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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대 연극영화과를 졸업하고 시나리오 작가를 하다가 1996년 < 은행나무 침대 > 로 데뷔했다. 지금까지 단 두 작품을 연출했지만 모두 대단한 흥행작이었기에 상업영화 감각이 가장 뛰어난 감독으로 평가받는다. 1984년 충무로에 들어가 정인엽 감독 연출부로 시작했으며 1985년 합동영화사 연출부를 거쳐 방송프로그램, CF, 문화영화 제작, 영화수입사 직원 등 다양한 경력을 갖고 있다.
< 누가 용의 발톱을 보았는가 > < 게임의 법칙 > < 장미의 나날 > 등의 시나리오 작가였던 그는 궁중악사와 공주의 사랑이야기를 다룬 자작 시나리오 < 은행나무 침대 > 로 단숨에 주목받는 감독이 됐다. < 사랑과 영혼 > < 천녀유혼 > 등 영혼과의 사랑이야기가 붐을 이룬 다음 기획된 < 은행나무 침대 > 는 알려지지 않은 시공간을 무대로 과거와 현재를 오간다.
CG의 효과적인 사용이 돋보이는 영화로, < 구미호 > 로 이 분야에 경험을 축적한 영화사 신씨네가 제작을 맡았다. 그뒤 3년 만에 연출한 < 쉬리 > 는 한석규, 최민식, 송강호 등 스타 캐스팅, 액션블록버스터라는 컨셉, 미스터리와 멜로를 조합한 장르적 특성, 한국영화로는 처음 시도되는 특수효과 등이 화제를 불렀던 영화. < 서편제 > 의 흥행기록을 넘어 < 타이타닉 > 의 흥행기록까지 깬 < 쉬리 > 에서 그는 남북문제를 장르영화의 틀에 교묘히 안착시킨다. 여기서 남과 북은 악인과 영웅인 동시에 연인이 되는 것이다. 미숙한 연기와 개연성이 부족한 상황설정에도 < 쉬리 > 가 흥행작이 된 것은 그가 멜로드라마의 축을 조심스럽게 보존한 탓이 크다. 본격적인 상업영화, 장르영화로 해외시장을 개척하겠다는 야심을 가지고 있는 그는 개별 작품의 완성도에 대한 비판이 따를지라도 한국영화의 또 다른 영역을 개척하는 쪽이 낫다고 생각하는 감독이다.
이창동은 1954년 4월 1일 대구에서 출생했다. 그는 대구고등학교를 졸업할때까지 공납금을 제대로 내본 적이 거의 없었을 만큼 어려운 가정 환경속에서 생활했다. 그의 어머니는 삯바느질로 집안 살림을 꾸려나갔고, 해방공간에서 좌익세력에 몸을 담았었던 아버지는 당시 사회체제를 부정하던 생활력 없는 인물이었다. 그런 아버지의 영향으로 그의 큰형은 학생시위에 가담했다가 고교 2학년 때 제적을 당했고, 결국 4형제 중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까지 나온 이는 이창동 혼자 뿐이었다.
이창동은 철거민 판자촌에서 살았던 스무 살 되던 해, 재수에 실패하여 아버지한테 쫒겨났다. 그는 아버지한테 자살만큼 좋은 복수는 없다고 생각하고 유서를 남긴 후 죽으려 했다. 그는 수면제를 사들고 산동네 여인숙까지 투숙했었다. 그 다음 이야기에 대한 이창동 감독이 직접 한 말이다.
" 무슨마음에선지 그 방에 있던 새한테 약을 먹여 죽였다. 죽은 새를 보니까, 죽음이 실감났다. 새벽에 도망쳐나왔다. 그때 하늘을 봤다. 심리적으로 자살을 경험한 뒤에 본 별은 너무 찬란했다. 내가 살아있다는 느낌이 막 밀려올라왔다. 그런 느낌으로 살고 싶었다."
이창동은 40대에 접어들 무렵 영화계에 뛰어들었다. 이창동은 박광수 감독의 영화 <그 섬에 가고싶다>와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를 제작할 때 시나리오 제작에 함께 참여하고 조감독으로 일하며 영화에 대한 감각을 익히기 시작하여 두 번째 작품집을 냈던 1997년, 그는 직접 메가폰을 잡는다.
1997년 국내 최고의 영화로 <초록 물고기>가 선정됐다. 이창동의 영화데뷔작인 <초록물고기>는 현대사회에서 가족의 해체와 삭막한 도시속의 서글픈 삶을 응시한 작품으로 호평을 받았다. 이창동은 신인감독으로는 보기 드문 성과를 얻었다. 흥행 성적으로 따지면 서울에서 17만명 동원에 그쳤기 때문에 그리 대단한 일이라고는 할 수 없다. 그러나 이창동은 <초록 물고기>를 통해 30여개 국제 영화제에 초청을 받았을 뿐 아니라, 각종 영화제에서 최우수 작품상 등 4개 부문을 협회에서 주최하는 영평상에도 4개 부문을 석권했다.
그 다음 작품은 <박하사탕> 1999년에 내놓은 이 작품은 일본의 NHK가 영화 시나리오 단계에서 제작비 15%를 투자하기로 결정해 시작부터 주위의 관심을 모았던 작품으로 99년 영상물등급위원회는 <박하사탕>을 '올해의 좋은 영화'로 선정했다.
그가 글쓰기에서 영화만들기로 전향한 것은 더 이상 글쓰기로 할 수 있는 이야기가 없어져 가는 시대가 되었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창동은 결코 인문주의를 포기한 것이 아니라고 외친다. '큰 소리로 떠드는 자가 왕'인 세상에서 상업주의로 무장한 헐리우드 영화가 엄청나게 큰 마이크를 잡도록 놔둘 수 없었기 때문이다. 라고 말하고 있다. 영화 <박하사탕>은 카를로비바리 영화제에서 심사위원특별상을 수상했으며 '박사모'라는 최초로 자발적 영화팬클럽이라는 것을 탄생시켰다. 이 팬클럽은 <박하사탕>이 흥행성적을 이유로 개봉관에서 조기종영하는 것을 아쉬워하며 생긴 팬클럽이었고 이후 몇군데 영화관에서 연장상영되기도 했다.
그리고 다시 3년 후인 2002년 세번째 영화 <오아시스>가 만들어졌다. 이 영화는 베니스 국제영화제에서 감독상과 신인배우상을 수상하고, 이창동은 국내 뿐만 아니라 국제적으로도 인정받는 감독이 된다. 그리고 2003년 2월, 이창동 감독은 참여정부 출범과 함께 현역감독으로는 최초로 문화부 장관에 전격 기용돼 많은 이들에게 충격을 안겨주었다. 그리고 그 충격은 이후 '스크린쿼터축소'라는, 이전과 다른 방침을 밝혀 많은 영화계종사자들에게 실망을 주기도 했다. 하지만 취임 이후 기존의 정치인이나 관료출신 장관과는 차별화되는 수수한 행보로 많은 이들의 이목을 다시한번 집중시키기도 하였다.
그리고 2004년 6월 문화부장관직에서 물러나 영화계에 다시 복귀한 이창동 감독은 전작 <오아시스> 이후로 4년만인 2006년 네번째 작품 <밀양>을 내놓는다. 많은 이들의 기대속에 태어난 <밀양>은 2007년 칸영화제에 초청되었으며, 여주인공인 전도연이 국내최초로 칸에서 연기상을 수상하는 쾌거를 이뤘다.
그리고 이 영화는 또 다른 이유에서 이창동이라는 이름을 주목시키는데 그것은 2007년 청룡영화제에 자신의 네번째 작품인 <밀양>의 출품을 고사한 데에서 비롯된다. 그것은 청룡영화제가 조선일보가 주관한 영화제라는 것이 문제가 된 것. 어쨌든 이창동 감독은 현역감독으로서 최초로 청룡영화제 출품거부라는 기록을 남겼다. <밀양>은 그 덕분에 2007년 청룡영화제에서 작품상, 감독상후보에 제외되었다. 하지만 전도연은 또 다시 여우주연상을 수상하였다.
*2006 제44회 영화의날 공로상
*2004 제25회 청룡영화상 감독상
*2002 디렉터스 컷 올해의 제작자상
*2001 제15회 예총예술문화상 대상
*1996 오늘의 젊은 예술가상
*1996 미국 로스앤젤레스 문화영예상
*1996 제17회 청룡영화상 최다흥행감독상
*1991 제27회 백상예술대상 감독상
*1989 한국영화평론가협회상 신인 감독상
*2007 제36회 누보시네마영화제 관객상
*2007 제57회 베를린영화제 알프레드 바우어상
*2006 대통령표창
*2006 로얄살루트 2005 마크 오브 리스펙트상
*2005 한국영화인협회 올해의 영화인상 감독부문
*2004 제40회 백상예술대상 영화부문 감독상
*2004 제3회 대한민국 영화대상 감독상 (올드보이)
*2004 칸영화제 심사위원대상 (올드보이)
*2004 대종상 감독상 (올드보이)
*2003 대종상영화제 최우수작품상
*2001 청룡영화제 감독상
*2001 백상예술대상 감독상
*2001 도빌영화제 작품상
서강대학교 철학과 재학 시절 영화에 눈을 떳듯이 마음 맞는 친구들과 영화동아리, 서강영화공동체를 조직해 활동했으며 졸업 후 영화사를 다니다가 가수 이승철을 주연으로 한 스릴러《달은..해가 꾸는 꿈》로 감독 데뷔했다. 당시 한국 영화계에는 낯설었던 B급 영화 정서에 기반한 이 작품은 영화팬들에게 화제가 되었지만 상업적으로는 철저히 실패했다.
이후 박찬욱은 영화평론가로 활동하며 생계를 유지했으며 두번째 작품 《삼인조》를 찍었지만 열악한 제작 환경으로 인해 감독 경력 최악의 실패작이 된다. 이후 준비하던 작품의 기획이 취소되거나 각본까지 쓴 영화의 감독직을 다른 이에게 빼앗기는 등 불운이 계속되었다.
그러던 중 영화사 명 필름에서 남북분단을 소재로 준비하던 <공동경비구역JSA>의 감독으로 발탁되었는데 이 작품이 박찬욱의 경력을 송두리째 바꿔놓는다. 이 영화의 흠잡을 데 없는 완성도는 '그동안 박찬욱이 얼마나 열악한 스탭들과 일해왔는지 짐작이 간다'는 찬탄을 낳으며 그의 영화적 재능에 대한 의심을 완전히 가시게 하였고 흥행면에서도 시기적으로 남북화해무드와 맞아떨어지면서 당시까지 한국 영화사상 최고의 흥행작이었던 <쉬리>의 기록에 근접하는 대성공을 거둔다.
하지만 박찬욱의 오랜 팬들은 '웰메이드 상업영화'을 넘어서는 개인적 색깔이 드러나는 작품을 기대했고 2년후에 공개된 <복수는 나의 것>은 이러한 기대를 완전히 충족시킨다. 극도로 비타협적이고 비주류적인 정서로 가득한 이 작품은 흥행면에서는 완전히 실패했고 격렬한 찬반 논쟁을 낳았지만 그의 작가로서의 지위를 완성시켜주었다.
다음 해에 박찬욱은 최민식을 주연으로 일본 만화를 원작으로 한《올드보이》를 만드는데 이 작품이 다시 흥행면에서 큰 성공을 거두면서 이제 그는 비평가와 관객을 동시에 만족시킬 수 있는 희귀한 감독으로 자리잡는다. 수많은 금기에 도전하는 작품의 논쟁적 성격으로 인해 이 영화는 사회 현상이 되었고 (국민일보에서는 사설을 통해 영화의 스포일러를 노출시키면서까지 작품의 비도덕성을 비난했다) 2004년 칸 영화제에서 2등에 해당하는 심사위원상을 받으면서 그의 명성은 국제적으로 퍼지게 된다.
2005년 박찬욱은《복수는 나의 것》, 《올드보이》로 이어지는 이른바 '복수 삼부작'을 마무리 짓는《친절한 금자씨》를 발표했다. 2006년 현재 박찬욱은 세계에서 가장 논쟁적인 감독의 하나로 수많은 나라에 열혈팬과 극단적 비판자를 동시에 갖고 있다. 뉴욕타임즈는 '포스트 모더니즘의 파산' 운운하며 혹평을 가했고 프랑스의 《가까이에 뒤 시네마》는 자신들이 지지하던 홍상수(로 대표되는 고답적 아시아 아트하우스 무비) 대신 (B-무비 정서의 스릴러 감독인) 박찬욱이 칸 영화제에서 수상한 것에 실망을 감추지 않으면서 '가장 과대평가된 한국 감독'이라고 독설을 퍼부었다. 반면에 로저 에버트는 '그리스 비극'을 연상시킨다며 찬사를 아끼지 않았고 《올드보이》가 깐에서 수상할 당시 심사위원장이었던 쿠엔틴 타란티노는 박찬욱의 엄청난 팬으로 알려져 있다. 박찬욱에 대한 이러한 상반된 평가는 사실 당연한 것으로 보여지며 사정은 모국인 한국이라고 해서 예외가 아니다.
봉준호 감독
자신만의 특유한 유머가 돋보이는 '괴물' 감독
프로필 :
*1993년 "6mm단편 백색인" 신영청소년 영화제 수상
*2001년 "플란다스의 개" 제25회 홍콩국제영화제 국제영화비평가상
*2001년 "플란다스의 개" 뮌헨영화제
*2003년 "살인의 추억" 대종상영화제 감독상
*2003년 "살인의 추억" 춘사나운규영화예술제 감독상, 각본상, 작품상
*2003년 "살인의 추억" 제 2회 대한민국 영화대상 감독상, 작품상, 시나리오상
*2003년 "살인의 추억" 산세바스찬 영화제 은조개상, 신인감독상
*2006년 "괴물" 대한민국 영화대상에서 감독상
1994년 6mm 단편 영화 《백색인》을 연출하여 영화계에 데뷔했으며, 두번째 단편 《지리멸렬》은 큰 화제가 되었다.
첫 장편으로 일상에 대한 위트가 돋보이는《플란다스의 개》에서 신인답지 않은 탄탄하고 치밀한 연출력으로 평단의 주목을 받았다. 그러나 아쉽게도 흥행에는 실패했다. 이후 《살인의 추억》으로 작품성과 상업성을 모두 만족시키면서 그만의 작품세계를 구축했다는 평을 받으며 유명해졌다.
그리고 2006년 7월에 세 번째 장편 영화 《괴물》을 개봉했다. 봉준호 감독은 고등학교 시절 우연히 창 밖으로 한강 다리에서 괴생물체를 목격한 생생한 이미지는 그의 뇌리를 떠나지 않았고, 그 기억은 영화감독이 되면 꼭 이런 영화를 만들겠다는 꿈을 가지게 했는데, 영화 <괴물>은 18년간 그의 가슴속에 담아 두었던 꿈을 실현시킨 순수 오락 영화의 결정판이다. 일상적이고 평범한 장소를 배경으로 비현실적이고 이질적인 느낌이 드는 장면을 포착하고, 영화속 주인공들의 난감한 행동에 웃음을 터뜨리도록 유도하면서도 우스꽝스러운 상황에 서늘한 풍자를 심어놓는 특유의 영화 감각을 가지고 있다.
* 영화감독 선정은 주관적인 견해이고, 자료는 인터넷 인물검색과 여러가지 자료들을 종합 인용하여 서술하였습니다.
첫댓글 수고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