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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물관의 해바라기 불상과 척화비
국립경주박물관 깊숙이 들어가 남쪽을 바라보는 사무실 벽면을 마주하면 20여구의 부처들이 상처를 안고 해바라기 하는 모습을 만나게 된다.
숱한 중생들의 머리 조아림을 높은 곳에서 시선을 아래로 하고 가여운 눈길로 맞았을 부처가 대부분 머리를 잃고, 팔이 없거나 다리가 잘려나간 불구의 몸이 되어 해바라기 하고 있다. 누군가의 보살핌을 받아야할 중생의 입장이 된 것 같은 부처의 상실된 몸통이 안타깝다. 도대체 왜 머리가 잘려나가고 팔이 뜯겨진 모습으로 지붕도 없는 외진 곳에서 해바라기하고 있는 것인지 역사를 거슬러 까닭이라도 알고 싶어진다.
경주 남산에서, 분황사 터에서 더러는 출토된 곳도 모르는 곳에서 한적한 곳으로 옮겨져 지하철 노숙자 모습을 하고 있는 지 궁금해지는 것이다.
또 출토지역을 알 수 없는 돌무덤의 흔적, 외세 침략에 맞서 나라의 힘을 키우기 위해 쇄국해야 한다며 국민들의 결속을 강요하던 척화비도 경주박물관의 동남쪽 정원에서 눈비를 맞으며 역사를 기꺼이 지키고 있다.
머리 하나만 중학생 키만한 부처의 머리, 구부정한 4m 크기의 입불상, 산산조각난 입불상이 하반신을 잃은 상반신의 수려한 자태를 가진 부처가 나란히 이웃하고 서 있는 모습도 역사 속으로 방문객의 생각을 끌어들인다. 국립경주박물관 옥외전시장의 남쪽과 동쪽을 돌아본다.
박물관의 해바라기 불상
❚부처님의 해바라기
경주박물관 정원의 남쪽 사람들의 발길이 잘 닿지 않는 곳의 벽면에 20구의 신체가 온전하지 못한 부처들이 햇살을 정면으로 맞고 있다. 박물관 전체 배치에서 한쪽으로 치우쳐 있지만 아침부터 저녁까지 온전히 햇빛을 볼 수 있는 따박뜻한 곳이다.
장항리 절터에서 훼손되어 발견된 불상의 상반신
이곳에 흡사 유배되듯 버려진 듯 일렬로 정렬된 채 앉아있는 부처들은 머리가 있는 부처는 찾아보기 어렵다. 팔도 온전히 붙어있는 모습도 몇 되지 않는다. 그러면 이곳 석불들은 왜 머리가 없을까? 남은 몸통을 보아 머리가 있었던 흔적은 분명히 있다. 일제시대의 억압을 크게 생각하고 있는 우리나라 사람들은 가장 먼저 일본사람들의 소행으로 떠올리고 그렇게 대답한다.
1965년 경주 분황사를 발굴할 때 분황사 터의 우물 속에서 통일신라시대에 조성된 것으로 보이는 석불들이 많이 출토됐다. 거의 대부분의 석불들이 머리가 없어진 모습이었다. 학자들은 가장 먼저 지진과 같은 자연재해를 꼽는다. 지진으로 땅이 흔들리면 받침대 위에 앉아 있던 불상이 굴러 떨어지면서 약한 부분인 목이 쉽게 훼손되었을 것이라는 짐작이다.
이어서 몽고와 왜적의 침입 등의 전쟁으로 불상이 훼손된 것이라는 이유도 설득력이 있다. 다음으로 조선시대의 불교를 억압하고 유교를 숭상하는 국가이념에 따라 고의적으로 불상을 훼손한 사례도 있다는 기록이 있다.
조선왕조실록에 땀을 흘리는 불상에 관한 기록이 있고, 이러한 이야기들이 세상을 현혹시키는 것으로 간주해 유생들이 불상을 파괴했다는 것. 목불은 불에 태우고, 금동불은 저수지나 바다에 버렸다는 것이다.
국립경주박물관 옥외전시장 남쪽에 머리 부분이 사라진 부처들이 줄지어 앉아 있다
분황사 우물 속에서는 불상의 몸체보다 불상의 머리수가 모자라게 발굴됐다. 부처의 머리를 잘라 관청에 신고한 사례도 있었다고 하니 부처의 머리수가 모자라는 이유를 미루어 짐작할 수밖에 없다.
장정 한 둘이서는 도저히 들 수 없을 무거운 석불이 무더기로 우물 속으로 폐기될 때 부처를 지키는 승려들은 없었을까? 그들은 무사했을까? 승려들과의 몸싸움은 없었을까? 그냥 부처의 머리가 날아가고 우물 속으로 폐기될 때 ‘나무아미타불’만 암송하며 안타까운 마음으로 ‘저들을 용서하소서’를 기원하고 있었을까?
국립경주박물관에 있는 돌방무덤석재
높은 좌대에 올라앉아 중생들의 머리 조아림과 우러러봄을 익숙하게 여겼을 불상들이 머리를 잃고 온전치 못한 몸으로 해바라기 하고 있는 모습은 지하철 노숙자를 떠올리게도 한다. 그러나 아직 앉아있는 자세, 남아있는 어깨는 당당하다.
허물어진 자세로 해바라기하고 있는 불상들을 거쳐간 시간이 가져다주는 역사의 현장들을 하나하나 제대로 만나보고 싶은 마음이 들게 한다.
❚우리는 외세의 침입을 봉쇄한다
요즘 잘나가는 커피숍이 박물관의 동남쪽 모서리 부분에도 ‘다연’이라는 다정스런 이름으로 방문객을 맞고 있다. 다연에서 입맛을 다시며 문을 열고 나오면 정면으로 쳐다보는 초등학교 고학년생 키 정도의 화강암 비석을 만나게 된다. 높이 1.5m 돌비석이다. 풀밭에 발을 담근 채 선명하게 내력이 담긴 글을 가슴에 새기고 있는 척화비다.
척화비
“洋夷侵犯 非戰則和 主和賣國(서양 오랑캐가 침입하는데, 싸우지 않으면 화친하자는 것이니, 화친을 주장함은 나라를 파는 것이다)”라는 큰 글자가 새겨져 있다.
“戒我萬年子孫 丙寅作 辛未立(우리들의 만대자손에게 경계하노라. 병인년에 짓고 신미년에 세우다)”라는 내용의 글도 함께 조금 작은 글씨로 새겨져 있다.
1866년 병인양요와 1871년 신미양요를 겪고 고종 때 대원군이 쇄국정책을 펼치면서 나라 곳곳에 세운 척화비 중의 하나로 경주 사정동에 세워졌던 비석을 옮겨둔 것이다.
지금까지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척화비는 충남 홍성과 부산 용두산공원 등 20여 곳에 같은 내용의 글을 새긴 비석으로 서 있다.
대부분 같은 내용을 기록하고 있고 문화재자료 등으로 지정 관리되고 있다. 이에 대해 지역마다 시대적으로 맞지 않는 것이며 문화재적인 가치가 없어 폐기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한다.
흥선대원군은 “서양 오랑캐가 침입해 오는데 그 고통을 이기지 못해 화친을 주장하는 것은 나라를 팔아먹는 것이며, 그들과 교역하면 나라가 망한다”고 추상같이 꼬장꼬장한 자세로 불같이 엄명을 내렸으리라. 외교의 문을 닫아거는 대원군의 쇄국의지 강한 목소리가 오늘날 밀려드는 FTA 물결에 반대하는 농민들의 목소리와 겹쳐 생각된다.
지나온 과거에 이루어져버린 역사 속의 일들이지만 당시 외교문물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면 어떻게 변했을까 등으로 상상해보는 역사기행의 묘한 맛을 느끼게 하는 유물이다.
❚장항사의 허리 잘린 입상불
박물관을 들어서면서 왼편으로 길게 조성된 화단에 남산 철와골에서 출토된 아이 키높이의 부처 머리상과 구부정하게 생긴 낭산에서 옮겨온 서 있는 부처, 유난히 돋보이는 대리석 부처의 상반신이 순서대로 눈에 들어온다.
머리와 어깨가 잘린 불상
경주의 석불들이 대부분 화강암으로 조각된 것과 다르게 장항리 절터에서 옮겨온 허리 잘린 입불상은 대리석으로 조각돼 연분홍색으로 마치 화장을 한 것 같은 모습이다.
석굴암이 있는 토함산에서 대왕암이 있는 동해를 바라보며 동쪽으로 내려오는 산줄기에 잡초 무성하게 자란 곳에 절터가 하나 있다. 절의 이름이 전하지 않아 장항리의 지명을 따서 장항사 혹은 탑정사라고 부른다. 절의 동쪽과 서쪽에 높이 10여m에 이르는 같은 모형의 탑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서탑은 1925년 도굴범들이 폭파해 1932년에 복원했는데 신라시대 탑으로는 보기 드물게 5층석탑으로 조성됐다. 이때 하반신이 사라지고 조각만 남은 상반신을 모자이크하듯 붙여 복원한 불상을 박물관으로 옮겨 복원했다.
장항리 절터에는 두기의 오층석탑과 사자와 연꽃무늬가 새겨진 팔각형의 불상대좌가 남아 있었다. 이 불상은 하반신이 없이 상반신만 발견되었지만 남은 대좌에 촉을 꽂아 고정할 수 있는 구멍이 있어 부처는 입상이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상반신이 2.5m 크기로 보아 전체 불상은 4.8m 키는 되었을 것으로 큰 불상이었다고 짐작된다.
당시 산산조각 난 석불을 복원하면서 깨어진 흔적이 뚜렷하게 드러나 다시 성형수술 하듯 재복원해 지금은 제법 말끔한 부티가 흐르는 부처의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여전히 하반신이 없는 상반신만 드러나고 왼팔은 아예 없이 오른팔도 어깨에서 손목부분까지는 떨어져나가고 없는 형태다. 조각기법이 미세해 옷주름이 바람에 펄럭이듯 아름답게 새겼다. 광배에도 5구의 불상이 섬세하게 조각돼 있다.
석굴암의 불상과 비슷한 모습과 기법으로 새겨져 통일신라 예술성이 최고조로 달했던 시기에 조성되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아름다운 불상의 자태가 깨어진 조각으로 남아 아픈 역사를 생각하게 한다.
❚머리와 몸통이 박물관에서 조우한 부처
키가 3.76m의 멀쓱하게 큰 돌부처가 경주박물관 동쪽 옥외전시장에 서 있다. 구부정하게 다소 어정쩡한 모습으로 약병을 왼손에 들고 서있는 관음보살이다. 낭산 문무왕 능지탑지에서 발견돼 옮겨 온 것으로 전해진다. 이 입불상은 머리와 몸통, 연화대좌가 제각각 다른 시기에 발견돼 박물관에서 조우해 본래 하나의 몸체로 부활했다.
일제강점기에 불상의 머리가 먼저 경주박물관으로 옮겨졌다. 그러던 중 몸체가 낭산 능지탑 근처에서 반쯤 묻혀있는 상태로 발견됐다. 1975년 불상의 몸체를 조사하는 시기에 인근지역에 살던 노인이 “이 불상의 머리를 일제강점기에 경주박물관으로 옮겼는데 머리모양새가 일반 불상과 다르게 길쭉하게 생겼다”고 증언해 박물관의 머리와 낭산의 부처몸과 하나라는 것을 알게 됐다.
또 1977년 4월 부처의 몸체가 묻혀있던 부근에서 앙련과 복련이 뚜렷하게 구분되게 조각된 연꽃대좌가 발견돼 현재의 완벽한 모습을 회복하게 됐다. 이 부처는 얼굴이 왜곡되게 길게 표현되었고 얼굴모습 또한 통일신라시대의 수려하고 미려한 모습과 다르게 입술과 코가 두터우면서 무뚝뚝한 표정을 하고 있다. 옷자락은 비교적 상세하게 표현했다. 발가락까지 조각한 입상으로 왼손에 정병을 들고 있는 관음보살로 복원돼 경주박물관 동쪽에서 서편을 바라보며 방문객들을 만나고 있다.
이 관음보살은 길쭉하게 머리 위에 얹혀 마모가 심한 상태라 보관화불은 확인되지 않는다. 연화대좌의 기단부분이 일부 파손된 것을 제외하면 비교적 본래의 모습을 가지고 있는 흔하지 않은 부처의 모습을 회복해 다행스럽다.
낭산으로의 역사기행을 떠나기 전에 만나본다면 능지탑의 규모와 성격 등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 같다.
첫댓글 다시 보아도 안타까운 생각이 듭니다.
머리가 사라진, 허리가 훼손된
제모습을 잃은 불상들이 웅변하는 시간들... 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