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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련의 무영탑
<경주·불국사>
울창한 소나무숲에 가리운 불국사 쪽을 바라보는 아낙의 눈엔 어느덧 이슬이 맺혀 여윈 볼을 타고 흘렀다.
멀리 백제 땅에서 지아비를 찾아온 아사녀. 그리움에 지쳐 먼발치서나마 남편의 모습을 보고자 신라 땅을 찾았으나 용이치가 않았다.
그녀는 깊은 한숨을 몰아쉬며 못 속을 들여다봤다. 흐르는 것은 흰 구름뿐 남편 아사달도, 아사달이 조성하고 있는 석가탑의 그림자도 보이질 않았다. 다시 고개를 들어 숲속을 바라보는 순간 아낙은 흠칫 놀랐다. 아사달의 얼굴이 환히 웃으며 다가오는 것이 아닌가. 아낙은 불국사 입구를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그녀는 흘러내리는 치맛자락을 잡으며 난간에 앉아 있는 스님에게 다가갔다.
『스님, 아무리 연못 속을 들여다봐도 그리운 남편의 모습은 떠오르질 않습니다. 석가탑도 보이지 않구요. 스님, 어찌하면 아사달을 볼 수 있을까요?』
『아사녀, 그대의 애끓는 심정은 참으로 안타깝소. 그러나…』
지그시 감았던 눈을 뜬 스님은 합장한 채 애원하는 아사녀를 연민의 눈으로 바라보았다.
『스님, 이렇게 미칠 듯이 그리워하는 저의 정성이 아직 모자라서인가요?』
아사녀는 흐느끼며 말했다.
『아사녀, 아사달을 만나려는 그대의 마음은 한낱 오욕이 빚은 사랑 때문이오. 사랑은 고귀한 것이지만 오욕이 담긴 사랑은 영원할 수 없소. 그대는 자기를 버린 맑은 마음으로 불전의 탑을 조성하는 아사달의 지극한 정성을 따르며 아사달 보기를 기도하오. 그러면 관음소살님의 은혜를 입을 것이오.』
법문을 들려준 스님은 조용히 일어나 경내로 들어갔다. 스님의 뒷모습에서 숭고함을 느낀 아사녀는 합장한 채 한참을 바라보며 마음을 가다듬었다.
어둠이 내리면서 숲속을 울리는 맑고 경건한 목탁소리에 그녀는 가슴에 두 손을 모으고 관세음보살을 부르며 염불에 열중했다. 삼매에 든 그녀의 염불은 관세음보살이 아사달이 되고 아사달이 관세음보살이 됐다. 아스라해지는 의식 속에 그녀는 아사달을 일심으로 불렀다.
저녁놀이 지고 뒷산 절에서 범종소리가 들려올 때면 아사녀는 동구 밖에 나가 아사달을 기다렸다.
『아사녀, 집에서 기다리지 않고 왜 예까지 나왔소.』
『집에서 기다리기가 너무 지루하옵니다. 늘 함께 있고 싶은 마음에 지아비 계신 곳으로 뛰어가고 싶은 것을…』
홍조된 아사녀의 얼굴은 행복에 젖어 있었고, 그에 대한 아사달의 사랑은 흐르는 강물 같았다.
『아사녀, 곧 일이 끝나게 되오. 그때는 하루 종일 당신과 함께 있을 것이오.』
그러나 아사달은 또 떠나야 했다. 불국사 탑을 조성키 위해 천 리 타향 신라 땅으로 떠나야만 했다. 아사녀는 온 생애가 끝나는 것만 같았다. 「아사달-」 아사녀의 애절한 외침은 어두운 숲속으로 퍼져나갔다가 다시 메아리로 되돌아왔다. 아사녀는 메아리에 이끌리듯 숲속을 헤맸다. 시냇물이 그녀를 가로막았다. 다시 냇물을 거슬러 오르자 돌다리에 선 파수병이 그녀를 불러 세웠다.
『어디를 가시오?』
『지아비 찾아 백제 땅에서 온 아낙입니다. 제발 들어가게 허락해 주세요.』
『안되오. 절을 다 지을 때까지 잡인의 출입을 금하라는 어명이오. 여자는 더더욱 안되오.』
파수병은 그녀를 창대로 밀어냈다.
불국사 담을 끼고 돌며 아사달을 애타게 부르던 아사녀는 담을 넘어 들어갔다. 석공들이 잠든 방을 두루 살피던 그녀는 불이 켜진 방앞에 이르자 그만 숨이 막힐 것 같았다. 아사달이 단정히 앉아 있는 것이 아닌가.
『아사녀! 아사녀, 어떻게 이곳에 미칠 듯 보고 싶었소.』
『아사달! 얼마나 찾아 헤맸는지 몰라요. 다시는 헤어지지 않을 거예요.』
기쁨과 슬픔이 엉켜 두 사람은 뜨거운 포옹을 했다. 그러나 시간은 결코 그들을 위해 멈추지 않았다. 새벽이 다가오고 있었다.
범종이 울리고 목탁소리가 잠든 절을 깨우자 아사달은 일말의 불안을 느꼈다.
『이대로 아사녀와 백제로 돌아갈까? 아냐, 공사가 곧 끝날 텐데. 더구나 지엄한 왕명을 어긴 죄는 어떻게 하나.』
아사달은 자기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사달, 안색이 좋지 않은데 무슨 걱정이 있으세요? 혹시 제가 떠나야 하나요?』
『아사녀, 잠깐이오. 지금까지도 떨어져 살아왔소. 사람들이 알기 전에 어서 이곳을 떠나 공사가 끝나도록 기다려 주오.』
아사녀는 아사달 가슴에 얼굴을 부비며 흐느꼈다.
『아사녀, 지루하고 견딜 수가 없거든 절 앞 영지를 들여다보시오. 내가 쌓아 올리는 탑이 비치고 내 모습도 비칠 것이오.』
말을 마친 아사달은 방문을 열고 나가려 했다. 아사녀는 울며 아사달의 옷깃에 매달렸다. 온 힘을 다해 잡으려 했으나 아사달은 자꾸만 멀어져갔다. 안타까운 아사녀는 있는 힘을 다해 아사달을 불렀다.
꿈이었다. 아사달을 부르는 자신의 소리에 소스라쳐 깬 아사녀의 온몸은 땀에 젖어 있었다.
아침 햇살이 눈부셨다. 맑게 가라앉은 연못은 햇빛을 반사하고 있었다.
아사녀는 못가로 다가갔다. 한 걸음 다가서서 못 속을 들여다보고, 또 한 걸음 다가가서 못 속을 들여다봤다. 어느덧 아사녀의 걸음은 빨라졌다. 아사달의 이름을 뇌이던 그녀는 못가에서 걸음을 멈췄다. 수면이 일렁거렸다. 그녀의 얼굴이 흩어졌다 모아지고 다시 흩어졌다. 그 얼굴은 아사녀의 얼굴이 되기도 하고 아사달의 얼굴로 보이기도 했다.
아삳라의 얼굴이 환히 웃으며 그녀를 부르고 있었다. 아사녀는 두팔을 들어 아사달을 불렀다. 그러자 아사달이 저만치서 팔을 벌리고 그녀를 손짓해 불렀다. 그리움과 반가움이 그녀를 휘감았다.
아사녀는 아사달을 부르며 못 속으로 뛰어들었다. 아사달을 부르는 애절한 외침이 수면으로 퍼져 올랐다가 사라졌따.
사람들이 뛰어왔을 때 아사녀의 꿈과 사랑과 비원을 삼킨 영지는 아무 일 없는 듯 조용했다. 수면엔 흰구름과 숲을 안은 불국사가 비치고 있을 뿐 석가탑은 비치지 않았다.
아사녀의 슬픈 죽음을 전해 들은 아사달도 아사녀를 부르며 못 속으로 몸을 던졌다.
그 후 석가탑은 영지에 그림자가 비치지 않았다 해서 무영탑이라 불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