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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러스트 이철원 |
광고회사 임원 출신인 송모(48)씨는 “‘저녁이 있는 삶’에는 가슴을 울리는 뭔가가 있다. ‘저녁이 있는 삶’이라는 말을 접한 순간 ‘저녁이 없던’ 지난 삶을 되돌아보게 됐다. 우리 사회가 앞으로 무엇을 추구해야 하는지를 선명하게 제시하고 있다”고 말했다. 송씨 역시 우리나라 대기업 임원들이 그러하듯 야근과 회식에 치이며 ‘저녁이 없는 삶’을 이어오다 몇 개월 전 과감히 직장을 그만뒀다. 지금은 대학원에서 미뤘던 공부를 다시 하며 제2의 인생을 준비하고 있다. 송씨는 “고정적인 수입이 줄어들어 생활이 빡빡해진 것은 사실이지만 가족과 함께 보내는 ‘저녁이 있는 삶’은 되찾았다”며 “잃은 것보다 얻은 게 더 많은 요즘에 만족한다”고 말했다.
송씨의 말대로 ‘저녁이 있는 삶’이 큰 울림을 던지는 것은 역설적으로 우리 사회가 철벽과도 같은 ‘저녁이 없는 삶’에 갇혀 있기 때문일 것이다. ‘저녁이 있는 삶’을 가로막는 적(敵)은 일단 세계 최장의 근로시간이다. 한국 근로자들의 노동시간이 세계 최장이라는 것은 각종 통계에서 확인된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 지난 3월 발표한 ‘경제정책 개혁 2012년’ 보고서에 따르면, 2010년 기준으로 한국의 근로자 1인당 노동시간은 OECD 회원국 가운데 1인당 국내총생산(GDP) 상위 17개 국가 평균보다 37.5% 많다. 한국 다음으로 노동시간이 긴 국가는 스위스로 OECD 상위 17개 국가 평균보다 23.5% 길었고 이어 룩셈부르크(16.5%), 아이슬란드(14.9%)가 뒤를 이었다. 2010년 우리나라 근로자는 2193시간을 일했다. 이는 OECD 전체 국가의 평균 근로시간(1775시간)보다 418시간이나 더 길다. 우리 근로자들은 OECD 국가 중 근로시간이 가장 짧은 네덜란드(1381시간) 근로자들보다 연간 812시간을 더 일했다.
근로시간 최고, 생산성은 최하
더욱 한심한 것은 어느 나라보다 많이 일하면서 노동생산성은 바닥을 기고 있다는 점이다. 우리나라 근로자의 시간당 노동생산성은 OECD 30개 국가 중 28위로 최하위권이다. 미국의 43%, 일본의 65%에 불과하다. 전문가들은 과도한 노동으로 쌓인 피로가 생산성을 낮추고 이것이 다시 노동시간의 연장을 불러오는 악순환에 빠져 있다고 지적한다. ‘비효율적인 피곤한 일벌레’만 양산한다는 것이다. 손학규 후보도 지난 6월 27일 열린 정책발표회에서 OECD 국가들의 평균 노동시간보다 우리나라 근로자들의 노동시간이 훨씬 더 많다는 사실을 지적하면서 “압축 고도성장을 이뤘지만 생활은 점점 각박해지고 힘들어지고 있다. ‘일하는 기계’ ‘회사의 부속품’이라는 말처럼 개인의 인간다운 삶이 없는 고단함의 연속”이라고 말했다. 손 후보는 자신이 대통령이 되면 임기 내 노동시간을 연 2000시간으로 단축하고, 줄어든 노동시간을 통해 일자리를 늘려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을 이루겠다고 했다. 이를 위해 손 후보는 “일단은 금요일부터 정시에 퇴근하다가 요일을 조금씩 늘려나가는 단계적 정시퇴근제를 도입하겠다”며 “일이 아무리 많아도 하루 11시간은 일하지 않도록 하는 최소 휴식시간제와 노동시간 상한제를 도입하고 연차 휴가 등과 연계해 여름휴가를 2주일로 확대하자”고 제안했다.
정시퇴근이 주요한 정책 이슈가 되고 있는 현실이 말해 주듯이 세계 최장 근로시간은 퇴근 대신 야근을 밥먹듯이 하고 집에서도 일에 얽매여 사는 대한민국 직장인들의 서글픈 근로 행태와 맞물려 있다. 최근 취업 포털사이트 ‘사람인’이 직장인 1296명을 대상으로 ‘자신이 워커홀릭이라고 생각하느냐’고 물어본 결과 27.9%가 ‘그렇다’고 답했다. 10명 중 3명이 스스로를 워커홀릭이라고 여기는 셈이다. 스스로를 워커홀릭이라고 여기는 사람들은 연령대가 높을수록 많았다. 50대 이상이 38.7%로 가장 많았고, 40대(31.9%), 30대(29.1%), 20대(25.9%) 순이었다. 스스로를 워커홀릭이라고 생각하는 이유를 들어봐도 우리나라 근로자들의 ‘저녁이 없는 삶’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응답자들의 56.4%는 ‘야근, 주말근무가 생활화됐다’는 점을 스스로를 워커홀릭이라고 생각하는 첫 번째 이유로 꼽았다. 이어 ‘퇴근 후에도 업무 걱정을 해서’(46.4%), ‘놀고 있으면 마음이 불안해져서’(36.5%), ‘아파도 참고 출근해서’(34%), ‘항상 회사 일이 먼저라서’(33.7%)란 답이 이어졌다. 이들 자칭 워커홀릭들의 하루 근무시간은 ‘10시간’(24.3%), ‘12시간’(23.5%), ‘14시간 이상’(16.9%) 등으로 평균 근로시간이 법정근로시간보다 3시간 이상 많은 11시간20분이다. 국내 한 대형 로펌에서 근무하는 진모(48) 변호사는 “남들은 연봉이 많다고 부러워하지만 실제 돈을 쓸 시간도 없을 만큼 일에 파묻혀 지낸다”며 “거의 매일 이어지는 고객과의 저녁 자리가 끝나면 다시 들어와 야근을 하고 집에까지 일 보따리를 갖고 들어가는 생활이 지겨워 몇 년째 이직을 꿈꾸지만 실행에 옮기지 못하고 있다”고 했다.
“가족과 저녁식사 1~3회” 47.9%
우리나라의 유별난 회식문화도 ‘저녁이 있는 삶’의 적이다. 온갖 이유 속에 집에서 기다리는 가족보다는 회사 동료들과 저녁 식사를 하는 게 더 익숙해진 지 오래다. 우리나라 특유의 경직된 조직문화 속에서 회식 불참은 왕따를 부르기 십상이다. 잦은 회식과 회식에 으레 따르는 과도한 음주 문화에 다들 불만이지만 서로가 서로에게 얽매여 ‘저녁이 있는 삶’으로 전향하지 못하고 있다. 실제 우리나라 직장인들의 상당수가 회식문화에 불만을 품고 있다는 조사도 심심치 않게 나온다. 취업포털 ‘사람인’이 작년 말 직장인을 상대로 벌인 설문조사에 따르면, 직장인의 절반 정도가 회식문화에 대해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직장인들은 회식문화에서 가장 먼저 개선돼야 할 부분으로 ‘억지로 술을 강요하는 것’(27.5%)을 꼽았다. 또 △‘술자리에 끝까지 남아야 하는 것’(19.4%) △‘강제로 참석해야 하는 것’(18%) △‘항상 비슷한 회식코스’(17.4%) 등이 뒤를 이었다.
잦은 회식은 필연적으로 가족과 식탁에 마주앉는 기회를 앗아가고 있다. 취업포털인 ‘인크루트’가 작년 11월 직장인을 상대로 ‘가족과의 식사 횟수’에 대해 조사한 바에 따르면, 일주일에 평균 3회 정도 가족과 함께 식사를 하는 것으로 조사됐다. 가족과의 식사 횟수 분포 범위를 보면 ‘1~3회’(47.9%), ‘4~6회’(24.1%), ‘7회 이상’(14.5%) 순이었고 ‘거의 못한다’(13.5%)는 이들도 적지 않았다. 이는 선진국과 비교하면 훨씬 낮은 빈도다. 한국여성정책연구원 홍승아 연구위원은 “스웨덴·영국·한국을 대상으로 가족이 함께 저녁식사를 하는 빈도를 살펴봤더니 스웨덴에선 거의 매일이라는 응답이 81.1%로 나타났고 영국도 67.8%였지만 한국은 28.3%로 한참 뒤처진다”며 “가족과 보내는 시간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한국의 현실을 보여준다”고 말했다.
홍승아 연구위원은 “노동시간도 문제지만 일이 끝나도 집에 돌아오지 않으려 하는 의식과 관행도 문제”라며 “지금까지 우리 머릿속에는 가족과 함께하는 저녁이라는 관념과 풍경이 아예 존재하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홍 연구위원은 “아이들도 장시간 어린이집에서 돌봐주는 것이 당연하다는 식으로 육아의 사회적 책임을 강조하는 정책이 추진돼 왔는데, 이것도 부모가 늦게까지 일하는 것을 전제로 한 우리 사회 성과주의의 산물”이라며 “저녁이 되면 아이도 부모도 모두 집으로 돌아와 함께 지낼 수 있도록 정책과 인식의 전반적 전환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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