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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새 신천지 라는 교회 때문에 난리네요
신부님 강론에서도 많이 강조하시고 그래서 요한묵시록 대림 특강자료를 올립니다.
저의 주위에도 이러한 사람이 있는 것 같습니다. 이러한 사람들에게 대처할 수 있는 것은 알아야 한다는 점 아닐까요. 내용이 어럽더라도 한 번 읽어 보시고 파일로서도 저장해 놓았습니다 필요하신 분은 다운받아 프린트 하세요..
2011-12-08(금) 20시 우정성당 대림 특강 자료
'요한 묵시록' 에 대한 특강 자료를 '염철호 신부님'께서 보내 주셔서 아래와 같이 게시 하오니 꼭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요한 묵시록
염철호 사도요한 신부
(부산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그리스도교는 종말론적인 공동체이다. 항상 종말을 깨어 기다리며 살아가는 공동체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교는 이 땅 위에서 충실히 살아가는 공동체이다. 종말이 이제 곧 온다고 현실을 도외시하고 사는 이들에게 바오로 사도는 ‘무질서하게 살면서 우리에게서 받은 전통을 따르지 않는 형제는 누구든지 멀리 하십시오’(2테살 3,6-15)라고까지 이야기한다. 종말을 기다리면서도, 현실을 충실히 살아가는 삶. 이것이 바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삶이라 할 수 있겠다.
그런데 교회 역사를 보면 종말만을 부각하면서 현실을 도외시하는 이들이 많았다. 대개 시대적으로 어려움이 큰 시기, 곧 오직 희망을 둘 곳이라고는 하느님 밖에 없다는 것을 깨닫는 시기에 교회의 전통적인 종말론을 변형해서 사람들에게 잘못된 믿음을 주었던 이들이 많았다. 멀리 갈 것도 없이 가장 최근의 예로 ‘신천지’ 교회를 들 수 있다. 이들 교회의 특징은 요한 묵시록에 나오는 여러 가지 종말 상황에 관한 묘사들을 이용해서 종말이 가져다주는 공포, 두려움을 자극해 사람들을 현혹시킨다는 데 있다.
이번 강의는 요한 묵시록을 올바로 이해함으로써, 잘못된 교리에 현혹되지 않도록 하는데 그 목적이 있다. 아울러 묵시록이 이야기하는 올바른 종말 신앙을 회복함으로써, 항상 종말을 깨어 기다리면서도, 현실을 도외시하지 않는 그리스도인이 되고자 함에 있다.
1. 초대 교회와 로마 제국의 박해
로마 제국 각지에 흩어져 살던 초대교회는 나름대로 로마제국과 화목하게 지내려고 노력했다(로마 13,1-7; 1디모 2,1 이하; 디도 3,1; 1베드 2,13 이하). 예수의 가르침에 따라 카이사르의 것은 카이사르에게,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에게 돌리면서 지냈던 것이다(마르 12,17). 하지만 이런 교회가 갑자기 제국과 맞서게 된다. 요한 묵시록 13장과 17장을 보면 요한 사가는 로마 제국에 관해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는데, 그 이유는 로마 제국이 일치를 도모하기 위해서 종교를 이용하는 것을 넘어서서 사람들에게 황제를 숭배하는 의식을 거행하도록 강요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모든 식민지 백성들로 하여금 황제에게 절대 복종을 하게 하려는 정치적 방편이었다. 주로 그리스나 소아시아 지역에서 황제숭배 의식을 자주 행했는데, 황제를 위한 많은 신전들이 이 점을 잘 증언해 준다. 아울러 로마에 있는 아우구스투스의 동상(옷을 입은)과 달리 상체를 벗은 근육질 몸매로 아우구스투스를 신으로 표현한 여러 동상들에서 우리는 이 점을 잘 찾아 볼 수 있다. 특히 “하느님의 아들 아우구스투스”라는 말을 동전 앞, 뒷면에 새겨놓고 숭배의식을 강요하기도 했다.
그런데, 아우구스투스 황제나 그의 후계자들은 그러한 황제 의식을 매우 제한적으로 이용했기 때문에 큰 문제는 되지 않았다. 그러나 갈리굴라 황제(AD 37~41)나, 네로 황제(AD 54~68년), 도미시아누스 황제 (AD 81~96)등은 절대적 왕권을 세우고 중앙 집권을 강화할 목적으로 황제 숭배 의식을 의도적으로 강요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인간에 지나지 않는 황제를 섬기기보다 그리스도를 유일한 주님이요 하느님으로 섬기려 했다. 요한 묵시록에 보면 이런 초대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이 잘 담겨 있다(묵시 1,5 이하; 4,8.11; 5,9 이하; 7,10-12; 15,3; 16,5 이하; 19,1-8).
사실, 새로운 예배를 거행하는 그리스도교 신앙과 황제의 절대 권력 구축을 목적으로 황제 숭배를 강요하는 로마 제국은 서로 대립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요한 묵시록은 교회가 로마 제국과 대립하는 모습을 잘 전해 준다. 이런 그리스도인들의 반응으로 인해서 1세기 말엽에 이르러서는 그리스도교 박해가 로마 제국 전역에서 이루어지는 양상을 보이기까지 한다.
2. 요한 묵시록
예루살렘 파괴, 로마인들에 의한 그리스도교 박해 등을 경험하면서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크게 절망한다. 다시 오겠다고 약속한 예수는 여전히 오지 앉았고, 박해는 더욱 체계적으로 이루어졌기에 더 이상의 희망도 보이지 않는 시간이 계속되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배교를 하는 이들도 생겨났을 것이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감옥에 갇혀 있던 요한은 묵시록을 통해서 그리스도인들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전하려 했다. 곧, 그리스도가 반드시 오리라는 것을 강조하면서, 그리스도가 오면 결국 악과의 전쟁에서 크게 승리하리라고 밝힌다. 그리고 그리스도가 재림할 때 이스라엘이 그토록 기다리던 새 하늘과 새 땅이 열릴 것이니 언제나 희망을 가지고, 영광의 흰옷을 입을 수 있도록 항상 깨어 기다리라고 가르친다. 그리고 재림을 약속한 예수가 빨리 오기를 바라는 간절한 염원을 담아 “마라나타”(어서 오소서)라고 기도한다. 이런 내용을 담은 요한 묵시록에 관해서 조금 더 상세히 살펴보도록 하자.
1) 묵시문학
대개 요한 묵시록 하면 미래에 일어날 일에 대해 알려주는 그런 계시록 쯤으로 여긴다. 이것은 일종의 예언문학인 묵시문학을 잘못 이해하기 때문에 생겨난 문제이다.
그렇다면 예언이란 무엇인가? 구약의 예언서들은 단순히 미래에 일어날 일들을 예견해 주는 책이 아니다. 오히려 ‘예언’이란 현실에서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을 겨냥한 말들이다. 바로 지금 우리가 이런 상황에 이르게 된 것은 하느님의 가르침에 따라 살지 못했기 때문이고, 그렇기 때문에 하느님은 반드시 우리를 벌하실 것(예언)이라는 말이다. 그러니 지금 정신을 차리고 다시금 하느님께로 돌아오라는 식으로 전하는 말이 바로 예언이다. 이 때 예언은 멸망을 예언할 수도 있고, 또 희망(메시아, 위로)을 예고할 수도 있다.
어떻게 보면, 이 세상에서 우리가 보지 못하는 부분, 곧 하느님 편의 생각을, 하느님의 뜻을 전해주는 것이기에 이런 말들을 우리는 예언이라고 부르는데, 묵시문학 역시 일종의 예언문학이라고 할 수 있겠다.
사실 이런 예언문학이나 묵시문학은 정상적인 사람들이 이해하기에 대단히 곤란한 방식으로 무엇을 묘사하곤 한다. 이 때문에 사람들은 마치 이 책들을 비밀스러운 책으로 여기며, 그 책들에서 무엇인가 숨겨놓은 진실, 감추어진 비밀들을 찾아내려 했다. 그러나 이런 묘사 방법은 무엇인가를 감추어 놓기 위함이 아니라, 현실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의 저편에서 일어나고 있는, 그러니까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실재 현실 저편에서 일어나고 있는 사건들을 묘사하기 위한 일종의 묘사방법임을 알아야 한다. 사실 눈에 보이는 세상 너머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우리 인간적인 사고방식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그런 것들이다. 이 때문에 묵시문학은 대교 보통사람들이 이해하기 어려운 방식으로 묘사를 한다. 예를 들면 문법을 완전히 깨뜨리고 지키지 않는다든지, 알 수 없는 단어들을 이용한다든지, 상징적인 숫자들과 또 이상한 이미지 들을 사용한다든지, 앞 뒤 말이 안 맞게 만들어 버린다든지 하는 것이다. 하지만, 묵시록을 꼼꼼히 살펴보면 이상한 표현들처럼 보이는 것들이 서로 연결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3년 반 = 42개월 = 1260일). 이런 것들을 하나하나 연결해 나가다 보면 묵시록 전체가 무엇을 이야기하는지를 발견하게 된다.
2) 묵시록의 구조
1,1-3 제목과 도입축복
1,4-8 서간 도입
I. 첫 번째 부분 : 그리스도와 아시아의 교회
1,9-20 주님의 날에 일어난 그리스도 현시
2,1-3,22 : 일곱교회에 보내는 편지들(첫번째 일곱 묵음)
II. 두 번째 부분 : 역사 안에서 일어나는 하느님의 계획과 업적
a. 두루마리와 어린양의 계시 단락
4,1-5,14 : 시작 현시 : 옥좌, 두루마리, 어린양
6,1-8,1 : 어린양이 두리마리의 봉인을 풀다(두 번째 일곱 묶음)
b. 두 우상에 대한 치료적 개입 단락
8,2-11,19 : 전통적인 우상에 대한 재앙들 (세 번째 일곱 묶음)
[10장 : 백성들과 왕에게 예언하도록 임무를 받은 요한]
[11장 : 예언하다가 짐승에게 죽임을 당하는 두 증인들]
12,1-13,18 : 용, 두 짐승들과 짐승의 우상
14,1-16,21 : 짐승의 우상에 대한 재앙들 (네 번째 일곱 묶음)
c. 하느님의 심판적-종말론적 개입 단락
17,1-20,15 : 바빌론, 두 짐승, 용, 죽음에 대한 심판
[21,1-8] : 새 창조와 새 예루살렘
21,9-22,5 : 새 예루살렘
22,6-21 : 서간의 맺음부
3) 상징의 문법
그러면 여기서 저자가 사용하는 ‘상징의 문법’에 관해서 다루어 보도록 하자.
① 한 인물을 소개해야 할 때 마치 해부학책에 나오는 듯이 그 인물을 상세히 묘사한다. 그러나 이것은 그 인물의 외형을 단순히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그 외형을 묘사함으로써 그의 ‘정체’(identity)를 묘사하는 것이다. 곧 “사람의 아들을 닮은 이”와 같은 표현이 그것이다. 이런 표현은 책 전체에 많이 등장한다.
② 이미지의 변형(metamorfosi), 곧 앞에서 표현된 이미지가 그대로 사용되지 않고 자꾸 변형이 된다. 예를 들면 7,1-8에 나오는 144,000명의 사람은 하느님의 인장을 이마에 받는다. 그러나 14,1에서 보면 그들의 이마에는 어린 양의 이름과 그 아버지의 이름이 적혀 있다. 이와 같이 이미지가 같은 상태로 남아 있지 않고 변화한다. 17,15-18에서 보면 먼저 대탕녀 바빌론을 이야기 하는데 처음 탕녀는 마치 하나의 도시처럼 묘사되다가 다시금 여인처럼 묘사되고 다시금 도시처럼 묘사된다. 어떤 일관성을 가지기보다 여인과 도시 두 가지 사이에서 이미지의 변형을 통해서 묘사하고 있다. 예수는 어린 양으로 계속 묘사되고 있다가 나중에는 흰말을 타고 전투를 벌이는 이로 묘사된다(19,11-21).
③ 묵시록에 등장하는 여러 에피소드들은 하나 하나 독립적인 특징을 지니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17장 시작에서 대창녀는 큰 물 곁에 앉아 있다. 그러나 이내 3절에서 진홍색 짐승을 탄 여자를 보게 된다. 그런데 이 여자는 9절에서 일곱 산을 타고 있다. 묵시록 저자는 이 점에 대해서 별로 개의치 않는다. 아니 너무나도 의도적으로 이런 식으로 글을 쓰고 있다고 보는 것이 정확하겠다. 각 에피소드를 논리적으로 완벽하게 연결할 수 없도록 각 에피소드 하나 하나 남겨두는 것은 묵시록 만이 지니는 하나의 특징이라고까지 볼 수 있다.
④ 일상적인 설화진행 방식을 따르지 않는다. 예를 들면 18장에서 바빌론이 패망하였다고 외쳐 놓고는 다시금 바빌론이 패망할 때 조심하라는 둥, 조심하라는 둥 하고 조언을 한다. 그러다가 다시금 17절에 이르러 바빌론이 패망하였다는 것을 알리다가 21절에 와서는 앞으로 바빌론이 이렇게 패망할 것이라고 말한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설화적 공백(lacune narrative)에서 길을 잃으면 안 된다. 예를 들면 인장을 받은 이를 나열하는 묵시 7,5-8이 대표적이다. 설화가 갑자기 끊기고 설화자는 장황하게 인장을 받은 이에 관해 나열한다. 게다가 아무런 장소변화에 관한 언급도 없이 설화를 전개하는데 분명 하늘에 있던 설화자 요한은(4,1-2; 7,9.15) 10장에서는 땅 위에 내려 와 있다(나는 또 큰 능력을 지닌 천사 하나가 구름에 휩싸여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또한 12,14에서 여인이 뱀을 피해 삼 년 반 동안 처소에서 보살핌을 받았다는 이야기가 이미 12,6에서 언급되고 있다. 게다가 16,9에서 바빌론이 무너졌다고 이야기 해 놓고 나서 18,16에서 바빌론 패망을 예언하고, 18장에서 다시금 바빌론이 무너졌다고 말하다가 예언하다가를 반복한다. 21,2에서 하늘에서 예루살렘이 내려오는 것을 봐 놓고 10절에서 천사는 또 다시 하늘에서 내려오는 예루살렘을 보여 준다. 그러나 우리는 오히려 묵시록 저자가 사용하는 고유한 이야기방식을 따라가면서 그가 전하고자 하는 표현방식에 익숙해 져야 한다. 왜냐하면 이 공백은 너무나도 의도적이기 때문이다.
⑤ 장면의 연속성이 없는 듯 하다. 곧 해가 털로 짠 자루옷처럼 검게 되고 달은 온통 피처럼 되었으며 하늘의 별들은 무화과 나무가 거센 바람에 흔들여 설익은 열매가 떨어지듯이 땅에 떨어졌는데(6,12-13), 다시금 해의 삼분의 일과 달의 삼분의 일과 별들의 삼분의 일이 타격을 받아 그것들의 삼분의 일이 어두워지고, 낮의 삼분의 일이 빛을 잃고 밤도 그렇게 되었다고 이야기 한다(8,12). 게다가 12장에 등장하는 여인은 태양을 입고 발 밑에 달을 두고 머리에 열 두 개 별로 된 관을 쓴 채 등장한다. 마찬가지 방식으로 땅의 삼분의 일과 나무의 삼분의 일이 타고 푸른 풀이 다 타버렸는데(8,7) 메뚜기들은 땅의 풀과 푸성귀나 나무는 하나도 해치지 말라는 명령(9,3)을 받으니 서로 큰 연결성이 없는 듯 보인다. 게다가 8,8에서 바닷물이 피로 물들었는데 다시 16,3에서 바다는 다시 피로 물든다고 하니, 언제 피가 다시 깨끗하게 되었다고 보아야 할까?
⑥ 동사 사용에 있어서도 의도적으로 파격을 사용한다. 예를 들면 11장에서 두 증인에 관해 이야기를 하는데 시작은 미래형으로 시작해 놓고 4번에 걸쳐 현재형을 사용한 뒤 마지막에는 과거(aorist)형이나 미완료과거(imperfect)형을 사용한다. 이것은 18장에서도 반복되는데 바빌론 패망을 보고 전하는 소리에서 시제가 왔다 갔다 한다. 뿐만 아니라 10,7에서는 “일곱번째 천사의 소리의 날에, 그것이 막 울리려고 할 때(이제 막 다가올 사건), 당신의 종 예언자들에게 선포하신 것처럼 하느님의 신비는 이루어졌다(완료된 사건).” 물론 희브리어나 그리스어에서 ‘aorist’ 과거형은 시제와 상관없이 결정적으로 이루어지는 사건을 표현하기 위해 미래를 지적하는 것일 수도 있지만, 문법적인 탈형임에는 분명하다.
⑦ 모순된 표현이 자주 등장한다. 예를 들면 “음성을 보다,” “여덟 번째 왕은 일곱 가운데 하나이다,” “짐승은 있었고, 지금은 있으며 다시 있을 것이다,” “어린양의 혼인 잔치,” “피로 자신들의 옷을 씻다,” “태양을 옷으로 입언 한 여인.”
⑧ 한 주제나 대상에 대해 다양한 방식과 표현을 사용해서 묘사한다. 서로 다른 관점에서 묘사하기는 하지만 한 가지 대상을 묘사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11,2에서 먼저 이민족들이 거룩한 도성을 42달 동안 짓밟으리라고 이야기 한다. 이어서 11,3에서 두 증인을 내세워 1260일 동안 두 증인이 자루 옷을 걸치고 예언하게 하리라고 말한다. 그런데 12,6에서 여인이 다시금 1260일 동안 보살핌을 받도록 하느님이 마련해 주신 처소가 있다고 말한다. 이어 12,14에 여인이 일 년과 이 년과 반 년 동안 그 처소에서 보살핌을 받는다고 이야기하는데, 정확히 42달, 42×30=1260일이다. 13,5에 짐승은 마흔 두 달 동안 활동할 권한을 받는다. 항상 같은 길이의 시간이다. 왜 그럴까? 어찌 보면 네 가지 다른 이야기처럼 들리지만 사실은 같은 이야기의 여러 가지 다른 양상을 표현하는 것이 아닐까? 곧 시간 순서대로 이루어 진 사건이 아니라 같은 시기에 벌어진 사건을 뜻하지는 않을까?
앞에서 살펴 본 것 처럼 21장에서도 3절에서 새로운 예루살렘이 하느님에게서 내려오는 것을 요한이 보았는데 10절에 가면 다시 천사가 그를 높은 산 위로 데리고 가서 하늘로부터 하느님에게서 내려오는 거룩한 도성 예루살렘을 보여준다. 예루살렘이 두 번 내려왔다고 보아야 할까? 아니면 같은 사건의 두 가지 면을 설명하는 것이라고나 할까?
아마도 같은 사건을 이야기하는 것으로 볼 수 있는데 저자는 두 번 중복해서 다른 방식으로 이야기를 전개함으로써 독자들로 하여금 좀 더 잘 이해할 수 있도록 돕는 듯하다. 곧 처음 이야기를 전개할 때 먼저 이야기를 듣게 된 독자가 그 이야기가 마치기도 전에 같은 이야기를 다소 다른 방식으로 전해 듣게 됨으로써 한 사건을 좀 더 자세히 들여다 볼 수 있도록 도와주기 때문이다.
묵시록에 드러난 여러 가지 파격적인 구조나 파격적인 문법들은 다분히 의도적인 것이 분명하다. 어찌보면 눈에 볼 수 없는 하느님의 상을 설명하기란 결코 쉽지 않을 것이다. 깨달을 수 없는 그분의 뜻 역시 설명하기란 쉽지 않다. 이런 점에서 어찌보면 묵시록의 서술 방식은 대단히 독창적이면서도 적절하다 하겠다. 특별히 하느님의 행동, 곧 확실한 것을 하고, 확실한 것을 약속하기 때문에 이미 확실성이 보장된 “과거형 AORIST”를 쓰는 것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다. 이러한 점은 저자가 사용하는 상징적인 숫자나, 여러 상징들을 통해서도 잘 찾아 볼 수 있다.
4) 666과 짐승, 바빌론은 누구를 지칭하는 것일까?
요한 묵시록에서 사람들이 관심을 많이 가지는 666에 관해서는 조금 상세히 다루어 볼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666이 누구인지를 알아야 묵시록 전체를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곧, 묵시록이 누구를 겨냥하고 있는지, 어떤 박해를 염두에 두고 그리스도인들에게 희망을 전하려고 하는지를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서 교회 역사를 통해 볼 때 이 666이 누구인지에 관해 여러 가지 해석이 있어왔다. 여기서는 그 가운데 몇 가지만 살펴보도록 하자.
① 에우안타스(EUANQAS), 라테이노스(LATEINOS), 테이탄(TEITAN)
이레네오(+ 180년)는 당시 세 가지 해석이 있었음을 전한다. 곧 이레네오는 “에우안타스”가 무엇을 뜻하는지 알 수 없다고 말한다. 이어 “라테이노스”는 로마-라틴 황제를 지칭하는 말이고 “테이탄”은 그리스 로마 신화의 타이탄 뿐만 아니라 태양숭배를 나타낸 것이고 설명한다.
이런 해석은 현대에까지 계속 이어지는데, 여러 그리스도교 분파들이 서로 서로를 헐뜯기 위해서 이 견해를 사용하기도 하는데 다음과 같다.
여기서 볼 수 있듯이 각자 적대자를 정해 놓고 그의 이름을 그리스어로 만든 다음에 숫가를 매긴 것으로 볼 수 있다. 몇 개신교에서는 파피스트(PAPIST), 곧 교황 주의자들이 666이라고 하고, 같은 맥락에서 이탈리카 에클레시아(ITALIKA EKKLESIA), 곧 이탈리아 교회를 666이라고 하기도 한다. 이런 식이라면 루테라나(LOUTHERANA)라는 루터교 이름 역시 666 숫가를 채우기도 한다. 과연 요한 묵시록의 저자가 이 숫자가 루터교나 교황주의자들을 지칭하는 것이 되리라고 상상이나 했을까?
어쨌든 공통적인 견해는 이 숫자가 로마제국의 황제 이름을 뜻하는 것으로 보고 그들의 이름을 찾기 위해 여러 가지 노력을 하는 경우도 많다. 주로 카이사르, 타라야노, 칼리칼라 왕들의 이름에서 찾아내려고 하는데 여러 가지 제안들 가운데 네로 왕에 관한 의견이 가장 많다. 그런데 여기서 네로 왕과 관련해서는 히브리어 숫가에 따른다. 곧 QSR NRWN(카이사르 네론, 희브리어와 같이 네로 황제의 자음만 떼어놓은 것), 이렇게 되면 히브리어로 !wrn rsq이 되는데 그 숫가는 100(q)+60(s)+200(r)+50(n)+200(r)+6(w)+50(n)=666 이 된다.
실제로 네로 황제는 매우 포악한 사람으로 전해진다. 그는 자기 친모였던 아그립피나를 생매장해서 죽였을 뿐만 아니라 자기 아내 옥타비아도 살해한다. 그는 A.D. 64년 7월 19일 카페나 문 근처 빈민촌 지역에서 대화재를 일으켜 로마시의 거의 사분의 일을 태운 장본인이었다. 그리고는 그 방화의 책임을 그리스도인들에게 전가시켜 대대적인 박해를 가한다. 우리는 이 네로 박해 때 사도 베드로와 사도 바오로가 로마에서 순교하였으리라 추측한다. 이 점에 대해서는 로마 주교 클레멘스의 서신에서 어느 정도 암시되고 있다.
네로의 폭정을 거슬러 반란이 일어났고, 네로는 68년 6월 9일 자살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네로가 죽지 않았으며 동방 어느 곳(파르티아)으로 도망쳤으며, 언젠가는 로마를 멸망시키러 동방으로부터 돌아오리라고 믿었다. 유다인들은 악의 세력을 대표하는 인물이 세말에 하느님을 대적하여 나타나리라는 민간신념을 가지고 있었는데, 악의 표본적 인물이 바로 네로라고 여긴 듯하다. 묵시록에 보면 이 사실들이 잘 반영되어 있다(묵시 13,3; 17,10이하).
그러나 학자들은 이 묵시록이 대개 도미티아누스(Domitianus) 박해 시기에 적힌 것으로 본다. 도미티아누스가 통치하던 시기는 대 혼란의 시기였다. 그가 통치를 시작하기 직전인 A.D. 79년 폼페이와 헤르쿨라네움이 베수비오 화산 폭발로 폐허가 되어 버렸다. 또 81년에는 역병이 창궐했다. 이런 분위기에서 황제가 되었던 도미티아누스는 황제 숭배 사상을 더욱 강화시킴으로써 이런 어려움과 혼란의 시기를 극복해 내려했던 것 같다.
그는 83년 자기 아들이 죽자, 그 아이를 신으로 만들었고, 아이의 어머니 도미티아는 여신이라고 선언한다. 뿐만 아니라, 자신을 ‘주님이요 신’이라고 자처하면서 자신을 경배하도록 한다. 요한 묵시록은 이런 도미티아누스의 모습을 잘 보여주는데, 권력을 휘둘러 누구나 그 앞에 경배하도록 강요하는 ‘짐승’의 모습과 매우 유사하다(13,15).
② 숫자를 상징으로 보는 견해
사람들은 666을 하나의 상징적인 숫자로 보고 성서에서 666과 연결된 병행 숫자들을 찾아내고자 하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6이라는 숫자를 단순히 “불완전함”을 상징하는 것으로 보는 견해도 생겨났다. 곧, 6이라는 숫자는 12의 절반이고 또 7에서 하나 모자라는 숫자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12가 상징하는 계약을 파기하는 숫자요, 7이 상징하는 완전에서 모자라는 숫자라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6은 불길하고 부족한 숫자, 곧 흉수(凶數)이다. 이 흉수가 셋이나 모였으니 최악의 상태를 말한다. 우리는 하느님과 어린양은 7이라는 숫자가 상징하는 것처럼 언제나 완전하게 행동을 한다. 그리고 12는 하느님의 백성을 뜻한다. 반면에 짐승은 언제나 불완전하게, 나쁘게 행동하는데 7이라는 기간이 아니라 그 반인 3년 6개월 동안 전쟁을 하는 것처럼 그를 따르는 이들도 아주 불안한 상태에 놓인다. 곧 12라는 완전한 숫자의 반인 6이 바로 이들의 표식이라고 보는 것이다. 이제 이 6이 세 번에 걸쳐서 반복된다는 것은 엄청나게 불쌍하고 불안정한 숫자라는 것이다. 결국 짐승과 그를 따르는 이들은 어린 양과 그를 따르는 이들과 근본적으로 차이를 지닌다.
③ 삼각수를 이용한 해석
반 덴 베르그를 시작으로 다소 새로운 해석이 등장했다. 숫자를 문자로 바꾸려 들지 말고 숫자로 남겨 두면서 666이라는 숫자에 담긴 특징을 찾아야 한다고 제안한다. 그는 피타고라스가 “삼각수”라고 정의한 수의 법칙에서 그 답을 찾아낸다. 피타고라스는 1부터 계속 이어지는 정수의 합의 규칙을 찾아냈는데 1+2+3+…+n= 라는 법칙이다. 그런데 이 법칙으로 만들어진 수를 “삼각수”라고 부른다. 특별히 삼각수를 잘 표현해 주는 도형이 있는데 바로 Tetraktys이다.
매 줄에 점 하나씩 늘여가면 계속해서 정삼각형을 이루는데 지금 여기서는 1+2+3+4=10이다. 필로는 이를 통해서 4는 10을 만들어내는 수로 10은 4가 현실화된 수라 하면 4는 10이 될 가능성을 가지는 수라고 본다. 이런 점에서 10과 4는 서로 같은 수로 볼 수 있다. 마찬가지로 55는 10의 삼각수로 10과 대체할 수 있다. 그리고 666은 36의 삼각수이다. 흥미롭게도 36은 8의 삼각수이기에 우리는 666=36=8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묵시 17,11에 “전에는 있다가 지금은 없는 그 짐승이 여덟 번째 임금이다. 그러나 그는 일곱 가운데 하나였던 자로서, 멸망을 향하여 나아갈 것이다.” 반 덴 베르그의 의견에 대한 지지자가 점점 늘어나고 있다. 그러나 여전히 절대적인 지지를 받는 것은 아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666이 누구를 가르키는 지에 관해 살펴보았다. 학자들의 전반적인 견해에 따르면 이 666은 로마 제국의 어떤 황제를 가르킨다고 본다. 물론 그가 정확히 누구를 지칭하는 지에 관해서는 의견이 분분한다. 어쨌든 그가 만약 로마 제국의 황제를 지칭한다고 한다면, 결국 묵시록 전체가 겨냥하고 있는 적대자는 황제 숭배사상을 강요하던 로마 황제라고 볼 수 있겠다.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은 이 황제 숭배사상을 거부하다가 박해를 받았을 것이고, 이런 분위기에서 요한은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희망을 가지고 그 어려움을 꿋꿋히 이겨내도록 촉구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곧 오실 것이기 때문이다.
5) 새 하늘과 새 땅
하느님이 아담에게, 또 노아에게, 그리고 아브라함에게 맺었던 약속 가운데 땅이라는 주제가 묵시록에서 다시 등장한다. 복음서에서 예수는 이것을 하느님 나라라고 표현한다. 곧, 예수와 더불어 가까이는 와 있지만 아직 완전히 도래한 것은 아닌 그 하느님 나라가 바로 묵시록이 이야기하는 새 하늘과 새 땅이라는 말이다.
사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하느님 나라, 새 하늘과 새 땅을 오랫동안 기다려왔다. 하느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했던 땅은 단순히 팔레스타인에 있던 땅이 아니라, 바로 이 하느님 나라였기 때문이다. 곧, 하느님이 약속했던 나라는 바로 아담이 원죄를 지어 쫓겨났던 그 에덴동산, 그래서 다시금 들어가야 할 그 영원한 나라였던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 점을 지적해야 한다. 바로 이 새 하늘과 새 땅이 이 땅에 도래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이 세상의 고통을 피해 저 세상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예수 재림을 통해서 이 땅에 드디어 새 하늘과 새 땅이 열린다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 중요한 점을 발견하게 된다. 바로 내가 악의 세력과 투쟁하고 있는 바로 그 자리에 새 하늘과 새 땅이 도래한다는 사실이다. 이 때문에 우리는 내가 발 딛고 살아가고 있는 그 삶의 자리를 외면하거나, 피하려 해서는 안 된다. 묵시록에 나오는 흰 옷을 입은 사람들처럼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따라 자신에게 주어지는 어려움, 십자가를 기꺼이 지어야 한다. 그렇게 해서 우리들의 흰옷을 피로 물들일 때 우리 모두는 새 하늘 새 땅의 백성이 될 것이다. 요한 묵시록은 그 숫자가 144,000명이라고 전한다.
여기서 우리는 144,000명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살펴보아야 한다. 이 숫자는 12×12×1000으로 완전한 숫자를 의미하는데, 바로 세상 모든 이들을 상징한다고 할 수 있겠다.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이 아담의 모든 후손들, 곧 세상 모든 이들이 이 나라에 들어가기를 바라고 있다. 또 그렇게 할 것이다. 왜냐하면 하느님은 아브라함에게 세상 모든 이들이 그를 통해 축복 받을 것이라고 약속하셨기 때문이다. 하느님은 당신 약속을 지키시는 정의로운 분, 약속에 성실한 분이기 때문에, 세상 모든 이가 당신께로 나아가기를 지금도 희망하고 계신다. 바로 이 때문에 우리는 부족한 모습을 지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느님께로 나아갈 수 있게 된다.
나가면서
요한 묵시록은 현세의 어려운 상황을 헤쳐 나가려는 그리스도인들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전달하려 한다. 하느님은 성실한 분이시고, 결코 당신 약속을 어기는 분이 아니시니, 진리를 실천하다가 박해를 당하거나, 어려움을 겪을 때, 하느님이 계시지 않는다고 느껴질 때 두려워하지 말고 하느님을 찾으라는 말을 전하고 있다. 이것은 단순히 아무렇게나 살아도 하느님이 다 알아서 해 주신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또한 사람들로 하여금 현세를 피하게끔 하는 책도 아니다. 오히려 우리로 하여금 참되게 현세 삶을 살아가도록 이끌어 주며, 올바른 삶의 태도로 인해 겪게 되는 여러 가지 고통을 이겨내도록 이끌어 준다. 이를 통해서 우리 모두가 마지막 날에 영광스러운 화관을 쓸 수 있도록 이끌어 준다.
여기서 우리는 무엇이 올바른 종말론이고, 무엇이 그릇된 종말론인지를 분별할 수 있는 중요한 판단 기준 하나를 발견하게 된다. 바로 묵시록이 전하는 종말론의 두 가지면, 곧 종말에 대해 희망해야 한다는 점과 그 희망으로 현실에서 정의를 실천하며, 진리를 추구하고 살아가야 한다는 점 가운데 어느 하나를 부인하면, 잘못된 종말론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언제나 희망을 가지고 종말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이지만, 그 희망은 지금 이 자리를 피하려는 희망이 아니라, 오히려 이 자리의 고통을 분명히 이겨낼 수 있으리라는 희망임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종말론에 대해서는 어느 시대에나 나타나고 있는 것 같습니다.
1994년도에 있었나요, 대표적인 종말론으로 우리들에게 큰 혼란과 불안을 줬던 다미선교 - 뻥이었잖아요... 우리들에게 2천년을 면면히 이어오는 정통 가톨릭을 부정하면 안 됩니다. 믿으셔야 됩니다.
최근 종말론 변형 교회로 우리 성당을 파고드는 신천지 교회에서는 요한묵시록에 나오는 144,000명만 구원받는다고 혹세무민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144,000명만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까? 성경을 비틀어 해석하는 허무맹랑한 이 교회에 유혹받아 가시면 안 됩니다. 성경 공부하자고 꼬득여 간다는데 성경공부는 우리들이 다니는 성당에서 하시면 됩니다. 성당이나 평화방송, 평화신문, 가톨릭신문 등을 통해서도 할 수 있는 성경공부입니다. 하느님은 일부만 구원받기를 바라지 않으시고, 모든 민족이 예수를 믿음으로써 구원 받기를 원하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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