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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사이버 평화운동본부 원문보기 글쓴이: 사이버평화운동본부지기
하늘이 준비하신 참어머님의 생애
1999년 10월 21일, 남미
나(한학자 총재)는 1943년 음력 1월 6일 새벽 4시 30분, 평안남도 안주군 안주읍 신의리 26번지에서 태어났어요. 지금까지 고향 안주 주소를 기억하고 있는 것이 기특하죠? 내가 태어날 때 외할아버지(홍유일 선생)께서 지금 몇 시인지 봐두라고 하셔서 시간을 정확하게 알 수 있게 된 거예요.
그리고 태어날 때 한 씨 아버지(한승운 선생)께서는 태몽이라기보다 몽시, 환상을 보셨다고 해요. 푸른 소나무 수림이 아주 울창한 가운데 맑고 아름다운 햇살이 비치면서 두 마리의 학이 화동하는 모습이 보이더래요. 그래서 이름을 ‘학자(鶴子)’라고 지으신 거예요.
우리 마을은 아주 시골은 아니었어요. 집 뒤에는 야산이 있고 개울물이 흐르는 아주 포근하고 따뜻한 느낌을 주는 곳이지요. 마치 암탉이 병아리를 품듯 말이에요. 뒤뜰에는 식구들이 먹기 위해 재배하던 옥수수밭이 있었는데 그 옥수수가 아주 컸던 기억이 나요.
아버님(문선명 총재)의 고향 정주와 내 고향 안주는 강을 하나 끼고 있는데 70리 거리예요. 1991년 12월달 정주에 갔을 때 헬리콥터로 안주를 지나갔었는데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 가지고 전혀 달라진 모습이었어요. 참아버님(문선명 총재) 고향 정주보다 조금 더 시가지로 변했더라구요.
한 씨 아버지는 새예수교의 독실한 신앙인이셨어요. 이용도 목사, 이호빈 목사 같은 분들을 따라 대모님과 함께 신앙생활을 하셨지요. 둘이 결혼해서 아기를 가지면 하늘이 크게 쓰실 아들이 태어난다고 계시를 받았는데 딸이 태어난 거예요. 그 이호빈 목사는 아버님(문선명 총재)과 최선길 씨 주례도 하고 외삼촌 주례도 했지요.
홍유일 외할아버지는 키가 크고 미남이셨어요. 처음 아버님(문선명 총재)을 뵈었을 때도 외할아버지와 모습이 꼭 닮았고 같은 인상이셨기 때문에 생소하지도 않고 무섭지도 않았거든요. 그리고 그 시절에 며느리에게 하이힐을 사주실 정도로 신식 할아버지셨던 것이 기억이 나요.
조원모 외할머니는 작고 이쁘신데다가 부지런하시며 활동적이셨어요. 공부는 많이 못 하셨지만 신여성이셨고, 재봉틀 상회를 하셨어요. 팔고 나서 수금하실 때 고장난 것은 수리를 해주기도 하셨고요.
우리 가문의 역사를 보면, 외가 쪽으로 본다면 조 씨 할머니, 대모님, 그리고 내가 모두 외동딸이었는데, 아버님(문선명 총재)은 그게 다 뜻이 있다고 그러셔요. 대모님도 딸 하나, 외할머니인 조 씨 할머니도 딸 하나가 있었지요. 조 씨 할머니는 정주에서 태어나셨는데, 그 조 씨 가족은 정주 땅에서 아주 부자였다고 해요. 여러분이 알고 있는 미륵보살의….
미륵보살 역사에 대해 말하자면, 이것은 전설이 아니라 사실이에요. 우리 집은 기독교 가정이었기 때문에 조상을 숭배하지 않아서 몇 대 인지를 잘 모르지만, 우리나라가 중국의 속국의 입장에 있었을 어느 때라고 해요. 중국의 사신이 한국으로 오려면 정주 달래강을 건너야 하는데 그 당시에는 다리 없었던 거예요. 다리를 놓을 돈이 나라에 없었던 거지요. 그래서 나라에서 그 다리를 놓을 만한 사람을 찾기 위해서 방(榜)을 붙여 놓았어요.
그때 할아버지 조한준 씨라는 분이 사재를 털어서 그 다리를 놓았던 거예요. 다리는 돌다리였는데, 다리 밑으로 배가 지나갈 수 있을만큼 큰 다리였다고 해요. 그런데 그 할아버지가 돌다리를 만드는데 전재산을 다 쓰고 엽전 세 푼이 남았대요. 그래서 내일은 다리 준공식에 갈 거라고 그 남은 돈으로 짚신을 사 놓고 잠을 잤대요. 그런데 굼쏙에서 하얀 옷을 입은 할아버지가 나타나서, “한준아, 네 공이 크구나. 그래서 너희 가문에 천자를 보내려고 했는데 남겨 놓은 엽전 세 푼이 하늘에 걸려서 공주를 보내겠노라” 하셨다는 거예요. 그 몽시를 보고 나서 나가 보니까 그 언덕 위에 돌부처가 생겼더래요.
옛날에 미륵은 남자를 상징하고, 보살은 여자를 상징했지요. 석가모니는 모든 사람들이 편안한 마음으로 복을 빌 수 있게끔 인자한 인상으로 만들어졌는데, 그 보살은 더 인자한 모습을 하고 배가 불룩하게 나온 부처인 거예요. 옛날 아버지께서 말씀하시는데, 말을 타고 가다가도 그 보살 앞에서는 말에서 내려서 큰절을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고 해요. 왜냐하면 말이 그 앞에서는 으레 발을 멈추었기 때문이죠. 누구라도 그 앞에서는 경의를 표시해야지, 그렇지 않고 지나가면 안 되었다는 거예요.
그런데 우리 가문에 문제가 생겼어요. 그 조 씨 할아버지가 몽시를 받을 대로 딸이 태어나면 허리가 둥글둥글한 것이 보살같이 생겼을 거라고 해서 그만 그 부처의 배를 깎아내자고 한 거예요. 그래, 허리 부분을 깍아냈더니 거기서 피가 나왔다고 그래요. 그러니 사람들이 회개를 하고 갂아낸 부분에다 시멘트를 다시 발랐다는 거예요. 아버지께서 어릴 때 그곳에 가서 노실 때는 시멘트 바른 부분이 오랜 세월 바람을 맞아서 구멍이 생겨 가지고 벌들이 들락날락 거렸대요. 이 돌부처 이야기는 경주에 사는 사람은 모두 알고 있어요.
이런 이야기를 통해서도 일면을 알 수 있듯이 조 씨 할머니 집안 조상은 신을 모르더라도 백성으로서 나라의 뜻을 따라 살려고 했던, 그래서 하늘이 기억할 수 있는 축복받은 가정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웃는 말로, ‘조한준 할아버지로 인해서 조씨 가문에 왕자가 나올 뻔했는데 그 엽전 세 푼 때문에 늦게나마 공주가 태어났구나.’ 했지요.
2천년 전 예수님이 이스라엘 땅에 태어나시기까지 하늘은 그 민족으로 하여금 예수님을 맞이하여 하늘 가정을 이루고 하나 된 국가를 만들어 세계로 나아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미리 준비시켰습니다. 그러나 그때 준비되고 책임을 진 인물들이 하늘의 깊은 뜻이나 사정보다도 현실문제에 급급해 예수님을 제대로 알아보지 못하고 끝내 십자가에 보내고 말았던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 부활 이후 2천년 동안 내려오는 기독교 문화를 중심삼고 새로 오시는 주님을 맞기 위한 신부의 모든 준비를 할 수 있도록 하늘은 무지한 인간들을 깨우치시며 역사해 오셨어요. 하늘은 한국을 선민의 나라로 택하시고, 한국이 짧은 기독교 역사를 지녔음에도 불구하고 해방 전후를 통해서 새 주님을 맞기 위한 내적 준비를 하는 단체를 세우셨어요.
거기에 평안북도 철산을 기점으로 하여 해와의 사명을 탕감복귀하는 김성도 할머니가 주축이 된 성주교단이 있었어요. 또 성주교단의 김성도 할머니가 죽자 그 뒤를 이어 성주교단 평양교회 책임자로서 복중교를 만든 허호빈 씨 부부를 통해 하늘은 내적으로 어떻게 재림주님을 모셔야 하는지를 직접적으로 가르쳐주셨지요.
의복을 준비하는 데 있어서도 예수님이 태어나서 33년 생애노정을 걸으실 때까지의 전체 의복을 각각 사이즈에 맞춰서 만들도록 하시는 등의 실질적인 준비를 시키셨어요. 그리고 재림주님의 세 제자가 누가 되며, 또 36가정 형태를 준비하는 역사까지도 있었어요.
북쪽에서 공산당의 세력이 커지면서 종교에 대한 탄압도 심해졌지요. 그래서 허호빈 씨도 1946년 8월 평양의 대동보안서라는 감옥에 들어가게 되었는데, 감옥에서 재림주님을 만난다는 계시가 있었어요. 그때 아버님(문선명 총재)께서도 평양에서 전도하시다가 붙잡혀서 같은 감옥에 들어가시게 되셨던 거예요.
그 감옥에서 허호빈 씨의 수세자 황원신 씨를 통해서 아버님(문선명 총재)이 이 사실을 들으시고 허호빈 씨에게 편지를 보내던 중 간수에게 들켜서 아버님(문선명 총재)이 고된 고문을 당해 가지고 이까지 부러지는 수난을 겪으신 거지요.
그때가 내가 이남으로 내려오기 조금 전이었는데, 허호빈 씨의 어머니가 계시를 받고 나를 부르셨어요. 여섯 살 무렵이었어요. 허호빈 집단은 성주교에 이어서 재림주님을 위한 신부의 사명을 하는 단체인데, 그 명목 아래 나(한학자 총재)에게 축도를 해주었던 거지요. 이 다음에 큰 사명을 하실 사람이라는 기도를 받았어요. 하얀 치마저고리를 입은 젊은 할머니가 나(한학자 총재)를 혼자 불러 하늘의 계시가 있었다면서 축복을 해주던 기억이 생생해요.
복중교에 오고갈 무렵에 외삼촌 홍순정 씨가 일본에서 유학하고 돌아와 월남해 군(軍)에 입대했어요. 외삼촌은 지식인이면서 아주 멋쟁이셨어요. 외삼촌이 군대에 있을 때 외할머니가 삼촌이 너무 보고 싶다고 하셔서 외할머니하고 대모님하고 나(한학자 총재)하고 셋이서 외삼촌만 잠깐 만나러 갔다 오겠다고 남하했다가 그만 그때부터 계속 이남에 머물게 됐어요. 처음 남하했을 때는 서울 효창동에 있었지요. 그래서 효창국민학교에 입학도 했어요.
외삼촌은 다시 북쪽으로 올라가려고 했지만 상황이 여의치 않아 올라가지 못했어요. 외삼촌 많은 얘기를 들어보세요.
조 씨 외할머니 나(한학자 총재)와 항상 함께 계셨는데, 할머니와 함께 거리에 다니면 사람들이 내가 너무 예쁘다면서 다들 귀여워해줬어요. 그래서 다른 사람들은 잘 나다니지 못한 시절이었지만 나(한학자 총재)는 이리저리 다니면서 남의 심부름도 많이 해주며 많이 사랑을 받았지요. 남한으로 내려오는 과정에서도 아녀자와 어린 아이인 내가 있었기 때문에 무사히 월남할 수 있었구요.
예쁘고 단정해서 이렇게 가는 곳마다 선망의 대상이 되어 가지고 주변의 많은 사람들로부터 사랑을 받으며 자랐는데, 만일 내가 일찍 혼인하지 않았으며 세상을 빼앗길 수 있는 여지도 많았기 때문에 일찍 혼인하지 않았으면 세상에 빼앗길 수 있는 여지도 많았기 때문에 어린 나이에 성혼시켜 가지고 하늘이 나(한학자 총재)를 미리 품으신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보기도 하지요.
아무튼 그러다가 내가 여덟 살 때 6ㆍ25동란이 터졌어요. 서울에 있다가 전쟁으로 피난을 가게 되었는데, 그때 외삼촌이 큰 도움을 줬어요. 대모님은 오로지 주님 만날 생각만 하면서 늘 정성들이면서 지내셨는데, 외삼촌이 군대에 있으면서 한강 다리가 끊어진다는 정보를 입수했던 거예요. 그래서 어느 날 스리쿼터 차를 몰고 와서 외할머니하고 대모님하고 나를 태우고 남쪽으로 피난한 거지요.
한강 다리를 건너는데 외삼촌은 우리에게 다리를 건너자마자 내리라고 했어요. 우리 일행은 외삼촌이 시키는 대로 다리를 건너자마자 내려서 엎드렸는데 순간 한강 다리가 펑 하고 터지지 뭐예요? 그때 한강 다리를 건너오던 많은 사람들과 군인들이 강물에 빠져 숨졌지만 다행히 우리 일행은 외삼촌의 도움으로 목숨을 구할 수 있었어요.
내 연령쯤의 한국 사람들은 대부분 전쟁과 어려운 수난시대를 겪었지만 나(한학자 총재)는 모든 일에 항상 하늘이 보호하는 가운데 지켜주셔서 무사히 지나올 수 있어요? 6ㆍ25도 큰 탈 없이, 그리고 무사히 보낼 수 있었어요.
피난 중에 대모님께서는 내가 감기에 걸렸을 때 엿을 물려 기침을 방지하도록 하시고, 상처가 났을 때는 선인장에다가 밥을 으깨어 상처에 발라 고름이 쪽쪽 빠지도록 해서 상처를 치유해주신 기억이 나요.
입교 전 대모님은 주님을 찾는 날까지를 목표로 해서 늘 전도하셨어요. 외할머니와 나(한학자 총재)를 돌보면서 피난생활을 하시던 중 대구에서 성주교의 식구인 정석천 장로 가족을 만나 그곳에서 몇 년간 생식을 하면서 생활했어요. 그러다가 정석천 장로의 동생인 정평화 씨를 찾아 제주도로 가서 몇 개월간 생식을 하며 지냈지요.
그 후 춘천으로 올라왔는데, 대구에 있던 정석천 장로에게서 ‘이상한 선생님’이 오셨다는 소식을 들었어요. 대모님은 이상한 분이라면 아마 우리가 찾아다니는 그분이 맞을지 모른다고 하면서 대구로 가셨다가 못 만나고, 다시 서울로 오셔서 청파동에 계시던 아버님(문선명 총재)을 찾아뵙게 됐어요.
아버님(문선명 총재)을 뵙고 난 후 대모님은 춘천에서 목회를 하셨어요. 나(한학자 총재)는 그곳 춘천 봉의국민학교를 졸업했고요. 졸업할 무렵 안수사건이 생겨서 대모님이 감옥에 가시게 됐는데, 그때가 중학교 입학시험을 봐야 하는 기간이었어요. 그렇지만 대모님이 계시지 않아서 시험을 포기하고 있었는데, 마침 서울로 데려와서 입학시험을 보게 한 거예요. 이미 전기는 끝나고 후기가 남아 있어서 성정 중학교(현 선정중고등학교) 입학시험을 봐서 합격했어요. 성정중학교에 입학하면서 외삼촌이 살고 계시는 신당동으로 이사를 오게 됐어요.
복귀섭리노정에서 여성의 역할이 대단히 중요합니다. 특히 어머니의 사명을 준비하는 데 대해서 하늘은 인간이 모르는 가운데 사탄의 참소를 받지 않는 한도 내에서 수고로운 노정을 이끌어 나오신 거예요.
조원모 외할머니와 홍순애 대모님은 다시 오시는 주님을 맞기 위한 준비와 신앙으로 평생 일관된 생활을 하셨어요. 세상과 타협하지 않으시고 안일한 가정 환경 속에서 틀에 박힌 신앙이 아닌, 24시간을 전적으로 하늘 앞에 봉사하고 주님 맞기 위한 준비에 지극 정성을 다하셨어요. 대모님은 그러한 신앙생활로 거의 집에 계시지 않았기 때문에 나(한학자 총재)는 어린 시절에 주로 외할머니와 많이 지냈어요. 그래서 그 조 씨 할머니를 통해서 자연스럽고 당연하게 신앙을 받아들이게 된 거예요.
외할머니는 나(한학자 총재)에 대한 하늘의 어떤 뜻을 아셨던지 어떻게든지 내가 세상에 물들지 않고 순수하게 자라서 하늘 앞에 쓰여질 수 있는 귀한 딸로서 성장할 수 있도록 큰 공을 들이셨어요. 항상 외할머니는 나(한학자 총재)에게 ‘하나님 아버지가 아버지다. 하나님 아버지가 너의 아버지다’라고 말씀하셨어요.
그래서 아버지라 하면 육신의 아버지를 생각하지 않고 항상 하늘 아버지를 생각했기 때문에 하나님을 생각하면 늘 푸근한 느낌을 가졌고, 외적으로 봐서는 사람들이 얼른 이해하기 어려운 환경에서 자랐지만 별다른 불평불만이 없었어요. 뭔가 늘 나(한학자 총재)를 감싸주고 있는 듯한 푸근한 느낌으로 지냈으며 항상 여유로운 마음으로 지냈어요. 대모님이나 외할머니께서 육신의 부친에 대해서나 두 분이 왜 이렇게 사시는지 등의 이런 저런 질문을 전혀 안 했어요. 그대로 그 생활에 만족하며 살았지요. 육신의 부모에 대한 원망이나 반발감 같은 것은 내 일생에 전혀 없었어요.
2천년 전에 이스라엘 나라에도 주님을 맞이하기 위한 내적인 준비가 많았듯이, 해방 전 한국에도 재림주님을 모시기 위해 준비한 단체가 많았고, 복귀섭리역사를 내면적으로 해 나오던 단체들도 많았는데, 외할머니와 대모님은 그런 단체들을 찾아다니면서 세상과 일체 타협하지 않으시고 오로지 뜻만을 위해, 오로지 한 분 그 주님을 만날 그 날만을 위해 살아오셨고 결국 그러한 신앙이 나(한학자 총재)를 이 자리까지 인도한 것 같아요.
항상 깊은 신앙생활을 하셨어요. 항상 분별되고 정갈한 생활, 깨끗한 생활을 하셨고요. 나(한학자 총재)의 생활은 대게 대모님으로부터 배웠지만 조 씨 할머니도 그러셨어요.
조 씨 할머니는 아버님(문선명 총재)과 내가 성혼한 후 돌아가셨는데, 영계에 가셔서도 불교계 영통하는 보살인 윤청정심 씨에게 나타나서 때가 되었으니 옛날 임금님 등극 시 입는 옷을 만들라고 말했던 적이지요. 결국 윤청정심 씨는 이것을 하지 못하고 갔어요. 또 할머니는 아버님(문선명 총재)이 만왕의 왕이라고 하시고 시국이 바뀔 때마다 그 자리가 아버님(문선명 총재)의 자리라고 증거하기도 하셨어요.
학교 다닐 때 나다니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고 운동을 피하면서 조용히 독서를 즐겼어요. 그리고 어느 학교를 가더라도 선생님으로부터 사랑받고 보호받았어요. 비교적 착실한 편이어서 그런지 선생님들이 잘 보살펴주었지요. 또 선생님들이 너는 요즘 아이 같지 않다고 하면서 좀 나가 다녀보라고 그러기도 했는데, 그건 고민이 많다든지 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그냥 가만히 앉아 조용히 있는 것이 좋아서 그랬던 거예요.
사춘기라든가 하는 성장기에도 나(한학자 총재)는 생(生)에 대한 고민은 하지 않았어요. 외할머니나 대모님께서 항상 하늘 모시고 사는 신앙을 심어주셨기 때문이죠.
때때로 ‘테스’와 같은 소설을 많이 읽었고, 나중에 마음에 드는 친구와 같이 전원생활을 하며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어요. 친구들 사이에서 ‘너는 새침데기지만 시집은 먼저 갈 거다’라는 말을 듣기도 했지요.
성혼한 후에는 과거 학창시절에 대한 생각은 하지 않았기 때문에 별다른 기억이 안 나요. 생각할 겨를이 없었죠. 최근 들어 가끔 찾아오는 친구들이 있어서 그때의 기억이 조금 되살아나곤 해요.
최근 여성연합 대회 때 나(한학자 총재)를 찾아왔던 친구가 있는데 중학교 동기 ‘오광자’라는 친구예요. 같은 동네에 살면서 함께 학교에 다녔는데 그 아버지가 나(한학자 총재)를 무척 사랑해주셨어요. 또 고등학교 1년 선배인 헬렌 킴(Helen Kim)이라는 사람이 있는데 그 어머니가 나(한학자 총재)를 보고 단정하고 예쁘다고 관심을 많이 가져 주셨어요. 헬렌 킴은 지금도 캐나다에 살면서 때마다 나(한학자 총재)에게 편지를 보내주기도 하고 만나기도 했어요. 대회 때마다 참석하고 있다고 듣고 있어요.
선정학교를 인수할 때 그 학교에 가보니까 그 당시 국어 선생님이 그대로 계셨어요. 그 국어 선생님의 얼굴이 기억나더라구요. 또 작곡가 이흥렬 선생의 제자인 수학 선생님이 나(한학자 총재)를 그렇게 사랑해주셨어요.
60년대까지는 의복으로 자신을 감싸듯이 거의 나타내지 않는 생활을 했어요. 하늘이 나(한학자 총재)를 세상과 타협 안하는 생활로 이끄시니까 단출한 생활환경에서 살았지요. 하나님은 내가 사탄세계의 공기를 마시는 것도 싫어하실 만큼 철저히 보호해주셨고, 그런 환경 속에서 나(한학자 총재)는 나(한학자 총재) 자신의 생각은 다 없애고 하늘이 인도하는 생활만을 했어요.
그리고 항상 일기를 썼는데 이상한 것은, 생각 없이 끄적인 것이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라든가 대개 이런 문구였어요. 훗날 아버님(문선명 총재)을 말씀을 듣고 나서 그런 것들이 의미 있게 기억되곤 했지요.
가정연합 한학자총재의 <참사랑의 승리자 참어머님> 중에서 < 19. 하늘이 준비하신 참어머님의 생애>