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 | | | 시대 : 현대 출생지 : 전북 진안군 마령면 강정리 출생일 : 1969년 정보제공 : 진안군 문화관광과 063-430-2229
소개
지난 8월 중국 우한(武漢)에서 개최됐던 아시아역도연맹 총회. 오는 2000년11월과 이듬해 5월 개최예정인 아시아역도선수권대회의 전주유치를 위해 현지에서 전주시·대한역도연맹 연합유치단(당시 단장 여무남 대한역도연맹회장)이 치열한 유치전을 펼치고 있었다.
그러나 전북에 대한 사전지식이 없던 24개 회원국들은 전주유치를 망설이고 있었던 것이 사실. 이를 눈치챈 여무남 회장이 “전주시는 전병관을 배출한 역도도시”라고 역설하자 각국 대표들은 그제서야 고개를 끄덕이며 전주유치를 확정지었다.
‘한국이 낳은 간판역사’‘세계를 들어올린 작은거인’‘태릉선수촌 귀신’
전병관(全炳寬·37). 역도 그랜드슬램을 달성한 헤라클레스이자 전북은 물론 한국체육사를 굵직하게 장식한 간판역사다.
지난 8월 갑작스런 은퇴를 선언하기까지 17년동안 세계경량급 역도제왕임을 자임해왔고, 역도인들도 ‘1백년에 한명 나올까 말까 한 선수’로 극찬했다. 1백57㎝의 작은 몸집에도 불구하고 폭발적인 힘과 순발력이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더욱이 운동선수로서의 마음가짐과 자세 또한 단연 모범이었다. 전병관은 1969년 동부신악지형인 진안에서도 예로부터 걸출한 장사들이 많이 났다는 마령면 강정리에서 태어났다. 전덕권·박옥수씨 사이에 2남2녀 가운데 장남.
전병관은 12살이던 지난 82년 진안마령중 1학년 때부터 바벨을 잡기 시작했다.
전병관은 당시 바벨을 잡게된 동기에 대해 “교내 체력검사를 끝내고 얼마되지 않아 당시 체육교사였던 정인영 선생님의 권유에 이끌려 자의반 타의반으로 역도에 입문했다”면서 “중1년때는 한참 공부에 재미를 붙일 때여서 무척 망설였다”고 회고했다.
그러나 전병관은 역도에 입문하기가 무섭게 하루가 다르게 기량을 키워갔다. 역도 입문 3개월만에 자신의 데뷔 무대였던 1982년 5월 전주에서 개최된 소년체전전북대표 선발대회에서는 고배를 마셔야 했지만 이듬해인 1983년 같은 대회에서는 3관왕에 등극하며 생애 첫승을 일궈냈다.
이후부터 승승장구를 거듭, 같은해 소년체전에 출전해서는 당시 국가대표상비군 양무신 감독의 눈에 들어 본격적으로 역도수업을 받게 됐고, 중3년때 한국역도 사상 최연소로 태극마크를 달아 일찌감치 역사로서 자리를 굳혔다. 기량이 무르익자 전병관의 역량은 세계로 뻗어갔다. 1985년 아시아주니어선수권대회를 비롯해 1989년 세계주니어선수권대회, 19190년 베이징아시안게임과 1994년 히로시마아시안게임, 1991년 세계선수권대회, 1992년 아시아선수권대회 등을 차례로 석권하는 기염을 토했다.
올림픽에서도 예외는 아니었다. 지난 1988년 서울올림픽에서 은메달을 획득해 역도사상 첫번째 금메달을 예감케 했고, 마침내 1992년 바르셀로나올림픽에서 국민들의 전폭적인 성원을 등에 업고 당당히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국내 역도선수 가운데서는 유일하게 세계선수권과 아시아선수권, 올림픽과 아시안게임을 석권한 그랜드슬래머다.
전병관은 개인적으로 1991년 독일세계선수권대회와 1992년 바르셀로나올림픽 우승 그리고 당초 메달권 진입을 예상했던 1988년 서울올림픽에서 은메달을 차지했던 기억을 생애최고의 순간으로 꼽는다.
그러나 전병관에게도 좌절과 실패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전성기라고 자부했던 1993년 멜버른세계선수권대회에서 실격패를 당했고, 1994년 이스탄불세계선수권대회서도 메달권 밖으로 밀려나기도 했다. 1996년 4월 아시아선수권대회에서는 인상·용상 모두 0점기록의 오명을 남겼다. 그러나 가장 쓰라린 경험이었다면 1996년 애틀랜타올림픽에서의 몰락, 당초 올림픽 2연패를 자신했던 전병관은 역도 59㎏급에서 실격당하는 충격을 겪었다. 인상1차·2차시기에서 각각 1백30㎏과 1백35㎏을 들어 올린뒤 3차시기(1백37.5㎏)에서 실패한 전병관의 중간순위는 6위. 아직도 기회는 열려 있었다. 선두와의 차이 2.5㎏은 주특기인 용상에서 얼마든지 뒤집을 수있는 차이 였다.
그러나 심리적 압박감은 바벨의 무게를 짓눌렀다. 용상1차시기 도전중량 1백65㎏. 평소같으면 눈감고도 들어 올리는 무게였지만 경기대에 오르자마자 쫓기듯 바벨을 잡아챘다가 실패하고 말았다. 다급한 나머지 2.5㎏ 늘린 1백67.5㎏으로 2차시기에서 만회를 노렸지만 이 역시 허사. 3차에서도 2.5㎏ 늘려 최후의 뒤집기를 시도했지만 바벨을 무릎까지 들어올리다 떨구고 말았다.
애틀랜타올림픽 노메달 충격으로 잠시동안 은퇴를 선언하기도 했다. 주위의 따가운 시선 때문에 심신이 지쳐 바벨을 쳐다보기가 싫었기 때문. 그러나 1997년들어 재기를 선언했지만 안팎의 우환만 겹쳐갔다. 같은해 12월 몸담고 있던 해태음료역도팀이 해체되면서 5개월동안 무적자로 떠돌았고, 1997년 전국체전에서 5위에 그치는 최악의 성적을 기록했는가 하면 지난해 5월 아시안게임 대표선발전에는 훈련부족을 이유로 불참했다.
그러나 절치부심 끝에 지난해 4월 고향팀인 하이트맥주에 새로운 둥지를 틀었고 지난해 제79회 제주체전에서 당당히 3관왕을 차지, 다시한번 재기 가능성을 타진했다. 역도의 경우 한번 들었던 기록은 어느 정도 연습하면 다시 들어올릴수 있고 백전노장다운 게임 운영능력과 순발력은 전병관을 다시 전국체전 정상은 물론 세계무대 제패로 이끌 것이라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그러나 전병관은 지난 8월 은퇴를 전격적으로 선언했다. 지병이던 위궤양이 악화됐기 때문.
선수생활동안 체중조절 강박관념을 떨칠수 없었던 전병관은 급기야 만성위궤양에 시달려야 했다. 올해들어서는 극심한 통증으로 한계상황까지 이르렀다. 가족들은 당장 운동을 그만두라며 성화였고, 본인 역시 체력한계까지 실감해왔던 탓에 소속팀인 하이트맥주에 미련많은 사표를 제출했다.
전병관은 현역시절 공부하는 선수로 이름높았다. 단 한번도 ‘과학적인 것은 반드시 이긴다’는 마음을 잊지 않았다.
대표적인 사례가 역도화. 1992년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획득한뒤 포만감에 젖게 됐다. 새로운 목표가 필요했다. 궤도수정한 신목표는 세계신기록 수립과 자신의 몸무게 3배를 들겠다는 야심. 이를 위해서는 역도화를 새로 개발해야 했다.
1993년부터 자신의 체형과 발구조에 적합한 신발을 만드는 일에 몰두했다. 신형 역도화의 특징은 양쪽 신발의 높이 차이가 0.01㎜ 이하여서 양발에 힘이 고루 분산된다는 것. 그러나 신형역도화 때문에 1996년 애틀랜타올림픽에서 낭패를 보기도 했다. 새로운 역도화에 적응하기 위해서는 한달이상 소요되는데도 대회개막 20일전 새로운 역도화를 갈아신었고, 적응이 안돼 바벨을 들때 갑자기 힘이 빠지는 바람에 실격하고 말았다는 전병관의 주장이다.
전병관의 또다른 장점이었다면 부단한 자기개발. 힘이 생명인 역도에서 20년 남짓 한결같이 간판스타로 머물 수 있었던 것은 결코 천부적인 자질 때문만은 아니었다. 어두컴컴한 연습장 구석에서 혼자 바벨을 들어올렸던 남다른 집념이 있었기 때문이다. 오죽하면 후배들로부터 지독한 연습벌레라는 비난까지 들어야 했을까.
또한 현역시절 자세교정에도 남다른 관심을 보였다. 바벨을 들어올리는 자세가 깨끗하고 테크닉이 워낙 출중해 세계역도계에서도 작은 영웅으로 대접을 받아왔지만 자세교정만큼은 변신을 거듭했다.
1995년에는 V자형의 양발자세를 11자형으로 바꾸는 모험을 감행하기도 했다. 전병관은 한국체육과학연구소와 공동으로 세계무대를 평정할 비장의 카드로 양발자세 교정훈련을 해왔다. 양발을 V자형으로 벌린 상태에서 바벨을 들어올리면 발목부위에 불필요한 힘이 걸린다는 사실을 알아낸뒤 11자형으로 바꿔버린 것.
또한 ‘새는 좌우의 날개로 비행한다’는 점에 착안, 새로운 훈련방법을 고안하기도 했다. 종전 훈련방법은 바벨을 들어올려 놓고 몸을 상하로 움직이며 중심을 잡았지만, 전병관은 무게중심을 좌우에 고르게 균분, 힘을 극대화했다.
전병관의 최고기록은 1995년 작성한 인상 1백40㎏와 용상 1백72.5㎏. 여태껏 전국체전에서 전북에 선사한 금메달수가 25개 남짓. 개인적으로는 중3년때 작성했고 아직도 난공불락으로 남아있는 인상 97.5㎏·용상 1백25㎏을 가장 아끼는 기록으로 여긴다.
역도를 앞세워 국위를 선양한 점을 인정받아 1992년 청룡장을 비롯해 맹호장(1988년), 기린장(1987년), 체육포장(1984년)이 수여됐다. 1990년과 1994년에는 대통령표창을 받기도 했다.
1996년11월, 8년간 교제했던 동갑내기 서경미씨와 결혼해 1남1녀를 두고 있다.
전주고-고려대를 거쳐 고려대 교육대학원까지 마친 ‘연구파’이기도 하다.
전병관은 “내년 시드니올림픽에서 다시한번 세계를 들어올려 대미를 장식하고 싶었지만 더이상 선수생활을 지탱하기 어려웠다”며 아쉬움을 토로했다. 또한 “도민들의 성원이 없었다면 전병관은 없었을 것”이라면서 “앞으로 지도자 또는 스포츠용품사업에 나서 제2의 바벨인생을 활짝 열겠다”며 포부를 다졌다.
◈ '산'을 들어 흐름 제압하다
역도는 무조건 많이 드는 장사를 가리는 경기가 아니다. 얼핏 선수가 관중들 앞에서 무거운 쇳덩이를 들어올리며 힘자랑을 하는 경기로 보이겠지만 그리 간단하지 않다. 정밀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세심한 기술이 요구되기도 하고, 경기장 뒷편에서는 감독들이 피말리는 작전싸움이 불가피하다.
상대편의 기를 죽이기 위해 엔트리신청때 평소기록을 높여 놓는다든지, 상대의 방심을 유도하기 위해 일부러 기록을 낮춰 엄살을 떨기도 한다.
무엇보다 작전의 백미는 역시 경기장에서의 중량신청. 낮은 중량을 신청한 선수가 먼저 바벨을 잡아야 하기 때문에 그중에서도 1차시기 중량신청이 가장 중요하다. 이는 또한 시기수에 관계없이 적용된다. 예를 들어 A선수가 인상 1차시기에서 1백30㎏을 신청하고 B선수가 1백20㎏을 신청해 B선수가 성공했더라도 2차중량이 1백30㎏을 넘지 않으면 3분이내에 또다시 무대에 올라야 한다.
실력없는 선수는 연거푸 3번을 들어야 하지만 당초 중량신청을 높게한 선수는 상대편이 헉헉거리는 것을 여유있게 지켜본뒤 단번에 더높은 중량을 들어 게임의 흐름을 바꿔놓을 수 있다.
전병관은 이같은 역도의 특성을 가장 정확하게 이해했던 선수이기도 하다. 몸으로 역도를 체득했을 뿐만아니라 머리로 경기에 나섰기 때문.
그렇다면 작은 거인 전병관이 여태껏 들어올린 바벨의 무게는 얼마나 될까.
바벨을 처음 잡았던 때인 1982년 전국소년역도선수권대회부터 은퇴할때까지 전병관의 경기출전수는 모두 45차례 남짓.
각종 국내·외 대회에 출전해 최종기록 기준으로 인상에서 6천2백여㎏, 용상에서 7천8백여㎏을 들어올렸다.
여기에다 역도가 인상과 용상 각 3차시기까지 실시되고 1·2차시기 기록이 3차시기 기록보다 약간 낮은 점(통상 95%)을 감안하면, 전병관은 지난 17년동안 공식대회에서만 무려 4만4천4백여㎏을 들어올린 것으로 집계된다. 1백57cm의 단신이 1t짜리 트럭을 44번 이상 들어올린 셈이다. 한국최고기록이 그동안 전병관의 용틀임속에서 40여차례나 경신되기도 했다.
그러나 이같은 공식기록은 훈련량에 비하면 빙산의 일각이다. 현역시절 거의 하루도 거르지 않고 연중 계속되는 훈련속에서 그는 대회 때보다 무거운 중량을 수십번씩 거뜬히 들어올렸다. 이를 합산하면 거대한 산을 들어올리고도 남았다는 안팎의 분석이다.
◈ 전병관 발굴한 정인영교사
순창여중 정인영 교사(46). 손만 대면 금메달을 쏟아내는 역도계의 마이다스로 불린다.
정인영 교사의 발자취 가운데 으뜸이라면 ‘흙속 진주’였던 전병관의 발굴.
지난 77년 전북대 체육교육학과를 졸업한뒤 81년 진안마령중에 부임, 역도부를 창단했다. 전병관을 발굴한 때는 이듬해인 82년. 정인영 교사는 “학년초 교내 신입생을 대상으로 체력테스트를 실시했다”면서 “단신에도 불구하고 근력이 월등하고 순발력이 뛰어난 전병관을 어렵지 않게 찾아낼수 있었다”고 당시를 회고했다. 일단 전병관을 역도에 입문시킨뒤 혹독한 훈련이 계속됐다. 전병관 역시 “당시 엄청난 훈련량을 잊지 못한다”면서 “이같은 지옥훈련 때문에 간판역사로 올라설수 있는 발판을 마련한 것 같다”고 설명했다.
정인영 교사의 신화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지난 85년에는 전주농고로 근무지를 옮긴뒤 이번엔 로울러스케이팅팀을 만들었고, 전북로울러의 전국체전 8연패 신화 단초를 열었다.
지난 97년 3월에는 순창여중으로 옮겨 여자역도부 창설에 총력을 쏟았다. 될성싶은 낭자군 역사들을 발굴해 불과 1년만에 전국최강의 여자역사들로 길러냈다. 서여순을 비롯해 이현정·손지영(이상 순창여고 1학년) 등이 주인공들. 체육관은 커녕 기구조차 빌려가며 ‘맨땅’에서 일궈낸 기적이었다는 안팎의 찬사였다.
정 교사는 “명절에 전병관을 비롯한 제자들이 찾아와 절을 할때 가장 보람을 느낀다”며 흐뭇한 미소를 잊지 않는다.
경력 ▲1982년 진안마령중 1년때 역도 입문 ▲1983년 소년체전에서 첫번째 전국제패 ▲1984년 한국역도사상 최연소 국가대표 발탁 ▲1985년 전주고 입학 ▲1985년 아시아주니어선수권대회 우승 ▲1988년 고려대 입학 ▲1988년 서울올림픽 은메달 및 맹호장 ▲1990년 베이징아시안게임 우승 ▲1991년 독일세계선수권대회 우승 ▲1992년 실업팀 해태 입단 및 고려대 대학원 입학 ▲1992년 아시아선수권대회 우승 ▲1992년 바르셀로나올림픽 우승 및 청룡장 ▲1994년 히로시마아시안게임 우승 ▲1996년 동갑내기 서경미씨와 결혼 ▲1998년 실업팀 하이트맥주 입단 ▲1999년 공식은퇴선언 |
첫댓글 마령초등학교와 중학교, 그리고 마령과 대한민국을 빛낸 자랑스런 인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