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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중세대학(스콜라리움,SCHOLARIUM)
중세대학은 중세시대 유럽을 중심으로 등장한 고등교육기관으로 조합의 형태로 이루어진 초급적인 조직구성이었습니다 11~12세기, 이탈리아, 잉글랜드, 프랑스에서 나타난 것으로 이들 학교는 학부과정에서 자유와 교육, 전공과정에서 법학, 의학, 신학교육을 중점적으로 하였습니다 중세대학의 기원은 카톨릭교회 소속의 교회학교(본산학교,사원학교,Cathedral school)와 수도원학교에서 출발하였습니다 중새대학은 초기에 고대 로마의 고등교육기관의 명칭으로 "수투디아 게네랄레"(SUTUDIA GENERALE)로 사용되기도 하였습니다 학생과 교사의 학문적 조합을 의미하는 "우니베르시타스"(UNIVERSITAS)와 "스투디움"(STUDIUM)을 결합하여 "스콜라리움"(SCHOLARIUM)을 명칭으로 사용하는 등 각각의 명칭들이 교육의 특징에 따라 사용되었습니다
초기 이탈리아와 프랑스 남부지역은 법학과 의학을 위주로 하는 볼로냐 대학교(Università di Bologna)를, 유럽의 북부지역은 신학을 전문으로 하는 파리대학교(Université de Paris)를 모델로 삼아 대학교의 설립이 이루어졌습니다 이탈리아의 도시화와 로마제국의 통치적 구조로 인하여 로마법에 관심을 가진 지식인들이 증가하였고, 법학에 관한 지식탐구가 학교의 주요과목이 되었습니다 파비아(Pavia)는 롬바르디아법으로, 라벤나(Ravenna)는 로마법으로 유명한 양대지역이었습니다 그러나 이탈리아 최고의 학교이며 최초의 법률대학이 탄생한 지역은 볼로냐(Bologna)였습니다 당대의 대법학자 이르네리우스(Irnerius)가 볼로냐에서 활동함으로서 볼로냐 대학교가 유럽전역에서 법학의 중심지가 되었습니다
이 시기에 유럽의 북부지역에서는 신학이 중요한 과목이 되었습니다 변증법과 논리학이 주요교과로 되어 있었던 북부지역의 학부는 문법학, 수사학, 논리학을 중심으로 자유교과가 형성되어 있었습니다 문법학은 그리스어와 라틴어로 기록된 학문으로 이단시 되었고, 수사학은 문예수준이 뒤쳐져 있어서 주목을 받지 못하였습니다 이러한 제한적인 원인으로 변증법학을 연구하는 사람들이 많아졌습니다
요하네스 스코투스 에리우게나(Johannes Scotus Eriugena, 810년경~877년경)는 9세기 중엽 프랑크왕국 궁정학교의 교수였습니다 예정설(Predestination)에 대한 그의 논문은 진정한 철학과 진정한 종교는 일치한다고 확신하며 신학적 문제들을 철학적 방법으로 해결하려 하였습니다 그러나 고트샬크(Gottschalk)의 "이중예정설"을 반박하기 위해 쓴 "신의 예정에 대하여"는 교회로 부터 이단으로 취급되는 경향도 있었습니다 요하네스 스코투스는 과거의 이시도레(Isidore of Seville)와 알퀸(Alcuin)으로 대표되는 고전적 신학체계를 혁신하고 마음의 공통관념을 탐색하는 수단으로서 논리학을 재정립하였습니다 요하네스 스코투스는 ‘관념과 실재의 관계’라는 논리학적 변증법으로 중세 철학(신학)계에서 엄청난 비중을 차지한 문제에 접근하였습니다 11~14세기에 나타난 스콜라철학의 집대성은 요하네스 스코투스의 학술적 입장을 기반으로 일어난 사조였습니다
포르피리오스(Πορφύριος,234~305)가 추상적인 용어로 제기한 반립명제들은 11세기 실재론(실념론,實念論)과 유명론(唯名論)의 대립으로 표면화되었습니다 실재론은 사물의 실재는 사물의 일반적 관념에서 얻어지며 감각으로 지각되는 사물은 외견에 불과한 것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실재론은 개별자의 중요성을 부정함으로서 영혼의 불멸과 신의 존재까지도 의심의 여지가 있었습니다 유명론은 일반적 관념은 오직 명칭(meroe voces)이며 이것에 대응되는 실재는 존재하지 않고 개별적인 사물 각각이 실재라는 논리였습니다 이것은 삼위일체교리 및 성변화(transubstantiation)교리와 충돌하는 모순된 교리라는 오류가 각각의 논리에서 문제가 되었습니다
안셀무스Anselm of Canterbury,1033~1109.4.21)와 로스켈리누스(Roscellinus, 1050경-1124경)는 실재론과 유명론의 입장에서 논쟁하며 중세철학은 발전하였습니다 안셀무스는 정통교회의 입장에서 신앙으로 발전하였고, 로스켈리누스는 회의 및 비판의 세속철학으로 발전하였습니다 이러한 철학적 대립과 논리학의 발전속에서 학문은 진화하였고 이것을 계기로 대학교 설립의 필요성이 확대되었습니다
12세기 초, 샤르트르의 고등교육기관인 "수투디아 게네랄레"(SUTUDIA GENERALE)에서는 당대 고대문학석학 "베라느라 셀베스테르"가 학생들을 교육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학칙과 규정이 모호했던 시기인데다 교원과 학자들의 수준 또한 천차만별이어서 대학교의 설립과 함께 많은 수투디아 게네랄레는 퇴조의 길을 갔습니다 파리대학교(Université de Paris,1200~)는 파리지역의 교수와 학생들의 연합(L’Universitas magistrorum et scholarium Parisiensis)으로 조합형태의 교육기관으로 출발하였습니다 교원의 지명도에 따라 학교의 명성이 결정되는 제왕적 교수시대가 지나가고 학문적 전통이 학교의 명성으로 자리잡아갔습니다 캔터베리의 대주교 안셀무스가 베크교회(Saint-Julia-de-Bec)부설학교 교장을 겸직할때까지 베크는 파리보다 우위에 있는 교육도시였습니다 그러나 카페왕조(Capétiens,987~1328)가 파리를 수도로 지정하면서 파리는 12세기 후반, 프랑스 제일의 교육도시로 부상하였고, 중세 프랑스철학의 대가이며 스콜라철학의 아버지 "피에르 아벨라르"(Pierre Abélard,1079~1142.4.21)에 의해 파리대학교는 유럽 북부지역 최고의 명문대학교로 성장하였습니다
피에르 아벨라르는 유명론의 대가 로스켈리누스의 제자였습니다 샤르트르와 파리의 노트르담에서 교육을 받은 피에르 아벨라르는 학문적 욕구충족의 목적으로 파리에 학교를 세우려 하였습니다 교회와 변증법 논쟁에서 크게 자신감을 얻은 피에르 아벨라르는 교회의 영향력을 받지 않는 세속학교를 설립하였습니다 그 후 피에르 아벨라르는 인문학 교원자격과 신학 교원자격을 취득하고 노트르담대성당 부설학교의 교장으로 취임하였습니다 피에르 아벨라르의 강의를 듣기 위해 유럽북부는 물론 남부지역에서 학생들이 몰려왔고 그의 명성은 당시 유럽전역에 퍼져 나갔습니다
볼로냐와 파리에 집중된 교원과 학생들은 전문분야를 중심으로 높은 수준의 커리큘럼을 갖기 위하여 교육내용의 범위를 신학의 범주를 벗어나 다양한 과목으로 확장해 나가려는 움직임이 있었습니다 "수투디아 게네랄레"는 유럽 전역에서 ‘공부 장소’라는 의미로 통용되었습니다 수투디아 게네랄레는 고대 아테네와 알렉산드리아의 전통적이고 초보적인 학교의 범주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우니베르시타스"(UNIVERSITAS)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학생들의 조합이 필요하였고, 이러한 시도가 당시의 길드를 모방하여 생겨나기에 이르렀습니다 초기에는 교원조합으로 부터 출발하였습니다 1170년, 파리에서 강의중이던 셀라의 요하네스(Johannes of Cella)가 "저명한 교원 동호회"에 가입하였다는 측면에서 1170년대에 파리대학교의 전신과 같은 형태의 조직이 형성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파리에서 학생들이 교원조합 자격을 취득하기 위해서는 당대 유명한 석학의 제자로서 5~7년간의 도제생활을 필요로 하였습니다 그 후 추천서와 예비강의(probationary lecture)를 통하여 정식 조합원이 되었으나 그 이상의 규정이나 정관이 명시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12세기 후반 볼로냐의 학생조합은 도제의 지위에 있는 사람들을 회원으로 함으로서 교원조합과 차이점이 있었습니다 초기의 이러한 형태의 원시적 조직은 길드와 무역상인협회의 조직을 참고하거나 유사하게 적용한 측면이 강하였습니다
볼로냐에 최초로 출현한 우니베르시타스는 학문적 권위를 가지지 않은 채 회원의 이익목적으로 구성되었으며, 롬바르디아, 토스카나, 로마, 울트라몬타나(Ultramontana)출신 학생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형제애에 입각한 자선, 상호교유와 우의, 환자의 위문과 빈자의 지원, 장례의 수행, 원한과 싸움의 근절, 학위지망생의 안전과 보호, 전회원의 사기진작"은 볼로냐 우니베르시타스의 정관에 명시된 내용이었습니다
조합은 사회적으로도 특혜가 있었습니다 파리에서 교원조합원과 학생조합원은 모두 성직자로서 이들의 범죄행위는 일반 재판소가 아닌 교회재판소에서 재판을 받았습니다 이탈리아에서는 조합회원들을 특별계급으로 대우하며 특권을 부과하였습니다 1158년,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프리드리히 1세(Friedrich,1122~1190)는 롬바르디아 내 학생들에게 "학자의 특권'을 부여하는 칙령 "AUTHENTUCA HABITA"을 발표하였습니다 1200년, 프랑스 파리에서 시민과 학생들간의 난투극으로 사망사건이 발생하였을때 존엄왕, 필리프 2세(Philippe II,1165~1223)는 프랑스 학생에게도 이탈리아와 유사한 특권을 부여하였습니다 그러나 조합 자체에 특권을 부여한 것이 아니라 개개인에 대한 성직자로서의 특권이었습니다
(1) 볼로냐 대학교
13세기, "우니베르시타스"는 "수투디아 게네랄레"(SUTUDIA GENERALE)가 연합하여 행정기능을 갖춘 법인형태로 발전하였습니다 볼로냐에서 우니베르시타스는 권력기관과 잦은 마찰을 빚었습니다 볼로냐에서 수학중인 학생들은 대부분 외국의 귀족계급 출신이었습니다 이들이 볼로냐의 권력기관과 충돌하였을때 그들은 스스로의 이익집단을 형성하였고 그것이 연합형태의 법인으로 발전하였습니다
13세기 중엽, 군소 우니베르시타스는 치트라몬타나 우니베르시타스(Citaramontana)와 울트라몬타나(Ultramontana) 우니베르시타스로 통페합 되었습니다 치트라몬타나는 이탈리아내 롬바르디아, 토스카나, 로마 출신 학생들의 우니베르시타스이며, 울트라몬타나는 프랑스, 독일, 영국 출신 학생들의 우니베르시타스입니다 이 들은 회장을 선출하고 조직과 회장에 대한 복종을 맹약하였습니다 볼로냐 대학교의 특징은 여성교원의 등용입니다 이로 인하여 여성학생들도 함께 증가하였으며 남학생들과의 연애를 막기위해 상호간의 출입을 통제하였고, 1376년 학교내에서 댄스를 금하는 교칙을 제정하기도 하였습니다
14세기 초, 치트라몬타나와 울트라몬타나는 통합되었고 대학행정기구로서 학교운영을 총괄하였습니다 문학부와 의학부 등 소수의 인원을 가진 수투디아 게네랄레는 통합 우니베르시타스에 소속되어 볼로냐 우니베르시타스의 구성원이 되었습니다 볼로냐에서 "우니베르시타스 회장"(rector)은 학생통제를 위해 사법권이 인정되었습니다 대립은 학생이 연관된 사건에 시청,시의회를 상대로 회장이 권위를 앞세우며 시작되었으며 16세기 볼로냐대학교가 쇠락할때까지 계속되었습니다
12세기, 볼로냐의 수투디아 게네랄레에서 교육과 학술은 박사조합에서 담당하였으나 반동적 박사들과 학생들의 수업거부 일탈행위로 학생들이 이웃도시로 이탈하게 되자 시의회는 교원 우니베르시타스 회장의 출교(黜敎) 압력으로 맞섰습니다 이 일을 계기로 학생 우니베르시타스 회장의 권한이 강화되어 강좌 운영권과 개설권, 교원제명권을 갖게 되었습니다
13세기 후반, 학생주도의 볼로냐 우니베르시타스는 스스로 붕괴하였습니다 파리시 당국은 명문학생들을 유치하고 대학교의 명성을 유지하기 위하여 박사들에게 정기 급여를 지급하였습니다 대학교개혁위원회(Board of Reformatores studii)를 구성하고 교원의 임면권과 대학행정, 학사운영권을 직간접적으로 행사하였습니다 그러나 18세기, 격변기에 접어들면서 볼로냐 우니베르시타스는 찬란한 명성을 뒤로한채 역사속에서 쇠퇴의 길을 걸으며 사라져 갔습니다
(2) 파리대학교
프랑스 파리대학교의 발전은 볼로냐와는 다른 양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파리대학교의 중심은 문학부 학생들로서 이들은 상류층 계급의 자녀들도 아니었고 사회경험도 없었습니다 파리대학교의 체제 확립은 노트르담 사원장의 갈등으로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13세기, 교원조합과 노트르담사원간의 갈등은 노트르담 대성당 부설학교의 권위로 인한 것이었습니다 당시 노트르담사원장은 부설학교의 교장을 역임하며 파리 교육계의 최고 권위를 갖고 있었습니다 파리의 모든 교원은 노트르담 사원장이 발급하는 교원자격증을 필수로 하였으며 사원장은 발급과 효력정지의 권한까지 모두 가지고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파리 내 교원과 학생에 관련한 모든 업무를 관장하고 있었습니다
파리대학교 교원들은 노트르담사원장의 교원발급과 효력정지권은 인정하였으나 교원이 될 수 있는 조건은 교원에게 일임하여야 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교원조합은 노트르담사원장의 교원자격증을 취득하였다 할지라도 파리대학교의 교원조건에 맞지 않을 경우 교원조합의 가입을 승인하지 않았습니다 이로 인하여 노트르담사원장의 성직권위에 대한 명백한 위반이라고 하여 모든 교원들에게 복종서약을 강요하였습니다 그러나 파리대학교 교원조합은 이에 불복하고 교황 인노첸시오 3세(Innocentius PP. III,1198~1216)에게 제소하였고 교황은 복종서약이 권한의 남용이라고 결정하였습니다
1212년, 교황은 교지를 통하여 노트르담 사원장은 교원과 교원조합에 복종 서약을 강요할 수 없고 노트르담 사원장은 교원조합에서 제출하는 명부의 모든 신규 교원에게 자격증을 발부해야 한다고 확정하였습니다 이로서 노트르담 사원장의 영향력은 문학부로 한정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기관들은 파리대학교 운영정관을 변경하는 등 여러가지 통지조치를 취하는 결정들을 하였으나 교황에 의해 모두 파문되고 느트라담사원내의 교원감옥은 폐쇄되는가 하면 교황의 인준없는 대학교 파문은 모두 위법으로 결정되었습니다
1229년, 파리 시민과 대학생들간의 갈등이 심화되었을 때, 파리대주교의 묵인속에 프랑스 국왕이 군대를 동원하여 문제를 해결하는 가운데 학생이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하였습니다 교원들은 사건 직후 강의를 중단하고 대학교를 자진 폐쇄하는 강경한 조치를 취하였습니다 많은 교원들이 잉글랜드 옥스퍼드 대학교로 이주 하였고, 일부는 프랑스내 신생 대학교로 전학을 하였습니다 이러한 상황속에서 교황 그레고리오 9세(Gregorius PP. IX,1227~1241)는 교원의 입장에서 파리대학교와 파리 교회 당국간의 중재를 하며 1231년 "학문의 모체"(Parens Scientiarum)라는 교지를 발표하였습니다 교원들은 강의 거부권을 통해 교원의 입장을 관철할 수 있는 권한을 갖게 되었고, 교원들이 파리대학교의 규정을 자율적으로 정하며, 그 규정을 구성원들에게 강제할 수 있는 완전한 권리를 소유하게 되었습니다 이로서 노트르담 사원장의 사법권은 더욱 약화되어 형법적 권한은 완전히 소멸되었고 민법과 종교적 사법권도 제한적으로 허용되었습니다
13세기 중반, 도미니코 수도회와 프란체스코 수도회로 구성된 탁발수도회 양대 교단의 성장으로 파리대학교내 신학교원의 임용권을 취득하였습니다 그러나 교황 알렉산데르 4세의 후임 교황들이 그 권한을 취소함으로서 탁발수도사들의 권한 또한 소멸되었습니다 13세기, 파리대학교는 교회기관들과의 투쟁을 거치는 과정에서 조직과 체계를 완성도있게 구성하였습니다 13세기 초, 학부별로 느슨하게 구축되어 있던 교원과 학생조합은 13세기 말, 개별학부 협의체가 구성되고 문학부의 학장이 대학교의 총장을 겸임하는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노트르담 사원장과 대항하는 과정에서 여러개로 나뉘어 있던 교원 우니베르시타스들이 하나로 통폐합 되었고 학사학위과정을 담당하는 문학부 교원들의 영향력이 강화되었습니다 문학부 교원들은 볼로냐대학교의 법학선례를 따라 프랑스, 노르망디, 피카르(네덜란드), 잉글랜드 등 국가별로 4개조직으로 규합되었습니다 이들 국가의 우니베르시타스의 임원과 문학부 학장이 문학부의 정책을 결정하였을 뿐만 아니라 이들의 위상과 권한에서 7개의 우니베르시타스를 관장하는 총장을 겸하였습니다
파리대학교의 문학부는 1215년, 문학학위과정이 명확하게 규정되었습니다 파리 대학교에서의 7자유교과는 본래의 7자유교과와 매우 상이한 형태를 보였습니다 7자유교과 중 논리학은 "아리스토텔레스의 범주론 입문"(On Aristotle's Categories)을 주교재로 사용했고 문법은 "프리스키아누스"(Priscianus)의 논문에 국한되어 있었습니다 수사학과 철학은 교양과목으로 여겨져 휴일이나 국경일에만 이루어졌습니다 수사학 교재로 지정된 문헌은 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마코스 윤리학"과 대수학, 기하학, 음악학, 천문학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14세기, 문법, 논리학, 심리학을 중심으로 하는 "학사과정"(Baccalaureate)과 자연철학을 중심으로 하는 "교사자격과정"(Licence), 그리고 도덕철학과 고급자연철학을 중심으로 하는 "교사임용과정"(Mastership) 등 3단계로 세분화 하였습니다 또한 문법교원과 논리학교원과의 논변, 대학당국의 테스트, 결정과정의 주제논문 등 학사학위에 대한 절차가 복잡해지고 학사학위 이후에도 후속강좌 등 계속되는 논쟁과 강의들로 복잡한 과정들을 거쳐야 교원이 될 수 있었습니다 박사학위의 절차는 더욱 더 세분화되어 대학교의 체계는 자리를 잡아 갔습니다
파리대학교는 볼로냐 대학교와는 달리 교황과 국왕의 지원속에 발전을 가속화 하였습니다 종교개혁의 선구자 캘빈(Calvin)과 반종교개혁의 총수인 로욜라(Loyola)가 파리대학교의 출신인 점에서 유럽 최고의 명문을 자랑하고 오늘에도 여전히 세계적 명문으로서 그 위상과 가치를 나타내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