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비가 내리는 새벽에 할 일이 없어서 올리는 군대 얘기가 예상외로 너무 길어지는 바람에
지루한 장마같이 진짜로 재미 없는 얘기가 되어, 마지막으로 올리는 군대 얘기
回 想
-34개월의 군생활을 회상하며 쓴 글로 대구교육대학교 1977년 학보(學報)에 실린 글-
내가 ‘루짜뚱’이라는 별명을 가진 키가 무척이나 작은 그 녀석을 처음 만난 것은, 그 지긋지긋하던 유격훈련을 끝내고 지칠 대로 지친 몸을 질질 끌며 우리들의 내무반으로 들어섰을 때였다.
‘루짜뚱’이란 ‘똥자루’를 거꾸로 발음한 의미로
‘몽당 빗자루’ 정도의 키를 가진 녀석은 엄청 큰 눈의 소유자였다.
소눈만큼이나 큰 눈을 껌벅이며 조금은 겁먹은 표정으로 우리들을 바라보는 것이 녀석에게서 받은 첫인상이었다.
그 녀석은 좀 멍청한 듯이 보였다.
왜냐하면 전입을 온 첫째날 하루 종일 내무반 한쪽 구석에서, 두고 온 지 ‘짝순이’라도 생각하는지 턱을 괴고 앉아서 멍하니 생각에 잠겨 있었으니까!
‘아니야! 아마 그 녀석은 아는 계집애도 없을 거야!’
하여간 나는 새로 전입해 온 낮선 꼬마 녀석에게 무척이나 새로운 흥미를 느꼈다.
그 녀석은 전입 첫날부터 여러 가지 돌출행동으로 많이도 얻어 터졌다.
제대특명을 받아놓고 빼치카 옆에서 탱자탱자하는 말년 고참인 정병장에게 한다는 첫마디가,
“정병장님! 요즘 군대가 참 좋아졌다는데 웬만하면 말뚝이나 박죠?”
였다.
'말뚝'을 박으란 얘기는 직업군인으로 '장기복무'를 하라는 얘기다.
전입 온지 하루도 채 못 된 신병에게서 나온말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말이었다.
고참이 어떤 위치인지도 모르고, 지긋지긋하게만 느껴졌던 34개월의 군 생활을 마감하는 홀가분한 심정의 정병장에게 '말뚝'을 박으라고 했다.
정말로 맹랑한 녀석이었다.
그런 행동의 결과로 그녀석은 수시로 얻어 터졌다.
그러나 얻어 터져도 그때뿐 또다시 그런 행동은 반복이 되었다.
나는 이 신병 녀석에게 멋진 별명을 제대기념으로 하나 붙여주고 싶었다.
나 역시 제대특명을 받아 둔 상태였다.
일주일 동안 밤잠을 설쳐가며 드디어 작업을 완수하였다.
당시 우리부대 취사병으로 근무하던 덩치가 무척이나 큰 병사에 비유하여 만든
「김점식 똥무데기 만한…….」
내가 생각해도 정말로 기가 막힌, 인간의 두뇌로서는 도저히 상상 할 수 없는 그런 멋진 가사를 짓는데 성공을 하였다.
와! 그런데 이건 예상도 못한 big hit.
곡이 워낙 좋았던 데다 '엘비스 프레슬리'의 목소리를 그대로 닮은 통신병 전라도 최상병이 취입한, 녀석의 별명이 들어간 이 노래는 발표한지 일주일이 채 못 되어서 부대 내 인기가요 베스트 10곡 중에서 무려 3위를 차지하는 기염을 토하였다.
「루짜뚱! 김점식 똥무데기 만한 ......
빠안- 싼뿌라에 달구지…….」
열창되는 이 노랫소리와 함께 녀석은 아마 평생토록 날 잊지 못할 거야.
왜냐하면 얼마 안 되는 자기의 전 생애를 에누리 없이 몽땅 다 털어 봐도 그처럼 멋진 별명에 노랫말을 지어준 사람은 아마 모르긴 몰라도 처음이자 마지막이었을 테니까!
만나면 헤어지는 것이 인생의 철칙이라지만 이별의 아쉬움을 나누기에 앞서 새로운 세계를 접하시는 앞날에는 무궁한 영광과 행운이 깃드시길 기원해 봅니다.
「며루치 팔딱 뛰는 부산항구 제이 부두…….」
「서울이 좋다지만 나는야 싫어……. 밤이면 사랑방에 새끼 꼬면서…….」
로 이어지는 회식때면 즐겨 부르던 18번곡 [물방아 도는 내력]도 이젠 추억속에 노래가 되겠군요!
- 물방아 도는 내력 : 하모니카 연주 -
벼슬도 싫다마는 명예도 싫어
정든 땅 언덕 위에 초가집 짓고
낮이면 밭에 나가 길쌈을 메고
밤이면 사랑방에 새끼 꼬면서
새들이 우는 속을 알아보련다
서울이 좋다지만 나는야 싫어
흐르는 시냇가에 다리를 놓고
고향을 잃은 길손 건너게 하며
봄이면 버들피리 꺾어 불면서
물방아 도는 내력 알아보련다
삭막했던 34개월의 전방 생활!
막걸리 내음과 함께 산골에서 자라 온 사람에게서만 찾아볼 수 있는 특유의 애틋한 향수를 일게 해준 그 노랫소리도 이제는 더 들을 수 없게 되었군요.
괴롭고 생각하기조차 싫었던 군에서의 지난 시절도 돌이켜보면 아름다운 한 아름의 추억이듯이 어쩌면 우리 인간들은 추억 속에 자신을 묻고 사는 지도 모릅니다.
빼치카 옆에서 조용히 독서에 열중하는 당신에게서 저는
'이제는 돌아와 내 누님같이 생긴 꽃이여…….'라는 어느 책에선가 읽은 기억이 나는 시 한귀절이 문득 생각이 났습니다.
군이라는 특수한 집합체에서 묵묵히 34개월을 견뎌 나온 당신!
너무나 긴 여행이었습니다.
너무나 긴 고난과 역경의 연속이었습니다.
우리들의 젊음과 정열을 펼쳐보기엔 너무 춥고 어두운 3년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당신은 열심히 참아왔고 세월도 흘렀습니다.
계절이 바뀌고 당신은 또 다른 의미에서 생이란 것을 많이 배웠으리라 믿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당신이 떠나야 할 차례입니다.
눈 내리는 연병장위로 펼쳐졌던 사나이들의 하루해가 오늘도 조용히 저뭅니다.
지나간 젊음과 청춘을 회상하고 다시 그리워지는 것은 긴 여행을 끝낸 여행가에게서만 찾아볼 수 있는 만족감과 허탈감 그리고 말년이라는 어휘가 주는 안도감 때문인지도 모른다고 말입니다.
인생!
참으로 묘한 것이죠?
이름 모를 어느 골목길에서 뜻하지 않게 불쑥 만나지 않는다고 누가 보장하나요?
그 날은 우리 따끈한 술잔을 앞에 두고 내 젊음과 정열을 모두 바쳐 내조국 내 민족을 지켰노라고 열심히 얘기하며 긴 겨울밤이 다 하도록 기나긴 회포나 풀어봅시다.
하늘이 또다시 어두워집니다.
제설작업이 지긋지긋한데 눈이 또 내리려나 보죠?
당신은 알고 있나요?
왜 이렇게 지긋지긋하게만 느껴지는 제복 속에서의 기나긴 생활을 「인내」라는 두글자속에 묻어야만 하는지?
이젠 정말로 그 날이 가까워졌나 봅니다.
꽃이 피었다 지고 새가 우는 계절이 되풀이되고 천둥이 몰아온 먹구름비가 사정없이 쏟아지던 세월 그리고 함박눈이 펑펑 내리던 때가 몇 백밤이나 흘렀는지 모르겠습니다.
DMZ에 묶여서 지금은 접근하기 조차 힘이드는 어느 마을이 보입니다.
마을 어귀에는 부자집에서 경작하던 과수원이 있었습니다.
그 옛날에 과수원은 지금은 사람 손길이 가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사과나무에는 올해도 열매가 달렸습니다.
손질을 하지 못하는 바람에 사과는 조그마한 능금으로 변했습니다.
가을 햇볕을 받은 과수원의 능금들이 무척이나 빨갛게 보였습니다.
지금은 폐허가 된 철의 삼각지역에 위치한 금강산으로 향하는 이름 모를 어느 기차역도 보입니다.
울타리에는 측백나무가 심어져 있습니다.
예전에 심어진 측백나무는 아무도 손질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 바람에 지금은 교정에 플라타너스 나무만큼이나 커 버렸습니다.
가을이면 비무장지대에 위치한 예전 어느 마을 뒷동산으로 작업을 나갑니다.
DMZ에 근무하는 병사들만의 특권이지요!
분단전에 심어진 밤나무에는 탐스런 알밤이 지천으로 달렸습니다.
밤송이를 따서 W백에 담으면서 그 날의 혈전을 상상해 보았지만 뜨거웠던 피들이 지금은 차츰 식어만 가는 것 같아서 무척이나 안타까웠습니다.
사람 키를 훨씬 넘는 황금빛 갈대숲,
그 넓은 지역에 바람이 불어와 파도를 만듭니다.
갈대 사이사이로 가끔씩은 머리를 내미는 어린 고라니들이 무척 재롱스러웠습니다.
형언할 수 없는 아름다운 정경을 보며 감상에 젖어보던 시절,
땅굴을 발견하고 6개월 포상휴가에 일계급 특진의 영예를 안고 싱글벙글 떠나는 병사를 바라볼 때에는 그 행운이 내게로 돌아오지 못한 것, 운명의 여신의 축복이 내게로 돌아오지 못한 아쉬움도 화랑담배 연기 속으로 사라져 가는 추억이 되었습니다.
오늘도 어김없이 밤은 찾아왔습니다.
언제나처럼 어수선하고 소란한 내무반 분위기 - 딸그락 소리와 함께 하는 바둑알, 매일을 계속해도 끝이 없는 동료와 나누는 모포 속에서의 속삭임이 오늘도 시작이 되었습니다.
한줄기 세차게 불어온 겨울바람이 내무반 창밖에 비친 개살구나무를 스쳐갑니다.
연보라색 도라지꽃이 가득 피던 전선의 계곡마다엔 이젠 함박눈이 내려서 백설의 철책을 지키는 병사들의 마음을 더욱 외롭게 만듭니다.
멀리서 취침나팔이 구성지게 들려옵니다.
한국의 냉장고라는 이곳 화천군 대성산은 오늘은 영하 34.3°까지 기온이 떨어졌습니다.
49년만의 혹한이랍니다.
유난히도 춥고 긴 이 겨울 원한의 철책선을 넘어서 전선의 골짜기를 타고 내려오는 겨울바람은 왜 이리도 극성스러운지 모르겠습니다.
하늘이 빽빽하도록 함박눈이 내려서 연병장을 하얗게 덮을 때 남남으로 모여든 전우들이 눈 내린 연병장을 다시 챙기는 그 날, 우리들은 이 날을 영원히 기억할 것입니다.
우린 이 날을 다시 회상할 것입니다.
<76년 어느 겨울에>
첫댓글 인간을 만들려면 군대를 보내라
남자는 군대를 갖다와야 철이든다
이런 저런 말이 많던데
안가봐서 모르지만 그럴거 같기도 하네요 ㅎㅎ
🍀 고지식한 제 철학도 그런식이어서 아들 녀석이 군복무전에 입버릇 처럼
"전방부대에서 군복무를 제대로 해야 철이 들텐데..."
했습니다.
그러나 결과는 후방인 부산에서 24개월 현역복무로......
무사히 국민의 의무를 다하고 이쁜 손주들을 선물해준 대한민국의 아들로 자리 잡아 가는 아들 녀석이 기특할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