 사물이 (자신을 일부러 일삼아) 해칠 수 있는 바를 가지는 바가 없게 된다. 어린아이는 (유위有爲한) 마음을 가지는 바가 없다. 따라서 (어린아이는 무위無爲가) 신령스러운 바가 오롯하게 되고, 기氣가 (무위無爲와 더불어) 어우러지게 된다. (따라서 유위有爲한 마음을) 다스림으로써, (무위無爲한 마음) 그것이 어그러지지 않은 사람, (유위有爲한 마음을) 물러나게 함으로써, 암컷됨(雌; 無爲)을 지키는 사람은 (유위有爲가) 연한 사람으로 일컬어질 수 있다. 따라서 (세상 사람들은 유위有爲가) 연한 바가 되어야 한다. 따라서 도(道; 自然)가 일삼는 모습(用; 德·無爲)을 일삼게 되고, 따라서 (본래 저절로 그러한 성性대로) 오래 가게 되며, 따라서 그 (본래 저절로 그러한 명命대로) 살게 되는 바를 가지는 바가 있게 된다.
心動, 情熾, 而使其氣, 可謂强矣. 强者, 固死之徒也. 强者, 含德之反也, 壯者, 赤子之反也. 壯之, 必老. 猶强之, 必摧. 故相承而言.
마음이 (유위有爲의 가운데로 일부러 일삼아) 움직이고, 마음이 (유위有爲에 대해 일부러 일삼아) 세차며, (마음이) 그 (본래 저절로 그러한) 기氣를 (일부러 일삼아) 부리는 사람은 (유위有爲가) 굳센 사람이라고 일컬을 수 있다. (유위有爲가) 굳센 사람은 따라서 (일부러 일삼아) 죽는 무리가 되게 된다. (따라서 심사기왈강心使氣曰强에서) 강强은 덕스러움德을 머금은 모습의 반대 모습(反; 有爲)을 뜻한다. (물장즉노物壯則老에서) 장壯은 어린아이 모습의 반대 모습(反; 有爲)을 뜻한다. (이른바, 유위有爲가) 굳센 바는 반드시 (일부러 일삼아) 늙어지게 된다. (유위有爲가) 굳센 바는 반드시 (일부러 일삼아) 꺾여지게 된다. 따라서 (심사기왈강心使氣曰强과 물장즉노物壯則老가) 더불어 이어지게 되었고, (더불어) 일컬어지게 되었다.
此章, 卽上篇, 全氣致柔, 一句之意. 而演之. 廣成子, 所謂守一處和者, 亦此意也.
(요컨대) 이 장은 제10장, “전기치유(全氣致柔; 본래 저절로 그러한 기氣를 오롯하게 하고, 유위有爲가 부드러운 바에 이르러야 한다)”, (이) 한 문장이 뜻이다. 이른바, (이 장은) 그것을 부연하는 장이다. (아주 먼 옛날, 황제黃帝 때의 신선神仙인) 광성자廣成子가 일컬은 바, “(무위無爲와 더불어) 하나가 된 바(一; 道·德)를 지키고, (무위無爲와 더불어) 어우러진 바(和; 性·命)에 머물러야 한다”, 또한 이 장의 뜻이다.
或曰, 益生, 謂養生也. 心使氣, 謂存心以制欲, 使喜怒哀樂之發, 皆聽命乎心也. 强, 卽所謂自勝者, 强也. 此說, 亦可通. 但與上下文義, 不甚相屬耳.
(덧붙여) 어떤 사람은 일컬었다. “(익생왈상益生曰祥에서) 익생益生은 (무위無爲로써, 그 본래 저절로 그러한) 삶을 (먹여) 기른다는 뜻이다. (따라서 상祥은) 길吉한 일이라는 뜻이다. 심사기心使氣는 (그) 마음을 (무위無爲의 가운데) 자리하게 하는 바로써, (그) 일부러 일삼고자 하는 바를 다스린다는 말로서, 희노애락의 피어남이 모두 (그) 마음속의 (본래 저절로 그러한) 명命을 받아들이게 한다는 뜻이다. 강强은 스스로 (무위有爲를) 이기는 사람, (이른바 무위無爲가) 굳센 사람을 뜻한다.” 이 일컬음 또한 (뜻이) 통할 수 있다. 그러나 (심사기왈강心使氣曰强) 이상과 (물장즉노物壯則老) 이하 문단의 뜻이 서로 잘 이어지지 못할 따름이다. 〔옮긴이가 생각하기에, ‘어떤 사람’의 입장을 따르더라도, 물장즉노物壯則老 이하 문단을 ‘(따라서) 사물이 (일부러 일삼아) 자라나게 되면, 반드시 (일부러 일삼아) 늙어지게 되는데, 이것은 이른바 (그것이) 도道에 맞지 않기 때문이다. 도道에 맞지 않기 때문에, (일부러 일삼아) 일찍 끝나게 될 따름이다’로 풀이하면, 상·하 문단이 연결되는 데, 무리가 없는 듯하다〕
첫댓글 잘못된 부분이 있다면, 모두 저의 부족함 탓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