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왕봉 아래 제석봉과 연하봉 사이 고갯마루가 장터목. 백무동과 중산리를 잇는 최단거리 위치에 있는 산장이다. 옛부터 백무동 일대와 중산리 일대 주민들 간 물물교역터.
시천(矢川)과 마천(馬川)주민들 물물 교역터.. 장기정(場基項). 그 장터의 길목이라 <장터목>이라 명명된 곳에 있는..장터목 산장. 지리산 종주를 하며 천왕봉 일출을 감상하려는 인파로 늘 붐비는 곳.
'이곳은 언제부터 물물교환 장터가 형성된 것일까?'
...........................장터의 유래..................................... 몽골리안 유목민은 객지를 유랑하며 장막생활을 하는 특징. 장막이 모이는 곳이 장터가 되고 그곳에서 물물교환을 했다. 생필품 교환을 위해 3일 또는 5일에 한번씩은 모였을 듯 싶다.
유목민은 짐이 가벼워야 이동이 손쉬워 정기적인 장터를 형성. 한반도에서 유목생활이 농사 위주로 바뀌자 농산물 매매 교환터. 장막을 치고 농수산 특산물을 매매 교환하는 곳이 장터가 되었다. ...........................................................................................
한반도의 옛 조상 몽골 유목민이 장터목을 형성한 듯 싶다. 하여, 삼국시대 이전부터 장터로 사용되었을 가능성도 높다. 예전에는 일출봉의 숲길을 내려오면 5방향으로 등반로가 연결.
'천왕봉 전초기지라 야영터가 많았던.. 장터목.'
1971년 9월 지리산장 33 평방미터, 반지하 콘크리트 건물(40명 수용) 1986년 9월 새로 개축한 산장 82 평방미터 목조 2층 마루방(80명 수용) 1997년 325평방미터,140명을 수용할 수 있는 장터목 산장이 들어섰다.
야영하기 어려운 기상조건이면 더욱 붐볐던 장터목 산장. 야영객까지 산장으로 몰리는 휴가철엔 더욱 인파 붐빈 곳.' 2003년 6월 250 명 수용 시설로도 여전히 인파 붐비는 산장.
난방시설이 잘 되어 있어 겨울에 얇은 침낭으로도 견딜 수 있다. 취사장이 같은 건물 내에 위치한 것이 장점, 화장실 먼 것이 단점. <천왕봉 일출>맞이 하려는 등산객들 많이 이용해 사전 예약 바람직.
1997년까지 이곳 산장은 일출을 감상하려는 인파로 북새통. 지리산 산꾼들에게는 이곳의 ' 악명 높은...칼잠'도 감지덕지. 혹한기 인파가 몰리면, 침상에 두 줄로 마주보고. 모로 누워 칼잠.
옆 사람 발을 코 앞 가슴에 품고 칼잠. 새우등 웅크릴 공간도 없는 기나 긴 밤. 밤새 소변도 참고 뜬눈으로 지새웠던 밤.
화장실 다녀오면 누울 자리가 없어지는 탓. 그나마 그 잠자리 사수하려 필사적 안간 힘. 장터목의 악명높은 악천후 일기변화는 살인적.
'산장밖 악천후 하룻밤은 생사의 갈림길.'
인파가 몰려들면 산장 복도 바닥에 쪼그려 앉아 날밤. 가로 세로 줄 맞춰 앉은 채로 꼬박 밤을 지새워야 했다. 쪼그려 앉은 무릎이 저리다 못해, 감각조차도 없는 고통.
소변을 참다 못해, 화장실 다녀오면 사라진 잠자리. 그때문에 산장 안에서 티격태격하는 시비도 많았다. 산꾼들에게는 고생스러운 추억이 많았던 장터목 산장.
요즘은 현대식 시설라 이용하기 편하다. 예나 지금이나, 산장 직원이 잠자리 배정. 사전예약 없으면 산장에서 잠자기 어렵다.
숙박료 7000원. 침낭 대여 2000원. 담요 대여 1000원.
천왕샘.
천왕샘은 천왕성모를 상징하는 샘물이다. 지리산의 천왕봉은 천왕성모 전설의 고향. 중국 전설에도 천왕성모 같은 여신이 있다.
..................서왕모 전설............................ 견우와 직녀를 갈라놓은 전설의 여신 서왕모(西王母) 중국고대 신화 속에서 가장 잘 알려진 여신선 서왕모 서왕모는 천상계와 인간계의 여러 일에 일찍부터 개입
서왕모의 노여움을 샀던 애정 깊은 견우와 직녀 아직까지 멀고 먼 은하계를 사이에 두고 떨어져 매년 7월 7일 까치가 놓은 오작교에서 서로 상봉.
서왕모의 장생불로 선약(仙藥)을 훔쳐 먹은 상아 달의 궁전에서 영원히 외롭게 살았던 여신이었다.
삼황오제 황제가 치우와 중원을 놓고 다툼을 할 때, 치우가 비바람 안개를 불러 황제 군대는 길을 잃었다. 황제는 할수없이 군대를 물려 태산지방으로 후퇴했다.
이때 서왕모는 여우 갑옷을 입은 사자를 파견하여, 푸른 옥돌을 황제에게 주어 난국을 타개하게 하였다.
그리고 사람머리에 까마귀 몸을 한 구천현녀를 파견 황제에게 각종 음양술과 기관조종술을 가르쳤다 한다. 서왕모의 도움으로 황제는 치우와 전쟁에서 승리한다.
서왕모는 천하를 다스린 요에 이어 순 임금까지 지지 사자를 파견해 순임금에게 백옥환과 백옥피리를 하사. 그리고 지도를 내려 구주 중심 12주 영토 확장에 도움
우 임금 대홍수 때 운화부인(雲華夫人), 요희를 파견 홍수를 다스리는데 도움을 주어 성공하였다고도 한다. 서왕모는 삼천년에 한번 곤륜산에서 신선모임을 개최
선도복숭아를 신선들에게 대접하며 치하하였다고 한다. 서왕모는 국가나 민간에 재난이나 어려움에 봉착했을 때, 기복(祈福)을 비는 가장 중요한 신들 중 하나로 정착했다.
수나라 때 방화로 정형현 전체가 산불에 휩싸였을때 백성들은 두려움 속에서 어찌할 바를 몰랐다고 한다. 정형현 관리들은 서왕모 사당에 예를 올리며 고했다.
"백성이 무슨 죄가 있겠습니까? 지금 이러한 큰 재난을 만났습니다! 신령하다면 비를 내려 구해 주십시오."
기도가 끝나자 곧바로 구름이 몰려들며 소나기가 내려 큰 산불이 꺼졌다고 한다.
그후 서왕모 귀부인상으로 그려 제사를 지내고 복과 수명을 빌거나 각종 재앙을 없애도록 기도 이것이 널리 유행하여 민간에서는 풍속이 되었다.
서왕모에게는 많은 자녀들이 있었다고 한다. 그 중 가장 잘 알려진 여인이 운화부인(요희) 그리고 태진(太眞)부인 그 이름이 완(婉)이다.
운화부인은 서왕모의 23번째 딸이며 태진부인의 동생 서왕모의 아홉번째 아들이 현수이며 진인이라는 기록
서왕모는 주나라 목왕과 다시 만나기로 하고 이별 그러나, 목왕이 죽자 요지(瑤池)에서 재회도 물거품 그 당시 늙은 서왕모의 신통력은 대단하지 못했던 듯.
전국(戰國)시대가 지나고 한나라 때가 되자, 신선가의 방사(方士)들의 활약이 커지게 되며 서왕모의 지위와 신통력은 자꾸만 높아져 갔다.
장생불사약을 장악한 신령스러운 여신.
도교가 성행하자 서왕모는 도교진영의 주요인물 도교와 불교가 세력을 다툴 무렵 천상의 높은 신
한 무제 유철은 일심으로 신선의 도를 구했던 사람. 동쪽 어느 군에서 한 무제에게 소왜인(小矮人)을 조공 한 무제는 소인을 책상위에 올려놓고 장난하면서 즐겼다.
어느날 동방삭이 궁궐에 들어 왔다가 소인을 만났다. 동방삭은 한 무제에게 소인에 관한 이야기를 말한다.
"이 아이는 세 번이나 서왕모 선도복숭아를 훔쳐 그 벌로 이곳 인간세계에 귀양살이 온 왔습니다."
한 무제는 동방삭이 평범한 사람이 아님을 알았다. 그때까지 잠자코 있던 소인이 한 무제에게 말했다.
"서왕모가 도를 구하는 방법을 가르치라 했읍니다. 마음은 오직 청정하고 마땅히 조급해서는 안됩니다. 다시 오년이 지나면 서왕모가 당신을 만날 것입니다."
소인은 그렇게 말한 후 순간적으로 사라졌다. 오년후 서왕모가 7월 7일에 강림하겠다는 전갈. 한 무제는 향을 사르고 물청소 하고 장막을 쳤다.
7월 7일 밤 하늘이 자주색 구름으로 덮이며 서왕모가 구름수레를 타고 궁전으로 내려왔다. 이때 서왕모 얼굴은 절세가인으로 30 세 여인
서왕모는 한 무제와 이야기를 나누다가 선도복숭아를 한무제에게 맛보게 하였다.
서왕모가 사는 곳은 선경 요지(瑤池) 그곳에서만 자라난다는 '선도 복숭아'. 하나 먹으면 천년을 살 수 있다는 반도.
요지는 이상향을 찾는 이들이 동경하는 곳. 역대 이를 노래한 시인들이 수없이 많았다. 당나라 때 이태백은 양귀비를 노래한 청평조사
제석봉 아래 고갯마루 장터목 산장 인근에 있는 산희샘. 백무동, 중산리, 세석 방향에서 온 인파로 항상 붐빈다. 그곳 산장 바로 아래 샘은 수량이 적어도 마르지 않는다.
요즘은 워낙 찾는 이가 많아 주말엔 길게 줄서야 한다. 산희샘은 등산객의 타는 갈증을 해소해주는 고마운 샘물. 아울러, 그 못지 않게 짜릿하고 감미로운 전설들이 있다.
....................전설 - 1............................................. 약초를 캐러가 돌아오지 않은 총각을 기다리다 찾아나선 처녀. 며칠 동안 산중을 헤메다가 갈증을 못 이겨 이곳에서 숨졌는데 총각이 뒤늦게 오자 그 혼이 눈물로 반기듯 솟았다는 전설의 샘. ...................................................................
산청군 일대의 지리산 자락은 2400 여종 약초 자생지. 약초꾼들이 캔 한약재 약초를 장터목에서 거래했던 듯. 약초꾼 총각을 찾아나선 처녀가 숨진 전설의 고향 산희샘.
산희샘은 예나 지금이나 물이 많은 곳. 백무동도 가깝고 중산리도 멀지 않은 곳. 옛 약초꾼들의 애환이 담겨있는 샘물 같다.
.................전설 - 2........................ 마야부인이 멀리 떠난 남편 기다리며 거울 삼아 몸 단장했던 전설 속의 샘.
결국, 돌아오지 않는 남편을 원망하며 메꿔버린 샘이 장터목 인근에.. 산희샘. .......................................................
마야부인은 신라 진평왕의 첫째 부인. 승만(僧滿)부인은 진평왕의 둘째 왕비. 성은 손씨(孫氏)이고 후사(後嗣)가 없다.
이 전설의 주인공은 승만부인인듯.
산희샘의 풍부한 물이 장터목 옛 장터의 원동력. 오늘날 산장까지 들어선 그 원동력은 바로 산희샘. '마야 부인과 반야의 비련'이 애?은., 전설의 고향.
여성에게 거울이란 생명과도 같은 것이다. 아무리 속상해도 산에서 가장 귀한 것은 물. 샘물을 메꿔야 할 숨은 사연이 있는 듯 하다.
천왕봉에서 법계사 쪽으로.. 500m 아래 너덜지대 깔딱고개 위에 있는.,'천왕샘'.
'천왕성모 위력을 상징하는 통신골'은 거대하지만, 그 거대한 계곡이 품은 천왕샘은 가뭄에 자주 마른다. 그에 비해 산희샘은 언제나 변함없이 샘물이 솟아난다.
천왕샘보다 훨씬 맑고 깨끗한 산희샘.
산희샘은 높은 곳에 있어 오르기 힘들지만 물 맛은 천왕샘에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좋다. 반가운 님을 반기듯 펑펑 눈물처럼 쏟는 산희샘.
<천왕성모의 천왕샘>과 <장터목의 산희샘> 둘 다 여성에 비유한 샘물이란 공통점이 있다. 천왕성모 영원한 젊음도 산아가씨보다 못했을 듯.
'마야부인이 산희샘을 메꾼 이유는 무엇일까?'
남편을 기다리다가 거울인듯 들여다 보았다는 산희샘. 여성이 거울을 들여다 보기를 포기했다면 죽음을 의미. 마야부인은 남편을 향한 사랑이 삶의 전부였던 듯 싶다.
........................제라늄............................... 세계에서 가장 많이 재배되는 원예식물이고 중 하나. 영국에서는 19세기의 빅토리아 왕조시대에 크게 유행. 제라늄의 생태적 특성을 보면, 여성의 질투심과 흡사.
제라늄은 주변식물이 다가오지 못하도록 옆으로 퍼진다. 제라늄은 꽃이 지더라도 해충도 접근 못할 향기를 풍긴다. 제라늄은 아름답지는 않더라도 끊임없이 꽃들을 피워낸다.
다른 꽃들이 아름답게 피어나는 꼴을 시기하고 시샘하는 듯. 그 꽃이 40대 여인의 질투심 어린 정열같다 하여 제라늄이다. 화장실에 두면 방향제이고 베란다에 두면 해충을 쫓아버린다.
부엌에 두면 그 근처에 바퀴벌레 조차 얼씬거리지 못한다. 베란다에 두면 다른 꽃나무가 제대로 꽃을 피우기 어렵다. 제라늄의 독특한 꽃향기가 주변 벌 나비를 쫓아 버리는 탓. ...................................................................
하여, 제라늄 주변에는 다른 종류 식물이 서식하기 어렵다. 제라늄은 정성들여 가꿔주지 않으면, 곧 산만하게 흩어진다. 마치, 40 대 여인의 모습과 같은 특성을 갖고 있는 원예식물.
깨끗한 샘물을 펑펑 쏟아내는 젊음에 대한 마야부인의 시샘. 산희샘은 아직도 장터목에서 억울함을 호소하듯 눈물 쏟는다. 깊은 산속 산희샘은 마야부인과 더불어., 지리산 전설의 산실.
산희샘은 '산아가씨의 젊음을 상징하는 샘물이다. 사랑하는 총각을 반기며 혼이 눈물로 반겼다는 전설. 산희샘은 지리산에서 가장 높은 재에 위치한., 옹달샘.
장터목은 일기변화 극심하고 높아 오르기 힘든 곳. 찬바람 불듯 도도한 매력을 지닌 산세를 처녀에 비유. 그 샘물을 마시기가 쉽지 않다는 뜻으로도 풀이가 된다.
여성을 상징하는 샘은 대부분 높은 곳에 있다. 두 봉우리 사이의 깊숙한 계곡 안에 숨어있다. '처녀바위' 이름 붙은 곳은 오르기 까탈스럽다.
일명 '장터목샘'이라 불리우는., '산희 샘.'
지리산의 샘물은 저마다 색다른 전설을 품고있다. 그러나 공통점은 생명체의 젖줄이자 산실이라는 점. 산희샘을 산 아가씨에 비유한 전설 내용이 흥미롭다.
우리나라 전통적인 토속 민간신앙은 참으로 다양하다. 결혼한지 여러해 된 부부가 아들을 기원하는 기자주술 부처·산신(山神)·삼신할미·서낭신 등에게 비는 행위.
바위 나무 우물 자연물에 정화수를 떠놓고 비는 행위. 민간에서는 수명이 긴 것을 신성시하는 경향이 있는데 그 앞에서 정성드리면, 신의 도움을 받을 것이라는 믿음
'아들 많은 집안의 금줄을 훔치는 기자 주술.'
아들 많이 낳은 여인의 진 자리옷을 가져 와 입는 풍습. 아들 많이 낳은 여인의 생리대를 훔쳐서 몸에 차는 풍습. 고추를 주머니에 넣어 갖고 다니는 등 다양한 풍습이 있다.
이 밖에도 바위에 구멍을 내거나 문관석 돌부처 코를 갈아 마시기.
아들이 많은 집안 식칼을 훔쳐 작은 도끼를 만들어 속옷에 차기.
여자가 임신하면 해산할 때까지 삼가야 할 금기사항들과 먹거리
부녀자가 자식을 낳기 위해 벌리는 여러가지 형태의 신앙. 삼국사기, 삼국유사에도 기록된 전통적인 토속적 민속신앙. 특히, 이조시대에는 아들 선호 유교사상으로 인해 발달했다.
신앙의 대상은 산과 개울가의 성기형태의 기암괴석이며 자식을 기원하는 부녀자 행위에 따라 5가지로 나눠진다.
1. 영험이 있다고 믿는 자연 석물에 치성을 드리는 유형 2. 동식물에서 축출한 약물 복용 또는 음식을 먹는 유형 3. 특정 물건을 몸에 지니거나 은밀한 곳에 숨겨두는 유형 4. 남녀 성기 모양 돌 나무에 잉태와 출산을 기원하는 유형 5. 생전에 남에게 후덕한 일을 많이 하여 공덕을 쌓는 유형.
기자신앙은 생명을 존중하고 남아선호사상에 대한 강한 애착 아들을 낳지 못한 불안과 초조감을 해소하려는 심리적인 믿음.
'아들 선호 풍습은 언제 어디에서 비롯된걸까?'
우리나라는 삼국시대 이전부터 아들을 기원하는 풍습이 많았다. 동부여 해부루왕이 산과 강에 제사 후 얻은 아들이 훗날 금와왕
신라 경덕왕은 아들 못 낳는 왕비 '삼모부인'를 쫓아내고 새 왕비 '만월부인'을 맞아 표훈대사를 불러 아들을 청한다.
고려 명종은 태자가 없자 사신을 보내 백마산에서 제사 고려의 의종 임금도 왕비와 함께 사찰에서 득남을 기원. 득남하면 금과 은으로 된 화영경 네권을 만들겠다고 발원
고려태조 왕건이 나주를 공략하고 부인 오씨를 만나 하루밤 오씨(장화황후)가 임신 할까봐 돗자리에 사정하니 부인이 흡입 아들을 낳아 그 이마에 돗자리 자욱이 난 아이가 고려 2 대 혜왕
딸부자 집의 딸 이름은 섭섭이 끝순이 꼭지 후남이 순남이. 딸을 내리 다섯 낳고 다섯째 딸 이름을 꼭지라 짖고서 득남. 특히, 강릉 일대는 아들을 선호하는 사상이 뿌리깊은 곳이다.
신혼부부가 아들을 기원하며 방문한다는 강릉의 명소. 보물 제84호 신복사지 석불좌상, 보물 제87호 3층석탑.'
이 석불좌상 옆에는 여성 생식기를 상징하는 음석(陰石). 아들 낳으려는 여인들 탓에 돌부처 코가 남아나질 않는 곳. 음석이 있는 숲속에는 사람들이 하도 들락거려 반질반질하다.
주문진 소돌마을에는 남자 생식기를 닮은 버섯바위(아들바위) 여성을 상징하는 달에 얽힌 '전설의 고향' 경포호는 자궁 형태.
용꿈 꾼 신사임당이 율곡을 낳은 오죽헌 몽룡실. 대관령 박물관에 있는 남근석은 기자신앙의 상징.
'다산을 기원하는 성기에 관련된 풍속신앙들.'
남근바위 , 처녀바위, 미륵바위, 옥문바위는 고상한 이름. 공알바위, 암탑, 수탑, 자지방구, 소좆바위, 이름은 노골적. 마을 어귀에 세워놓은 남근석은 처녀를 낯 뜨겁게 할 모양새.
하지만, 동네총각이나 여인네들은 신주 모시듯. 정월에는 새끼를 감아 제를 올리며 풍년도 기원. 남근 숭배는 일본을 거쳐 동해안에 정착한 남방풍습
동해안 수신제 또는 해신제 풍습은 흥미롭다. 남근 나무조각이 동해 물결타고 출렁이는 모습.
파도가 거칠면 거친대로.. 파도가 잠잠하면 잠잠한대로 파도 따라 출렁거리며 껄떡댄다. . "철석 철석~" 살 섞는 듯한 파도소리 "끼룩 끼룩~" 갈매기떼들의 울음소리.
비릿한 바다 바람과 파도를 헤치고 수평선을 향해 떠가는 남근 나무조각.
......................동해안 수신(해신)제 풍습........................... 옛날에 시집 갈 나이가 된 어부의 딸이 사공인 청년과 약혼했다. 어느 날 바다에 고기잡이를 나간 청년은 풍랑을 만나 조난당한다. 처녀는 사랑하는 청년이 풍랑과 싸워 이기고 돌아오기만 기다린다. 눈이 오나 비가 오나 , 바다를 바라보며 청년이 무사하기만 염원한다.
사랑하는 청년이 돌아오지 않자 처녀는 바다에 몸을 던진다. 그 후에 마을에 좋지 않은 일만 생기고 물고기도 씨가 마른다. 마을 어부는 물론 젊음이들까지 조난을 겪고 돌아오지 않는다.
하여, 마을사람들은 시집도 못가고 죽은 처녀의 넋을 위로하여 사당을 짓고 향나무로 남근을 깍아 단오절마다 해신제를 올렸다. 그후부터 고기도 많이 잡히고 풍랑 조난사고도 많이 줄어들었다. .....................................................................................
남근 숭배는 풍요와 안녕을 바라는 우리 민족의 풍습. 선사시대부터 가장 신성시 여겼던 남근 성기숭배 문화. 인류의 생산능력 상징물로서 잉태와 연관시켜., 신앙화.
그래서 큰 선돌이 있으면 그 근처에 여근석을 마련. 여근석이 있으면 남근석을 결부해 당산돌로 삼았다. 서울 연희동 봉원사 뒤 안산 능선에 우뚝 선 남근석
이화 여대 방향을 내려다 보고 있는 거대한 남근석 옛부터, 남근석 앞에는 여인들이 많이 꼬이게 마련 지금도 자식을 원하는 여성들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옛 선비들이 쓰던 여성의 무릎을 닮은 연적 여체를 떠오르게 하는 아름다운 몸매의 불상 경북 포항 왕룡사에 삼신할머니를 모신 사당
전북 고창의 당산 옆에 있는 남근석, 전북 남원부근 지리산 자락의 음바위
청동기시대 선돌이나 솟대는 남근석의 초보적 형태 이들을 매개로 마을 또는 부락 공동체 문화를 형성, 우리나라에서는 남근석과 여근석을 마주보게 놓는다.
....................처녀바위와 총각바위 전설.................... 전설의 고향 중 한 곳인 '경상남도 고성군 개천면 당산.' 옛날 청남마을에 담 하나 사이에 두고 살았던 처녀 총각.
처녀는 양반 부잣집, 총각은 가난하지만 예의가 엄격한 집안 어느날 처녀는 담장 너머 옆집 총각이 글을 읽는 모습을 본다. 남녀칠세 부동석 유교사상이 지배하던 때라 마음속으로만 흠모.
처녀는 잠못이루던 끝에 몸종을 통해 편지를 총각에게 보낸다. 다음날 정오에 소당산 깊은 산속 큰 바위 앞에서 만나자는 내용. 다음날 아침 해가 뜨자 처녀는 나물 캐는 바구니를 들고 나선다.
첫 만남에서 서로에게 반한 두 남녀는 그곳에서 자주 만났다. 이런 소문이 동네에 퍼져 처녀가 아기를 가졌다고 잘못 와전 사태를 수습하려 총각은 처녀 아버지를 찾아 뵙고 청혼한다.
처녀 아버지는 가문을 욕되게 한 죄를 용서할 수 없다면 거절. 그 후에도 총각은 몇번 간청을 했지만 처녀 아버지는 요지부동. 두 남녀는 운명을 한탄하며 처음 만났던 바위 위에서 동반 추락.
이승에서 못다한 사랑을 저승에 가서 이루자고 다짐하며 죽는다. 그 순간 하늘에서 천둥번개가 치며 큰바위가 반으로 뚝 갈라진다. 마치, 두 사람의 애달픈 소원이 이루어지 듯 마주보고 선 바위 모습. ...................................................................................... ................... 삼막사의 남근석과 여근석.................................. 677년(신라 문무왕 17년)에 원효, 의상, 윤필 고승이 정진한 사찰. 서울 관악산에 있는 삼성산(三聖山)이란 이름도 이때 명명되었다. 삼막사 칠성각 앞에 자연암석 남근석과 여근석은 토속신앙의 대상.
자식을 원하면 출산, 일가의 번영 무병 장수를 빌면 효험이 있단다. 4월 초파일과 칠월칠석날 전국각지에서 많은 사람들이 몰려와 치성 성기숭배 사상은 다산 및 풍요를 기원하는 선사시대부터의 민간신앙 동남아와 일본은 물론 한반도 전역에 분포된 남방 지역의 풍습이다.
우리나라에는 옛날부터 바위에 얽힌 전설이 유난히 많다. 그중 처녀바위라 불리우는 곳은 위험한 곳이라 알면 된다.
...............................처녀 바위...................................... 바위의 모양새가 옴푹 패이고 찢어진듯 서있으면 처녀바위. 그 찢어진 듯 패인 바위 틈이 처녀 음부를 닮아 붙여진 이름. 순결한 처녀인 듯 접근 조차 허락하지 않을 만큼 까탈스럽다.
'우격다짐으로 오르면 거칠게 밀어내는 처녀바위.'
마치 거친 사내를 거부하는 처녀처럼 앙칼지게 할퀸다. 몸무계 실린 등산화가 바위 틈에 꽉 물리면 잘 안빠진다. 처녀바위 바위 틈에 낀 발은 용쓸수록 점점 꽉 조여 온다.
'한번 발목 붙잡히면, 오도가도 못하는 신세.'
하여, 처녀바위는 전국 어디를 가더라도 발목 꺽이기 쉬운 곳. 무리하게 오르면 떨어져 죽지 않을 만큼, 다치기 쉬운 처녀바위. 처녀바위라 불리는 곳은 좀 멀더라도 우회하는 습관이 안전하다. ......................................................................................
풍수지리 음양사상의 궁극적 원리는 성(性)에 있다. 남근석이나 여근석도 숭배의 대상으로 여긴 우리 조상. 풍요와 다산은 地力을 비롯한 주술적 힘에 있다고 신봉.
좌청룡, 우백호 묘자리 터는 여성의 국부(局部) 형태 산줄기의 철부(凸部)에 잡은 터는 성교(性交)의 형상. 여성의 심볼처럼 움푹 패인 바위를 농바우, 두덩바위
마을에 음풍(陰風) 바위가 바라보이면 옛부터 여성들이 바람 난다고 여겨왔다.
총각들이 몰래 두덩바위를 작대기로 쑤시면 여성들이 잠 못 이룬다고 하여 금기시 했다.
그래서 여근석 근처에 남근석을 세우고, 제를 지내 음풍을 다스리는 풍습이 있다. 원래 심볼석 숭배 근원은 기자(祈子)습속.
즉, 크고 우람한 남근은 성적 쾌감이 높고, 좁고 단단한 여근은 수태를 잘 한다는 믿음. 하여, 남성은 대물, 여성은 명기를 꿈꿔왔다.
'우리나라 기자신앙은 언제 어디서 비롯된걸까?'
중국학계는 고조선 역사까지도 중국 역사 범주에 포함 고대 중국 은나라와 주나라 교체기의 기자조선(箕子朝鮮) 은나라의 후예인 기자는 실존하는 철학가이자 정치가이다.
기자조선은 주(周)와 진(秦)을 황제의 나라로 섬긴 속국. 위만조선은 한(漢)의 속국이었다가 한 무제 때 한의 변방. 중국학계는 고대 동북지구 3대 종족을 숙신 예맥 동호로 구분 한국학계의 단군 -고조선 - 부여 -고구려 -발해 역사관과 상반
조선이란 명칭이 중국의 신화에서 비롯되었다는 주장 중국의 태양숭배 신화인 탕곡부상십일신화에 근거한 것. 10개 태양이 탕곡(湯谷)에서 목욕후 서쪽에 도착해 하루
탕곡은 중국의 동쪽인 현재의 산둥반도 칭저우(靑州)지역 중국학계는 단군신화가 중국신화의 영향을 받았다고 주장
중국 사서에 동이(東夷), 북적(北狄) 등은 외국인의 개념 진시황이 만리장성을 쌓은 공간에서 제외된 지역을 말한다. 따라서, 한반도는 진나라의 만리장성 변방에 있는 고대국가.
천왕봉 아래 제석봉과 연하봉 사이 고갯마루가 장터목. 백무동과 중산리를 잇는 최단거리 위치에 있는 산장이다. 옛부터 백무동 일대와 중산리 일대 주민들 간 물물교역터.
시천(矢川)과 마천(馬川)주민들 물물 교역터.. 장기정(場基項). 그 장터의 길목이라 <장터목>이라 명명된 곳에 있는..장터목 산장. 지리산 종주를 하며 천왕봉 일출을 감상하려는 인파로 늘 붐비는 곳.
'이곳은 언제부터 물물교환 장터가 형성된 것일까?'
...........................장터의 유래..................................... 몽골리안 유목민은 객지를 유랑하며 장막생활을 하는 특징. 장막이 모이는 곳이 장터가 되고 그곳에서 물물교환을 했다. 생필품 교환을 위해 3일 또는 5일에 한번씩은 모였을 듯 싶다.
유목민은 짐이 가벼워야 이동이 손쉬워 정기적인 장터를 형성. 한반도에서 유목생활이 농사 위주로 바뀌자 농산물 매매 교환터. 장막을 치고 농수산 특산물을 매매 교환하는 곳이 장터가 되었다. ...........................................................................................
한반도의 옛 조상 몽골 유목민이 장터목을 형성한 듯 싶다. 하여, 삼국시대 이전부터 장터로 사용되었을 가능성도 높다. 예전에는 일출봉의 숲길을 내려오면 5방향으로 등반로가 연결.
'천왕봉 전초기지라 야영터가 많았던.. 장터목.'
1971년 9월 지리산장 33 평방미터, 반지하 콘크리트 건물(40명 수용) 1986년 9월 새로 개축한 산장 82 평방미터 목조 2층 마루방(80명 수용) 1997년 325평방미터,140명을 수용할 수 있는 장터목 산장이 들어섰다.
야영하기 어려운 기상조건이면 더욱 붐볐던 장터목 산장. 야영객까지 산장으로 몰리는 휴가철엔 더욱 인파 붐빈 곳.' 2003년 6월 250 명 수용 시설로도 여전히 인파 붐비는 산장.
난방시설이 잘 되어 있어 겨울에 얇은 침낭으로도 견딜 수 있다. 취사장이 같은 건물 내에 위치한 것이 장점, 화장실 먼 것이 단점. <천왕봉 일출>맞이 하려는 등산객들 많이 이용해 사전 예약 바람직.
1997년까지 이곳 산장은 일출을 감상하려는 인파로 북새통. 지리산 산꾼들에게는 이곳의 ' 악명 높은...칼잠'도 감지덕지. 혹한기 인파가 몰리면, 침상에 두 줄로 마주보고. 모로 누워 칼잠.
옆 사람 발을 코 앞 가슴에 품고 칼잠. 새우등 웅크릴 공간도 없는 기나 긴 밤. 밤새 소변도 참고 뜬눈으로 지새웠던 밤.
화장실 다녀오면 누울 자리가 없어지는 탓. 그나마 그 잠자리 사수하려 필사적 안간 힘. 장터목의 악명높은 악천후 일기변화는 살인적.
'산장밖 악천후 하룻밤은 생사의 갈림길.'
인파가 몰려들면 산장 복도 바닥에 쪼그려 앉아 날밤. 가로 세로 줄 맞춰 앉은 채로 꼬박 밤을 지새워야 했다. 쪼그려 앉은 무릎이 저리다 못해, 감각조차도 없는 고통.
소변을 참다 못해, 화장실 다녀오면 사라진 잠자리. 그때문에 산장 안에서 티격태격하는 시비도 많았다. 산꾼들에게는 고생스러운 추억이 많았던 장터목 산장.
요즘은 현대식 시설라 이용하기 편하다. 예나 지금이나, 산장 직원이 잠자리 배정. 사전예약 없으면 산장에서 잠자기 어렵다.
숙박료 7000원. 침낭 대여 2000원. 담요 대여 1000원.
천왕샘.
천왕샘은 천왕성모를 상징하는 샘물이다. 지리산의 천왕봉은 천왕성모 전설의 고향. 중국 전설에도 천왕성모 같은 여신이 있다.
..................서왕모 전설............................ 견우와 직녀를 갈라놓은 전설의 여신 서왕모(西王母) 중국고대 신화 속에서 가장 잘 알려진 여신선 서왕모 서왕모는 천상계와 인간계의 여러 일에 일찍부터 개입
서왕모의 노여움을 샀던 애정 깊은 견우와 직녀 아직까지 멀고 먼 은하계를 사이에 두고 떨어져 매년 7월 7일 까치가 놓은 오작교에서 서로 상봉.
서왕모의 장생불로 선약(仙藥)을 훔쳐 먹은 상아 달의 궁전에서 영원히 외롭게 살았던 여신이었다.
삼황오제 황제가 치우와 중원을 놓고 다툼을 할 때, 치우가 비바람 안개를 불러 황제 군대는 길을 잃었다. 황제는 할수없이 군대를 물려 태산지방으로 후퇴했다.
이때 서왕모는 여우 갑옷을 입은 사자를 파견하여, 푸른 옥돌을 황제에게 주어 난국을 타개하게 하였다.
그리고 사람머리에 까마귀 몸을 한 구천현녀를 파견 황제에게 각종 음양술과 기관조종술을 가르쳤다 한다. 서왕모의 도움으로 황제는 치우와 전쟁에서 승리한다.
서왕모는 천하를 다스린 요에 이어 순 임금까지 지지 사자를 파견해 순임금에게 백옥환과 백옥피리를 하사. 그리고 지도를 내려 구주 중심 12주 영토 확장에 도움
우 임금 대홍수 때 운화부인(雲華夫人), 요희를 파견 홍수를 다스리는데 도움을 주어 성공하였다고도 한다. 서왕모는 삼천년에 한번 곤륜산에서 신선모임을 개최
선도복숭아를 신선들에게 대접하며 치하하였다고 한다. 서왕모는 국가나 민간에 재난이나 어려움에 봉착했을 때, 기복(祈福)을 비는 가장 중요한 신들 중 하나로 정착했다.
수나라 때 방화로 정형현 전체가 산불에 휩싸였을때 백성들은 두려움 속에서 어찌할 바를 몰랐다고 한다. 정형현 관리들은 서왕모 사당에 예를 올리며 고했다.
"백성이 무슨 죄가 있겠습니까? 지금 이러한 큰 재난을 만났습니다! 신령하다면 비를 내려 구해 주십시오."
기도가 끝나자 곧바로 구름이 몰려들며 소나기가 내려 큰 산불이 꺼졌다고 한다.
그후 서왕모 귀부인상으로 그려 제사를 지내고 복과 수명을 빌거나 각종 재앙을 없애도록 기도 이것이 널리 유행하여 민간에서는 풍속이 되었다.
서왕모에게는 많은 자녀들이 있었다고 한다. 그 중 가장 잘 알려진 여인이 운화부인(요희) 그리고 태진(太眞)부인 그 이름이 완(婉)이다.
운화부인은 서왕모의 23번째 딸이며 태진부인의 동생 서왕모의 아홉번째 아들이 현수이며 진인이라는 기록
서왕모는 주나라 목왕과 다시 만나기로 하고 이별 그러나, 목왕이 죽자 요지(瑤池)에서 재회도 물거품 그 당시 늙은 서왕모의 신통력은 대단하지 못했던 듯.
전국(戰國)시대가 지나고 한나라 때가 되자, 신선가의 방사(方士)들의 활약이 커지게 되며 서왕모의 지위와 신통력은 자꾸만 높아져 갔다.
장생불사약을 장악한 신령스러운 여신.
도교가 성행하자 서왕모는 도교진영의 주요인물 도교와 불교가 세력을 다툴 무렵 천상의 높은 신
한 무제 유철은 일심으로 신선의 도를 구했던 사람. 동쪽 어느 군에서 한 무제에게 소왜인(小矮人)을 조공 한 무제는 소인을 책상위에 올려놓고 장난하면서 즐겼다.
어느날 동방삭이 궁궐에 들어 왔다가 소인을 만났다. 동방삭은 한 무제에게 소인에 관한 이야기를 말한다.
"이 아이는 세 번이나 서왕모 선도복숭아를 훔쳐 그 벌로 이곳 인간세계에 귀양살이 온 왔습니다."
한 무제는 동방삭이 평범한 사람이 아님을 알았다. 그때까지 잠자코 있던 소인이 한 무제에게 말했다.
"서왕모가 도를 구하는 방법을 가르치라 했읍니다. 마음은 오직 청정하고 마땅히 조급해서는 안됩니다. 다시 오년이 지나면 서왕모가 당신을 만날 것입니다."
소인은 그렇게 말한 후 순간적으로 사라졌다. 오년후 서왕모가 7월 7일에 강림하겠다는 전갈. 한 무제는 향을 사르고 물청소 하고 장막을 쳤다.
7월 7일 밤 하늘이 자주색 구름으로 덮이며 서왕모가 구름수레를 타고 궁전으로 내려왔다. 이때 서왕모 얼굴은 절세가인으로 30 세 여인
서왕모는 한 무제와 이야기를 나누다가 선도복숭아를 한무제에게 맛보게 하였다.
서왕모가 사는 곳은 선경 요지(瑤池) 그곳에서만 자라난다는 '선도 복숭아'. 하나 먹으면 천년을 살 수 있다는 반도.
요지는 이상향을 찾는 이들이 동경하는 곳. 역대 이를 노래한 시인들이 수없이 많았다. 당나라 때 이태백은 양귀비를 노래한 청평조사
제석봉 아래 고갯마루 장터목 산장 인근에 있는 산희샘. 백무동, 중산리, 세석 방향에서 온 인파로 항상 붐빈다. 그곳 산장 바로 아래 샘은 수량이 적어도 마르지 않는다.
요즘은 워낙 찾는 이가 많아 주말엔 길게 줄서야 한다. 산희샘은 등산객의 타는 갈증을 해소해주는 고마운 샘물. 아울러, 그 못지 않게 짜릿하고 감미로운 전설들이 있다.
....................전설 - 1............................................. 약초를 캐러가 돌아오지 않은 총각을 기다리다 찾아나선 처녀. 며칠 동안 산중을 헤메다가 갈증을 못 이겨 이곳에서 숨졌는데 총각이 뒤늦게 오자 그 혼이 눈물로 반기듯 솟았다는 전설의 샘. ...................................................................
산청군 일대의 지리산 자락은 2400 여종 약초 자생지. 약초꾼들이 캔 한약재 약초를 장터목에서 거래했던 듯. 약초꾼 총각을 찾아나선 처녀가 숨진 전설의 고향 산희샘.
산희샘은 예나 지금이나 물이 많은 곳. 백무동도 가깝고 중산리도 멀지 않은 곳. 옛 약초꾼들의 애환이 담겨있는 샘물 같다.
.................전설 - 2........................ 마야부인이 멀리 떠난 남편 기다리며 거울 삼아 몸 단장했던 전설 속의 샘.
결국, 돌아오지 않는 남편을 원망하며 메꿔버린 샘이 장터목 인근에.. 산희샘. .......................................................
마야부인은 신라 진평왕의 첫째 부인. 승만(僧滿)부인은 진평왕의 둘째 왕비. 성은 손씨(孫氏)이고 후사(後嗣)가 없다.
이 전설의 주인공은 승만부인인듯.
산희샘의 풍부한 물이 장터목 옛 장터의 원동력. 오늘날 산장까지 들어선 그 원동력은 바로 산희샘. '마야 부인과 반야의 비련'이 애?은., 전설의 고향.
여성에게 거울이란 생명과도 같은 것이다. 아무리 속상해도 산에서 가장 귀한 것은 물. 샘물을 메꿔야 할 숨은 사연이 있는 듯 하다.
천왕봉에서 법계사 쪽으로.. 500m 아래 너덜지대 깔딱고개 위에 있는.,'천왕샘'.
'천왕성모 위력을 상징하는 통신골'은 거대하지만, 그 거대한 계곡이 품은 천왕샘은 가뭄에 자주 마른다. 그에 비해 산희샘은 언제나 변함없이 샘물이 솟아난다.
천왕샘보다 훨씬 맑고 깨끗한 산희샘.
산희샘은 높은 곳에 있어 오르기 힘들지만 물 맛은 천왕샘에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좋다. 반가운 님을 반기듯 펑펑 눈물처럼 쏟는 산희샘.
<천왕성모의 천왕샘>과 <장터목의 산희샘> 둘 다 여성에 비유한 샘물이란 공통점이 있다. 천왕성모 영원한 젊음도 산아가씨보다 못했을 듯.
'마야부인이 산희샘을 메꾼 이유는 무엇일까?'
남편을 기다리다가 거울인듯 들여다 보았다는 산희샘. 여성이 거울을 들여다 보기를 포기했다면 죽음을 의미. 마야부인은 남편을 향한 사랑이 삶의 전부였던 듯 싶다.
........................제라늄............................... 세계에서 가장 많이 재배되는 원예식물이고 중 하나. 영국에서는 19세기의 빅토리아 왕조시대에 크게 유행. 제라늄의 생태적 특성을 보면, 여성의 질투심과 흡사.
제라늄은 주변식물이 다가오지 못하도록 옆으로 퍼진다. 제라늄은 꽃이 지더라도 해충도 접근 못할 향기를 풍긴다. 제라늄은 아름답지는 않더라도 끊임없이 꽃들을 피워낸다.
다른 꽃들이 아름답게 피어나는 꼴을 시기하고 시샘하는 듯. 그 꽃이 40대 여인의 질투심 어린 정열같다 하여 제라늄이다. 화장실에 두면 방향제이고 베란다에 두면 해충을 쫓아버린다.
부엌에 두면 그 근처에 바퀴벌레 조차 얼씬거리지 못한다. 베란다에 두면 다른 꽃나무가 제대로 꽃을 피우기 어렵다. 제라늄의 독특한 꽃향기가 주변 벌 나비를 쫓아 버리는 탓. ...................................................................
하여, 제라늄 주변에는 다른 종류 식물이 서식하기 어렵다. 제라늄은 정성들여 가꿔주지 않으면, 곧 산만하게 흩어진다. 마치, 40 대 여인의 모습과 같은 특성을 갖고 있는 원예식물.
깨끗한 샘물을 펑펑 쏟아내는 젊음에 대한 마야부인의 시샘. 산희샘은 아직도 장터목에서 억울함을 호소하듯 눈물 쏟는다. 깊은 산속 산희샘은 마야부인과 더불어., 지리산 전설의 산실.
산희샘은 '산아가씨의 젊음을 상징하는 샘물이다. 사랑하는 총각을 반기며 혼이 눈물로 반겼다는 전설. 산희샘은 지리산에서 가장 높은 재에 위치한., 옹달샘.
장터목은 일기변화 극심하고 높아 오르기 힘든 곳. 찬바람 불듯 도도한 매력을 지닌 산세를 처녀에 비유. 그 샘물을 마시기가 쉽지 않다는 뜻으로도 풀이가 된다.
여성을 상징하는 샘은 대부분 높은 곳에 있다. 두 봉우리 사이의 깊숙한 계곡 안에 숨어있다. '처녀바위' 이름 붙은 곳은 오르기 까탈스럽다.
일명 '장터목샘'이라 불리우는., '산희 샘.'
지리산의 샘물은 저마다 색다른 전설을 품고있다. 그러나 공통점은 생명체의 젖줄이자 산실이라는 점. 산희샘을 산 아가씨에 비유한 전설 내용이 흥미롭다.
우리나라 전통적인 토속 민간신앙은 참으로 다양하다. 결혼한지 여러해 된 부부가 아들을 기원하는 기자주술 부처·산신(山神)·삼신할미·서낭신 등에게 비는 행위.
바위 나무 우물 자연물에 정화수를 떠놓고 비는 행위. 민간에서는 수명이 긴 것을 신성시하는 경향이 있는데 그 앞에서 정성드리면, 신의 도움을 받을 것이라는 믿음
'아들 많은 집안의 금줄을 훔치는 기자 주술.'
아들 많이 낳은 여인의 진 자리옷을 가져 와 입는 풍습. 아들 많이 낳은 여인의 생리대를 훔쳐서 몸에 차는 풍습. 고추를 주머니에 넣어 갖고 다니는 등 다양한 풍습이 있다.
이 밖에도 바위에 구멍을 내거나 문관석 돌부처 코를 갈아 마시기.
아들이 많은 집안 식칼을 훔쳐 작은 도끼를 만들어 속옷에 차기.
여자가 임신하면 해산할 때까지 삼가야 할 금기사항들과 먹거리
부녀자가 자식을 낳기 위해 벌리는 여러가지 형태의 신앙. 삼국사기, 삼국유사에도 기록된 전통적인 토속적 민속신앙. 특히, 이조시대에는 아들 선호 유교사상으로 인해 발달했다.
신앙의 대상은 산과 개울가의 성기형태의 기암괴석이며 자식을 기원하는 부녀자 행위에 따라 5가지로 나눠진다.
1. 영험이 있다고 믿는 자연 석물에 치성을 드리는 유형 2. 동식물에서 축출한 약물 복용 또는 음식을 먹는 유형 3. 특정 물건을 몸에 지니거나 은밀한 곳에 숨겨두는 유형 4. 남녀 성기 모양 돌 나무에 잉태와 출산을 기원하는 유형 5. 생전에 남에게 후덕한 일을 많이 하여 공덕을 쌓는 유형.
기자신앙은 생명을 존중하고 남아선호사상에 대한 강한 애착 아들을 낳지 못한 불안과 초조감을 해소하려는 심리적인 믿음.
'아들 선호 풍습은 언제 어디에서 비롯된걸까?'
우리나라는 삼국시대 이전부터 아들을 기원하는 풍습이 많았다. 동부여 해부루왕이 산과 강에 제사 후 얻은 아들이 훗날 금와왕
신라 경덕왕은 아들 못 낳는 왕비 '삼모부인'를 쫓아내고 새 왕비 '만월부인'을 맞아 표훈대사를 불러 아들을 청한다.
고려 명종은 태자가 없자 사신을 보내 백마산에서 제사 고려의 의종 임금도 왕비와 함께 사찰에서 득남을 기원. 득남하면 금과 은으로 된 화영경 네권을 만들겠다고 발원
고려태조 왕건이 나주를 공략하고 부인 오씨를 만나 하루밤 오씨(장화황후)가 임신 할까봐 돗자리에 사정하니 부인이 흡입 아들을 낳아 그 이마에 돗자리 자욱이 난 아이가 고려 2 대 혜왕
딸부자 집의 딸 이름은 섭섭이 끝순이 꼭지 후남이 순남이. 딸을 내리 다섯 낳고 다섯째 딸 이름을 꼭지라 짖고서 득남. 특히, 강릉 일대는 아들을 선호하는 사상이 뿌리깊은 곳이다.
신혼부부가 아들을 기원하며 방문한다는 강릉의 명소. 보물 제84호 신복사지 석불좌상, 보물 제87호 3층석탑.'
이 석불좌상 옆에는 여성 생식기를 상징하는 음석(陰石). 아들 낳으려는 여인들 탓에 돌부처 코가 남아나질 않는 곳. 음석이 있는 숲속에는 사람들이 하도 들락거려 반질반질하다.
주문진 소돌마을에는 남자 생식기를 닮은 버섯바위(아들바위) 여성을 상징하는 달에 얽힌 '전설의 고향' 경포호는 자궁 형태.
용꿈 꾼 신사임당이 율곡을 낳은 오죽헌 몽룡실. 대관령 박물관에 있는 남근석은 기자신앙의 상징.
'다산을 기원하는 성기에 관련된 풍속신앙들.'
남근바위 , 처녀바위, 미륵바위, 옥문바위는 고상한 이름. 공알바위, 암탑, 수탑, 자지방구, 소좆바위, 이름은 노골적. 마을 어귀에 세워놓은 남근석은 처녀를 낯 뜨겁게 할 모양새.
하지만, 동네총각이나 여인네들은 신주 모시듯. 정월에는 새끼를 감아 제를 올리며 풍년도 기원. 남근 숭배는 일본을 거쳐 동해안에 정착한 남방풍습
동해안 수신제 또는 해신제 풍습은 흥미롭다. 남근 나무조각이 동해 물결타고 출렁이는 모습.
파도가 거칠면 거친대로.. 파도가 잠잠하면 잠잠한대로 파도 따라 출렁거리며 껄떡댄다. . "철석 철석~" 살 섞는 듯한 파도소리 "끼룩 끼룩~" 갈매기떼들의 울음소리.
비릿한 바다 바람과 파도를 헤치고 수평선을 향해 떠가는 남근 나무조각.
......................동해안 수신(해신)제 풍습........................... 옛날에 시집 갈 나이가 된 어부의 딸이 사공인 청년과 약혼했다. 어느 날 바다에 고기잡이를 나간 청년은 풍랑을 만나 조난당한다. 처녀는 사랑하는 청년이 풍랑과 싸워 이기고 돌아오기만 기다린다. 눈이 오나 비가 오나 , 바다를 바라보며 청년이 무사하기만 염원한다.
사랑하는 청년이 돌아오지 않자 처녀는 바다에 몸을 던진다. 그 후에 마을에 좋지 않은 일만 생기고 물고기도 씨가 마른다. 마을 어부는 물론 젊음이들까지 조난을 겪고 돌아오지 않는다.
하여, 마을사람들은 시집도 못가고 죽은 처녀의 넋을 위로하여 사당을 짓고 향나무로 남근을 깍아 단오절마다 해신제를 올렸다. 그후부터 고기도 많이 잡히고 풍랑 조난사고도 많이 줄어들었다. .....................................................................................
남근 숭배는 풍요와 안녕을 바라는 우리 민족의 풍습. 선사시대부터 가장 신성시 여겼던 남근 성기숭배 문화. 인류의 생산능력 상징물로서 잉태와 연관시켜., 신앙화.
그래서 큰 선돌이 있으면 그 근처에 여근석을 마련. 여근석이 있으면 남근석을 결부해 당산돌로 삼았다. 서울 연희동 봉원사 뒤 안산 능선에 우뚝 선 남근석
이화 여대 방향을 내려다 보고 있는 거대한 남근석 옛부터, 남근석 앞에는 여인들이 많이 꼬이게 마련 지금도 자식을 원하는 여성들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옛 선비들이 쓰던 여성의 무릎을 닮은 연적 여체를 떠오르게 하는 아름다운 몸매의 불상 경북 포항 왕룡사에 삼신할머니를 모신 사당
전북 고창의 당산 옆에 있는 남근석, 전북 남원부근 지리산 자락의 음바위
청동기시대 선돌이나 솟대는 남근석의 초보적 형태 이들을 매개로 마을 또는 부락 공동체 문화를 형성, 우리나라에서는 남근석과 여근석을 마주보게 놓는다.
....................처녀바위와 총각바위 전설.................... 전설의 고향 중 한 곳인 '경상남도 고성군 개천면 당산.' 옛날 청남마을에 담 하나 사이에 두고 살았던 처녀 총각.
처녀는 양반 부잣집, 총각은 가난하지만 예의가 엄격한 집안 어느날 처녀는 담장 너머 옆집 총각이 글을 읽는 모습을 본다. 남녀칠세 부동석 유교사상이 지배하던 때라 마음속으로만 흠모.
처녀는 잠못이루던 끝에 몸종을 통해 편지를 총각에게 보낸다. 다음날 정오에 소당산 깊은 산속 큰 바위 앞에서 만나자는 내용. 다음날 아침 해가 뜨자 처녀는 나물 캐는 바구니를 들고 나선다.
첫 만남에서 서로에게 반한 두 남녀는 그곳에서 자주 만났다. 이런 소문이 동네에 퍼져 처녀가 아기를 가졌다고 잘못 와전 사태를 수습하려 총각은 처녀 아버지를 찾아 뵙고 청혼한다.
처녀 아버지는 가문을 욕되게 한 죄를 용서할 수 없다면 거절. 그 후에도 총각은 몇번 간청을 했지만 처녀 아버지는 요지부동. 두 남녀는 운명을 한탄하며 처음 만났던 바위 위에서 동반 추락.
이승에서 못다한 사랑을 저승에 가서 이루자고 다짐하며 죽는다. 그 순간 하늘에서 천둥번개가 치며 큰바위가 반으로 뚝 갈라진다. 마치, 두 사람의 애달픈 소원이 이루어지 듯 마주보고 선 바위 모습. ...................................................................................... ................... 삼막사의 남근석과 여근석.................................. 677년(신라 문무왕 17년)에 원효, 의상, 윤필 고승이 정진한 사찰. 서울 관악산에 있는 삼성산(三聖山)이란 이름도 이때 명명되었다. 삼막사 칠성각 앞에 자연암석 남근석과 여근석은 토속신앙의 대상.
자식을 원하면 출산, 일가의 번영 무병 장수를 빌면 효험이 있단다. 4월 초파일과 칠월칠석날 전국각지에서 많은 사람들이 몰려와 치성 성기숭배 사상은 다산 및 풍요를 기원하는 선사시대부터의 민간신앙 동남아와 일본은 물론 한반도 전역에 분포된 남방 지역의 풍습이다.
우리나라에는 옛날부터 바위에 얽힌 전설이 유난히 많다. 그중 처녀바위라 불리우는 곳은 위험한 곳이라 알면 된다.
...............................처녀 바위...................................... 바위의 모양새가 옴푹 패이고 찢어진듯 서있으면 처녀바위. 그 찢어진 듯 패인 바위 틈이 처녀 음부를 닮아 붙여진 이름. 순결한 처녀인 듯 접근 조차 허락하지 않을 만큼 까탈스럽다.
'우격다짐으로 오르면 거칠게 밀어내는 처녀바위.'
마치 거친 사내를 거부하는 처녀처럼 앙칼지게 할퀸다. 몸무계 실린 등산화가 바위 틈에 꽉 물리면 잘 안빠진다. 처녀바위 바위 틈에 낀 발은 용쓸수록 점점 꽉 조여 온다.
'한번 발목 붙잡히면, 오도가도 못하는 신세.'
하여, 처녀바위는 전국 어디를 가더라도 발목 꺽이기 쉬운 곳. 무리하게 오르면 떨어져 죽지 않을 만큼, 다치기 쉬운 처녀바위. 처녀바위라 불리는 곳은 좀 멀더라도 우회하는 습관이 안전하다. ......................................................................................
풍수지리 음양사상의 궁극적 원리는 성(性)에 있다. 남근석이나 여근석도 숭배의 대상으로 여긴 우리 조상. 풍요와 다산은 地力을 비롯한 주술적 힘에 있다고 신봉.
좌청룡, 우백호 묘자리 터는 여성의 국부(局部) 형태 산줄기의 철부(凸部)에 잡은 터는 성교(性交)의 형상. 여성의 심볼처럼 움푹 패인 바위를 농바우, 두덩바위
마을에 음풍(陰風) 바위가 바라보이면 옛부터 여성들이 바람 난다고 여겨왔다.
총각들이 몰래 두덩바위를 작대기로 쑤시면 여성들이 잠 못 이룬다고 하여 금기시 했다.
그래서 여근석 근처에 남근석을 세우고, 제를 지내 음풍을 다스리는 풍습이 있다. 원래 심볼석 숭배 근원은 기자(祈子)습속.
즉, 크고 우람한 남근은 성적 쾌감이 높고, 좁고 단단한 여근은 수태를 잘 한다는 믿음. 하여, 남성은 대물, 여성은 명기를 꿈꿔왔다.
'우리나라 기자신앙은 언제 어디서 비롯된걸까?'
중국학계는 고조선 역사까지도 중국 역사 범주에 포함 고대 중국 은나라와 주나라 교체기의 기자조선(箕子朝鮮) 은나라의 후예인 기자는 실존하는 철학가이자 정치가이다.
기자조선은 주(周)와 진(秦)을 황제의 나라로 섬긴 속국. 위만조선은 한(漢)의 속국이었다가 한 무제 때 한의 변방. 중국학계는 고대 동북지구 3대 종족을 숙신 예맥 동호로 구분 한국학계의 단군 -고조선 - 부여 -고구려 -발해 역사관과 상반
조선이란 명칭이 중국의 신화에서 비롯되었다는 주장 중국의 태양숭배 신화인 탕곡부상십일신화에 근거한 것. 10개 태양이 탕곡(湯谷)에서 목욕후 서쪽에 도착해 하루
탕곡은 중국의 동쪽인 현재의 산둥반도 칭저우(靑州)지역 중국학계는 단군신화가 중국신화의 영향을 받았다고 주장
중국 사서에 동이(東夷), 북적(北狄) 등은 외국인의 개념 진시황이 만리장성을 쌓은 공간에서 제외된 지역을 말한다. 따라서, 한반도는 진나라의 만리장성 변방에 있는 고대국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