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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하나님 여호와♡
성경: 시편 23편 1절
찬송: 212, 214, 287, 87, 86
설교: 이 경준 목사님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시편 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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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전 이 공간을 통하여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눈 적이 있었습니다. 저는 그 고백이 수록된 시편 23편을 가장 좋아하고 즐겨 암송하기도 합니다. 같은 믿음을 가진 형제자매들도 그럴 것이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그래서 오늘은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라는 제목을 조금 바꾸어 “나의 하나님 여호와”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며 하나님의 측량할 수 없는 은혜를 느껴보는 시간을 가졌으면 합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라는 성구는 시편 23편에 기록되어있는 다윗의 시 일부분입니다. 다윗이 말하기를 하나님은 나를 키우시는 목자와 같은 분이라고 표현합니다. 그리고 자기는 연약한 양과 같은 존재라서 언제, 어디서나, 항상 하나님을 의지할 수밖에 없다고 했습니다. 그렇게 살아가면 사는 동안에 부족함이 없을 것이라는 믿음의 고백을 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그 구절을 음미하면서 단편적으로 하나님을 의지하고 살아가면 아주 평안하게 잘살게 될 것이라는 착각을 일으키기도 합니다. 그러나 다윗의 일대기가 기록되어있는 구약성경 사무엘서나 열왕기서를 읽어보면 다윗의 삶은 그렇게 평안했었던 것은 아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자기가 겪어왔던 그 수많은 어려움을 고난으로 여기지 않고, 하나님의 선하신 섭리로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지는 과정에 나타나게 되는 일의 일부분일 뿐이라고 이해했고 그럴지라도 하나님은 목자가 되시기 때문에 자기를 안전하게 인도하여 주실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일생에 부족함도 느낄 수 없을 것이라는 믿음을 굳게 가졌었던 것 같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그는 역경들 속에서도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면 결국엔 원수들의 목전에서 넘치는 상을 베풀어주실 것이라는 믿음의 고백을 하게 됩니다.
사실 다윗의 일생은 평안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겪었었던 고난들은 엄청난 것들이어서 매우 견디기가 어려웠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위기의 순간순간들을 믿음으로 이겨내고 마지막까지 승리할 수 있었기 때문에 다윗이 위대하다는 것입니다.
모든 피조물은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 섭리 속에는 여러 가지 형태의 극한 환경이 펼쳐지기도 합니다. 이를테면 평안한 날들이 있는가 하면 어떤 때는 극심한 고통의 때도 있는 것입니다.
이럴 때, 우리는 하나님의 선하신 섭리를 믿고 순응하는 편인가요? 아니면 처해있는 환경을 내 중심적으로 해석하고 판단하여 원망하는 편인가요?
우리의 신앙생활에는 먼저 생각해보고 재정립해 보아야 할 부분들이 좀 있는 것 같습니다. 남은 생애를 온전하고 안전하게 항해하고 싶다면 이 문제가 선행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은 전능하신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에서 나라는 존재는 어떤 위치에 있는 것일까? 라고 하는 것입니다.
성경 창세기 1장을 보면 하나님은 영원하신 중에 계시며 무한하신 능력으로 온 우주 만물을 창조하십니다. 혹시, 여러분 영원(永遠)을 상상해본 적이 있습니까? 시작도 없고, 끝도 없는 그 무한(無限)한 영원 말입니다. 쉽게 단편적으로 우주(宇宙)는 무한하다고 하는데 그것을 창조한 전능하신 무한의 하나님은 어떤 분일까요? 무한의 끝은 어디이고, 그리고 시작은 어디이겠습니까? 시작과 끝이 있습니까? 인간의 상상할 수 있는 능력으로는 도무지 가늠해 볼 수 없는 것 엄청난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 쉽지 않은 문제를 인간이 이해하고 품어보려고 했다가 많은 과학자가 정신병(精神病)을 얻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한마디로 판단해 볼 수 없는 것을 판단해 보려고 했던 사람들의 말로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말인데 하나님은 판단과 증명의 대상이 아니라 경배와 믿음의 대상이시며 우주의 주인이십니다. 그렇다고 허무맹랑하게 인간의 생각으로 만들어진 신이 아닙니다. 인간의 과학적인 방법으로 접근해보면 시간의 시작, 유한의 시작까지는 추론해 볼 수 있다고 합니다. 요즈음 흔히 말하는 최초의 대폭발이 있었다고 하는 빅뱅(Big Bang)의 때입니다.
창세기 1장 1절부터 4절까지를 보면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이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 빛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나님이 빛과 어두움을 나누사”라는 기록이 있고 14절에 “하나님이 이르시되 하늘의 궁창에 광명체들이 있어 낮과 밤을 나뉘게 하고 그것들로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를 이루게 하라”라고 하심으로 시간 창조가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그때부터 우리는 유한의 시간 속에 있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유한의 시간대에 계시지 않고 영원 위에 계시며 시간대에서 살아가는 피조물들을 섭리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물리학자나 천체과학자들의 주장을 빌어보면 대략 138억 만 년 전 즈음에 빅뱅이 있었다고 가설(假設)합니다. 그때부터 우주가 태어나서 계속 팽창하고 진화되어가고 있다고 하는데, 팽창이라는 말은 영어로 프라스페러티 (prosperity)라고 하는데 성경이 말하는 번성(蕃盛)이라는 말의 의미와도 같습니다. 그때부터 유한(有限)의 시간이 시작되었다고 보아야 합니다. 과학자들은 빅뱅 이전의 현상은 설명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간혹 빛과 어두움과 그리고 우주의 모든 물질이 곤죽과 같은 혼돈의 상태였을 것이며 극한의 질량을 가졌을 것이라고 말은 하면서도 모른다고 합니다.
빅뱅으로 우주가 시작되었다면 누가 빅뱅을 일으켰을까? 이 물음에는 분명한 답을 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어떤 학자들처럼 빅뱅 이론을 거부하면서 우주는 우연히 원래부터 있었을 것이라는 말도 하지만, 신학대전이라는 장대한 책을 저술한 스콜라학파의 신학자 토마스 아퀴나스는 우주가 대폭발과 팽창으로 이루어진 것이라면 대폭발을 있게 한 최초 원동자는 누구인가를 논하면서 최초 원동자는 하나님일 수밖에 없다고 결론짓습니다.
여기서 곰곰이 생각해보면 과학자들은 장황한 설명들과 함께 여러 갈래의 논리를 주장하지만, 결국에는 성경 창세기에서 단 4절로 표현된 창조론으로 귀결(歸結)된다고 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창조과학회에서도 받아들이기 시작한 창조진화론을 옹호하는 편입니다. 아직도 원시기독교에 파묻혀 천지창조의 역사를 오천 년쯤이라고 고집하는 보수 기독교인들은 지금까지 증명된 과학적 근거는 어느 정도 받아들여서 생각의 폭을 넓혀볼 여지가 있다고 생각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무한(無限)의 주인이시고 유한의 시간대를 창조하신 분이십니다. 다윗은 그 하나님을 바로 알고 믿었던 것 같습니다. 나를 중심에 두고 나를 위하여 일하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자기는 우주 중에서 먼지와 같은 피조물임을 깨달은 것입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도 창세기 18장 27절에 하나님께 여쭙기를 “아브라함이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티끌이나 재와 같사오나 감히 주께 아뢰나이다.”라는 대목이 나옵니다. 아브라함은 자기를 하나님 앞에 티끌과 같은 존재라고 고백하였던 것입니다.
성경 창세기 2장 7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태초에 빛과 어두움, 그리고 온 우주 만물을 창조하신 후에 인간을 지으시는데 인간을 흙으로 빚으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생기를 불어넣으셨다고 합니다. 흙이라는 단어를 원어로 보면 [ʽâphâr] עָפָר 라고 하는데 먼지라는 뜻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 존재의 가치가 극히 미미한 우주의 먼지라는 말입니다. 그 한 줌으로 만들어진 것이 인간입니다.
예전에 천문학자이며 신부인 니콜라스 코페르니쿠스(Nlcolaus Copernicus)나 갈릴레오 갈릴레이(Galileo Galilei,)라는 천체물리학자가 지동설(地動說)을 주장하기 전에는 사람들은 태양이 지구를 중심으로 돈다는 천동설(天動說)을 믿고 살았습니다. 모든 것을 인간 중심의 시각으로 이해하려고 했던 때가 있었던 것입니다. 엄청난 오류와 착각 속에서 살았던 것이지요.
그런데, 근래의 그리스도인들도 그런 오류와 착각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이 있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에 있어서 하나님은 인간을 위하여 존재하는 신쯤으로 착각하는 사람들입니다. 더 좁게는 하나님은 자기를 위하여 일하시고, 자기만을 위하여 싸우시며, 자기에게는 언제나 후한 복을 내리실 것이라는 착각 속에 사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일부 목회자 중에서도 성도들을 그런 착각 속에 빠지도록 유도하고 있다고도 봅니다. 이런 생각에 빠져있으면 성공적인 신앙생활을 할 수가 없습니다. 커다란 오류이기 때문입니다. 앞서 말했지만, 인간은 우주에서 먼지와 같은 존재인데도 불구하고 자가당착 (自家撞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랬음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태초 이전에 나를 아셨고, 내 이름을 기억하시며 사랑하신다고 합니다. 얼마나 어마어마하고 놀라운 일입니까? 우리의 믿음은 여기부터 시작되어야 합니다. 아브라함과 다윗이 그와 같은 믿음을 가졌었기에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과 다윗을 그렇게 사랑하신 것입니다.
다윗은 그가 겪은 엄청난 고난 속에서도 하나님께서는 항상 자기를 보호하여주시고, 때를 따라서 양식을 공급하여 주시며, 돌보아주신다는 것을 믿었습니다. 그리고 감사했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하나님 한 분만으로 충분하고 만족한 삶을 살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는 어릴 때부터 양을 치면서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광야에서 양 무리를 이끌고 풀을 뜯게 할 때도 이런 생각을 하였습니다. 내가 양 무리를 위하여 잠을 자지 않고, 지키고, 먹이듯이, 하나님께서도 나를 위하여 주무시지 않고, 한눈을 파심도 없이, 나를 지켜주시고, 보호하실 것이라는 믿음을 가졌던 것입니다. 그렇기에 그는 오늘의 본문과 같은 신앙의 고백을 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정말 그는 항상 하나님을 의지하고 높이며 살았습니다. 그의 신앙적인 고백은 시편에 수록된 수많은 그의 시로도 잘 알 수가 있습니다. 그는 평안할 때든지 어려움을 당할 때든지 항상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았습니다. 그의 변함이 없는 믿음에 감동하신 하나님은 다윗을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고까지 하셨습니다.
다윗은 자신을 지켜주시는 그 하나님이 ‘여호와’라고 고백합니다.
이 “여호와(אֱלָהּ)”라는 이름은 하나님께서 스스로 밝히신 성호입니다. 그 이름을 이스라엘 백성들은 너무도 고귀하고 높으신 하나님의 성호이기에 차마 입으로 부르지를 못했었습니다. 그래서 그분을 칭할 때는 “아도나이(אֲדֹנָי)”라고 불렀었는데 그 뜻은 나의 주님이라는 뜻이었습니다.
우주와 천지를 창조하신 그분이 실존하시는 하나님 ‘여호와’이십니다. 만일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전능한 하나님이 아니고 영원하신 분이 아니라면 우리가 그를 믿어야 할 이유가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온 우주의 역사를 주관하시고 또 인생들의 생사화복을 주장하시는 절대 전능자이기에 우리가 하나님을 온전히 믿고 따르는 것입니다.
이토록 신실하신 분이 “나의 하나님 여호와”이십니다. 이 세상에는 잡다한 종교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그것들은 모두 사람이 만든 우상일뿐입니다. 번지르르한 겉 포장으로 사람들을 현혹하여서 이용하려고 하는 것뿐입니다. 자기 욕심을 채우기 위한 수단으로 말입니다. 이들은 인간의 생명을 책임을 질 수 없는 것들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는 그의 아들을 우리의 죄의 값으로 내어주셔서 죽게 하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고 계십니다.
시편 34편 8~10절에 이르기를 “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 그에게 피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너희 성도들아 여호와를 경외하라 그를 경외하는 자에게는 부족함이 없도다. 젊은 사자는 궁핍하여 주릴지라도 여호와를 찾는 자는 모든 좋은 것에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우리의 하나님, 곧 나의 하나님을 경배하며 믿고 살기를 바랍니다. 그리하면 하나님께서는 성경에 기록된 대로 우리의 목자가 되어 주실 것입니다. 두려워하지 마십시다. 우리의 생명은 하나님께 있습니다. 하나님은 생사화복(生死禍福)을 주관하시는 분은 전능하신 분이시며 우리의 목자이십니다. 그분께서는 우리를 푸른초장과 잔잔한 물가로 인도하여 주실 것입니다.
-아멘-
사랑과 은혜가 많으신 하나님 아버지!
오늘 본문 말씀에서 다윗은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시편 23:1)라고 고백하며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우주의 먼지의 한 티끌과도 같은 존재인 우리를 사랑하시어 너는 내 것이라 지명하여 불러주시고 이 험난한 세상을 살아갈 때 때론 숨조차 쉴 수 없는 상황 가운데서 기도조차 할 수 없어 눈물만 흘릴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도 우리와 함께하시고 지친 우리를 안아주시고 위로해주시는 하나님 아버지를 찬양합니다.
우리가 어둠 가운데 앉아 홀로 외롭고 힘들 때도 주님은 우리와 함께 해주셨고 우리가 기뻐하며 즐거워하며 행복해할 때도 주님은 우리와 함께 해주셨습니다.
우리가 고난 가운데 어찌할 바를 알지 못하여 두려움에 떨며 죽음을 생각할 때에도 주님은 우리와 함께 해주셨음에 감사드립니다. 행복은 많이 가지는 것이 아니라 지금 우리에게 주신 것에 감사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날마다 우리에게 허락하신 것에 감사하며 하나님만을 찬양하오니 영원토록 우리와 함께하시고 축복하소서!
감사드리며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 올렸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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