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는 참으로 많은 종류의 사랑이 있다. 그 중에서도 가장 놀랍고 독특한 사랑을 꼽으라면 아마도 <신곡>을 쓴 단테의 사랑이 아닐까 싶다. 어릴 때 부터 '순진한 아이' '순수한 아이'라는 말을 가끔 듣곤 했는데, 그리고 실제로 내가 그런 종류의 사람이라고 생각하였는데, 단테를 알게 된 뒤에 비로소 '나도 역시 세속적인 사람이구나' 하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 만큼 단테는 순수한 -순진한- 사람이었다. 단테와 베아트리체의 사랑은 세간에 익히 알려져 있지만, 너무나 소문으로만 알려져서 그 진위가 매우 왜곡된 것이 사실이다. 어떤 사이트에서는 '단테의 베아트리체'에 대한 사랑은 황당한 헛 소문이라고 하는데, 그 이유로 단테는 평생 베아트리체를 딱 한번 보았을 뿐이라고 하였다. 하지만 단테는 베아트리체의 이웃에 살았다. 그리고 또 어떤 사이트에서는 '베아트리체'가 19세에 요절하였다고 하는데, 이 역시 황당한 이야기 일 뿐이다. 베아트리체는 결혼을 하였고, 24세에 죽었다. 이러한 사실은 소문이란 것이 얼마나 사람을 무지하게 하는가를 알게해주고 있다.
이상의 오해는 16세기에 살았던 동일한 이름의 '베아트리체 첸치'라는
여성과 14세기 단테와 동시대에 살았던 '베아트리체'를 혼동한 때문에
생긴 오해일 것이다.
왼쪽의 그림이 16세기에 살았던 '비운의 소녀' 베아트리체 첸치 인데,
이 그림은 그림속의 소녀가 사형당하기 전의 모습을 직접 그린 것이라고 한다.
반면 단테가 살았던 14세기에는 사실상 회화그림이 거의 존재하지 않았고,
정식적인 회화 그림은 15세기에서 시작하였다. 15세기 당시는 회화라고 해도
그 기법이 상당히 뒤떨어지고 마치 벽화그림 유사한 회화들이었다.
따라서 단테의 연인이었던 실제 인물을 그린 그림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해야하는 것이 맞을 것이다.

단테의 연인이었던 '베아트리체'의 모습을 담은 그림들은
주로 1800년대 이후에 그려진 것인데,
가장 많은 그림을 남기고 있는 화가로는
단테와 동일한 이름을 가진 '단테 가브리엘리 로세티'라는
19 세기 화가이다.
오른쪽 그림은 가장 오래된 것으로 추정되는
그림인데 작자 미상이다.
이 그림에서 작자가 표현하고자 한 것은 베아트리체가 상당한 귀족가문의 딸(하인을 데리고 산택을 하고 있다)이며, 마음이 매우 선량했던 사람(노파에게 적선을 하고 있다)임을 그리고 단테는 평범한 문학청년(의복이 단순하고 두건이 귀족 집안이 아님을 말해주고 있다)임을 말해주고자 하는 듯 하다.
단테가 살았던 집은 베아트리체가 산 집과 거리 하나를 두고 불과 50여 미터 떨어진 곳이었다고 한다. 9살에 아버지와 연극을 보러 갔다가 베아트리체를 처음 본 순간부터 단테는 평생을 가슴 속에 베아트리체라는 여인을 두고 살았다. 아마도 그는 최소한 일주일에 한번 이상은 창문을 내다보며 메아트리체가 지나가는 모습을 지켜 보았을 것이다. 세상에 오직 한 사람, 처음 마음에 담았던 사람을 한 결같이 사랑하였던 단테는 그럼에도 베아트리체에게 사랑을 고백하지도 못하였다.
= 물론 여기서도 둘이 서로 사랑하였다는 설이 있겠지만, 정확하지 않다. 단테와 베아트리체가 만나서 사랑을 속삭이는 그림들이 있다해도 이는 400년 뒤에 그려진 것이라 실제 사실과는 무관한 것들이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시만 해도 중세의 중후기라, 한국의 조선시대와 유사한 시대였기 때문이었다. 제법 그럴듯한 가문의 사람들은 이미 어릴 적에 집안끼리 약혼을 해 놓았기 때문에 부모가 정해준 사람이 아니라면 '사랑'은 고사하고 데이트 한번 한다는 것도 있을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젊은 단테는 매우 소심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베아트리체가 일찌기 결혼을 하자 단테도 결혼을 하게 된다. 하지만 단테는 단 한번도 베아트리체를 잊지 못하였다. 그의 글들에는 '베아트리체'라는 이름이 많이 나오는데에 비해서 자신의 아내의 이름은 전혀 찾아 볼 수 없다는 것이 그 증거일 것이다. 사랑을 이루지 못한 그의 마음의 공허는 그를 정치판으로 내몰았는데, 그는 오랫동안 정치와 글을 쓰면서 세상을 비판하기 시작하였다. 그의 비판은 당시의 정치사회 전반에 걸친 것이었는데, 아마도 그러한 비판적인 성향은 자신의 사랑을 이루지 못하게 한 원인이 당시의 잘못된 사회적 관습에 있다는 생각을 가슴깊이 담고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러한 그의 비판적인 사고는 당시 정치인들에게는 아주 눈에 가시처럼 여겨졌고, 결국 단테는 그가 평생을 살아왔던 '피렌체'에서 추방을 당하는 선고를 받게 된다. 사실 중세기에 추방이라는 벌 보다 무서운 벌은 사형 이외에는 없었다. 왜냐하면 추방자는 추방되는 그날로부터 모든 법의 보호를 떠나게 되기 때문이다. 그는 암살의 위협을 느끼면서 고향을 떠나 타지를 방황하게 된다. 그의 방황과 고뇌는 절망을 불러오고 그는 삶 그 자체를 비관하기에 이르게 된다. 이미 중년을 맞이한 단테에게 '인생의 희망'이나 '구원의 빛'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그는 그 같은 부조리한 삶을 살아갈 힘을, 용기를 더 이상 가질 수가 없었다. 그는 애타게 희망과 구원의 빛을 갈망하고 있었다. 그리고 방황하는 그에게 빛을 준 것은 평생 가슴에 담아 왔던 남모르는 사랑, 베아트리체의 사랑이었다. 그는 아마도 어떤 깊은 종교적인 체험을 하였을 것이다. 일체의 사회적인 삶을 중단하고 그는 글을 쓰기 시작하였다. 어떤 사람들은 40년을 썼다고 하고 어떤 사람들은 10년을 썼다고 하지만, 아무도 그가 얼마나 오랫동안 글을 썼는지 정확히는 알수가 없었다. 그가 드디어 세상에 내어 놓은 책은 바로 <Divina comedia>, 즉 <신곡>이었다.
방황하고 해메던 절망의 끝에서 그는 천국으로부터 온 빛을 맞이하게 되는데, 베르길리우스라는 그리스의 위대한 시인이 저편세상으로부터 자신을 찾아왔다고 고백하면서 <신곡>은 시작하고 있다. 그 이유는 천국에 있는 '베아트리체'의 간곡한 부탁으로 단테를 지옥과 연옥 그리고 천국에로 여행을 할 수 있도록 한 것이었다. 물론 이러한 사실은 오직 단테가 스스로 살아갈 용기를 얻기 위해서 지어낸 것일 수도 있을 것이며, 몽롱한 정신에 환상을 본 것일 수도 있다. 어쨌건 지옥과 연옥과 천국을 방문하면서 그는 인생의 진리를 깨닫게 되고, 마지막으로 천국에서 신을 만나면서 그는 세상이 온통 신의 사랑으로 가득하며, 진정한 세상의 모습이 얼마나 아름다운 것인지를 알게 되면서 끝을 맺고 있다. 참으로 아름다운 반전이다. 그리고 마음을 훈훈하게 하는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한 젊은이가 한 여인을 사랑했고, 그 사랑은 결코 열매를 맺지 못했지만, 평생을 가슴속에 간직하였고, 그리고 그의 절망의 끝에서 그 사랑의 힘으로 살아갈 마지막 힘을 얻은 것이다. 그 사랑으로 인하여 그는 추하고 부조리한 세상에서 이루 말할 수 없는 아름다움을 발견하게 되고, 그 결실을 '불멸의 문학작품'으로 역사에 길이 남긴 것이다.
철학자 데카르트는 우리들이 머리 속에 상상한 관념도 만일 그것이 외부세계에 실제 존재하는 대상과 연결시키지만 않는다면 그것은 존재하는 실재라고 할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단테의 이러한 사랑은 비록 이 세상에 하나뿐인 사랑이라 할지라도 단테에게는 실제로 존재했던 사랑인 것이다. '사랑이란 나약한 이들이 지어낸 허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사랑이 진정 실재임을 숭고한 것임을 알게해주는 일화 중에 하나가 단테의 사랑일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