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ㅇ 開港(개항) 인천의 '한국최초'
앞에서는 한국 최초의 철도, 경인선 철도와 최초의 짜장면을 만들었다는 共和春(공화춘)과 차이나타운을 돌아보았다.
이번에는 차이나타운을 중심으로 한 인천 중구 일대의 개항기 근대문화유산, 특히 한국 최초 기록의 유적들을 답사하기로 한다.
<차이나타운을 포함, 중구지역의 근대문화유산 답사 지도... 인천개항 누리길...>
<우리가 걸으면서 돌아본 답사코스....>
지금까지 둘러 본 차이나 타운 우측으로는 대부분의 지역이 청나라와 일본의 조계지였으며 그 경계구분을 짓는것이 계단이다.
일본조계(1883)와 청국조계(1884)와의 경계계단은 위로는 자유공원과 연결되어 있다. 중앙에 돌계단을 배치하고 양쪽에 조경공간을 두어 이 계단을 중심으로 확연하게 다른 청국과 일본 건물들이 배치 되었다.
120년 역사를 간직한 이 계단은 중국과의 국교가 수립된 후 새롭게 정비되어 계단 윗쪽에는 청도에서 기증한 공자상이 세워졌다.
<청-일 조계지 경계계단... 왼쪽이 청국조계지, 오른쪽이 일본조계지였다.... 인천시 기념물 제51호>
<중국 청도시에서 기증한 공자상이 계단위에 세워졌다.>
大佛(대불)호텔 터(址)
조계지 경계계단 아래가 1888년 세워진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호텔 대불호텔 터인데 정동의 손탁호텔보다 14년 앞서 세워졌다.
개항과 함께 제물포에는 많은 외국인이 쏟아져 들어오기 시작했는데 열차가 개통되지 않았던 당시 80리 거리의 한성까지 당일에 이동할만한 교통편이 없었기에 하룻밤 정도는 제물포에서 숙박을 해야 했는데, 대불호텔은 그런 수요를 바탕으로 생겨났다.
이 호텔은 서양식으로 설계된 3층 벽돌 건물로 일본어가 아닌 영어로 손님을 맞았고, 침대 객실 11개와 다다미 240개 규모였다.
정확한 건축연대는 알 수 없지만 1885년 이전에 지어진 것은 분명하다. 1885년 인천에 들어온 선교사 아펜젤러 목사 부부가 이곳에 묵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천시 자료에는 1888년 일본인 사업가 횔 히사타로가 신축한 우리나라 최초의 서구식 호텔이었다고 하였으니 아마도 재래식 건물로 개관한 후, 1888년에 새로 지었다는 뜻인듯 하다. 초기에는 호황을 누렸지만 한강철교 개통이후로 인천에서 숙박하는 사람들이 별로 없어지고 서울로 바로 들어가게 되자 점차 불황을 맞이하였으며, 결국 1918년경 매도되어 중화루라는 중국음식점으로 활용되었다고 한다. 1978년 철거되었으며, 현재 빈터만 남았는데 최근 신축을 위한 기초공사중에 대불호텔 유적이 발견되어 복원이 의논되고 있으나 보상문제등으로 지지부진한 실정이다.
<대불호텔 터... 기초공사중 대불호텔 유적이 발견되어 발굴한 흔적이 보인다.>
<1880년대 중반의 대불(다이부츠)호텔... 초기에는 일본식 목조가옥이었음을 보여주는 삽화...>
<1900년대초 신축한 대불호텔 건물.....>
<3층 벽돌건물로 새로 지어진 대불호텔, 오른쪽은 중화루로 바뀐 후 모습이다.>
조선의 호텔, 대불호텔에서 손탁호텔까지 (펌글)
1887년 개축한 대불호텔, 경인철도 개통 될 때까지 방 잡기 힘들 정도
한성서 가장 큰 프렌치호텔, 서대문 스테이션호텔 인수해 영화 상영
미스손탁, 러시아공광에 피신한 고종 시중들고 하사금 받아 호텔 신축
이런 조선에 근대호텔이 맨 처음 등장하게 된 것은 역시 제물포에서였다. 미국 군함의 선상 요리사로 활동하던 일본인 호리 큐타로가 개항과 함께 제물포에 정착해 처음에는 빵 굽는 일부터 시작해서 정육점, 환전업, 제화업을 전전하다 세운 대불(大佛)호텔이 그것이었다.
대불호텔 초기의 시설은 보잘 것이 없었던듯 하지만 1887년 건축에 착수, 이듬해에 완공된 새로운 대불호텔은 서양인들을 위한 완전 서양식 호텔로 지어졌다. 당시로선 가장 서양식 유행을 따른 하이컬러 3층 높이의 붉은 벽돌 건축물은 단번에 개항 제물포의 랜드마크로 떠올랐다.
더욱이 이 호텔은 일어가 아닌 유창한 영어로 손님들을 맞이했으며, 식사 또한 서양인들의 입에 맞는 제대로 된 서양 요리와 함께 커피가 제공됐다. 객실은 침대가 딸린 방이 11개, 다다미방이 24개로 결코 적지 않은 규모였다. 숙박료는 당시 화폐로 상급이 2원50전, 중급 2원, 하급 1원50전이었다. 주변의 숙박 시설에 비하면 2배 이상 비쌌으나 늘 빈 방이 없을 정도로 인기가 높아 제물포를 통과하는 거의 모든 외국인들 예외 없이 이 호텔을 들러 가는 필수 코스처럼 여겨질 정도였다.
이에 반해 서울에 호텔이라는 이름을 내건 서양식 숙박시설이 본격적으로 등장하게 된 것은 1900년 무렵이 되어서였다. 제물포와 노량진 사이에 철도가 부설된 데 이어 한강 철교의 준공과 더불어 서대문역까지 경인철도가 완전히 개통된 게 직접적인 계기였다.
예전 같으면 으레 하룻밤은 제물포의 호텔에서 숙박을 해야 했는데, 기차를 이용해 곧바로 한성까지 들어올 수 있게 되면서 굳이 제물포에 체류할 이유가 없어진 것이었다. 이에 따라 제물포의 호텔들이 서서히 쇠락의 길로 접어든 데 반해, 한성에선 새로운 수요에 따라 전에 없던 서양식 호텔들이 속속 등장하기 시작했다.
새로운 황궁이 된 경운궁 영역과 인접한 곳에 자리했던 서울호텔, 경운궁의 정문인 대한문 앞 프렌치호텔과 임페리얼호텔, 서대문 부근(현 농협중앙회)의 스테이션호텔이 거의 비슷한 시기에 세워졌다. 손탁호텔(현 이화여고 100주년기념관) 또한 같은 시기에 등장했다.
먼저 이탈리아인 삐이노 소유의 서울호텔은 탁 트인 널찍하고 잘 갖춰진 침실이며 고급스런 프랑스 스타일의 요리를 선보였다. 호텔 부속 식료품 가게에는 그동안 구경조차 할 수 없던 갖가지 서구 상품이 이목을 끌었다. 새로 입하한 프랑스·독일·이탈리아·러시아산 와인이며 샴페인, 맥주, 농축 및 무가당 우유, 각설탕, 식탁용 건포도, 이집트산 담배, 일본산 광천수, 영국산과 미국산 통조림 등이 즐비했다.
프랑스풍의 프렌치호텔은 호텔 정면 2층에 근사한 베란다가 설치돼 있던 당시 한성에서는 가장 규모가 큰 호텔이었다. 이 호텔의 첫 주인 론돈은 개항장 제물포는 물론이고 한성에서 대창양행을 운영하고 있던 무기판매의 거상이었다. 이 때문에 초기 프렌치호텔은 '론돈여관'으로 불리기도 했다. 이 호텔은 3년 뒤 새 주인을 맞이했다. 제물포 대창양행의 직원이었던 마르텡으로 호텔의 소유주가 바뀌게 된 것이다.
호텔의 새로운 소유주 마르텡은 사업 수완이 매우 뛰어난 이였다. 1905년에는 서대문 부근에 자리한 스테이션호텔까지 인수해 이곳에 영화 상영관을 만들기도 했다.
경운궁(혹은 덕수궁으로 부름) 대한문 앞에는 이런 프렌치호텔 말고 또 하나의 서양식 호텔이 있었다. 요리사 출신의 프랑스인 물리스 소유의 임페리얼 호텔이 그것이었다.
그러나 임페리얼호텔이나 프렌치호텔은 투숙객들로부터 그다지 좋은 인상을 남기지 못했던 것 같다. 다름 아닌 목욕시설을 갖추고 있지 않았다는 사실 때문이다.
새 황궁의 정문 대한문 바로 앞에 자리한 임페리얼 호텔 2층 베란다는 한성의 명사들에게 새 황궁을 드나드는 모든 풍경을 바라볼 수 있게 해주는 훌륭한 전망대 역할을 해줬다.
이 호텔은 그런 지리적 이점에도 불구하고 문을 연 지 불과 3년여 만에 폐업하고 말았다.
서대문 부근 스테이션호텔은 영국인 선교사 엠벌리 소유였다. 이 호텔의 초기 모습은 담장 대신 나무를 둘러 세운 장식만이 조선식이 아닐 뿐 건물 모두가 순전히 조선식 단층 기와집 수준이었다. 이 호텔도 남다른 지리적 이점이 있었다. 제물포에서 경인철도를 타고 단번에 한성으로 들어오는 외국인 탑승객들이 주로 찾는 호텔이 됐다. 1899년 개통된 청량리~서대문 구간의 전차 종착점이 되면서 여러모로 교통의 이점을 가진 호텔로 부각될 수 있었다.
엠벌리는 초기의 기와집을 헐고 정면에 성탑이 우뚝 솟아있고 그 꼭대기에 다시 높다랗게 깃대를 세운, 한성의 그 어떤 호텔보다도 멋지고 품위 있는 서양식 호텔로 새로 지었다.
그러나 엠벌리가 독립신문을 인수해 사장으로 취임하면서 이 호텔은 프렌치호텔의 마르텡 소유로 바뀌게 됐다. 그러면서 마르텡은 이 호텔의 이름을 애스터 하우스로 바꿨다.
마르텡이 인수한 뒤에는 애스터 하우스가 단순히 숙박시설을 넘어 때로는 영화 상영관으로, 때로는 한성과 제물포에 거주하는 서양인 음악가들이 출연하는 유료 콘서트를 개최하는 등 새로운 문화 공간으로 폭넓게 활용되기도 했다.
그런가 하면 '조선의 마타하리'로 불렸던 일본의 밀정 배정자가 세 번째 남편 박영철과 결혼식을 올린 곳도 다름 아닌 이 애스터 하우스였다. 아직은 서양식 결혼식조차 흔치 않았던 시절에 요즘 유행하는 호텔 결혼을 해 원조가 된 셈이었다.
하지만 애스터 하우스의 운명 또한 그다지 오래 지속되지는 못했다. 한·일병합 이후 일제 강점기에 접어들면서 호텔의 소유주였던 마르텡의 종적은 물론이고 애스터 하우스마저 완전히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여기에 빠질 수 없는 게 손탁호텔이다. 손탁은 프랑스 태생의 독일인으로 여동생의 남편인 러시아 주한공사 웨베르를 따라 1885년 한성으로 들어온 32세의 젊은 미망인이었다.
한성에 들어온 지 몇 년 지나지 않아 그녀는 웨베르 공사의 추천으로 명성황후를 소견하고 황궁에서 외국인을 접대하는 관리로 촉탁됐다. 더욱이 명성황후에게 자주 불려가 서양 세계에 대한 이야기 상대가 돼 주면서 그녀의 존재가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재기 발랄한 데다 영어와 불어에서부터 조선어까지 능숙해 명성황후는 물론 드디어 고종의 지척에까지 갈 수 있기에 이르렀다.
그러면서 1895년에는 정동에 있는 황궁의 토지와 가옥을 일부 하사받고 황궁의 외국인 접대 외에도 황족들에게 서양 식기를 비롯해 서양의 장식 등을 소개하면서 지냈다.
그러던 손탁에게 명성황후 시해 이후 고종의 아관파천은 예기치 않은 행운이었다. 그녀는 갑작스레 러시아 공관으로 이어한 고종의 식사에서부터 일상에 이르기까지 정성껏 시중을 들었다. 고종은 그런 손탁을 유달리 마음에 들어해 나중에는 황궁의 요리에서부터 연회의 일체를 맡기면서 거액의 하사금까지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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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고종으로부터 받은 하사금으로 러시아공사관 건너편 자리를 사들여 1902년 서양식 2층 규모의 큰 건물을 신축했다. 어느새 사십대 중반이 된 그녀는 거기에 손탁호텔이라고 이름을 짓고 스스로 여주인 겸 총지배인으로 호텔을 경영하고 나섰다.
하지만 손탁호텔은 한성의 다른 호텔들과는 달리 황궁 궁내부의 '프라이빗 호텔'의 형태로 운영됐다. 그럼에도 손탁호텔만이 유명해진 까닭은 처음부터 한성에 거주하는 서양인들의 일상적 회합 장소로 자리매김하게 된 데다 무엇보다 반일친미 세력의 회합 장소로 알려졌기 때문인 것으로 여겨진다.
하지만 1904년 러·일전쟁에서 러시아가 패하자 손탁호텔도 그럭저럭 명맥을 유지하는 수준으로 전락하고 말았으며, 이듬해인 1905년에는 당시 일본의 최고 실력자인 이토 히로부미가 이곳에 투숙하면서 이른바 '을사늑약'을 배후에서 진두지휘한 비운의 역사를 간직한 공간이 되기도 했다.
결국 그녀는 역사의 격랑을 이기지 못하고 프랑스인 보에르에게 호텔을 매각한 뒤 24년의 조선 생활을 마감한 채 쫓기듯 프랑스로 돌아가 풍광 좋은 니스 지방에 별장을 지어 극동의 왕국에서 가져온 재산을 쌓아두고 만년을 유유히 보낼 계획이었다.
하지만 어떻게 된 영문인지 재산의 대부분은 여동생인 웨베르 부인의 명의로 러시아은행에 예치된 채 러시아 기업에 투자됐다. 그러나 러시아혁명 이후 공산 정권이 들어서는 과정에서 그녀의 저금도 투자도 한순간에 사라지고 만 채, 1925년 71세의 노양(老孃·노처녀)으로 그만 러시아에서 객사하고 말았다.
돌아보면 개항과 함께 서양식 숙박 시설인 근대호텔이 이 땅에 탄생했다가 역사의 격랑 속으로 하나둘 사라져갔다. 이때 등장하게 된 근대호텔은 한성에 정착한 서양인들에겐 하나의 문화 공간이었으며 또 한편으로는 스러져가던 대한제국의 쇠망기를 고스란히 지켜본 역사의 현장이기도 했다.
자유공원 (인천시 유형문화재 제51호)
청-일 조계지 경계계단 아래에 대불호텔이 있었다면, 경계계단을 올라가면 자유공원이다.
이 공원은 1888년에 만들어진 우리나라 최초의 서구식 공원으로 1897년에 세워진 서울의 파고다 공원보다 9년가량 빨리 세워졌다.
인천 개항 직후, 각국 조계지가 설정된 후 이곳에 모여 살던 외국인들에 의해 최초의 서양식 공원이 사바틴의 설계로 응봉산 일대에 조성되었으니 各國公園(각국공원), 또는 만국공원이라 불렀다.
그 후 일본조계를 중심으로 일본신사가 있는 東公園(동공원)때문에 西公園(서공원)이라 불렸고, 1957년에는 인천상륙작전을 성공하여 자유를 되찾았다는 뜻에서 自由공원으로 개칭되었다.
자유공원 맥아더 장군 동상 자리는 원래 독일 무역회사 '세창양행'의 직원용 사택이 있었다.
1883년 건립된 이 건물은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건물로 독일에서 온 3명의 사원을 위한 기숙사였는데 인천 부립 도서관으로도 사용되었으며, 이후 우리나라 최초의 공립박물관인 인천시립박물관으로 개관하였으나 6. 25전쟁때 함포사격으로 사라졌다.
<맥아더 동상 자리에 세워졌던 세창양행 기숙사... 멀리 보이는것은 현 한미수교 백주년 기념탑 자리의 존스톤 별장이다.
죤스톤의 영국인 사업가로 1905년 여름별장을 이곳에 세웠다. 1936년 인천부청이 매입하여 서공원회관으로 명명하였고
이듬해에는 고급 여관 겸 요정인 인천각으로 개칭되었다. 광복후에는 미군장교 속소로도 쓰였으나 이후 소실되었다.>
<지금의 자유공원... 시계탑 뒷편에 맥아더 장군 동상이 세워져 있다.>
<자유공원에서 바라본 인천항... 중앙에 높은 건물이 도크를 통제하는 곳이고 오른쪽 언덕이 월미도이다.>
<맥아더 장군 동상....>
인천기상대
자유공원에서 멀지않게 건너다보이는 흰색건물, 여름에 숲이 우거지면 안보인다.
제물포 고등학교쪽인데, 바로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적 관측소인 인천 기상대다.
1904년 통감부 관측소로 기상관측업무를 시작하였으며, 영국 그리니지 천문대와도 기상정보를 주고 받을만큼 뛰어난 능력을 갖추었다고 하는데, 6. 25전쟁후 인천기상대로 재편돼 오늘에 이르고 있다.
<최초의 기상대, 인천기상대...>
애관극장
자유공원에서는 좀 떨어진, 동인천역쪽에 애관극장이 있다.
인천시 자료에는 빠져있지만 이 극장은 1895년에 생긴 공연장 '協律舍(협률사)'이다.
이는 1902년 조선왕실이 서울 정동에 세운 공연장 '協律社(협률사)'나 1908년 이인직이 세운 '원각사'보다 앞서는 우리나라 최초의 공연장(극장)이다. 이곳에서는 인형극, 신파극, 창극, 남사당패 공연등이 열렸다.
이곳은 그뒤 '築港舍(축항사)'로 이름을 바꾸었다가 다시 애관극장으로 바뀌어 오늘에 이른다. 협률사의 원래 위치는 지금보다 좀 더 위쪽이었으나 6. 25전쟁때 불타버려 없어지는 바람에 지금 자리에 새로 건물을 지은 것이다.
<현재의 애관극장....>
이밖에도 인천에서 만날수 있는 한국최초로는 사이다가 있다.
1980년대까지만 해도 학교에서 소풍갈 때 필수품이었던 사이다는 지금의 중구 신흥동에 있던 '인천 탄산수제조소'에서 1905년 '별표 사이다'로 처음 태어났다. '인천 앞바다에 사이다가 많아도 고뿌(컵) 없이는 못마십니다'하는 옛 만담이 여기에서 나왔다.
또한 인천항에서 남쪽으로 15.7Km 떨어진 팔미도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등대가 서 있다. 1903년 6월 1일 처음 불을 밝힌 이 등대는 높이 7.9m, 지름 2m 규모로 특히 6. 25전쟁 당시 인천 상륙작전을 성공시키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기도 했다.
2003년 그 옆에 새로 만든 신형 등대에 임무를 넘겨주고 100년만에 퇴역하였으며, 지금은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우리나라 최초의 移民(이민)은 1902년 12월 22일 인천항에서 미국상선 '게릭호'를 타고 하와이로 떠난 102명이었다.
인하대학교는 이렇게 하와이로 떠난 이민자들이 교육을 통해 부강한 나라를 만들어달라며 보내온 성금을 바탕으로 만든 학교다.
그래서 학교 이름이 인천의 '인'과 하와이의 '하'를 합쳐 인하대가 되었다.
< 계 속 >
ㅇ 내나라 문화유산 답사회 : http://cafe.daum.net/sm-academy
ㅇ 사랑하는 내인생 : http://cafe.daum.net/people4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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