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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복궁학생_100회등산(9), 참가자들 표정+ 해설 2013.09.21. 이재익 촬영, 해설
* 본 페이지는 현장 유적사진은 없고 공부하는 회원들의 진지한 표정만 모았습니다. <경복궁_100회등산(10), 경복궁역사해설> 과 함께 공부하세요. 거기에는 유적 사진만 모았습니다. 회원들이 차분히 듣고 있으니 차근차근 얘기 해야 겠네요.
1. 안내 자원봉사자 이희성 선생님(사단법인 한국의 재발견 소속)의 열성어린 설명에 감사드립니다. 배경은 건청궁
2. 세상에 가장 중요한 기본은 天地人 정전인 근정전 귀퉁에 있는 향로, 밑바닥 받침돌 하나에도 상징성을 부과하였다. 맨아래는 네모(네모난 월대의 바닥 전체=땅/ 중간 6각형=사람/ 윗쪽, 둥근것=하늘
3. 경복궁과 자금성 조선 경복궁은 1395년 완공, 14만평(46만여 ㎡), 중국 북경의 궁궐인 자금성은 1420년 완공, 24만평(79만㎡). 경복궁은 자금성의 60% 규모. -자금성 ; 황궁이므로 , 대문에서 정전까지 5개의문, 장대하지만 삭막하다. -경복궁 ; 왕궁, 대문에서 정전까지 3개의 문을 거친다.광화문, 흥례문, 근정문, 자연과 어울린다.
4. 월대의 서수 조각상과 마당의 박석 * 월대는 근정전이 앉아 있는 넓은 축대이다. 월대 사방에 3종류의 석상 배치. 딱딱한 월대에 생기를 불어 넣는다. 현재 보이는 것은 12지상 중에 용의 모습이다. 1) 4방 지킴 ; 4신상 ; 공간 개념, 동-청룡, 서-백호, 남-주작, 북-현무, 4신도는 고구려 고분벽화에서 부터 나온다, 2) 방위와 시각 상징 ; 12지상, 시간개념, 3) 서수瑞獸 ; 상서로운 동물, 새끼달린 한쌍의 서수인데, 석견으로 보고 있다.
* 근정전 마당에 깔린 조각조각의 화강석을 박석薄石이라고 한다. 1) 미끄럼과 햇빛 반사를 방지한다. 2) 북쪽이 남쪽보다 70cm정도 높다. 배수 용이. 비 올때 배수구로 쏟아는지 박석위의 물결모습은 장관이다. 3) 얇은 화강암 판석인 박석은 강화도 매음리, 해주의 박석광산에서 채취했다.
5. 삼봉 정도전과 근정전 의미 경복궁을 탐방하면, 처처에 문과, 전각의 명칭을 삼봉 정도전이 지었는데, 그의 인문적 정신과 지식이 잘 나타난다. 근정전勤政殿 명칭은 서경에서 끌어와 부지런함의 미덕을 강조하였다. 임금인 통치자가 근정전에서 부지런히 어진 이를 찾고, 어진 이를 쓰는데 신곡해야 한다는 정사를 부지런히 수행함의 의미가 함축돼 있다. 유홍준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6>>의 표현으로는 ‘임금은 아침에는 정무를 보고, 낮에는 사람을 만나고, 저녁에는 지시할 사항을 다듬고, 밤에는 몸을 편안히 하여야 한다. 쉴 때는 편히 쉬는 것도 부지런함의 개념이다.’ 라고 했다. 쉴 때는 쉬어야 다음날 열심히 일을 할 수 있는 것이다.
6. 근정전, 경무대, 청와대 나 학정은 생각한다. 요즘 대통령의 집무실 청와대는 명칭이 '푸른 기와집 집무실' 이란 의미 이외 달리 뜻이 깊지 못하다. 미국의 대통령궁을 ‘백악관, 하얀집’ 이라고 하는 것을 모방이라도 한것 같다. 차리라 그전 이름인 이승만 대통령시절의 ‘경무대’ 란 이름에 더 의미가 있었다. ‘武즉 나라는 지키는 국방의 총책임자가 집무하는 곳’ 이라는 의미가 담겨있었다고 본다. 이승만 대통령이 물러났다고 그 잔재를 없앤다고 이름조차 바꿔 청와대로 했으나 거기에는 별다른 의미도 없고 단지 대통령궁이라는 고유명사일 뿐이다. 옛날 우리 선조들은 전각과 누각 정자이름 하나에도 온갖 지혜와 철학을 담았다.
7. 천재지변 일어나면 왕은 자신을 돌아본다. -1544년 중종 때 경복궁 근정전 동수각에 벼락이 떨어져서 임금이 자신의 부덕을 돌아보고, 대사면령을 내렸다. 영제교의 천록상은 하늘이 올바른 통치를 하는지 아닌지를 지켜보는 상징적 조각상이다.
8. 경복궁의 기본 구조는 3문3조 * 3문 ; 정전인 근정전에 이르는 3문. 광화문, 흥례문, 근정문 * 3조 ; -외조 ; 외국사신 맞고, 문무백관 조회, 즉위식 등을 하는 곳, 근정전 일원 -치조 ; 정무를 보는 사전전 영역, 편전이라고 한다. 부속건물 만춘전, 천추전 -연조 ; 왕의 침소 강녕전, 왕비 침소 교태전, 대왕대비 침전 자경전 등
9. 사정문 지나 사정전, 왕의 일상 집무실, -정사와 경연(군신 함께 공부하는 모임), 일월곤륜도, 운룡도가 있다. -사정전앞 행랑에 곳간은 왕의 내탕금 곳간이 있다, 천내텅금은 왕의 비자금, 즉 개인 주머니돈이다. 4개의 창고 이름은 천자고, 지자고, 현자고, 황자고로 명칭한다. -사정전은 온돌이 없고, 부속건물인 만춘전, 천추전에는 온돌이 있다.
10. 새가 집을 짓지 못하게 천장 단청부분에는 망으로 쳐져있으나 정교해서 잘 보이지 않는다.
11.근정전의 뒷쪽에 앉아 있다.
12. 왕의 침전 강녕전과 왕비 침전 교태전에는 용마루가 없다. 사진과 일치하지는 않지만, 설명을 계속하겠다. 용마루가 없는 이유는 왕은 곧 용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 창덕궁 대조전, 창경궁 통명전 등 왕과 왕비의 침전(내전)에 공통적으로 적용되는 양식이다.
13. 교태전 대문 양쪽 벽의 굴뚝은? 왕의 친전인 강녕전에는 대청앞에 넓은 월대가 있고 왕비의 침전인 교태전에는 월대가 없으나, 대신 행각이 모두 연결되어 시녀들이 활동하기 좋다. -교태전에 들어 가는 문, 양의문 양옆에 문자무늬를 새긴 높다른 굴뚝이 붙어 있다. 이것은 앞건물인 강녕전 부속건물의 굴뚝이다.
14. 교태전 뒤 아미산이라는 꽃동산 십장생 등의 그림이 있는 굴뚝이 여러개 있다. 이 높다란 동산은 경회루를 파면서 나온 흙을 유용하게 처리한 것이다.
15. 수정전은 세종 때 집현전, 한글 창제와 반포의 역사적 현장 사정전 행각 밖에 있는 부속 건물, 집현전 학사들이 여기에서 연구를 했다. 세조때 예문관으로 바뀌었다.
16. 수정전 흥선대원 복원하면서 수정전이라 칭하였다. 갑오경때 군국기무처로 사용했고 갑오경장(갑오개혁, 1895)의 개혁조치가 여기에서 나왔다.
17. 흠경각 교태전 서쪽 행각에 둘러싸인 함원전과 흠경각이 있다. * 함원전 : 교태전 서쪽, 부처님을 모시고 불교행사가 열렸던 전각이다. * 흠경각은 세종 때 유명한 과학자 장영실의 과학기구들이 설치됐던 곳이다. 세종의 과학정신과 애민정신이 잘 나타난다. 흠경각의 명칭은 서경 요전의 구절에서 따왔다. -흠약호천 欽若昊天 하늘을 우러러 공경하며 -경수인시 敬授人時 백성들에게 때를 일러 준다.
18. 궁궐전문안내책자 * 연세대 국학연구원 이광호 교수팀, <<궁궐의 현판과 주련>>, 전3권, 수류산방중심, 2007
19. 자선당資善堂이란? -왕세자가 기거했던 동궁이다. 資善이란 '착한 성품을 기른다' 명종 때 궁궐 일부 화재로 중건할 때 퇴계 이황이 쓴 상량문에 의거한 명칭.
* 경복궁 복원 -경복궁은 1553년 명종 8년에 대화재가 났고, 일년만에 신속히 복구되었지만, 38년 뒤 임진왜란 때 다시 소실되었다. 그 후로 273년간 폐허 상태. 이 기간 동안 왕궁은 창덕궁시대였다. -1865년 고종 2년에 흥선대원군이 실추된 왕권을 회복하고자 중건하기 시작해서 3년만인 1868년 고종 5년에 완성했다.
20. 2011년 현재 복원된 경복궁 건물은 흥선대원군 당시의 45% 수준이다. 현재 국립민속박물관 자리에는 선원전이 있던 곳이다. 역대 선왕들 영정을 모시던 전각이다.
21. 태원전은 빈전 답사의 마지막은 대개 서북쪽 외진 곳 태원전이다. 그 기능은 왕실의 죽은이의 시신을 임시로 안치하는 빈전이다. 빈전의 빈殯자는 주검시尸변에 손님 빈賓자의 합자이다. 실제로 시신을 모시는 곳은 빈전 영역 안에 숙문당이란 곳이다.
22. 경회루와 박자청 -연못 크기 남북 113m, 동서 128m. 48개 돌기둥. 이층 누각 크기. 정면 7칸, 측면 5칸, 남북 33m, 동서 29m. -누각에서 바라보면 북쪽은 북악산, 서쪽은 인왕산, 남쪽은 남산, 동쪽은 근정전, 사정전, 강녕전의 팔작지붕들이 보인다. -외국사신 연회, 경사때 잔치, -1961년 5.16 군사혁명 후에 수도경지 사령부 30경비단이 경복궁에 주둔한 적이 있었다. 그런 연유로 경회루에는 출입이 금지되었는데, 2005년에 풀리고, 경회루도 인원수 한정으로 일반인들에게 개방하였다. 경회루는 봄 가을에 인테넷으로 하루 네번, 1회 100씩 관람이 가능하다. -물의 순환 ; 북악산에서 흘러 들어 와 항상 맑은 물이 유지 된다. -태종 때, 박자청이 공사를 지휘했다. 그는 토목건축에 비상한 능력이 있어서 여러 곳의 공사를 성공적으로 완성하는 공로를 세워 노비 출신으로 공조판서 종1품 의정부 참찬에 이른 입지전적 인물이다. 태종 세종도 능력을 인정한 인물이었다. * 참고 ; 동래 관노 출신 장영실은 과학기술로 종3품까지 올랐던 인물이다,
23. 향원정 북쪽에 있는 향원정은 건청궁 앞뜰 연못이다. 송나라 성리학자 주돈이의 글 <愛蓮說>에 '향원익청 香遠益淸, 연꽃향기는 멀수록 더욱 맑다.' 라는 구절에서 가져온 이름이다.
24. 조선왕조 왕실에서는 적장자 계승이 원칙이지만~ 형편이 여의치 못했습니다. 정식 왕비와 많은 후궁을 거느렸음에도 불구하고 왕자 생산이 게을러서 후계자 계승에 차질이 많이 생겼습니다. 운동부족이 아니었을까 생각됩니다. 운동을 자유롭게 할 수있는 우리들은 복이지요.
* 적장자로서 즉위한 왕은 몇 명이나 될 까요? 500년 조선왕조 27대 왕 중에서, 문종, 단종, 연산군, 인종, 현종, 숙종, 순종 등 단 7명입니다.
25. 왕이 어리면 대비나 대왕대비가 수렴청정 할 수 있는데, 왕대비가 원칙이고 왕대비가 없으면 대왕대비가 한다. 그런데 정실부인 왕비를 거친자라야만 할 수있고 후궁 출신은 안된다. * 후궁은 간택 후궁도 있고, 궁녀중에 성은을 입어 되는 경우도 있다.
26. 능호 붙이는 규정 ; 후궁들의 무덤은 무엇이라고 부를까요? 1) 능(릉)陵 ; 왕과 왕비 무덤 2) 원園 ; 왕의 사친, 세자, 세자빈 무덤 3) 묘墓 ; 대군, 공주, 옹주, 후궁 등의 무덤 예) 태조 무덤-建元陵 / 영조 후궁 영빈이씨 무덤은 수경원 / 쫓겨난 왕은 왕자신분으로 강등하여 광해군 묘, 연산군묘(도봉구 방학동)라고 한다. / 후궁은 일반적으로 묘이나, 왕을 낳은 후궁은 원으로 높여 칭한다. 영조를 낳은 숙빈 최씨는 소령원으로 격상시킴.
27. 후궁에게 붙인 궁호 조선전기에는 대개 후궁 거처를 궁이라고 하였으나, 후기에는 후궁출신인데 왕의 생모이면, 거처하는 곳이나, 생모 사당에 궁호를 붙였다. 인조 생모는 계운궁, 정조 생모는 혜경궁, 순조 생모는 가순궁, 영조 모 숙빈최씨사당은 육상궁. * 궁녀 출신으로 왕비가 된 사람은 장희빈 뿐이다. 왕비가 됐다가 다시 강등되기는 했지만~
28. 청와대에는 일반인 출입이 금지된 7궁이 있다. 왕을 낳은 후궁들 사당들이다. 청와대도 경복궁 영역이었다. 1. 저경궁= 선조 후궁, 인빈김씨, 원종(인종의 생부) 생모 2. 대빈궁= 숙종 후궁, 희빈 장씨, 경종 생모 3. 육상궁= 숙종 후궁, 숙빈 최씨, 영조 생모 4. 연호궁= 영조 후궁, 정빈 이씨, 진종(효장 세자, 정조가 입적한 부) 생모 5. 선희궁= 영조 후궁, 영빈 이씨, 장조(사도세자, 정조 생부) 생모 6. 경우궁= 정조 후궁, 수빈 박씨, 순조 생모 7. 덕안궁= 고종 후궁 ,순빈 엄씨, 영친왕 생모
29. 영조 * 조선시대 가장 오래 산 왕은 영조이다. 재위기간도 가장 길다. 1694~1776, 수 83세, 재위기간 1724~1776, 51년 7개월 * 아름다운 대답 영조의 왕비 정성왕후가 66세로 승하하였다. 세살 연하인 영조가 66세 때 다시 맞이한 계비가 15세 정순왕후였다. 영조가 집적 간택할 때 처녀들에게 질문했다. -세상에서 가장 깊은 것이 무엇인가? 다른 처녀들은 산이 깊다, 물이 깊다했다. 정순왕후는 인심이 가장 깊다고 했다. 영조가 또 질문했다. -가장 아름다운 꽃은 무엇인가? 정순왕후의 대답은 목화꽃이라고 했다.목화꽃은 비록 멋과 향기는 빼어나지 않으나, 실을 짜서 옷감을 만들어 백성들을 따뜻하게 해주는 꽃이라 가장 아름답다는 것이었다.
30. 태실 ; 비빈이 왕자를 출산하면 그 태를 항아리에 담아서 묻었다. -경상북도 성주에는 세종대왕의 열여덟 명의 왕자 중에서 적장자인 문종을 제외하고 열일곱 명의 태를 집단 안장한 태실이 있다. -왕자가 태어나면 3일 만에 유모를 구하는 것이 관례였다. 주로 각사의 공노비 중에서 구했다. 훗날 자신이 키운 왕자가 왕이 되면 奉保夫人으로 봉해지기도 했다.
31. 조선왕조에서 수렴청정이 있었던 것은 몇 번인가? -성종; 13세, 세조비 정희왕후 윤씨 -명종; 12세, 중종비 문정왕후 윤씨 -선조; 16세, 명종비 인순왕후 심씨 -순조; 11세, 영조비 정순왕후 김씨 -헌종; 8세, 순조비 순원왕후 김씨 -철종; 19세, 순조비 순원왕후 김씨 -고종; 12세, 익종비 신정왕후 조씨 6명의 대비에 의해 총 7차례 시행됐다.
32. 자경전앞 광장, 조대비와 대원군 -효명세자가 단명하고 추존된 익종의 왕비 신정왕후 즉 조대비의 거처가 자경전이다. 조대비의 도움으로 흥선대원군의 제2자 이명복이 즉위하여 고종이 됐기 때문에, 대원군은 경복궁을 중건하면서 그 보답으로 자경전을 아기자기하게 꾸며 주었다. 특히 담장이 아름답다. 매화 난초, 모란, 연꽃 등 아름다운 그림으로 벽이 장식 돼 있다. 조대비는 여기에서 1866년까지 수렴청정을 했다.
* 조선말기 세도정치 ; 순조 11세, 헌종 8세, 철종 19세, 고종 12세로 즉위했다. 연속적으로 어리고 유약한 왕들이 즉위하여 순헌철 3대 60여년 간 외척세도정치가 자행되어 국력이 약화 됐다.
33. 자경전앞 광장, 익종은 누구인가? -22대 정조와 수빈박씨 사이에 태어난 정조의 차남이 제23대 순조이다. -순조와 순원왕후 사이에 태어난 장남이 효명세자인데 단명하고 추존하여 익종이라고 칭한다. 이 익종의 부인이 신정왕후 조씨(조대비)는 헌종의 모후이다. -익종과 신정왕후 사이에 태어난 장남이 24대 헌종이다. 헌종에게는 아들 없이 단명하였으므로 방계 철종이 즉위하였다.
* 철종은 누구인가? -철종의 계보 ; 영조→사도세자→ 은언군 →3 남 전계군 → 3남 제25대 철종이다. -철종도 후사가 없어서 방계 고종의 즉위하였다. 철종은 얼마나 자녀 복이 없나 하면은 왕비 포함 부인이 8명인데, 달랑 옹주 하나 뿐었네요. 왕위에 14년 6개월이나 있었는데~ 후계 생산 기술이 많이 부족했죠.
34. 자경전 앞 광장. 26대 고종은 누구인가? * 고종 선대 계보 ; 고종의 즉위는 행운이었다, 아주 먼 방계였다. 영조→ 사도세자(장조) → 은신군 → 남연군(입적된 양자, 실제는 인조 세째 아들 인평대군 6대손)→ 흥선대원군(이하응) → 차남 고종 * 고종의 6남1녀 자녀 ; 명왕황후 민씨 사이 27대 순종 / 귀비 엄씨 사이에 영친왕/ 귀인 이씨 사이에 완친왕, 육/ 귀인 장씨 사이에 의친왕 / 귀인정씨 사이에 우/ 귀인 양씨 사이에 덕혜옹주
35. 건청궁 건청궁은 고종이 부친 대원군의 섭정 간섭을 벗어나려고 고종10년 1873년에 자신의 내탕금으로 짓기 시작했다. 고종은 10년 11월에 친정을 선언했다. 건청궁은 경복궁의 북쪽 향원정 연못 뒤에 가장 북쪽 외진 곳에 있다. 일반 사대부집같이 수수하다. 궁궐속의 작은 궁궐이라고 흔히 말한다.
36. 건청궁은 장안당(초양문, 고종 거처), 곤녕합(함광문, 명성황후 거처), 복수당(상궁거소) 장안당 누마루에서 바라보면 향원정 연못이 한 눈에 들어 온다. 곤녕합 누마루에 옥호루가 있다. 건청궁 경내 뒷쪽에 서양식 관문곽이 있었다.
37. 을미사변 비극의 장소 이 건청궁은 고종과 민비가 독립하기 위하여 지었지만, 대원군의 영향력에서는 벗어났으나. 청,일,러 3국의 제국주의 틈바구니에서 곡예하듯,하던 약소국 조선의 국모 명성황후 민비가 결국 일본 미우라 공사의 음모아래 일본낭인배 들에게 시해당하는 비극의 장소가 되고 말았다.
38. 건청궁, 아관파천 환궁후에 고종은 경운궁으로 1895년 명성황후 시해사건 을미사변 후에 고종은 아관파천을 했고, 고종이 아관에서 돌아온 후에 다시는 경복궁으로 가지 않았다. 경운궁(덕수궁)으로 황궁하여 기거했다. 덕수궁 주위에는 외국공사관들이 많아서, 일본에게 놀란 마음에 의지가 된 모양이다.
39. 명성황후(민비)와 대원군 1) 배경이 없는 집안의 처녀라는 조건에 부합하여 왕비로 간택됨. - 1851(철종2) 민치록의 무남독녀, 8세에 고아. 민치구(대원군 장인)의 둘째 아들 승호(대원군 부인 민씨의 친동생)가 민치록의 양자로 들어옴. 대원군 부인과 명성황후는 12촌 2) 명성황후는 완화군(이상궁 소생)을 애지중지하는 대원군을 중오함. - 고종 8년 명성황후가 아들을 낳았으나 대소변을 보지 못했다. 대원군이 산삼을 먹였는데, 그 후유증인지, 죽었다. 황후는 대원군을 원망함. 3) 병풍 뒤에서 고종을 조종하고 대원군 타도에 인재등용의 초점을 맞췄다. - 36명의 민씨를 등용하고 조영하 조성하 등 조대비 조카, 안동김씨, 대원군 맞아들 재면, 대원군의 형 이최응, 유생 등을 명성황후 편으로 포섭하였다.
40. 1882년 임오군란, 갑신정변 때 명성황후의 수난 개화정책 신식군대 우대 때문에 차별대우를 받은 구식 군인들이 임오군란을 일으키고, 이때 구식군인들은 이최응, 민겸호 등을 죽이고, 명성황후까지 죽이려고 궁궐을 뒤지고 다녔다. 궁녀복으로 변장한 명성황후가 대궐에 들어오던 민부인의 가마에 타자 군인들이 수상히 여겼다. 지나가던 무예별감 홍계훈이 내 누이 홍상궁이라며 외치고 업어서 구했다. 1884년 김오균 등의 급진개화파들이 일으킨 갑신정변 때는 민영익이 중상을 입고, 민영목, 민태호, 윤태준, 이조연, 한규직, 조영하 등이 살해되었다.
41. 건청궁에서, 을미사변이 일어나게된 배경 1) 일본 공사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의 망발 - 대신들도 동석한 자리에서 고종을 향해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고 큰 소리쳤다. 갑오개혁을 강요하였던 일본은 청,일전쟁에 승리한 뒤 박영효(朴泳孝), 김홍집(金弘集)을 중심으로 한 친일내각을 만들어 세력확장에 힘을 기울였다.
2) 삼국간섭 - 1895년 러시아가 주도하여 프랑스, 독일 등과 함께 일본에 외교적 압력을 가하여, 일본이 청일전쟁의 승리로 차지한 랴오둥 반도[遼東半島]를 청국에 반환하도록 하였던 사건이다.
3) 삼국간섭후 친러정권 성립 - 주한일본공사가 조선정부에 약속한 증여금 300만 원을 일본정부가 제공하지 않자, 조선정계에서는 배일세력이 증가하였다. - 삼국간섭의 국제정세의 변화를 이용하여, 명성황후는 러시아 공사 K.베베르와 제휴하여 러시아의 힘을 빌려 일본을 견제하려고 하였다. - 친일계 축출 ; 박영효(전 내무대신, 왕비시해 음모혐의), 어윤중, 김가진 등. - 친러파 기용 ; 1895년 9월 6일 이범진, 이완용(李完用) 등의 제3차 김홍집내각 성립. - 일본인 교관이 훈련시킨 2개 대대의 훈련대도 해산하고자 하였다.
42. 미우라 고로의 음모 - 1895.7 이노우에 일본공사 후임으로 미우라 고로[三浦梧樓] 부임. 예비역 육군 중장출신. 명성황후 시해 음모를 꾸미고, 말수가 적고 태도가 정중하며 독경으로 소일하는 것으로 위장하였다. - 하수인으로서 한성신보사 사장 아다치[安達]와 그의 소속 낭인(浪人 ; 건달 지식인들)을 이용하였다. - 전투는 일본군과 일본 낭인(건달)들이 담당하였다. - 표면에 훈련대를 내세워 쿠데타로 가장하였다. 훈련대는 일본교관들이 가르친 조선군으로, 정부가 해산하려고 하였으므로 불만을 가졌다. 우범선(禹範善), 이두황(李斗璜), 이진호(李軫鎬) 등 훈련대 3대대장과 전 군부협판(軍部協辦) 이주회(李周會)를 포섭하였다. * 우범선은 육종학자 우장춘 박사 부(父)로 나중에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 - 공덕리(孔德里) 아소정(我笑亭)에 있는 흥선대원군을 궁중으로 강제로 호위하여 괴뢰로 내세웠다.
43. 명성황후 시해 (을미사변) - 1895년 양력 10월 8일(음력 8.20) 새벽, 76세의 대원군이 늙음을 이유로 완강히 거부해서 대원군의 거동이 눚어지자 밤사이에 해치우려던 것이 아침이 되어서야 거사를 했다. - 일본군과 훈련대가 침입하자, 훈련대 연대장 홍계훈(洪啓薰)과 군부대신 안경수가 1개 중대의 시위대 병력으로, 막아 싸웠지만 역부족. 흉도(兇徒)들은 궁내부대신 이경직(李耕稙)과 홍계훈 살해, 경복궁 점령. - 일본 낭인들은 왕비 침소인 옥호루(玉壺樓)에서 누가 왕비인지 몰라 닥치는데로 여자들을 죽이고 난후 왕후의 빰에 한 점 얽은 자국이 있다는 소리를 듣고 궁녀의 머리채를 끌고다니며 왕비의 시체를 확인했다. 옆방에 있던 세자는 칼을 맞고 세 번이나 자기를 부르며 죽어가는 어머니의 비명을 들었다. 시신은 장작 위에 놓고 불태웠다. - 명성황후 춘추 45세. 금곡릉에 고종과 합장.
44. 결과 - 일본은 유길준(兪吉濬), 서광범 등 친일파를 중심으로, 제4차 김홍집내각을 수립하였다. - 명성황후시해 현장에는 고종, 황태자 및 미국인 교관 다이, 러시아인 기사 사바틴, 그외 많은 조선인이 진상을 낱낱이 목격하였다. 구미열강은 강경하게 일본에 항의하였다. 이에 일본은 처리방안으로 미우라를 해임, 고무라[小村]를 판리공사(辦理公使)로 임명하고, 한편 미우라 등 관계자 48명을 히로시마[廣島] 감옥에 구치하였으나, 결국 증거불충분을 이유로 전원석방시켰다.
45. 을미항일의병 발생이 발생하고, 고종이 러시아나 공사관에 피신을 하는 아관파천(俄館播遷)의 계기가 되었다. 한국은 러시아의 보호국과 같은 지위로 떨어졌고, 일본의 식민지화계획은 당분간 차질을 가져왔다.
-사건 당일 마침 러시아인 사바틴이 건청궁 경내 서양식 건축인 관문각에 거주하며, 목격했던 바 중요한 증언을 했다. 일제는 조선을 합병하자 자신들 치부의 장소가 되는 이 건청궁을 제일먼저 헐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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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학정님.설명 들으랴 사진찍으랴 수고가 많으십니다.
번번이 사진기록 정말 감사 합니다....... 좋은 기록... 길이길이 두고 보겠습니다..
지방에서 서울구경온 어느 다문화가정팀이 경복궁을 둘러 보고' 경복궁을 거니니 진정한 한국인이 된 것같다' 고 했다. 왕조시대 정치의 중심이 된 궁궐에 대하여 알고 둘러 보다는 것은 한국인의 정체성을 확인하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