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를 빕니다!
서울교구 주낙현 요셉 신부님께서 성공회신문에 연재하신 시리즈 [성찬례 해설]을 공유합니다.
주낙현 신부님께 감사합니다.
원문 출처: [성찬례 해설 7] 기원송가 1 - 자비송과 영광송 - 성공회신문 (skhnews.or.kr)
[성찬례 해설 7] 기원송가 1 - 자비송과 영광송
주낙현 요셉 신부
죄를 고백하는 사람에게 하느님의 자비와 은총이 넘친다. 한목소리로 죄를 고백하고 용서의 선언을 들은 뒤, 신자들은 이제 한목소리로 하느님을 찬양하는 노래를 이어간다. 2004년 기도서에 <기원송가>라는 표제어로 묶인 네 개의 노래가 그것이다. 여기에는 다양한 역사와 주제가 있다. 현행 기도서는 절기에 따라 쓰임새도 정해 놓았다.
"'기리에'는 사순절에, '우리에게 오시어'는 대림절에, '영광송'은 성탄과 부활절, 그리고 대축일에, '거룩하신 하느님'은 연중에 사용한다."(성공회 기도서 245쪽)
그런데 연유를 알 수 없이, 그 배열이 오락가락한다. 교회력 순서를 따라 배치한 것도 아니고, 익숙한 것을 우선한 것도 아니다. 또한, '거룩하신 하느님'(트리사기온)과 '우리에게 오시어'는 2004년에 새로 들어왔다. 번거롭지만, 그 역사를 살피고, 주제를 깊이 헤아려 우리 전례를 하느님께 봉헌하도록 할 일이다.
가장 익숙한 <기리에 엘레이손>(Kyrie eleison)은 희랍어 그대로 사용하기도 하고,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로 번역하여 쓰기도 한다. 라틴어를 쓰는 서방 교회에 희랍어 문장이 그대로 들어와 있다. 이는 동방교회와 서방교회가 초기에는 전례를 함께 나누었다는 뜻이다. 좋은 것은 언제든 받아들이는 데 거리낌이 없었다.
문제는 의미의 변화다. "기리에 엘레이손"은 우리말 번역에 담긴 참회의 분위기와는 달리 칭송의 노래다. 예를 들어, 전쟁에서 승리하여 개선하는 왕의 행렬을 반기는 한편, 그 전리품을 나눠달라는 의미도 있다. 그리스도교가 초기에 이를 받아들였을 때도, 이런 찬양의 분위기가 더 강했다. 그런데 <기리에>가 이음기도(litany: 連禱)의 후렴으로 쓰이면서, 참회와 청원의 분위기로 흘렀다. 서방교회에서 일어난 일이다. 꼭 그럴 필요는 없다. 그러니 번역도 이제는 바꿀 필요가 있다. "주님, 자비를 베푸소서"로 하면 더 원어에 가깝고, 분위기를 좀 더 밝고 다채롭게 할 수 있다. 이름도 우리말로 <자비송>이라 하면 좋겠다.
<영광송>도 동방교회 아침기도의 찬양시가 서방교회로 흘러들어온 사례다. 초기에는 훨씬 길고 반복적인 표현이 많았다. 단순한 장엄미를 좋아했던 서방교회 전례에서 그나마 짧아져서 지금 본문으로 정착했다. 6세기 초에는 교종이 집전하는 성탄절 미사에서만 사용했다가, 점차 주교가 집전하는 주일과 축일 미사에도 쓰였다. 8세기에 이르러서 신자들의 요청으로 사제가 집전하는 매 주일 성찬례에도 쓰이는 찬양으로 정착했다. 이어 나올 <본기도>에 앞서 모든 신자가 함께 입을 모아 경배하는 노래로 적합하여 많은 사랑을 받았다.
성공회 기도서는 <영광송>을 <기리에> 다음에 따라 부르게 했으나(1549년), 영성체 후 기도와 축복기도 사이에 넣어 사용하기도 했고(1552년), 아직 그런 전통을 따르는 성공회 전례도 있다. 우리 기도서 개정(2004년)부터는 이를 아예 분리하여 함께 사용하지 않는 것처럼 했으나, 꼭 그럴 필요는 없다. 교회 음악 전통에서도 함께 연결하여 부르는 일이 대부분이다.
출처 : 성공회신문(http://www.skhnews.or.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