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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야모토 무사시(宮本武藏, 1584∼1645). 60여회 이상의 대결에서 단 한 번도 진 적이 없는 전설적인 검객으로, 일본에서는 그를 '검성(劍聖)'이라 부르고 있다. 젊은 시절, 16세기 실존 인물이자 역사상 가장 위대한 무도인 중 하나로 알려진 다케다 신겐의 편에 서서 전쟁에 참전했다가 패전한 후 평생 아내를 맞아들이지 않고 머리에 빗질을 하거나 목욕도 하지 않은 채 떠돌이 낭인생활을 했으며, 장검의 달인 사사키 고지로(佐佐木少次郞)와의 결투를 끝으로 69번에 걸친 목숨을 건 싸움에 종지부를 찍으며 이천일류를 탄생시킨 장본인이다.
하지만 그는 검객이기 이전에 서화와 불상조각에 능하고 노장(老莊)사상에 영향을 받은 도인이기도 했다. 그는 죽기 2년 전, 즉 도쿠가와 이에야스에 이어 3대 쇼군에 오른 이에미쓰가 집권 20년째를 맞은 1643년에 무사시는 그와 오랫동안 교류해 온 구마모토 영주 호소카와 다다토시(細川忠利)의 지시로 운간사라는 절에 머무르면서 [오륜서(五輪書)]를 집필해, 현대까지 내려오는 사무라이 정신을 집대성한다.
"난세의 방랑자"
미야모토 무사시는 400년이나 계속된 일본의 내전이 한창이던 1584년에 태어났다. 당시 전국시대의 소용돌이 속에 있던 일본은 지방군벌, 무장승려, 도적들이 날뛰었으며 다이묘(大名)라고 하는 지방 영주들은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성을 쌓고 이를 중심으로 도시를 형성한다. 그러나 전국의 혼란은 오다 노부나가의 등장으로 해결의 가닥을 보이고, 1582년 노부나가의 암살 후 등장한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통일에 박차를 가하게 된다.
권력을 잡은 히데요시는 통일작업을 수행하는 한편 권력의 집중을 위해 칼의 소지를 제한한다. 즉 단검은 모든 사람들이 갖고 다닐 수 있지만 장검은 사무라이만이 지닐 수 있도록 한 것. 이로 인해 사무라이는 최고의 자리에 오르게 되고 히데요시의 아래에서 일본은 평화의 길로 들어서는 듯 보인다. 그러나 통일의 과업은 1598년 히데요시의 죽음으로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이어진다. 1603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히데요시의 아들인 히데요리를 무찌르며 쇼군이 된 이에야스는 일본에 관료정치와 철저한 계급사회를 지향한다. 이 때, 일본은 사무라이, 농민, 예능인, 상인의 4계급으로 나눠지며 사무라이는 또한 군주, 장군, 무장 및 일반병사로 구분되었다.
무사시 역시 사무라이 계급에 속했다. 그러나 에도 시대를 통해 평화가 정착되자 일자리를 잃은 사무라이들은 전국을 떠돌게 되는데 무사시 또한 그런 방랑무사 중 하나였다. 사무라이들은 전통적인 무사도에 근거한 사회에 살고자 했으나 당시 무장한 무사를 필요로 하는 곳이 더욱 없어지면서 이들은 사회로부터 더 격리되고 무사들은 예능인으로 전락하거나 낙향해 도장을 열고 스스로 무사정신에 몰두하며 하류계급화 되어 간다. 그리하여 이때부터 일본에서는 검도가 하나의 국민적인 도예로서 정착하게 된다.
"사무라이의 정신을 완성시킨 검도인"
무사시의 검법은 '이천일류'로서 그가 만년에 저술한 [오륜서(五輪書)]에 집대성되어 왔는데 그의 검법은 사무라이 정신과 결합해 봉건 도덕의 버팀목으로 이용되었다. 무사시는 끊임없이 자신을 단련하는 금욕주의자이자 어떤 승부에서도 반드시 경쟁자를 이겨야 한다는 철저한 원칙주의자였다. 검술 시합에서 적을 쓰러뜨리기 위해서는 상대와 자신의 사이에 정신과 기술을 절묘하게 조화시켜야 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29세 때까지만 대련한 이후 방랑길에 오른 무사시는 1대1의 병법을 소병법이라고 하며 용병의 도를 터득하는 대병법을 터득하고자 했다. 예컨대 "집이나 몸, 적이 허물어지는 것은 모두 때가 되어 박자가 어긋나 허물어지는 것이다. 따라서 많은 수의 싸움에서는 적이 허물어지는 때를 알고 그 순간을 포착하는 것이 중요하다"며 결정적인 기회를 포착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지 알려준다.
또한 "치는 것과 닿는 것은 전혀 다르다. 닿는 것은 어쩌다 부딪히는 것이지만 치는 것은 작정하고 하는 일이다"라며 우연한 성공과 철저한 전략에 따른 성공의 차이를 지적한다. 한편 분명한 목적의식을 강조하는데 "누구나 적과 싸울 때 사람을 구별하지 않는다. 단지 사람을 베어야겠다고 생각할 뿐, 강하게 하겠다거나 약하게 하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라는 그의 말은 그가 얼마나 승부를 중요시하던 현실주의자임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이런 내용 때문인지 <오륜서>는 지금도 경영이나 처세술과 관련해 일본 뿐만 아니라 전세계적으로 널리 읽히고 있다. 특히 합리적이고 유연한 사고를 갖고 매너리즘에 빠지는 것을 경고하며 자신의 능력과 수단을 극대화시켜 오직 적에게 이길 것을 강조하는 무사시의 주장은 격렬한 경쟁 속에서 살아가야 하는 현대 자본주의에도 많은 시사점을 주고 있다.
"현대를 살고 있는 일본인 무사시"
어린 나이에 자신의 부모님을 죽인 원수의 집에서 자라나 복수를 꿈꾸며 검을 들었던 무사시가 최고의 검객이 되기 위해 60여회 이상의 장렬한 전투를 치루고는 홀연히 사랑하는 여자와 가족, 친구들을 뒤로 한 채 세상을 떠도는 모습은 일본인들에게는 하나의 상징처럼 가슴 속에 남아 있다.
제일 유명한 것은 이나가키 히로시 감독의 영화 <미야모토 무사시>. 이 영화는 1955년 아카데미시상식에서 최우수 외국영화상을 수상하며 우리나라의 <춘향전>처럼 일본에서 가장 친근한 고전으로 꼽히게 된다. 이로 인해 일본인들은 그를 보편적인 일본인의 전형으로 생각하는가 하면, 청소년들은 가장 존경하는 인물 중 한 사람으로 꼽을 만큼 일본인들에게 있어 미야모토 무사시는 가히 일상 속의 신화적인 상징으로 의식 깊숙이 자리 잡고 있다. 때문에 패전 후 미군정은 사무라이 영화가 일본인의 복수심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이유로 제작을 금지했을 정도.
출판계 역시 마찬가지다. 일본 내에서 많은 지식층 독자를 확보하고 있는 에이지 요시카와의 소설 [미야모토 무사시]는 적어도 일본인들에게는 미국인들에게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와 같은 의미를 지닌 작품. 2003년 들어 방송 50주년을 맞은 NHK가 어마어마한 제작비를 투자해 방송하고 있는 대하사극 역시 <무사시>이다. 또한 한국에서도 발행된 [미야모토 무사시의 전략경영](안수경 옮김, 사과나무)은 무사시의 <오륜서>를 번역한 책으로, 이 책은 일본 뿐만 아니라 미국의 인터넷서점 아마존에서 경영부문 최장기 베스트셀러 자리를 지키고 있다.
미야모토 무사시 선풍은 영화나 TV, 출판계 뿐만 아니라 만화에까지 일고 있다. 만화계를 들끓게 했던 농구 만화 [슬램 덩크]의 작가 이노우에 다케히코가 후속작으로 내놓은 [배가본드] 역시 소설 [미야모토 무사시]를 원작으로 한 것. 이렇듯 무사시는 고전적인 영웅의 모습과 현대인들의 삶에도 대단한 힌트를 주는 그의 검법이 한데 어우러져 영화, TV드라마, 만화 등으로 끊임없이 재생산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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