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시작 / 양선례
천장을 두드리는 빗소리에 잠이 깼다. 머리맡 스탠드에서 흘러나온 빛만 흐릿한 걸 보니 아직 날이 밝지는 않았나 보다. 얼굴까지 이불을 뒤집어쓰고 다시 잠을 청했다. 이런저런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져서 뒤척였다. 눈 감았다 뜬 것 같은데 알람이 울린다. 휴대폰을 먼저 찾았다. 새 소식을 확인하니 역시나 예상대로다. 강풍으로 종일 결항이라는 문자가 와 있다.
셋이 아침을 먹기에는 밥이 조금 부족해. 버섯과 호박, 양파에 묵은 김치를 달달 볶아서 볶음밥을 만들어야지. 그 사이 참치를 넣고 김치찌개를 끓여 두면 아들이 여러 날 먹을 수 있겠지. 아홉 시가 되면 집을 나서는 거야. 물론 그전에 택시도 불러야겠지. 공항까지는 25분이 걸리니 오전 10시 30분에 출발하는 여수행 비행기를 타는 데는 문제 없을 거야. 그런데 결항이라고? 계획했던 모든 일이 틀어질 판이다.
멀리 날아간 슬리퍼를 주워다 신고 베란다로 나갔다. 집 앞 소나무 가지가 찢어질 듯 바람에 펄럭였다. 빨래집게가 90도로 흔들리며 춤을 춘다. 하늘은 뿌옇게 잿빛이다. 간간이 빗방울이 뿌린다. 윙윙대는 바람에 창문이 덜컹거렸다.
내일은 2025학년도가 시작되는 첫날이다. 1학년 아이들의 입학식, 2~6학년의 시업식이 예정되어 있다. 학교에 처음 오는 아이들에게 읽어 주기 좋은 그림책을 고르고, 그에 맞는 피피티(PPT)를 준비하여 낭독 연습도 해두었다. 81명의 신입생에게 나눠 줄 그림책도 한 권씩 샀다. 영상 매체를 멀리하려면 자녀의 스마트폰 보는 시간을 통제하고, 초등학교 3학년까지는 부모가 수시로 책을 읽어 주면 좋겠다. 휴일이나 방학이면 자녀 손 잡고 가까운 도서관이나 서점 나들이도 권해 볼 참이다. 그런데 갈 수가 없다니, 이 무슨 날벼락이랴.
이가 없으면 잇몸이라고 누군가 대신 식은 진행하겠으나 신학기 첫날부터 교육장의 연가 결재를 받아야 하는 건, 생각만으로도 끔찍하다. 여러 변수를 미리 대비하지 못한 무능한 관리자가 되겠지. 어제 비가 내릴 때 서둘렀어야 했는데, 후회막급이다. 배편도 끊긴 지 오래였다. 발을 동동거리는 나를 본 아들이 여러 검색창을 들락거리더니 “엄마, 여수공항만 결항이고 다른 데는 이상이 없네요.” 한다. 믿기지 않아서 정말이냐고 소리를 질렀더니 휴대폰 화면을 들이민다.
이럴 수가. 진짜였다. 이른 아침에 출발하는 김포행 비행기 몇 대만 빼고는 평소와 다를 바 없었다. 서 있기도 힘든 이 바람을 뚫고 그 무거운 비행기가 하늘을 난다고? 놀라워라. 김포건 김해건 가리지 않을 테니 육지에만 나갈 수 있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아들이 항공권을 구한 건 그로부터 얼마 되지 않아서였다. 그것도 가까운 광주공항. 아침을 준비하면서 콧노래가 절로 나왔다. 가슴에 얹힌 짐이 쑥 내려간 느낌이다.
지난 1월에도 여수공항은 1cm도 안 되는 눈 때문에 결항한 적이 있다. 전화했더니 제설 장비가 아예 없다고 했다. 다른 데는 정상 운행인데 유독 여기만 그런 일이 잦다. 오가는 비행기가 몇 편 안되는 데다, 활주로가 짧아서 그런 모양이다. 어쩔 수 없이 그때도 예정된 날보다 하루 늦게 갔다. 지방 사는 어려움이 이런 건가 싶어 씁쓸했다. 아들과 며느리의 직장이 있는 제주도는 두 아이 모두에게 타향이다. 일가친척은 고사하고 친구도 없어 지난 설에도 8개월 된 손자를 데리고 와서 열흘을 머물다 갔다. 손자도 보고, 아이들도 달래줄 겸 봄방학과 짧은 연휴를 이용하여 나선 길이었다.
늦은 아침을 먹고는 공항 가까운 카페에 자리를 잡았다. 다른 곳과 달리 좌식 탁자가 있어 손자를 데리고 놀기에 좋았다. 너른 통창으로 된 면에서, 평소와는 다른 바다가 한눈에 들어왔다. 하얗게 물보라를 일으키는 파도가 도로까지 넘실거렸다. 카페에는 가족이나 연인으로 보이는 여행객이 많았다. 기분 탓인지 손에 잡히는 것마다 물고, 빨고, 맛보느라 한시도 가만히 있지 못하는 손자를 따라다니는 일도 힘들지 않았다.
집에 가서 쉬라고 아들네를 돌려보내고, 탑승 시간보다 일찍 공항에 들어왔다. 예정된 시간이 넘었는데 수속할 기미가 안 보인다. “지금 바람이 너무 많이 불어서 우리가 탈 비행기가 착륙하지 못하고 있대요. 공항 상공을 빙빙 돌고 있다네요.” 부지런한 누군가가 사연을 전한다. 기약 없는 기다림이 시작되었다. 그래도 다행인 건 어디를 향하는지는 몰라도 그 사이에도 비행기는 쉬지 않고 뜨고 내린다는 거다.
드디어 탑승구가 열렸다. 버스를 타고 한참을 가서야 비행기 앞에 닿을 수 있었다. 거센 바람 탓에 오르는 계단이 흔들렸다. 굵은 빗줄기가 얼굴을 쳤다. 다시 마음이 조마조마하다. 좌석번호 55까지 넘어가는 자리가 꽉 찼다. 모바일 체크인이 안 되어 걱정했더니 운 좋게 비상구였다. 이조차 없었으면 어땠을까. 안도의 한숨이 절로 나왔다.
어둠이 깔리는 광주공항에 내렸다. 마중을 나온 딸내미 차를 타고 한 시간 반을 달려 집에 왔다. 택시, 버스, 그리고 다시 택시를 타야 하는 번거로운 일이 딸 덕분에 해결되었다. 시간도 반이나 줄어들었다. 남편이 시내버스를 두 번 갈아타고 가서 5일간이나 여수공항에 세워 둔 차를 가지고 왔다.
온 가족의 도움으로 새 학기 첫날, 출근할 수 있었다. 세상에 당연한 건 없다. 우여곡절을 겪은 탓인지 벌써 36년이나 해왔던 일인데도 처음인 것처럼 신선하고 즐거웠다. 입학식도 무사히 끝났다. 졸업생이 162명인데 비해 그 절반뿐이지만 단 한 명의 입학생도 없는 학교가 전남에만 해도 32곳에 이르는 처지를 생각하면 이 또한 얼마나 고마운가.
자, 이제 시작이다!
첫댓글 제목을 쓰고 보니 최미숙 선배님과 같네요. 미리 알고 그런 건 아닙니다. 하하하.
아이고, 개학 전날 제주도에 있었군요. 얼마나 애가 탔을까. 그 마음이 그대로 전달 되네요.
그러게요. 이번에 깜짝 놀라서 당분간은 가지 않으려고 합니다. 하하하
손주 보러 갔다가 기상 때문에 혼나셨내요. 그져 예쁘죠. 그런데 양 선생님이 할머니라니
많이 어색합니다.
하하. 저도 나이를 먹었답니다.
두 딸이 갔더라면 아마도 더 먼저 할머니가 되었을지도 모르죠.
결혼도 안하고, 아이도 낳지 않는 시절이 되어버려서 손주 볼 때마다 아들한테 고마워하고 있답니다.
손주! 너무 예쁘죠? 늙어가는 나이에 신이 주신 선물. 돌아서면서 바로 또 보고싶어지는 어여쁜 손주. 해외(제주)에 있어 바람때문에 맘 고생하셨네요.
실로 조마조마했답니다.
하루종일요.
신의 선물이라는 말에는 공감합니다.
어제까지 못했던 일을 해내고, 말은 못해도 조금씩 알아듣는 눈치라서 귀엽기 짝이 없답니다.
개학날 출근하지 못하실까 봐 애태우는 모습, 가족들의 도움으로 모든 것이 잘 해결되는 과정이 눈에 선합니다. 좋은 글은 구체적이어야 한다는 교수님 말씀처럼요.
하하. 칭찬 고맙습니다.
긴 하루였지만 피곤하지 않았던 건 가족의 협조 덕분이었죠.
힘차게 새 학기 출발하시기 바랍니다.
상황을 구체적으로 묘사해서 글에 몰입하게 되네요
글쓴이와 한 호흡으로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읽었어요.
돌발상황에서 가족들의 도움이 컸군요.
양선례 교장 선생님 같은 분들은 나이들지 않고 백년 이백년쯤 교단에 계속 머물렀으면 좋겠어요.
우리나라 미래를 위해서. 제 바람입니다. 하하하
아이고, 왜 이러실까요?
텃밭 농사에, 소 키우는 일까지, 선생님이 하시는 일에 비하면 저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러면서도 글 쓰는 선생님, 진짜 대단하세요.
글쓰기 반에 선생님이 보이지 않아서 걱정을 많이 했습니다.
선생님 걱정이 아니라 글쓰기 반이요.
정말 반갑고 고맙습니다.
앞으로 이곳에 쭉 계셔 주세요. 그래야 거센 바람이 선생님을 비켜 갈 듯합니다. 하하하.
'선생님 걱정이 아니라 글쓰기 반이요.'
너무 웃겨서 소리 내서 웃었습니다.
제가 위에 쓴 대롭니다. 이가 없으면 잇몸이 다 한다고요.
오히려 그분들이 잘할 수 있는 역할을 제가 뺏는지도 모르지요.
이 방에 숨은 실력자들이 많은 것 저는 알고 있습니다.
하하, 이런 유머까지 겸비하셨군요.
하하. 정희연 선생님과 같은 생각했는데요. 이제 든든합니다.
선생님 영양보충 하셔야겠네요. 녹은 간 원상회복 하려면요. 고생하셨습니다. 손주녀석 웃는 모습 한 번 보는 것으로 이미 회복되었겠지요.
조마조마 한 마음으로 읽었습니다. 선생님댁은 용감한 가족이세요.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