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쉬와 이샤(너는 나)
2024. 5. 19(주일낮예배) 창 2:18-24
플라톤의 향연이라는 책이 있다. 플라톤의 연애론이라고 해도 될 만큼 플라톤의 남녀간의 사랑을 담은 이 책은 기원전 416년 아테네의 비극 작가인 아가톤이 비극 콘테스트에서 우승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아가톤의 우승으로 그의 집에서 축하연이 벌어졌는데, 파이드로스, 아리스토페네스, 소크라테스, 알키비아데스 등 8명의 철학자가 에로스(사랑)에 대한 말을 한다. 그때 아리스토파네스는 사랑의 기원을 설명하기 위하여 한 신화를 이야기한다. 원래 사람은 4개의 팔과 4개의 다리를 가지고 있었고 얼굴 앞뒤에 눈이 있어서 모든 것을 볼 수 있었다. 이러한 인간은 완벽하여서 불가능한 것이 없었어서 점점 교만해 진다. 이렇게 교만해진 인간은 신들을 위한 제사를 게을리하기 시작하였다. 그때 인간의 교만을 두고 분노한 제우스가 인간을 반으로 쪼개어서 반쪽 짜리가 되게 하였다. 그 결과 사람은 두 개의 팔과 두 개의 다리를 가지고 앞만 보는 존재가 되었다. 이렇게 둘로 갈라진 인간이 자기의 반쪽을 찾는 단계를 애로스(사랑)이라고 하였다. 결국 아리스토파네스는 사랑은 자기의 반쪽을 찾는 것이고, 사람이 완전하게 되는 것이 사랑이다고 하였다.
여러분은 아리스토파네스가 말하는 여러분의 반쪽을 잘 찾아서 완전하여 졌는가? 창세기 2장을 보면 아담이 살았던 에덴동산이 얼마나 아름다웠는지를 잘 기록하고 있다. 에덴동산에는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있었고, 또 비손과 기혼과 힛데겔과 유브라데 라고 하는 큰 강이 흘러 땅은 비옥하고 온 세상은 아름다웠다. 그렇게 아름답고 비옥한 에덴동산에서 아담을 경작하며 만물이 자라는 것을 보고 기뻐할 수 있었다. 우리가 보기에 에덴동산에서 사는 아담에게는 부족함이 전혀 없는 상태에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에덴동산에 있는 아담을 보면서 한가지 부족한 것을 발견하신다.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 보시기에 좋지 못하다고 말씀하고 있다.
하나님 보시기에 좋지 못한 것이 무엇인가? 창세기 2장 18절을 읽기 바란다.
(창 2:18)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
모든 것이 다 갖추어진 최고의 상태에 아담은 있었다. 그리고 아담은 그곳에서 기쁨과 만족을 가질 수 있는 자신만의 일도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담은 혼자였기 때문에 하나님 보시기에 좋지 못하였다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담을 위하여 돕는 배필을 주시기로 계획하신다.
여기서 돕는 배필(에제르)이란 어떤 역할을 하는 사람이겠는가? 우리는 돕는 배필을 보조자(ASSIST)정도로 생각한다. 남편이 텔레비전을 볼 때 리모컨 하면 가져다 주고, 밥을 먹다가 물 하면 아이구 내가 깜빡했네 하면서 숭늉 떠오는 역할이 에제르가 아니다. 에제르는 이보다 훨씬 더 대단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에제르가 가진 의미를 알고 싶으면 시편 33편을 생각해 보기 바란다. 시편 33편은 하나님을 찬양해야 하는 이유가 나오는데, 시편 33편 20절에서 그는 우리의 도움과 방패시로다 라고 기록한다. 시편기자는 하나님이 우리를 도우시기 때문에 하나님을 찬양해야 한다고 하였는데, 여기서 하나님의 도움을 에제르로 기록하고 있다.
이러한 모습은 사무엘상 7장에도 나온다. 사무엘상 7장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이 미스바에 모였다는 소식을 듣고 블레셋이 공격하여 왔다. 그때 하나님은 블레셋에 우레를 발하여서 그들을 흩어버리셨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후 센과 미스바 사이에 돌을 세웠는데, 그 돌의 이름이 여호와께서 여기까지 우리를 도우셨다는 뜻의 에벤에셀이라 하였다. 여기서 에셀이 에세르와 같은 단어이다. 에세르는 단순히 물 떠다 주는 정도가 아니라, 하나님의 도움을 에세르라고 하는 것이다.
무슨 말인가? 하나님은 최고의 사람을 나에게 돕는 배필로 주었다는 것이다.
지금 여러분 옆에 그 에세르가 있는가? 아마 우리 중에 어떤 분은 하나님이 최고의 사람을 주었다고 하는데, 내 옆에 있는 사람은 왜이럴까? 하고 질문하는 분이 있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 옆에 있는 사람이 에세르가 되지 못하는 것은 제 아내 말에 의하면 사용자 부주의 때문이다. 제 아내는 결혼하기 전에는 착하고, 온순하고, 상냥하였는데, 사용자 부주의로 고집부르고, 버럭하는 사람이 되었다고 모든 책임을 저에게 돌릴 때가 가끔 있다.
여러분은 돕는 배필을 잘 사용하고 있는가? 하나님은 어떻게 돕는 배필을 만들었는지 한번 보시기 바란다. 하나님은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신 후에 갈비뼈를 취하여 돕는 배필을 만들었다. 그런데 주석가 메튜헨리는 왜 하나님이 갈비뼈로 돕는 배필을 만들었을까? 하는 질문에 이렇게 답한다.
그 여자는 아담의 옆구리에서 나온 갈비뼈로 만들어졌다. 그의 머리에서 나와서 그를 다스리게 한 것이 아니라, 그의 발에서 그에게 짓밟히게 한 것이 아니라, 그의 옆구리에서 나와 그와 동등해지게 하고, 그의 팔 아래서 보호를 받고, 그의 마음 가까이에서 사랑을 받게 하였다.
메튜헨리는 하나님이 여자를 갈비뼈로 만들었던 이유는 아담의 머리 위에서 군림하지 않고, 또 발 아래에서 짓밟히지 않는 동등됨을 위함이었다고 한다. 그와 동시에 메튜헨리는 하나님이 갈비뼈를 취하여 여자를 만든 이유는 팔아래에서 남자의 보호를 받고, 사랑을 받도록 하기 위함이었다고 한다. 쉽게 설명하면 에덴동산에서 하와가 가장 행복할 수 있었던 것은 에덴동산에 먹을 것이 많이 있고, 또 온갖 진귀한 보석이 많았기 때문이 아니라, 남편 아담의 보호를 받을 때가 가장 행복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것이 돕는 배필 사용법이다. 돕는 배필은 머리에 올려도 안되고, 발에 두어서 짓밟아도 되지 않는다. 돕는 배필은 항상 가슴에 품고 있어야 하는 것이다. 저는 그래서 주남이 결혼할 때 주례사를 통하여 하나님이 갈비뼈로 여자를 만드신 것은 갈비뼈는 사람에게 가장 소중한 심장을 보호하기 때문이다고 말하였다. 그래서 갈비뼈가 심장을 보호하는 것처럼 이제 주남이는 소영이를, 소영이는 주남이를 가장 소중하게 여기며 서로 지키고 보호하는 사랑을 하라고 하였다.
여러분은 이러한 사랑을 하고 있는가? 신랑 권지웅 군의 어머니 박순영 여사의 주례사는 구독자가 46만회나 된다. 먼저 그 주례사를 들어보기 바란다. <주례사>
박순영 여사는 아들에게 행복하게 살아가려면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좋다, 옳다, 맞다고 생각하는 것들은 수나 앞에서 빡빡 우기지 마라고 하였다. 남편으로 살아가는데는 유연한 지혜가 필요하다. 그래서 응 그래, 응 알았어 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고 가르친다. 그리고 한 눈으로 보던 사랑이 이제 두 눈으로 보여지는 그 때에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이 사람이 맞아! 라고 생각이 들 때 처음 사랑을 기억하여서 아름다운 사랑을 나누라고 권면한다. 정말 멋있는 주례사이다.
그런데 왜 결혼하면 내가 좋다, 옳다, 맞다고 하는 것을 다 포기해야 하는가? 창세기 3장 16절은 깨어진 부부관계를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창 3:16) 또 여자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게 임신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 너는 남편을 원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 하시고
범죄한 아담과 하와는 이제 더 이상 돕는 배필을 가장 소중하고 지켜야 하는 존재로 여기지 않는다. 범죄한 아담과 하와는 이제 서로를 원하고, 또 다스리려 하는 것이다. 돕는 배필이었던 하와는 이제 남편을 지배하려 하고, 그러한 하와에게 아담은 지배자가 되려 하는 것이다. 그래서 아담과 하와는 배우자가 서로 자기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고 미워하고, 원망하고 살아가게 된 것이다.
혹시 이것이 지금 여러분의 모습이 아닌가? 아담이 하나님이 주신 돕는 배필을 처음 보았을 때 한 고백을 이 시간 함께 읽기 바란다.
(창 2:23) 아담이 이르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부르리라 하니라
아담은 돕는 배필을 보면서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고 나에게 가장 소중한 존재라고 고백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지금 변질된 부부가 되어져 있다면 서로를 향하여 가장 소중한 존재로 보고, 또 고백하는 모습이 회복되어져야 할 것이다.
그리고 창 2장 23절에서 우리가 눈여겨 보고 싶은 것은 아담이 돕는 배필의 이름을 지어주고 있다는 것이다. 여러분도 잘 아시는 것처럼 하나님은 아담이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여 돕는 배필을 주시겠다고 계획하신다. 그리고 하나님은 아담에게 각종 짐승과 새의 이름을 짓도록 하였다. 그렇게 아담이 모든 짐승들의 이름을 다 지은 후에 아담의 갈비뼈를 취하여 돕는 배필을 만들어 주었는데, 그때 아담은 그 돕는 배필의 이름을 지어준 것이다.
아담은 돕는 배필의 이름을 무엇이라 지었는가? 23절을 보면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 즉 여자라 부르리라 고 기록한다. 여기서 여자를 히브리어로 보면 이샤이다. 참고로 말씀드리면 남자는 히브리어로 이쉬(אישׁ)이고, 여자는 히브리어로 이샤(אשׁה)이다. 이쉬와 이샤는 같은 어근을 가지고 있고, 단지 이샤에는 여성 접미어 헤(ׁה)를 붙여 놓은 것이다.
이것이 아담이 붙여준 돕는 배필의 이름이다. 아담은 하나님이 만들어 주신 돕는 배필을 보면 어~ 여자인데 나네 하고 말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아담은 돕는 배필이 나이기 때문에 비방할 수 없고, 또 내가 너이기 때문에 자랑할 수도 없는 것이다. 그래서 너의 모든 수고가 나의 수고가 되고, 나의 모든 기쁨이 너의 기쁨이 되어서 둘이 한 몸을 이루어 가는 것이 결혼이다. 결혼은 아들을 낳기 위함도 아니고, 사랑하기 때문에 하는 것도 아니며, 또 자기 편리를 위하여 하는 것은 더욱 아니다. 결혼은 어 나네 라고 하는 사람을 만나 연합하여 한 몸을 이루는 것이다.
그런데 둘이 연합하여 한 몸을 이루는 것이 쉬운가? 고린도전서 13장은 사랑을 말하고 있다. 그런데 그 고린도전서 13장에서 사랑을 제일 먼저 정의한 내용이 무엇인지 아는가? 사랑은 달콤한 것이다. 사랑은 아름다운 것이다가 아니라, 사랑은 오래 참고(고전 13:4)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 부분을 어떤 영어성경은 사랑은 고난이다 라고 번역하기도 한다.
그런데 우리는 결혼을 통하여 이 사랑을 배우는 것이다. 그래서 이 사랑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 이 사랑으로 교회를 사랑하며,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우리는 하나님의 온전한 성도로 세워져 가는 것이다.
이것이 결혼의 목적이 아니겠는가? 하나님은 아담에게 돕는 배필을 주어서 둘이 연합하여 한 몸을 이루라고 하였다. 그런데 범죄하여 서로를 다스리고 지배하려는 그 부부에게 하나님은 여전히 둘이 연합하여 한 몸을 이루라고 말씀하신다. 왜냐하면 그래야 사랑을 배울 수 있고, 또 그 사랑을 실천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하나님은 부부간에 배운 그 사랑을 이제 하나님과 교회와 이웃에게도 행하라는 것이다.
그러면 저와 여러분은 결혼의 목적에 맞는 삶을 살고 있는가? 지금 배우자를 생각해 보기 바란다. 그리고 저를 따라 해 보시기 바란다. 어 나네~~
그래서 이제 비방하지 말고 용서하시고, 그래서 지배하려 하지 마시고, 그래서 섬기는 부부가 되기를 바란다. 그리고 더 나아가 이런 과정을 통하여 사랑을 배워서 참된 성도답게 사는 복된 저와 여러분이 될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