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섯 번째 강의
≪마을굿을 통해 본 전통마을문화 속의 생태성≫
김창이
1. 들어가며
(대뜸) 술 먹고 다음날 가장 피곤한 공간이 으딘지 아십니까? 으디서 술 먹으면 다음 날 가장 피곤한지 아십니까? 포장마차죠. 포장마차에서 마시면 다음날 피곤허요. 꼬임이 있다는 것이죠. 자리를 보면 포장마차는 서로 옆으로 바라보고 있죠. 고개를 요렇게 돌려서 서로 이야기를 해야 하기 때문에 피곤한 거요. 이 자리 배치도 꼬여서 지금 바라보고 있죠? 옆으로 한, 두 시간 고개 돌려서 바라보면 나중에 피곤해집니다. 책상 배치를 새롭게 해야 할 것 같아요. (당시 공간초록 강의형태가 옆으로 강사를 바라보는 구조임을 지적함)
<마을 굿을 통해 본 전통마을문화 속의 생태성> 이란 주제로 강의를 하라고 하데요. 정중효씨가. 제가 제목 부친 게 아니에요. 예, 전공자가 아닙니다. 마을굿이라는 것과 전통마을문화라는 단어, 그리고 생태성까지. 이 세 단어를 연결지어라는 얘기인데, 연결 짓지 못해요. 그냥 가싯거리 전달하는 차원정도의 수준에서 얘기해볼까 합니다.
미장원에 갔어요. 볶았어. 크게. 볶았단 말이야. 자연스럽게 잘 됐어. 이때 자연스럽다는 말을 쓰잖아. 그런데 머리 볶은 거는, 자연은 아니죠? 자연스럽다라는 말은 자연에 대해서는 쓰지 않어요. 인공적인 것에 쓰지. ‘자연스럽다’는 인공을 전재로 한 말이죠. 마을굿은 인공을 전재로 한 거예요. 인위적인 행위죠. 오늘 말하고 싶은 것은 스스로 자(自). 이게 코의 상형문자에요. 스스로 자신을 의미할 때 코 모양을 상형했다. 코로 숨을 쉬죠. 숨을 쉬는 것에서 쉼이 온 거에요. 쉼과 숨은 같은 거죠. 쉼이 없이 노동은 힘들어요. 다음의 노동을 위해 쉼이 필요한 거죠. 오늘은 쉼을 가지고 얘기할 생각이에요. 이때까지 어렵게 공부를 해오셨다면 오늘은 명절 쉬듯이 쉼으로 쉬어간다 생각하고 들으세요. 매듭을 짓자는 말이죠. 매듭은 꼭 필요한 거요. 쉼이다 생각하세요.
사실 활동가들이 많이 아파요. 제 친구 중에 제주도 문화활동가이신 분이 있어요. 나이가 54세 쯤 되었는데, 아, 어제 돌아가셨다네. 죽었다고 연락이 왔어. 활동가들이 몸이 안 좋아요. 제주도 얘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제주도는 싸움굿이예요. 굿 중에서 제주굿은 좌파(?)무당이에요. (웃음) 싸움의 형태가 많이 남아있어요. 칼 들고 꽹과리 치고 다 싸울 때 쓰는 거죠. 어쨌든 아프면 절에 많이 다니죠. 나중에는 절로(저곳으로) 갑니다. 우리가 이런 활동을 하면서 아프지 말자. 열심히 하면 아파요. 그런데 너무 열심히 해. 열심히 살면 안 돼요. 자꾸 열심히 살라는데 그리 살면 안 됩니다. 저도 사실 열심히 살았죠. 저는 아직까지 주민증이 없어요. 치열하게 살았습니다. 자신을 디비(힘을 줘서) 쪼았어요. 자신을 디비 쪼으니까 이빨이 다 빠져 버리네. 자기만 손해요. 너무 진중하게 살지는 말자.
제 후배 한 녀석이 이렇게 말해요. 지리산 사는 놈인데, ‘선배, 지리산 여기 다 개판이에요’. 사람들이 너무 훼손시켰어요.’ 제가 뭐라고 한줄 압니까. ‘니가 거기 있으니 파괴가 되지’ 여행의 파괴성이 나타나죠. 안 가야 되요. 그래서 제가 아직도 못 가봤지 뭡니까. 하여튼 너무 철저히 해서 문제에요. 생태운동 너무 빡시게 하지 말자. 오유(‘오늘의 유머’ 사이트의 준말-편집자 주) 같은 거 아세요? 오유 하시는 분?(아무도 없음) 이거 봐. 너무 진지해. 오유도 하면서. 재미나게 살아요. 남기씨, 머리 살짝 눌러보면서 어깨를 들어보세요. 안 들어 지죠? 생태계에요. 머리를 눌렀는데 팔이 안 들어져요. 생태계란 말이죠, 우리 몸이. 소우주란 말을 쓰죠. ‘유기체’란 의미에요. 우리 몸이 유기적으로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증거에요. 머리를 눌렀는데 팔이 안 들어지는 것은 이 모든 것이 연결되어 있다는 말이죠. 머리와 팔이 떨어져 있는데 연결되어 있어요. 저는 휴지 세 칸만 써요. 빠케스(바가지)도 들고 다니지 않아요. 컵만 들고 가야 되요. 휴지는 3칸만, 조금만 쓰고. 이런 노력은 자신을 규정하는 하나의 노력이죠. 우주 속에 서로 모두 연결되어 있고 자신도 그 일부라는 것을 알게 하는 노력이란 말이죠.
우리 도시에서 어떻게 공동체를 만드냐. 저는 복제란 말을 씁니다. 옛 당시의 삶을 복제한다는 거죠. 농촌은 지금 도시보다 더 해요. 마을은 지금 멸종위기종입니다. 그래서 지금 농촌을 복제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앞 시대의 마을을 보고 복제해서 만들어 가보자. 그 당시의 생태성, 옛마을의 모습을 복제하자는 거죠.
2. 굿의 의미
– 모든 사회, 문화, 경제 현상의 지칭어
‘마을굿을 통해 본 농촌 마을 공동체의 생태성’ 강의를 해 보겠습니다.
‘굿’이란 말이 어디서 왔나. ‘굴’에서 왔어요. ‘굿→굴-혈’ 다 같은 말이죠. 혈은 ‘구멍 혈’이에요. ‘굴’이 ‘굿’의 어원입니다. 우리말에 구멍, 구석, 구유란 말이 있죠? 구석도 ‘굴’에서 나왔어요. ‘굴’의 모양이 구멍이죠. 그런데 굿이란 말도 굴에서 나왔어요. 옛날의 모든 활동, 그러니까 구석기 시대 이전에 굴에서 생활할 때, 굴 속에서 모든 생산, 저장, 방어, 춤이나 문화까지 굴에서 이루어졌어요. 알타미라 벽화를 보면 굴 속에다 그림을 그렸죠. 문화생활도 다 굴에서 했어요. 이것이 ‘굿’이란 단어 속에 다 들어 있어요. 생산하고 저장하고 방어하고 춤 추는 모든 문화행위들이 굿이란 단어 속에 들어있단 말이죠.
이런 굿이란 말이 폄하된 것은 근대 이후라고 할 수 있어요. 그 이전에는 사회, 경제, 문화 모든 현상에 굿이란 말을 붙였어요. ‘난리굿이다’, ‘씨름굿이다’, ‘굿쟁이다’ 등의 말들이 있죠. 굿의 모든 도구는 전쟁 도구이기도 합니다. 실제로 일제 때는 굿판을 벌이다 주재소(일제강점기 당시의 파출소)를 점령한 일도 있어요. 대나무는 죽창이 되고 무당이 들고 있던 칼이 무기가 되는 거죠. 이런 ‘굿’의 의미가 박정희 정권 당시에 ‘굿’의 의미를 축소하기 시작했어요. 종교의 이데올로기를 통해 당산나무를 제거한 거죠. 당산나무가 그 마을의 코어(핵심)이에요. 그 코어를 없애버린 거죠. ‘당’을 없앴어요. 그리고 대신에 마을회관을 만들어 중앙 권력이 통제 속에 포함시켜버렸어요.
어쨌든 ‘굿’은 모든 문화 전반을 아우르는 말이었습니다. 지금 시골의 폐교들이 많죠. 이 시골 학교들은 사실 마을사람들이 돈을 내어 만든 거예요. 시골 학교들 대부분이. 근데, 지금 다 교육청 소속이 되어있죠. 당시 학교를 만들면서 학교 끄림굿(?)을 했었어요. 또 ‘굿’에는 금융도 포함되어 있어요. 굿을 하며 돈을 모으기도 했고 계돈도 마련했어요. 굿을 통해 절을 짓기도 했어요. 또 농사를 지을 때도 굿을 했어요. 전쟁을 할 때도 당연히 굿을 했죠. 우리나라가 몇 번 외침을 받았는지 아세요? 993회의 외침이 있었다고 해요. 여기에 곱하기 삼(3)을 하면 반란이 일어난 횟수가 되어요. 제가 해남이 고향이에요. 땅 끝에 보면 봉화대가 있어요. 그런데 봉화가 올라서 중앙정부까지 가려면 시간이 걸리죠. 언제 군대 끌고 내려오겠어요. 그래서 지역 단위에서 민병대를 꾸리는데, 그 민병대가 다 굿패들이고 농악패들이에요. 이 굿패들이 평시에는 농악을 부르다 전쟁 때는 민병대가 된거죠. 전란에는 그랬고 평시에 관리가 맘에 안들면 확 디비는 거죠. 민간의 조직적 활동 주체가 이들이에요. 동학농민항쟁 때도 풍물패가 신호체계를 담당했다고 하죠. 이러니 일제때는 이 풍물패를 없애는 것이 목표가 됩니다.
요즘은 ‘굿’의 의미가 치유의 의미로 많이 쓰이죠. 전국에 무당이 50만이에요. 주로 치병굿을 하죠. 옛날 비디오 틀면 호환, 마마보다 더 무서운 게 불법 비디오다나 뭐다나 그런 내용이 있어요. 그 때, 호환마마 나올 때 무당이 눈 쫙 찟어진 무당이 춤을 막 춰요. 무당을 천박하게 만들어버렸죠. 저희 어릴 때만 해도 ‘굿’을 많이 했어요. 홧병 나면 치병굿을 했죠. 딴 건 몰라도 홧병에는 치병굿이 최고죠. 누가 홧병나서 치병굿을 한다하면 온 동네 사람이 다 나와요. 동네사람들이 모여 빌어주고 걱정해주죠. 같이 아파해 주고 빌어주면 홧병은 금방 치유됩니다. 정신적 문제에서 치유가 이루어지는 것이죠.
이처럼 굿은 우리 삶의 많은 부분의 의미를 담고 있어요. 삶의 전반과 관계되어 있는 것이 굿이에요. 결코 나쁘지 않아요.
3. 마을 굿의 과정
3-1) 당산굿
이제 마을 굿에 대해 얘기할게요. 마을 굿을 할 때 처음 치는 것이 ‘당산굿’이에요. ‘당산’은 예배당이든 절간이든 혹은 돌무더기든 큰 나무든 움막이 되었든 다양한 형태의 ‘당산’이 존재해요. 얼마 전에 나온 ‘아바타’란 영화의 큰 나무도 일종의 당산나무죠. 우주목이라고도 해요. 우리 마을의 결집의 핵으로 합의한 곳이 바로 당산이에요. 마을의 코어죠. 당산나무, 우주목은 그 마을이 우주와 다이렉트(직접적으로)로 연결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어요. 비보의 역할을 하죠. 우리 마을의 비보로 자신이 사는 땅을 인간이 사는 데 최고의 곳으로 만드는 곳이 바로 당산이에요. 신(神)의 기운이 직접 내려오는 곳이고 신(神)이 내려오는 곳이 곧 인간이 가장 살기 좋은 곳이 될 거 아녀요. 이런 당산과 그 마을의 역사는 같이 굴러가요. 당산나무를 통해 인간과 나무 혹은 자연과의 관계성을 볼 수도 있어요. 그 나무를 키우고 마음을 쓰고 인간과 나무가 같이 성장하는 과정들을 살펴보면 대단히 의미가 깊죠. 이 당산에서 마을굿을 시작하는데 이 ‘당산굿’은 우주와 그 마을의 코어를 결집하고 이 땅을 귀하게 만드는 굿이라고 볼 수 있어요. 그냥 돌덩이리가 돌부처로 변하고 나무가 나무 십자가가 되는 그런 것과 같은 의미를 지니고 있어요. 무의미한 것이 의미를 지니게 되고 신성성을 지니게 되는 것이죠. 당산굿은 그렇게 인간이 살던 마을이라는 일상의 공간을 신성한 곳으로 바꾸는 역할을 해요.
3-2) 샘굿
두 번째로 샘굿이 있어요. 물의 어원은 미, 미르에서 나왔어요. ‘미’는 우리말에서 ‘물’의 고어(古語)에요. 미르는 용이죠? 용은 동양에서 물을 상징해요. 그래서 바다에 사는 신을 용왕이라고 하죠. 봉왕(鳳王)이니 호왕(虎王)이니 하지 않고 용왕(龍王)이라고 하는 이유는 용이 물을 상징하기 때문이에요. 용왕제, 혹은 저는 샘굿이라고 하는데 이 샘굿을 살펴보면 생태성을 발견할 수가 있어요. 물의 신은 여성성을 지니고 있어요. 여성굿인데 땅도 지모신이라고 여성성을 가지고 있어요. 다 같은 것이에요. 샘굿은 용왕에게 지내는 굿이에요. 물이 돌아야 생명이 살죠. 모든 생명의 탄생이 여기에 달려 있어요. 당연히 중요한 굿이죠. 그래서 마을의 샘터에 가서 굿을 한 거에요. 우물물이나 천이나 강가에서 굿을 했죠. 바다는 말할 것도 없이 용왕제가 성대히 열렸어요.
3-3) 마당굿(마당밟기)
그다음에 '마당밟기'가 있어요. 마당굿이라고 하는데, 일종의 나눠먹기라고 할 수 있어요. 영험한 신을 모신 뒤에 그 영험함을 서로 분배하는 거죠. 이거 보면 우리 민족은 신앙까지도 분배를 한 대단한 민족이에요. 서로 종교적 신심을 나누는 행위죠. 이 마당밟이는 각 집을 돌며 신에게 받은 영험을 분산시켜요. 축복을 빌고 영험함이 마을 각 집에 미치도록 집집마다 마당에 가서 한바탕 노는 거죠. 이런 행위는 일종의 마을 화해의 장치가 되죠. 오래된 공동체 내의 여러 문제들을 해결하고 화합하게 하는 문화적 장치가 바로 마당굿이예요. 사실 요즘 마을공동체다 뭐다 하면서 모여들어 살지만 판판이 깨지는 경우가 많죠. 몇 년만 살아도 문제가 발생하는데 몇 백년된 마을에 문제가 없겠어요? 그럼에도 마을을 유지하고 이어져 오게 했던 것은 이 마을굿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거죠. 어쩌면 그런 마을의 문제들을 지혜롭게 해결하기 위한 선조들의 지혜가 배어 있는 것이라 볼 수 있죠. 앞 집 사람과 며칠 전에 싸워서 다시는 서로 얼굴 안 본다 했지만 이런 마을 행사가 있으면 어쩌겠어요. 그 집 마당에 가서 복을 빌어야지. 그러다 보면 다시 화해하게 되고 서로의 마음을 이해하게 되는 거예요. 그럼으로써 마을이 평화를 다시 찾게 되는 거죠. 옛 마을에는 개맥이라는 것이 있었어요. 이 개맥이란게 개인의 행동은 못하는 것을 선포하는 행위에요. 마을 어른이 ‘오늘은 개맥이입니다.’하고 선언을 하면 그날은 개인행동을 못해요. 모두 마을일을 해야 하는 거죠. 이 개맥이는 징계를 포함하고 있어요. 공동체를 위해 해야 할 일이 있으면 강제성을 띠고 개인의 활동을 금지시킨 거죠.
3-4) 헌식(獻食)굿
그 다음 헌식(獻食)이라는 것이 있어요. 대문 밖에다 음식을 놔두는 일을 헌식이라고 하죠. 지금도 설이나 명절 때 헌식을 하죠. 지금이야 종이에다가 조금 담아서 밖에 내놓지만 예전에는 아예 상을 차려서 지나가는 거지들을 먹여 보냈어요. 헌식이란 말이 밥을 바치는 것을 말하죠. 헌화, 헌가 모두 뭔가를 바친다는 의미잖아요. 헌식도 음식을 바친다는 말이니까 지금처럼 대충 생선 대가리에 나물 조금 얹어서 내놓는 것은 ‘헌식’이 아니죠. 이런 헌식도 일종의 헌신굿이에요. 그럼 이 헌식굿을 왜 했을까요? 헌식은 잡귀 잡신들 먹으라고 주는 거죠.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면 잡귀 잡신들은 이승에서 사회적 약자였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한이 맺힌 귀신들이죠. 한이 맺혔다면 이승에서의 삶은 당연히 핍박 받거나 사회적 규율에 억눌린 사람들일 거 아녀요. 그러니까 사회적 약자였을 것이다. 바로 이런 사회적 약자들이었던 잡귀에게 바치는 음식굿이 헌식이라고 할 수 있어요. 우리 조상들은 이런 데까지 마음을 썼어요. 아름답죠.
자, 당산굿에서 샘굿도 하고 마당밟기(마당굿)도 하고 헌식까지 했으면 굿이 끝났죠. 굿이 끝났다는 것은 이제 이 땅은 살만한 땅으로 완성되었다는 것을 의미해요. 상징적 의미죠.
4. 굿에 임하는 자세-정성, 영성
저는 지금 우리가 굿을 생각하는 마음으로 굿을 봐서는 안 된다고 봐요. 그 당시 굿에 담긴 정성이 얼마 정도였을지 여러 가지 상황으로 가늠해 볼 수 있겠죠. 당시 사람들이 많이 죽고 생활이 어려웠죠. 지금과 달리. 전염병도 많았다고 해요. 전 국민의 20%가 사망했다는 기록을 심심찮게 봐요. 전염병이 한 번 번지면 울산 같은 한 도시가 통째로 날아가는 거예요. 엄청나게 죽어 나갔죠. 어쩌면 옛 조상들은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살았다고 볼 수 있어요. 그런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굿을 지내는 마음은 어땠을 거 같아요? 내 아들 살았으면, 내 엄매 살았으면 하는 바람이 얼마나 간절했겠어요. 그 깊은 정성으로 굿을 지낸 거죠. 그 정성을 생각해 보면 충분히 영적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그 때의 굿판을 보면 아주 강한 영성을 느낄 수 있었을 거예요. 지금도 제가 굿을 하면서 그 당시의 간절함을 느낄 때가 있어요. 그런 느낌이 오거든요. 굿을 해 보면 말이죠. 어쨌든 전통적 마을 굿이 가지고 있는 의미에 대해 알아봤는데요. 저는 이 '굿'을 통해 사람의 관계망을 만들어 내자, 이렇게 마무리 할까 합니다. 감사합니다.
|
첫댓글 뒤늦게 필기한 노트를 보고 작성했습니다. 빠진부분이 있지 않았나 생각되지만 이번 강의록도 다 만들어야 책을 낼 수 있을 것 같아 기억을 더듬어 만들었습니다. 다음에는 변강훈, 구자상 대표님 강의 올려보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