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참된 발전은 어디에서 출발하는가? 그것은 자기 자신에 대한 올바른 인식에서부터일 것이다. 한 인간의 온전한 '자기인식'은 다른 모든 사물과 정황에 대한 올바른 사고의 방향과 방법의 열쇠가 된다. 교회의 참된 발전도 역시 교회의 올바른 자기인식에서부터 기대될 수 있는 것이다. 거의 2,000년 동안 수 많은 세대들을 통하여 교회는 자기본질과 자기인식이라는 물음과 대답을 끊임없이 던져왔고, 지금도 동일한 문제로 몸부림치고 있다.
한스 큉(Hans Kung)에 의하면 교회자체가 인간을 위한 인간의 것이요, 끊임없이 변하는 인간세계의 반복없는 현재 안에 존재하는 것인 이상, 교회의 자화상이라 할 수 있는 교회론도 역시 본질적으로 역사적인 제한을 받는다. 이러한 설명은 서로 다른 장소, 서로 다른 언어, 서로 다른 상황 속에서 새롭고도 다양한 교회론이 요구될 수 있음을 시사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교회론은 끊임없이 변하는 역사적 상황에 대한 응답인 동시에 요구인 것이다.
필자는 지금 하나님과 하나님 자신의 계시보다는 인간에게 더 집중하는 위험에 빠진 근대 개신교 신학의 조류에 저항했던 한 신학자를 언급하고자 한다. 성경의 권위를 성경비평학에 양도해 버린 자유주의 신학의 물결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토대를 둔 신학을 정립하려고 몸부림쳤던 예언자적 신학자인 바르트가 바로 그이다. 특히 교회가 갖는 역사성을 고려해 볼 때에, 당시 시대적인 변황 속에서 사색하며 행동 속에서 신학을 보여 주려했던 그의 교회론을 연구해 보는 것은 실로 의미깊은 일일 것이다. 바르트의 교회론은 당시의 시대적 상황이 던지는 실제적 물음에 대한 구체적인 응답으로서 가치가 있다. 그의 생애를 통해 일어나는 인식과 사고의 전환은 그가 이해하고 있는 '교회'에 대한 사고의 다양한 통찰을 가져다 준다.
바르트는 시대가 교회와 신학에 던지는 질문에 '수용'과 '행동'으로 응답하려 했다. 최소한 당시의 상황 속에서 교회와 신학이 걸머져야 할 '응답'의 과제를 성실히 수행하고자 한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몸부림 안에는 현대교회가 인식해야 할 '자기인식'의 방향과 지향해야 할 목표의 방향성이 암시되어 있다는 확신을 갖고서 본 연구에 접근하고자 한다.
B.연구방법과 범위
필자는 바르트의 교회론의 온전한 이해를 위해 제 II장에서 바르트의 생애 속에서 나타나는 사건들과 상황의 변화 속에서 맞물려 발전되어가는 교회이해의 변화과정을 세 단계로 나누어 살피고자 한다.
제 III장에서는 [교회교의학] IV/1,2,3에 나타난 교회론의 이해과정을 교회공동체의 회집(Gathering), 건립(Upholding), 보냄(Sending)이라는 순서에 따른 항목을 따라 성실하게 전달하는 데 주력하여, 바르트의 입장에 순수하게 접근하고자 한다.
제 IV장에서는 이러한 바르트의 입장에 근거하여 "그의 교회론이 현대교회에 줄 수 있는 방향성은 무엇이 있겠는가?"라는 질문에 접근하여 나름대로 평가를 내리고자 한다.
마지막 제 V장에서는 내용을 최종적으로 요약,정리하여 평가해 보고, 결론을 맺고자 한다.
II. 바르트의 교회론의 발전이해
바르트의 신학은 그가 처했던 시대적 정황과의 관련성 속에서 수정, 발전되었기 때문에, 그의 교회론도 역시 이와 맞물려 해석되어질 때 이해될 수 있다. 그러므로 본장에서는 당시 시대적 필요성과 함께 그의 전 생애에 걸쳐 일어난 신학적 전제의 변천 속에서 그의 교회론에 대한 견해를 세 가지의 시기로 나누어 살펴보고자 한다.
A. 초기의 교회이해(1913-1920)
20세기의 위대한 신학거장인 칼 바르트(Karl Barth)는 1886년 5월 10일 스위스 바젤에서 태어났다. 바르트의 아버지인 프리츠 바르트(Fritz Barth, 1856-1912)는 라이트나우에서 6년간 목회생활을 하고 바젤에서 목사 양성소 강사를 역임한 후, 1889년부터 수도인 베른(Bern)대학에서 교회사와 신약성서 교수로 활동하게 되었다. 그로 인하여 바르트는 어린 시절 대부분을 베른에서 보내게 되었다.
1904년 대학입학 자격시험에 합격한 바르트는 베른대학에 입학하여 신학을 공부하게 되었다. 계속하여 당시 자유주의 신학 중심지들인 베를린, 튜빙겐, 마부르크에서 리츨, 하르낙, 헤르만, 트뢸취 등 자유주의 신학자들로부터 교육을 받은 그는 신학을 '종교적 인간학의 방향'으로 이해하고 있었다. 즉 하나님과 그의 계시보다는 인간과 그의 종교적 경험을 더 강조하는 낙관적인 입장을 취하면서, 자유주의 신학, 문화개신교, 신개신교로 일컬어지는 현대학파의 충실한 추종자로 자신을 확인하였다. 바르트는 이런 신학의 영향 아래서 교회를 이해했다. 즉 그는 교회를 인간의 종교적 도덕적 개선을 위해 그리고 사회적 상황과 조직의 개선, 변혁을 위해 존재하는 교육적인 기구로 생각하였다.
그러나 바르트가 스위스 자펜빌(Safenwil)에서 목회하던 시절(1911-1921)에 그의 삶과 신학적 사고에 커다란 전환을 가져오게 되었다. 그 전환은 1914년 제 1차 세계대전이라는 파국적인 사건이 계기가 되었는 데, 이는 바르트로 하여금 지금까지 물려받았던 자유주의 신학과 급격히 결별하게 만들었다. 빌헬름 II세의 전쟁정책을 지지하는 선언에 93명의 독일 지성인들이 서명하였을 때, 당시 바르트의 스승과 선배들 대부분이 지지자의 대열에 참여한 것이었다. 바르트는 더 이상 그들의 윤리와 신학을 신뢰할 수가 없었다. 지금까지의 인간에 대한 낙관적인 생각에 대해 회의를 갖게 되면서부터, 하나님이 전혀 새롭게 다시 진지하게 여겨져야 된다는 관점이 생겼다. 즉 인간 중심적인 사고로부터, 신 중심적 사고 방식으로의 전환을 가져오게 된것이다.
이것은 바르트로 하여금 성서를 연구하게 하였고, 결국 그의 첫번 째 대작인 '로마서 주석'이 출판(1919) 되었다. 여기서 그는 낭만주의, 이상주의, 경건주의 및 종교사회주의와 논쟁하고 그 시대와 교회를 향해 날카로운 비판을 하였다. 즉 그는 당대 교회의 타락한 현실을 비판적으로 묘사하였다. 한때 교회를 세우신 하나님이 이젠 교회를 버리셨기 때문에, 교회는 심판 앞에 서 있고 궁지에 빠져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교회의 궁지는 교회의 잘못 때문인 것이다. 왜냐하면 교회가 자신의 사역 속에서 하나님만이 유일한 통치자가 되길 원하신다는 사실을 간과하고, 자신의 의지와 노력을 앞세웠기 때문이다. 이것은 결국 하나님의 사역을 방해한 결과를 초래한 것이다. 바르트는 참된 교회를 유기적인 관계, 살아있는 친교와 공존으로 이해했다. 즉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분리가 아닌 연대성을 갖는다는 것이다.
결국 이 시기의 바르트는 교회를 '공동체'로 이해하고, 교권계급적인 로마 카톨릭교회, 인본주의적인 신개신교주의 교회 그리고 개인주의적인 경건주의 교회에 대항하여 공동체로서의 교회상을 부각시켰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몸'사상과 '하나님 나라' 사상에 기초한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 세상 및 인간 간의 상실된 유기적 일치관계를 다시 회복하는 것이요, 지상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재건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그리스도의 출현 속에서 빛나고 고난절에 가능하게 되었고 부활절에 현실화 된 것이다. 이러한 하나님 나라의 관점에서 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유기체요 그 공동체이다. 그리고 이 교회는 오고 있는 하나님의 세계의 운동과 깊이 관련되어 있다.
B. 변증법적 교회이해(1921-1931)
이제 로마서 주석 1판을 수정하면서부터 바르트는 신학의 새로운 전환을 가져오게 되었다. 로마서 주석 2판에서 새롭게 수정,발전된 관점은 먼저 그가 보편주의로부터 결별하여 이제는 하나님-세계-인간의 관계를 실존적인 관계로 해석함으로써 개인이 하나님과 맺는 관계를 강조했다는 데에 있다. 그리고 그가 사용한 '유기적'이라는 개념이 사라지고, 그 대신에 '불가시적'이라는 개념이 등장하였다. 또한 2판은 오버벡(F.Overbeck)의 영향에서 유래한 초시간적인 '원역사(原歷史)'의 개념을 사용하면서, 종말론에 대한 개념도 수정하였다. '부활의 미래'는 시간 속에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모든 시간의 한계와 지양이 되었다. 결국 기독교와 신앙은 역사로부터 설명될 수 없다는 것이다.
이 시기에 바르트가 이해하였던 교회도 역시 역사적인 실체라기 보다는 비역사적 실체이다. 이 교회는 기적, 신앙, 회개, 은총, 죄인들의 교회로서, 오직 하나님에게만 알려져 있는 것이다. 이 교회는 불가능한 가능성으로서 존재하고, 죽음으로써 살며, 심판을 받음으로써 은총을 경험하게 되는 역설적인 존재, 변증법적 실체이다.
즉 바르트는 변증법적인 신학적 사고를 통해 하나님에 관한 모든 사고와 모든 신학의 근본문제에 직면하게 되었다. 그것은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죄인된 인간이 창조주와 피조물의 관계 안에서 마주 서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바르트는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끊임없는 '위기'라 생각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 위기는 사람, 세계, 종교, 교회 등 모든 것이 하나님의 말씀의 심판과 명령 아래 놓여 있다는 점에서 심판을 의미하고 있다.
교회는 죄인들의 교회이며, 오직 용서 속에서만 존속할 수 있고 오직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리스도 안에서만 구원을 발견할 수 있는 '십자가 아래의 교회', '죄인들의 교회'이다. 이로부터 그는 주도적으로 말하고 행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부여된 그리고 말씀된 것으로부터 듣고 증언하는 교회, 즉 '하나님의 말씀 아래 있는 교회'를 강조하기 시작했다.
'하나님의 말씀의 신학'과 관련되어 그는 변증법적 교회관으로부터 결별하게 하면서, 동시에 교회를 하나님이 설립한 것으로 긍정적으로 이해하기 시작하였다. 바로 이 교회는 하나님의 은총이 내려지는 장소로서, 은총의 자리와 수단으로서 창조되었다. 그리고 바르트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계약에 근거한 '계약의 개념'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었다.
C. 기독론적 교회이해(1932-1968)
바르트는 1차 세계대전 후 일어난 신학적 위험성과 혼란에 맞서서 투쟁하였다. 즉 국민교회라는 개념을 비판하면서, 계시의 개념을 인간의 실존, 질서, 국가, 민족 등과 같은 어휘들과 연관시키려는 모든 신학적 시도들을 우상숭배적 위험이라고 말했고, 모든 종류의 자연신학과 분리하여,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만을 의지할 것을 주장하였다.
이 시기에 바르트의 신학적 인식의 전환은 페터슨(E.Peterson)의 비판과 안셀름(Anselm von Canterbury)의 사고방법론 - 지성을 추구하는 신앙 - 을 통하여 이루어졌다. 그리하여 그의 [교회교의학] 속에서 '변증법적인 사고' 대신에 '유비론적 사고'가 대체되기 시작했다. 하나님의 말씀은 이제 예수 그리스도라는 구체적인 용어로 표현되었다. 바르트는 이제부터 하나님과 인간의 만남이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이루어질 수 있음을 말하였다. 그가 이해한 종말론도 역시 수정되었는데, 그는 역사적 사건의 의미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재평가하였다. 그의 이러한 이해 가운데 교회는 '중간기(zwischen den zeiten)에 있는 그리스도의 나라'로, '예수 그리스도의 승천과 재림 사이의 시간에 있는 그리스도의 나라의 실존형태'로 파악되었다.
바르트는 이러한 그리스도론적 집중에 의해 화해론의 내용을 규정, 제한하고, 또 그 안에서 교회론의 내용도 규정, 제한했다. [교회교의학] IV/1-3에서 전개된 교회론은 바로 그리스도론 안에서 이해되고 있다. IV-1에서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칭의받은 전 인류의 선행적 묘사'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지상적-역사적 실존형태(earthly-historical form of existence), 즉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규정된다. IV-2에서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일어난 전 인류의 성화의 선행적 묘사'로서, '성도의 교제'라고 규정된다. IV-3에서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일어난 전 인류의 소명의 선행적 묘사'로서,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소집된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규정된다. 이처럼 그는 그리스도론 안에서 교회의 존재를 삼중적으로 정의하고 있다.
III. 교회 교의학에 나타난 바르트의 교회론(IV/1-3)
바르트는 방대한 저작인 [교회교의학]에서 교회론을 화해론의 빛 안에서 조명하고,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모든 것- 인간,자연,세계 -을 하나님과 화해된 관계 안에서 다시 새롭게 조명한다. 그는 하나님의 삼위적 행동 안에 있는 교회의 질서, 소명, 존재 등을 조명한다. 비록 교회가 하나님의 나라와 동일시되진 않더라도, 바르트에게서 교회는 '하나님의 나라의 선행적 형태'로 인식된다. 그는 여기에서 성령 안에서 이루어지는 공동체의 회집, 건립 그리고 보냄을 다룬다.
A. 성령과 성도의 공동체의 회집(The Holy Spirit and the Gathering of the Christian Community...IV/1)
바르트에 의하면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가 지상적-역사적 실존형태인 그의 몸된 교회를 갱신하고 일깨워 가는 능력이다. 바르트는 교회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이라는 신적 계시 아래서 이미 의도된 공동체의 회집임을 말한다. 그러므로 그는 교회가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게 된 전체인류의 선행적 묘사(the provisional representation)임을 강조하기에 주저하지 않는다. 이미 이러한 바르트의 전제는 그의 교회론이 기독론과 화해론의 밀접한 조명 아래서 비추어 지고 있음을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1) 성령의 사역(The Work of the Holy Spirit)
바르트는 그의 신학을 정립할 때에 기독론을 수직선에, 인간의 죄론을 수평선에 비유하였다. 수직선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은총의 역사'라면, 수평선은 그러한 '하나님의 은총의 대상으로서의 인간들과 인류'이다. 여기에서는 하나님의 은총이 인간들에게 베풀어지는 객관적인 면과 인간들이 이 은총에 능동적으로 참여하게 되는 주관적인 면이 동시에 포함되어 있다. 그는 교회 안에서 이러한 '하나님에 의해 성취된 객관적 화해가 개개인에게 주관적으로 적용되는 일'이 일어난다고 주장한다.
바르트는 화해의 신적 행위 안에 능동적인 인간의 참여가 요구되고 있음을 강조한다. 여기에서 다루어지는 인간은 본래적으로, 심지어는 현실적으로 다른 인간들과 차이가 있는 것이 아니라, 다만 믿음에 의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인간으로 그리스도와의 특별한 관계 안에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가 하나님과 함께하는 세계의 화해의 역사라는 사실이 예수 안에 있는 인간들에게 미묘하고도 특별한 위치의 가치성을 제공해 준다.
바르트에 의하면 죄인이며 타락한 인간은 하나님의 은총 안에 능동적으로 참여할 수 없다. 만일 그러한 일들이 교회 공동체 안에서 일어나고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일깨우시는 능력에 기초한 것일 뿐이라는 것이다. 이 성령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죄인이며 타락한 인간을 하나님의 은총에 능동적으로 참여할 수 있도록 새로운 인식과 능력과 자유함을 공급해 주는 주의 영인 것이다. 그러므로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 자신을 계시하며 증거한다. 즉 성령은 그리스도 자신의 진정하고도 효과적인 자기증거, 자기현재화, 자기전달이며, 이러한 일을 통하여 성령은 그리스도인들을 그에게 부르고 모으며 조명하고 성화하는 것이다.
우리는 성령이 그리스도에 의해서 보내심을 입었으며, 인간에게 임재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즉 교회 공동체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거룩성'에로 일깨움을 받으며, 그와의 교제에 들어가게 된다. '성령을 믿사오며'(credo in Spirit Sanctum)라는 신앙고백은 그 분과 맺는 공동체의 진정한 연합과 그 분과 맺는 성도 각 개인의 연합에 대한 고백이다. 바르트는 이 고백 속에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공동체의 독특한 위치가 포함되어 있음을 암시한다.
2) 공동체의 존재(The Being of the Community)
바르트에 의하면 교회 공동체는 성령의 사역으로서 인간활동의 한 형태이므로 불가피하게 역사성을 갖게 된다. 바르트는 교회의 존재를 언급할 때, 존재(being)와 행위(act), 본질(essence)와 실존(existance)의 구분을 포기한다. 그에게는 공동체의 존재가 행위이며, 본질이 곧 실존인 것이다. 이 공동체는 언약의 주인 그 분의 신실함 속에 맺혀진 모든 창조물의 첫 열매들과 같은 인간들의 회집인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의 존재는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권위 아래서 말씀 안에 있는 그리스도의 사건에 대하여 하나의 공통된 응답으로써 공동체의 실존을 형성해 갈 때 존재하는 것이다.
바르트에 의하면 교회는 역사성을 가지고 인지될 수 있는 가시적인 교회(ecclesia visibilis)이다. 그러나 동시에 성령의 사역으로서의 이 공동체는 불가시적인 교회(ecclesia invisibilis)이기도 하다. 그러나 불가시적인 것의 존재는 가시적인 것의 행위로 드러날 수 밖에 없다. 바르트는 이러한 측면에서 공동체의 불가시성과 더불어 지상적-역사적 실존형태(earthly-historical form of existence)로서의 교회를 강조한다.
바르트에 의하면 공동체의 회집(gathering), 유지(maintaining), 성취(completing)는 하나님 자신의 일이며, 하나의 영적 실체이다. 그것은 믿음이 아니고서는 인식할 수 없는 불가시적인 것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바르트는 어떠한 구체적 형태로서의 공동체 자체가 신앙의 대상일 수는 없다고 경고한다. 가시적인 것은 불가시적인 것을 증거할 뿐이다. 그렇지만 다른 한편으로 바르트는 오직 교회가 성령의 일깨우는 능력에 의해 생명을 갖게 되며, 하나님을 위해, 그 분의 뜻을 따라 순종에로 부름을 받는 '예수 그리스도 자신의 지상적-역사적 실존형태'임을 강조한다.
바르트는 이제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으로 설명해 간다. 교회는 성령의 일깨우는 능력에 의해 생성되고 갱신되어 가는 그의 몸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고난받고 부활하여 천상적-역사적 실존형태(heavenly-historical form of existance)로 존재하지만, 꼭 그 안에 갇혀 있는 것은 아니다. 그는 동시에 자신에 의해 창조되고 다스려지는 '지상적-역사적 존재형태(earthly-historical form of existance)' 안에 존재하며, 그것이 바로 그의 몸으로서의 교회 공동체인 것이다. 그는 이 공동체의 머리로서, 그의 몸과 더불어 존재한다. 그는 교회의 머리이며, 동시에 몸 즉 교회이기도 하다.
바르트에 의하면 교회는 부활절을 뒤로하는 '이미'(already)와 최후의 날(the Last Day)를 향해 나아가는 '아직'(yet)의 긴장 속에서 그의 지상적-역사적 존재형태로 살아계신 주 예수 그리스도 자신에 속해 있다. 그는 교회의 기초와 신실성과 지속성은 다만 예수 그리스도의 살아계신 말씀과 선택과 결정 속에 놓여 있는 것이라고 강조한다. 교회는 그리스도에게 속해 있기 때문에, 그것은 어떤 반복된 실수나 무력에 의해서 파괴될 수 없으며, 이 세상의 역사 속에서 항상 구체적인 형태로 존재하고, 앞으로도 항상 존재할 것이다.
바르트의 '그리스도의 몸' 개념은 공동체의 존재개념을 믿음 안에서 가시적인 것으로 인식한 것이다. 바르트는 이제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 안에서 '교회'(ecclesia)에 주어진 네 가지 속성들의 분석형태를 통하여 이 개념을 해석해 가고자 한다. 그것은 곧 교회의 통일성(Una), 거룩성(Sancta), 보편성(Catholica), 사도성(Apostolica)이다.
a. 교회의 통일성(Credo unam ecclesia)
바르트에 의하면 성도들은 오직 하나의 교회를 믿는다. 그것은 다수의 공동체 속에서도 오직 하나의 통일체로서 공동체의 존재 안에 속해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는 교회의 통일성이 성부 하나님과 성자 예수 그리고 성령 하나님의 삼위적 속성에 예속되어 있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동일하게 그를 알고 고백하는 인간들의 회집인 그의 공동체도 역시 하나일 수 밖에 없다. 바르트는 여기에서 이러한 이유로 몇가지 결론을 추출해 낸다.
첫째, 가시적, 불가시적 교회는 결코 둘이 아니며, 하나의 지상적-역사적 교제이자, 동시에 위로 감추어진 하나의 초자연적 영적 교제라는 점이다. 가시적인 것은 전적으로 불가시적인 것으로부터 산다. 그 반면에 불가시적인 것은 가시적인 것에 의해 대표되고 발견되어진다. 그러나 바르트는 양자가 서로 분리되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며, 그들의 통일 속에서 한 몸, 즉 한 분인 살아계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지상적-역사적 존재형태임을 주장한다.
둘째, 전투적인 교회(ecclesia militans)와 승리의 교회(ecclesia triumphans)도 역시 둘이 아닌 하나의 교회이다. 바르트에 의하면 교회의 승리는 '그리스도와 함께'(with Christ) 있다. 몸의 머리된 그와 함께 있으므로 교회는 전투하는 교회로부터 아직까지 감추어져 있는 영광에 참예한다. 바르트는 승리의 교회 안에서 있는 전투적인 교회도 이미 종말로 존재하는 성취의 영역속에 자신의 성취를 함께 드러낸다고 한다.
세째, 그리스도 이전의 교회 전(前) 역사 속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과 오순절을 토대로 도래한 성도 공동체는 결코 두 형태나 두 양식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가 그의 지상적-역사적 실존형태를 갖는, 하나의 분리될 수 없는 공동체인 것이다. 성도의 공동체로서의 교회와 이스라엘은 모두 그의 소유이며, 그의 몸일 뿐이다. 한 사람 안에서 그 자신이 교회의 주인 것처럼 그는 이스라엘의 고난받은 메시야이며, 이스라엘의 메시야인 동시에 교회의 부활의 주가 된 것이다.
여기에서 바르트는 구약과 신약이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하는 하나의 역사, 한 하나님의 한 계시이며 증언임을 강조한다. 그는 이러한 통일성을 부인하려고 하는 것은 결국 그리스도 예수를 부인하는 것이 된다고 경고한다.
네째, 우리는 지역적으로 분리되었거나 역사적인 시기를 달리하는 모임들의 다수적 개념에도 불구하고, 성도의 교회들이 하나의 통일체라고 말할 수 있다. 바르트는 여기에서 교회 공동체가 불가시적이며 동시에 가시적 존재성을 갖는 구체적인 회집의 사건임을 강조한다. 즉 서로 다른 시간과 공간 속에서 다양한 특성을 갖는 공동체들이 일어나겠지만, 그들은 공동체의 주로 말미암아 지시된, 하나의 성취된 공동체임이 분명하다는 것이다.
바르트에 의하면 공동체는 서로 상이한 지역성에도 불구하고, 그 안에서는 공동체의 통일성이 증언되며 확증될 수 있어야 한다. 하나의 교회는 총체성(totality) 안에서 개별적 공동체로서 각기 존재한다. 주는 그의 영으로 인하여 그에 의해 모여진 모든 공동체 안에서 예언적이고도 사도적인 말씀으로 자신을 증언한다. 그는 모든 공동체의 통일성의 기초요, 보증이 된다.
바르트는 모든 기독교인들의 종파성에 의한 그룹화를 지적한다. 그러나 바르트는 이러한 각 부름은 그로부터 출발하여 하나의 교회, 즉 예수 그리스도 공동체의 통일성을 향해 뻗어나가는 과정의 출발이어야 함을 강조한다. 그것은 타교회에 대해 배타적이고 고립적인 자기의 주장을 포기하며, 오직 하나의 교회를 향해 나아가는 겸손한 출발인 것이다. 이러한 실제적인 교회의 통일성은 다소 간의 차이는 보이더라도 확실히 가시적일 수 밖에 없다.
b. 교회의 거룩성(Credo sanctam ecclesiam)
거룩은 그 기원에서 '분리시키다', '구분하다', '구별하다'의 의미를 갖는다. 그러나 이 구별과 분리는 하나님에 의해서 이루어 진다. 바르트는 우리가 'credo ecclesiam'에 주의해야함을 지적한다. 이 고백이 'credo ecclesiam'이지, 'credo in ecclesiam'이 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교회 자체를 거룩한 교회로 신앙할 수는 없다. 여기에서 바르트가 말하는 교회의 거룩성이란 교회의 천상적 머리인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성의 반영이며, 오직 그의 성령에 의해 회집된 공동체 안에 그리스도가 임재한다는 사실에 기인하는 것이다.
바르트는 여기에서 교회의 거룩성과 관련하여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비판의 면을 다룬다. 긍정적인 면에서 볼 때, 첫째 예수 그리스도의 몸으로의 그 공동체는 거룩하다. 그러나 그것은 머리인 그분의 거룩성 때문이며, 그와 연합하고 있는 통일성 속의 거룩이다. 그런 의미에서 믿음으로 일깨워지는 것과 공동체로 덧붙여지는 것은 하나의 일이며 동일한 일이다.
바르트는 오직 하나의 분리만을 인정한다. 그러나 그것 조차도 '성도의 교제'(communio sanctorum)를 위한 분리이며, 개별적인 신앙의 일깨움과 공동체로 회집시키는 목적으로 인한 분리이다.
둘째, 그 공동체의 거룩성이 본질적으로 세속으로부터 구별되어 있는 것인 만큼, 공동체의 거룩성은 결코 파괴될 수 없다. 왜냐하면 이 거룩성은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비롯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르트는 교회가 공동체의 주인 그리스도의 비판의 불 가운데 있음을 강조한다. 그것은 자기수정, 자기연단을 요구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것을 깨닫는 교회는 마땅히 부단한 갱신을 시도하는 교회로서 존재할 수 밖에 없다.
바르트는 공동체의 거룩성이 전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성의 반영과 성령의 은혜로 이해된다는 사실로부터 몇가지 비판적인 결론을 도출한다. 첫째, 교회의 거룩성이란 능동적인 것이라기 보다는 수동적인 거룩성이다. 교회의 활동을 거룩하게 만드는 것은 교회 자체가 아니다. 바르트에 의하면 공동체의 거룩성은 그에게 의존해 있으며, 그분은 항상 주(主)이며, 공동체의 행위의 거룩성의 수여자이다. 그들은 다만 그리스도의 증인으로서 응답하는 활동 속에 있을 뿐이다.
둘째, 공동체의 거룩성은 반드시 어떤 사람이 이 공동체와 연합하고, 그의 일원이 되었다는 사실에 일치하여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여기에서 바르트는 공동체 안에 참예하면서도 확증이 없고 세례받지 못한 무리들을 염두한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거룩한 공동체의 정체성을 알고 있는 만큼 성도의 공동체도 신뢰할 수 있으며, 그 만큼 우리는 공동체의 거룩한 일원으로서 우리와 다른 성도를 함께 신뢰할 수 있다고 바르트는 주장한다.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는 것보다도 더 나은 어떤 방법으로 우리의 거룩성을 실제로 보일 수는 없다.
세째, 공동체에 대한 복종의 문제가 불가피하게 대두된다. 이 문제는 결국 공동체의 거룩성과 신뢰의 문제이자 이에 대한 인식의 문제로서, 이 문제는 그의 머리의 거룩성과 관련될 때에만 대답될 수 있다. 공동체는 살아있는 머리의 거룩성에 기초한 것이며, 그분은 공동체를 그의 몸으로 드러내고 공동체 안에서 공동체를 향해 행동하는 분이다. 이러한 사실을 근거로 구성원들은 공동체에 대한 순종의 문제를 수용하며, 인간의 교회 사역의 모든 일을 깊이 고려하게 된다.
c. 교회의 보편성(credi catholicam ecclesiam)
보편적(catholic)이란 형용사는 '일반적인', '인지할 수 있는'의 의미를 갖는다. 그것은 많은 차이들 속에서도 여전히 계속되는 동일성, 지속성, 보편성을 말하는 것이다. 이것을 교회에 적용한다면, 이것은 교회는 항상 모든 곳에서 동일하다는 것과 이 동일성 안에서 인식될 수 있는 성격을 갖는다는 것을 말한다.
바르트에 의하면 교회의 보편성에 대한 고백(Credo catholicam ecclesiam)은 형태적인 변화에도 불구하고 성도의 공동체를 형성하는 본질은 결코 변할 수 없다는 사실을 믿는 것이다. 바르트는 'catholic'을 'eccumenical'의 협소한 의미로 해석하기도 한다. 여기에서 그는 서로 다른 모든 족속, 언어, 문화, 계급, 국가, 사회 등으로 확산되어가는 교회의 의미를 도출하면서, 그곳에서도 역시 교회는 동일하다고 주장한다.
바르트는 이제 Catholic이 갖는 '시대적 확산'의 의미를 다룬다. 바르트에 의하면 교회는 역사 속에 존재하며, 그 자체가 하나의 역사이며, 역사를 만들기도 한다. 그러므로 교회는 지속적으로 변화하는 배경 속에서도 항상 동일한 것으로, 그리고 항상 새로운 형태 속에서도 본질상 자체를 유지하고 있는 것으로 이해된다. 바르트는 교회가 서로 다른 신앙의 개별적 행위들의 총체는 아니라고 하지만, 각 개인들은 개별적 신앙 안에서, 그 신앙을 가지고 공동체 안에 연합한다고 말한다. 각 개인의 신앙은 공동체로부터 비롯되며, 그 위에 세워진다.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 그의 머리와 연합함으로써, 그 공동체는 그의 구성원들에 대해 우위성을 갖는다. 바르트는 이러한 속성을 'catholic'의 의미 안에 포함시킨다.
바르트에 의하면 결국 'catholicam ecclesiam'은 장소, 시대, 사회를 불문하고 본질상 교회 공동체는 하나요 동일하다는 것을 믿는 것이다. 그에 의하면 우리가 믿음에 의하지 않고서는 통일성, 거룩성과 마찬가지로 보편성도 볼 수 없다. 바르트는 공동체 자체의 실제적인 속성인 보편성은 머리되신 예수 그리스도에 의한 것임을 강조한다. 그에 의하면 공동체는 그의 살아 있는 말씀 속의 사건 안에서 형성되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에게로 부름받아 연합된 그리스도의 지상적-역사적 실존형태라는 것이다. 바르트는 그리스도가 하나의, 그리고 거룩한 공동체를 만드는 것처럼, 그는 그것을 보편적인 것으로 만든다고 말한다. 바르트는 그를 믿는다는 것이 결국 수동적이 아닌, '교회의 보편성'에 대한 매우 능동적이고 실제적인 고백임을 강조한다.
d. 교회의 사도성(Creso apostolicam ecclesiam)
바르트는 교회의 통일성(Una), 거룩성(Sancta), 보편성(Catholica), 사도성(Apostolica)이 사실 교회 공동체의 하나의 존재성을 묘사하고 있다고 말한다. 즉 Una는 공동체의 단일성을, Sancta는 이러한 단일성의 기초가 되는 특수성을, Catholica는 단일성과 특수성 속에 지속되는 본질을, 그리고 Apostolica는 더 이상의 새로운 어떤 것이 아니라 하나의 거룩한 보편적인 교회공동체에 대한 구체적이고도 영적인 기준을 제시하는 의미를 갖는다는 것이다. 바르트는 이러한 교회의 사도적 기준이 오직 믿음에 의해서만 보여진다고 말한다.
바르트에 의하면 '사도적'(apostolic)이란 하나의 사건으로서 교회의 존재를 묘사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교회의 사도성이란 사도적 증언이 공동체 안에서 제자직, 들음, 복종 등의 역사로 일어날 때 존재한다는 것이다. 사도들을 부르고 그들을 파송했던 주체는 그리스도 자신이었다. 그들은 그리스도가 교회를 그 위에 세우려 하는 반석이었고, 그의 종들이었다.
바르트는 공동체의 관계 속에서 제자들에게 대표성과 공식적인 권위를 부여해 주는 것은 사실 '봉사의 직분'이었음을 강조한다. 이러한 섬김 안에서 그들은 거룩한 사도가 된다. 주는 그들을 통해 이야기 하며, 그들에게서 들은 이는 주에게 듣는 것이 된다. 이제 공동체와 세상과의 관계 속에 있는 전체적인 책임이 그들 위에 부과되어 있다. 성령의 능력으로 일깨움 받은 그리스도의 지상적-역사적 실존형태인 공동체는 그에 대한 증언이 드러나야만 존재하는 것이 된다. 바르트는 만일 공동체가 예수 그리스도와 사도들과 더불어 함께 한다면, 거기에는 오직 하나의 섬김과 복종의 태도만이 있게 될 것을 주장한다.
바르트에 의하면 '성서의 원리'인 '사도적'이란 말은 십자가에 못박히고 죽은자 가운데서 부활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직접적인 지식을 가졌던 사람들의 증언정신을 갖는 것이다. 바르트는 사도적 공동체가 신약과 구약의 사도적 증언들을 듣고 인식하며 이러한 증언을 공동체 존재의 근원과 공식화된 표식으로 이해하는 공동체여야 함을 강조한다. 그러므로 사도적 교회는 어제나 오늘이나 살아계신 그리스도 예수에 대한 증언으로서 성경을 받아들이고 읽는 교회이다.
바르트에 의하면 성서 그 자체가 공동체를 진정한 교회들로 만드는 것은 아니다. 그는 성서가 단지 훈도, 경외심, 복종을 요구하는 하나의 증언임을 말한다. 성서는 공동체로 하여금 살아있는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게 한다. 그리고 이 때에 성령, 즉 성경의 영의 사역이 일어나게 된다. 그 때에 성경은 공동체의 주의 몸 안에서 역사하며, 교회는 사도적이고 보편적인 교회가 된다.
3) 공동체의 시간(The Time of the Community)
바르트는 공동체의 시간이 첫 번째 예수 그리스도의 파루시아(Parousia)와 두번째 파루시아(Parousia) 사이의 시간이라고 말한다. 그에 따르면 파루시아는 예수 그리스도 자신의 가시적 행위를 나타낸다. 즉 주의 첫 번째 파루시아의 직접적 가시적 현존과 임재는 그가 불경건한 이들의 심판주로서 부활절 이후 40일 간 제자들에게 보였던 것을 말한다. 그리고 두 번째 파루시아는 산자와 죽은 자의 심판주인 그가 그의 계시 속에서 보여주는 궁극적이고 종말적인 임재이다.
바르트에 의하면 주의 공동체는 그의 첫 번째 파루시아와 둘 째 파루시아 사이에 존재한다. 이 공동체의 시간은 '중간기'이다. 이러한 중간기 안에 예수 그리스도는 그의 성령에 의해 불가시적으로 그의 몸인 공동체의 머리로 현존한다. 공동체가 이러한 시간과 움직임 속에 존재한다는 것은 공동체의 약점이자 동시에 강점일 수 있다.
바르트는 공동체가 이러한 '중간기'에 존재한다는 사실의 강점은 이 시간의 출발이 부활에서부터 출발한다는 사실에 있다고 주장한다. 거기에는 그를 직접 보았던 자들의 증언이 있다. 성령의 일깨우는 능력에 의해 공동체는 이러한 멧시지에 대한 믿음의 통일성 안에서 그리스도에게로 모아진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메시지를 듣고, 공동체는 무엇을 기대한다. 즉 부활의 첫 열매인 예수가 모든 산자와 죽은 자에 대한 심판주가 된다는 사실이 공동체에게 믿음을 주며 공동체를 강하게 만든다. 이제 부활의 멧시지를 믿음으로써 일깨워진 그 공동체는 믿음의 앎 속에 존재하며, 그 속에서 공동체는 하나의 거룩하고, 보편적이고, 사도적인 예수 그리스도의 공동체인 교회가 된다.
바르트는 이러한 공동체 존재의 목적론적 방향성에서 또 하나의 강점을 발견한다. 이 공동체는 출발 안에 이미 그것이 기다리는 끝을 그 뒤에 가리키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믿음의 연합 안에서 공동체는 시대와 종족과 언어를 뛰어 넘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게 된 전 인류의 선행적 묘사로 모아진다는 강점이 있다. 공동체는 시작과 종말사이의 시간에 존재한다는 것을 알고 있음으로 인해 유지되고, 지시되며, 방향지워진다.
바르트는 중간기 안에 있는 공동체의 약점은 공동체에게 오직 믿음에 의한 직관력이 요구된다는 것임을 지적한다. 그것의 연약함이 중간기라는 공동체의 시간의 본질 안에 존재론적으로 근거하고 있다. 중간기에 그리스도는 가시적인 현존으로 나타나지 않는다. 바르트는 우리가 이 시간 안에서 첫 증인들의 멧시지를 통하여 들을 수 밖에 없으며, 오직 믿음으로 일깨움을 받는다는 약점을 지적한다.
이제 바르트는 교회 공동체의 시간, 즉 '중간기'가 공동체에게 주는 의미를 질문한다. 그는 이에 대하여 그 시간은 공동체의 회집과 존재와 선교의 시간이라고 대답한다. 또한 그는 이 시간은 예수 그리스도의 첫 째 파루시아와 둘 째 파루시아 사이에서 세상과 더불어 성령 안에서 함께 유지되어야 하는 시간임을 말한다. 여기에서 바르트는 공동체의 생명이 재림의 사건과 더불어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예수 그리스도의 첫 파루시아는 곧 그의 마지막 파루시아와 연결된다. 부활의 아침의 사건은 곧 최후의 나팔소리로 연결되며, 죽은 자의 부활도 이미 지시되어 있다.
바르트는 공동체가 예수 그리스도의 종말의 파루시아 안에서 갖게 될 형태와 외적인 힘과 소망을 이미 갖고 있다고 말한다. 그는 두 파루시아가 그것을 행하시는 한 분의 인격 안에 의존한다고 강조한다. 결론적으로 바르트는 두 파루시아를 동일한 하나의 사건으로 단언하면서, 이러한 종말의 시간을 공동체의 시간으로 해석한다.
바르트는 하나님이 공동체에 대한 자신의 목표를 갖고 있으며, 그에 의해 창조되고 보호되는 세상과 인간을 향해 무엇인가를 기대한다고 말한다. 거기에는 인간을 위한 공간이 있으며, 여전히 남은 잔여의 공간과 존재가 있다. 거기에는 여전히 한 역사가 있고, 하나님 앞에 그리고 그를 향해, 그 분과의 교제를 위한 인간존재의 기회가 있다. 공동체는 이러한 종말의 시간을 소유하고 있는 것이다.
바르트는 이러한 새로운 종말의 시간에 사람들에게 의도된 목적을 다룬다. 바르트에 의하면 하나님은 인간없는 자신을 의도하지 않았고, 인간의 머리 위에서 화해자와 구속자가 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그는 오히려 그의 지상적-역사적 존재형태인 그의 몸이길 원했다. 하나님은 그의 피조물인 인간의 마음으로부터 나오는 찬양을, 그리고 그 자신과 화해된 세상의 깊이에 대한 인간의 감사의 목소리를 듣기 전에 그의 종말적 완성과 성취를 허락치 않았다. 그것은 그의 은혜의 위대함이며, 겸손의 극치이며, 거기에는 우리에게 위탁한 공동체의 진지함이 깃들여 있다.
바르트는 중간기를 성령의 사역을 위한 시간으로, 믿음과 회개, 세상을 통한 복음선포의 시간으로, 그리스도 공동체를 위한 시간으로 강조한다. 이런 의미에서 이 시간은 '은혜의 시간'이다. 하나님은 진정 지상에서 울리는 공동체의 빈약한 찬양(poor praise on earth)를 기대한다. 이 종말의 시간은 세상을 위한 공동체의 시간이 되어야 한다. 그것은 공동체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일어난 칭의의 선행적 묘사로서 아직도 연약하고 적지만 빛을 비추기 위해서이다. 여기에서 바르트는 교회 공동체의 봉사를 강조한다. 그는 우리에게 남아 있는 시간이 공동체의 '봉사의 시간'임을 단언한다.
B. 성령과 교회 공동체의 건립(The Holy Spirit and the Upbuilding of the Christian Community...IV/2)
바르트에 의하면 성령은 주 예수 그리스도가 세상 가운데 그의 지상적-역사적 실존형태인 그의 몸된 교회를 세우는 힘이다. 성령은 교회가 그리스도 안에서 생성되어 모든 인류의 성화의 선행적 묘사(a provisional representation of the sanctification)로 적합한 것이 되게 한다.
1) 진정한 교회(The True Church)
바르트는 화해론에서 다루어야 할 중요한 주제로서 교회공동체의 건립과 그리스도인의 사랑을 내세운다. 바르트는 부활하여 살아 있는 그리스도 예수와 우리가 성화의 원리로서 이해했던 성령의 능력있고 살아있는 가르침이 그리스도인의 사랑과 더불어 교회공동체의 건립을 가능케 한다고 주장한다.
바르트에 의하면 인간의 지상적-역사적 구조물인 교회공동체는 하나님이 그 안에서 성령으로 말미암아 일을 하고 있기 때문에 존재하는 것이다. 진정한 교회 는 실로 하나님이 그 안에서 일하며 거기에는 하나님이 구상하는 인간의 역사가 있다는 두 가지 사실 안에서 일어나며 유지되고 생존하게 되는 것이다.
바르트는 교회 자신의 제도와 전통 그리고 개혁적 요소와 같은 것이 진정한 교회의 보증이 되는 것이 될 수 없다고 경고한다. 그에 의하면 교회는 성령의 능력 안에서 세워지고 전통과 변화와 혁신을 통해서 빛나게 될 때에, 비로소 가시적인 교회가 된다. 하나님의 계시 안에서만 참교회의 가시성이 가능하므로, 참교회도 역시 믿음의 인식 안에서 보여질 수 있으며, 그것은 추상적 개념의 교회가 아닌, 보이는 참교회를 말하는 것이다. 바르트는 성령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일어난 공동체를 인간의 삶과 성화의 선행적 묘사로 만들어가는 힘임을 다시 한번 강조한다.
바르트에 의하면 부활과 재림 사이의 '중간기'(the time between) 안에 있는 공동체의 존재는 그 자체가 목표는 아니다. 참교회의 목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이루어진 모든 인간과 인간의 삶의 성화를 계시하는 것이며, 이것이 공동체에 주어진 증언의 주제이며, 내용이고, 의무이다. 그러나 이 시간 속의 성화는 '잠정적'이며, 그것은 하나님이 공동체 안에서 일하고 있음을 드러내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살아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사건을 통하여 그의 계시가 종결된 것이 아니라 시작된 것을 나타내는 것이다.
바르트는 '중간기' 안에 있는 참교회는 하나의 선행적 묘사로서 항상 '오늘' 존재하는 것이며, 끊임없이 새롭게 갱신되고 유지되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에 의하면 성령은 깨우치는 능력의 힘으로 역사성을 갖는 '사건으로서의 교회'에서 행동하기때문에, 하나님의 백성인 교회공동체 없이 직접적으로 일하지는 않는다. 성화의 선행적 묘사인 참교회는 구성원들의 상호섬김을 통해 성숙된다. 그리고 그것은 하나의 현실적 사건으로서 성화의 완성을 향하여 세워지며, 그 완성은 하나님으로부터 공동체를 향해서 임하는 온 우주의 종말을 뜻한다.
바르트는 여기에서 참교회를 세우는 주체자와 그 사실이 주는 의미를 다룬다. 참교회를 세우는 주체자의 문제에 대해 대답을 찾기위해 바르트는 먼저 이 세움이 일반적인 건축과 다른 차이점을 비교한다. 그에 의하면 일반적인 건축에서는 완성까지 일련의 공정 속에 각 공정마다 완성자가 다를 수 있겠지만, 공동체의 경우는 오직 한 분 만이 다스리는 질서 안에 주님의 목적과 계획이 있을 뿐이다. 그리고 거기에는 이미 세워진 기초 위에 점진적인 세움이 있으며, 완성된 일이란 없다. 모든 각 점진은 이미 성취된 것과 지금도 추구해야 할 것에 대한 일련의 반복을 포함하는 것이다.
바르트는 교회의 진정한 건축자가 오직 하나님 자신이라고 말한다. 하나님이 그의 공동체를 건립한 것은 오직 그의 성령의 능력 안에 있는 인간 예수 안에서 그로 말미암은 것이다. 여기에서 바르트는 공동체가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지속적으로 사도적 가르침 아래 쇄신과 갱신이 요구되고 있음을 지적한다. 공동체는 그 자신이 미래의 심판에 예속되어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공동체는 전 인류의 선행적 묘사로서 자신의 행위와 책임성과 영광이 주어진 자신의 일을 수행해야 한다.
바르트는 공동체 건립의 의미를 '연합'에 둔다. 공동체를 향한 연합은 총체적이며, 온전하며, 비조건적이어야 한다. 그러므로 그것은 형제애 속에서 일어나는 연합이어야 한다. 그런 연합은 견고하며, 자유함 속에서의 연합이며, 타인과 갖는 그의 특수성에 대한 연합이다. 이렇게 할 때, 교회는 세상사 속에 공동체의 존재 의미인 증언을 제시하며 선행적 묘사의 의미를 제시해 줄 수 있는 진정한 교회가 되는 것이다.
바르트는 공동체의 진정성이 공동체의 일반적인 예배로부터 출발한다고 말한다. 공동체가 일깨움을 얻는 것이 예배에서 비롯된 것만은 아니지만, 예배는 공동체 안에서 일어나는 첫 번째의 현상이다. 예배는하나님과 신인(神-人)의 주 그리고 그리스도인의 건립이 다른 사상의 통치와 외견으로부터 구분되어 있는 지점이다. 그들은 특수한 시간과 장소에서, 총체성 속에서 구체화 된 사건 속에 있는 모두로 변한다. 그들은 여기에서 살아 있는 주의 성령의 능력 안에서 그분의 미래적 위엄과 그들 자신의 종말을 함께 바라보도록 부름을 받음으로써, 종말에 공동체를 위해 주어진 그들의 일깨움의 목표와 방향 안에 놓여 있게 된다.
바르트는 그리스도인의 예배 자체가 이미 공동체의 건립이 된다고 주장한다. 그것은 이제 그리스도인들의 매일의 삶의 폭넓은 범주로 퍼지며, 그들 각 개인의 관계 속으로 확산된다. 여기에서 그들의 매일의 언어, 행위, 태도도 폭넓은 변형된 예배로 규정된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예배의 본질은 공동체 속에서 각 구성원들이 위로하며 의지하는 일 속의 교제에 그 중심이 있다. 공동체는 살아 있는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매일의 폭 넓은 범주 속에서 그 자신을 그리스도 안에서 일어난 화해, 칭의, 성화의 선행적 모델로 세상에 증언해야 한다.
2) 공동체의 성장(The Growth of the Community)
바르트는 공동체의 건립을 '성도의 교제'로 해석한다. 교제란 하나의 존재하는 연합의 기초 위에서 많은 사람들이 동일한 연합을 향한 움직임에 참예하는 하나의 행위이다. 이것은 성령의 힘과 작용과 성령에 의해 회집되고 일깨워진 사람들의 일치되는 행위 속에서 일어난다. 그러므로 교제란 이러한 신적이고 동시에 인위적인 일로서 이미 성취된 그 기원으로부터 확실히 드러날 그 목표까지 움직여 간다. 교제는 성취와 성취 사이의 비완성의 영역, 연합과 연합의 비완성의 영역 속에서 일어난다. 그들은 이러한 연합으로부터 또 동일한 연합까지를 전후로 바라보면서 다시 연합하고 함께 행동한다.
성도들은 성령의 교제 안에서 살고 행동하며, 서로의 교제 속에 있다. 하나님의 영원한 선택과 하나님의 사랑이 성도를 만든다. 여기에서 바르는 교회가 '성도의 교제'라고 불려지는 두 가지 의미를 기억해야 함을 강조한다. 한편으로 그것은 성령에 의해 성화된 사람들인 'sancti'의 교제를 가리키며, 또 다른 한편으로 거룩한 관계, 직분, 일에 연합하는 인간의 존재와 행동 속에서 그들을 성도되게 만드는 'sancta' 속의 교제개념이다.
바르트에 의하면 성도의 교제는 이러한 'sancta에 참예하는 sancti 속에 있는 한 사건'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리스도인의 교제인 성도의 교제는 그들의 신앙의 지식과 고백 안에서 일어난다. 그것은 신학과 고백의 교제로서, 그리고 공동체의 기도의 교제, 세상과 관계 속에서 세상의 짐을 지는 교제, 성화된 자신들을 행위로써 증언하는 봉사의 교제, 내일을 바라보는 희망과 예언의 교제로서 일어난다. 무엇보다도 그것은 그들을 모으고 힘을 주며 유지하는 말씀 복음선포의 교제로서, 그리고 예배의식의 교제로서 일어난다. 그러나 '성도의 교제'는 아직도 죄인의 교제 속에 있는 존재와 행위속의 한 사건으로 sancta의 수용과 실행에 관련된다.
바르트는 공동체 건립을 하나의 성장으로 이해한다. '성장'이란 말은 유기적 세계로부터 파생된 이미지이다. 사실상 '성장'이란 말이 건립의 이미지를 명료화한다. 바르트에 의하면 인간의 계획, 언어, 신앙, 사랑, 행위 등은 모두 신적 의지와 질서 안에 포함되어 있음이 사실이다. 성도의 교제인 공동체가 씨앗이나 사람이 자라가는 성장처럼 자란다는 것은 인간의 행위뿐 아니라 동시에 신적인 행위의 전제이다. 이러한 성도들의 교제 속에서 잉태하고 태어나며 살고 행동한다는 것은 시종 적절한 하나의 '성장'인 어떤 것이다.
바르트가 말하는 공동체 안에서 역동하는 성장은 수적 개념보다는 질적인 부분과 관계가 있다. 그리고 그것은 공동체 자신의 교제의 실재화, 즉 거룩한 직분(sancti)에 의한 성도(sancta)들의 일반적인 수용과 훈련과 관련되어 있다. 공동체의 건립의 비밀인 진정한 성장은 외적인 것이 아니라 내적인 부분이며, 높이와 깊이 속에 있는 수직적 성장이다. 우리는 수평적인 확장과 숫적 팽창을 위해서만 수직적 갱신을 추구할 수는 없다. 성도의 교제가 일어날 때만, 그것은 내적, 수직적, 영적인 성령의 적절한 힘이 되는 것이다. 즉 sancti인 그들에게 부여된 거룩한 일을 수용하고 준행함 안에서 성도들이 팽창해 갈 때, 그것은 올바른 힘이 되는 것이다.
지상에서 성도의 교제의 영적, 내적 성장보다 놀라운 것은 없다. 바르트는 교회의 역사 안에서 가끔의 실수와 모순 속에서도 새롭게 그리고 지속적으로 교회의 성장을 가속화하는 힘의 여명을 깨닫는다고 말한다. 그 힘은 세상의 역사를 통해서, 그러나 새롭고도 구별되는 통로 위에서 그 공동체를 인도한다. 성장은 생명의 표현이며, 채워감이며, 상징이다. 공동체 안에서 성령의 일깨우는 능력 으로 일하시는 이가 주 예수임을 명백히 해야 한다. 성도의 교제는 그분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존재하는 것이다.
바르트는 성령이 위로부터 일깨우는 능력이며 하나님으로부터 임하는 능력임을 강조한다. 그는 지상에서 성도의 교제를 생성하고 유지하며, 통제한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지상적-역사적 형태로서 그의 몸인 성도의 교제 속에 존재한다. 공동체의 머리이며 몸인 그는 동일한 한 분이다. 유사하게도 그 안에서 성화된 그리스도인의 생명도 하나이다. 그분과 더불어 그리스도인의 생명은 하나님 안에 감취어져 있다. 공동체는 전능한 능력에 의해 세상 가운데서 하나님과 화해된 새로운 인류로서, 모든 사람들의 성화의 선행적 묘사로서 존재하며 성장한다.
여기에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는 공동체이다'(Jesus Christ is the community)라는 진술을 피할 수 없다. 그러나 바르트는 이 진술이 뒤집어질 수는 없다고 말한다. 즉 '공동체가 예수 그리스도이다'라고는 할 수 없다. 이 사실과 더불어 바르트는 신약의 중심개념인 '하나님 나라'와 관련하여 언급한다.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 세상 안에 성취된 하나님의 주권이며 하나님의 통치이다. 그분 스스로 하나님의 왕국이며, 공동체가 하나님의 나라는 아니다. 여기에 실제적인 자기 정체성이 있다. 즉 하나님의 나라는 거룩한 것이며, 죄인의 교제로서 지상에 있는 성도의 교제가 하나님의 나라는 아니다.
바르트에 의하면 공동체의 천상적 머리인 거룩한 이의 능력 안에서 하나님의 통치는 성취되었으며, 그 능력은 지상의 공동체 안에 내재되어 생명과 성장의 내주하는 능력이 된다. 생명과 성장이라는 측면에서 하나님의 나라는 씨앗과 같이 자란다.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나라를 향해 눈이 열린 인간들의 교제인 공동체가 그를 향해 자라가고 있는 것이 바로 이런 이유에서이다. 결론적으로 공동체는 주가 사심으로 인해 존재하며 전적으로 그의 백성으로서 존재하는 것이다.
3) 공동체의 유지(The Upholding of the Community)
여기에서는 바르트가 공동체의 역사를 은혜로운 '유지'의 역사로 이해한다. 그는 공동체가 그리스도 안에 존재하며, 주께서 공동체의 강함이 된다는 사실이 공동체 유지에 어떤 영향을 주는가 하는 문제를 다룬다. 바르트는 먼저 '성도의 교제'가 갖게 되는 위협을 다룬다. '성도의 교제'는 늘 위험 가운데 있으므로 방어, 보존, 보호를 필요로 한다. 그들은 외적으로는 세상에 의해, 내적으로는 그 자체로부터 위협을 받는다.
a. 외부적인 위협의 유형
외부적인 위협의 첫 번째 유형은 그것이 세상의 압력 아래 있다는 사실로부터 일어나는 것이다. 공동체를 둘러싼 세상은 실력을 행사하여 세속의 정신적, 비정신적 통치권력 속에 적응케 하며, 공동체의 드러나는 특권들을 비본질적인 것으로 만들어 버리고, 결국엔 그 제한적인 부분을 수용케 하려는 것이다. 이것은 '핍박'(persecution)이란 말로서 드라마틱한 용어 만은 아니다. 성도의 교제인 공동체는 아직도 이러한 핍박 가운데 지상 위에 있다. 그리고 '성도의 교제' 자체도 공동체가 위협을 받고 있는 만큼 위협을 받는다.
또 하나의 다른 외부적 위협의 형태가 있다. 그것은 공동체의 존재로 야기되는 방해들을 진지하게 취급 조차 하지 않는 '무관심'이라는 더 무서운 무기이다. 이들은 하나님의 은총, 화해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의 욕구도 없으며, 다만 조용히 그것을 무시해 버린다.
b. 내부적인 위협의 유형
내부적인 위협은 하나의 인간행위인 공동체가 세상의 일부분에 놓여 있다는 사실로부터 비롯되는 문제이다. 바르트는 내부적 위협의 첫번째 유형으로 세속화(secularization)를 지적한다. 이것은 공동체 자체가 스스로 성취된 것으로, 그리고 무죄한 것으로 자신을 간주할 때 일어난다. 세속화는 특별한 철학을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는 표준으로 삼고, 특별한 전통을 자신의 윤리로 삼으며, 독특한 이데올로기를 세상에 대한 자신의 태도로 취하는 것이다.
이것은 공동체의 약함에서도 기인되며, 때로는 강력한 세상에 직면하여 자기 보존의 한 시도로서 회피하거나 후퇴하는 움직임으로 드러난다. 세속화는 공동체가 단지 세상의 한 부분이 되는 과정을 말한다. 그리고 그것은 교회가 단지 세상, 민족, 문화, 국가를 위한 교회, 즉 세계교회, 민족교회, 문화교회, 국가교회가 되려고 할 때 일어난다. 이런 세속화는 육체적 그리스도인만을 구성하게 될 것이다.
바르트는 이러한 부패의 또 다른 형태로 공동체의 '자기 신성화'(self-glorification)를 지적한다. '자기 신성화'의 목적은 스스로 세상 속에서 발전하고 유지하려는 것이다. 자기 신성화의 교회는 섬김과 봉사 대신에 강력한 구조적 힘을 드러낸다. 성령 대신에 자기의 정신을 드러내며, 하나님의 일 대신에 자신의 일을 드러낸다. 신성화는 예수 그리스도의 주권을 교회의 허영심으로 바꾸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인간의 인위적인 형상들처럼 또 하나의 우상을 세우는 것을 의미한다. 결국 세속화와 신성화는 공동체의 끝을 의미하는 것이다.
c. 공동체의 유지의 약속의 근거
바르트는 이러한 모든 위협에도 불구하고 공동체가 결코 파괴될 수 없음을 강조한다. 바르트는 때로 공동체는 세속화와 신성화의 모습을 드러내겠지만, 거기에는 항상 이상한 지속력이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비록 파멸의 음영 가운데 있지만, 결국 그것은 비파멸성의 현재적 지시가 될 것이라는 것이다. 비록 음부의 문이 열릴 것이나, 그것을 삼키지 못할 것이다. 이 말씀은 최소한 공동체 건립과 진리의 표지일 수 있다.
바르트는 이제 공동체 유지의 한 요소로서 '성서'를 다룬다. 지금 우리 시대까지 구약과 신약은 단지 문자적으로만, 그리스도인의 삶의 범주 안에 축소되어 있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것은 지속적으로 살아있는 목소리와 말씀이 되어 실행시키는 힘으로 작용해 왔다. 공동체를 유지하는 것이 성령이지만, 공동체를 방어하고 보호하는 것은 성령의 검, 즉 하나님의 말씀인 것이다. 그러므로 공동체의 보존은 그 공동체가 이 예언자적이며 사도적인 말씀에 의해 유지될 때 일어난다.
그러나 바르트는 성서가 교회가 유지될 수 있는 수단일 뿐이며, 궁극적으로 그것이 증언하는 그분이 교회를 유지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사도들의 말씀을 따라 전에도, 이제도, 장차 있을 그가 세상과 우리 시대로부터 최후의 시간까지 공동체를 위해 존재한다. 그가 공동체 안에 있기 때문에, 지옥은 그것을 삼키지 못한다. 왜냐하면 공동체는 그의 지상적-역사적 실존형태로 그의 몸이기 때문이다. 내외적인 위협이 그를 패배시킬 수 없으며, 그의 몸인 공동체를 머리인 그로부터 분리시킬 수 없다. 왜냐하면 그는 이미 도울 뿐 아니라, 정복자요, 승리자이기 때문이다.
4) 공동체의 질서(The Order of the Community)
바르트는 이제 공동체의 건립이 성취되는 형태를 고려한다. 여기에 필수적 요소가 '질서'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된 하나님과 화해된 세계의 증거인 공동체의 건립은 혼돈과 무질서에 대항하는 위대한 전략이다. 우리가 그것의 건립을 공동체의 성장과 생명으로서 이해할 때, 우리는 반드시 그것의 성장이 한정적인 형태를 취하며, 특수한 법에 따르고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질서는 공동체의 올바른 운전법이며, 혼돈에 대한 하나의 개혁이며, 이렇게 구분된 공동체의 확증이기도 하다. 이렇게 될 때 만이, 그리스도 안에서 일어난 전 인류의 성화의 선행적 묘사로서의 교회공동체가 될 수 있다.
바르트는 만일 그것이 진정한 법이며 교회의 법이라면, 그것은 정당한 표준으로부터 출발되어야 한다고 지적한다. 그는 '교회공동체'라는 개념 안에 일차적 주관과 이차적 주관 사이의 진정한 관계가 지속되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공동체의 머리인 예수 그리스도가 공동체의 개념 안에서 일차적 행위주체라면, 성도의 교제는 이차적 행위주체일 것이다. 우리가 공동체의 머리인 예수 그리스도를 일차적 주관으로, 그의 몸인 성도의 교제를 이차적 주관으로 이야기 한다는 것이 이미 '법과 질서'를 이야기하는 것이다.
전 인류의 선행적 묘사인 그리스도의 공동체 안에는 거룩한 이의 현실적인 명령과 통제가 지배하고 있으며, 거기에는 '성도들의 교제'가 그분에 대하여 순종과 종속의 관계에 놓여 있다. 이 관계가 공동체를 구성하며, 그것이 곧 공동체의 질서원리며 공동체의 기본적인 법이다.
바르트는 기독론적-교회론적 공동체의 관점에서 '법과 질서'는 모든 가시적인 모든 다른 형태와는 구분되는 '특수성'을 갖는다고 주장한다. 바르트는 교회의 법이 외부에서 볼 때도 영적인 것이 되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성령의 공동체 안에서 발견되고 성취된 법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진정한 교회법은 예수 그리스도의 음성을 듣는 데에서부터 출발한다. 그러므로 공동체는 성서로부터 지시를 받는다. 신구약 공동체 속에 있는 주의 생명에 의해 공동체는 '형제적 그리스도지배'(brotherly-Christocracy)의 기원적 형태를 취한다. 그러므로 성서는 진정한 교회의 법이며, 법중의 법, 표준 중의 표준(norma normans)이다.
세상은 자체적으로 공동체에 대한 또 다른 이해의 관점을 갖는다. 세상은 공동체를 사회론적 구조로 이해할 수도, 종교적인 사회로서 이해할 수도 있다. 그러나 세상의 이러한 오해를 강제로 금할 수는 없다. 세상 속에 있는 교회와 구체적으로 병립해 있는 두드러진 특수한 구조로 국가를 들 수 있다. 국가는 교회를 그 국가 자체의 법질서의 구조 속에 넣어서 취급하려 한다. 초대교회 이후로 나타난 교회 공동체는 결코 국가의 강압적 성격을 방법으로 채택했던 사법적 공동체가 아니며, 오히려 교회의 권위는 사도적이며 영적인 권위에 기인한 것이었다. 바르트는 국가가 규정하는 교회법적인 명제가 '교회법'이 될 수는 없다고 강조한다.
바르트에 의하면 교회가 자체에 부과된 법에 순종할 때, 국가에 대해 대립되지도 않고, 오히려 국가를 위해서도 온전한 책임성을 느끼고 활동하게 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인식 속에서 공동체는 '국가가 하나님으로부터 비롯되었음'을 알고, 다만 자신에게 위탁된 권위와 법을 수행한다. 기독론적 교회론적 공동체의 관점에서 볼 때, 그것의 기본법은 진정한 교회법에 타당한 척도가 되어야 할 것이다. 교회법은 오직 그 자신의 기본법 위에 살 뿐이다. 그것은 공동체의 주께 복종하는 가운데서 발견하고, 성취하고, 준행해야 하는 질서이다.
a.교회법은 '봉사의 법'(the Law of Service)이다.
바르트에 의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공동체는 그의 몸으로 그를 섬김으로써 존재한다. 그의 구성원들도 역시 상호 섬김 안에서 존재한다. 공동체의 법의 결정적인 요소는 주가 모든 이를 섬기러 왔다는 사실에 기인한다. 그는 섬김으로써 통치하신다. 이제 그의 통치에 따른 공동체의 순종은 단지 '봉사'가 될 수 밖에 없고, 당연히 교회의 법도 역시 '봉사의 법'일 수 밖에 없다.
바르는 공동체 안에서 아무도 봉사의 가능성으로부터 피해 갈 수 없다고 말한다. 공동체와 그 안에서 각 구성원들에게 주어진 위탁은 모든 공동체가 누리는 특권 중의 기본이며, 자유조차도 이러한 봉사에로의 자유인 것이다.
바르트에 의하면 이 법의 결정은 총체적인 성격을 갖는다. 즉 공동체의 구성원들은 상호 자유함 속에서 전체적 봉사에 참여하며, 공동체는 그의 존재와 행위의 총체성과 더불어 항상 봉사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에 의하면 이 법의 결정은 또한 보편적인 성격의 것이기도 하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같은 기능으로 동일하게 봉사할 필요는 없으나, 그들은 각기 책임성을 가지고 서로 다른 영역 속에서 봉사한다. 공동체 안의 법과 질서는 결코 특수한 제사직이 아니라 모든 믿는 자들의 보편적인 제사장직인 것이다.
b.교회법은 '예전적인 법'(the liturgical Law)이다.
바르트는 교회법이 교회의 예배라는 특수한 사건과 근본적으로 연결이 되어있다고 말한다. 공동체가 알려지고 발견되는 것은 예배의 행위를 통해서이며, 공동체의 전체적 생명의 중심도 건립의 진정한 행위로서의 공적예배에 있다. 교회공동체는 예배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라는 자기의 분명한 중심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세상 속에서, 세상과는 명백하게 자신을 구별하는 것이다.
바르트는 그리스도가 특수한 역사 속에서 자신을 공동체에게 계시한 신적봉사는 하나의 종말적 사건이라고 말한다. 교회 안에서 예전적 뿌리로서의 교회법은 신적 예배라는 사건 속에서 그 본래의 자리를 갖는다. 성도들은 주의 이름으로 '고백의 사귐', '세례의 사귐', '성찬의 사귐', 그리고 '기도의 사귐'을 갖는다.
c.교회법은 '살아있는 법'(a living Law)이다.
바르트는 역사 속에 살아 있는 인격인 예수 그리스도가 친히 교회의 법이 되므로, 교회도 역시 역동적인 살아있는 법이어야 함을 강조한다. 그러나 교회는 인간의 법이지 신적인 법이 아니기 때문에 항상 위로부터 오는 역동성에 대해 열려 있어야 하며, 끊임없는 변화 속에서 수정이 가해질 수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그렇지 않게 될 경우, 교회법은 어떤 전통이 고착화되거나, 어떤 제도 자체가 율법화되는 경향을 면하지 못하게 된다.
d.교회법은 '모범적인 법'(an exemplary Law)이다.
바르트는 교회법이 자신의 법질서의 제정과 실행에 대해 세상법의 모범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세상 속에 증언의 빛과 책임을 지고 있는 교회법의 목적은 복음에 대한 증언이다. 교회가 자신의 이기욕에서 질서를 추구한다면, 그것은 참다운 법이 될 수 없다. 그러므로 교회는 자신의 법질서로 인해 세상법의 개선을 위해서도 나름대로 기여할 수 있어야 한다. 교회는 자신의 법질서의 수립을 위한 노력 속에서 하나님의 법을 잠정적이나마 실제로 보이고, 세상 한복판에서 세상에게 실제적인 도움을 잠정적이나마 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C. 성령과 공동체의 보내심(The Holy Spirit and the Sending of the Christian Community...IV/3)
성령은 그리스도에게 부름받은 공동체를 그의 몸으로서 고백하는 살아계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일깨우는 힘이다. 바르트는 이제 공동체가 그리스도 예수의 지상적-역사적 실존형태로서 그의 예언자적 말씀을 위임받은, 모든 인류와 피조물의 소명의 선행적 묘사(the provisional representation of the calling)인 것을 강조한다. 그리스도는 이제 자신의 백성인 이 공동체를 세상 가운데 보내며, 세상 가운데에서 그를 고백하도록 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그는 온 세상으로 하여금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된 하나님과 인간사이의 언약이 역사의 처음이자 종말적인 역사의 의미'를 갖는다는 것과 '그분의 미래적인 현시인 공동체가 온 세상의 위대한 희망'이라는 것을 알게 한다.
1) 세상의 사건 속에 있는 하나님의 공동체(The People of God in World-Occurrence)
그리스도인은 살아 있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공동체인 교회로 부름받은 사람들이다. 바르트에 의하면 예수 그리스도는 이들을 처음부터 개별적인 동역자들, 제자들, 증인들로가 아니라, 오히려 그 자신이나, 다른 사람들과의 연합된 복수성(plurality)으로 인식하였다.
바르트는 신앙과 공동체 의식은 사람들을 그들의 일반적인 상황으로부터 이끌어 내어 형제들로서 연합하게 한다고 주장한다. 교회 공동체는 각 개인이 스스로 예수 그리스도에게 나아와 자신의 종교적이고 도덕적인 기질의 힘으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그를 부르고 그 자신과 함께 연합하게 한다는 사실에 기인한다. 그러므로 '연합'의 이전에 '부름'의 사건이 있으며, 이 부름은 '그와의 연합'으로의 부름이며 '공동체로의 연합'을 위한 부름이다. 그러므로 이 공동체는 '부름'( ) 받은 '교회'( )인 것이다.
바르트는 화해론 3부에서 현상과 문제를 다룬다. 여기에서 교회의 현실은 교회의 보냄 또는 '선교'와 같은 '사도적 교회'로서 다루어진다. 주 예수에게 부름받은 공동체는 세상 가운데 있으며 세상사 속에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존재한다. 우리는 세상사와 공동체의 상존하는 관계 속에서 공동체가 세상의 역사를 어떻게 이해하며, 또 그 속에 있는 공동체 자신을 어떻게 이해하며, 세상사 속에서 공동체는 어떻게 존속해야 하는가라는 물음에 직면한다.
a. '세상의 역사'란 무엇인가?
바르트는 먼저 세상의 역사는 신학적으로 고려되어야 하며, 공동체는 공동체의 주(主)인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이 증언하는 세상의 역사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인간과 계약을 맺으시고 성취하신 하나님께 속해 있다고 주장한다. 그렇게 본다면 결과적으로 공동체의 역사와 세상의 역사는 분리될 수 없는 것이 된다. 우리는 그러한 의미에서 세상사 역시 하나님의 왕적 통치와 부성적인 섭리 아래 진행되고 있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바르트는 세상사에 대해 신학적으로 이야기할 수 있는 결정인 것이 '하나님의 통치의 섭리'임을 강조한다. 그러나 바르트에 의하면 세상사는 화해에 대해 무지하며, 자신의 창조자나 이웃, 심지어 자신과도 근본적으로 충돌하는 '혼돈의 역사'요, 죄악의 역사이다. 그러나 인간의 혼돈(confusio hominum)조차도 하나님의 섭리(Providentia Dei)를 벗어날 수 없으며, 그것은 자체 속에 존재근거를 가지고 있지 않으며, 오직 한 하나님의 통치 아래 종속되어 있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바르트는 세상사를 '하나님의 섭리의 역사'와 '인간의 혼돈의 역사'의 대립으로 본다. 한편으로는 세상의 모든 피조물이 하나님이 창조한 선한 피조물이라는 측면이 있고, 다른 한편에서는 인간의 죄로 인하여 창조를 추상적이고도 무(nothigness)로부터 기인된 작용의 실체로 생각하고, 하나님의 선한 피조물임을 부인하려는 인간행위의 측면이 있다. 혼돈의 역사 속에서 이제 사람들은 반립되는 이 두 요소가 결코 융화될 수 없고 일치될 수 없다고 생각한다.
바르트는 하나님의 섭리와 인간의 혼돈사이의 관계는 '신비'라고 하면서, 헤겔의 변증법적 관점에서는 이러한 반립되는 요소의 화해 가능성이 어려움을 지적하였다. 세상 역사의 온전한 이해는 기독교 공동체가 자신에게 부여된 예언자적인 증언의 빛에서 볼 때에 가능하며, 세상역사는 하나님과 인간의 상호작용에 의해 이루어진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보여 준 하나님의 은총이 아닌 다른 원리나 논리적 발견으로 인간에 의해서 인식될 수는 없다는 것이다. 바르트는 이 은총이야말로 자유로운 자기 계시의 진리이며,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라고 말한다.
공동체는 이제 위로는 하나님의 고귀하고도 부성적 통치와 그의 우편에 있는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아래로는 인간들의 혼돈을 바라보게 된다. 이러한 상하의 모순과 반립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은 '새로운 것'으로 비춰지면서 이 두 관계를 연결시킨다. 하나님의 은총은 이제 '그 분 안에 있는 세상'을 지시한다. 하나님의 은총은 그리스도 예수의 이름 아래서 의도된 하나의 진정하고도 정당한 자리를 갖는 세상을 드러낸 것이다.
바르트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은 인류의 혼돈의 상황을 변화시키고,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새로운 세상의 현실성(reality)을 드러낸다고 주장한다.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두개의 왕국이 충돌하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는 실재성 속에 있는 하나님의 하나의 왕국이 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부름에 정초하여 드러난 것이며, 이제 하나님의 백성인 공동체는 세상 역사의 새로운 실제성을 이야기해야 한다. 그것은 이 세상 안에서 그리고 이 세상 위에 하나님이 성취하고 이룬 자유의 역사이며, 그와 세상과의 화해이며, 인간과 더불어 맺는 그의 계약이행이며, 결국 예수 그리스도의 실존의 한 결과인 세상과 인류에 대한 새로운 실재성인 것이다.
바르트에 의하면 하나님 왕국의 도래는 예수 그리스도의 종국적이며 우주적인 드러남으로서 이미 그안에서 일어난 것이다. 이 사실은 공동체에게는 믿음에서 실제적 직관으로 옮겨가는 전환을 의미한다. 이미 드러나 있으며 계시 되어진 세상사의 새로운 실재성을 공동체는 알고 있지만 세상은 알지 못하며, 이 새로운 증언의 위탁이 공동체에게 남아 있다. 이것은 진정한 실제성에 대한 지식에 근거하며, '믿음'(faith)으로 말미암은 것이지, '직관'(sight)으로 인한 것은 아니다. 이것은 단적으로 말하면 '순종적인 믿음'인 것이다. 그래서 그 믿음 안에는 '지식'(knowledge)과 '순종'(obedience)이 따르는 것이다.
바르트에 의하면 공동체는 하나님의 왕국이 예수 안에서 이미 도래한 것을 알며, 그러나 미래적으로도 직접적이고 우주적인 가시성 속에서 도래할 것을 기대한다. 이러한 '단호함'(resoluteness) 속에서 공동체는 자신에게 위탁된 사역을 감당할 수 있다.
바르트는 이러한 단호함이 확신 속에서 오는 단호함이며, 그것은 진정하고도 총체적인 것에 대한 확신이라고 말한다. 즉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화해된 세상의 역사에 대한 신뢰로서, 이 신뢰의 근거 위에서 공동체는 세상의 사건 속에 유지하고 살아가는 것이다. 이 단호함은 또한 결정적인 결단에 대한 확신으로서,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이룬 행위는 자신과 더불어 평화하며, 그의 창조의 선행을 영화롭게 하는 새로운 인간을 위한 분명한 결정이라는 확신이다. 공동체가 진정으로 그를 믿는다면, 그것은 세상사 속에서 이러한 결단들에 대한 확신의 단호함을 가지고 존재하게 된다. 그리고 그것은 세상사를 위한 희망의 단호함속에 존재하는 것이기도 하다.
b. 공동체는 세상사 속에 있는 자신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바르트는 이 문제가 결국 교회 공동체의 본질의 문제임을 말한다. 바르트에 의하면 교회 공동체는 그리스도 안에 감취어진 세상사의 새로운 실재성에 대해 신적으로 주어진 지식 속에서 존재하는 백성이며, 그러한 확신, 결정, 희망 속에 있는 백성이다.
바르트에 의하면 사건으로서의 교회공동체는 가시성을 가진 현상이면서 동시에 수많은 사람들에게 가리워진 불가시적인 것이기도 하다. 그는 공동체의 실존이 그리스도의 실존과 일치한다고 주장한다. 즉 예수 그리스도가 진정한 인간으로서 가시적이고 동시에 진정한 하나님으로서 불가시적인 것처럼, 공동체도 역시 그러하다.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영원한 아들로서 성육신하여 세상과 결합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세상 사건에 직면하여서는 그것과 다른 것처럼, 교회 공동체도 역시 자신을 전적으로 세상적인 것으로 그리고 세상의 사건과의 만남 안에 있는 존재로서 자신을 드러내고 이해해야 한다. 그러나 바르트는 이러한 가시적 존재성이 하나님의 영원한 말씀에 대한 섬김 안에 있는 존재성이어야 한다고 덧붙인다.
c. 공동체는 세상의 사건 안에서 어떻게 존재하며, 유지되는가?
바르트는 이 물음에 대하여 두 가지의 대답, 즉 기독론적-교회론적인 것과 성령론적-교회론적인 대답을 한다. 그러나 이 둘은 결코 분리되어 있는 것이 아님을 말한다.
기독론적-교회론적(Christologico-ecclesiological) 대답이란, 교회 공동체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 속에서 지속된다는 것인데, 그 기초는 하나님의 의지와 말씀에 정초되어 있다. 바르트는 교회 공동체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존재성 속에로 부름을 받아서 존재하며, 그분에 대한 증언의 공동체로서 존재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리스도의 부름의 능력은 그 안에서 말씀된 하나님의 살아있는 말씀의 능력이며, 이 말씀의 능력은 결국 성령의 능력이기도 하다.
바르트에 의하면 공동체는 그 몸의 머리이신 주에게 존재하는 것처럼 성령의 일깨우는 능력 안에서 행동하고 사역한다. 그는 공동체가 예수 그리스도의 사심으로 인해 존재하며, 이것이 올바른 존재질서라고 강조한다. 이런 의미에서 공동체는 그에게 속해 있으며 그의 소유이다.
바르트는 공동체의 존재 안에서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살아있는 말씀으로 자신을 계시한다고 말한다. 그리스도는 이들에게 위로부터의 말씀이며, 공동체의 천상적 머리요 동시에 온 인류의 주로서 고백 되며 인식 된다. 이미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비추어진 부활과 종말의 전조는 세상의 역사 안에서 공동체에게 위탁되어진 증언 안에 드러나 있다. 공동체는 이제 그의 지상적-역사적 실존형태로 존재하며, 이러한 예수 그리스도의 존재와 공동체의 통일성, 총체성은 공동체 존재의 기초요 비밀이다.
바르트는 계속해서 성령이 모든 그리스도인들을 부르고, 회집시키며, 일깨우시고, 성화시킨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성령은 공동체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서 유지시킨다. 이것은 공동체 존재와의 관계 속에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존재적 힘이기도 하다. 성령의 능력 안에서 말씀의 창조적인 힘이 공동체를 부르며, 그 능력은 하나님의 은혜의 힘으로서 공동체 자신으로부터가 아닌 전혀 낮선 힘인 것이다.
바르트에 의하면 공동체는 성령의 사역으로서 존재하며, 성령 안에서 교제하며 유지된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자유로운 은총의 사역인 성령의 이러한 행위는 교회 공동체 존재의 기초요 또한 비밀이다. 공동체는 성령의 은혜로운 은총의 행위로 인해 세상의 사건 속에서 그리스도의 증언의 백성으로 존재하며 유지된다.
2) 세상을 위한 공동체(The Community for the World)
바르트는 예수 그리스도의 공동체는 세상을 위하면서도 동시에 하나의 피조물인 공동체 자체를 위해 존재한다고 단정한다. 이러한 존재양식 안에서 그 자체와 또 다른 인류를 위하여 줄 수 있는 만큼, 공동체 자신의 생명력도 유지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공동체의 존재 목적은 "처음부터, 궁극적으로 하나님은 세상을 위해 존재하신다"는 사실에 기인한다. 즉 하나님이 세상을 위하여 존재하시듯이, 공동체도 세상을 위하여 존재한다.
바르트에 의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진정한 공동체는 하나님께서 세상 속으로 보내는 공동체이다. 위로부터 부여된 전권을 힘입어 공동체는 이미 앞서 세상 속으로 파송된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파송된다. 이 공동체는 세상을 향해 나아가도록 지시되었고, 세상을 위해 존재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바르트는 진정한 교회공동체가 세상에 대해 갖는 행위의 근거를 세 가지로 설명한다: 첫째는, 교회 공동체가 세상의 '현실'(reality)를 알고 있다는 것이다. 공동체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계시와 화해의 신적 행위에 대한 지식을 품고 세상에 대면해 있다. 공동체가 세상에 직면하고 또 그것에 속해 있음으로써 세상을 돕는 것은 기본적으로 이렇게 형성된 지식 안에서인 것이다.
둘째는, 교회공동체가 세상과 더불어 존재하는 '연대성'을 인식하고 행동한다는 것이다. 물론 연대성이 세상에로의 '일치'(conformity)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공동체는 예수 그리스도안에 주어진 생명의 빛으로 인하여 눈이 열려 세상을 비추는 하나님의 사랑을 보게 된다. 이 사랑은 하나님이 세상을 위해 독생자를 주신 깊이 있는 사랑이다. 만일 공동체가 세상을 회피하고 따로 분리하여 존재하려 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회피하는 것이다.
바르트는 이 연대성이 탈선과 혼돈 속에 있는 인간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파괴되어서는 안 될 무리의 실존과 상황 앞에 민망히 여겼던 예수가 무리들과 함께 어울릴 수 밖에 없던 '사랑의 자리'라고 말한다. 이 연대성은 공동체도 역시 의도적으로 선한 양심을 가지고 세상의 양식 안에 존재할 수 있다는 능동적인 인식에 기인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공동체의 특수성은 세상과의 분리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세상과의 연대성에 있는 것이다.
세째는, 교회 공동체가 하나님에 대한 순종 아래서 세상에 대해 능동적인 섬김으로 부름받았다는 것이다. 공동체의 주인 예수는 세상과 더불어 고난받았으며, 세상을 위해 고난받았고, 또한 세상을 위해 행동하였다. 바르트는 공동체가 세상과의 관계 안에서 비능동적이거나 중립적인 태도를 갖는 것은 이미 세상을 위해 행한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아니라고 지적한다.
바르트는 진정한 교회 공동체는 세상에 대한 능동적 참여를 피하지 않으며, 능동적으로 자신을 넘어 세상 속으로 접근해 간다고 말한다. 진정한 교회는 순종의 모험 앞에 늘 직면해 있으며, 이를 수행하는 중에 항상 용서, 수정, 끊임없는 자기비판이 요구된다.
바르트는 이제 '교회공동체가 세상을 위해 존재하는 사회'라는 전제의 근거로서 네 가지 답변을 제시한다. 첫째로, 공동체는 그 근거와 유지력을 자신의 미래에 대해 총체적으로 지시되어 있는 일련의 사역에 두고 있는데, 이것은 성령의 능력에 의해 세상과의 관계속에서 비추어질 때 올바르게 인식된다. 하나님의 말씀이 성령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세상을 비추며, 이 빛은 그들을 깨워 순종케 하고, 마침내 교제 가운데로 이끌어 낸다. 그 빛은 하나님과 성령의 능력에 의해 세상에 그분의 영원한 빛을 반사하도록 허락된 빛이다. 공동체는 이러한 전제 위에서 세상을 위해 존재하는 사회이다.
둘째로, 공동체가 오직 성령의 능력으로 인하여 힘을 얻으며,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고백으로 유지된다는 것이다. 바르트는 예수 그리스도를 고백한다는 것은 곧 공동체가 그분이 존재한 것처럼 존재하는 것임을 강조한다. 공동체가 고백하는 예수는 세상 안에서, 세상을 위해서 행동하시며, 자신을 세상에 드러낸 하나님이다. 또한 그 하나님은 세상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행동하는 살아 있는 하나님이며, 인간없이는 존재하지 않는, 인간과 더불어 인간을 위해 있는 분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전제 위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고백하는 교회 공동체는 세상을 위해 존재하는 사회이다.
세째로, 성령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가능케 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공동체의 고백은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 공동체에 대해 고백해 왔고 고백하고 있으며 앞으로도 고백할 것이라는 사실에 대한 감사의 응답인 것이다.그리스도는 공동체 안에서, 공동체와 더불어 행동하는 주체이다. 바르트에 의하면 공동체는 예수 그리스도가 그들을 그의 예언자적 사역에 참여케 하며, 그들로 하여금 책임성을 갖고서 이러한 봉사와 섬김으로 인도한다는 사실 속에서만 존재할 수 있다. 공동체의 머리인 예수 안에 존재 근거를 두고 있는 공동체는 그의 보냄과 그의 예언자적 사역에 참여함으로써, 그와의 연합을 실재화하며, 세상을 위해 존재하는 사회가 된다.
마지막으로, 이 공동체는 그 자신과는 다른 신-인(神-人)의 실재에 대한 하나의 잠정적이고 선행적인 묘사이다. 바르트에 의하면 이 실재가 지시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속에서 이미 계시되어진 그러나 아직은 오지않은 하나님의 나라이다.공동체의 존재는 예수의 부활과 부름 안에 그 근거를 둔다. 공동체는 이제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나라를 반영하고 지시하며, 모든 인류와 피조물 앞에서 하나님을 섬기도록 부름받은 전체 인류의 선행적 묘사로 자신을 드러냄으로써, 공동체는 세상을 위해 존재하는 사회가 된다.
3) 공동체의 과제(The Task of the Community)
우리는 앞에서 이미 교회 공동체가 세상에로 보냄을 입었으며, 세상을 위해 존재한다는 것을 언급했다. 이제 바르트는 세가지 측면에서 공동체의 과제를 다룬다. 그것은 첫째 '과제의 내용'에 관하여, 둘째 '과제가 해당되는 사람들'에 관하여, 마지막으로 '과제의 순수성'에 관한 것이다.
a. 과제의 내용
바르트에 의하면 공동체는 예수에 의해 과제를 부여받는다. 여기에서 바르트는 그들을 공동체로 결속케 하는 예수 자신이 궁극적으로 공동체에게 주어진 과제의 기원이며 내용이라고 단언한다. 즉 예수는 공동체로 하여금 그를 고백케 하기 위해 그 자신을 공동체의 과제로 준다는 것이다.
바르트는 무엇보다도 공동체가 그에게 부여된 위치를 가지고 세상 속에서 예수의 긍정을 증언해야 함을 다룬다. 바르트에 의하면 예수는 위대하고 포괄적인 긍정이다. 예수에 대한 찬양조차도 이러한 긍정에 의해 채워질 때만 진정한 것이 된다. 우리는 공동체의 과제 속에서 부정을 포함하고 있는 긍정을 다루고 있다. 그러나 지배적이고 결정적인 것은 긍정이다.
바르트는 예수에 대한 공동체의 증언이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신실함과 선하심의 긍정을 증언해야 함을 강조한다. 인간과 함께 하며, 인간을 위하며, 그의 친구와 조력자이며, 구세주와 보증자인 예수는 하나님의 긍정을 드러낸다. 또한 예수는 하나님 자신을 인간의 이웃과 형제로 드러낸다. 그는 세상과 하나님의 화해이며, 죄인의 칭의와 성화이다. 그는 또한 위로와 치유가 있는 하나님의 나라요, 값없는 은혜이며 선물인 것이다.
바르트는 여기에서 인간도 공동체에게 위탁된 과제의 내용임을 강조한다. 그러나 여기에서 강조하는 인간은 하나님의 자비의 대상으로서의 인간이며,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보증자요 친구와 형제가 되어주는 인간이다. 공동체가 이러한 하나님을 위해 존재하기 때문에 무조건적으로, 어떠한 환경에도 불구하고 공동체도 또한 인간을 위해 존재해야 함이 요구된다.
b. 과제가 해당되는 사람들
바르트는 이제 공동체의 과제가 해당되는 사람들의 문제를 다룬다. 여기에서 다루어 지는 인간은 이러한 공동체의 과제의 입장에서 본 인간이며, 공동체를 구성하는 분의 입장에서, 그리고 동시에 복음의 입장에서 본 인간이다.
바르트에 의하면 그리스도의 복음에 부름받은 인간은 하나님과 이웃에 대하여 직접적인 관계에 있는 인간이다. 이제 공동체에게 주어진 과제가 그에게 지시된다. 공동체에게 주어진 과제는 무지에 의해 고통받고 배타성의 짐을 지고 신음하는 인류를 목표로 한다. 이러한 모순과 저항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영원토록 이 고난받는 자를 사랑해 왔고, 지금도 사랑하시며, 앞으로도 사랑할 것이다. 이것이 공동체가 그의 과제를 수행하려는 사람들과 함께 설 수 있는 존재의 근거이다.
바르트는 하나님의 그칠 줄 모르는 사랑이야 말로 인간의 존재속에 있는 역동적인 요소임을 강조한다. 인간이 그에게로 나아갈 때, 하나님은 그에게 그의 현재적 상태를 뛰어 넘어 그와는 다른 미래를 드러내며, 새로운 미래를 강요하며, 지시한다. 마치 병자에게 "일어나, 너의 침상을 들고 가라"하고 외치셨던 것처럼 말이다.(막 2:9)
바르트에 의하면 예수를 이웃에게 드러냄으로써 인간 존재의 우위적인 법을 증언하는 것이 공동체의 과제인 것이다. 이것은 복음에 따라서 인간을 돕는 미래이며, 그에 대한 하나님의 자비하심의 증거이다. 교회 공동체는 모든 인간들과 피조물 가운데 이러한 위대한 선행적 기쁨을 누리는 자리이다.
c. 과제의 순수성
바르트에 의하면 공동체에게 위임되어진 과제의 순수성에 관한 물음은 과제가 공동체의 주로부터 죄많고 연약한 인간들의 손으로 과제가 위임됨에 따른 문제이다. 바르트는 먼저 공동체에게 위임되어진 과제의 내용의 순수성을 다룬다.
바르트는 공동체는 때때로 예수에게서 듣고 그를 증언해야 함을 잊어버리기도 하며, 구체적인 복음의 진리가 때때로 추상적인 것으로 변질되기도 한다고 경고한다. 그에 의하면 복음이 항상 공동체의 살아 있는 주의 살아 있는 말씀이 되고, 항상 공동체의 유일한 주의 지속적인 말씀이 될 때만 그 순수성이 성취된다는 것이다. 예수의 동일하심처럼 그의 복음이 독특한 시대와 상황에만 적용될 수 만은 없는 것이다. 만일 그러한 복음이 있다면, 그것은 다른 복음일 것이다.
바르트는 또 하나의 순수성의 실패를 비복음적인 보수주의 경향에서 지적한다. 그것은 과제의 내용의 오류화 내지는 변질을 이야기하는 것으로서, 고대 영지주의로부터 현대의 다양한 실존론자들에 이르기까지 복음이 세속적으로 지속된 사상이며, 인본주의적으로 이용된 것을 지적하는 것이다.
바르트에 의하면 과제의 순수성에 대한 문제는 공동체가 공동체의 보냄을 입은 사람들에 대한 태도의 순수성의 문제이기도 하다. 여기에는 두 가지의 위기가 있는데, 첫째는 전체에 있어서 부분을 무시하는 태도이며, 둘째는 사람들에게 선심쓰는 체하는 위선의 태도이다.
예수의 영광스럽고 예언적인 말씀은 그 자체가 세상에 대한 하나의 봉사이다. 만일 공동체가 그의 말씀을 참되게 섬기려 한다면, 세상을 지배하지 않고 섬기려 할 것이며, 압박이 아닌 높임으로, 그리고 짓눌림이 아닌 자유함으로 섬기려 할 뿐이라고 바르트는 강조한다. 또한 그는 두번째 위기에 대하여 그러한 위선의 태도로 인하여 사람들은 복음의 입장에서 참된 자신을 엄격하게 바라볼 수도, 이해할 수도 없게 된다고 경고한다.
4) 공동체의 봉사(The Ministry of the Community)
a. 봉사의 성격
바르트는 공동체의 봉사가 매우 특수하며, 제한적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것이 약속에 차 있다고 주장한다. 공동체의 봉사가 특수하다고 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공동체로서 그것이 세상을 위해 존재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세상에 증언함으로써 세상 속에서 그의 과제를 수행해야 한다는 사실에 기인한다.
공동체의 봉사가 제한적이라고 하는 것은 그것이 다만 '증언의 봉사'라는 사실에 의한 것이다. 즉 그것은 하나님과 인간에 대한 봉사로서 그 이상의 것은 아니다. 봉사는 이미 능동적인 섬김을 의미한다. 그것은 공동체의 봉사로서 공동체를 만드신 하나님에 대한 능동적인 섬김이자 동시에 하나님을 섬김으로 인하여 마땅히 그렇게 해야 할 사람에 대한 능동적인 섬김인 것이다.
바르트는 공동체의 봉사는 증언과 증언의 봉사로서 특수하고도 제한적인 면을 갖지만, 그것은 충만한 약속을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이 약속은 공동체로 하여금 그의 봉사를 책임지고 수행할 수 있도록 할 만큼 강력한 것이다. 공동체가 봉사를 하면서 확신하고 있는 이 약속이 곧 공동체의 증언의 근거이자, 주제이며 내용인 것이다.
바르트에 의하면 이 약속은 예수 안에서 화해, 언약, 하나님의 나라, 세상의 새로운 현실(reality)을 다루는 하나님의 말씀이기도 하다. 부활한 예수는 증언의 근거와 내용이며, 공동체에 의해 증언되는 하나님의 말씀이며, 공동체에게 이 약속과 확신을 준다. 이 약속은 예수에 의해 성취된 약속인데, 공동체는 이러한 봉사의 약속에 의해 살 수 있으며, 그 약속에 의하여 존재해 가야 하는 것이다.
b. 봉사의 본질
바르트는 봉사의 본질을 다루면서 교회의 모든 봉사의 총괄적인 요약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증언'이라고 말한다. 바르트는 그와 같은 맥락에서 봉사의 본질이 갖는 세 가지의 과정을 다룬다. 그것은 복음선포, 복음의 해명, 그리고 복음의 적용으로서의 봉사이다.
첫째, 공동체는 세상사 속에서 인간들에게 복음의 내용을 구성하고 있는 신적-역사적 사실을 선포해야 한다. 이것은 인간들에게 베푼 하나님의 은총과 예수안에 있는 하나님과 인간의 화해의 성취,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를 세상에 선포하는 것이다.
둘째, 공동체의 증언의 봉사는 사람들로 하여금 올바르게 이해하고 인지할 수 있도록 하는 '복음의 해명'의 과정을 다루어야 한다. 복음의 자기선언(self-enunciation)적인 내용은 열매없는 단순한 앎(acquaintance)을 허용하지 않으며, 또 다른 자율적인 해명도 용인하지 않는다. 복음의 해명에서 필수적인 것은 복음의 전 내용으로 하여금 자신의 해명원리가 되도록 하는 것이며, 또 다른 근거 위에서 복음과 다른 설명원리를 붙이지 않는 것이며, 낮선 주제안에 복음을 강요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이해, 해명하는 것이다. 그것은 복음의 내용 자체가 합리적이기 때문이고, 복음은 일반적으로 인식하고 해명될 수 있기 때문이다.
세째, 공동체가 수행하는 증언의 봉사는 공허한 것이 되지 않기 위해서 적용의 형태 속에서 선포되고 해명되어야 한다. 공동체의 행위 안에 말씀의 메아리가 없고, 하나님의 부르심이 없다면, 공동체는 하나님의 나라의 선행적 묘사가 되지 못할 것이다. 예수가 하나님의 말씀을 수용하고 순종하여 인간들을 위해 죽고 부활함으로 하나님이 인간들을 사랑함을 보였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바르트는 복음이 그들에게 적용되어야 함이 이런 이유에 있다고 강조한다.
복음의 내용은 그 선포와 해명뿐 아니라, 공동체가 세상을 향해 신앙에로의 강한 촉구를 호소해야 함을 포함한다. 바르트에게서 복음적 설교로 표현되는 복음의 적용은 소수에게 해당되는 종교적 환상이 아니라, 기독교인과 비기독교인, 그리고 무신론자와 회의론자든 상관없이 전체 인류에게 해당된다. 그러므로 복음적 설교는 공동체가 공동체의 봉사의 여하한 형태 속에서도 그의 존재성을 세상 속에서 실재화 해야하며, 세상에 직면하여 그의 요구하는 공동체의 존재성을 구체화 하는 봉사를 나타낸 것이다.
c. 봉사의 형태와 기능
바르트는 이제 교회의 봉사가 갖는 다양성과 특수성을 다룬다. '특수성'이란 봉사의 여러가지 기능 속에서도 증언하는 내용의 '단일성'을 말하며, '다양성'이란 내용의 단일성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구체적인 여러기능과 형태로 나타남을 가리키는 것이다.
예수의 제자들은 세상에 예수를 전파하여 그들을 모아 그의 부르심과 세상과 하나님의 화해, 칭의와 성화와 소명을 인식하도록 세상에 보냄을 받았다. 바르트에 의하면 제자들이 증언하는 예수의 생애는 말(speech)과 행위(action)라는 두가지로 나뉘어진다. 마찬가지로 공동체의 봉사도 예수 안에 있는 단일한 증언을 말과 행위라는 이중적인 형태로 드러내는 것이다. 바르트는 이를 근거로 공동체의 봉사를 말씀의 봉사와 행위의 봉사로 구분한다.
바르트는 말씀의 봉사를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 설교, 가르침, 전도, 선교 그리고 신학의 여섯가지로, 그리고 행위의 봉사를 기도, 목회상담, 그리스도인의 모범적인 삶, 봉사, 예언자적 행동 그리고 성찬과 세례에 기초한 교제의 여섯 가지로 구분한다.
IV. 바르트의 교회론의 가치성과 현대교회에 주는 방향성
A. 바르트의 교회론의 가치
복음의 본질은 변함이 없지만, 복음의 형태는 시대와 상황에 맞는 새롭고 다양한 옷을 입어야 하는 것처럼, 시대적인 상황의 다양한 변화는 끊임없이 새로운 교회론을 요구한다.
먼저 바르트의 교회론은 1차 세계대전과 같은 세기적 사건에 대해, 그리고 목회현장에서 부딪히는 실제적 질문에 대해 책임성 있는 교회의 증언으로서, 그리고 끊임없이 사색하고, 행동하며, 대답하려 했던 실천적이고도 실제적인 신학적 작업으로서 가치성을 갖는다. 특히 바르트에게서 교회론은 그의 신학적 모태요 신학의 출발점이었다. 즉 그의 신학적 실존은 교회 안의 신학적 실존인 것이다.
바르트가 직면했던 시대적 정황, 목회현장은 바르트로 하여금 당대의 자유주의 신학의 '인간중심적 사고'로부터 본질적으로 결별하고 '신중심적 사고'로 신학적 방향전환을 하게 하였다. 현대신학의 공공연한 목적은 인간의 지성(종교적, 도덕적 의미에서)을 만족시키려 하는 것이었다. 이리하여 근대주의 개신교에서는 교회가 자기 자신을 비추어 볼 표준을 제거함으로써, 그 교훈의 핵심을 상실한 것이다. 바르트의 교회론은 이러한 인본주의적 사고에서 신중심적인 '사고의 전이'로서 또 하나의 교회론적 가치를 갖는다. '하나님'이 진지하게 '하나님'으로 여겨져야 한다는 생각 속에 하나님의 계시인 성서의 본래의 자리를 회복시켰다. 그에게 더욱 중요한 것은 해석 방법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되게 하는 문제였다.
이러한 그의 사고는 끊임없이 성서와 교회 사이에서 움직였고, 그렇게 함으로써 또한 교회와 세상 사이에서 움직였다. 자유주의 신학으로부터 급선회한 바르트의 신학적 사고 전이는 이제 그로 하여금 다시 한 번 교회의 본질, 형태, 미래의 방향성에 대해 진지한 대답을 요구하였으며, 바르트는 이 물음에 직면하여 교회론의 새로운 신학적 돌파구를 마련하게 되었다.
여기에서 바르트의 교회론이 갖는 신학적 가치성이 드러나는데, 그것은 바르트의 교회론이 '그리스도론 중심의 교회론'이라는 점이다. 바르트의 교회론은 그리스도론 안에서 그 존재론적 근거를 가지고 있다. 바르트는 [교회교의학] IV/1에서 교회 공동체를 '그리스도의 몸'으로 해석함으로써, 그의 교회론의 기초를 세워간다. 교회는 그리스도 예수 자신의 지상적-역사적 실존형태(earthly-historical form of existence)로 간주되면서, 드러난 '사건과 행동'으로서의 교회는 이제 불가시적인 '형태와 존재'로서의 그리스도 예수를 증거한다.
'칭의', '성화', '소명'의 선행적 묘사로서의 교회의 출발은 하나님과 화해된 공동체의 화해의 근거로서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 사건'에 놓여 있다. 공동체의 머리인 그리스도 예수의 첫 번째 파루시아(Parousia)와 두 번째 파루시아의 중간기(the time between)에 공동체는 존재한다. 바르트는 여기에서 그리스도론적 교회 공동체의 자기 존재형태와 미래의 존재 방향성을 제시해 간다.
바르트의 그리스도론적 교회론은 교회가 가지는 모든 신학적 실존을 그리스도 예수와 그의 사건, 그에 대한 증언 그리고 그의 통치에 근거하고 있다. 이러한 점에서 그의 교회론이 갖는 신학적 가치성이 매우 뛰어나다고 본다.
B. 현대교회의 문제점과 바르트의 교회론이 주는 방향성
바르트는 교회 공동체를 그리스도의 지상적-역사적 실존형태로 강조하면서, 이 공동체가 그리스도의 두 파루시아 사이의 중간기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언급하였다. 이 사실로부터 우리는 현대교회도 역시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이 두 파루시아 사이에 존재한다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필자는 여기에서 이 중간기에 존재하는 현대교회가 갖게 되는 몇 가지 내적, 외적인 문제를 지적하면서, 바르트가 이 문제에 대해 가리키는 방향성을 제시하고자 한다.
현대교회가 갖는 두드러진 문제가 다양한 양상을 띠고 있지만, 필자는 총체적인 문제성을 '신학의 부재'로 요약하고 싶다. 즉 교회 공동체의 올바른 자기존재, 자기본질, 자기미래, 자기역할에 대한 인식이 부족하거나 잘못된 것을 말한다. 이로 말미암아 교회는 그 실존을 잘못된 사고와 행위형태로 드러내게 된다. 필자는 여기에서 현대교회의 문제중 심각하게 드러나고 있는 성직주의, 신비주의, 그리고 교회의 세속화 문제를 다루려고 한다.
첫째는 현대교회 안에 지나치게 대두되고 있는 '성직주의' 문제이다. 이것은 신학적으로는 교회의 본질과 그것이 갖는 통일성, 거룩성, 보편성, 사도성에 대한 인식의 부족에 기인한 것으로 본다. 이것은 내적으로는 봉사자 상호 간의 지나친 지배적 양상으로, 외적으로는 교권주의 양상으로 드러난다.
바르트는 성직주의를 자연과 은총의 일치에 관해 일가견이 있다고 생각하는 자들로부터 비롯된 적그리스도의 통치라고 비판한다. 그는 교회 안의 다양한 직책들은 지배를 위한 것이 아니며 전(全) 공동체에 위탁되고 명령된 봉사를 수행하기 위한 기초임을 강조한다.
한편 현대교회의 교권주의는 지나친 대량주의와 허영적인 교회행정과 조직으로 발전하는 것에서 드러난다. 바르트는 교회의 거룩성이 그의 머리인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성에만 의존한다는 것을 강조하면서, 오히려 내적, 수직적 성장과 거룩한 직분(sancta)에 대한 겸손한 수행을 강조한다.
둘째는 현대교회에서 나타나는 '신비주의'의 문제이다. 이것은 주관적 경험과 경건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데서 비롯되는데, 이로 말미암아 신앙은 초월적이고도 개인적인 것이 되어버린다. 이것은 신학적으로는 교회의 본질과 관련하여 존재목적에 대한 잘못된 인식에서 비롯된 문제라고 본다. 현대교회에서 신비주의는 지나친 경건에 따른 세상과의 단절된 개인주의적 신앙, '말씀'에 기초한 것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맹종'으로 표현해도 좋을 만한 신앙의 양상으로 드러난다.
바르트는 신앙과 공동체의 정신은 사람들을 그들의 일반적인 상황에서 끌어내어 형제들로 연합케 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이러한 부름은 다시 '세상사 속에서 하나님을 증언하는 백성'으로서의 소명과 직결된다. 그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의 새로운 실존을 알게 된 현대교회를 향해, 그리스도를 따라 '세상을 위한 존재'가 되어야 하는 존재목적을 지시한다.
바르트는 하나님의 나라를 개별화로부터 벗어난 포괄적 전체적 영육적 삶의 유기체로 이해했으며, 교회를 철두철미 유기적인 관계, 살아있는 친교와 공존으로 이해했다. 그리고 신비주의적 경건에서 드러날 수 있는 '기계적' 요인을 공격하였다.
바르트는 예수 그리스도는 공동체 안에서 성령의 능력으로 행동하고 사역한다고 언급한 바 있다. 그는 이 공동체 안에서 하나님의 살아 있는 말씀으로 자신을 계시한다. 바르트는 현대교회를 향해 지속적인 자기수정, 자기갱신을 지시한다. 그러나 그것은 성서가 증언하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의 수정과 갱신일 뿐이다.
세째 현대교회에서 두드러지는 '세속화'(Secularization)의 문제이다. 바르트에 의하면 세속화는 공동체 자체가 스스로 성취된 것으로, 그리고 무죄한 것으로 자신을 간주할 때 일어난다. 그에 의하면 세속화는 특별한 철학을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는 표준으로 삼고, 독특한 이데올로기를 세상에 대한 자신의 태도로 취한다. 그는 이러한 세속화의 또 하나의 요인으로서 공동체의 약함을 언급하고, 공동체가 자기 보존의 한 시도로서 단지 세상의 한 부분이 되어가는 과정을 경고한다.
현대교회의 세속화는 다원화된 현실 속에서 단지 많은 종교들 중의 하나로서 그리고 하나의 문화현상으로서 존재하려는 양상으로 드러난다. 그러나 이것은 궁극적으로 이질화된 복음이며, 이질화된 공동체일 뿐이다. 이것은 신학적으로 공동체의 존재목적과 존재미래에 대한 인식의 부족에서 비롯된다고 본다.
바르트는 '고백교회'의 투쟁기 중에 독일교회가 직면하고 있는 위기를 지적한 바 있다. 그는 독일교회가 성서가 아닌 다른 계시를 추가하며 자신의 소명을 다른 곳에서 온 것으로 해석하고, 무책임하게 세계사의 어떤 형태와 결합하여 마치 이것을 공동체의 존재목적으로 삼으려 한다고 지적하였다. 바르트는 수많은 종교와 문화현상들 속에서 존재의미가 흐려지고 있는 현대교회를 향해, 거짓교회로 탈바꿈할 수 있는 교회의 가능성을 엄중히 경고하며 공동체가 그리스도의 지상적-역사적 실존형태로서 그를 증언해야 함을 지시한다.
필자는 앞에서 언급했듯이, 현대교회가 안고 있는 성직(교권)주의, 신비주의, 세속화의 문제는 결국 교회의 자기존재, 자기인식과 관련된 올바른 '신학의 부재'라고 본다. 바르트는 당시의 어려운 상황에 직면하여 그 속에서 몸부림치며 사색했던 결과로 그리스도론적 교회론을 제시할 수 있었다. 현대교회는 세상 속에서 어려운 상황에 항상 직면해 있다. 이제 바르트는 몸부림치며 사색하며 '상황에 대한 실천적인 응답'으로서 신학하려 했던 그의 삶의 방향을 우리에게도 지시하고 있다.
V. 결 론
A. 내 용 요 약
끊임없이 변화하는 상황이 지속적으로 새롭고 다양한 교회론을 요구한다면, 현대교회를 비추어 올바른 자기인식을 갖게 하며 그 나아갈 온전한 방향성을 제시할 수 있는 교회론의 모델은 어디에서 발견할 수 있는가? 필자는 이러한 질문에 대한 대답을 얻기 위해 기초적인 연구과정으로서 20세기의 신학거장으로 불리우는 바르트의 교회론에 접근하였다.
흔히 바르트를 거대한 바다에 비유하면서, 그의 신학적 자원의 무한한 잠재성을 칭찬한다. 필자는 사람들이 바르트를 위대한 신학자로 여기는 이유 중의 하나를 그의 '교회 중심적' 신학적 사고와 행동에 있다고 본다. 이러한 그의 교회론에 대한 총체적 사고는 그의 방대한 저작인 [교회교의학]으로 집대성 되었다.
필자는 II장에서 [교회교의학]에 나타난 교회론에 대해 접근하기 전에, 바르트의 생애와 맞물려 변천되어 가는 그의 교회론의 발전을 이해하고자 관련된 내용을 다루었다. 1913년부터 1920년까지 초기의 단계에서 바르트는 세기적 사건과 목회상황을 겪으면서, 이제껏 그가 영향을 받았던 자유주의 신학과 결별하고, 하나님 중심적 사고로 전환하게 되었다. 교회에 대한 이해를 '유기적인 관계', '살아있는 친교와 공존'으로서 새롭게 다루었다. 이것을 그는 '그리스도의 몸'사상과 '하나님 나라'의 사상으로 연결시켰다.
1921년에서 1931년까지의 두번째 단계에서 바르트는 변증법적으로 교회를 이해하기 시작했다. 로마서 제 1판에 대한 수정으로 제 2판 주석에서, 그는 '하나님-세계-인간'의 관계를 '실존적'인 것으로 해석하였다. 그는 '유기적'이라는 개념 대신에 '불가시적'이라는 개념을 사용하여 교회를 '불가시적 실체'로 보았다. 이 공동체는 하나님에게만 알려진 역설적인 존재, 변증법적인 실체로서의 교회 이해였다. '절대타자', '무한한 질적 차이' 속에서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는 끊임없는 '위기'로 이해되었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이 드러나게 되었다. 공동체는 오직 그에게서 듣는 공동체여야 하며, 그 말씀을 증언하는 공동체여야 한다는 이해가 시작되면서, '말씀의 신학'으로 차츰 발전되어 갔다.
1932년부터 1968년의 세번째 단계에서 바르트는 그의 교회론의 종착지인 '기독론적 교회론'에 이르게 된다. 여기에서 바르트는 유비론적 사고 속에서 하나님과 인간의 만남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이루어 질 수 있음을 표명한다. 역사적 사건인 예수 그리스도의 파루시아(parousia)를 재평가하면서, 교회 공동체를 이 두 파루시아 사이의 시간에 존재하는 그리스도의 지상적-역사적 실존형태로 이해한다.
필자는 III장에서 바르트의 [교회교의학] IV/1-3을 중심으로 그의 교회론에 본격적으로 접근하였다. 특히 여기에서 필자는 있는 그대로의 바르트의 입장과 그의 대변을 소개하고, 내용을 충실하게 이해하기를 원했다.
[교회교의학] IV/1에서 바르트는 공동체의 회집(gathering)을 다룬다. 성령의 사역으로서 공동체안에는 하나님의 객관적인 은총이 주관적으로 적용되는 일이 일어난다. 이 공동체는 그리스도 예수의 지상적-역사적 실존형태, 즉 '그리스도의 몸'으로 다루어진다.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공동체는 그의 머리인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성', '거룩성', '보편성', '사도성'을 갖게 된다. 이것은 그리스도 예수와의 연합의 사건에 기초한 것들이다. 이 공동체는 그리스도 예수의 두 파루시아(parousia) 사이의 시간 속에서 온 인류의 '칭의의 선행적 묘사'로 존재한다.
[교회교의학] IV/2에서 바르트는 공동체의 건립(Upbuilding), 성장(Growth), 유지(Upholding), 질서(Order)라는 실제적인 부분을 다룬다. 바르트는 이제 공동체의 건립을 '성도의 교제'로 이해한다. 그리고 그는 '유기적인 성장'을 신적인 행위의 전제로 해석하면서 공동체의 수평적, 수직적 성장을 표명한다. 그러나 그는 내적, 질적 성장에 우선을 둔다. '성도의 교제'에는 내적, 외적인 위협이 도사리지만, 이미 승리하신 예수 그리스도와의 연합 속에서 공동체의 생명은 하나님께 감취어져 있다.
이 공동체는 이제 온 인류의 '성화의 선행적 묘사'로 존재하면서 봉사의 직무를 감당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지상적-역사적 실존형태인 교회는 질서가 필요하며, 바르트는 이러한 교회질서로서의 '교회법'이 갖어야 할 내용으로 '봉사의 법', '예전적인 법' 그리고 '살아있는 법', '모범적인 법'을 강조한다.
바르트는 [교회교의학] IV/3에서 공동체의 보냄(Sending)을 다루면서, 세상사 속에 있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교회를 이해한다. 세상 가운데 있다는 사실 속에서 공동체는 자기인식, 존재목적, 존재방향을 묻게 되며,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하나님과 화해된 세상을 보고, 이에 참여하게 된다. 예수 그리스도가 세상을 위해 모든 것을 준 것처럼, 공동체는 세상에 대한 '봉사'를 위해 보냄을 받고, 세상 가운데서 그의 '증언의 공동체'로 존재한다. 그리하여 공동체는 온 인류의 '소명의 선행적 묘사'로 존재하게 된다.
바르트는 교회의 존재가 철저하게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생명력을 갖게 되고, 유지되며, 성장함을 강조한다. 필자는 IV장에서 II, III장에 기초하여 얻어진 지식을 토대로 바르트의 교회론의 가치성을 살펴보았다. 그리고 그의 교회론이 현대교회의 갱신에 기여하고 제시해 줄 수 있는 방향성을 기대하면서, 현대교회가 갖는 구체적 위기에서 바르트가 제시하는 방향성을 발견하고자 하였다.
B. 평 가
바르트는 종교의 인식론적 질문들이 지배하고 있던 현대신학의 조류를 '위로부터의 계시'에 중심을 갖는 방향으로 급선회시킨다. 이러한 그의 사고는 결국 그리스도론에 정초한 '교회론'에 집중되어 있다. 바르트의 [교회 교의학] 제 VI권은 기독론을 다루고 있으며, 최고의 작품으로 평가된다. 여기에서 그는 세 가지의 보편적인 길을 제시하고 있다. 먼저 그리스도론을 다루고, 그 다음에 죄론을 다루며, 다음은 그리스도인의 공동체적인 삶과 개인적인 삶을 다루고 있다.
필자는 이미 앞 장에서 바르트의 교회론이 갖는 가치성을 피력한 바 있다. 그러므로 여기에서는 그의 저작 [교회 교의학] 제 IV / 1, 2, 3에 나타난 교회론이 갖는 약점을 몇 가지 살피고자 한다.
첫째로, 지나친 그리스도론에 집중된 교회론이 갖는 오해의 요소이다. 즉 그의 교회론이 그리스도론에 집중되어 있음으로 인해서 상대적으로 교회론이 독자성을 상실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의 그리스도론적 기초설정이 오히려 화해론 뿐 아니라 교회론의 내용도 규정, 제한하는 인상을 준다.
둘째로, 교회와 하나님 나라에 대한 오해의 요소이다. 바르트는 [교회 교의학] 제 IV / 1, 2, 3에서, 교회를 중간기에 존재하는 칭의, 성화, 소명의 지상적-역사적 실존형태로 강조하여 왔다. 바르트는 이러한 칭의, 성화, 소명을 공동체가 하나님 나라의 선행적 묘사로서 갖는 존재의미로 제시한다. 그가 이미 "교회는 하나님의 나라가 아니다", "교회는 그리스도가 아니다"라고 언급했지만, 마치 교회가 하나님의 전(前)단계 처럼 인식될 오해가 생긴다. 우리는 교회를 그의 말 처럼 하나님 나라를 반영하며 지시하는, 중간기에 존재하는 하나의 실재로서 이해해야 한다.
이러한 약점에도 불구하고 필자는 바르트와 그의 교회론이 갖는 가치는 실로 크다고 본다. 우리는 한 사람과 그의 사상이 가지고 있는 그대로의 실체에 대해서도 서로 상반된 견해를 강점과 약점으로 제시한다. 20세기의 신학거장이라고 불리우는 그에게 잠재되어 있는 신학적 자원을 모두 이해할 수는 없겠지만, 그의 교회론은 그가 직면한 상황에 대한 사색과 교회와 자신의 실천을 향한 몸부림을 느끼기에 부족하지 않다. 그는 아직도 그의 신학 안에서 이 시대를 살아 가고 있는 우리들에게 끊임없이 질문하며 또한 새로운 미래를 지시하고 있다.
C. 결 어
필자는 본 연구의 서론에서 바르트의 교회론에 대한 이해와 그의 교회론이 현대교회에 줄 수 있는 방향성을 발견하고자 함을 언급하였다. 바르트의 신학은 철저하게 교회를 위한 실존으로서 마치 오늘날 신학과 교회와의 상충된 듯 보이는 관계를 비판하는 것 같다.
그의 교회론은 필자의 신학적 상상력을 자극하였으며, 필자의 신학적 실존의 본질과 목적을 재정립하는 초석이 되었다. 그는 교회와 세계를 향하여 그들이 부여받은 책임을 각성시키고 이를 반드시 수행하도록 외친 기독교 세계의 양심이었다. 지금도 그는 신학과 상황 안에 늘 직면해 있는 현대교회를 향해 끊임없이 묻고, 끊임없이 대답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 우리에게는 하나의 과제가 남아 있다. 그것은 우리가 공동체에로의 성실한 연합과 삶의 예배를 통한 그리스도의 임재를 세상 가운데 드러내는 것이다. 그것은 이미 바르트가 공동체의 실존이 그 안에 있는 그리스도의 실존을 드러내야 한다고 언급한 것 이상의 그 어떤 것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