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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와 하나님의 나라
교회란 무엇인가? 옛 교회론은 교회를 구원의 방주라고 가르쳤다. 그러나 오늘에 와서는 교회를 구원의 방주라고 말하는 신학자도 없고 교회도 없다. 그렇다면 교회는 무엇이고 교회는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 오늘의 교회론은 교회는 하나님의 나라에 봉사하기 위해 존재한다고 언급하기 시작했다. 교회는 구원의 방주가 아니고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봉사하는 존재라는 말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나라와 교회와의 관계는 어떻게 되는 것이며 교회는 어떻게 정의 되어야 하는 것인가? 그리고 교회는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어떤 과제를 갖게 되는가? 왜 교회는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봉사해야 하는가?
1. 교회란 무엇인가?
교회란 무엇인가? 교회는 하나님의 백성이다. 교회를 하나님의 백성으로 정의하는 것은 일차적으로 교회는 눈에 보이는 건물이나 제도 혹은 조직체와 직접적으로 일치시켜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눈에 보이는 건물로서의 교회는 신자들의 모임을 위한 장소 또는 예배당을 의미할 뿐이다. 또한 교회는 교황 혹은 총회장을 정점으로 하는 제도로서의 교회와 직접적으로 일치하지 않는다. 가톨릭 신학자 큉(H. Küng)은 그의 유명한 『교회론』에서 교회를 하나님의 백성으로 정의했다. 즉, 교회는 제도라기보다는 우선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오늘날 다수의 신학자들 역시 교회를 하나님의 백성으로 정의한다. 교회를 하나님의 백성으로 정의하는 것은 물론 일차적으로 종교개혁자들의 교회에 대한 정신과 일맥상통하고 있다. 종교개혁자들이 정의한 성도들의 모임으로서의 교회 개념은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교회 개념과 매우 유사하다. 성도들이 교회라는 개혁자들의 정신은 이제는 개신교 영역을 넘어 가톨릭의 교회관을 새롭게 하는 데도 영향을 미쳤다. 가톨릭은 제2차 바티칸공의회에서 교회를 하나님의 백성으로 정의했다. 물론 제2차 바티칸공의회 문서들이 여전히 가톨릭교회의 제도성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지만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교회에 대한 기본적인 정의는 매우 가치 있고 중요한 정의라고 할 수 있다. 교회는 근본적으로 제도가 아니고 사람인 것이고 예수를 주로 고백하는 성도들인 것이다.
그러나 교회를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정의하는 것은 종교개혁자들의 정의인 성도들의 모임이라는 개념보다는 보다 더 넓고 포괄적인 개념이다. 20세기 중엽 요한네스 호켄다이크(J.C. Hoekendijk)의 ‘흩어지는 교회 개념’은 교회를 정의하는데 무시할 수 없는 영향을 미쳤다. 교회를 하나님의 백성으로 정의하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들의 모임 뿐만 아니라 그들이 흩어져서 활동하는 삶 전체를 포괄적으로 지칭하는 개념이다. 교회의 삶은 하나님의 백성들의 삶 전체이다. 그들이 모여서 예배드리는 그곳에만 교회가 있는 것이 아니고 그들이 흩어져서 하나님의 정의와 하나님의 평화를 위해 일하는 그곳에도 교회의 삶이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교회를 생각할 때 모여 있는 공동체만 생각해서는 안 된다. 모여 있는 공동체만 생각하다 보면 교회의 목적은 제도적인 교회의 교세 성장으로만 치달을 가능성이 생기고 이런 현상은 한국교회 안에 현저하게 나타나고 있다. 예를 들어 그리스도인 판사가 있다고 생각해 보자. 그가 주일에 교회에서 헌금 걷는 집사의 일을 충실하게 하는 것도 대단히 중요하다. 그러나 그것 못지않게 그는 평일에 하나님을 대신해서 의로운 재판관의 일을 행해야 한다. 그가 의로운 재판관의 일은 하는 것은 그가 하나님 앞에서 받은 소명이다. 그리고 이 소명은 하나님 나라 건설을 위해 대단히 중요한 영적인 책무이다. 그러므로 교회의 목사는 모여 있는 제도적인 교회가 잘 되기만을 위해 설교하면 안 된다. 교회의 삶은 모여 있는 공동체만의 삶이 아니다. 교회의 삶은 이 모여 있는 공동체가 흩어져서 살아가는 삶 전체를 포괄하고 있다. 그리고 이 전체의 삶이 하나님의 나라를 향하도록 교회의 목사는 설교해야 한다.
2. 교회의 목적으로서의 하나님 나라
교회의 목적은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봉사이다. 교회는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고 성장시키기 위해 존재한다. 예수께서 전하신 복음의 핵심도 하나님의 나라였다. 겨자씨의 비유(마13:31~32)는 이 하나님의 나라의 성장을 상당 부분 잘 암시하고 있다.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현존하고 있었고 성령을 통해 현재 성장하고 있다.
예수께서 가르쳐 주신 주기도문의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마6:10)라는 기도는 이 땅에 존재하는 교회가 무엇을 위해 기도하고 일해야 함을 결정적으로 잘 가르쳐 주고 있다. 교회는 하나님의 뜻을 이 땅 위에 이루기 위한 공동체이다. 하나님의 통치를 이 땅 위에 이룩하고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고 하나님의 평화의 나라를 건설하는 것이 교회의 주된 사명이다.
교회의 목표가 하나님의 나라라는 것은 우선 교회가 자체의 존속과 성장을 최종 목표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경종을 우리에게 주고 있다. 교회는 자체 기구의 성장을 주된 목표로 하는 교회 내향성의 병에서부터 해방되어야 한다. 칼 라너(K. Rahner)에 의하면 교회의 성직자들은 특별히 이 교회 내향성의 병에 걸리기 쉽다. 라너는 특히 독일의 나치 통치 시기에 교회가 자체의 기구 존속을 너무나도 많이 생각하고 염려한 나머지 600만 유대인의 학살을 방치한 역사는 교회 내향성의 병의 대표적인 실례로 보고 있다. 교회는 인간의 생명을 교회 제도의 성장보다 더 귀하게 생각해야 한다. 교회는 자체 기구의 존속에 어려움이 온다고 해도 인간의 생명을 살리고 하나님의 평화와 정의를 수립하는 하나님의 통치에 봉사해야 한다. 왜냐하면 교회의 종국적 목표가 하나님의 나라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세상 속에 존재하는 사탄의 통치를 분쇄하면서 도래하는 나라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전하신 하나님의 나라도 사탄 축출사건과 깊이 연관되어 있다. 복음서의 내용을 살펴보면 사탄의 나라를 공격하는 것이 하나님의 나라이다.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마12:28; 눅11:20). 하나님의 나라는 사탄의 통치가 분쇄되는 곳에 나타난다. 사탄이 하늘로부터 떨어졌다(눅10:18), 마귀들이 예수 앞에서 소리를 지른다(막1:24) 등은 사탄의 통치가 예수와 그의 제자들에 의해 붕괴됨을 상징적으로 나타낸 말들이다.
사탄은 현재 세상을 지배하고 있는 강한 자(눅11:21)이고 이 악한 세대(갈1:4)를 만드는 영이다. 그는 질병과 죽음을 세상에 가져오고 거짓과 불의와 분쟁과 살인의 역사를 세상 속에 만든다. 요한복음 8장 44절에 의하면 사탄은 거짓말하는 자이고 살인자이다. 진리가 비진리로 바뀌고 전쟁과 살인으로 뒤얽힌 역사는 사탄에 의해 주도되는 역사인 것이다. 교회는 바로 이 사탄의 역사를 부수고 하나님의 통치를 세우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기 위한 교회의 과제는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그 가운데 첫째는 하나님의 나라 건설을 위한 교회의 영적인 활동과 책임이다. 전통적인 교회론은 교회의 과제를 주로 이 영적인 과제에만 집중해서 설명해왔다. 하나님의 나라 건설을 위한 교회의 영적 기능 중 중요한 대표적인 것들을 언급하면 다음과 같다.
(1) 하나님의 말씀의 기관으로서의 교회의 기능
(2) 선교의 기관으로서의 교회의 기능
(3) 영적 일꾼 양성 기관으로서의 교회의 기능
(4) 예배하는 곳으로서의 교회의 기능
(5) 성도의 사귐의 공동체로서의 교회의 기능
(6) 기도하는 곳으로서의 교회의 기능
이상의 대표적인 영적 기능은 하나님의 나라 건설을 위한 결정적으로 중요한 기능들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나라는 영적으로 각성된 사람들을 통해 크게, 결정적으로 성장하기 때문이다. 교회가 선교를 하고 말씀을 선포하는 것은 일차적으로 개인을 중생시키고 영생을 얻게 하는 위대한 과제를 수행하는 것이다. 개인이 영생을 얻는 것은 그 어떤 다른 기관을 통해서는 불가능한 교회만이 갖고 있는 엄청난 특권이자 인간을 향한 놀라운 공헌이다. 그러나 교회가 개인을 중생시키고 영생을 얻게 하는 것은 그 자체에만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다. 교회는 개인의 구원에만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있다. 즉, 구원받고 영적으로 각성된 사람들이 하나님의 영광이 빛나는 하나님의 나라를 향해 진군해 나가는 것이다. 이 하나님의 영광이 빛나는 하나님의 나라라는 교회의 넓은 목표 속에 교회의 세상적인 책임이 내재하고 있다.
교회의 과제를 영적 기능으로만 제한하면 안 된다. 하나님의 나라 건설을 위한 교회의 세상적인 과제가 있다. 물론 이 세상적인 과제도 영적인 과제이다. 왜냐하면 이 세상적인 과제 역시 하나님으로부터 부과된 과제이고 또한 하나님 나라 건설에 있어서 결정적인 의미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단지 여기서 세상적이라는 표현을 쓴 것은 영적인 의미가 없다는 말이 아니라 일상적으로 사회에서 쓰는 개념상의 종교적인 영역이 아닌 세상의 사회, 정치, 경제 등의 문제와 관련된 과제라는 의미이다. 수레의 두 바퀴가 있듯이 교회를 참으로 교회 되게 하기 위해서는 교회는 두 가지 과제를 잘 감당해야 한다. 교회는 복음만 전하고 기도하고 예배하는 것으로 자신의 과제를 모두 수행한 것은 아니다. 교회는 세상 속에 존재하는 악의 통치를 종식시키고 하나님의 의와 평화의 통치를 수립해야 하는 세상적 과제가 있는 것이다. 이 세상적 과제의 수행을 위해 교회는 정의를 위해 일해야 하고, 평화를 위해 일해야 하고, 창조 세계의 보전을 위해서, 그리고 참된 형제공동체의 창건을 위해 일해야 한다.
교회의 과제를 복음 전하는 것에 주로 집중하는 복음주의 신학은 교회의 과제를 협소화시킬 위험이 있다. 왜냐하면 복음주의 신학이 말하는 복음은 인간을 죄에서부터 구원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은혜를 의미하는 것인데 이것은 개인의 영혼 구원을 위해서는 결정적으로 중요하지만, 하나님의 나라라는 전체적인 과제를 설명하기에는 좁은 개념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여기에서 복음에 대한 개념을 좀 더 넓게 사용하지 않으면 안 된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전한 복음은 개인의 영혼만을 위한 복음이 아니었고 하나님의 나라에 관한 소식이었기 때문이다(마4:23). 예수께서는 하나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전파하셨다(눅4:43). 이 하나님 나라의 기쁜 소식은 가난한 자에게 주어지는 기쁜 소식이고, 나병환자, 걷지 못하는 자가 나음을 입는 전인적인 복음이고 포로된 자, 갇힌 자가 해방을 받는 하나님의 퉁치에 관한 소식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 복음 속에는 죄 용서의 복음과(막2:5) 일곱 번씩 일흔 번을 용서하시는 아버지 하나님의 용서가 그 중심에 들어있다. 그러나 예수께서 전하신 복음과 오늘의 복음주의 신학이 말하는 복음 사이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는 점을 유념해야 한다. 예수께서 전하신 복음의 내용은 하나님의 나라였다.
교회는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일해야 한다.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께 충실한 참된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의 모습이다. 이 하나님의 나라 건설을 위해 교회는 자신에게 주어져 있는 영적 과제들을 충실히 감당해야 한다. 교회에 주어진 영적 과제는 교회만이 행 할 수 있는, 양도할 수 없는 독특한 기능이다. 교회에 주어져 있는 영적 과제는 결코 국가가 대행할 수 없다. 그것은 교회에만 주어져 있는 특권이요 영광이다. 설교는 교회의 성직자가 하는 것이지 대통령이나 국회의원이 하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교회의 이 영적 기능은 하나님의 나라 건설을 위해 반드시 있어야 할 핵심적인 것이다. 교회의 영적 봉사 없이 하나님의 나라 건설은 거의 불가능하다.
그러나 교회는 영적 봉사만으로 자신의 과제를 모두 수행한 것은 아니다. 세상 도처에 흩어져 있는 하나님의 백성들은 자신에게 주어져 있는 세상적 과제들을 수행해야 한다. 물론 제도적 교회도 세상적 과제의 수행을 위해 함께 일해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건설하시기 원하시는 하나님의 나라는 이 세상적 과제들을 통해 이룩되어나가기 때문이다. 그러면 교회가 행해야 할 교회의 세상적인 과제들은 어떤 것이 있는가? 그 중요한 과제들을 언급하면 다음과 같다.
3. 하나님의 나라 건설을 위한 교회의 세상적 책임
(1) 가난한 이웃에 대한 교회의 책임
교회가 세상 속에 행해야 할 세상적 책임의 첫 번째는 가난한 이웃에 대한 책임을 지는 것이다. 성서가 말하고 있는 이웃사랑은 가난하고 소외된 이웃을 사랑하는 데서부터 출발한다. 가난하고 소외된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이웃사랑이 참으로 실현되고 있는가를 판단하는 시금석이다. 잘 살고 화려하고 아름다운 사람끼리 사랑하는 것은 이방인들도 할 수 있는 사랑이다. 하나님의 백성인 교회는 자기들끼리 사랑하고 문안하는 이방인들의 사랑의 차원을 넘어서 가난하고 소외된 이웃을 사랑하고 이들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한다.
성서는 이웃사랑을 가르치는 교과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씀 속에 다 들어 있다. 이웃사랑은 성서의 정신이자 교회가 반드시 실천해야 하는 세상적 책임의 핵심이다. 그런데 이 이웃사랑은 가난하고 소외된 이웃을 사랑하는 데서부터 출발한다는 점을 유념해야 한다.
구약의 율법은 가난한 자의 권리를 위한 책이었고 구약의 예언자는 가난한 자들을 위한 대변인이었다. 중동지역의 종교는 일반적으로 왕권이나 지배권력과 결탁되어 있었다. 일반적으로 중동지역의 왕은 신의 아들이었고, 왕에게 복종하는 것이 신에게 복종하는 것과 같은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그런데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달랐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가난한 자와 함께 하고 있었고, 고아의 아버지요 과부의 보호자로 나타나고 있었고, 이 하나님의 예언자들은 왕이나 권력자들이 가난한 자를 늑탈하는 것을 꾸짖다가 고난을 당하고 감옥에 끌려가기도 했다. 참 하나님은 가난한 자를 돌보시는 하나님이고, 이 하나님이 구약의 율법과 예언자들을 통해 명백히 계시된 것이다.
신약성서에 나타난 예수의 정신 역시 너무나도 명백했다. 예수는 가난한 자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는 것을 자신의 사역의 핵심 과제로 설정했다(눅4:18~19). 예수는 배고픈 자를 먹이고 나병환자를 고치고 병자들을 일으켜 세우면서 하나님 나라의 기쁨을 확장시킨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의 확장은 가난한 자를 살리는 기쁨에서부터 시작한다는 것을 교회는 유념해야 한다. 마태복음 25장에 나오는 양과 염소의 비유 역시 예수의 정신의 핵심을 잘 나타내 주고 있다.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마25:40). 교회는 주린 자에게 먹을 것을 나눠주고 나그네된 자를 돌보고 병든자, 옥에 갇힌 자를 찾아주고 위로해야 한다.
가난한 자, 소외된 자를 위한 교회의 책임의 첫 번째 단계는 교회 안에 봉사관을 설치하는 것이다. 봉사관은 교회가 가난한 이웃과 함께함을 나타내는 가장 기초적인 기관이다. 교회는 봉사관을 설치함과 더불어 나눔의 신학을 체계화하고 이를 발전시켜야 한다. 가난한 자를 살리는 기쁨이 없는 교회는 참 교회가 아니다. 교회는 우선적으로 가난한 자를 살리는 일에 주력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사랑의 공동체는 이 나눔의 신학이 참으로 구현화될 때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다.
(2) 정의의 수립
하나님은 정의의 신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정의가 지배하는 나라이다. 불의는 하나님의 나라를 가로막는 악한 힘이다. 사탄은 불의의 영이고 이 세상에 불의의 조직과 영역을 확대하고 있는 자이다. 영적으로 성숙한 교회는 세상 속에 불의의 조직과 영역을 확대하고 있는 사탄의 활동을 감지하고 이에 대처할 수 있는 능력을 가져야 한다.
구약의 사관에 의하면 정의는 국가의 흥망성쇠를 좌우하는 결정적인 시금석이다. 정의를 버린 국가는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는다. 예언자 아모스는 정의를 버린 사마리아에 대한 하나님의 경고를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사마리아의 산에 있는 바산의 암소들아 이 말을 들으라 너희는 힘 없는 자를 학대하며 가난한 자를 압제하며 가장에게 이르기를 술을 가져다가 우리로 마시게 하라 하는도다 주 여호와께서 자기의 거룩함을 두고 맹세하시되 때가 너희에게 이를지라 사람이 갈고리로 너희를 끌어 가며 낚시로 너희의 남은 자들도 그리하리라”(암4:1~2). 가난한 자를 압제하는 불의의 상황은 아모스에 의하면 하나님의 진노를 일으키는 상황이다. 정의의 상실은 하나님의 심판을 야기시킨다.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이스라엘의 서너 가지 죄로 말미암아 내가 그 벌을 돌이키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은을 받고 의인을 팔며 신 한 켤레를 받고 가난한 자를 팔며 힘 없는 자의 머리를 티끌 먼지 속에 발로 밟고 연약한 자의 길을 굽게 하며 아버지와 아들이 한 젊은 여인에게 다녀서 내 거룩한 이름을 더럽히며 모든 제단 옆에서 전당 잡은 옷 위에 누우며 그들의 신전에서 벌금으로 얻은 포도주를 마심이니라”(암2:6~8). 아모스는 이스라엘에 임하는 심판이 이스라엘이 불의의 도성이기 때문임을 명백히 말하고 있다.
정의가 국가의 흥망성쇠를 좌우하는 시금석이라는 것은 이방 민족들에게도 똑같이 적용된다.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두로의 서너 가지 죄로 말미암아 내가 그 벌을 돌이키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그 형제의 계약을 기억하지 아니하고 모든 사로잡은 자를 에돔에 넘겼음이라 내가 두로 성에 불을 보내리니 그 궁궐들을 사르리라”(암1:9~10). 정의가 국가의 흥망성쇠를 좌우하는 시금석이 되는 이유는 불의는 하나님의 통치를 거역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불의한 압제를 기뻐하지 않으신다. 이스라엘 백성이 고백하는 하나님은 원래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의 바로의 학정 밑에서 신음하고 울부짖을 때 강한 힘과 능력의 팔로 바로를 심판하고 그들을 해방시켰던 해방의 신이었다. 이 하나님에 대한 신앙이 이스라엘 신앙의 골격이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압제의 상황을 부수고 해방시키고 정의를 수립하는 신인 것이다.
압제의 상황을 부수는 하나님의 모습은 예수의 설교 속에서도 잘 나타난다. 누가복음 4장 18~19절에 의하면 예수께서는 예언자 이사야의 글을 인용해서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주의 성령은 압제의 상황을 부수고 해방과 자유를 주는 영이다. 압제는 하나님이 원치 않는 불의의 영역이다.
교회는 불의한 압제의 상황을 부수고 정의를 수립하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활동에 동참해야 한다. 예수께서는 당시의 율법학자들을 “과부의 가산을 삼키는 자”(눅20:47)로 비판했다. 정의에 대한 예수의 정신은 다음의 말씀 속에서 명백히 나타난다. “화 있을진저 너희 바리새인이여 너희가 박하와 운향과 모든 채소의 십일조는 드리되 공의와 하나님께 대한 사랑은 버리는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눅11:42). 예수의 정신 속에는 구약의 예언자를 능가하는 철저한 예언자적 정신이 있었다. 교회는 이 예수의 정신을 이어받아 이 세상을 하나님의 정의가 숨 쉬는 세상으로 만들어야 한다. 교회는 세상 속에 “정의를 물 같이, 공의를 마르지 않는 강같이 흐르게”(암5:24) 해야 할 책임이 있는 것이다.
(3) 평화의 수립
평화는 하나님의 통치의 결정적 상징이다. 하나님이 세상을 다스리시면 세상은 평화의 세계가 된다. 하나님은 세상 속에 평화를 수립하기를 원하신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평화의 통치의 상징인 메시야 왕국은 평화라는 상징으로 성서 속에 기록되어 있다.
흑암에 행하던 백성이 큰 빛을 보고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주하던 자에게 빛이 비치도다 주께서 이 나라를 창성하게 하시며 그 즐거움을 더하게 하셨으므로 추수하는 즐거움과 탈취물을 나눌 때의 즐거움 같이 그들이 주 앞에서 즐거워하오니 이는 그들이 무겁게 멘 멍에와 그들의 어깨의 채찍과 그 압제자의 막대기를 주께서 꺾으시되 미디안의 날과 같이 하셨음이니이다 어지러이 싸우는 군인들의 신과 피 묻은 겉옷이 불에 섶 같이 살라지리니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사9:2~6)
메시야 왕국은 싸움이 없고 피와 죽음과 눈물이 없고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드는 평화의 왕국이다. 바로 이 평화가 하나님의 통치를 극명하게 나타내 주는 상징인 것이다.
하나님은 세상 속에 평화를 수립하기를 원하시는 반면에 사탄은 세상 속에 분쟁을 일으키고 전쟁과 살인의 역사를 만든다. 요한복음 8장 44절에 의하면 사탄은 살인자로 규정되어 있다. 사탄은 세상 속에 미움과 증오의 씨를 뿌리고 전쟁을 일으키고 살인의 역사를 만든다. 요한복음 8장 44절은 살인이 죄의 원형임을 요한이 언급하고 있는 매우 중요한 구절이다. 요한은 이 본문에서 창세기 3장의 아담과 하와의 타락과 더불어 가인이 아벨을 살해한 두 개의 사건을 생각하면서 사탄을 거짓말하는 자로 그리고 살인자로 규정하고 있다. 즉, 창세기에 언급되고 있는 중요한 두 개의 죄의 원형은 하나님을 향한 인간의 도전과 이웃 인간을 향한 폭력적 행위이다. 폭력은 죄의 원형이고 마귀의 도구이다. 창세기 6장에 나오는 반신-반인적인 존재는 몰트만(J. Moltmann)에 의하면 그 배후에는 바벨탑의 폭력적 왕을 암시하는 신화이다. 땅이 폭력으로 가득 차는 현상은 죄로 가득 차는 것으로 노아 시대의 홍수의 심판을 받아야 할 정도로 극한적인 반신적인 악의 현실이다. 히틀러나 스탈린 같은 자의 폭력적 통치는 바벨론의 폭력적 왕의 악한 통치와 비견될 수 있는 반신적인 통치이고 악마적이다. 이런 통치하에서의 세상에는 기쁨이 없고 통곡과 눈물 뿐이다. 압제자의 막대기를 꺾는다는 것은 평화와 기쁨의 상징이자 하나님의 통치의 상징이다.
사탄이 분열을 일으키고 전쟁과 살인의 역사를 만드는 데 반해 성령은 하나 되게 하고(엡4:3) 분노를 없애고 참게 하고(갈5:22) 평화의 열매를 맺게 한다. 그러므로 평화를 위해 일하는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요(마5:9) 성령의 일꾼이다.
사랑은 평화를 만드는 정신이다. 사랑이 있는 곳에는 증오와 분열과 살인의 역사는 존재하지 않는다. 사랑의 실천은 역사 속에 활동하는 사탄을 몰아낸다. 특별히 그리스도께서 가르쳐 준 원수 사랑의 정신은 땅의 평화를 수립하는 결정적인 정신이다. 원수 사랑은 사탄의 최후의 날카로운 칼을 무디게 하고 사탄을 결정적으로 패배시키는 위대한 정신이다. 하나님은 원수 사랑의 정신의 실천을 통해 그의 평화의 나라를 만드신다. 원수 사랑을 가르치신 그리스도의 죽음 속에는 민족과 민족 사이의 적대의 담을 헐고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적대의 담이 헐리는 역사의 깊은 비밀이 들어있다는 것을 유념해야 한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이십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유대 사람과 이방 사람이 양쪽으로 갈려 있는 것을 하나로 만드신 분이십니다. 그는 유대 사람과 이방 사람 사이를 가르는 담을 자기 몸으로 허무셔서, 원수된 것을 없애시고, 여러 가지 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을 폐하셨습니다. 그것은, 이 둘을 자기 안에서 하나의 새 사람으로 만드셔서, 평화를 이루시고, 원수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만드셔서, 하나님과 화해시키시려는 것입니다. 그분께서는 오셔서, 하나님에게서 멀리 떠나 있는 이방인 여러분에게 평화를 전하시고, 하나님께 가까이 있는 사람들에게도 평화를 전하셨습니다”(엡2:14~17, 새번역). 그리스도의 죽음 속에는 원수가 친구가 되는, 적대와 살인의 역사를 뒤바꾸는 화해의 공동체를 만드는 신비가 숨어 있는 것이다.
(4) 창조 세계에 대한 책임
기독교회는 오랫동안 하나님의 구원의 영역을 인간 영혼에 제한시켜 이해해 왔다. 그리스도의 죽음을 인간의 영혼의 죄악을 속하기 위한 속죄의 죽음으로만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최근의 신학에서 발전한 그리스도의 우주적 화해라는 새로운 기독론의 개념은 화해와 구원에서의 인간 중심적인 개념을 타파하는 데 결정적인 공헌을 하고 있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결코 인간의 영혼만의 죽음이 아니었다. 그의 죽음은 우주적 차원을 갖고 있었다. 골로새서 1장 20절에 의하면 그리스도는 그의 십자가의 피로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것을 하나님과 화해시켰다고 언급하고 있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우주적 차원을 갖고 있었고 성령은 전체 피조 세계를 썩어짐과 허무와 죽음에서 구원하는 구원의 영이다. 그러므로 로마서 8장 19~21절에 의하면 피조물도 허무와 썩어짐에서 해방되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고 하나님의 자녀와 같은 영광의 자유를 갈망하고 있다.
오늘의 교회는 인간 중심적인 활동을 넘어서 하나님의 우주적 구원 활동에 동참해야 한다. 이 하나님의 우주적 구원 활동에는 창조 세계에 대한 책임이 필수적으로 요구된다. 오랫동안 교회는 인권을 위하여 노력해왔다. 오늘날 세계 도처에서 인권이 신장 되고 인간의 자유와 가치가 존중되게 되는 데 있어서 교회의 역할은 지대했다. 어쩌면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의 활동이 없었다면 오늘의 신장 된 인권의 상황은 이루어지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인권을 위한 교회의 노력은 훌륭했고 앞으로도 계속해 나가야 한다. 그것은 인간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구원 행위에 상응하는 교회의 노력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인권을 위한 교회의 노력은 이제는 인권과 더불어 전체 피조 세계와 자연의 권리를 위한 교회의 노력으로 확장되고 있고 앞으로 더 계속되어야 한다.
성서는 자연의 권리를 언급하고 있다. 출애굽기 23장 12절에 의하면 동물들도 안식일에 쉴 권리가 있다. 출애굽기 22장 30절에 의하면 소와 양의 어린 새끼는 이레 동안 어미와 함께 쉴 권리가 있다. 레위기 22장 26절에 의하면 소와 양을 그 새끼와 함께 같은 날 죽여서는 안 된다. 동물에 대한 잔학한 행위를 금하고 있는 것이다. 출애굽기 23장 19절에 의하면 새끼 염소를 그 어미의 젖으로 삶아서는 안 된다. 동물을 긍휼히 여기시고 잔인하게 대하기를 원치 않는 하나님의 뜻을 충분히 알 수 있다.
레위기 25장 4절에 의하면 땅은 칠 년마다 한 번씩 쉬게 해야 한다. 출애굽기 23장 10~11절에도 땅은 칠 년째 되는 해에는 묵혀 쉬게 해야 한다고 언급되어 있다. 레위기 33장 33~35절에는 땅의 휴경 계명과 연결된 매우 중요한 말씀이 기록되어 있다. “내가 너희를 여러 민족 중에 흩을 것이요 내가 칼을 빼어 너희를 따르게 하리니 너희의 땅이 황무하며 너희의 성읍이 황폐하리라 너희가 원수의 땅에 살 동안에 너희의 본토가 황무할 것이므로 땅이 안식을 누릴 것이라 그 때에 땅이 안식을 누리리니 너희가 그 땅에 거주하는 동안 너희가 안식할 때에 땅은 쉬지 못하였으나 그 땅이 황무할 동안에는 쉬게 되리라” 인간은 땅을 황폐하게 만들 권리가 없다. 땅도 땅의 권리를 갖고 있다.
게제(H. Gese)는 구약의 안식일, 안식년 계명은 하나님의 창조 질서의 회복이 그 핵심이라고 주장했다. 안식일, 안식년 계명은 인간만을 향하고 있지 않고 전체 창조 세계를 향하고 있다는 점을 유념해야 한다. 오늘의 교회는 전체 창조 세계를 향한 하나님의 뜻을 잘 이해해서 창조 세계를 하나님 앞에서 참으로 책임지는 역할을 충실히 감당해야 한다.
(5) 하나님의 나라 건설을 위한 선한 이웃과의 협력
하비 콕스(H. Cox)에 의하면 교회는 하나님 나라 건설의 전위대이다. 교회는 하나님 나라 건설을 위해 제일선에서 싸우는 존재라는 말이다. 교회는 이 땅 위에 존재하는 사탄의 통치를 몰아내고 하나님의 통치를 알리고 또한 이 통치를 구체적으로 실현하기 위해 싸우는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결정적인 도구이다.
그러나 교회는 하나님의 나라는 아니다. 교회와 하나님의 나라의 일치는 불가능하다. 옛 가톨릭교회는 한 때 교회와 하나님의 나라를 일치시킨 적이 있었으나 그것은 잘못이었다. 하나님의 나라는 아직 역사의 미래에 있고 교회는 이 하나님의 나라를 역사 속에 수립하기 위해 일하는 공동체일 뿐이다. 물론 교회 안에 하나님의 나라의 부분적인 모습은 나타날 수 있다. 큉(H. Küng)에 의하면 교회는 하나님의 나라의 전조일 수 있다. 교회 속에는 미래에 나타날 하나님의 어떤 모습이 미리 앞당겨 나타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부분적인 일치 내지는 상응일 뿐이지 교회 속에 하나님의 나라의 모습이 완전히 나타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나라가 아닐 뿐만 아니라 교회를 통해서만 하나님의 나라가 도래하는 것도 아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교회를 통해서만 확장되어 나간다고 생각하는 것은 교회에 대한 지나친 과대평가이다.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시키고 건설하시는 분은 하나님 자신이지 결코 교회는 아니다. 교회는 이 하나님의 활동에 봉사하는 도구일 뿐이다. 하나님의 나라 건설을 위한 하나님의 활동은 교회 안과 밖에 동시에 존재한다. 하나님은 교회를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시기도 하지만 동시에 교회 밖에 존재하는 사람이나 기구를 통해서도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시키기도 하신다. 하나님은 믿지 않는 사람도 정의를 확장하기 위한 하나님의 활동에 동참하도록 유도하신다. 하나님의 정의와 평화는 교회를 통해서만 확장되어 나가는 것은 결코 아니다. 하나님은 교회 밖의 많은 사람들을 이용해서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봉사의 도구로 사용하신다. 구약에 의하면 하나님은 바사 왕 고레스를 통해 자신의 역사 계획을 성취하셨다.
따라서 교회는 교회 밖에 존재하는 하나님의 활동에도 유념해야 한다. 교회 밖에 존재하는 많은 선한 사람들은 하나님의 나라 건설과 확장을 위해 매우 유익한 존재라는 점을 인식해야 한다. 예컨대, 자연과 인간의 조화라는 오늘의 창조신학이 가르치는 창조 세계에 대한 교회의 책임을 생각해보자, 도교의 정신은 자연과 인간의 조화라는 기본적 정신 위에 형성되어 있다. 자연과 인간의 조화로운 공동체를 위해 도교는 상당히 중요한 정신적인 기능을 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하찮은 미물의 생명까지도 사랑하는 생명 존중의 정신은 불교 속에 많이 존재하고 있다. 슈바이처(A. Schweitzer)가 “생명 앞에서의 경외”를 외치기 오래전에 불교는 생명의 존중을 가르치고 있었던 것이다. 또한 가난한 이웃에 대한 자비 역시 불교의 정신 속에 본질적으로 존재하고 있다. 이 모든 것들은 다 선한 것이고 하나님의 나라 건설에 긍정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좋은 정신이다. 교회는 교회 밖에 존재하는 많은 선한 사람들과 협력해서 하나님의 왕국 건설을 위해 일해야 한다. 교회 밖에 존재하는 모든 사람은 마귀라는 이원론적인 단견은 한시바삐 청산해야 한다. 이와 같은 단견은 교회 밖에 존재하는 성령의 활동을 인식하지 못한 데서 나온 단견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면 교회 밖에 있는 선한 사람들을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를 수 있는가? 가톨릭의 신학자 칼 라너(K. Rahner)는 이들을 ‘익명의 그리스도인’이라고 칭했다. 그러나 이 익명의 그리스도인 개념은 구원론에 심각한 혼란을 불러올 수 있는 개념이다. 이들을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르는 것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는 그리스도인은 성서 속에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는 그리스도인 개념은 구체적인 그리스도의 개념을 매우 추상적으로 만들고 그리스도 교회의 지상 과제인 전도를 종국적으로 불필요하게 만들 위험을 안고 있다. 교회 밖에 있는 선한 사람은 선한 사람일 뿐이다. 우리가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은 그들을 통해서도 성령이 활동하고 있다는 점과 이들이 하나님 나라 건설을 위한 부분적인 동역자의 기능을 갖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교회 밖에 많은 하나님의 나라 건설을 위한 선한 동역자들이 있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나라 건설의 결정적 도구는 교회이다. 지상에 존재하는 것들 가운데 어떤 것도 교회 이상으로 하나님 나라 건설의 결정적인 도구는 없다. 왜냐하면 교회만이 하나님의 뜻을 명시적으로 아는 공동체이고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일꾼을 직접적으로 양성하는 공동체이기 때문이다. 교회를 통한 성령의 직접적인 지도가 없는 교회 밖의 선한 활동들은 순식간에 이기심에 물들고 잘못된 길로 나갈 가능성이 있음을 우리는 유념해야 한다.
(6) 교회의 정치적 책임과 공동의 선의 창출
교회는 정치적 문제에 대해 어떤 입장을 취해야 하는가? 교회는 정치적 문제에 대해 중립을 취해야 하는가? 대체로 보수적인 경향을 띠고 있는 신학자들과 교회는 정치적 문제에 중립을 취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교회가 세속적인 문제에 깊이 개입하는 것은 교회가 자신의 본질적인 과제를 망각하는 것이고 세속화되는 것으로 그들은 믿고 있다. 교회는 자신의 본질적인 과제인 영혼 구원의 과제에 집중해야 하고 데모나 정치를 위한 교회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그들은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교회의 정치적 중립론은 진보적인 경향의 신학자들의 비판의 표적이 되는 개념이다. 왜냐하면 교회의 정치적 중립은 결국 지배자의 사악한 지배를 영속시키는 결과를 낳기 때문이다. 특히 해방신학자들에 의하면 교회의 정치적 중립은 사실상 지배자의 이데올로기에 교회가 영합하는 것으로 규정하고 있다. 왜 교회의 정치적 중립은 지배자의 이데올로기에 영합하는 것이 되는가? 해방신학자들의 관점에 의하면 교회의 정치적 중립은 불의한 지배자의 지배를 사실상 방관함으로 말미암아 사악한 지배가 계속되는데 공헌하게 된다. 예를 들어 설명하면 강한 나라가 힘 약한 나라를 불의하게 침략하여 힘 약한 나라가 거의 멸망 상태에 빠져 있다고 할 때 이때의 중립이란 어떤 의미를 갖는가 하는 점이다. 이때의 중립이란 결국 강한 나라의 사악한 계속적 통치를 가능하게 하고 결국 힘 약한 나라가 불의에 희생되는 것을 사실상 방조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역사적으로 볼 때 교회의 중립이란 이와 같은 결과를 수없이 가져왔다는 것이 해방신학자들의 관점이다. 결국 교회의 정치적 중립이란 독재자들이나 사악한 지배자들이 원하는 신학적 관점인데 많은 경우 교회가 이에 영합하고 있다는 점이다.
해방신학자들에 의하면 교회의 정치적 중립이란 결국 지배자의 편을 드는 것이기 때문에 사악한 중립성이라고 규정한다. 이 사악한 중립성 때문에 기존하는 사악한 질서는 계속 유지되고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의 억울함은 영속화된다. 해방신학자들에 의하면 교회의 정치적 중립이란 없다. 교회의 정치적 중립을 외치는 자들은 내면적으로는 지배자의 이익을 대변하는 자들이다. 교회의 정치적 중립이란 현존하는 불의한 구조를 영속화시키고 개혁 의지를 원천적으로 봉쇄하는 잘못을 범한다.
해방신학자들에 의하면 교회는 정치적 중립의 입장을 견지해서는 안 되고 가난한 자의 편이 되어야 한다. 교회의 정치적 중립이 사악한 중립성이라면 가난한 자와 한편이 되는 것은 가난한 자들의 문제를 해결하는 길이고 불의한 자의 불의한 지배를 단절시키는 길이다. 해방신학자 보프(L. Boff)에 의하면 교회는 가난한 자와 한 당이 되어야 하고 가난한 자들을 위한 사회주의 이데올로기를 위해 투쟁해야 한다. 세군도(J. L. Segundo) 역시 비당파적인 체하는 신학은 그 출발점에서부터 보수적인 당파성을 내포하고 있다고 비판하면서 구체적인 상황 속에서 모든 인간은 당파적일 수밖에 없고 또 당파적이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세군도에 의하면 비당파성은 한결같이 현실적 책임 행위의 결여로 나타나고 결국 사악한 지배의 영속화로 귀결된다고 보았다.
교회는 정치적 중립이어야 하는가 아니면 가난한 자의 편이어야 하는가? 이 질문은 교회가 역사 속에서 어떤 활동을 하게 될 것인가와 매우 깊이 연관된 질문인 동시에 현재 교회 내의 진보적인 정신과 보수적인 정신 사이에서 일어나는 심각한 갈등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위의 두 가지 모두 아니다. 이 질문의 답은 교회는 공동의 선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교회의 정치적 중립론에 대한 해방신학자들의 비판은 상당한 범위에서 옳다. 교회의 정치적 중립론은 사회, 정치적인 문제를 교회의 비본질적인 문제로 간주하게 되는 잘못된 정신이 그 속에 들어 있다. 교회는 정치적인 문제에 초연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교회는 정치적인 문제에 책임을 져야 한다. 하나님의 나라 건설을 위한 교회의 정치적 책임은 막중하다. 힘센 자가 힘 약한 자를 불의하게 구타할 때 교회는 초연한 중립의 자세를 견지해서는 안 된다. 교회는 불의한 구타가 종식되도록 노력해야 하고 이 경우에 있어서는 교회는 힘 약한 자와 한 편이 되어야 한다.
그러면 교회는 언제나 힘 약한 자, 가난한 자의 편이어야만 하는가? 그렇지 않다. 가난한 자 속에 존재하는 이기심과 죄악성도 교회는 깊이 인식해야 한다. 지배자는 언제나 악이고 가난한 자는 언제나 선이라는 흑백논리는 정당성이 없다. 가난한 자가 지배자보다 상대적으로 많은 선을 내포할 수는 있어도 가난한 자 속에도 이기심과 죄악이 동시에 존재함을 교회는 유념해야 한다. 교회가 공동의 선을 위해 일해야 한다는 것은 교회는 지배자의 불의를 고치는 동시에 가난한 자의 죄악도 고쳐서 양자 모두 공동의 선을 이룩해야 한다는 것이다. 맑스주의 이데올로기 속에 있는 프롤레타리아의 지배가 교회가 지향하는 이상이 아니다. 교회는 부자의 지배도 가난한 자의 지배도 아닌 부자와 가난한 자와 함께 형제로 사는 평화의 공동체를 지향해야 한다. 교회의 당파성은 지배자의 불의한 지배를 깨기 위한 일시적인 도구로서의 기능은 갖고 있을 수 있지만 영속적인 교회의 정신은 될 수 없다.
성서가 전하고 있는 복음의 내용은 하나님의 나라이다. 하나님의 백성인 교회는 이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부름을 받은 공동체이다. 교회는 이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영적인 과제를 성실히 수행해야 한다. 교회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이 세상에 하나님 계심을 전해야 하고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선포해야 하고 죄 용서의 기쁜 소식을 전해야 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영적 일꾼을 양성해야 한다. 또한 교회는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고 하나님께 예배해야 하고 세상을 위해 기도하는 영적 과제를 성실히 수행해야 한다. 이것이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교회의 영적 봉사이다. 하나님의 나라 건설은 교회의 이 영적 봉사 없이는 그 방향을 잃게 되고 사탄의 활동에 미혹되고 사탄의 통치를 분쇄할 영적 힘을 상실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나라 건설은 결정적으로 장애를 받게 된다. 그러므로 특별히 제도적 교회는 하나님의 나라 건설을 위한 이 영적 봉사에 실패하지 않도록 유념해야 한다.
그러나 교회는 동시에 하나님의 나라 건설을 위한 세상적 책임에 실패하지 않아야 한다. 오늘의 세계 교회가 강조하고 있는 JPIC의 문제는 바로 이 세상적 책임에 대한 강조라고 볼 수 있다. 교회의 세상적 책임이 JPIC의 문제에만 국한되는 것은 물론 아니지만 그것들이 오늘의 세계교회에 당면한 가장 중요한 과제임에는 틀림없다. 이 세상적 과제는 시대가 지나감에 따라 또 새로운 과제가 등장할 것이다. 그 과제가 어떤 것이든 간에 교회는 하나님의 나라 건설을 위해 세상 한복판에서 일하시는 성령의 활동에 언제나 동참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