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경하는 외사촌 형님
나에게는 외사촌이 5남매로 남자는 형님과 남동생이 있다. 형님의 남동생은 육군 중령으로 예편하여 유명 회사 엔지니어로 성공한 내 동생이기도 하다. 오늘 이야기는 외사촌 형님에 대해서다. 형님은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대구의 큰 한의원에 근무하며 독학으로 열심히 공부하였다. 당시 동양통신대학 한의과에 적을 두고 공부했다. 열심히 공부하던 중에 외삼촌이 노령으로 농사 경영이 어렵게 되자 농촌에 돌아와서 농사를 짓게 된 일이다. 육군에서 군 의병으로 근무한 일로 의술에도 지식이 있었다. 3년 반 동안 현역에 근무하면서 나와는 편지로 열심히 소통했다. 나는 우리 친형이 없음으로 친형처럼 따르며 자랐다. 나이로 네 살이나 많음으로 친형 같으면 상대해 주지도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외사촌 형이라도 나에게는 친형님 이상으로 잘해주었다. 편지는 내가 문학 공부를 하는 관계로 자주 썼고 편지 쓰기를 즐겼다. 뜻밖에도 형님이 답 편지를 빼지 않고 보내 주어서 아주 친구처럼 지냈다. 내가 기억하는 편지 내용 가운데는 이런 내용도 있다. 육군병원에서 환자의 종기를 치료하다가 고름이 튀어서 형님 얼굴에 묻혀버린 일까지도 알려주었다. 내가 문학청년으로 편지 쓰는 솜씨가 예사롭지 않다고 열심히 쓰라고 격려한 일이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 그래서 만기 제대할 때까지 편지 쓰기는 끊이지 않았다.
제대 후에는 형님도 공무원시험 응시에 대한 관심이 있었다. 내가 한 번 도전하여 떨어지고 제대군인에게만 응시 자격이 주어지던 때다. 시험출제 형식과 범위 등 출제 경향을 내가 아는 범위로 알려주었다. 나는 당시 공무원시험 준비로 공부하다가 한번 떨어지고 그 뒤로는 현역으로 제대한 군인만 시험 응시 자격이 주어져 포기하고 말았다. 현역 군인으로 복무한 경력이 없다는 이유다. 나는 아버지 돌아가셔서 독자로 현역 의무를 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형님도 정규 고등학교는 나오지 못했지만, 이미 독학으로 공부를 하였으므로 열심히 준비했다. 군대 경력으로 제대한 형님은 뒤늦게 도전하여 단번에 합격하고 공무원이 되었다. 그 후 두 해가 지나자 현역 미필자도 법률위반 사실이 없으면 시험응시 자격이 주어져 나도 공무원이 되었다. 공무원 공개 경쟁 채용시험에서 드디어 보란 듯 합격한 성공이다. 발령받은 곳도 형님과 같은 사무실에서 2년간 함께 근무하기도 했다.
형님도 동양통신대학을 마쳤으면 한의사 자격도 획득하고 공무원보다 더 좋은 형편을 누렸으나 그러지 못했다. 생활 형편이 허락지 않아서 공무원 직업을 선택한 일이다. 당시 공무원 사회는 새마을사업과 통일벼 재배로 눈코 뜰 새가 없도록 바빴다. 공무원이면 사무실에 앉아 편한 업무만 보는 줄 알았으나 그게 아니었다. 출근 시간도 앞당겨야 하고 퇴근 시간이 되어도 퇴근할 수 없는 상황이다. 야근은 매일 같이 반복하게 되는 근무 형편이다. 형님은 성실하기가 타의 모범으로 동료 직원들도 혀를 내 두른다. 다른 직원이 겁내는 중점사무인 쌀 증산 업무를 불평 없이 해낸다. 한 번은 형님이 예비군 장기 훈련으로 자리를 비우자 마침 상부인 도청에서 업무감사가 왔다. 박정희 대통령 지하수 개발이 한창 시절이라 양수기 점검이 가장 우선하는 감사다. 양수기 창고에 가니 수많은 양수기가 진열되고 양수기마다 "피의 대가 아껴 쓰자!"라는 빨간 글씨가 눈에 먼저 들어온다. 대일 청구권 보상 자금으로 구입된 양수기란 표시다. 만약 양수기 관리에 허점이라도 발견되면 면장은 물론 시장. 군수는 바로 직위 해제나 면직을 당하는 위기의 시절이다. 감사자가 지적하는 양수기 시동을 조작하면 첫 번에 가동이 되어야 합격이다. 만약 시동이 되지 않아 불합격이면 지휘체계로 문책이 기다린다.
사무실에 와서는 특별감사반이 면장실에서 서류를 가져오라는 대로 찾아다 바쳤다. 우리 산업계의 차석인 선배와 둘이서 내 키만큼 높이로 쌓인 서류를 찾아내며 대단한 작업량을 보고 우리는 함께 감탄했다. 이렇게 많은 서류를 만드느라 저녁마다 야근한 형님의 모습이 떠올랐다. 만일 형님 한 사람의 잘못이라도 발견하면 면장과 군수가 날벼락을 맞을 일이 생긴다. 공무원은 이렇게 성실하게 일해야 한다는 것을 나는 그때 비로소 처음 깨달았다. 그 많은 서류 편철 속에 형님의 고뇌하던 애환이 핏물처럼 뜨겁게 느껴졌다. 거기에는 상부의 전화 호통과 상사의 꾸중이 시퍼런 칼날처럼 위협의 서슬로 녹아있다. 상부의 특별감사가 주문하는 대로 찾아서 바치니 형님의 작업 고통이 뼈저리게 느껴졌다. 공무원 신입인 내가 공무원은 이렇게 열심히 정성을 쏟아야 본분을 지킨다는 사실에 그만 맥이 풀린다. 솔직히 이런 중요한 업무에 나는 자신이 없어진다. 서류 속에 파묻힌 형님 고초가 녹아서 이루어지는 공무원 업무가 비로소 감지된다.
군수님 훈시에 늘 지금은 고생이 되더라도 1980년대에는 공무원 대우를 국영기업 수준으로 높아진다는 말씀이다. 어렵고 고생이 되더라도 장래를 보고 살라는 훈시다. 날마다 라디오를 타고 날아오는 소식은 들판의 나무 그늘에 쉬던 어느 계장과 직원이 직위 해제라는 뉴스다. 면장은 경고라고 시간마다 떠드는 라디오 뉴스에 위기가 감돈다. 지금이 아니고 80년대를 기다리자면 아직도 10년의 세월이다. 박봉과 과로에 시달리는 공무원도 그런 희망은 있다고 달래는 말이다. 내가 처음 공무원 시험 응시에 실패할 때 유일하게 합격한 동료 직원은 기어이 사직서를 내고 말았다. 두뇌가 뛰어난 그 친구는 자기 담당하는 마을에 벼 종자 담그기가 늦어졌다고 직위 해제를 받아서 사표를 낸 일이다. 공무원 하는 동안에는 그 징계기록 피해가 따라다니므로 감수하고 지내기가 싫었단다. 다른 직장을 구해야 한다는 판단으로 선택한 느낌이 들었다. 공무원 신분보장이 말 한마디로 허깨비 장난처럼 믿지 못할 위기의식이 팽배한 분위기다. 1960~1970년대는 경제발전 총력 시기라서 당시 지방공무원들은 죽음 직전의 위기를 벗어나려는 모습 각오로 일했다. 10년 후의 장래 복지혜택 보장을 기다리며 목숨 바쳐 일한 사람들이다.
형님은 어느 날 이제 할 만큼 했으니 시의원이나 해 보겠다고 공무원을 사직했다. 지방에서 성실히 일한 보람으로 주민들의 신망이 두터웠다. 일가친척도 별로 없으면서 성씨도 청주 양씨로 다른 성씨에 비해 친족도 많지 않았다. 그래도 선거 결과를 보니 시의원으로 당선되었다. 영남대학교 교수였고 박사학위의 재종 동생이 열심히 도운 결과도 한몫했다. 마음씨 착한 소문과 공정하고 바른 일 처리로 이름이 나 있었기 때문이다. 형님의 성실한 태도는 내가 배워보려 애쓴 일로 늘 감동해온 일이다. 4년을 의정활동하고 다음 선거에는 투표가 필요 없는 무투표로 당선하여 두 번의 영광을 안았다. 지역 주민들이 신임하는 분위기가 확대하자 상대할 출마 대상자가 마음을 거둔 상황이 되어 퍽 다행이다. 4년 뒤에는 더 욕심을 내지 않고 친구에게 물려주듯 양보한 일이다. 보통 생각을 능가하는 배려의 마음 씀이 형님다운 모습이다. 형님의 삶을 보면 내가 반드시 배워야 할 노력을 절실히 느끼게 한다. 아무리 어려워도 표정에 드러내지 않고 묵묵히 노력하는 모습은 대인의 성격이다. 옳은 일과 그렇지 못한 일을 확연히 구분하여 매사를 거스르지 않는 성격은 높이 우러러 보이는 인격이다. 그런데 아쉬운 일은 80세도 채우지 못하고 급성 폐암으로 돌아가시니 안타깝기 그지없다. 아직도 그 정렬과 마음이 내 가슴에 음각으로 새겨주는 느낌이다. ( 글 : 박용 202106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