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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의 부흥운동3 (부흥운동의 전개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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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절 백제 부흥운동의 전개
출처: 충남도역사문화연구원의 '백제문화사대계 연구총서 6권' 중 발췌
661년 초에 백제부흥군은 복신과 도침을 중심으로 재차 사비성의 공격에 나섰으며, 이에 당은 부임직후에 병사한 왕문도를 대신하여 유인궤를 파견하여 신라군과 같이 이를 구원토록 하였다. 이때 백제부흥군은 본진을 임존성에서 주류성으로 옮기게 되었다. 백제부흥군이 본진을 임존성에서 주류성으로 옮기게 된 것은 주류성이 금강과 가까운 거리에 위치하고 있어 금강을 통하여 사비 및 웅진으로 유입되는 당의 원군을 적극적으로 차단하려는 의지가 담겨있으며, 또한 수로를 이용하여 왜 및 고구려와의 통교를 더욱 긴밀하게 전개하기 위함이었다.그리고 곧바로 사비성을 포위하고 공격하게 되었다.
? 1. 웅진강구 전투
백제부흥군으로서는 사비부성에 주둔하고 있는 나당진수군을 물리치는 것이 백제를 다시 일으키는 것이 되기 때문에 이를 함락시키는 것이 가장 급선무라고도 하겠다. 임존성에서의 승리 여세로 나당군의 수뇌부가 있는
이 사비성을 공격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기도 하다. 나당연합군 측에서도 사비성의 함락은 백제를 다시 포기하는 것이기에 용인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당은 다시 유인궤를 파견하게 되었고, 백제부흥군으로서는 사비성을 고립시키기 위해서 결사적으로 이를 저지하여야 할 입장이었다. 이와 관련되는 기사는 다음과 같다.
E-① 왕문도가 바다를 건너 죽으니 유인궤로서 그를 대신하게 하였다. 무왕의 조카 복신이 일찍이 군사를 거느리고 있었는데 이 때에 승려 도침과 함께 주류성에 의거하여 반기를 들었으며 옛 왕의 아들로 일찍이 왜국에 질자로 가 있던 부여풍을 맞아 세워서 왕으로 삼으니 서북부가 모두 호응함에 군사를 이끌어 도성의 유인원을 포위하였다. (당에서) 조칙을 내려 유인궤를 검교대방주자사로 기용하여 왕문도의 군사를 거느리고, 지름길로 신라군을 출동시켜 유인원을 구원하게 하니 유인궤가 기뻐서 말하기를 “하늘이 장차 이 늙은 나를 부하고 귀하게 하려는 것이다.”하고 당나라 책력과 묘휘를 청하여 가지고 떠나면서 말하기를 “내가 동쪽 오랑캐를 평정한 다음 대당의 정삭을 해외에 반포하려한다.”하였다. 인궤가 군사를 엄숙하게 정돈하고 계속해서 싸우면서 전진하니, 복신 등이 웅진강 어귀에 두개의 목책을 세우고 그들을 막았다. 인궤가 신라군과 함께 군사를 합군하여 그들을 공격하니 아군이 후퇴하여 달아나 목책으로 들어오는데 물이 막히고 다리가 좁아서 떨어져 익사한 자
와 전사한 자가 1만 여명이었다. 복신 등이 바로 도성의 포위를 풀고 임존성으로 물러나 지켰다. 신라군사들이 군량이 떨어져서 군사를 이끌고 돌아가니, 이때는 당나라 용삭 원년3월이었다.( 삼국사기 권28 백제본기 의자왕 20년)
E-② 문도는 바다를 건너가 병으로 죽었다. 백제의 가짜 승려 도침과 옛 장수 복신이 무리를 이끌고 다시 반란을 일으켜 옛 왕자 부여풍을 세워 왕으로 삼고 군병을 이끌어 부성의 인원을 포위하였다. 조칙으로 인궤를 검교대방주자사로 하여 문도를 대신하여 무리를 통솔케 하고, 지름길로 신라군을 출동시켜 합세하여 인원을 구하고 계속 싸우며 앞으로 나아갔다. 인궤군의 군용이 정돈되고 엄숙하여 가는 곳마다 모두 함락시켰다. 도침 등이 곧 인원의 포위를 풀고 임존성으로 물러나 지켰다.(구당서 열전 유인궤)
E-③ 문도가 죽으니, 백제의 옛 장수 복신과 승려 도침이 옛 왕자 부여풍을 맞이하여 그를 왕으로 삼고 군병을 이끌어 인원을 포위하였다. 조칙으로 인궤를 검교대방주자사로 삼아 문도의 무리를 통솔케 하고, 아울러 신라군을 출동시켜 구원토록 하였다. 인궤는 군병을 거느림에 엄격하게 정돈하고 계속 싸워 (적)진을 함락시키니 가는 곳마다 막힘이 없었다. 복신 등이 인원의 포위를 풀고 임존성으로 물러나 지켰다.(신당서 열전 유인궤)
E-④
㉠ 문도가 바다를 건너가서 죽었다. 백제의 승려 도침과 옛 장수 복신이 무리를 거느리고 주류성에 의거하여 반란을 일으키고 왜국에 사신을 보내어 옛 왕자 부여풍을 맞아 왕으로 세웠다. 백제의 서부와 북부가 모두 뜻을 바꾸어 성에서 그들에게 호응하였다. 이때에 낭장 유인원은 백제부성의 군진에 머물러 있었는데, 도침 등이 군사를 이끌고 그를 포위하였다. 대방주자사 유인궤가 문도를 대신하여 무리를 거느리고, 지름길로 신라군을 출동시켜 합군하여 인원을 구하고 계속해서 싸우며 전진하니 가는 곳마다 모두 항복하였다.
㉡ 도침 등이 웅진강 어귀에 두 개의 목책을 세워 관군에 저항하자, 인궤는 신라군과 함께 사방에서 그들을 협공하였다. 적의 무리들이 후퇴하여 달아나 목책 안으로 들어가는데 물에 막히고 다리는 좁아 물에 빠지거나 전사한 사람이 1만여명이나 되었다. 도침 등은 바로 인원의 포위를 풀고 임존성으로 물러나 지켰다. 신라군은 군량이 다하여 군사를 이끌고 돌아갔다. 이때는 용삭 원년 3월이었다. (구당서 열전 동이백제)
E-⑤ 장(무왕)의 조카 복신은 일찍이 군병을 거느리고 있었는데, 이 때에 중 도침과 함께 주류성을 거점으로 하여 반란을 일으키고, 왜에서 옛 왕자 부여풍을 맞이하여 왕으로 삼으니 (웅진강) 서부가 다 호응하여 군사를 이끌고 인원을 포위하였다. 용삭 원년에 인궤가 신라군을 출동시켜 가서 구원토록 하니 도침은 웅진강에 두 개의 벽을 세웠다. 인궤가 신라군과 함께 협공하니 (백제부흥군이) 달아나 벽안으로 들어가는데 앞을 다투다 다리에서떨어져 빠져 죽은 사람이 1만명이었다. 신라군은 돌아갔다.(신당서 열전 동이백제)
E-⑥
ⓐ 또 좌위중랑장 왕문도를 웅진도독으로 삼아 그 나머지 무리들을 위무토록 하였다. 문도가 바다를 건너가서 죽었다.
ⓑ 백제의 중 도침과 옛 장수 복신이 무리를 모아 주류성에 웅거하며 왜국에서 옛 왕자 풍을 맞이하여 그를 왕으로 세우고 군사를 이끌어 부성의 인원을 포위하였다. 조서를 내려 유인궤를 검교대방주자사로 기용하여 왕문도의 군사를 거느리고 지름길로 신라군을 진격시켜 유인원을 구원토록 하였다.
ⓒ 백제가 웅진강 어귀에 두 개의 목책을 세우니 인궤가 신라군과 합하여 공격하여 그들을 깨뜨리니 살해되거나 물에 빠져 죽은 자가 만여 명이었다. 도침이 바로 부성의 포위를 풀고 임존성으로 물러나 지켰다. 신라군은 양식이 다하여 군사를 이끌고 돌아갔다.
ⓓ 침은 스스로 영군장군으로 칭하고 복신은 스스로 상잠장군으로 칭하며 여러 무리들을 불러 모으매 그 세력이 더욱 확대되었다.
ⓔ 인궤는 무리가 적으므로 인원과 더불어 합군하고 군사들을 휴식시키며 황제에게 표문을 올려 신라군을 출병토록 하였다. 신라왕 춘추가 조칙을 받고 그의 장수 김흠을 보내어 군사들을 거느리고 인궤 등을 구원하려고 고사에 이르렀으나, 복신이 급하게 공격하여 그들을 패배시켰다. 김흠이 갈령도로 도망하여 돌아가니 신라는 감히 다시는 나오지 못하였다. (자치통감 당기 고종 용삭 원년 3월)
상기 기록 중 가장 원형에 가까운 것은『구당서』(E-② ④)이다.『 자치통감』(E-⑥)은 압축하여 기술하고 있으며, 『삼국사기』백제본기(E-①)는『구당서』의 기사내용을 채록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상의 기록을 살펴보면, 661년에 백제부흥군이 유인원 등 나당군이 주둔하고 있는 사비성을 포위하고 공격하고, 웅진도독으로 부임하던 왕문도가 바다를 건너자마자 사망했다. 이에 따라 당은 유인궤를 출병시키면서 신라에 원군을 요청하여 지름길로 신속하게 구원토록 하고 있다.
왕문도의 사망기사에 대해서는『삼국사기』백제본기와『구당서』및『자치통감』에는 바다를 건너자마자 사망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으나, 이는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당 고종에 의하여 웅진도독으로 파견된 좌위중랑장 왕문도는 660년 9월 28일에 삼년산성에서 태종무열왕에게 조서를 전한 후 갑자기 사망한 것으로『삼국사기』신라본기에 비교적 상세하게 기술되어 있다.
왕문도의 후임으로 부임하게 된 유인궤는, 백제 토벌 시에 청주자사로 출병하게 되어 바다 건너 군량을 운반하는 책임을 맡았으나 시일을 어겨 義府로부터 독촉을 받았고, 또한 풍랑을 만나 선박을 잃고 많은 익사자를 내는 바람에 백의종군을 하던 중이었다.(自治通鑑 唐紀 高宗中之上) 웅진도독으로 부임한 왕문도가 삼년산성에서 급사하게 되고, 사비성의 군진에 머무르고 있는 당군이 위기에 처하게 되자, 유인궤를 임시직인 검교대방주자사로 삼아 구원케 하였던 것이다. 이때 유인궤는 기뻐서 “하늘이 장차 이 늙은 나를 富하고 貴하게 하려는 것이다.”하고 말하고, 당나라 책력과 묘휘를 청하여 가지고 떠나면서 “내가 동쪽 오랑캐를 평정한 다음 대당의 정삭을 해외에 반포하려한다.”고 다짐 한 것으로 보아 이번 출동을 명예회복의 기회로 삼으려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유인궤의 도착 시점은 확실하지 않다. 다만 유인궤군과 신라군의 구원으로 도침 등이 사비성에 대한 포위를 풀고 임존성으로 물러선 것이 661년 3월이라는 것이니, 이 때에는 유인궤가 이미 도착하여 있는 상태라는 것을 알 수 있을 뿐이다. 그런데 유인궤가 “지름길로 신라군을 출동시켰다.”는 신라군이 출병하고있는 것이 661년 2월인 것을 보면 유인궤는 늦어도 661년 2월중에는 도착하여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백제부흥군은 유인궤가 이끄는 당나라 원군의 진입을 막기 위하여 금강어귀에 2개의 목책을 세우고 방어하였으나 패하여 1만명의 전사자를 내고 임존성으로 후퇴하고 있다. 백제부흥군이 비록 유인궤의 진입을 저지하는데 실패하고 있지만, 전사자가 1만명에 달하였다는 것은 복신과 도침을 중심으로 많은 백제유민들이 결집해 있었던 것을 파악할 수 있다.
이 웅진강구 전투가 유인궤와 직접적인 관련이 있는 사건이기 때문에 『신·구당서』의 유인궤전을 모두 살펴보았지만 전황에 대해서는 상세하게 언급되어 있지 않고, 모든 공을 유인궤의 것으로 돌리고 있다. 이에 대해서는『구당서』백제전의 기록에서도 같은 양상을 보여주고 있다.
그런데 이 『구당서』백제전(E-④)은 웅진강구 전투에 대한 문장내용이 두 단락으로 이루어 졌음을 볼 수 있는데, ㉠에서 백제부흥군을 물리치고 사비성의 유인원을 구한 다음에 ㉡에서 거꾸로 웅진강구에서 백제부흥군을 물리치고 진입하는 장면이 수록되어 있는 것이다.
또 하나의 의문은 신라군이 이 웅진강구전투에 참여하고 있음에도 신라본기에는 이 사건에 대한 기록이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어쩌면 ㉠이 중국 측 기록내용이라면 ㉡은 신라 측 기록내용으로, 어떤 경로에 의해서인지 중국 측 기록 후면에 신라 측 기록이 수록된 것이 아닐까 한다.
이 것을 수정한 것이『신당서』백제전이다. 『신당서』백제전(E-③)은『구당서』에서 유인궤의 출현시기를 애매하게 표현하고 있는데 대하여, 용삭원년 이후에 등장시켜 매끄럽게 정리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백제부흥군을 이끈 지휘자에 대해서는『구당서』백제조에는 웅진강구에 목책을 세우고 유인궤군의 원군을 저지한 백제부흥군을 도침이 지휘한 것으로 수록하고 있으며, 『신당서』와『자치통감』도 이를 따르고 있다. 그러나『구당서』의 내용을 거의 그대로 채용하고 있는 백제본기에는 그 주체를 복신으로 기록하고 있다. 이와 같이 유인궤의 원군과 맞서 싸운 백제부흥군의 지휘자를 달리하여 기록하고 있는 것은『삼국사기』찬자의 의도가 개입된 것으로 보인다. 즉 김부식이『삼국사기』를 편찬하면서 유가적인 역사관에 근거하였기 때문에 승려인 도침을 의도적으로 제외시키고 왕족이며 당에 사신으로 다녀온 바 있는 복신의 활약으로 나타내려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후술할 주류성전투에서 복신이 주도적으로 활약하고 있고, 이 전투이후 남방의 여러 성이 복신에게 귀속하게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대체로 복신은 금강입구에서 유인궤군의 진입을 저지하고 도침은 사비성을 포위 공격하여 유인궤군과 사비부성의 진수군이 합세하는 것을 막으려고 하였던 것으로 파악된다. 그 후 복신은 웅진강에서의 유인궤군 저지에 실패한 후 가까운 거리에 위치하고 있는 주류성으로 들어가 지키고, 도침은 후퇴하여 임존성을 지키게 되었다.
2. 두량윤성 및 주류성 전투
『구당서』백제전과 『삼국사기』백제본기에는 웅진강구 전투에서 승패가 갈리고, 백제부흥군이 사비성의 포위를 풀고 임존성으로 물러간 것이 661년 3월로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삼국사기』신라본기에는 이와 같은 시기인 661년 3월에서 4월에 걸쳐 두량윤성(청양 정산면 계봉산성 비정)을 공격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더욱이 유인궤의 웅진강구 진입을 돕기 위하여 당군과 함께 싸운 신라군의 행적에 대해서는 기록이 누락된 것은 아닐텐데 전혀 언급하지 않고 있는데 반하여 두량윤성 전투에 대해서는 매우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 봄 2월에 백제의 남은 적들이 와서 사비성을 공격하였다. 왕이 이찬 품일을 대당장군으로 삼고 잡찬 문왕과 대아찬 양도와 아찬 충상 등으로 보좌하게 하고, 잡찬 문충을 상주장군으로 삼고 아찬 진왕으로 보좌하게 하였으며, 아찬 의복을 하주장군으로 삼고 무홀·욱천 등을 남천대감으로 삼았으며 문품을 서당장군으로 삼고 의광을 낭당장군으로 삼아 사비성으로 가서 구원하도록 명하였다.
㉡ 3월 5일 중로에 이르러 품일이 휘하 군대를 나누어 먼저 두량윤( ‘이’라고도 한다.)성 남쪽으로 가서 군영터를 선택하도록 하였다. 백제 사람들이 진영이 정돈되지 않은 것을 바라보고 갑자기 출동하여 불의에 급히 공격하였으므로 아군이 놀라서 흩어지다 패하여 달아났다.
㉢ 12일에 대군이 와서 古沙?城(고사비성)밖에 주둔하고 나아가 두량윤성을 공격한 지 한달 엿새가 되었으나 이기지 못하였다.
㉣ 여름 4월 19일에 군사를 이끌고 돌아오는데 대당서당이 앞에서 가고 하주군이 후군이 되어 뒤에서 오는데 빈골양에 이르러 백제군과 만나 서로 싸웠으나 패하여 퇴각하였다. 전사자는 비록 적었으나 병기와 군수품을 잃은 것이 매우 많았다. 상주낭당은 각산에서 적을 만났으나 나아가 공격하여 그들을 이기고 드디어 백제군이 주둔하는 보루에 들어가 2천명을 사로잡아 목을 베었다.
㉤ 왕이 군사가 패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크게 놀라 장군 김순·진흠·천존·죽지를 보내어 백제 군사로부터 구원토록 하였다. 가시혜진에 이르러 적군이 퇴각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가소천에 이르러 이내 돌아왔다. 왕이 여러 장수들의 패전한 전적을 논하여 벌을 내리되 차등이 있었다. (삼국사기 권5 신라본기 태종무열왕 8년)
661년 2월에 백제부흥군이 사비성을 공격하자 신라에서는 품일 등 11장군을 출동시키고 있다. 이때 신라군은 사비성의 나당진수군을 구원하기 위하여 출동하였으나, 상기 사서(신구당서)들의 내용과는 달리『신라본기』에는 유인궤가 지휘하는 당군과 함께 웅진강구에서 백제부흥군을 물리치는 전투기사는 실려있지 않고 두량윤성을 공격하는 기사만 수록하고 있다.
사비성에 고립된 나당진수군을 구원하기 위하여 출동한 신라군이 두량윤성을 공격하게 된 것은 이 두량윤성이 사비성을 압박할 수 있는 유리한 위치에 입지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하겠다. 이 두량윤성의 위치에 대하여서는『삼국사기』잡지 지리 4 백제조에,
열기현은 일설에는 두릉윤성이라 하고, 두관성이라고도 하고, 윤성이라고도 한다.
고 하고,『 삼국사기』잡지 지리 3에는,
열성현은 본래 백제의 열기현으로 경덕왕때 지명을 고쳤으니 지금의 정산현이다.
라고 하여, 백제의 열기현은 두릉윤성이라고도 하는데 경덕왕때 정산으로 지명을 고쳐 현재까지 내려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세종실록지리지』충청도 공주목 정산현조를 보면
계봉산석성은 현의 동쪽 5리에 있는데, 둘레는 160보이며 조금 험하다. 안에 우물이 하나 있는데 겨울이나 여름에도 마르지 않는다. 군창이 있다.
고 하고, 1872년 정산현고지도에는 계봉산성을 ‘두능성’이라 표기하고 있어 두릉윤성을 일찍이 충남 청양관내 정산의 계봉산성에 비정한 바 있다. 계봉산성은 충남 청양군 정산면 백곡리와 목면 지곡리에 위치하고 있으며,
표고 210m인 계봉산 정상부에 테뫼식으로 돌린 석축산성이다. 험준한 지형을 이용하여 내탁공법으로 축조한 이 성의 둘레는 550m 정도이며, 성내에는 너비 10m 정도의 내호가 전체에 돌려 있다.
현재 남아 있는 서남벽의 성벽 높이는 6m에 달하며, 남벽의 융기된 석루는 내벽 높이가 1.4m, 상부 폭이 4.2m이다. 이 성에는 남문지가 잘 남아 있는데, 그 문폭은 3m로 목면 지곡리로 통하게 된다. 동벽에는 3m 정도의 끊어져 붕괴된 부분이 있는데, 이는 수구지로 추정되며, 이 곳에서 서쪽으로 약 5m 떨어져서 1.8×1.8m인 정방형
의 우물이 있어, 현재에도 물이 솟아나고 있다. 성내의 서남부에는 높은 대지가 위치하고 있으며, 시계가 매우 양호하여 공주?청양간의 도로가 내려다보이고 있다.
동쪽과 동북부의 평탄한 곳은 당시의 건물지로 보이며, 여기에서는 백제시대의 토기편과 와편 외에 조선시대의 자기편까지 발견되고 있어, 백제시대에서부터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중요시되고 있었음을 짐작케 한다. 또
한, 고대 이정표에 의하면 이 정산에서 부여까지는 30리의 거리이며, 공주까지가 50리로서 백제부흥군이 이 산성을 중심으로 사비성에 대한 공세를 감행하였음을 파악할 수 있다.
신라군의 두량윤성에 대한 공격은 실패하고 말았다. 우선 3월 5일에 있었던 품일장군의 선발부대는 진영이 정돈되지 않은 상태에서 백제부흥군이 불의에 급습하여 대패하여 달아나고 말았으며, 3월 12일에는 품일장군 등 11명의 장수들이 거느리는 대군이 도착하여 사비성 밖에 주둔하고 나아가 두량윤성을 한달 엿새가 되는 4월 19일까지 공격하였으나 이기지 못하고 그 날 신라로 철군하게 되었다.
앞에서 인용한 신라본기 기사내용 중 ㉢에 등장하는 古沙比城은 대부분 전북 고부에 비정되는 고사부리성으로 인식하고 있으나, 이 고사부리성 밖에 군영을 설치하고 정산에 비정되는 두량윤성을 공격한다는 것은 너무 먼
거리로 이치에 맞지 않는다고 하겠다. 특히 사비성에 고립되어 있는 나당진수군을 구원하기 위하여 출동하였는데, 고사부리성에 군영을 설치한다는 것은 납득하기 어렵다. 특히 전북 고부에 입지한 고사부리성에서 충남 정산에 입지하고 있는 두량윤성 사이에는 동진강과 금강이 가로막고 있으므로 신라군이 고사부리성 밖의 진영에서 출발하여 이 두 강을 도하하여 두량윤성을 공격한다는 것은 비현실적이라고 하겠다. 따라서 여기에 나오는 고사비성은 백제도성으로서의 기능을 다한 옛 사비성의 한자 표기인 古泗?城의 오기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하겠다.
신라본기에서의 무열왕 8년 3월은 바로 앞의 ‘웅진강구 전투’에서 살펴본 백제본기나 『구당서』및『자치통감』에 나타나는 당 용삭 원년59)인 661년 3월에 해당한다. 이로 볼 때 신라본기의 ㉠·㉡·㉢과 백제본기, 『구당서』·『자치통감』의 ⓑ·ⓒ기록이 모두 사비성에 고립된 유인원 등 진수군의 포위를 풀 목적으로 나당군이 백제부흥군을 상대로 전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상기 기록중 백제본기와『구당서』·『자치통감』은 당의 유인궤군과 신라군이 함께 웅진강구에서 백제부흥군을 물리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지만, 이 때 신라군을 지휘하는 장수가 누락되어 있는데 반하여, 신라본기
에는 품일 등 11장수가 이끄는 신라군이 독자적으로 두량윤성을 공격하고있음을 볼 수 있다.
이 기록의 내용으로만 본다면 품일 등 11장수 중에 누가 웅진강구 전투에 참여하였었는지, 또는 품일이 이끄는 대군과는 별도의 신라군이 웅진강구 전투에 참여하였었는지 확실치 않다. 그러나 웅진강구전투 후 신라군이 철수한 시기가 661년 3월이기 때문에 웅진강구에서 백제부흥군의 저항을 물리치고 유인궤군의 진입을 도와준 신라군이 사비성을 압박하고 있는 두량윤성을 공격하기 위하여 이동한 것이라 하여도 무리는 없다. 다만 신라의 철수 이유가 군량이 다하였다는 것인데, 이는 현지에서 군량을 조달하려 하였다면 큰 문제는 아니라 하겠다.
이때 신라군의 움직임을 살펴보면, 661년 3월 5일에 품일이 휘하 군대를 나누어 소수의 병력을 먼저 두량윤성으로 보내게 되었다. 품일이 소수의 병력만을 두량윤성에 보내게 된 것은 아직 웅진강구 전투가 진행 중이었을 것으로 파악되며, 파견 목적은 군영을 설치할 장소를 물색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이 선발대는 신라군의 진영이 정돈되지 않은 것을 바라보고 있었던 백제부흥군의 기습공격에 의하여 대패하여 달아나고 말았다.
그 후 품일이 지휘하는 대군이 3월 12일에 합세하여 사비성 밖에 주둔하고 두량윤성을 공격하게 되었다. 이와 같은 군사전략은 품일이 구상한 고도의 군사작전으로 비록 백제부흥군에게 패하고는 있지만 3월 5일에 두량윤성으로 간 신라군은 두량윤성에 웅거하고 있던 백제부흥군이 웅진강구전투에 합세하지 못하도록 묶어두는데 성공하였다고 하겠다. 그리하여 웅진강구로 진입하는 유인궤군과 품일 등이 지휘하는 신라의 대군은 복신과도침이 지휘하는 백제부흥군을 웅진강구에서 물리치고 신라군은 그 여세를 몰아 3월 12일에 사비성 밖에 진영을 설치하고, 두량윤성을 37일에 걸쳐 공격하게 된 것이라고 하겠다.
복신과 도침이 웅진강구 전투에서 패한 후에 각각 주류성과 임존성으로 물러나 지키고 있는 것으로 보아 두량윤성에서 신라의 대군을 맞아 싸운 백제부흥군의 지휘자는 일찍이 이곳에서 부흥군을 일으킨 바 있는 좌평 정무일 것으로 파악된다. 좌평 정무는 복신과 도침이 웅진강구에서 유인궤가 이끄는 당나라 원군의 저지에 실패하여 자칫 백제부흥군의 사기가 저하되어 자칫 붕괴위기에 까지 갈 수 있었던 상황에서 품일 등 11장수가 지휘하는 신라의 대군을 물리침으로서 전세를 삽시간에 역전시키고, 퇴각하는 신라군을 중도에서 대패시키는 전승을 이끌어내는 큰 전과를 세운 것이라 하겠다.
한편, 문무왕 11년 7월 26일에 당나라 장수 설인귀가 보낸 문서에 대한 왕의 답서에 보면
6년에 이르러 복신의 무리들이 점점 많아져서 (웅진)강의 동쪽 땅을 침범하여 빼앗으므로 웅진의 漢兵(唐軍) 1천명이 가서 적의 무리를 치다가 적에게 격파를 당하여 한사람도 돌아오지 못하였다. 이같이 패배한 이래로 웅진으로부터 청병이 계속되었다. 신라는 전염병이 많이 돌아 군마를 징발할 수 없었으나 (그들의) 괴로운 청을 피할 수 없어 드디어 군사를 일으켜 가서 주류성을 에워쌌다. 적이 우리 군사가 적은 것을 알고 인하여 즉시 와서 공격하므로 군마를 크게 손실하는 손해를 보고 돌아왔다. 남쪽지방의 여러 성들이 일시에 모두 배반하여 함께 복신에 속하니 복신이 승리에 편승하여 다시 부성을 에워쌌다.(삼국사기 권7 신라본기 문무왕 11년)
고 하고 있다. 여기에 나타나는 6년은 당나라 현경 6년으로 당은 이 해에 바로 연호를 바꾸었으니 곧 당 용삭 원년인 661년이 된다. 그런데 이 두 문헌 사이에 기록된 같은 연대와 당나라의 신라에 대한 청병사실이 혼동되어『삼국사기』신라본기 태종무열왕 8년 3월과 4월에 걸쳐 있었던 두량윤성 전투와 상기『문무왕보서』에 나타나는 주류성 전투를 동일사건으로 취급하여 津田左右吉, 池內宏, 今西龍, 노도양65, 전영래, 지헌영, 新川登龜男 등 많은 학자들이 두량윤성과 주류성이 같은 지명이라는 오류를 낳게 되었다.
『문무왕보서』는 당나라 장수 설인귀가 보낸 서신에 대한 답신으로 그간의 사정을 축약하여 기록한 것이다. 그리하여 문제가 되고 있는 ‘6년에 이르러’는 661년이 되자 복신이 거느리는 백제부흥군이 점점 세력을 확대하여 웅진강의 동쪽방면의 땅을 침범하여 탈취하였다는 것을 강조한 것이다.
그리하여 그 후에 있었던 주류성 전투는 웅진에 주둔하는 당군이 웅진강 동쪽을 침범하는 백제부흥군을 토벌하려고 1천명이 출동하였다가 오히려 대패하여 전멸당한 후에 있었던 사건이다. 유인원이 지휘하는 당군은 사비성에 고립되어 있었기 때문에 웅진성에 주둔하고 있던 당군은 유인궤군이라고 하겠다. 661년 초에 웅진강으로 진입한 유인궤군은 웅진성으로 들어가 진수하고 있었던 것으로 파악되는데, 이는 661년 6월 소정방이 고구려 정벌 시에 신라에서는 문무왕이 친히 김유신 등을 거느리고 고구려로 출전하는데, 사비성에 머물러 있었던 유인원도 수로로 출발하여 합세하고 있다.
그런데 이때 웅진부성에서 府城이 고립되어 위태롭다는 사실을 알리는 사자가 도착하여 고구려로 향하던 도중에 옹산성을 함락시켜 웅진으로 통하는 ‘熊津道’를 개통시켜 웅진부성의 위기를 해소시키고 있다.(삼국사기 권42 열전 김유신(중) 용삭 원년 6월조 ; 신라본기 7 문무왕 11년『문무왕보서』당 용삭 원년 6월조.) 따라서 사비성에서 출발한 당군을 유인원이 지휘하고 있다면, 웅진부성에 고립되어 있었던 당군은 유인궤가 거느리고 있었다고 하겠다. 그리하여 웅진강 동쪽에서 백제부흥군에게 대패당한 당군은 유인궤군이 틀림없다고 하겠다.
앞에서 살펴 본 바와 같이 본래 웅진에서는 달솔 여자진이 부흥운동을 일으켰었다. 유인궤군의 웅진성 공격에 관한 문헌기록이 누락되어 있으므로 유인궤가 웅진성에 진입하여 주둔하게 된 상황에 대해서는 확인이 되지 않고 있다. 다만『신·구당서』유인궤전과『구당서』백제전에 의하면, 유인궤는 웅진강구 전투이후 가는 곳마다 모두 승리하였다는 내용으로 일관하고 있어, 웅진성 전투에서 달솔 여자진이 지휘하는 백제부흥군을 물리치고 진입하였을 것을 짐작하고 있을 따름이다.
달솔 여자진은『일본서기』에 ‘좌평 복신·좌평 자진’이라고 칭송하였다는 기록을 남기고 있기 때문에, 백제유민들로부터 많은 신망을 받고 있었다고 하겠다. 그러나 663년 8월에 백강구 전투에서 왜 수군이 패배한 후 왜 수군과 함께 왜국으로 망명하기 이전에는 그 동안 국내에 머물고 있었을 텐데, 역시 그의 행적에 대해서는 파악이 되지 않고 있다.
한편, 『자치통감』(F-⑤)에는 당고종 용삭 원년(661) 3월조의 기록에 ⓑ·ⓒ의 왕문도를 대신한 유인궤의 부임 사실과 웅진강구에서의 백제부흥군을 물리치는 장면 이후에 “ⓓ 도침은 스스로 영군장군으로 칭하고 복신은 스스로 상잠장군으로 칭하며 여러 무리들을 불러모음에 그 세력이 더욱 확대되었다. ⓔ 인궤는 무리가 적으므로 인원과 더불어 합군하고 군사들을 휴식시키며 황제에게 표문을 올려 신라군을 출병토록 하였다. 신라왕 춘추가 조칙을 받고 그의 장수 김흠을 보내어 군사들을 거느리고 인궤 등 을 구원하려고 古泗에 이르렀으나 복신이 급하게 공격하여 그들을 무너뜨림에 김흠이 갈령도로 도망하여 돌아가니 신라는 감히 다시는 나오지 못하였다.”는 기사를 계속하여 수록하고 있다.
그런데『자치통감』ⓔ의 기사는『문무왕보서』의 주류성 전투기사와 같은 내용을 수록하고 있다고 하겠는데, 여기에서는 주류성 전투가 유인원군과 유인궤군이 합군한 이후에 일어난 사건으로 확실하게 밝히고 있다. 이를
볼 때, 661년 6월까지도 유인원군과 유인궤군이 별도로 군영을 설치하고 운영되고 있었기 때문에 661년 3월에서 4월에 걸쳐 있었던 두량윤성 전투는 그 해 6월 이후에 있었던 주류성 전투와는 별개의 사건임을 알 수 있는 것이다.
두량윤성 전투와 주류성 전투는 사료상에서도 다음과 같이 차이가 나고 있다. 첫째, 『문무왕보서』의 주류성 공격목적은 복신의 무리들이 점차 많아지고 웅진강 동쪽의 지방을 침략하여 취하므로 웅진의 당군이 가서 쳤으나, 오히려 백제부흥군에게 대패하여 한사람도 돌아오지 못했다. 이에 웅진에서 신라에게 청병하여 신라군이‘전염병이 많이 돌아’ 힘든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주류성으로 출동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신라본기의 두량윤성에 대한 공격목적은 백제부흥군이 사비성을 에워싸고 공격하기 때문에 이 사비성에 있는 나당진수군을 구하기 위하여 출동하고 있음을 볼 수 있는 것이다.
둘째, 『문무왕보서』의 “복신의 무리들이 점점 많아져서 (웅진)강의 동쪽 땅을 침범하여 빼앗으므로”의 기록은『자치통감』ⓓ의 “여러 무리들을 불러모으매 그 세력이 더욱 확장되었다.”의 기록으로 볼 수 있어, 시기적
으로 백제부흥군에 의한 사비성의 포위가 풀린 후의 사실이며,
셋째, 『문무왕보서』의 주류성 공격후 철수 이유는 “군마를 크게 손실하는 손해를 보고 돌아왔다.”고 하고 있는데, 두량윤성 공격 후의 철수 이유로서는 “신라군사들이 군량이 떨어져서 군사를 이끌고 돌아가니”이라하고 있다. 즉 주류성 공격 후의 철수 이유는『자치통감』ⓔ기록의 “복신이 급하게 공격하여 그들을 패배시켰다.”고 한 기록과 결부된다고 하겠다.
넷째, 신라군 철수 이후의 기록으로, 『문무왕보서』에는“남쪽지방의 여러 성들이 일시에 모두 배반하여 함께 복신에 속하였다.”고 하였는데, 이는『자치통감』ⓔ기록에서 “김흠이 갈령도로 도망하여 신라로 돌아가니 신라는 감히 다시는 나오지 못하였다.”와 부합된다고 할 수 있다.
다섯째, 『문무왕보서』에서 신라군의 주류성 공격 시 백제부흥군이 와서 치게 된 것은 신라군의 수가 적음을 간파했기 때문인데, 이는『자치통감』ⓔ에서 보듯이 김흠이 거느린 소부대와 부합된다고 하겠다. 또한, 두량윤
성 공격 시에 품일 등 11장수가 이끌고 간 군대는 결코 그 수가 적다고 할 수 없겠다.
여섯째, 『문무왕보서』에서 주류성 공격시의 지휘자는 金欽임을 알 수 있는데, 이 김흠은 품일 등 11장군이 두량윤성을 공격하는 대열에는 빠져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오히려 두량윤성 전투에 참여했던 신라군이 귀로 중에 패했다는 소식을 듣고, 왕명에 의하여 파견되고 있는 장군 金純이 주목되고 있다. 이와 같은 내용의 기록으로『삼국사기』김유신(중)전에 보면 이 때 파견된 장수들이 수록되어 있는데, “또 이찬 흠순(흠춘이라고도 한다), 진흠, 천존과 소판 죽지 등을 보내어 군사를 구제하도록 하였다.”라고 하여, 金欽을 金欽純이라 기록하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바로 金欽과 金純은 동일인물로서, 열전 김유신조에 보이는 김유신의 동생 김흠순임을 알 수 있는 것이다. 또한, 백제부흥군의 패망기록을 보면,
왕이 김유신 등 28(30명이라고도 한다)장군을 거느리고 그들과 함께 합하여 두릉(량이라고도 한다)윤성과 주류성 등 여러 성을 공격하여 모두 항복시켰다.(삼국사기 권42 열전2 김유신)
라고 하여, 두릉윤성을 두량윤성이라고도 하여 혼용하여 부르고 있음을 밝히고, 특히 두릉윤성과 주류성을 별개의 지명으로 기록하고 있어, 두릉윤성과 주류성이 동일지명이 아님을 밝히고 있다. 이로써 두량윤성 전투와 주류성 전투는 그 공격목적이나 시기를 전혀 달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하여 이상의 여러 사실들을 종합하여 정리하여 보면, 661년에 들어서 백제부흥군이 사비성을 포위하고 공격하게 되자, 당은 왕문도를 대신한 유인궤를 출동시키면서 신라에 원군을 요청하게 되었다. 이에 무열왕은 8년(661) 2월에 품일 등 11장군을 파견하게 되었으며, 웅진강구 전투이후 곧바로 두량윤성을 치게 되었다. 그러나 선발대 패배 이후 본대가 도착하여 1개월 6일간에 걸친 공격이 실패로 돌아가고 식량도 다하여 귀환하게 되는데, 이 귀환도중 백제부흥군의 공격으로 신라는 막대한 피해를 입고 말았다. 이에 놀란 무열왕은 장군 김순 등을 구원군으로 출동시키고 있으며, 이들은 본군이 돌아오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이내 돌아오게 되었다. 이 때 무열왕이 여러 장수들의 패전한 전적을 논하여 벌을 내리되 차등이 있었다고 하는 것으로 보아 무열왕의 실망과 우려가 반영된 것이라고 하겠다.
백제부흥군은 이 두량윤성 전투에서 승리한 이후 도침은 임존성으로 들어가서 지키고, 복신은 주류성으로 들어가 지키면서 각각 스스로 장군을 호칭하며 군세를 더욱 확장하게 되었으며, 웅진강 동쪽 지역으로 세력을 뻗치게 되었다. 그리하여 고립된 웅진부성에서는 이를 해소하기 위하여 출동시킨 당군 1천이 도리어 전멸하니, 유인궤는 군사가 적음을 들어 유인원군과 합군하고, 군사들을 휴식시키며 황제에게 표문을 올려 신라군을 출병
토록 하였다.
당시 신라는 전염병으로 인하여 병마를 징발하기 어려웠으나 당나라 진수군의 괴로운 청을 피할 수가 없어 김흠 등 소부대만을 파견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김흠은 소부대만을 이끌고 유인궤 등을 구원하기 위하여 주류성을 에워싸다가 신라군의 수가 적다는 것을 간파한 백제부흥군이 나와 공격함으로 해서 크게 패하게 되었던 것이다. 김흠이 오히려 복신에게 대패하여 돌아오니 남방의 여러 성들이 복신에게 귀속하게 되었으며, 김흠이 돌아온 이후 신라군은 감히 다시 나가려고 하지 않았다고 기록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신라군의 피해상황이 얼마나 컸었나를 짐작할 수 있다.
이에 백제부흥군은 승리에 편승하여 다시 웅진부성을 포위하고 웅진도를 차단하게 되었다.(삼국사기 권7 신라본기 7 문무왕 11년『문무왕보서』) 이와 같이 상황이 유리하게 전개되자 도침은 영군장군, 복신은 상잠장군을 일컬으며 백제 유민들을 모아 들여 그 세력이 더욱 커지게 되었다. 그리하여 유인궤에게 사자를 보낼 정도로 여유를 갖게 되었으며, 답서를 가지고 온 유인궤의 사자를 관직이 낮다고 하여 답신도 하지 않고 홀대하여 돌려보내고 있다.(구당서 동이열전 백제조.『 책부원귀』장군부에는, 이 때에 부여풍 및 복신 등이 유인원 등이 외로운 성에 구원군이 없음을 알고“대사 등은 언제 서쪽으로 돌아갈 것인가. 마땅히 보내주도록 도와주고 전송하겠노라.”하여 교만함을 나타내고 있다.)
3. 고구려의 지원(Ⅱ)
이 때 고구려는 신라군이 백제고지로 출동하여 비어있을 것이라고 하여 신라를 공격하고 있다. 이와 같은 고구려의 행동은 백제부흥군의 사기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F-① 9일(11일 이란 말도 있다)에 고구려 장군 뇌음신이 말갈장군 생해와 함께 군사를 합치고 와서 술천성을 공격하였으나 이기지 못하고, 군사를 북한산성으로 옮겨 포차를 배열하고 공격하니 날아오는 돌에 맞는 곳은 성가퀴와 가옥이 무너지니 성주인 대사 동타천이 사람들로 하여금 마름쇠를 성밖으로 던져 깔아서 사람이나 말이 통행하지 못하게 하고 또한 안양사의 창고를 헐어 그 재목을 실어다가 성이 무너진 곳마다 망루를 구축하게 하고, 밧줄로 그물을 엮어 소와 말의 가죽과 솜옷을 걸쳐놓고 그 안에 노포를 설치하여 지켰다. 이 때 성안의 남녀가 다만 2,800명이 있었는데 성주 동타천이 어리고 약한 사람들을 격려하여 무릇 20여일 동안 강대한 적과 격렬하게 싸웠다. 그러나 양식은 다하고 힘은 지쳐서 지성으로 하늘에 고하였더니 갑자기 큰 별이 적의 군영에 떨어지고 또한 우레와 함께 비가 내리며 벼락이 치니 적들이 놀라서 머뭇거리다 포위를 풀고 갔다(삼국사기 권5 신라본기 태종무열왕 8년 5월).
F-② 고구려와 말갈이 이르기를 신라의 정예병이 모두 백제에 있으니 내부가 비어서 가히 공격할 수 있다고 하여 군사를 일으켜 수로와 육로로 같이 진격하여 북한산성을 포위하였다. 고구려 군영은 성 서쪽에 두고 말갈군은 성 동쪽에 주둔하며 10일 동안 맹렬하게 공격하니 성안이 위급하여 두려워하였는데, 갑자기 큰 별이 적의 진영에 떨어지고 또한 우레와 함께 비가 내리며 벼락을 치니 적들이 놀라서 머뭇거리다 포위를 풀고 달아났다(삼국사기 권42 열전 김유신).
F-③ 여름 5월에 왕이 장군 뇌음신을 보내어 말갈군을 거느리고 신라 북한산성을 포위하여 열흘동안 풀지 않으니, 신라의 군량수송로가 끊어져서 성안이 두려워 하였다. 갑자기 큰 별이 우리 군영에 떨어지고 또 우뢰와 함께 비가 오고 벼락이 치니 뇌음신 등이 의심스럽고 놀라서 군병을 이끌고 물러났다.(삼국사기 권22 고구려본기 보장왕 20년)
품일장군 등이 거느리는 신라 대군이 두량윤성 전투에 이기지 못하고 신라로 귀환하는 때가 661년 4월 19일이며, 귀환하는 도중에 빈골양 전투에서 백제부흥군에게 패하여 많은 손실을 입었고, 두 번째 각산 전투에서는 승리하여 2천 여명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리는 등의 전황을 겪으면서 퇴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고구려 장군 뇌음신이 술천성과 북한산성을 계속하여 공격하고 있는 5월중에는 신라 내에는 원군을 보낼만한 여력이 없음을 알 수 있다.
백제부흥운동이 전개되고 있는 동안 고구려군이 신라를 공격하여 간접적으로 도와준 것이 두 차례인데, 두 차례 모두 신라의 주력군이 백제고지 내에 진입하여 원군을 보내지 못할만한 상황에서 작전을 전개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 때에도 고구려의 주력군은 당군을 방어하기 위해서 총력을 기울이고 있었다. 신라의 기선을 제압하는 것이 당군의 방어에 매우 효과적임에도 불구하고 고구려는 뇌음신이 말갈군만을 거느리고 출동하는 등 매우 소극적으로 대처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