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도 열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심판하리라(구약성경 인용)
마태복음 19장 28-30절『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상이 새롭게 되어(팔링게네시아) 인자가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을 때에 나를 따르는 너희도 열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심판하리라 또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마다 여러 배를 받고 또 영생을 상속하리라 그러나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
『세상이 새롭게 되어』라고 번역한 팔링게네시아(παλιγγενεσίᾳ)는 중생, 거듭남을 의미한다. 세상은 성도를 두고 말하는 것이다. 성도가 옛사람이 예수와 함께 죽고, 부활하신 예수와 함께 부활하였음을 믿을 때, 새롭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 심령 속에 새성전이 세워지는데, 새성전은 그리스도께서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는 그 자리를 나타낸다. 새성전에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여 들어와 심령 속의 성전의 주인이 되시는 것이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 옛성전을 심판하시는 것이다. 옛성전은 이스라엘의 예루살렘 성전과 같이 유대 율법주의를 상징한다. 옛성전은 파괴되어야 하는 것이다.
『너희도 열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심판하리라.』열두 보좌는 심령 속의 새성전을 의미하고, 보좌에 앉으신 분은 예수 그리스도이신데,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가 함께 보좌에 있는 것이다. 에베소서 2장 6절에서『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심령 속의 하나님 나라를 육체 안에 있다고 생각하면 곤란하다. 사람은 아무도 알 수 없다. 사도바울도 셋째 하늘에 가 보았는데, 육체 안에 있었는지 밖에 있었는지 알 수 없다고 말을 했다. 고린도후서 12장 2절『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 사람을 아노니 그는 십사 년 전에 셋째 하늘에 이끌려 간 자라 (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하나님은 아시느니라)』
이스라엘의 열두지파는 유대 율법주의를 상징하며, 옛성전에 앉아있는 육적 자기의 모습이다. 심판에 대해서, 하나님이 세상 사람들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그의 아들을 십자가에서 죽게 하셨듯이, 모든 사람들이 이같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어야 하는 것이다. 이게 심판이다. 그들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십자가의 심판은 계속된다. 하나님이 심판하시는 방법은 인간으로서는 알 수 없다.
원하는 자들은 하나님이 심판받은 자로 인정하시고 부활생명을 주신다. 그러나 원하지 않는 자는 심판만 있는 것이다. 교회 공동체 안에서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를 지향하는 율법주의자들은 부활생명은 없고 심판만 있게 되는 것이다.
또 예수님은 부모 형제 자매 자식을 버리는 자를 말한다. 이는 육적인 혈통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들이다. 말하자면 죄의 몸을 받고 이어주는 관계라는 것이다. 표면적으로 인간관계에서 이런 일을 하라는 것이 아니라, 영적으로 죄의 몸에 관계되는 자들을 끊어내라는 말씀이다. 그리고 전토를 버리라고 한다. 과거에 사람들은 농업을 기반으로 했으므로, 전토를 버리는 것은 생명을 버리는 것과 같았다.
그런데, 예수님이 전토를 버리라고 하는 것은 육적 생명에 구원을 기대하지 말라고 하신다. 또한 이렇게 하는 것이 예수님의 이름을 위한 길이라고 하신다. 예수라는 이름의 의미는 마태복음 1장 21절에서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니라.”죄에서 구원받기 위해서는 예수와 함께 죄의 몸이 죽어야 하며, 혈연관계로부터 오는 자기라는 존재성을 부인해야만 하는 것이다.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먼저된 자는 이스라엘이고, 나중된 자는 이방인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택하시고, 그들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로 가는 여정을 만백성들이 보도록 해 주셨다. 그러나 그들은 율법 속에 갇힌채 선민사상에 물들어 그리스도를 발견하지 못한 것이다. 오히려 이방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믿고 부활생명에 이르게 된 것이다.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은 야곱에게서 유래된다. 야곱이 외삼촌 라반을떠나, 에서가 있는 고향 집을 앞두고 얍복강가에서 하나님과 밤새 씨름하여 이겼다는 것으로, 하나님이 그에게 이름을 붙여주신 것이다. 하나님은 아브라함, 이삭,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하셨다.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언약을 체결하였기 때문이다. 땅과 자손을 주시겠다고 하신 것이다.
야곱은 말년에 가나안에서 지내다가 기근으로 애굽으로 내려가 살게된다. 물론 아들 요셉이 애굽의 총리가 된 것도 결정적이겠지만, 야곱과 그의 가족들이 모두 애굽으로 내려갔다가 야곱을 모르는 바로가 등장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을 종으로 만들어 버렸다. 그래서 그들이 하나님께 부르짖으므로 하나님이 모세를 통하여 출애굽시키고 가나안에 다시 들어가게 해 주신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가나안에서의 삶의 역사는 하나님께 대한 배반과 회개의 역사이다. 그들이 우상숭배하므로 하나님을 배반하고, 그리고 하나님께 회개하는 역사가 계속 반복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런 와중에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지켜주시고 은혜베푸시는 것을 통해서 그들은 선민의식을 갖게 된 것이다. 그들만 하나님 백성이라는 것이다. 결국 그들은 선민사상과 율법주의에 빠져 예수님 당시에 그리스도를 발견하지 못하고 멸망당하고 말았던 것이다.
하나님은 표면적으로 나타난 이스라엘의 심판을 통해서, 율법주의와 하나님의 선민사상을 붙잡고 있는 오늘날 신도에게 경고하시는 것이다. 교회 공동체에서 신도들은 하나님 백성이라는 선민 사상이 있다. 그리고 부활생명의 복음을 전했지만, 영적인 부활과 현재적 부활을 믿지 않은채 여전히 육적 자기를 내세운 율법주의에 빠져, 육적 이스라엘과 동일하게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것이다.
신도들의 심령 속에는 옛성전이 무너지고 새성전이 들어서야 하는데, 새성전은 들어서지 않고, 옛성전에서 자기가 그 자리에 앉아서 왕노릇하는 모양을 취하는 것이다. 이게 율법주의의 전형이다. 날마다 죄를 용서받기 위해 제사의식과 같이 예수의 피를 요구하고 있다. 다니엘이 예언한 바와 같이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서있는 것이다. 가증한 것은 다름 아닌 육적 자기라는 우상이다.
예수님은 자기를 부인하라고 말씀하셨는데, 이 자기라는 우상은 다름 아닌 하나님처럼 되고 싶은 죄의 본질이라는 것이다. 누가복음 9장 23절『또 무리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자기를 부인한다는 말은 자기의 정체성을 분명히 알고 행동하라는 것이다. 하나님이 거듭나게 해 주신 것은 부모로부터 받은 육적 자아가 주인이 아니라, 하늘로부터 오는 영적 자아가 참된 주인이라는 말이다. 육적 자아는 죄(탐욕)의 지배를 받지만, 영적 자아는 성령의 인도를 받는 자들이다. 이것이 제대로 되지 않으면, 자신의 적이 누군지 식별이 안되는 것이다. 거듭난 성도에게 영적 전쟁의 대상은 육적 자기라는 말씀이다. 그래서 혈육에서부터 오는 생각들을 하나님 말씀 앞에 세우지 말라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