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편의 시로 황후가 되고 황제가 된 여인
남 진 원
683년 당고종이 낙양에서 죽자, 측천은 낙양동도에서 67세의 나이로 왕으로 즉위한다. 고종은 고질병이 있었고 성격이 유약하고 우유부단하였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고종은 측천이 자신을 보필하여 일을 잘 처리하므로 측천에게 정치를 맡기다시피 하여 당나라 최고의 평화시대를 구가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무측천은 14세에 당태종의 재인이 되고 26세에 당태종이 죽자 쫓겨나 비구니가 되어 절에서 머문다.
비구니가 되어 슬픔을 위로하고 다시 이치 황제의 눈에 들기 위해 시를 지어 노래를 불렀다.
붉은 색이 푸르게 보이도록
초췌해진 것은 임 때문이오
항상 눈물 흘림을 못 믿겠거든
눈물 흘린 석류치마 보여드리오리다.
이 시가 이치의 귀에 들어가자 이치는 무측천을 잊지 못하고 그를 궁으로 다시 불러 32세에 왕후가 된다.
시 한 편의 힘이 실로 사람의 마음을 움직여 일약 왕후로, 중국 최초의 황제로 군림할 수 있었던 것이다.
무측천은 32세에 당고종의 황후가 되고 60세에 대권을 쥔다. 그리고 67세에 제위에 오른다.
그 후 낙양에서 지냈다.
서기 701년 장안으로 돌아온다. 그때의 나이 70세.
장안은 거대한 왕궁을 지었는데 대명궁이다. 이 궁궐은 전대미문의 궁궐로 화려하면서도 웅장한 기백이 넘쳐흐르고 다채롭다.
무측천의 시대에는 여성의 사회적인 지위도 높았다. 개방적이고 여성의 복식은 화려하였으며 내의도 입지 않았다고 하였다. 거리에는 고위대관들과 미인들이 구름처럼 넘쳐났다.
무측천은 82세에 세상을 떠난다. 그는 세상을 떠나면서 자신의 무덤을 별도로 만들지 말고 건릉에 매장해 달라고 한다.. 그리고 죽은 후부터는 이름을 황후라고 부르게 하였다.
(唐)나라 측천무후(則天武后)가 아들 넷이 있었는데, 태자(太子) 홍(弘)이 너무 총명하였다. 총명한 것이 화가 되어 짐살(酖殺)하고 둘째 아들 현(賢)을 태자로 책봉하였다. 그러나 둘째 아들 현(賢)은 자신에게도 화가 미칠까 두려워하는 마음에서 황대과사(黃臺苽辭)를 지었다. 그 내용에는 “황대 아래 오이를 심었더니, 오이 익어 주렁주렁 하구나. 하나를 따자 남은 오이 보기 좋더니, 두 개를 따자 오이가 듬성해진다. 세 개를 딸 때만도 괜찮았는데, 네 개를 따니 빈 넝쿨뿐이구나.” 라고 노래하였다.
( 송시열의 [송자대전] 참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