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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 에크하르트 - 신과 인간의 역동적 관계 부산가톨릭대학교 이 부 현(철학전공)
1. 들어가는 말 - 내적 인간과 외적 인간
에크하르트는 자신의 논고『고귀한 사람』에서 인간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인간(Menschen)이라는 말마디는 자연을 넘어서 있는(über natûre) 것, 시간을 넘어서 있는(über zît) 것 그리고 시간으로 향하여 있는 것이나 시간의 냄새가 나는 모든 것을 넘어서 있는 것을 뜻한다. 공간과 유형적인 것과 관계해서도 동일한 이야기를 할 수 있다. 더 나아가 이러한 인간은 어떤 방식에 있어서도 결코 다른 어떤 것과 공통점을 갖지 않는다.“ 물론 여기서 거론되는 인간은 내적 인간이다. 에크하르트는 기본적으로 외적 인간과 내적 인간이라는 틀을 갖고 인간을 이해하고 있다. 논고『버리고 떠나 있음』에 따르면 외적 인간은 감각적 인간이다. 이러한 감각은 영혼 덕분에 작동한다. 또 다른 인간은 내적 인간이다. 곧 내면적 인간이다. 내적 인간은 올바른 이성과 의지를 통하여 감관을 주도하고 인도할 때만, 오관으로 향할 따름이다. 하지만 “이러한 내적 인간이 어떤 드높고 고귀한 것(etwas hôhes edeles)을 향하게 되면, … 내적 인간은 감각으로부터 해방되어 (탈아脫我의) 황홀경을 맛보게 된다(sinnelôs und verzückt). 그리하여 이들이 바라보는 대상은 이성적인 원상(vernünftic bilde)이거나 아니면 상이 없는 이성적인 어떤 것(etwas vernünftiges âne bilde)이게 된다." 그런데 이러한 그의 생각은 이미 플라톤주의적․스토아주의적 전통 그리고 바울과 교부들의 전통 속에 자리 잡고 있었다. 또한 이에 따른 인간 이해는 루터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그를 훨씬 넘어 - 예컨대 경건주의(Pietismus) - 그리스도교적 인간학을 구성하는 모델을 제공해왔다. 그렇다면 에크하르트는 이원론자인가? 인간은 각각 구별되는 내적 인간과 외적 인간이라는 구성 요소의 합성물인가. 인간의 정신성은 내적 인간과 관계하고, 신체성은 외적 인간에 관계한다는 말인가. 에크하르트는 한 라틴어 설교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내적 인간과 외적 인간은 구분된다. 외적 인간은 낡고 이 세상의 지상적인 인간이이며, 날이면 날마다 사그라져 간다. 그의 종말은 죽음이다. … 반면에 내적 인간은 새롭고 천상적이다. 내적 인간 가운데서 신이 빛을 비춘다. 진리가 내적 인간으로 향하는 신의 길인 것처럼, 사랑은 신을 향하는 인간의 길이다.” 외적 인간은 지상적이고 신체적인 것에 속한다면, 내적 인간은 천상적인 것에 속한다. 하지만 이러한 이원론은 형식적인 구분일 따름이다. 왜냐 하면 외적 인간과 내적 인간이라는 말마디는 전적으로 동일한 인간을 상이한 측면에서 일컫는 말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에크하르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내적 인간은 비록 외적 인간과 동시에 동일한 곳에 나타나지만, 그들은 마치 최고 높은 하늘이 땅의 중심으로부터 먼 것보다 더욱더 서로 거리가 있다. … 아우구스티누스에 따르면 내적 인간에 있어서 진리가, 곧 신이 산다. 신의 본성은 항상 그리고 오직 안에 그리고 가장 내적인 데 존재하는 것(esse intus et in intimis)이다. … 내적 인간은 어떤 방식으로든 시간 속에서 또는 하나의 장소에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 오히려 전적으로 영원 가운데 존재한다. 거기(내적 인간)서 신은 탄생한다. 거기서 신은 소리를 듣는다(auditur). 거기서 신은 말한다. 오직 신만이 그렇게 한다. … 거기서 내적 인간은 가장 광활하고 심원한 가운데 있게 된다. 왜냐하면 그는 크기 없이 크기(magnus sine magnitudine) 때문이다." 에크하르트에 따르면 피조물은 신을 떠나서는 순수 무(reines Nichts)이다. 따라서 외적 인간은 무인 반면에, 내적 인간은 영원성 자체이기에 모든 것(alles)이다. 그렇다면 얼핏 보보기에 이원론을 표방하고 있는 것 같은 외적․내적 인간에 대한 논의는 일원론으로 지양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에크하르트가 인간에게는 신을 향해 열려 있는 내면성이 있다는 것을 받아드리고 있다는 점이다. 에크하르트는 이러한 내면성을 영혼의 근저(Seelengrund), 또는 영혼의 작은 불꽃(Fünklein)이라 부른다. 영혼의 근저는 신과 인간의 역동적 관계를 나타내는 관계 개념이다. 에크하르트의 인간론에 따르면 신체 이외에 신체의 형식인 정신-영혼(die Geist-Seele)이 있다. 영혼은 보다 낮은 능력과 보다 높은 능력을 갖고 있다. 보다 낮은 능력은 식물적 능력, 동물적 능력 및 감각적 능력인 반면에, 보다 높은 능력은 의지와 이성이다. 그런데 영혼의 근저는 이러한 영혼의 구성 요소나 부속물이 아니다. 이러한 영혼의 기관(Organ)이 아니다. 오히려 신과 인간 사이의 가장 내밀하고 정신적인 관계 개념이다. 신적 영역에 인간의 참여(participatio)를 나타내는 말이다. 곧 영혼의 근저는 그것의 신에 대한 가장 내밀한 역동적 관계, 곧 신 자신이 자신의 존재를 영혼의 근저에 샘솟듯 흘러 보냄(Seinszustrom)을 뜻한다. 영혼의 근저는 영혼 속으로 그때그때마다 새롭게 부여되고 흘러들어 작용하는 신의 존재 능력(Seinskraft Gottes)을 뜻한다. 에크하르트는 설교 20b에서 “신은 지속적 생성 가운데 끊임없이 새롭게 영혼에게 자신을 부여한다. 신은 ‘그것이 이루어졌다’ 또는 ‘그것이 이루질 것이다’라고 말하지 않고, 그것은 중단 없는 생성에 있어서와 같이 항상 새롭고 신선하게 이루어진다”고 말한다. 이런 의미에서 영혼의 근저는 신적이고 창조되지 않은 것이다. 하지만 영혼의 근저가 인간 가운데 있는 한, 그것은 인간적인 것, 곧 창조된 것이기도 하다. 존재론적으로는 신과 같은 것이지만, 생성에 있어서는 신에 의해 낳아진 것이다. 이 글은 에크하르트의 인간 이해와 그 후의 영향사를 더듬어 보기 위한 작업의 일환으로 쓰였다. 이런 일련의 작업이 완수된다면, 에크하르트 사상을 통하여 서양 사람들의 생각을 알아듣는 이해 지평이 보다 넓어지고 완벽해질 것이다. 이 글은 에크하르트의 라틴어・독일어 저서들을 통해 그의 설교 1을 분석하고 다시 구성하고 해석하는 일을 하고 있다. 설교 1은 논의 주제에 따라 다음과 같이 10부분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이 글에서는 ①을 도입부와 성전에 대한 정의로 ②③④를 하나의 주제로 묶어 ‘외적 인간의 내적 인간으로의 전환’으로 ⑤를 ‘신과 인간의 역동적 관계’로 ⑥은 예수의 발설 1로 그리고 ⑦⑧⑨⑩을 하나로 묶어 예수의 발설 2‘로 제목을 붙이고자 한다.
2. 도입부와 성전에 대한 정의
설교 1의 제목은 “예수께서 성전으로 들어가시어 팔고 사는 사람들을 내?기 시작하셨다(Intravit Jesus in tempulum et coepit eicere vendentes et ementes).”라는 마태오 복음 21장 12절의 말씀이다. 그런데 정작 에크하르트는 마태오의 이 구절을 요한복음 2장 14-16절을 빌려와 나름대로 재구성해 도입부를 마련하고 있다. 이에 따르면 도입부의 설교 주제는 다음의 두 가지 주제로 나누어진다. ① 우리 주님께서 성전으로 들어가시어 거기서 팔고 사는 사람을 바깥으로 내치셨다. 그 까닭은 무엇인가. ② 비둘기와 그와 같은 물건을 파는 또 다른 사람들에게는 “이런 것을 치워라. 이런 것들을 멀리하라”(참고. 요한, 2.16)고 말씀했다. 그 까닭은 무엇인가. 이러한 설교 주제 ①은 설교 가운데서 ‘장사꾼에 대한 정의 및 그들의 무지 및 바로 이어지는 부연1’(6쪽 6행-10쪽 7행)에서 논해지고 있으며, 설교 주제 ②는 앞의 논의에 대한 부연2(10쪽 8행 -12쪽 8행)에서 되풀이 설명되고 있다. 그리고 이들 모두에 대한 총론은 제일 먼저 거론되는 성전에 대한 정의(5쪽. 2행-6쪽 5행)에서 다루어진다. 과연 에크하르트는 성서상의 성전을 어떻게 해석하고 있는가. 이런 일련의 예수의 행동에는 성전을 비우고자(ledic) 하는 것 이외에 어떤 의도도 없었다. 그는 “나는 이 성전에 대한 권리를 갖고 있다. 성전 가운데서 혼자이고 싶다. 성전 가운데서 지배권을 갖고 싶다.”는 것이 이외 아무 것도 의도하지 않았다. 왜 그렇게 의도했을까. 신이 위엄 있게 자신의 뜻에 따라 지배하고자 한 이 성전이 바로 인간의 영혼이기 때문이었다. 신은 인간의 영혼을 자기 자신과 “꼭 같은” 모습으로 빚어내어 창조했다. 신은 “인간을 우리의 꼴(unserm bilde)과 우리의 모습(unser glichnisse)에 따라 만들었다.” 신은 인간 영혼을 자신과 “같게” 만들었기 때문에, 신이 경이롭게 창조한 모든 훌륭한 작품인 피조물 가운데 그 어느 것도 인간의 영혼만큼 신과 “같은” 피조물은 하나도 없다. 신과 그렇게도 “같은” 피조물은 인간이 유일하다. 에크하르트에서 있어 우주에 있어서 인간의 지위는 독보적이다. 이 때문에 신은 자신 이외 어떤 것도 더 이상에 인간의 영혼 가운데 있지 않도록 하기 위해 성전을 비우고 싶어 했던 것이다. 신과 성전은 “똑 같은" 것이기 때문에 성전이 신의 마음에 꼭 들었던 것이다. 성전 가운데 신 홀로 항상 있을 때 신에게 편했던 것이다. 이런 에크하르트의 논의는 왜 그가 우리에게 그렇게도 ‘버리고 떠나라'(Abgeschiedenheit) 또는 ’그냥 놓아두고 있어야‘ 한다(Gelassenheit)고 반복적으로 말하고 있는가에 대한 이유를 잘 보여주고 있다. ’버리고 떠나라‘는 말은 피조물적인 것으로부터 또 나로부터 떠나라는 말이다. 논고『버리고 떠나 있음』에 따르면, 신 자신이 “이러한 확고부동한 버리고 떠나 있음(unbewegelîchen abegescheidenheit) 가운데 영원으로부터 성립했으며, 여전히 그렇게 서있다. … 신이 하늘과 땅 그리고 모든 피조물을 창조했을 때, 이러한 창조 활동조차도 그 분의 확고부동한 버리고 떠나 있음을 전혀 손상시키지 못했다. 마치 어떠한 피조물도 결코 창조되었던 적이 없는 것처럼 그렇게 그분의 확고부동한 버리고 떠나 있음은 지속되었다.” 단적으로 신은 마치 피조물과 전적으로 다르다. 마치 하이데거에서 존재(Sein)가 존재자(Seiende)와 전적으로 전적으로 다르듯이(Unterscheiden) 말이다. 따라서 피조물적 방식으로 신을 언표하고 신을 이성을 부여하여 설명하고자 하지 말아야 한다. 신을 나의 손아귀에 잡으려고 하지 말아야 한다. 개 짖는 소리를 내지 말아야 한다. 신을 ’그냥 놓아두고 있어야 한다.‘ 그럴 때, 신이 영혼 가운데 탄생한다. 신의 탄생은 내가 신에 의해 신이 된다는 말이다. 신과 같아진다는 말이다. 여기서 신과 인간이 닮아 있다가 아니라, 신과 인간이 같다는 일의성이 강조되고 있음을 간과하지 말아야 한다. 여기서 성전이라는 은유로 지시되고 있는 인간의 영혼을 설교 101에서는 "영혼의 근저"(grunde der sêle), 또는 "영혼의 존재"(wesenne der sêle) 또는 "영혼의 가장 감추어져 있는 곳"(verborgensten der sêle), "영혼의 가장 고상한 곳"(edelsten der sêle), "영혼의 가장 순수한 곳"(lûtersten der sêle)이라는 말로 바꾸어 표현하고 있다. 설교 2에서는 “시간과 육체와도 관계하지 않는 영혼 안의 한 능력”(ein kraft in der sêle, diu berüeret nihit zît noch vleisch) “영원한 아버지는 그의 영원한 아들을 이러한 능력 안에 중단 없이(âne underlâz) 낳는다.” 또는 “작은 성벽”(bürgelîn) "오직 자유로운 정신 가운데의 하나의 능력"(ein kraft in dem geiste, diu sî aleine vrî)" "정신의 모자"(ein houte des geistes) "정신의 빛"(ein lieht des geistes) "작은 불꽃"(vünklîn) "이것도 저것도 아닌 것“(weder diz noch daz) "하늘이 땅보다 아득히 높이 있는 것보다 훨씬 더 이것이나 저것보다 높이 있는 어떤 것”(ein waz, daz ist hoeher boben diz und daz dan der himel ob der erde) 등의 말로 표현하고 있다. 그 이외에 여러 곳에서 ‘정신의 최상의 정점’(obersten Wipfel des Geistes) ‘인간 가운데 영원한 지복의 장소’(Ort ewiger Seligkeit im Menschen) '정신의 정상‘(Gipfel der Seele) '신의 모습’(Bild des Gottes), ‘소용돌이’(Wirbel), ‘최상의 이성’(oberste Vernunft), ‘인간’(Mensch) 등으로 부르고 있다. 그리고 라틴어 저작에서는 영혼의 근저를 아우구스티누스의 사상적 유산에 따라 ‘정신의 숨겨진 심연’(abditum mentis) 또는 토마스주의적 유산에 따라 ‘최상의 이성’(ratio superior)이라 부르고 있다. 간혹 양심(synderesis)이고 표현하기도 한다. 이들 개념은 앞서 말한 것처럼, 영혼의 낮은 능력(식물적 능력, 동물적 능력, 감각적 능력)이나 높은 능력(의지, 이성)의 구성 요소도 부속물도 아니다. 곧, 그러한 영혼의 기관이 아니다. 신과 인간 사이의 가장 내밀하고 정신적인 역동적 관계 속에서 성립하는 관계 개념이다. 이 영역은 신과의 관계 속에서만 의미를 갖는 영역이다. 에크하르트는 인간에게 신으로 열려 있어 신과 소통 가능한 신적 영역, 곧 신체와 시간으로부터 깡그리 벗어나 있는 영역이 있다고 보았다. 그는 설교 2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것(이 영역)은 모든 이름이나 정식들(alle formen)로부터 벗어나 있다. 이것은 신이 자기 자신 안에서 벗어나 자유롭듯이 전적으로 벗어나 자유롭다. … 그래서 우리는 그 안을 어떤 방식으로도 들여다 볼 수 없다. … 이러한 능력 자체 안에서 아버지는 참으로 자기 자신 안에서처럼 그의 유일하게 낳아진 아들(sînen eingeborenen sun)을 낳는다.” 한 마디로 설교 1의 앞머리에 나오는 성전은 이러한 인간의 가장 근원적인 가장 내적 영역을 뜻한다.
3. 외적 인간의 내적 인간으로의 전환
에크하르트는 논고『고귀한 사람』에서 외적 인간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영혼에 붙어 있는 모든 것은 외적 인간에 속한다. 외적 인간은 육신에 사로잡혀 있고 육신과 섞여 있다. 외적 인간은 모든 기관들을 갖고서 신체적 상호 작용을 한다. 곧, 눈, 귀, 혀, 손 그리고 그와 같은 것 등등을 갖고 그렇게 한다. 이러한 모든 것을 성서는 낡은 인간, 지상적 인간, 외적 인간, 적대적 인간, 예속적 인간이라고 부른다.” 물론 내적 인간도 신체를 갖고 있지만, 그것에 함몰되지 않고 이성과 의지를 통해 그것을 제대로 사용한다. 더 나아가 내적 인간은 드높고 고귀한 것을 향할 때, 영혼의 능력을 넘어서는 영혼의 근저에 신의 탄생을 경험한다. 신과 하나 된다. 그리하여 신과 소통 가능한 신적인 영원의 영역에 머물게 된다. 반면에 외적 인간은 신체와 그것의 형식인 영혼의 높고 낮은 능력들과 소통하면서 살아가는 보통의 우리를 말한다. 보통의 우리는 제물로 향한다. 바쁘고 분주하다. 개인적 욕심에 눈이 멀어 있다. 또한 자아에 대한 집착을 떨쳐 버리지 못하고 살아간다. 그래서 더욱 정신적․신체적 온갖 병을 얻게 된다. 행복을 엉뚱한 데서 찾게 된다. 이런 논의는 하이데거의 ‘넘어서 있는 존재’(Existenz)와 ‘일상적 존재’(Alltägliches Sein)에 대한 논의를 떠올린다. “신의 모습, 신의 아들이 마치 살아 있는 샘처럼 영혼의 근저에 있는 것”인가? 에크하르트는 그런 영역을 경험하고 인간의 본래 모습을 경험했다. 그것을 우리에게 알려주려고 했다. 그에 따르면 인간에게는 신체와 그것의 형식인 영혼의 여러 능력을 훨씬 벗어나 있어 신이 자유로운 것처럼 자유로운 그런 영역이 인간에게 있다는 것이다. 그 영역만이 참된 의미에서 인간의 고유한 영역이다. 에크하르트는 외적 인간에 대한 논의를 ① ‘무지에 둘러 싸여 있는 장사꾼에 대한 정의’(6쪽 6행 - 9쪽 6행) 및 ② ‘바로 이어지는 부연1’(9쪽 7행-10쪽 7행) 그리고 ③ 좋은 사람이긴 하지만 아상에 여전히 물들어 있는 수도자들이나 베기네로 추정되는 사람에 대한 논의인 ‘앞의 논의에 대한 부연2’ 등에서(10쪽 8행-12쪽 8행) 등에서 행하고 있다고 이 글은 설정하고 있다.
3.1. 무지에 둘러 싸여 있는 장사꾼
성전에서 팔고 샀던 사람들은 누구인가? 지금도 여전히 성전에서 팔고 사는 사람은 누구인가? 에크하르트는 예외 없이 좋은 사람(gouten liuten)에 대해서만 설교하고 싶었지만, 이번 경우는 예외로 장사꾼에 대해 말하겠다고 한다. 따라서 에크하르트 눈에 장사꾼은 좋은 사람과 반대되는 사람이다. 이때 장사꾼은 비둘기를 파는 사람이 아닌 환전상을 뜻한다. 이런 장사꾼은 우리 주님께서 바깥으로 내치시고 내몰았던 성전에서 팔고 샀던 사람들이며 오늘날도 여전히 성전에서 팔고 사는 사람들이다. 그렇다면 에크하르트가 장사꾼이라는 말로 은유적으로 말하고 있는 사람들은 과연 어떤 사람들인가? “무례한 죄를 짓지 않으려고 노심초사하는 사람들, (할 수만 있다면) 기꺼이 좋은 사람이었으면 하는 사람들, 단식, 철야, 기도 및 그와 같은 것들 그리고 모든 종류의 선행 등과 같은 자신들의 좋은 행실들을 신의 영광을 위해 행하는 사람들은 모조리 다 장사꾼들이다.” 왜 그럴까? “그들은 여전히 우리 주님께서 그 대가로 어떤 것을 자신들에게 주실 것이기 때문에 또는 신이 자신들이 바라는 어떤 것을 자신들에게 그 대가로 베풀어 주실 것이기 때문에 행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다른 것을 위해 하나를 주고자 하면, 이러한 방식으로 우리 주님과 장사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이러한 장삿속에 휘말려 속고 있다. 왜냐 하면 “그들이 소유하고 있는 모든 것, 그들이 영향을 입힐 수 있는 모든 것을 그들이 신을 위해 포기한다고 하더라도 그리고 그들이 갖고 있는 것 모두를 신을 위해 전적으로 베푼다 하더라도, 신이 그 대가로 그들에게 줄 것 이라고는 전혀 그리고 전적으로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또는 신이 그들에게 전적으로 죄스럽게 여길 것이 하나도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 그 까닭은 그들이 그들인 것은 (바로) 신을 통해서이기 때문이다. 그들이 갖고 있는 것을 그들이 갖는 것은 신에 의해서이지, (결코) 그들 자신들에 의해서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신은 그들의 선행들과 그들의 베풂 때문에 그들에게 책임질 것이 전혀 없다. … 그들은 자신의 것으로부터 준 것이 하나도 없다. 그들은 또한 자기 자신으로부터 작용한 것도 하나도 없다. … 이 사람들은 지독하게 바보 같은 사람들이다.” 설교 4에 따르면 실로 “모든 피조물은 순수한 무(ein lûter nicht)이다. … 존재를 갖지 않는 것은 무이다. 모든 피조물은 존재를 갖지 않는다. 왜냐 하면 피조물은 존재는 신의 현재(gegenwerticheit gotes)에 매달려 있기 때문이다. 만약 신이 단 한 순간이라도 모든 피조물로부터 등을 돌린다면, 모든 피조물은 없어질 것이다. … 모든 피조물은 신 없이는 더 이상 (존재를) 갖지 않는다.” 그런데 이들은 자기 것이 있는 냥, 주님과 장사하려고 든다. 이들은 진리를 전혀 모른다. 빛과 어두움이 서로 나란히 서 있을 수 없다. 그래서 주님께서 이들을 성전 바깥으로 내쳐 몰아냈던 것이다. 신은 진리이고 빛이다. 따라서 신은 성전으로 들어 서기 위해 어두움인 무지를 몰아 낼 수밖에 없다. 그리하여 진리가 인식되면, 장사꾼은 물러가게 된다. 진리는 어떠한 상행위도 갈구하지 않는다. 곧, 신은 자신의 것을 추구하지 않는다. 신은 모든 일을 다 행하면서도 그것을 벗어나 있어 자유롭다(ledic und vri). "신은 진정한 사랑으로부터 작용한다. 또한 신과 하나 된 사람도 전적으로 그렇게 한다. 그는 모든 자신의 업적 가운데서도 (그것을) 또한 벗어나 있으며 자유롭다. 그들은 자신의 업적들을 오직 신의 영광만을 위해 작동시키며, 자신의 것을 추구하지 않는다. 신은 그 사람 가운데 작용한다.“ 한 마디로 장사꾼은 신의 떠나서는 자신이 아무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모르고 자신의 것으로 신과 장사하려는 사람이다.
3.2. 장사꾼에 대한 논의의 부연 설명 1 에크하르트가 무엇인가를 부연할 때, 사용하는 문체는 대개 “더 나아가서 나는 말한다.”(ich spriche noch mê: Ich sage noch weitgehend)이다. 따라서 그는 이 말들을 갖고 앞의 논의에 대해 부연을 시작한다. “인간이 자신의 모든 업적을 갖고 신이 줄 수 있거나 주고자 하는 모든 것 가운데 그 어떤 것이라도 추구하는 한에서, 그는 장사꾼과 같다.” 그 까닭에 라틴어 설교들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는 신만을 의도해야 한다. 이것이 ‘정신적으로 거닐라’(spiritu ambulate)라는 말의 뜻이다. 나의 것 어떤 것도 또는 나도 추구하지 말아야 한다. … 신은 자기 것을 어떤 것도 추구하지 않는다. 신은 오로지 우리의 이익만을 생각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의 “영혼은, 벗어난 영혼(nuda)은 오직 신만(nudam deum)을 찾을 뿐 신 가운데 있는 어떤 것도 찾지 않기 위해, 모든 것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 설교 1번의 말로하면 “신이 이러한 성전(영혼)에서 당신에게 자리 잡게끔 당신이 장사꾼의 속성으로부터 전적으로 벗어나기를 원한다면, 당신은 모든 당신의 업적 가운데서 행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순수하게 신의 찬미만을 위해 행해야 한다. 그리고 당신은 마치 여기에도 없고 저기에도 없는 무(niht)가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고) 벗어나 있는 것처럼 그런 것으로부터 벗어나 서 있어야 한다.” 우리는 어떤 대가도 바라지 않고, 신을 갈망해야 한다. 이 때 우리의 업적은 정신적이고 신적인(geistlich und götlich) 것이 될 것이다. 이때 장사꾼들은 모조리 다 성전에서 쫓겨나고, 신만 그 가운데 존재하게 될 것이다. “오직 신 이외 자신도 그 어떤 것도 찾지 않는 사람 그리고 신의 영광만을 생각하는 사람은 … 모든 장사꾼 같은 속성으로부터 참으로 벗어나 있어 자유롭다.” 그는 마치 신이 벗어나 있어 자유로운 것처럼, 자유롭다. 그는 자신의 것을 추구하지 않는다. 이로써 설교 주제 ①인 ‘우리 주님께서 성전으로 들어가시어 거기서 팔고 사는 사람들을 바깥으로 내치셨다.’에 대한 논의는 끝난다.
3.3. 장사꾼에 대한 논의의 부연 설명 2
“에크하르트는 나는 또한 더 나아가서 이야기했다.”로 부연 설명 2를 시작한다. 여기서 주제 ②인 ‘비둘기와 그와 같은 물건을 파는 또 다른 사람들에게는 “이런 것을 치워라. 이런 것들을 멀리하라”고 말씀했다.’는 구절에 대한 에크하르트의 특유의 설교가 시작된다. 주님께서 이 사람들을 바깥으로 내치지도 않으셨고, 그들을 혹독하게 다루지도 않으셨다. 오히려 주님은 대단히 호의적으로 “이런 것을 치워라.”라고 말씀하셨다. 이는 “아마 이런 일은 (그다지) 나쁜 일은 아니지만, 순수한 진리에 대해 방해 요인이 된다.”라고 말씀하시고자 했던 것 같다. “이 사람들은 좋은 사람들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선행을 순수하게 오직 신만을 위해 하고자 하지, 그 가운데서 자신들의 것을 추구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들은 여전히 자신의 자아(eigenschaft)에, 시간과 숫자에 그리고 앞(vor)과 뒤(nach)에 사로잡힌 채(mit eigenschaft, mit zît und mit zal, mit vor und nâch) 행위하고 있다.” 이 때문에 이들은 이러한 선행 가운데서도 여전히 최상의 진리(aller besten wârheit)에 도달하지 못하고 여전히 방해받고 있다. 이들은 마치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가 자유롭고 벗어나 있듯이 자유롭고 벗어나 있어야 한다. 자유롭고 벗어나 있는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는 … 중단 없이 모든 순간에 그리고 시간을 벗어나서(âne zît) 하늘에 계신 아버지로부터 항상 새롭게 자신을 받아들이셨다. 그리고 그는 감사로 가득 찬 찬미를 지니고서 동일한 현재에 있어서(in demselben nû) 중단 없이 저 높은 곳에 계신 아버지께로 (아버지와) 똑 같은 위엄을 지니고 자신을 완전히 다시금 낳는다.” 우리도 그와 같이 자유롭고 벗어나 있어야 한다. 그럴 때, 우리도 최상의 진리를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 앞과 뒤도 없이 그리고 모든 선행과 그 선행에 대한 생각들(bilde)에 방해 받지 않고 그렇게 할 수 있게 된다. 이 때, 우리도 벗어나 있어 자유롭게 되어 신적 선물을 이 지금에 있어 새롭게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 이 때, 감사로 가득 한 찬미를 갖고 어떤 방해도 받지 않고 우리들을 다시금 낳게 될 것이다. 비둘기는 모든 선행을 통해 암암리에 자신을 추구하는 데서 비롯되는 장애(hindernisse), 곧 자아에 사로잡힘(eigenschaft: Ich-Bindung)을 뜻한다. 단적으로 선행은 좋지만, 그 가운데 자신의 것을 추구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런 연유로 우리 주님께서 ‘이런 것을 치워라, 이런 것을 멀리하라’고 대단히 호의적으로 말씀하신 것이다. “그는 ‘그것은 좋다. 하지만 그것은 장애를 수반 한다’고 말씀하시고자 하셨든 것 같다.” 이들은 사심 없이 신만을 위해 살려고 하지만, 알게 모르게 자아에 사로 잡혀 있어 최종적 목적 지점에 도달하지 못한 이들이다. 3.4. 부정 신학 설교 1에 나오는 환전상에 해당하는 장사꾼과 비둘기를 파는 사람에 대한 논의를 외적 인간에 대한 사례로 설정했다. 장사꾼은 단식, 철야, 기도 및 모든 종류의 선행 등을 신을 영광을 위해서 행한다고 하지만, 신이 그 대가로 어떤 것을 자신들에게 주실 것이라고 생각하고 행하는 사람들이다. 따라서 그들은 신과 장사하고자 하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장삿속에 휘말려 속고 있다. 그들이 소유하고 있는 모든 것은 이미 신으로부터 받은 것이기 때문에 그들이 아무리 좋은 일을 한다하더라도, 신은 그들에게 그 대가로 줄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기 때문이다. 그들이 처해 있는 상황은 무지이다. 그들이 자신의 것을 하나도 추구하지 않을 때. 그들은 진리 가운데 서게 될 것이다. 비둘기파는 사람들에 있어서 비둘기는 모든 선행을 통해 알게 모르게 자신을 추구하는 데서 비롯되는 자아 구속과 장애를 뜻한다. 따라서 비둘기, 곧 선행으로부터 말미암는 생각들로부터 비롯되는 자아에 대한 집착으로 벗어나야 한다. 이들이 처한 상황은 자아에 여전히 사로잡혀 있음이다. 비둘기파는 사람에 대한 논의는 화엄경의 공(空)에 도달했다고 생각하는 것조차도 비워야 한다(空)는 공공(空空)을 떠올린다. 간단히 말하면 설교 1에서 말하는 외적 인간은 무지와 자아에 사로 잡혀 있는 인간을 말한다. 에크하르트의 이러한 논의는 그의 부정 신학적 입장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피조물이 신에 대해 이렇게 또는 저렇게 말하는 것은 하나의 개 짖는 소리(Kläffen)에 지나지 않는다. 인간이 행하는 모든 일은 자기의 것을 염두에 두고 하는 일이다. 이기적이다. 자기와 관계되어 있다. 인간은 모든 것을 신까지 포함하여 자기 자신을 위하여 소유하고자 한다. 인간이 신을 추구하는 것도 개인적인 이익을 보존하고자 구실이다. 인간은 신과 장사하려고 한다. 천배나 되돌러 받으려는 생각으로 신에게 준다. 인간에게는 주는 것(Geben) 자체가 이미 청구하는 것(Heischen)이다. 신은 결코 장사 대상이 아니다. 따라서 신께 도달하려고 하면, 정신적으로 가난해야 한다(geistige Armut). 그때 우리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신, 이름 없는 신(Namenlosigkeit Gottes)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그래서 신은 무엇보다도 우리에게 침묵을 요구한다. 우리 쪽에서 신에게 어떤 술어도 붙일 수 없다. 설교 83은 다음과 같이 말하다. “신은 이름이 없다. 왜냐하면 어느 누구도 신에 관해 언표하거나 인식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 까닭에 이교도 스승(아리스토텔레스)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가 최초의 원인들에 대해 인식하거나 언표 하는 것은 최초의 원인들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우리들이다. 왜냐 하면 이들 최초의 원인들은 모든 언표와 이해를 넘어 서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만약 나는 신은 선하다고 말한다면 - 그것은 참이 아니다. (오히려) 내가 선한 것이지, 신이 선한 것 이 아니다! … 더 나아가 만약 내가 신은 지혜로우시다고 말한다면 - 그것은 참이 아니다; (오히려) 신보다도 내가 더 지혜롭다. 더 나아가 만약 내가 신은 존재(ein wesen)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참이 아니다. (오히려) 신은 존재를 넘어서 있는 존재이며 존재를 넘어서 있는 무이다. 따라서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인간이 신에 대해 언표 할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것은 … 침묵할 수 있는 것 가운데 성립한다고 말한다. 따라서 침묵하라 그리고 신에 대해 짖어대지 마라.” 이런 까닭에 성전은 비워 있어야 한다.
4. 신과 인간의 역동적 관계 - 귀속적 유비(analogia attributiva) 이어지는 설교는 성전(영혼)이 자아와 무지로부터 벗어날 때 갖게 되는 효능(12쪽 9행 - 15쪽 9행)에 대한 논의로 시작한다. “만약 이 성전이 모든 장애로부터, 곧 자아와 무지로부터 자유롭게 되기만 한다면, 이 성전은 신이 창조한 모든 것을 넘어서서 … 너무나 아름답게 그 광채를 드러내며, 너무나 순수하고 너무나 투명하게 그 빛을 발할 것이다. … (따라서) 오직 창조되지 않은 신만을 제외하고 어느 누구도 이 성전과 같을 수가 없다.” 물론 이때 성전은 영혼의 근저, 영혼의 불꽃이다. 영혼의 근저는 신과 똑 같은 것이기 때문에 ① 천사 아래 있는 모든 것은 그 어떤 것도 이 성전과 도무지 같을 수 없다. ② 최고의 천사라도 고귀한 영혼의 이 성전과 어느 정도만 같을 따름이지, 전적으로 같지는 않다. 이때 최고의 천사가 어느 정도 영혼과 같다는 말은 인식(bekantnisse)과 사랑(minne)에 있어서 그렇다는 말이다. 하지만 천사들은 목표가 정해져 있어 그것을 뛰어 넘을 수 없다. 그러나 인간 영혼은 그것을 뛰어 넘을 수 있다. “ … 이러한 인간은 항상 또한 자신의 자유로운 능력 가운데서 숫자 없이(âne zal), 곧 방식 없이(âne wîse) 각각의 지금에 있어서 새롭게 천사를 측량할 수 없을 정도로 아득히 더 높게 나갈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천사와 모든 창조된 지성의 방식을 아득히 넘어 나갈 수 있을 것이다. 신만이 자유롭고 창조되지 않은 것이기 때문에, 신만이 자유에 좇아 영혼과 같다.” 영혼과 신이 같다는 말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존재는 신에게도 피조물에도 각각 상이한 방식으로 술어가 된다. 존재라는 말이 신에게 술어가 되는 경우, 절대적인 의미를 갖지만 피조물들에게는 각각의 존재 정도에 따른 위계질서에 따라 상대적인 의미만 갖는다. 게다가 신은 원인과 원리(Ursache und Prinzip)로서 존재하는 반면, 피조물들은 원인에 의해 도출된 방식으로 서로 상이하게 존재한다. 이와 같은 것이 토마스의 유비론의 골자이다. 하지만 에크하르트에서는 이와 전적으로 다르다. 그는 피조물에 존재를 전적으로 귀속시키지 않는다. 그가 볼 때, 토마스가 말하는 상대적인 피조물의 존재와 절대적인 신적인 존재 사이에 어떠한 비례 관계(Proportionalität)가 성립한다는 견해는 부정된다. 에크하르트가 볼 때, 피조물은 신에 의해 유지되는 한 존재할 따름이다. 존재는 단지 신에게 속하는 것이다. 따라서 참(Wahr), 선(Gut), 올곧음(Gerecht) 등 모든 초월 범주(Transzendentalien)와 일반적 완전성(perfectiones generales)은 단지 신에만 속한다. 그리고 또한 에크하르트에 있어 절대적 존재와 상대적 존재 사이에 어떠한 정지된 대립도 결코 있을 수 없다. 오히려 신적 존재는 오직 주는 존재로서만 생각되고, 창조된 존재는 수용하는 존재 또는 그때그때마다 새롭게 수용하는 존재(je neu zu empfangendes Sein)로서만 생각된다. 따라서 창조자와 피조물 사이에는 토마스에서처럼 중성적 연관 관계(ein neutrales Bezugsverhältnis)가 아니라, 의존적 관계(Abhängigkeitsverhältniss)가 지배한다. 토마스에서 피조물은 거의 무(quasi nihil)에 해당하지만, 에크하르트에서 피조물은 순수 무(purum nihil)이다. 피조물은 전적으로 그때그때 마다의 신의 존재 부여에 매달려 있을 따름이다. 이를 귀속적 유비라 한다. 영혼이 그때그때마다 새롭게 신에 귀속해서만 그때그때마다 새롭게 신과 같아진다는 것이다.
이러한 의존 관계가 신과 인간 사이의 역동적 성격을 규정하는 것이다. 에크하르트에 있어서 모든 존재가 그에 귀속되는 신과 어떤 존재도 귀속되지 않는 피조물 사이의 역동적 토대 지움의 관계(das dynamische Fundierungsverhältniss)가 중요하다. 피조물은 존재에 대한 목마름(Durst) 가운데 존재한다. 왜냐하면 피조물은 자기 자신으로부터는 어떠한 존재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는『집회서에 대한 설교와 강의』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창조된 존재자는 존재(esse), 생명(vivere), 사유(sapere) 등을 … 신으로부터 그리고 신에 있어서이지 창조된 존재자인 자기 자신에 있어서 갖지 않는다. 그래서 창조된 존재자는 그것이 산출되고 창조된 한에 있어서, 항상 (신으로부터) 먹는다. 하지만 항상 굶어 있다. 왜냐하면 항상 자기 자신으로부터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항상) 다른 것으로부터 존재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신을 토대로 해서만 존재한다. 인간은 신의 존재만을 수용할 수 있을 때, 그때만 신과 같게 된다. 자신을 항상 비울 때, 그때만 항상 신과 같게 된다.
신과 인간의 관계는 정적으로 고정되어 있지 않다. 신을 비우는 정도에 따라 인간은 신과 달라지는 정도가 달라진다. 그리고 피조물을 비우는 정도에 따라 인간은 신과 같아지는 정도가 달라진다. 이러한 논의가 바로 신과 인간의 고정되지 않은 역동적 관계를 뜻하는 것이다. 에크하르트의 논고『버리고 떠나 있음』에 따르면, “모든 피조물로부터 비워져 있는 것은 신으로 가득 차 있는 것이다. 그리고 또한 모든 피조물로 가득 차 있는 것은 신으로부터 비워져 있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피조물에게 우리 자신을 투신하면 할수록 그 만큼 우리는 신과 적게 하나 될 수밖에 없다. … 그러므로 우리가 피조물로부터 빠르게 달아나면 날수록, 그 만큼 빨리 창조주가 그에게 달려 나갈 것이다.” 또한 신과 인간의 관계는 모든 사람에게 천편일률적으로 다 똑 같이 적용될 수도 없다. 신을 받아들일 수 있는 심정의 준비에 따라 사람마다 달라질 수밖에 없다.
신은 전능하신 분이지만, 신이 우리 심정 가운데 자신의 온전한 의지대로 작용할 수 없다. 신은 우리가 준비가 되어 있을 경우나 그 자신이 우리를 준비시키거나 하는 경우에 한해서만 우리에게 작용할 수 있다. 논고『버리고 떠나 있음』에 따르면, “신은 우리가 준비를 하는 데 따라 작용한다. 신은 돌 가운데 작용하는 것과 달리 인간 가운데 작용한다. … 누군가가 빵 굽는 가마를 데워, 그 안에 귀리 반죽과 보리 반죽 그리고 호밀 반죽과 밀가루 반죽을 집어넣고, 이제 가마에 열 이외 어떤 것도 가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열은 반죽에 똑같은 방식으로 작용하지 않는다. 그 까닭에 어떤 반죽은 예쁜 빵이 되고, 또 다른 반죽은 거친 빵이 되고, 또 셋째 빵은 더욱더 거친 빵이 된다. 이는 열의 탓이 아니라, 오히려 같지 않은 재료의 탓이다. 이와 같이 신은 모든 심정들에 똑 같은 방식으로 작용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우리가 그분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는 정도에 따라 작용한다.” 신에 토대한 신과 인간의 관계는 동일한 인간에 있어서도 그때그때 마다 달라지지만, 인간들 각각에 있어서도 준비 정도에 따라 다 달라진다. 동일한 인간에서도 동일한 순간이 없다. 또한 각각의 인간들에서도 동일한 것은 없다. 니체와 하이데거가 떠오른다. 인간 일반에 대해 이성을 갖고, 언어를 갖고 말하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을까. 학문들(sciences)은 각각 어떤 것을 특정 관점에 따라 우리에게 말해주긴 하지만 동시에 아무 것도 말해주지 않는 것이 아닐까. 그것들은 세상에 근거를 부여하고 이성을 부여하여(rationem reddere) 인위적으로 성립된 시뮬레이션이 아닐까.
설교 1에서는 이러한 관계를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비록 창조된 것이 아닌 신만이 영혼과 같기 하지만 “(영혼이 신과 같이) 창조되지 않았다는 점에 따라서 그러한 것이 아니다. 영혼은 창조되었기 때문이다.” 영혼은 신과 결코 같을 수 없다. 영혼은 창조된 것이고, 신은 창조되지 않은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영혼은 신에 의해서만 신과 같을 수 있다. 어떨 때 영혼이 신과 같이 되는 것인가? “만약 영혼이 혼합되지 않은 순수한 빛 가운데로 들어선다면, 영혼은 무 가운데 창조된 어떤 것과는 아주 동떨어진 자신의 무로 전환할 것이다.” 영혼이 혼합되지 않는 순수한 빛 가운데 들어선다는 말은 영혼의 근저로 들어선다는 말일 것이다. 무 가운데 창조된 어떤 것은 피조물을 뜻한다. 그렇다면 그런 것과 아주 동떨어진 자신의 무란 무엇일까? 신을 떠나서는 순수 무인 창조된 어떤 것, 공간적인 것, 시간적인, 것, 변화무상한 것 등으로부터 아주 떠났다는 말일 것이다. 그런 것으로 아예 되돌아오지도 못할 정도로 말이다. “영혼이 자신의 고유한 능력으로부터 다시는 결코 자신의 창조된 어떤 것으로 되돌아 갈 수 없게끔” 말이다. 그럴 때, 신이 그 자리에 들어선다. 곧, “신이 자신의 창조되지 않음을 갖고 영혼의 무 아래에 선다. 신은 … 영혼을 지탱한다.” 그래서 영혼은 무가 되고자 했다. 다시금 자기 자신으로 되돌아 올 수 없을 정도로. 신이 영혼 아래에 자신을 세우기 이전에 “영혼은 그렇게나 멀리 자신을 벗어나 있다. 반드시 그렇게 되어야 한다. 이런 까닭에 … 예수께서 성전으로 들어가시어 거기서 사고팔던 사람들을 바깥으로 내몰았으며, (비둘기를 파는) 다른 사람에게 ‘이런 것을 멀리 치워라! 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만약 사고팔던 사람도 바깥으로 나가고 다른 사람도 그런 것을 멀리 치운다면, 곧 자아와 무지로부터 영혼이 자유롭게 된다면, 이제 거기에는 예수 말고 어느 누구도 없게 된다. 영혼이 신과 같아질 때는 자아와 무지로부터 되돌아 올 수 없을 정도로 떠날 때이다. 피조물적인 것, 공간적인 것, 시간적인 것으로부터 아예 떠날 때이다.
성전에 홀로 있게 된 예수는 비로소 말씀을 시작한다. 하지만 “오로지 예수 이외에 다른 누군가가 영혼인 성전 안에서 말하고자 한다면, 예수는 침묵할 것이다. 마치 그가 거기에 있지 않은 것처럼, 그리고 (그때) 그는 또한 영혼에 거주하지도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때) 영혼은 이야기를 나눌 낯선 손님을 (이미)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영혼은 홀로 있어야하며, 침묵 가운데 있어야 한다. 예수는 ① 창조 이전의 영원 가운데서의 신적 발출에 대해 말한다. 또한 ② 이런 영원 가운데의 신적 발출이 자신을 통해 그것을 받아들이는 인간 영혼 가운데 되풀이하여 그때그때 마다 생기(Geschehen)함을 말한다. 이런 생기는 하이데거의 사건(Ereignis)이란 말마디를 연상시킨다. ①은 예수의 발설 1이고 ②는 예수의 발설 2이다. 특히 예수의 발설 2의 최종적 목적은 인간으로 하여금 신성으로 돌파하게끔 하기 위함이다.
5. 예수의 발설 내용 1 - 아버지와 아들
5.1. 영원 가운데서의 신적 발출 - 내재적 삼위일체론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에 대한 난해한 논의는 15쪽 9행 - 16쪽 11행에서 행해진다. 이 논의는 창조 이전의 감추어진 어둠 속에서, 곧 영원 속에서 이루어지는 신적 발출 사건을 뜻하는 내재적 삼위일체론(immanente Trinitätslehre)에 대한 논의이다. 내재적 삼위일체론은 세계 창조 이전의 신 가운데서 일어나는 신적 발출 사건(processio: Hervorbringen)을 뜻하는 반면에, 구원경륜적 삼위일체론(ökonomische Trinitätslehre)은 세계 창조 이후에 세계․역사 속에 신적 발출이 겉으로 드러나는 계시의 역사, 곧 일회적인 사건으로서의 육화(Inkarnatio)을 정점으로 하는 계시의 역사를 뜻한다. 그런데 에크하르트에 있어 구원경륜적 삼위일체론은 내재적 삼위일체론을 바탕으로 하여 해석되고 있다는 점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곧, 영원 가운데서 이루어지는 신적 발출이 역사 속에서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이다. 곧 버리고 떠난 영혼 가운데, 곧 내적 인간 가운데 영원 가운데 이루지는 신적 발출, 곧 신적 탄생이 중단 없이 일어나고 있다. 신의 영혼 가운데의 ‘끊임없는 탄생’(generatio continua)이 바로 ‘끊임없는 창조’(creatio continua)인 동시에 끊임없는 ‘육화’(incarnatio continua)이다.
『요한복음 주석서』에 따르면 “(신적) 발출(prodessio), 산출(productio), 유출(emanatio)은 … 본래적 의미에서, 무엇보다도, 우선 탄생(generatio)에 자리를 갖는다. 이 탄생은 운동과 함께 하지도 않고 시간 가운데 있지도 않다. … 그 때문에 탄생은 비존재(non-esse)로 이행하지도, 과거로 빠져들지도 않는다는 것이 귀결된다. 만약 사정이 이러하다면, 생성은 항상 근원 안에(in principio) 있는 셈이다. … 만약 탄생이 항상 근원 안에 있는 것이라면, 그것은 항상 낳아지고 항상 산출되는 것이다. 탄생은 결코 일어나지 않든가 항상 일어나는 것 둘 중의 하나일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근원 또는 ‘근원 안에’(in principio)는 항상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신성 안에 있는 아들(filius in divinis), 근원 안의 말씀은 (근원 가운데) 항상 태어난다.” 우선 발출, 산출, 유출을 가장 적절하게 나타내는 말마디는 탄생이다. 이런 탄생은 근원 안에서 일어나기 때문에 시간 안에 존재하지 않는다. 근원은 항상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에, 탄생은 항상 일어난다. 따라서 신성 안에 있는 말씀은 항상 태어난다. 이를 다른 말로 하면 끊임없는 창조. 끊임없는 육화이다. 그런데 이런 탄생, 창조, 육화는 설교 2에 나오는 마리아를 상징하는 “부인인 처녀”(juncvrowe die ein wîpe was)인 버리고 떠나있는 영혼 가운데 항상 끊임없이 발생한다. 그래서 내적 인간은 영원 가운데 산다.
5.2. 아버지와 아들 관계 설교 1번(15쪽 9행 - 16쪽 11행)에 따르면, 영혼이 침묵 가운데 있을 때, 예수는 영혼(성전)으로 들어가 영원 가운데의 신적 발설(Sprechen)은 신적 산출(processio) 등에 대해 말하기 시작한다. 그는 도대체 무엇을 말씀하는가? “그는 자신이 무엇인가를 말한다. 그렇다면 그 자신은 무엇인가?(Waz ist er denne?). 그는 아버지의 말씀(ein wort des vaters)이다. 아버지의 말씀 가운데 아버지는 자기 자신과 신적 본성 그리고 신인 바 모든 것(allez daz got ist)을 아는 것 그대로 말씀하신다. … 아버지는 자신의 인식과 자신의 능력에 있어서 완전하신 분이기 때문에, 아버지는 또한 자신의 발설(sprechenne)에 있어서도 완전하시다.” 예수는 아버지의 말씀이다. 예수인 이 말씀 가운데 아버지는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발설한다. 또한 아버지의 발설은 인식과 능력에 있어 완전하다. 따라서 아버지와 아버지의 말씀은 인식과 능력에 있어 똑 같다. 그러면 아버지와 아버지의 말씀은 하나이다. 그러면 이 양자가 어떻게 동시에 둘이 될 수 있는가. 설교 22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아버지가 모든 피조물을 낳았을 때 아버지는 나도 낳았으며, 나는 모든 피조물들과 함께 흘러나왔지만, 그럼에도 나는 아버지 안에 여전히 머물러 있다. 이는 내가 지금 말하고 있는 말과 전적으로 같다. … 내가 말을 발설하면, 여러분은 이 모든 말을 받아들인다. 그럼에도 그 말은 고유한 의미에서 볼 때, 여전히 내 안에 머물러 있다. 이런 연유로 나는 (아버지로부터 발출되어 나왔지만, 동시에) 여전히 아버지 가운데 머물러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이 인용문의 나를 아들로 대치하면, 아들은 아버지로부터 발출되었지만, 동시에 여전히 아버지 가운데 있다. 마치 말이 나로부터 산출되지만(Hervorgebrachte) 동시에 이 말은 산출하는 자(Hervorbringende) 가운데 있는 것과 같다. 따라서 신적 산출은 산출된 것이 산출하는 자 바깥에 있는 그러한 산출이 아니다.『삼부작』의 일반적 서론에 따르면, 신은 (모든 것을) 만들고는 (그것들로부터) 떠나지 않았다. 오히려 (모든 것은) 신으로부터 있고 신안에 있다.“ 이는 인위적인 제작자들의 경우와 사정이 다르다. 이들은 자신의 바깥에(extra se) 있는 자료들을 갖고 자신의 바깥에 작품을 만든다. 하지만 신은 자기 바깥의 어떤 무한한 것 또는 허공에 피조물을 산출하지 않는다. 무는 어떤 것도 받아드리지 않으면, 어떤 것의 담지자도 될 수 없다. 신적 산출은 모든 것을 깡그리 자신으로부터 자신에 있어서 산출이며, 동시에 산출된 것이 신에 머물러 있는 그러한 산출이다. 따라서 신적 산출은 산출, 산출되는 것, 산출하는 자가 하나 되는 삼위 일체적 산출(trinitarische Hervorgang)이다. 따라서 아버지와 아들은 다르면서 동시에 전적으로 같다.
이런 논의를 에크하르트의『요한복음 주석서』의 1절에 나오는 주석으로 풀어 보자. 1절은 “한 처음에 말씀이 계셨다(In principio erat Verbum).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는데(Verbum erat apud Deum), 말씀은 하느님이셨다(Deus erat Verbum).”이다. In principio은 흔히 시간적 의미로 ‘한 처음에’ 등으로 번역되어 있다. 하지만 에크하르트에서는 모든 것을 산출하는 시원 또는 근원(Ursprung) 곧, 신성이며 아들과의 관계에서는 아버지 신으로 해석되고 있다. 또한 말씀은 신 가운데 이미 자리 잡고 있는 로고스, 이데아이다. 그렇다면 1절의 주석은 시원인 아버지와 로고스(이데아, 말씀)의 관계에 대한 해석이다.
① “산출되는 것(productum) 또는 어떤 다른 것으로부터 산출하는 것(procedens ab aliquo)은 이미 그 다른 것 가운데 있다." 여기서 ”산출되는 것“ 또는 ”어떤 다른 것으로부터 산출하는 것“은 로고스, 곧 말씀을 뜻한다. 로고스는 아버지로부터 산출되면서도 아버지를 통해 모든 것을 산출하는 것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어떤 다른 것“은 시원인 아버지를 뜻한다. 이런 의미에서 ‘시원 가운데 말씀이 있었다’(In principio erat Verbum)가 말해진 것이다.
② "산출되는 것 또는 어떤 다른 것으로부터 산출하는 것은, 마치 씨앗이 자신의 근원에(in suo principio) 가운데 미리 자리 잡고 있는 것처럼, 다른 것 가운데 미리 잡고 있다(preest). 이런 의미에서 시원 가운데 말씀이 있었다가 말해진 것이다.”
③ ”다른 것으로부터 산출된 것은 일반적으로 그 다른 것의 말씀이다. (그래서) 다른 것으로부터 산출된 것은 그가 거기로부터 나온 그 다른 것을 말하고, 알리고 드러낸다. 따라서 시원 가운데 말씀이 있었다가 말해진 것이다.”
④ “이념(ratio)과 모사상(similitudo) 같은 (어떤 다른 것으로부터) 산출하는 것(procedens)이 산출자 가운데(producente) 있다. … 이를 그리스 사람들은 in principio erat verbum라 했는데, 이때 verbum은 곧 로고스를 말한다. 이 로고스는 라틴어로 verbum(말씀) 또는 ratio(이념)이라 한다.”
⑤ “다른 것으로부터 산출하는 어떤 것(quid procedit ab alio)은 다른 것과 구별된다. 아들은 이로부터 태어났다. 따라서 근원과 말씀은 다르다. 그래서 뒤이어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있었다(verbum erat apud deum)말해진다. 말씀이 신 아래 있다고도, 신으로부터 내려왔다(descendit)고도 말하지 않고, 말씀은 신과 함께 있었다고 말하고 있다. 이는 하느님과 함께(apud deum)라는 말이 어떤 동일성(aequlitatem)을 뜻하기 때문일 것이다. 여기서 다음이 주목되어야 한다. 유비적인 관점에서 보면(in analogicis) 산출된 것은 항상 산출자보다 더 못하고, 더 적고, 더 불완전하다. 하지만 일의적인 관점에서 보면(in univocis) 산출된 것은 (산출자와) 항상 같다. 산출된 것은 (산출자의) 동일한 본성에 참여하는 것이 아니라, 단순하고, 전적이며 똑같은 방식으로 자신의 근원으로부터(a suo principio) 본성 전체를 받아들인다.” 에크하르트는 여기서 영원 가운데 일어나는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를 설명하고 있다. 성립의 측면에서는 낳는 자이고 낳아진 자이지만, 존재론적으로 똑 같다. 이를『위로의 책』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좋음은 자신과 자신인 모든 것을 좋은 사람 가운데 낳는다. … 좋은 사람은 좋음의 가장 내적인 곳 그리고 심정으로부터 그리고 오직 좋음으로부터만 자신의 존재 전체, 지식, 사랑, 활동을 받아들인다. 좋은 사람과 좋음은 하나의 좋음 이외에 다른 어떤 것이 아니다. 모든 것에 있어 완전히 하나이다. 한편에서는 낳는 것이고 다른 한편에서는 낳아진 것이라는 것만 제외하고.”
⑥ “(다른 것으로부터) 산출하는 것은 산출자의 아들이다. 아들은 위격(persona)에 있어 다를 뿐이지, 본성(natura)에 따라 다른 것은 아니다.” 설교 1번에 따르면, “아버지는 자신과 모든 것을 다른 위격 가운데 발설하신다. 아버지는 자기 자신이 지니고 있는 것과 동일한 본성을 말씀에 베푸신다.” 산출된 것과 산출자는 위격은 다르지만, 본성은 전적으로 같다. 일의적이다.
⑦ “아들 또는 말씀과 아버지 또는 근원(principio)인 것과 똑 같다. 그래서 신은 말씀이었다(deus erat verbum)이라는 말이 뒤따라 나오는 것이다.” 한마디로 하면 로고스, 이데아인 말씀은 아버지 안에 있었다. 말씀은 아버지로부터 나왔다는 의미에서 아버지와 다르다. 하지만 아버지와 동일한 본성을 아버지로부터 깡그리 받아 들였기 때문에 일의적인 의미에서 아버지와 똑 같다.
5. 3. 아버지와 사물의 관계 - 범형론(Exemplarismus) 창조 이전의 영원 가운데서는 아버지와 아들만 똑 같았던 것이 아니라, 모든 것들은 다 똑 같았다. 모든 것이 아버지 안에 머물러 있었을 때는, 아무런 차이가 없었다. 범형론은 창조 이전에 신성 가운데 깃들어 있었던 모든 사물의 원상(Urbild)들에 대한 논의이다. 이때, 신과 원상들은 차이 없이 하나였다. 창조 이전의 원상과 창조 이후의 것들의 관계는 원상-모상(Abbild)의 관계이다. 이러한 범형론은 플로티노스와 그 뒤를 잇는 아우구스티누스의 범형론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플로티노스의 범형론에 대한 논의는『에네아데』Ⅴ권 3장 15절에 주로 전개되고 있다. 일자가 어떻게 다자(多者)를 산출할 수 있다는 말인가? 만약 일자가 다자를 산출한다면, 일자는 이들을 이미 갖고 있다는 말인가? 그렇다면 일자는 단순한 것이 아닐 것이다. 또한 만약 일자가 이들을 갖고 있지 않다면, 일자가 어떻게 이들을 산출한다는 말인가? 플로티노스는 이에 다음과 같이 답변하고 있다. “일자가 모든 것 각각을 미리(tō proteron) (자신 가운데) 갖고 있기(echein) 때문이다. … 일자는 이 모든 것 각각(후에 산출될 것)을 (자신과) 구분되지 않은 것(mē diakekrimena)으로 자신 가운데 (미리) 갖고 있기” 때문이다 라고. 그런데 ‘가진다’라는 말을 일자에 대해 사용할 수 있는 것인가? ‘가진다‘라는 말마디도 ’가지는 것에 앞서는 가짐‘(Vor-Haben)으로 의미가 바뀌게 된다. 이러한 ’가지는 것에 앞서는 가짐‘은 전개된 것을 여전히 전개되지 않은 것으로서, 구분되는 것을 여전히 구분되지 않는 것으로, 다수를 비-다수로 그리고 운동하게 된 것을 자신 가운데 머물러 휴식하는 것으로 가진다는 것을 뜻하게 된다. 곧, 대상으로부터 풀러나 있는 일자 자신의 초월적인 방식으로 이들을 갖는다는 것을 뜻한다. 그런데 물론 일자로부터 생겨난 것은 일자와 똑같은 것은 아닐 것이다. 그것은 일자보다 가치가 적고 결핍되어 있을 것이다. 이것은 다수의 것이다. 원래 다수의 것들은 일자 안에 있었을 때는 일자와 구분되지 않은 것이었지만, 일자로부터 흘러 나와서 달라진 것이다.
에크하르트는 이에 대해『요한복음 주석서』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산출된 것이 근원 안에 있는 한, 그것은 본성에 있어서 (산출자와) 다르지 않을 뿐 아니라, 자립성(supposito)에 있어서도 (산출자)와 다르지 않다. 왜냐하면 상자가 예술가의 정신 가운데 있을 때는 상자가 아니라, 예술가의 생명이고 지성(intelligere)이며, 그의 생동하는 기획이었기 때문이다. … 바깥에 존재로 산출하거나 산출된 상자는 그럼에도 그것이 만들어지기 이전에 근원 안에 있었던 것처럼 예술 자신 가운데 (여전히) 존재하고 머문다. 비록 그것이 파괴된다고 하더라도.” 하지만 동시에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유비적 관점에서는 산출된 것은 산출자로부터 내려오는 것이기에 근원의 아래(sub) 있으면 근원과 함께(apud) 있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산출된 것은 (산출자와) 본성에 있어 다르다. 그리고 산출된 것은 근원 자체가 아니다”고. 산출되기 전에는 산출자와 본성과 자립성에 있어 같지만, 산출되고 나서 달라졌다.
이제 범형론에 바탕을 두는 다음의 설교 1의 16쪽 5-9행은 쉽게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아버지는 동일한 말씀 가운데서 원상에 따라(bilde) 볼 것 같으면 동일한 말씀과 (본질적으로) 똑 같은 모든 이성적인 모든 정신적 존재들(alle vernünfige geiste)을 발설하신다. 원상이 (근원) 안에 머물러 있는 한에서, 동일한 말씀과 똑같다. 그러나 원상이 바깥으로 비추어지는(ûzliuhtende) 한에 있어서 곧, (바깥으로 비추어진 원상이 각각의 상들로 분리되어) 각각의 상들이 (분리된 채) 자신에 있어서 머무를 때, (이 모든 것은) 모든 방식에 있어 동일한 말씀과 같지 않다. 그러나 바깥으로 비추어진 상들(sie: die ausleuchtenden Bilder)은 은총에 의해 동일한 말씀과 같아질 수 있는 가능성을 유지하고 있다.” 원래 모든 것이 원상으로서 근원 가운데 있었을 때는 말씀과 똑 같았다. 하지만 근원으로부터 흘러나온 그것의 모상들은 그렇지 않다. 하지만 말씀과 같아질 수 있는 가능성은 여전히 갖고 있다. 그렇다면 근원으로부터 흘러나온 우리도 아버지의 말씀과 똑 같아질 수 있지 않을까.
6. 예수의 발설2 - 아들과 인간의 관계 예수의 발설 2는 17쪽 1행에서 20쪽 5행에서 다루어지고 있다. 세부적으로 나누어 말하면 ① 아들과 인간의 관계(17쪽 1행 - 12행): 아들의 인간 영혼에의 발설 방식과 발설 내용 및 그것을 수용하는 인간 측에서 얻게 되는 힘(gewalt) ② 앞의 논의에 대한 부연 1(18쪽 1행- 19쪽 2행): 지혜를 갖고 인간에게 자신을 계시하는 아들 및 그것을 수용하는 인간 측에서 얻게 되는 지혜 ③ 앞의 논의에 대한 부연 2(19쪽 3행 - 20쪽 5행): 달콤함과 풍부함을 갖고 자신을 계시하는 아들과 그것을 수용하는 인간 측에서 얻게 되는 풍부함과 달콤함 등이다.
6.1. 아들과 인간의 관계 - 예수의 발설 방식과 발설 내용
아들과 인간의 관계(17쪽 1행 - 12행)에 대한 논의는 다음과 같다. “아버지는 자기 자신에 있는 그대로의 말씀을 전적으로 발설하셨다. 곧, 아버지는 말씀과 말씀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모조리 다 발설하셨다.” 그리고 아버지는 말씀을 말씀 가운데 발설하시는 것 이외의 다른 곳에는 결코 발설하지 않으신다. 그러나 예수는 영혼 가운데 발설한다. 그렇다면 예수는 영혼 가운데 어떤 방식으로 발설하는가? “자기 자신 및 아버지가 자기 자신에 있어서 발설한 모든 내용 전부를 (인간) 정신이 수용할 수 있는 방식에 따라 계시한다(offenbâret).” 예수는 자기 자신을 곧, 자신이 아버지로부터 들은 것 모두를 정신에 계시한다. 예수는 성서상의 계시의 정점이다. 그런데 그 방식은 인간 정신이 수용할 수 있는 방식에 따라 그렇게 한다는 것이다. 예수는 무엇을 영혼 가운데 발설하는가. 그는 아버지와 동일한 측량할 수 없는 힘(gewalte) 가운데서 아버지의 지배권(hêrschaft)을 인간 정신들에 계시한다. 그런데 “(인간) 정신이 이러한 힘을 아들에 있어서 그리고 아들을 통하여 수용할(enpfaehet) 때. 인간 정신은 모든 전진 과정(vürgange)에 있어서 힘 있게 된다.” 이때, 사랑도 고통도 또한 신이 시간 가운데 창조한 모든 것도 인간을 더 이상 파괴할 수 없게 된다. 인간은 신적 능력 가운데서 힘 있게 머물게 된다. 이러한 신적 능력에 반해 모든 것은 왜소하고 무능한 것들이다. 물론 인간이 이러한 힘을 얻으려면 내적 인간이 되어야 한다. 모든 것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 그렇다면 영혼 가운데 이런 것을 인간이 알아들을 수 있도록 발설하는 예수를 도대체 에크하르트는 어떻게 해석해야 하고 있는가? 물론 이때 말하는 예수는 예수 그리스도이다.
에크하르트에 따르면 그리스도는 단지 개별적 인간성을 취한 것이 아니라, 보편적 인간성(eine allgemeine Menschennatur)을 취했다. 모든 인간을 신의 아들이 되는 지위로 고양시키기 위해, 곧 보편적 구원을 위해 그렇게 했다. 이때 보편적 인간성이란 신으로 드높여질 수 있는 인간성을 뜻한다. 곧, 개별적인 것, 나, 나의 것(alle eigenschahft)을 버리고 떠나 온전한 아들, 곧 신이 될 수 있는 인간성을 말한다. 만약 그리스도가 사람됨에 있어 보편적 인간성을 취했다면, 우리도 개별적인 것, 나, 나의 것을 버리고 떠나는 보편적 인간이 되어 야 한다. 그 때 우리도 신의 아들이 될 것이다. 설교 24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보편적) 인간 본성은 시간과 전혀 관계없다. (보편적) 인간 본성은 전적으로 접촉 불가능하다. 또한 인간이 자기 자신에 가까운 것보다 훨씬 더 내적이고 더 가깝다. 그 때문에 신은 인간의 (보편적) 본성을 취했다. … 신은 순수한 인간적 본성을 취했던 것이지, 하나의 인간을 취한 것은 아니다. 그 때문에 만약 당신이 동일한 그리스도가 되기를 원한다면 그래서 신이 되기를 원한다면, 당신에 붙여 있는 하나의 인간으로부터 전적으로 벗어나라. … 그리고 (보편적) 인간적 본성에 따라서만 순수하게 당신을 취하라. … 왜냐하면 당신의 인간적 본성과 말씀의 본성은 어떠한 차이도 없기 때문이다.” 여기서 말하는 하나의 인간이 외적 인간이라면, 보편적 인간은 내적 인간이다. 내적 인간에 있어서 진리가, 곧 신이 산다. 신은 항상 가장 내적인 데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내적 인간은 시간과 장소 가운데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전적으로 영원 가운데 존재한다. 내적 인간에서 신은 탄생한다. 거기서 신은 소리를 듣고 말한다. 내적 인간 가운데서 신성과 인간성의 내밀하고 역동적인 관계가 형성된다. 그리스도, 곧 신이 사람이 되었다 할 때의 사람은 보편적 인간, 곧 내적 인간이 되었다는 말이다.
에크하르트에서 그리스도론이 별 의미를 지니지 못한다고 흔히 비난된다. 신의 아들의 세계 속으로의 일회적 파견에 대한 언급이 거의 없다고 비난된다. 하지만 에크하르트에서 그리스도의 구원 사건의 역사성이 부정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에게 있어 모든 생기(Geschehene), 곧 창조뿐만 아니라 세계 속으로의 신의 아들의 파견 또한 신의 현재 속에서 끊임없이 항상 다시금 수행되는 하나의 사건으로 해석된다. 신은 현재의 신(ein Gott der Gegenwart)이다. 신은 과거나 미래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다. 신에게는 신적 사건의 언제나-지금(das Je-Jetzt des Gott-Ereignisses)이 문제이다. 따라서 그는 설교 10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신은 세계를 지금 창조한다. 그래서 모든 것은 이 날에(in diesem tage) 똑같이 고귀하게 된다. 만약 우리가 신은 세계를 어제 또는 내일 창조한다고 말한다면, 우리는 바보스러움에 빠지게 된다. 신은 세계와 모든 것을 현재적 지금에 있어서 창조한다. … 현재적 지금에 서있는 영혼에게 아버지는 자신의 낳아진 아들을 낳는다. 이러한 동일한 탄생에 있어서 영혼은 다시금 신 가운데 태어난다.” 여기서 창조와 아들의 탄생은 항상 지금에 있어서 일어난다. 창조와 아들의 탄생의 동시성이 확정되고 있다. 에크하르트의 가르침에서 가장 중심 되는 사상은 영혼 가운데 신의 탄생에 대한 논의이긴 하지만, 이러한 생각 자체는 그리스도의 사람됨(Menschwerdung Christi) 없이는 전적으로 생각될 수 없다. 왜냐 하면 영혼 가운데 신의 탄생은 그때그때마다 새롭게 실현되고 현재화되는 인간 됨 가운데의 신의 육화 이외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6.2. 예수와 지혜, 달콤함, 충만함 - 신성으로의 복귀적 돌파 6.2.1, 예수와 지혜
이어서 앞의 논의에 대한 부연 1(18쪽 1행- 19쪽 2행)이 이어진다. “두 번째 경우에 있어서 예수는 바로 그 자신인 측량할 수 없는 지혜를 갖고 (인간) 영혼에 자신을 계시한다. 아버지는 이러한 지혜에 있어서 … 자신도 인식하며, 지혜 자체인 동일한 말씀도 인식하며, 또한 (동시에) 동일한 말씀 가운데 있는 모든 것을 하나인 것으로 인식한다.” ① 아들은 지혜를 갖고 자신을 인간에게 계시한다. ② 아버지는 지혜인 아들 가운데서 자기 자신을 아버지로 파악한다. ③ 아버지는 아들 곧, 말씀을 자신의 거울상(Spiegelbild)으로 파악한다. ④동시에 아버지는 자신의 의식 내용 곧, 이데아의 총괄(Inbegriff seiner Bewußtseininhalte, der Ideen)인 아들 가운데 있는 모든 것을 순수 활동성(actus purus) 안에서 구별 없이 존재하는 하나로 파악한다. 그런데 “이러한 지혜가 영혼과 하나로 결합된다면, 영혼에게는 모든 회의와 모든 오류와 모든 어두움이 깡그리 사라질 것이다. 그리고 영혼은 신 자신인 투명한 빛 가운데 자리할 것이다.” 이때 ① “영혼 가운데 신은 신을 갖고서 인식된다.” ② 따라서 “영혼은 이러한 지혜를 갖고 자기 자신과 모든 사물을 인식하게 된다.” ③ “영혼은 신 자신을 갖고 동일한 지혜를 인식한다.” 곧, 영혼은 아버지를 통해 아들을 인식한다. ④ “영혼은 동일한 지혜를 갖고 풍부한 산출력 가운데 있는 아버지의 지배권을 … 인식한다.” 곧, 영혼은 아들을 통해 아버지를 인식한다. ⑤ “영혼은 단순한 하나 가운데 있는 본질적인 근원(weselîche istikeit)을 어떠한 중단도 없이 인식한다.” 곧, 영혼은 아버지와 아들이 하나임을 깨닫게 된다. 또한 영혼은 아들 안에 있는 모든 것이 하나임을 깨닫게 된다. 그래서 영혼은 영원으로부터 하나인 신성으로 최종적으로 돌파하게 된다. 6.2.2. 예수와 달콤함과 충만함 앞의 논의에 대한 부연 2는 19쪽 3행 - 20쪽 5행에서 이어진다. “예수는 또한 측량할 수 없는 달콤함과 풍부함을 갖고 자신을 계시한다. 이러한 측량할 수 없는 달콤함과 충만함은 성령의 능력으로부터 샘솟아 나와(ûzquellende) 흘러넘치는 충만한 내용과 달콤함(übervlüzziger voller rîcheit und süzigkeit)을 갖고 (그것을) 받아들이는 모든 심정으로 넘쳐흘러 들어가고 물결쳐 흘러 들어간다(überquellende und învliezende).” 충만함, 샘솟아 나오다. 넘쳐흐르다. 물결쳐 흘러 들어가다 등의 말마디들은 플로티노스의 일자에 대한 논의를 연상시키고 있다. 아무튼 예수가 이러한 충만함과 달콤함을 지니고서 자신을 계시하고 영혼과 하나 된다면, “영혼은 이러한 충만함과 이러한 달콤함을 갖고서 자기 자신으로(in sich selber) 흘러들어 가서는 자기 자신으로부터(ûz sich selber) 벗어난다. 그리고 자기 자신을 넘어서고(über sich selber), 모든 것도 넘어서(über alliu dinc) … 아무런 매개 없이(âne mitel) 다시금 자신의 최초의 원천으로(in ir êrste begin) 되돌아간다.” ① 영혼은 충만함과 달콤함으로 가득 찬다. ② 자기 자신으로부터 벗어난다. ③ 자기 자신을 넘어선다. ④ 모든 것을 넘어 선다. ⑤ 아무런 매개 과정 없이 곧장 최초의 원천으로 복귀한다. 결국 영혼의 종착점은 하나인 신성으로의 복귀적 돌파이다. 플로티노스말로 하면 일자와 하나 되는 것이다. 그럴 때, “외적 인간은 죽을 때까지 자신의 내적 인간에 복종하게 될 것이다. 외적 인간은 신에 대한 헌신 속에서 지속적인 평화(staetem vride)을 누리게 될 것이다.” 에크하르트 영성의 마지막 단어는 평화이다. 내적 인간이 완성된 셈이다. 6.2.3. 신성으로의 복귀적 돌파
내재적 삼위 일체론과 구원 경륜적 삼위 일체론의 구별에 따라 신의 존재 방식도 두 가지이게 된다. 곧, 신성과 신으로 구별된다. 물론 이러한 두 가지 존재 방식은 범주적인 것이 아니라, 상이한 관점에 따른 구별일 따름이다. 신을 선재성(Präexistenz)의 관점에서 보느냐 또는 실존(Existenz)의 관점에서 보느냐에 따른 구별이다.
“피조물이 신을 드러내어 말하는(aussprechen) 한, 신(Gott)은 (신)이 된다(wird). … (그러나) 내가 신성(Gottheit)의 근저에, 토대에, 흐름과 원천에 서 있었을 때는 아무도 내가 어디로 가기를 원하는가 또는 내가 무엇을 하고 있는가 등을 묻지 않았다. … (그러나) 내가 (근원으로부터) 유출되어 나왔을 때, 모든 피조물은 말했다. 신을! (그리고) 사람들을 나에게 물었다. 에크하르트 수사, 당신은 집에서 언제 나왔습니까? 라고. … 모든 피조물은 신에 대해 말한다. … (하지만) 신성 안에 있는 모든 것은 하나이다. 따라서 우리는 그것에 관해 말할 수 없다. 신은 작용한다. (그러나) 신성은 작용하지 않는다. … 신과 신성은 작용과 비-작용을 통해 구별된다. … 나의 (신성으로의) 돌파(Durchbrechen)는 나의 (신성으로부터의) 유출(Ausfluß)보다도 더 고귀하다. 나는 오로지 모든 피조물을 그것들의 정신적 존재로부터 나의 이성으로 불러 모은다. 그것들이 내 속에서 하나일 수 있도록. 내가 신성의 근저, 토대, 흐름과 원천으로 되돌아간다면, 아무도 나에 묻지 않을 것이다. 내가 어디로 왔는가. 또는 내가 어디에 있었는가를. 거기서는 내가 없어도 아무도 서운해 하지 않을 것이다.
거기서는 신은 (신을) 벗어난다(entwird).” 신이 신이 된다(werden). 또는 신이 신을 벗어난다(entwerden)는 논의, 달리 말하면 신과 신성의 구별에 대한 논의가 인간 정신에 논의를 통해 설명되고 있다. 인간은 자신의 이성 능력 때문에 모든 피조물을 정신적 방식으로 하나로 통일시킬 수 있다. 이성은 모든 피조물을 정신적인 측면에서 하나로 통합하는 능력(integrierende Kraft)이다. 인간 정신에 이미 각인되어 있는 모든 것을 하나로 할 수 있는 능력(Kraft des Einen)이 또한 신에서도 발견된다. 물론 인간의 경우와 무한히 다른 질적 차이를 갖고 발견된다. 그래서 신은 신의 측면과 신성의 측면이라는 두 개의 측면을 지닌다. 피조물이 신의 자취인 한 그리고 신에 대해 말하고 신을 고지하는 한, 신은 피조물의 언어와 묶이게 된다. 피조물이 더욱더 많이 신을 고지하고 더욱더 강하게 신을 언표하면 할수록, 신은 더욱은 신이 된다. 하지만 신에게는 모든 것을 하나로 파악하고 모든 것을 영원으로 지양하는 거점 또는 휴식의 지점이 있다. 이것이 바로 신성이다. 신성은 통합적 하나의 측면에서 본 신이다. 모든 피조물들은 신성 가운데서 영원으로부터 하나로 파악된 이념들로서 머물러 있었다. 신성으로의 돌파를 통해 신과 하나 되고자 하는 궁극적 목표는 내가 여전히 있지 아니했을 때의 나인 것으로 내가 되는 것이다. 지혜와 결합된 영혼의 궁극적 목표는 신성으로 돌파이다. 그래서 에크하르트는 설교 1를 다음과 같은 기도로 끝맺고 있다. “우리가 예수와 하나 되어 영원히 머물 수 있기 위해, 예수께서 또한 우리에게 들어오시어 모든 장애들을 내치시고 제거해주실 수 있도록 그리고 그가 성부, 성령과 함께 하나로서 하나의 신인 것처럼, 우리도 하나일 수 있도록 신이여, 우리를 도우소서. 아멘.” 7. 나가는 말
이 글은 에크하르트의 설교 1을 중심으로 그가 인간을 어떻게 보고 있는가를 알고 싶은 관심에서 씌어졌다. 에크하르트는 독일어 설교들의 가장 주요한 주제들을 설교 53에서 다음과 같이 정식화하고 있다. “① 내가 설교할 때, 버리고 떠나 있음에 대해 자주 말하려고 했다. 그리고 인간의 자기 자신으로부터 그리고 모든 것들로부터 자유로워져야 한다고 자주 말하려고 했다. ② 둘째, 사람은 신 곧, 단순한 선으로 되돌아가 그와 하나의 형상이 되어야(îngebildet) 한다고 자주 말하고자 했다. ③ 셋째, 신이 영혼 속에 불어 넣어준 위대한 고귀성(grôzen edelkeit)을 생각해야 한다고 자주 말하고자 했다. 그를 통해 사람이 놀라운 방식으로 신에 도달할 수 있음을 자주 말하고자 했다. ④ 넷째, 신적 본성의 순수성(göttlîcher natûre lûterkeit)에 대해 자주 말하고자 했다. 그리고 신적 본성에 자리 잡고 있는 그러한 광채는 말로 표현할 수 없다는 사실을 자주 말하고자 했다.” 하지만 필자는 에크하르트의 독일어 설교들의 주요 주제들을 비교적 체계적으로 이해하기 위해 다음과 같이 재설정하고 싶다.
① “영원한 감추어짐의 감추어진 어두움으로부터(ûz dem verborgenen vinsternisse der êwigen verborgenheit) 영원히 낳았던 아들”과 아버지 가운데 머물러 있었던 사물들의 원상들에 대한 그의 근본 경험(Grunderfahrung). 이는 에크하르트가 말하는 네 번째 항목 곧, 그의 신론에 해당한다.
② 또한 신을 떠나서는 무일 수밖에 없는 피조물에 대한 논의 곧, 신을 떠나서는 어떤 이성적 근거도 있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어떤 자립적 존재도 갖지 못하는 피조물에 대한 그의 근본 경험. 이런 논의가 인간이 피조물적인 것과 자신으로부터 ‘버리고 떠나있어야 한다.’ 또는 ‘그냥 내버려 두고 있어야 한다.’는 그의 주장의 근거가 된다. 곧, 그가 말하는 첫 번째 항목에 해당한다.
③ 인간과 신의 역동적 관계에 대한 근본 경험. 영혼의 근저에 끊임없이 생기하고 있는 아들의 탄생에 대한 그의 근본 경험. 이것도 저것도 훨씬 뛰어넘어 있는 영혼의 근저에 대한 논의가 바로 그가 말하는 셋째 논의에 해당한다면, 영혼 근저 가운데 신의 탄생을 통해 신성으로 돌파에 대한 논의가 바로 그가 말하는 둘째 항목에 해당한다.
실로 그의 설교들의 주요 거점은 ① 내재적 삼위일체론을 바탕으로 하는 신론 그리고 ② 피조물의 본성을 바탕으로 하는 인간론 ③ 신과 인간의 역동적 관계이다. 이러한 틀은 동시에 독일 관념론의 근본적인 틀이기도 하다. 설교 1의 구조는 크게 나누면 ① 성전, 곧 인간의 근저에 대한 이야기, 외적 인간의 내적 인간으로 전환, 곧 일상적 자기의 본래적 자기로의 전환에 대한 논의 - 인간론 ② 신과 인간의 역동적 관계에 대한 논의 ③ 영원 가운데의 신적 발출에 대한 논의 - 신론 그리고 범형론 ④ 아들과 인간의 관계를 통한 신과 인간의 역동적 관계에 대한 논의 및 그 종착점인 신성으로의 복귀적 돌파 순으로 진행되고 있다. 하지만 에크하르트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그의 내재적 삼위일체론으로 대변되는 신론을 잘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그럴 때, 그가 전제로 깔고 있는 부정 신학, 귀속적 유비, 내재적 삼위일체론, 말씀, 신적 산출, 신적 탄생, 끊임없는 창조, 끊임없는 육화, 범형론, 신성으로 복귀적 돌파 등을 이해할 수 있으며, 그에 따라 내적 인간과 외적 인간에 대한 논의와 신과 인간의 역동적 관계, 더 정확히 말하면 신성과 인간의 역동적 관계 및 그의 그리스도론 등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논의에 따라 설교 1의 논의 지평을 다시 재구성하여 말하면 다음과 같다.
① 그의 신론은 곧, 내재적 삼위일체론과 범형론에 대한 그의 근본 경험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이러한 그의 근본 경험은 그리스도교적으로 재해석된 플로티노스의 일자에 대한 근본 경험과 맥을 같이 하고 있다. 에크하르트에서의 끊임없는 신적 산출 또는 신적 탄생 등으로 대변되는 삼위일체론을 제외한다면, 일자 안에서의 모든 것이 차이 없이 있다는 플로티노스의 주장은 그대로 에크하르트의 범형론에 적용된다. 여기서 철저하게 지배적인 논의는 모든 것이 똑 같다. 하나이다.라는 것이다. 산출에 있어서 산출자와 산출된 것은 낳고 낳아졌다는 점에서 다르지만, 동시에 철저히 하나라는 것이다. 곧, 일의성이 지배적이다.
② 피조물은 원래 신 가운데서는 신과 차이가 없었다. 그런데 신으로 흘러나와서 신을 떠나서는 무일 수밖에 없게 되었다. 그러나 인간은 신과 하나 될 수 있는 가능성을 여전히 가지고 있다. 버리고 떠나서 그냥 놓아두고 있게 된 인간의 영혼의 근저에는 신이 탄생한다. 그는 신과 하나 되는 경험을 한다. 그래서 그는 모든 것 넘어서 있게 된다. 그는 영원 가운데 있게 된다. 모든 것을 넘어 서 있게 된다. 시간도 공간도, 유형적인 것도, 또 그와 같은 냄새를 풍기는 어떤 것도 넘어 서 있게 된다. 그래서 인간은 영원한 신성과의 관계 속에서만 자신의 본래적 자아를 되찾게 된다. 신은 영원 가운데만 있기 때문에 과거도 미래도 없다. 있다면 현재만이 있다. 따라서 신의 탄생을 경험한 사람에게는 현재만 있게 마련이다. 플로티노스에서는 유출에 따른 산출물들의 일자와의 관계에 따른 위계가 주요 주제라면, 에크하르트에서 그렇지 않다. 에크하르트에서 중요한 것은 인간이다. 역사 속에 사는 개개인이 영원 가운데의 신적 발출을 경험함으로써 신성과 일의적으로 하나 되는 것이 그에게는 주요 관심사이다.
③ 에크하르트의 인간론은 신과의 관계 속에서만 이해될 수 있다. 그것도 신과의 고정적 관계가 아니라, 역동적 관계 속에서 그러하다. 인간이 피조물로 채워지는 만큼 신으로부터 비워지는 반면, 신으로 채워지는 만큼 피조물로부터 비워진다. 그래서 더 본래적인 자신이 되기도 하고, 더 비-본래적 자신이 되기도 한다. 또 사람마다 신과의 관계가 다르다. 그래서 동일한 인간에도 전적 동일한 순간이 없으며, 모든 인간 사이에도 전적으로 동일한 경우가 없다. 이를 에크하르트는 영혼의 근저에 신의 끊임없는 탄생, 끊임없는 창조, 육화로 풀이한다. 이는 일자 가운데서만 인간의 자기 인식이 완성된다는 플로티노스의 근본 경험이 그리스도교 특유의 육화와 창조 사상으로 다시 해석된 것이리라.
아무튼 에크하르트의 설교들을 대담하고 날카로우면서 비상하는 듯한 언어들로 구성되어 있다. 그에게 신학은 곧 철학이었다. 그 역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삼위일체, 육화, 창조 등 그리스도교 계시 전체를 통하여 철학적 진리를 찾았다. 하지만 이런 그의 신학적 철학 또는 철학적 신학은 모든 언어를 넘어서는 그의 근본 경험Grunderfahrung)에 바탕을 두고 있다. 그래서 그는 설교 52에서 “이 강론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은 그 때문에 신경을 쓰지 마라. 왜냐하면 인간이 이러한 진리와 같아지지 않는 한, 그는 이 말들을 알아듣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 까닭은 신의 마음으로부터 매개 없이(âne mittel) 도래하는 숨겨진 진리이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그는 신의 마음으로부터 매개 없이 도래하는 숨겨진 진리와 같아졌다.
신성을 아무런 매개 없이 경험했다. 그렇다면 그의 철학적 신학 또는 신학적 철학적 언어들은 언어를 넘어선 그의 경험을 우리에게 전달하기 위한 하나의 개 짖는 소리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사유 이전의 것(das Unvordenkliches)을 우리에게 전달하려는 몸부림이었을 것이다. 그는 용수의『중론』이 논의처럼 근원적 현실과 언어와의 괴리를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이런 의미에서 그의 사상은 철저하게 이성을 부여하여 현실을 설명 하고자 했던 전통 형이상학과의 단절이라 말할 수 있다. 이성보다는 근본 경험이 우선이라는 하이데거의 말이 떠오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