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사 논평
지난 봄, 학교에 온 강신주의 강연을 들은 적이 있다. 다른 정보가 전혀 없이 그때 받은 인상만으로 판단하건대, 그는 미혼인 것 같다. 그러나 「인간다운 삶을 가로막는 괴물, 냉장고」를 읽고선 생각이 바뀌었다. 그는 아마도 가사 도우미를 두고 있는 싱글이거나 기혼자일 것이다. 냉장고와 식품 산업자본의 의존 관계에 대한 그의 지적은 흥미롭다. 앞에 장황하게 묘사된 병적인 소비의 광경이 자기혐오를 불러일으켜 ‘냉장고 폐기론’에 설득력을 실어주었음도 물론이다. 그러나 그는 정말로 ‘무엇을 먹을지’에 얽매인 삶을 알까? 그의 말마따나 포장 식품으로 점철된 삶에서도 사람들은 먹는 일에 놀라울 정도로 많은 시간을 소비해야만 한다. 3-4인 가정의 주부는 가족을 먹이는 일을 하기 위해 적어도 주당 다른 구성원에 뒤지지 않는 근로 시간을 소비한다(물론 직접 요리를 하는 시간뿐 아니라 그것에 대해 고민하는 시간을 포함하여). 냉장고로 대표되는 식품자본과 기술의 힘이 아니었다면 인류는 ‘무엇을 먹을지’에 지금보다 훨씬 더 얽매이게 될 거다. 그것과 지금의 식품 시장에 소요되는 노동력에 비교하면 어떨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런 삶을 상상하면 내 삶의 질은 한없이 한없이 하락한다.
위의 기사와 비슷한 어조로 「설악산, 여신으로 남을 것인가 매춘부로 만들 것인가」에서 강신주는 상 남자처럼 땀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산봉우리에 올라가 본, 기술을 등에 업고 어떤 유리한 고지에 올라서 본 모든 이들을 공격한다. 기술은 대부분 원래 그러했던 것들에 대한 엄청난 폭력으로 작용하지만, 강신주의 주장 또한 다른 의미의 폭력을 낳는다. 땀을 흘려야 한다는 바로 그런 맥락에서 천 번을 흔들려야 어른이 된다는 식의 이야기도 나오는 것이 아니겠는가? 설악산 대청봉 케이블카 설치를 막기 위해서는 미적인 측면이나 가치의 훼손 측면을 부각하는 것이 훨씬 낫다. 그의 주장에서 한 걸음 나아가면 다리가 성하지 않은 장애인은 산을 오를 자격이 없다. 그렇다면 그들의 인생에서는 어떤 것이 의미가 있는가? 팔굽혀펴기나 철봉이라도 열심히 해야 하는 것인가?
어쩌면 냉장고가 없다면 소득이 적은 사람은 뭘 먹느냐, 장애인은 대청봉에 오를 수도 없느냐, 와 같은 문제들은 철학자가 해명해야 할 문제가 아닌지도 모른다. 그저 기술과 우리가 잊고 있지만 그로 인해 전과 같을 수 없는 것들의 가치를 지적하여 위의 문제들을 해결할 사람들을 설득하는 것만으로도 가치 있는 일일 테니 말이다. 그러나 날 설득하기엔 그의 논리에서 너무 ‘꼰대 냄새’가 난다. 전이 좋았다, 지금은 잘못되고 있다, 땀 좀 흘리고 고생 좀 해야 한다, 하는 논리를 벗지 않는 이상, 나는 그의 글을 읽고 자꾸 기술의 편을 들고 싶어지는 것이다.
* 체험기
18시간 차단할 기술로 신용카드를 골랐다. 통신기기나 냉방기기 같이 학교생활에 너무 큰 영향을 주지 않고 냉장기구처럼 후에 너무 큰 피해를 주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텔레비전이나 라디오 같이 영향을 전혀 주지 않을 것이 자명한 것도 아닌, 사용하지 않을 때 적당히 불편할 만한 기술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시작은 9월 11일 수요일 오전 0시에 했다. 11시 반쯤 전철 개찰구를 통과하면서 마지막으로 카드를 사용하고 집에 들어와 씻고 누워서 잠을 잤다. 그리고 아침에 일어나서 나가려니 당장 현금이 없었다. 신용카드를 사용하지 않기 위해선 미리 현금을 인출하는 준비가 필요했다. 하는 수 없이 엄마에게 현금을 약간 빌려 등교했고, 등굣길엔 1회용 교통카드를 이용했다. 점심시간엔 약속이 있었는데 어제 친구가 점심을 샀기 때문에 오늘은 내가 사기로 마음먹었었다. 그런데 친구가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읽은 유머 글, 예를 들어 남자가 만 원짜리 밥을 샀으면 여자는 육천 원짜리 간식을 살 때 현금으로 만 원을 내는데 이때 남자가 거스름돈 사천 원을 챙겨서 여자 측에서는 화가 난다는 이야기에 심취해서, 어제 자신이 더 비싼 걸 샀으니 내가 현금으로 자판기에서 식권을 뽑고 남은 거스름돈을 가져야겠다고 해 약간의 분쟁이 있었다. 또 학교에 있는 동안 쭉 사사롭게 음료수를 사먹거나 하는 식의 소소한 현금 지출이 있었고 18시에 수업이 끝남과 함께 신용카드 차단의 경험도 끝났다.
원래 학교에서 생활하는 데는 신용카드보다 현금을 사용하는 것이 훨씬 편하기 때문에 별달리 불편한 점은 없었다. 그러나 현금영수증을 받을 것을 기대할 수 없는 상황에 현금을 사용했기 때문에 소득공제 혜택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이 슬펐고, 또한 친구가 얘기해준 유머 글에서처럼 현금은 쉽게 갈취당할 수 있지만 우리나라 정서상 그에 대한 상실감을 쉽게 표현할 수 없기에 계산을 따지기에는 신용카드가 훨씬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시 말하면 신용카드는 개인을 위한 기술인 것이다. 함께 식사하고 각자의 카드로 계산을 따로 하는 건 이제 음식점에서 쉬이 볼 수 있는 모습이다. 강신주 식으로 풍경의 삭막함을 논할 생각도, 화차 식으로 금융자본이 개인에게 미치는 영향을 얘기할 생각도 없지만, 현금이 두둑이 든 명품 지갑과 머니클립의 격차가 똑같은 카드 한 장으로 치환되기 때문에 인간적인 기술이라고 생각했던 신용카드의 비인간적인 면모를 그날 한번 되돌아보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