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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골목 끝에도 찾아올 봄을 기다리며 서 한
테이너박스 아래 구멍에서 뭔가 움직이는 게 보였다. 어린 길고양이였다. 녀석은 구멍 밖으로 고개를 내밀고 주 위를 살피다가 나와 눈이 마주치자 재빨리 안으로 사라졌다. 보이기도 했다. 어찌나 조심성이 많은지 구멍 안에서 고개도 내밀지 않은 채 눈만 반짝이는 모습이었다. 가만히 보니 벽돌 한 장만 한 넓이의 구멍은 바로 옆에 있는 다른 컨테이너박스와도 통하게 되어 있어 녀석은 비록 세들 어 살지만 집을 두 채나 가지고 있는 것 같았다. 게다가 컨테이너 아래는 시멘트 바닥이지만 버젓이 1층이니 반 지하같이 칙칙하지는 않겠구나 하는 생뚱맞은 생각도 들었다. 나는 상상으로나마 도저히 들어가볼 수 없는 녀석 의 방안에 수시로 들락거렸다. 내가 우리집 베란다 한구석에 나만의 공간을 만들어 책을 읽거나 사색을 즐기듯 녀석도 혹 그런 걸까, 하는 지레짐작을 하면서. 타스퀘이어가 키만 뻘쭘하니 녀석의 집 앞까지 그림자만 길게 두고, 단풍이 미처 들지 못한 등나무 잎이 둥글게 말려 바닥에 깔렸다. 나는 공연히 애꿎은 나뭇잎을 걷어차며 가을을 느낄 새도 없이 바삐 가는 시간을 탓했다. 늦가을을 재촉하는 찬바람을 맞으며 월말 관리비를 정산하러 가는 길, 통장의 잔고를 떠올리며 녀석은 월동준비 나 제대로 하고 있는지 구멍 안을 잠깐 들여다보았다. 물가는 오르고 집안 경제는 해가 다르게 곤두박질을 친다 고 다들 아우성인데 나는 주머니에 동전 소리가 나도 제 잘난 맛에 자존심만 세워 의연한 척 사는 것 같아 공연 히 쑥스러웠다. 번 찍은 모양의 뒤쪽에 다시 엄지손가락으로 쿡 누른 듯한 선명한 발자국이 옆 컨테이너 구멍까지 나 있었다. 녀 석이 소통한 거리라야 고작 10미터 남짓이다. 하기야 요 며칠 내 걸음걸이를 어림잡아 보니 우리집에서 골목 끄 트머리를 돌아 녀석의 집 앞을 거쳐 재활용 집하장까지 80미터 정도다. 녀석과 나의 몸집으로 비교해 보면 우리 의 행동반경은 얼추 비슷한 듯하다. 동안거나 면벽참선을 하는 것도 아닌데, 이 좋은 계절에 그 흔한 여행 한번 못 가고 동네나 왔다 갔다 하는 나나 녀석이나 신세가 비슷해 보인다. 그래서 흉흉한 세상인심에 잔뜩 주눅이 들 어 살맛 죽을맛 곱씹지나 말자며 밑도 끝도 없는 한마디를 툭 던져 주었다. 움츠리고 종종걸음이다. 찬바람이 불고 어제 내린 비에 길바닥까지 질퍽했다. 관리소에서 낙엽을 녀석의 집 쪽 으로 쓸었는지 구멍 앞이 완전히 막혀 있었다. 안에서 잠가야 할 대문인데 밖에서 걸었으니 녀석이 놀라지나 않 았을까. 나는 얼른 맨손으로 젖은 낙엽을 파헤쳤다. 주춤주춤 엉덩이를 들고 안을 들여다보니 휑한 게 바깥보다 더 한기가 느껴졌다. 재건축을 위해서 만들어 놓은 추진위원회 사무실인데 사람들이 오가지를 않으니 온기가 있 을 리 없다. 그런데 세입자끼리도 저렴하고 괜찮은 전셋방 구하기 추진위원회 같은 뭔가가 있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그러고 보니 집 문제로 녀석과 내가 논의해야 할 공통 주제가 생긴 셈이다. 종일 햇볕이 따뜻하다. 신문을 보면서 깜박 졸다가, 다니는 직장에 하루 휴가를 내고 신촌에 간 큰애의 전화를 받았다. “엄마, 졸고 있었죠?” 하고 묻는 큰애의 졸린 듯한 목소리가 되레 내 잠을 깨웠다. 작은애 학교 교정에 왔는데 평일인데도 휴일 같이 한가로워 생각하니 자기만 노는 날이고, 오늘 날씨가 너무 좋다고 일러 준다. 요즘 날이 춥다는 핑계로 내가 집에만 있는 게 마음에 걸렸는지 “지금에 나가 보세요.”라고 아이 달래듯 말한다. 나는 트레이닝복 차림 그대로 운동화를 끌고 현관문을 나섰다. 해거름이 되려면 좀 더 있어야 하지만 혹시 녀석을 볼 수 있을까 걸음을 재촉했더니 구멍 안이 빈 듯하다. 녀석의 코에도 이미 따뜻한 기운이 들어갔나 보다. 다는데, 올해가 녀석과 내가 보내는 마지막 해가 되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아무튼, 누가 알까. 왠지 허기진 겨 울을 벗어나기만 하면 느끼기만해도 배부른 계절, 봄을 기다리는 들뜬 심정을. 골목 끝에 있는 우리집이나 녀석 의 집에도 봄은 찾아올 것이라는 믿음을. 봄이 오면 나는 가장 먼저 베란다로 나가는 덧문을 떼어낼 것이다. 그 동안 직장에 다니느라 몸보다 마음이 바빠 덧문을 떼어내면 집안이 환해질 거라는 생각만 했다. 진종일 햇볕이 들어 스멀스멀 집안이 통째로 낮잠에 빠지면, 나는 그저 거기 베란다 한구석에 앉아 글을 쓰고 싶다. 녀석은 어 떨까. 아마 춘정을 못 이겨 동네방네 마실 다닐 것 같다. 풀밭엔 제철 맞은 개망초가 피어나 지난해보다 더 환한 봄이 녀석을 찾을지 모른다. 그 사이를 우리는 누비며….
- 계간 『시에』2009년 겨울호
글을 씀으로서 '생각'이 온전히 치유된다면
스물 몇 살, 한동안 방구석에 처박혀 어떻게 하면 자립할 수 있을까를 고민만 했다. 하루에도 여러 번 보따리를 싸서 내 방의 미닫이문을 열고 나가는 꿈을 꾸며 온갖 궁상을 다 떨었다. 밑도 끝도 없는 구렁텅이에 빠진 기분이 었던 때, 뭔가가 머릿속을 휘젓고 들어왔다. 텔렉스 자판이었다. 손가락과 함께였다. 그 몇 달 책상 위에 삼중당 문고판을 쌓아놓고 읽으며 끝없이 머릿속 자판을 두드렸다.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언제나 조급했다. ‘살아있는 것’ 이 녹록지 않아서였다. ‘글’은 그렇게 시작했다. 어쩌다 집에 혼자 있을 때면 생각을 두드린다. 주로 집안일을 일찍 끝내고 베란다 한구석에 느긋하게 앉아 책이 나 신문을 읽거나 잠시 넋 놓고 있을 때다. 그러나 ‘생각’도 ‘살아있는 것’처럼 즐거운 것만은 아니다. 드문드문 지 난 일을 떠올리면 가슴이 아리다. 사춘기 시절, 밤늦게 시험공부를 할라치면 아버지는 방에 들어와 다짜고짜 형 광등 불을 껐다. 학교 성적도 웬만큼 상위권이었는데, 왜 그랬을까. 나는 부모님과 남동생의 방 사이에 껴 있는 내 골방이 싫었다. 수 있는 것이라는 바람에, 아껴 두었다가 이따금 꺼내보는 판도라의 상자이기도 하다. 그렇게 두서없이 두드린다. 생각은 여러 개의 문장이 되고 문단이 되고 글이 되기도 한다. 나는 글을 서재 한가운데에 자리 잡은 책상이 아닌 베란다 한구석에서 쓴다. 병아리처럼 쪼그리고 앉아 따뜻한 햇볕을 쬐며 앉아있는 그곳은 웬만큼 어질러도 공간 이 남을 만큼 크고 넓다. 더러 창밖 잣나무 가지 사이를 유영하는 듯 잠자리 날갯짓에 온몸을 버둥거려 보기도 한 다. 글을 씀으로써 ‘생각’이 온전히 치유된다면…. 고민하다가, '길고양이'를 소재로 '저'를 끌어가는 모험을 했습니다. 제가 운이 좋았나 봅니다. 과천문협 김정학 선생님께 칭찬받은 날, 진종일 즐거웠습니다. 출발선, 잊지 않을게요. 제 스승, 이경은 선생님께 그리고 '수수회' 에 사랑을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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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선생님, 제가 예쁘게 사진을 찍어(포샵은 하지 않겠습니다.) 보낼 테니 다시 올려주세요. 백일장 날, 늦잠 끝에 그대로 나간 모양이 고스란히 웹상에 올라왔네요. ㅎ~
예, 알겠습니다. 서선생님~
생각의 치유를 받는 글 언제나 기대하겠습니당^^ 축하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